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움(Ooom)시장 / 이행희
선반 문을 열 때마다 달랑거린다. 500원짜리 동전만한 파란 유리조각이다. 하늘을 관찰해 보면, 저녁에 해가 진 후 하늘이 아주 짙은 파랑으로 물들 때가 있다. 형언할 수 없는 동경심을 불러일으켜 빨려들어 갈 것 같기도 하다. 바로 그 파랑이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색이다.
노끈에 묶여 있는 파란 조각을 싱크대 윗 선반 손잡이에 걸어두었더니 그릇 꺼낼 때마다 이렇게 달랑거린다. 나도 모르게 미소가 어린다. 그녀의 짜랑거리던 웃음이 생각나서이다. 이렇게 기쁜데 어떻게 웃지 않을 수가 있느냐는 그런 웃음이었다.
오늘 아침, 봄비를 맞으며 수영구 F1963 주차장에서 열린 문화시장 '마켓움(market Ooom)'에 갔다. 그녀는 간이 매대에서 유리공예 작품을 팔고 있었다. 내가 산 유리 수저받침을 쇼핑백에 넣더니, 책상 한 옆에 놓인 상자를 뒤적여 파랗고 동그란 유리조각을 꺼내었다. 유리조각에 난 작은 구멍에는 노끈이 묶여있었다. 그 노끈을 쇼핑백 손잡이에 묶어 길게 늘여 파란 조각을 장식해주었다. 내가 좋아하는 색이네. 내 말에 그녀는 환하게 정말 기쁜 듯 짧게 소리 내어 웃었다.
동행과 함께 재활용 인형만들기 수업에 참여하였다. 막상 가보니 다른 신청자들은 부모 손에 이끌려온 아이들이었다. 우리도 동심으로 돌아가 함께 작업을 시작하였다. 젊은 여자 인형공예가가 입을 여는 순간 걱정이 되었다. 입에서 나오는 언어가 일본어였던 것이다. 그러나 걱정은 잠깐, 그녀가 보여주는 동작을 따라 하니 별 문제가 없었다. 선생님은 일본어로, 우리는 한국어로 말하면서도 발짓과 손짓을 병행하니 신통하게 서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
목 부분을 잘라낸 헌 양말 앞부분에 볼록하게 솜을 가득 넣으니 얼굴이 되었다. 길쭉한 두 귀도 자투리 천에 솜을 넣어 바느질해 붙였다. 색색의 단추로 눈과 코를 붙이고 구멍 난 펠트천으로 네모 입을 오려붙였다. 로봇을 닮은 인형이 되었다. 동행은 인조모피를 두르고 리본도 달아 개성 있는 아가씨를 창조하였다. 몰두하여 작품을 완성하고 나니 투박하고 엉성하지만 뿌듯하기 이를 데 없었다. 각자의 작품을 자랑스럽게 들고 선생님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옆에는 일본 일러스트작가가 손수 그린 그림엽서를 늘어놓고 팔고 있었다. 판다기보다 놀러온 듯하였다. 한가롭게 여기저기 구경 다니다가 내게 다가와 친근하게 이야기를 건네었다. 알아듣지도 못 하는 자기 나라 말로 말이다. 꼭 알아듣지 못 하더라도 괜찮다는 분위기였다. 느낌이 중요했다. 글로벌 시대가 실감났다.
우산과 파우치, 문구용품을 파는 매대가 있었다. 00대학 시각디자인학과 학생들이었다. 그들이 미술지도 봉사를 했던 불우아동의 작품을 상품화하여 판매하였다. 판매수익은 아이들 자립을 돕는 데에 쓴다고 하였다. 저 쪽 벽에는 커다란 돌고래가 꿈틀거리며 바다를 가르고 있었다. 뿔이 멋진 사슴, 갈기가 휘날리는 유니콘도 있었다. 종이접기공예였다. 우리 집 거실 벽에 돌고래 한 마리 붙이고 싶기도 했다.
북적이는 시장을 이리 기웃 저리 기웃 구경 다녔다. 멋진 진열솜씨가 설치미술 같기도 했다. 가구, 그릇, 막걸리, 젓갈까지 없는 것 없이 다 있었다. 평소 맛있다고 소문난 맛집, 감각적인 생활소품을 판매하는 가게, 지역 예술가의 예술작품을 한자리에서 접할 수 있었다.
'마켓움'은 기존 시장의 이미지를 깨는 색다르고 즐거운 시장이었다. 나눔, 배움, 지움(지어올림)을 더하고 새로움이 움트길 바란다는 뜻의 플리마켓 '마켓움'이다. 부산에도 보고 즐길 거리가 다양한 플리마켓이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기획자가 지인들과 파티처럼 시작한 일이라고 하였다. 지금은 계절이 바뀔 때마다 주말 이틀간 개최한다. 플리마켓은 원래 중고 물품을 사고팔거나 교환하는 장터를 뜻한다. 하지만 최근에는 공예가와 미술작가들이 자유롭게 작품을 선보이고, 사람들과 소통하는 하나의 문화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다양하고 특색있는 일백여 점포가 입점하여 개최장소인 주차장건물 4층까지 꽉 차 있었다. 자신의 작품에 대한 깐깐함과 자존감을 지닌 예술가들이었다. 판매자는 직접 만든 작품들을 전시해놓고 구경하는 사람이 사든 안 사든 상관없이 즐겁게 맞아주었다. 판매하는 것보다 자신을 소개하는 것에 더 큰 의미를 두는 듯했다.
즐거웠다. 찾아온 사람 모두가 즐기는 시간을 만들고 싶다는 기획자의 바람대로였다. 판매자가 판매자라기보다 마음 맞는 친구 같았다. 작은 물건을 사도 정성을 다해 대해 주었으며, 인형 만들기 수업에서도 배운다기보다 하나의 놀이에 참여하는 것 같았다.
개최장소도 딱 어울리는 곳이었다. 요즘 부산의 가장 핫한 문화공간인 F1963 주차장이었다. F1963은 고려제강이 망미동의 옛 수영공장 자리에 설립한 복합문화공간이다. 공장 뼈대와 외형을 유지하여 2016년 부산비엔날레를 개최하며 문을 열었다. 회색 4층 건물인 주차장은 옥상까지 와이어를 올려 초록 덩굴식물이 타고 올라간 외벽이 특이하고 아름답다. 자연과 역사와 디자인이 함께 한 공간이다.
한바탕 잘 놀고 왔다. 아파트란 것이 없고 판잣집과 기와집 그리고 기껏해야 2층 양옥집이 있던 시절이었다. 입에 손나팔을 대고 동무 집 대문 앞에서 "00야, 노올자." 큰 소리로 부르면, 기다렸다는 듯 동무가 발을 구르며 뛰어나오곤 했다. 골목에서 쭈그리고 앉아 땅따먹기나 공깃돌놀이를 했다. 해지는 줄 모르고 신나게 노래 부르며 고무줄놀이를 했다. 오늘 한나절 그때 그 시절로 시간여행을 다녀온 듯하다.
예술가들과 그곳을 찾는 사람들이 어우러지는 한 바탕 축제의 장이었다. 판매와 구매의 행위가 이루어지는 곳이 아니라 마음과 마음이 이어지는 곳, 그 끝에 꽃이 피는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