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월 후면 국내에서도 디젤승용차가 선보일 예정이다. 휘발유에 비해 40% 가까이 저렴한 경유로 승용차를 몰 수 있다니, 예전 같으면 승용차업계가 떠들썩하게 난리를 칠 법도 한 일이다. 하지만 정작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아니, 디젤승용차 출시를 앞두고 떠들썩하기는커녕 디젤승용차를 언급하는 것조차 거북해하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가장 발 빠른 움직임을 보이는 현대자동차 관계자들 입에서도 “좀 조용히 해달라”는 부탁이 튀어나온다. 디젤승용차 출시를 앞둔 국내 자동차시장에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가?
최근에 이르기까지 디젤승용차는 말 그대로 뜨거운 감자였다. 2005년부터 디젤승용차 판매를 허용한다는 정부 발표가 나오면서 배기가스 기준을 유로3 기준에 맞추느냐, 유로4 기준에 맞추느냐를 두고 국내 자동차 회사들 간에 한바탕 뜨거운 신경전이 벌어진 것이다. 현대·기아차는 유로3 기준을 고집한 반면, GM대우, 쌍용, 르노삼성자동차는 유로4 기준으로 맞섰다. 결과는 현대·기아차의 판정승. 2005년까지는 한시적으로 유로3 기준에 맞춰 디젤승용차가 판매되지만, 2006년부터는 더욱 강화된 유로4 기준을 따르기로 결정이 났다. 이로써 유로3 기준에 맞춰 이미 유럽 시장에 디젤승용차를 판매하고 있는 현대·기아차는 땅 짚고 헤엄치기로 국내 디젤승용차시장에 무혈입성하게 된 셈이다. 여태껏 디젤승용차를 만들지 않는 경쟁사들로서는 배가 아플 노릇.
결론이 이런 식으로 내려지게 된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아무래도 시장점유율 70%인 현대·기아차의 손을 정부가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하태은 르노삼성 홍보팀 차장은 “현대차가 유럽 시장에 팔고 남은 차를 국내에 팔 수 있도록 시장을 열어줬다”고 비난한다. 반면, 현대자동차 관계자는 “유럽과 국내의 운전환경이 많이 다르기 때문에 국내 여건에 맞는 차량을 다시 개발해 판매할 예정이지, 재고 소진을 위한 것은 아니다”라고 반박한다.
유로3 충족하는 현대차, 초기 시장 무혈입성
어쨌든 적어도 2005년 상반기까지 현대·기아차 외에는 디젤승용차를 출시할 수 있는 여력이 되는 회사가 없을 듯하다. 르노삼성자동차 관계자는 “유로3 기준이 한시적으로 1년밖에 채택되지 않을 텐데, 유로3엔진을 수입해 차량에 장착할 수 없는 노릇”이라며 “아예 2005년은 포기하고 2006년에 대비할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어차피 디젤엔진을 르노에서 들여와 승용차를 만들기까지 최소한 1년여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문제도 있고, 이 참에 현대·기아차가 내놓은 디젤승용차가 어느 정도 시장에서 받아들여지는지를 지켜보겠다는 뜻도 담겨 있다.
쌍용자동차의 입장 역시 르노삼성자동차와 별반 다르지 않다. 쌍용자동차 관계자는 “디젤승용차를 출시한다 해도 차종이 체어맨 정도에 그치기 때문에 차라리 시간을 두고 개발할 참”이라고 말했다. 내부적으로는 디젤승용차에 대해 논의를 하고 있지만 어차피 유로3 기준의 디젤승용차를 개발해 봐야 1년이 지나 다시 유로4 기준의 승용차를 개발해야 하기 때문에 당장 출시를 꺼리고 있는 것. “현재까지는 특별한 안이 없다”는 게 쌍용차 관계자의 공식 입장이다.
