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개요
산행일시 : 2018년 5월12일 /토
산행장소 : 경남 함양군 대봉산의 첨봉,계관봉,천왕봉
산행날씨 : 산행내내 봄비가 산행길을 적시고,마루금에서는 서 있으면,한기가 들 정도로 체온이 떨어짐.
짙은 안개로 주변 지리산 산그리메와 백두대간 마루금 경관들을 조망하지 못함.
거리시간 : GPS상10.9Km이고,5시간20분 소요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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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악소개
대봉산은 옛 괘관산(掛冠山)으로 경남 함양의 진산(鎭山)이라하고, 함양군 병곡면, 서하면, 지곡면에 걸쳐 있으며,
괘관산은 이름을 우리말로 풀이하면 ‘갓걸이 산’으로 이는 온 세상이 물바다를 이룬 천지개벽 때, 이 산이 정상에 갓을
걸어놓을 만큼의 공간만 남기고 물에 잠겼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하기도 하고, 관(官)에서 제정한 관(冠)을 쓰지 않고
걸어둔다(掛)는 의미로 벼슬을 내놓고 물러남을 이르는 말로 함양의 선비들이 벼슬길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내려올 때
맞이하는 산이라 하기도 한다.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괘관산이 대봉산으로 바뀌게 된 것은 함양군의 일본강점기 때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작업 중
하나로서, 괘관산의 명칭이 ”큰 인물이 나오지 못하도록 일제가 붙인 이름”으로 이를 바로 잡고자 큰 인물이 난다는
의미의 대봉산(大鳳山) 계관봉(鷄冠峰1,252m)으로 개명하여 2007.4.11.고시, 국토지리정보원 제2009-239호에 의거,
명칭변경을 하였다 한다. 따라서 옛 괘관산 표지석은 없어지고 그 아래에 계관봉 표지석이 새롭게 자리하고 있는바,
계관봉은 닭벼슬을 닮은 암봉의 형상 때문인 듯 하다.
산행경로
은행마을~692.9봉~북릉~암릉지대~첨봉~대봉산정상(1254.1m/삼각점)~계관봉(1233m)~안부사거리~천년참꽃나무/보호수
~갈림길~천왕봉(1299.6m)~임도~합수지점~임도/이정표~지소마을~지소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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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조정래의 `태백산맥`이 전라남도 벌교를 뿌리로 한 빨치산의 역사를 다루었다면,이병주의`지리산`은 하동에 맥을 둔
빨치산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이 소설에는 지리산 자락에서 나고 자란 하준수 등이 학도병 징집을 피해 괘관산으로
입산하여, 보광당을 결성하고 항일 투쟁을 전개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들이 괘관산을 택한 것은, 이곳이 지리산과 덕유산의 가운데에 위치해 있고 산과 골짜기가 깊어 보급 투쟁이 수월하고
몸을 숨기기도 쉽기 때문이다. 해방 후 이들은 이현상의 권유로 공산당원이 되었고,지리산으로 들어가 빨치산투쟁을
전개하였으며,결국 이곳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쥘부채`라는 소설에는 지리산 밑이 고향인 동기생 최가 나온다. 최는 학생회 간부가 교실에 들어와 데모에 참가할 것을
권유하자,반대하며 이런 이야기를 한다.
“자기 소신대로 행동하려는 것이 비겁한지, 자기의 소신을 굽히고까지 부화뇌동하는 것이 비겁한지는 각자의 주관에 따라
다르겠지요. 나는 지리산 밑에서 자랐습니다.수많은 사람들이 지리산에서 죽었습니다.
옳건 그르건 소신대로 죽은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는 본의 아니게 뇌동하다가 죽은 자도 많을 것입니다
본의 아니게 뇌동하다가 죽는 것처럼 비참한 일은 없다고 생각하며 나는 자랐습니다.
나는 뇌동하는 행동은 결코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자랐습니다.”
지리산 근처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은 지리산의 정치적·역사적 의미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고, 어떤 형태로든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지리산에서 죽은 수많은 사람들 모두가 빨치산이었거나 사회주의자였던 것은 아니다.
