사람들의 생각은 영화를 만드는 필름처럼 하나하나 나누어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잡념이라고 한다. 하지만 깨달은 자는 그 마음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일념이라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하고는 중요한 약속을 할 수가 없다. 한 개 한 개의 마음조각이 모여 생각을 이루고 그 생각 생각을 언어로 표현하기 때문에 그 말을 믿을 수가 없다. 그래서 상호간에 서류를 만들고 녹음을 해서 그때의 마음을 증명시키고자 한다.
그러나 깨달은 자의 마음은 일념이기 때문에 삼세의 시간에 늘 한결같다. 샘물이 시냇물이 되고 시냇물이 강물이 된다. 강물은 언제나 도도하게 흐른다.
끊기지 않고 흐르는 물은 자신도 살리고 주변도 살린다. 하지만 끊어진 물은 자신도 죽이고 주변도 죽인다.
깨달은 자의 생각은 간단없이 흐르는 강물과도 같고 범부의 생각은 흐르다 멈춘 소 발자국 물과 같다.
강물은 어제와 오늘 내일이 없다. 시간의 단절을 넘어 언제나 변함없이 흐른다. 그러므로 그 흐름은 삼세를 뛰어넘어 있다. 그래서 無始이고 無終이 된다. 법성게의 게송이다.
九世十世互相卽구세십세호상즉 仍不雜亂隔別成잉불잡란격별성
구세와 십세가 서로 물려 있어서 잡란치 않고 별개가 다 이루어져 있다.
九世는 三世다. 三世를 다시 과거현재미래로 나누면 九世가 된다. 거기다가 현재를 더하면 十世가 된다.
삼세와 구세와 현재는 서로 연결되어져 있기에 물려 있다고 한 것이다. 그것은 본질을 말하고 있다. 둘째 줄은 그 사이 속에서 일어나는 온갖 물상의 출몰을 말한다. 그것은 현상이다.
현재 한 개의 필름 속에 과거가 있고 현재가 있고 미래가 나온다. 그 속에 실재 같은 수많은 물상들이 개체적 성격을 띠고 출몰한다. 그것이 격별성이다. 격별성은 사이가 벌어져 개별적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말이다.
그 十世 속에 삼라만상은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질서정연하게 제각기의 개체로 생겼다가 사라지고 또 생겼다가 사라지고 한다는 것이다.
원효성사가 남양만에서 무덤 속을 흐르는 해골 물을 마시고 큰 깨달음을 이루었다. 그 깨달음이 무엇인지는 다음에 아주 잘 나올 것이다. 그분이 깨달음을 이루고 환희에 찬 기분으로 덩실 덩실 춤을 추고 있자 그것을 망연하게 바라보고 있던 의상스님이 바쁘게 행장을 꾸리면서
''빨리 갑시다. 배 떠나겠습니다.'' ''혼자 가시오. 나는 이미 유학의 목적을 이루었소.''
의상스님이 배를 타고 중국으로 출발할 때 성사는 눈앞에 보이는 서해바다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성사는 바닷물로 塵勞진로의 몸을 씻으면서 감격에 찬 소리를 질렀다.
ㅡ1200년 전 부처님의 욕조에 내가 들어가 몸을 씻는다!ㅡ
뼈를 깎는 듯한 6년 동안의 모진 고행으로 피골이 상접해진 고행자 싯다르타는 범천왕의 비파소리를 듣고 그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극한 고행으로부터 벗어나 니련선 강에서 6년 만에 처음으로 몸을 씻으셨다.
성사는 그 니련선 강의 물과 오늘 서해바다의 물을 하나의 목욕탕 욕조로 보신 것이다. 즉 바다와 강물은 하나로 연결되어져 있고 그 물은 三世로부터 벗어나 있기에 부처님이 목욕하신 그 물이 지금의 물이고 그 강과 이 바다는 연결되어 있기에 같은 한 개의 목욕탕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그분의 마음이 얼마나 크고 넓어졌는지 이해가 될 것이다.
의상스님과의 사사로운 인연은 사실 여기서 끝이 났다. 똑같이 유학을 가던 길이었지만 한 스님은 불교를 배우러 계속 가고 다른 한 스님은 중도에서 깨우쳐 해인의 바다에 들어가 몸을 씻으신 것이다.
첫댓글 원효대사는
서해바다에서 1200년 전 강물인 부처님의 욕조,해인의 바다에 들어가 몸을 씻으시고,
의상대사와의 인연은 서해바다에서,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게 되셨나요? ^^
다들 절친으로 알고 있는 원효대사와 의상대사.
가깝고도 먼 그대.
TV 벌거벗은 한국사를 보는듯 합니다.
감사합니다 _()_
어떤 한편의 대하드라마를 보는듯한 느낌이 듭니다.
재미있게 즐겨 보고 갑니다.
글 올려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