사정은 GM대우 역시 마찬가지다. GM이라는 든든한 우방을 둔 GM대우는 마음만 먹으면 당장이라도 GM의 엔진을 얹을 수 있지만 서두르겠다는 의지를 그다지 내비치지 않는다. 그동안 GM대우는 2005년에 한시적으로 유로3 기준에 맞춰 디젤승용차를 출시할 수 있도록 한 결정에 대해 가장 적극적으로 반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실 “시장상황을 봐서 기존 차량에 디젤엔진을 그대로 얹으면 된다”는 게 GM대우의 입장이다. 일단 라세티에 디젤엔진을 얹어 2006년에 판매한다는 복안을 마련해 둔 상태다. 물론 이때도 유로4 기준에 의한 엔진을 장착할 예정. 이를 위해 GM대우는 2005년 4월 완공 예정으로 4750억원의 돈을 투자해 군산에 디젤엔진 공장을 건설하고 있다. 이 공장에서는 유로4 기준을 만족시키는 1.5 및 2.0 리터급 디젤엔진을 생산할 것으로 알려진다.
하지만 디젤엔진 생산은 2006년 3월에야 가능하므로 GM대우 역시 2005년은 포기하고 2006년부터 타사와 본격적인 경쟁체제로 돌입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GM대우가 생산할 디젤엔진은 배기가스에 포함된 미립자를 크게 줄여주는 DPF(디젤 미립자 저감장치)를 적용하고 있어 유럽 진출을 위한 사전포석의 의미도 담고 있다.
그렇다면 업계를 주도하고 있는 현대·기아차의 입장은 어떨까? 현대차는 유럽에 판매하고 있는 아반떼XD(2.0 디젤), 라비타(수출명 메트릭스)를 내년 초부터 국내 시장에 판매할 예정이다. 우선 이들 두 모델로 2만5천대 규모의 판매를 기대하고 있는데, 시장 반응이 나쁘지 않을 경우 2006년 초에는 싼타페 엔진을 장착한 쏘나타 모델도 국내에 선보일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대차가 출시하는 디젤승용차에 들어갈 클릭 1.5리터 CRDi 디젤엔진은 최대출력 80ps/4천rpm, 최대토크 18.6kg/2천rpm의 엔진으로, 연비와 마력이 기존 엔진에 비해 각각 15%, 24% 향상돼 경쟁 차종인 폭스바겐의 동급 디젤엔진보다 소음 및 배기가스 저감에 우수한 성능을 발휘한다. 기아차도 쎄라토에 디젤엔진을 장착해 조만간 디젤승용차를 출시할 예정이다. 기아차가 지난 5월 말부터 유럽에 수출하기 시작한 쎄라토 2.0 디젤 모델은 6~7월 2개월간 6500대 판매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단 현대차는 경쟁 업체들이 현대차만을 바라보는 입장이기 때문에 2005년 초부터 유로3 기준을 충족하는 디젤승용차를 선보이며 초기 시장 선점에 나서겠다는 계산을 내린 것으로 알려진다. 이에 대해 강철구 한국자동차공업협회 이사는“현대차의 초기 시장 선점효과는 클 것”이라 내다봤다.
한불모터스, 유로4 기준 디젤차 내년 1월 출시
한편, 대부분의 국내 업체들이 일단 관망세를 보이는 것과는 달리, 푸조를 수입 판매하는 한불모터스는 디젤차 수입에 상당한 열의를 보여 눈길을 끈다. 당장 2005년 1월부터 국내 시장엔 중형 세단 푸조 407이 선보일 예정이다. 특히 푸조는 르노자동차와 더불어 유럽 지역에서 디젤엔지 기술이 가장 앞서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어 디젤승용차 출시에 자신감이 묻어 나온다. 송승철 한불모터스 사장은 “환경단체가 디젤승용차 출시를 두고 많은 이야기를 하는데, 푸조승용차는 아예 유로4 기준에 맞춰 디젤승용차를 출시할 것”이라고 밝힌다. 현대·기아차가 유로3 기준으로 디젤승용차를 출시하는 것에 대해 푸조는 아예 유로4 기준의 디젤승용차를 내세워 맞불을 놓겠다는 얘기다. 게다가 독일의 경우 미세먼지를 걸러내는 필터를 장착할 의무가 없기 때문에 2009년까지 독일 자동차에는 필터가 장착되지 않는 것과는 달리 “푸조는 필터를 장착해 환경 문제에 대한 논란을 미연에 방지했다”고 송 사장은 전한다.