개중에는 사회주의 이념에 찬동하지 않거나 이념에 무지한 채 입산한 경우도 있었고,빨치산에 부역했다는 혐의로 목숨을
잃은 경우도 허다했다.
이병주 자신도 이런 혐의 때문에 상당히 오랜 기간 괴로워해야 했을 것이고, 그가 우리 역사를 복원하고 그 속에서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이 무엇인지 알리는 데 얼마만한 책무감을 느꼈는지 잘 보여 준다고 하겠다.
이제,괘관산 명칭은 역사속으로 사라졌으며,대봉산은 남쪽으로 지리산과 북쪽으로 덕유산을 두고 있으며,또한 서쪽으로
백운산과 동쪽의 황석산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이러한 지리적 여건으로 인해 일제때 강제 학도병 징집을 피해서 이 산으로
숨어들거나, 한국전쟁 와중에 빨치산들이 은신처로 이용하기도 했다.실존인물 하준수가 괘관산 아래서 나고 자랐다.
아주 오래전 청년기에,장코르미에의 체 게바라평전과 이병주의 지리산을 밤을 새워가며 읽은 적이 있었다.
이젠 흐릿한 기억이 되었지만 나이들어서 꼭, 쿠바와 남아메리카를 여행가면, 체게바라에 대한 일생의 흔적들을 체험해
보고 싶었고,틈나면 백두대간길의 지리산과 덕유산,괘관산을 다시금 생각하면서 가보리라 다짐했다.
그런데,백두대간을 할때나 지리3대종주산행을 하면서도 그렇게 그들의 아픈 흔적 아니,우리들의 상처를 회상하며 걸어
본 적이 없었다.장거리종주는 집중력과 강인한 지구력을 요하는 산행이라서 여유를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서도
그랬는지도 모른다.
몇해 전에, 다시금 익숙한 지리태극종주를 우중산행하면서 그 기억을 더듬어서 걸었던 적이 있다.
특히,동부능선 웅석봉에서 계관봉을 보려했지만 짙은 안개로 나의 바램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이후로, 대봉산이 아닌
괘관산은 내마음 구석자리에 그늘져 있었던지, 이제껏 찾아 가보지를 못했다.
이번에 그리운 그 곳을 찾게되어 산행 전날에, 여기저기 흐린기억들을 더듬어 하준규(본명 하준수)와 보광당을 기억하느라
잠도 설쳤다.이 소설의 초판처럼 빛바랜 누런 책갈피같이 해묵은 숙제를 하는것 같아서 속이 확 뚫리는 것 같다.
산경도
산행후기
아침6시가 되기전에 집을 나서서 첫 출발지로 가는 마음은 첫사랑을 만나러 가는 기분이다.
그리운이를 만나는 마음은 첫차를 타고 차창밖을 자꾸만 쳐다보며 느긋하게 자리하지 못하는 심정일게다.
얼마만의 산행인지 논공휴게소를 들러니, 낯선 휴게소를 온 것처럼 놀라서 버스에서 내려서 잠시 발을 떼지 못한다.
고속도로에는 비로인해 윈도우브러쉬를 분주히 좌우로 닦아댄다.어느듯 평온한 서상면 운곡리 은행마을에 도착한다.
먼 산들을 가리우는 안개들은 골짜기를 쳐올라서 대봉산의 아픈 상처들을 드러내기 싫은듯이 산그리메를 꼭꼭 숨긴다.
첫걸음을 떼는 그자리에는 800년동안 살아오면서 하준수의 생애도 말없이 묵묵히 지켜 본 은행나무가 늦었지만 잘 왔
는것 같다. 오랜 세월을 묵혀 둔 만큼이나 나무들의 키도 하늘을 찌를듯이 높고,흙내음,풀냄새,진달래향기 수더분하고
숲길도 울창하다.
가는 빗줄기는 숙연한 이내 마음으로 적셔준다.나와 함께 일곱 산우님은 오붓하고 소담스레 오른다.초입부터 가파르다.
모처럼 만난 산선배님도 반갑고, 설악서북릉 종주때의 반가운 아우님도 만나서인지 거친 오름도 편한 마음으로 걷는다.
