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김해박물관은 경남 창녕군 부곡면 비봉리 신석기 유적에서 통나무를 이용해 만든 소형 선박을 발견했다고 5일 밝혔다. 김해박물관은 목선 발견 지점이 비봉리 유적 아래 신석기 초창기 층위인 점을 감안할 때 이 선박이 8,000년 전(기원전 60세기)에 제작, 사용됐을 것으로 추정했다.
8,000년 전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목선. 사진 아랫쪽이 선미, 위쪽이 선수 부분이다. 국립김해박물관 제공
과학적 연대 측정 등을 통해 이 같은 추정이 사실로 확인될 경우, 국내 발굴 선박 가운데 지금까지 가장 오래된 경주 안압지 배(8세기)보다 6,800년 앞서게 된다.
또 이집트 쿠푸왕 피라미드 고선박 보다 3,400년,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선박으로 알려진 도리하마(鳥浜)1호나 이키리키(伊木力) 유적 출토품보다 2,000년 이상 앞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 된다.
실물 기준으로 볼 때 비봉리 목선은 최대 길이 310㎝, 최대 폭 60㎝, 깊이 약 20㎝ 정도의 규모이며 소나무로 만들어졌다. 배는 불로 나무를 그슬린 뒤 날카로운 석기로 제작했으며 어로용, 이동용 등 다목적으로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김해박물관측은 “어로 활동 등 신석기인들의 생활상과, 목선을 만들 정도로 뛰어났던 당시 사람들의 기술력 등을 보여주는 매우 소중한 자료”라고 평가했다.
"신석기 역사 다시 써야" 학계 흥분 세계 最古목선 발견 소나무 재료… 전체 길이 4m 넘을 듯 "돌칼 등 이용 가공기술 상당히 뛰어나"
비봉리 목선은 우리나라에서 발굴된 선박 가운데 가장 오래됐을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울정도로 오래된 배다.
고고학계는 비봉리 목선 발굴이 신석기 시대의 생활상과 고선박 연구에 결정적인 도움을 줄것이라며 흥분하고 있다. 조유전 동아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는 “제작및사용 시점이 8,000년 전으로 최종 확인되고 이를 통해 신석기인의 생활 방식과 선박 제조 기술 등에 대한 추가 자료가 확보되면 우리 교과서를 다시 써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비봉리 유적은 2003년 태풍 매미 때 완전 침수된지역으로 창녕군이 배수장을 건설하는 도중 발견됐으며, 신석기 시대 분석(糞石·배설물 덩이)과 동물 그림 등 많은 유물이 지난 6월께 상층부에서 발굴됐었다.
배의 상태 및 제작 방법
배가 발견된 곳은 비봉리 유적의 가장밑부분인 신석기 초창기 층위로해 수면보다 2┢ 정도 낮다. 과학적인 연대 측정 결과가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고고학적 층위로 볼 때 신석기 초창기유물이 거의 틀림없다고 김해박물관측은 밝혔다.
배는 동서 방향으로 놓여져 있으며 강을 바라보며 남쪽으로 약간기울어져 있다. 선미부 일부가 훼손된점을 감안하면 실제 길이는 4m가 넘을것으로 추정된다. 배는 소나무를통째파내 만든 목선으로 불에 태워 가공한흔적즉초흔(焦痕)이있다. 가공하려는 부분을 불로 태운 다음 돌도끼같은 것으로 깎고 다시 돌로 갈아서 다듬은뒤U자형으로파배를 만든 것이다.
용도
창녕 지역은 낙동강 하구로 강을 따라 김해를 거쳐 남해로 이어지는 곳이다. 임학종 김해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은 이를 감안할 때 배가 어로와 운송등에 사용됐을 것으로 추정했다.
조유전 교수도“신석기 유적에서 그물추가여럿 발견된 것으로 보아 당시 고기잡이가 활발했던 것으로 보인다”며“이배는 어로 활동은 물론, 주민이나 짐을 나르는데도 사용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크기가 작기 때문에 낙동강과 연안에서는 사용했어도 원양 어로용으로는 사용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배는 4~5명정도 탔을 것으로 보인다.