이처럼 한불모터스가 디젤승용차 국내 출시에 유독 적극적인 것은 국내 시장을 선점하겠다는 의도도 담고 있지만, 이미 2002년 기준으로 프랑스에서 디젤승용차의 시장점유율이 63%를 넘어섰기 때문에 디젤승용차를 들여오기 유리한 환경이라는 점도 작용했다. 특히 송 사장은 유럽과 한국의 지형적인 유사성을 예로 들며, “유럽이나 한국이나 석유가 나오는 것이 아니기에 일단 디젤승용차가 들여오면 시장은 확대될 것”이라고 강한 자신감을 내비쳤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수입자동차업체들의 움직임은 더딘 편이다. 이들 역시 일단 현대차가 디젤승용차를 출시한 후 국내 시장 반응을 지켜보겠다는 속내를 감추지 않는다. 아우디 코리아 관계자는 “현재로서는 아무 계획이 없다” 며 “내년 하반기에나 수입할지 모르겠다”며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김영은 BMW코리아 이사 역시 “규제는 풀린다 해도 디젤승용차에 대한 편견이 남아 있기 때문에 일단은 관망할 것”이라고 밝혔다. 언젠가 디젤승용차를 수입하기는 하겠지만 시점은 최대한 미루겠다는 얘기다. 게다가 BMW는 디젤승용차를 수입할 경우 일단 3시리즈나 5시리즈가 아닌 7시리즈로 승부를 걸 참이다. 3시리즈나 5시리즈 디젤승용차의 경우 운전 중에는 휘발유 차량과 거의 차이를 느낄 수 없지만 정지 중에는 차이가 느껴질 수 있기에, 이 참에 아예 최고급 모델로 디젤승용차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없애겠다는 계산이 깔려 있는 것이다.
벤츠 코리아는 디젤승용차 수입에 특히 소극적인 편이다. 벤츠 코리아 관계자는 “고급차 수요자들이 디젤승용차에 별로 관심이 없다고 판단한다”며 “적극적으로 모델을 들여오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런 분위기라면 벤츠 역시 최소한 내년 하반기까지는 디젤승용차를 출시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이 관계자에 따르면 “일단 E클래스로 모델은 결정했지만 시기는 내년 초에 다른 브랜드의 움직임을 보고 결정할 것”이라며 조심스런 입장을 내비쳤다.
경유와 휘발유 가격차 줄어 시장 위축 우려
이 밖에도 국내사들이나 수입자동차회사들 사이에 디젤자동차의 인기가 그다지 높지 않은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우선 경유와 휘발유의 가격 차이가 급속도로 줄어든다는 것을 꼽을 수 있다. 조세연구원은 최근 디젤승용차 시판에 맞춰 경유소비자 가격을 2006년 7월까지 휘발유 가격 대비 85%까지 끌어올려야 한다는 보고서를 내놨다.
휘발유 가격이 1400원 정도에 머물 경우를 가정하면 경유 가격을 1190원까지 끌어올려야 한다는 얘기다. 대략 내년 7월에 휘발유:경유:LPG의 가격을 100:75:50으로 조정한 뒤 2006년 7월 100:85:50으로 상향 조정하는 방안과, 내년 7월에 100:75:50으로 조정한 후 2007년 7월까지 3년에 걸쳐 단계적으로 조정한다는 방안이 검토되는 중이다. 이 경우 경유를 쓰는 레저용 차량의 시장점유율이 37.7%에서 적게는 16.5%까지 줄어들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디젤승용차시장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게 분명하다.
일단 경유와 휘발유의 가격이 비슷해지면 소비자들은 디젤승용차에 대한 편견으로 인해 디젤승용차 구입을 꺼릴 것이라고 업계는 내다보고 있다. 자동차업계 관계자는 에너지 세제 개편으로 유가가 상승하면 고객들의 자동차 구매심리가 위축돼, 차종에 상관없이 자동차시장이 위축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제 디젤승용차 출시가 3개월도 채 남지 않은 상황에서 디젤승용차에 대한 논란은 잠시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2005년은 탐색기, 2006년은 본격적인 출시’라는 기본 구도 하에 각 자동차업체들의 물밑작업은 더욱 치열해질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