그리고,그보다도 함께 한 일곱빛깔 산우님들이 일제강점기와 한국현대사의 아픈역사를 둘러보면서 이해 하고자 함께
공감산행을 하니 더 좋았다.
어찌보니 점잖은 산우님들이 마치,그 주인공들로 환생하여 이 길을 걸으며 회상을 하는 성숙된 모습 같기도 하다.
나로써는 처음 한 동행인데도 너무나 오랜인연처럼 편하고 친근함이 느껴져서 모습들을 많이도 담아낸다.
가파른 숲길을 힘주어 차오르면 바위가 기다리고,로프잡고 올라서면 싱그러운 연분홍 참꽃이 빗망울을 머금은 채,
우리를반겨 길을 안내한다.빗물 머금은 바위라서 더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흙길에는 나뭇가지 잡고서 돌아간다.
좁은 마루금 바윗길을 땀과 비로 속옷까지 달라붙고 무거움에 힘겨워지니,꽃다운 나이의 영혼으로 빙의되어 걸었으면
어떠할까?...
두시간 여를 올라서 비스듬한 길옆에서 자리깔고 시장기를 해결한다.후일 박태영의 부인 될 숙자씨와 하준규의 연락병인
순진무구한 순이가 된 두 여산우님은 구수한 쌈된장과 야채들로 풍성하다.밥상보자기에 떨어지는 빗줄기는 굵어지지만
야채들도 한번 더 씻고,우리들의 찌든 때도 씻기운다. 밥상보와 웃도리에 후두둑 떨어지는 빗줄기도 아랑곳 하지않고,
여유로운 웃음과 막걸리와 곡주를 건네는 잔에는 산우의 정이 가득하다.
닭벼슬처럼 기복이 잦은 마루금은 로프가 일곱군데나 엮여 고정되어 있는 만큼 산세가 험하다.산행내내 바위를 품은 그 산
의 숲에서 고개를 내민 진달래는 엷게 미소를 머금으며 반긴다.
부른 배로 오름짓이 한층 힘들어도 앞에도 뒤에도 차근차근 나무와 흙과 달래와 바위와 안개와 동화되어 나비되어 오른다.
로프를 잡고 당겨 바위 위를 오르면 사방천지가 하얀 천으로 가리운 듯, 장엄한 백두대간과 지리영산의 마루금을 안타깝게
도 볼 수가 없다.하늘의 뜻이지 않은가!다시 또 찾아야겠다.
자아도 제대로 영글어야 할 미숙한 청년들이 강제징용을 거부하며 일본순사들을 대적하여 목숨을 걸고 싸우면서,
배고프고 헐벗은 채, 이 곳에서 지리산과 덕유산을 이어서 추운 겨울에도 굴주림과 헐벗음에 추위와 두려움,
고통에 떨면서 목을 치듯 날카로운 찬바람과 냉기에 이를 깨물고 쪼그려서 밤을 지샜을 미숙한 청년들을 생각하니,
대봉산은 차라리 모든 걸 보지말고 그냥 지나치라 하는건가? 그들의 아픈 절규가 적우되어 비로 적신단 말인가?
바위틈을 비집고 고개내민 연분홍 앳띤 진달래도 반가움을 수줍게 눈치보며 감춘다.로프잡고 바위에 올라서자 한자락
서늘한 바람이 온 몸을 묵직하게 스친다.
숙연해지는 걸음은 안개를 감싸안고 숲으로 이어서 첨봉을 만나고, 다시금 무겁게 올라 계관봉을 만난다.
빗줄기는 그칠줄 모르고 우리들은 다같이 오늘의 흔적을 남긴다.정상석이 붉게 음각된 모습이 중국에서나 볼 수 있는
사회주의적 선입견에 일반인들은 어쩌면 공포감으로 거부감마저 느껴 질수도 있을듯 매우 인상적이다.무슨 사유로?...
한맺힌 피로 표현한 것일까? 여기 모든 정상석이 피빛이다.살며시 정상석에 입을 맞춘다.그대, 반갑소! 잘 지내셨소?...
여전히 천지사방은 안개만 있을 뿐이다.비를 맞는 내마음은 너무나 평화롭다.
담배가 있었다면 한대 피워 물고서 마음으로 그들에게 건넸을 것이다.미처 생각이 모자라서 술한잔 뿌려주지 못한게
너무나 아쉽다.다음에 꼭 다시 오리다.그때는 아픈 상처도 숨김없이 보여 주게나! 함께 아파할 것일세! 그대들보다 더
철부지같다는 생각이 드는건 왜일까? 다시올때까지 답을 찾지말자.
다시,발길을 이어 로프를 잡고 당기고 산죽대 좁은길과 바위를 끼고 도는 절벽길을 조심스레 우회하고서, 다시 내림길을
미끄러지듯 내려서는 숲길에는 천년을 산길 비탈에서 가지가 휘어져 버티기에도 힘이 드는 천년의 나무가 진달래꽃을
피우고 반겨하고 있는게 아닌가! 천년의 향기를 조심스레 저며넣어 맑은 영혼으로 거듭난다.
하준규와 보광당의 꽃다운 산골청년들이 여기서 어찌 지냈는고?...
화답을 잊은채 서 있는 천년참꽃나무에게 더이상 묻지 않기로 하고서 마음속의 목례로 인사한다.
내림길이 잠시 완만해지는 안부의 갈림길의 이정표에는 500m거리에 있는 천왕봉을 가리킨다.
나와 일곱빛깔 산우는 지체없이 천왕길을 접어든다.물오른 분홍 진달래는 무리지어 빗줄기 속에서도 고개들어 반긴다.
화답하여 한사람씩 인증샷을 담고서 천왕을 만난다.반갑게 입맞춤을 하고서 천왕과 포즈를 하고서 시간을 담는다.
정상석 아래의 전망데크에는 영험한 소원바위가 있고 봉황의 날개같은 군자의 자리가 놓여 있다.잠시 앉아 본다.
뒤쪽에는 모노레일이 설치되어 있고,공사자재를 운송하는 것 같다."아하! 여기쯤 이겠네."라며 혼잣말을 삼킨다.
당시,지리산에징집을 거부한 청년들이 약 300명 가량이 숨어 있었는데,하준수는 이들을 중심으로 1945년 3월에 동지 73명
모아,보관당을 조직하여 일제의 전쟁수행을 방해하고,장차 연합군이 조선에 상륙하는 경우,이에 호응할 수 있도록 군사훈련
을 실시했으며 무기입수를 위해 인근의 경찰주재소를 습격하기도 했다.주변은 재빛 안개속에 적막감만 흐른다.
천왕봉을 되돌아 나오는 길가에는 작은 돌탑과 진달래가 외롭다는 생각에 걸음이 무겁다.괘관산에서 적우를 맞으며 흔적을
이어가고 싶다.하지만 길은 임도로 이어지고 지소마을로 안내하는 표지판이 보인다.축축한 등산화의 양말속에 물이 가득
차도록 머무르고 싶었다. 임도를 지나는 길가에는 하늘을 찌를듯한 침엽수림이 마음을 가라 앉힌다.잠시 배낭을 내려두고
쉰내가 짙게 배인 채로 개울에서 바지가랑이만 흙을 훔쳐내고 차에 오른다.하준규와의 만난 흔적을 지우고 싶지가 않았다.
무지의 백성들만 두려움,배고픔과 공포속에 무조건적 복종만으로 절대권력의 종이되어 살아왔고,
강국들의 침입에 도륙된 상흔들은 산굽이처럼 긁히고 패여 험하게 널부러져 안개덮힌 계곡따라 말없이 흐르고 있다.
지소마을 맛집에서 산우님들과 잔채워 산우의 정을 나누고 괘관산을 떠나올때 빗줄기는 더 굵어진다.
괘관산의 절규는 대봉산에 적우가 되어 하염없이 나의 가슴을 적신다
전체 줄거리
제1권 「잃어버린 계절」은, 서두는 박태영의 친구 이규의 가족사로부터 시작되지만, 이야기는 태영의 등장부터 전개된다.
1933년 태영이 지식인이며 지주인 하영근에게 빌린 막심 고리끼의 수필집을 읽은 까닭에 불온서적을 읽은 죄로 일경에 체포
되고, 이규가 이에 연루된다. 그러나 진주중학교 일본인 교장 하라다의 보증으로 둘은 무사히 방면된다.
1940년 일제의 학교 병영화와 창시개명 공포는 어린 나이지만 강한 민족의식을 가졌던 태영으로 하여금 중도 퇴학하게 하고,
이규는 어물어물 창씨개명의 강압을 피한 뒤 무사히 상급학교에 진학한다. 이규는 교또 삼고(三高)의 자유분방하고 학구적
인 학풍 속에서 프랑스어를 전공하면서 학창시절을 구가한다.
제2권 「기로에서」는 이규가 도일한지 여섯 달쯤 후, 일본에 도착한 태영과 해후한 후의 이야기이다.
태영은 교외의 우유배달부로 취직하여 노동자 생활을 하면서 주경야독으로 공부하여 몇 달 후에 전검(專檢)시험에 1등으로
합격한다.이를 계기로 일생의 반려자인 김숙자를 알게 된다. 태영은 우유배달 동료 중 무라까와란 인물의 영향으로
죄익사상에 눈을 뜨게 된다. 무라까와는 일본공산당 창설멤버였으나 일경을 피하여 지하에 숨은 인물이다.
제3권 「작은 공화국」은 이규와 태영이 일본에 온 지 3년 후, 1943년 말 일제의 징병제 공포로 애매한 한국 유학생들이
일본을 떠나는 이야기다.일본을 떠나 지리산으로 은신하려고 태영이 한국으로 갈 배를 수배하는 도중, 중학 선배이자
후일 빨치산으로 전설적 이름을 남기게 되는 하준규를 만나 의기투합하게 되어, 지리산으로 함께 들어가 그들의 작은
공화국을 세운다.이들은 보광당(普光黨)이란 단체를 만들어 식량을 자급자족하고 무예를 익힌다. 산속 생활에서 후에
남부군 사령관으로 전설적 명성을 남긴 이현상과 허무주의적 성향을 지닌 하영근의 친구인 윤창혁을 만나게 되는데,
이들은 태영과 하준규의 앞날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다.
제4권 「서림의 벽」은 이규와 김숙자까지 합류한 지리산 은둔생활과 해방을 맞은 직후의 태영과 하준규의 조선공산당
입당과 그들의 활동 이야기이다.이규는 하영근의 후원으로 그의 외동딸 윤희와 프랑스 유학길에 오르고, 중앙당 기간요원
으로 활동하는 태영은 신탁통치가 민족적 과제로 떠오를 때 당중앙이 반탁에서 찬탁으로 돌아선 데 대해 반론을 제기하다가
숙청된다. 윤창혁으로부터 공산당이 비인간적 독재조직으로 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누누이 설교를 받은 바 있는 태영은
공산당에 환멸을 느낀다.
제5권 「회명의 군상」에서는 태영이 서울대학에 입학하여 독서회를 만들어 죄익이념을 익혀 나가고, 1946년 10월 조선공산
당 주도하에 10월항쟁이 일어나 태영의 옛 동지들은 다시 지리산으로 들어가 빨치산이 된 이야기이다.
당의 지령에 따라 영웅적 투쟁을 한 이들에게 태영이 관찰한 바에 따르면 당의 지원이 전혀 없다. 공산당의 관료성·무책임성
에 더욱 환멸을 느끼게 되나, 태영은 스스로 이들의 후방 지원을 담당하려 하여 교내에서 은밀한 모금운동을 한 결과
몇 트럭 분량의 후원 물자를 수집하여 철도편으로 진주까지 수송하지만, 경찰에 포착되어 실패한다.
제6권 「분노의 계절」 1948년 8월부터 1951년 8월까지의 태영의 활동이 주요 내용이다.
태영은 공상당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하여 나름대로 연구를 시도한다. 공산당 주류에서 탈락한 이우적·신동우 등을 면담하면
서 공산당에 대하여 천착해가지만, 공산당에 대하여 알면 알수록 환멸은 커진다. 그러나 우익에 동조하지도 않는다.
인물난에 고심하던 남로당이 복당 권고를 하나 이를 물리친다.1950년에 접어들어 약 3년 전 빨치산에 대량의 물자를
보급하려던 배후 인물을 꾸준히 추적하던 진주서 문남석 형사에게 덜미를 잡힌다. 진주로 압송되면 즉결처분될 터였으나
하영근의 도움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고, 수감생활 중에 6.25발발 소식을 듣게 되고 며칠 후에 자유의 몸이 된다.
그는 공산당의 명령으로 진주통신사의 통신원으로 파견된다. 김숙자와 함께 진주로 내려간 태영은 공산주의에 대하여
이해하지 못하는 김숙자에 대한 혐오감으로 정상적인 부부관계를 이루지 못한다. 인민군의 패주로 태영이 당을 따라가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을 절박한 상황에서 사랑을 확인하게 된다.
제7권 「추풍 산하」 1951년 8월부터 1954년 6월까지의 지리산 속의 남부군의 빨치산 활동이 주요 내용이다.
같이 따라가겠다고 눈물로 애원하는 숙자에게 자신의 후사를 낳아 길러줄 것을 부탁하고 입산한 태영은 충직한 당원으로서
지켜야 할 계율과 인간적 본성 사이에 갈등과 회의를 겪는다.자신의 운명을 너무나 경솔하게 공산당에 맡겨버린 무책임성을
스스로 단죄하겠다는 마음으로 최후의
빨치산이 되기로 결심한다. 쫓기고 쫓기는 고난의 빨치산 생활이 2년쯤 지났을 때 휴전협정이 조인된다.
거의 궤멸 상태에 이른 빨치산들은 산중의 미아가 되고, 토벌대의 포위망이 점점 좁혀오던 어느날 태영은 몇 명의 대원을
투항시키고 자신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보광당 시절부터 동료이자 남매 같던 순이를 역사의 증인으로 남아야 한다고
피신시켜 주지만, 순이는 체포되어 전향을 거부하다가 교수형을 당한다.그이후, 1956년 프랑스 유학에서 돌아온 이규는
격동의 역사를 증거하는 지리산을 다시찾는다. 김숙자가 낳은 태영의 아들은 프랑스 유학을 하여 화학자가 된다.
1972년 9월부터 1978년 8월까지, 6년에 걸쳐 `세대`에 연재된 `지리산`은 이병주 자신의 체험과 빨치산 출신 인사의 회고록,
주변의 기록과 증언을 토대로 씌어진 소설이다. 일제 강점기인 1938년부터 휴전 뒤인 1956년 사이에 벌어진 일들을 다룬
이 소설은, 전반부에서는 지식인 청년 이규와 박태영의 성장 배경과 성격, 각자의 이념 선택 과정을 그들의 행동 반경인
고향과 서울, 도쿄로 이어지는 동선을 따라가며 그려내고, 후반부에서는 주로 박태영을 축으로 징병을 피해 입산한
청년 학생들이 빨치산의 전사로 변신해 지리산 일대를 누비고 다니는 정황을 담아낸다.
에필로그 :
이병주의 삶은 일제의 식민지 교육, 태평양전쟁, 강제 징병, 해방 공간에서 불거진 좌우 이데올로기의 대립과 갈등, 한국전쟁, 부역,
남북 분단, 5·16정변, 필화 사건으로 말미암은 감옥살이 등 수난과 질곡의 한국 현대사를 고스란히 끌어안고 있다.
그는 자전적 소설처럼, 삶의 갈피마다 서려 있는 수난과 질곡의 현대사를 어떤 식으로든 토해내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해방과 6·25를 전후하여 지리산에서는 2만여 명이 죽어갔다. 파르티잔과 군경 토벌대인 이들은 대부분 꽃다운 젊은이들이었다.
어떻게 해서 그런 일이 일어났든 간에, 또 파르티잔의 상당수가 잘못 선택한 길을 갔든지 간에, 그들의 죽음은 민족과 시대의
관점에서 다시 조명되어야 한다. 2만여 생명이 죽어간 민족의 비극을 그냥 묻어둔다는 것은 기록과 문자가 있는 나라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며, 그들의 일이 가슴에 호소하는 그 무엇으로 남겨져야 한다..
지리산은 바로 그 민족의 수난과 질곡을 끌어안고 있는 공간이다. 높고 험준한 연봉과 크고 작은 계곡을 거느린 수려하고 웅혼한
이 산은 제2차 세계대전 뒤 동서의 냉전 이데올로기가 집중적으로 대치한 곳이자, 이윽고 동족 상잔의 형태로 한국 현대사의 비극이
펼쳐진 곳이다. 지리산은 해방 직후 좌우 이데올로기의 대립과 갈등 속에서 “지리산에 가면 살 길이 있다.”는 말을 따라 칠선골,
뱀사골, 피아골, 칼바위골, 거림골, 백운골 등 골짜기로 깃들인 2만여 젊은이들의 주검을, 그 이름없는 패자들의 허망한 주검을
끌어안고 침묵하고 있는 산이다. 그는 이 지리산에 묻힌 이름 없는 혼령들의 부름을 받는다. 그의 `지리산`은 일제의 징용을 피해
지리산으로 들어간 젊은이들이 해방 뒤 좌익 이데올로기를 붙여안고, 열정에 찬 남로당 활동을 하다가 6·25를 전후해 빨치산으로
최후를 맞이하는 장엄한 서사를 아우른다.
“태양에 바래지면 역사가 되고 월광(月光)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는 말을 즐겨하던 그는 작가란 햇빛에 바래진 역사를 새로 쓰는
복원자, 준엄한 사관(史官)이나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모든 역사는 승자들을 위한 기록이다. 따라서 당연히 역사는
승리자 중심으로 기술되고 결과만 따지게 된다. 그러나 문학은 역사가 빠뜨리고 간 것을 챙기고 메워준다. 무명의 패배자에게도
발언권을 주고 결과만이 아니라 동기도 중요하게 조명을 한다. “역사의 그물로 파악하지 못한 민족의 슬픔의 의미를 모색하는 것”을
자신의 문학적 지향으로 삼은 그는 철저한 자료 수집과 취재에 바탕을 두고 한국 현대사를 소설의 공간에서 충실하게 되살려낸다.
`역사는 산맥을 기록하고 나의 문학은 골짜기를 기록한다.`라면서...
다음에 괘관산은 대봉산으로써 제 기운을 찾아서 하준수와 보광당의 젊은 영혼들이 산새되어 힘차게 날개짓을 하며 반길 것이다.
...
Message of Love /Don Bennechi
첫댓글 잘보고갑니다 늘봄 오곡밥생각나네요
감사합니다.그 식당에 다시 가고 싶습니다.ㅎ
산이 태동하고부터 인간의 모든것은 산과 자연속에서 진화해 왔습니다. 신으로 숭배하다가 산을 경계로 문화와 풍습이 생기고,
사투리도 생기고 집도 음식도 습관도 자기들의 사는 방식만이 옳다고 생각하며 배타적인 삶으로 점철 된 인간의 삶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인문학적 관점에서 과거의 아픔을 치유하기도 하고,현재를 살아감에 힐링도 하고,미래를 위한 희망의 힘도 얻습니다.산,길,고개 이름도 인간의 흔적으로 남은 겁니다.
길은 시공을 초월한 공감과 소통이라서 먼저 떠나간 선답자의 발길을 따라 후답자가 산을 찾는게 아닌가?
산과 인간은 뗄 수 없는 얽힌 실타래라 생각하고,그 실타래를 풀어보는 되새김도 괜찮을거라 생각해봅니다
인간의 끝없는 욕망이 반복되어 수많은 부작용을 만들어도 그 시대적 기준을 뛰어넘어 반성하고 이해하고 겸손하도록 깨우침을 주는것도 산이라서 위대할 수도 있을 것이며,
그래서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고 현재의 시간을 빌어 힐링을 하며,미래의 가치있는 삶을 위해 희망을 가지게 해주어서 고마워 하지않나 싶습니다.
그래서 산에 동화되기를 바라서 저는 감마로드에 있는 것이며,나이들어 죽기전에 들머리 언저리에서 살고 싶어지는지도 모르죠.-동원이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