임 실장은“울주 반구대암각화를 보면통나무배에 10명이상이 타고 있는 장면이 있다”며“이번에 발견된 배의 실제 길이가 우리의 추정보다 더 길다면 10명 정도까지 탔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국립해양유물전시관 이철환학예연구사는“신석기주거지역이강, 바닷가에 많이 분포한 점으로 미뤄볼 때 신석기인들은 어로 작업을 많이 했으리라 추정되며 어떻게든 배를 만들려했을 것”이라고 전제, “당시 사람들의 기술은 우리 생각보다 훨씬 뛰어나 돌칼, 돌도끼 등을 이용해 배를 만들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국내외 고선
이제껏 우리나라에서 출토된 배로는경주 안압지배(8세기), 완도선과 십이동파도선(11세기), 안좌도선(13~14세기), 달리도선(14세기) 등이 있는데 모두 통일 신라 또는 고려 시대의 것이다.
이에 반해 비봉리 목선은 선사 시대의 것으로 안압지 배보다 6,800년이나 앞선다. 이는 1954년 이집트 쿠푸왕 피라미드 옆에서 발굴된 고선박(4,600여년 전 제작 추정)이나 60년터키 겔리도니만 해저에서 발굴된 난파선(3,300여년전제작 추정)보다훨씬 앞서며 도리하마(鳥浜) 1호, 이키리키(伊木力) 유적 출토품 등 일본의 고선박보다도 2,000년 이상 앞선다.
둥근 통나무 여러개를 옆으로 엮어서 만든 뗏목배와 둥근 통나무의 속을 파내서 만든 통나무 쪽배(퉁궁이)가 해상의 주요 교통 수단으로 사람의 이동과 하물 운반에 이용하였다. 강에서는 짐을 나르는 짐배로 쓰이기도 하고 강을 건너는 나룻배로도 이용되엇다. 뗏목배와 통나무 쪽배(퉁궁이)는 어로 활동을 할 때에는 어선으로 사용되고 어염(魚鹽)을 실어 나를 때에는 운반선으로 사용되었다.
나. 삼한시대
뗏목배가 발달하여 고물에 노를 설치하고 노를 저어서 가까운 거리를 내왕하기도 하고 돛풀(부들풀=香蒲)로 짠 자리를 돛대에 매어 달고 바람을 받아 먼 곳을 내왕하기도 하였다. 통나무배(퉁궁이=쪽배)는 양쪽 뱃전의 노걸개에 노를 매어 달고 노를 저어 이동하였으며 배 한가운데에 돛대를 세우고 돛을 달아 서해안과 남해안에서 어로 활동도 하였다. 삼한(三韓)의 사람들은 돛을 단 통나무 쪽배나 뗏목배를 이용하여 왜국으로 도해(渡海=遠洋航海)도 하였다.
다. 사국시대
1) 고구려 5세기 천하의 중심은 고구려였다. 이 시대만큼 고구려의 위상이 드높은 적이 없었다. 남조와 북조가 서로 고구려와 외교 관계를 맺고자 안달이 났었고, 백제와 신라를 제어하면서 북방의 실위와 지두우, 물길을 지배하는 가히 동방의 강국의 명성을 드높였다.
더군다나 북위는 고구려에 역대 황실계보를 바치고, 고구려 태왕이 붕어하면 황제 스스로 상복을 입고 통곡을 하며 태왕의 명복을 비는 사당을 지을 정도였다. 이는 당시 북위가 고구려보다 하위 국가였음을 뜻한다. 실제로 역대 황실계보는 곧 그 나라의 역사서인데 이를 바치는 건 조공국이 상국에 하는 행위이다. 그러한 예를 북위가 고구려에 했다는 건 북위가 고구려의 영향 아래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고구려가 5세기 천하의 중심국이 될 수 있었던 데에는 어떠한 요인이 있었을까? 그것은 바로 강력한 군사력에 있을 수 있지만, 그보다는 바로 바다를 지배했기 때문일 것이다.
역사의 흐름을 살펴보면 바다를 지배한 민족이 세계를 지배했고, 그 민족은 번영을 누려왔다. 하지만 바다를 이용하지 못한 민족은 그렇지 못했다. 일례로 근세조선을 보면 알 수 있다. 조선은 바다를 포기함으로써, 폐쇄적인 사회가 되었고, 변화에 재빠르게 대응하지 못해 결국 이웃 국가들에게 뒤쳐지고, 쇄국만을 고집해 결국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하지만 바다, 즉 제해권을 잃은 고구려는 국력이 약해질 수 밖에 없다. 고구려는 고구려 천하를 유지하기 위해 제해권을 지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6세기에 북쪽 물길의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남쪽의 백제가 다시 강국이 되었고 고구려의 제해권은 약해졌다. 백제는 521년 혼자서 사신을 파견할 수 없었던 신라가 양나라와 사신 왕래를 하는 데 도움을 준다. 또 백제는 신라와 동맹을 맺고 550년대 고구려가 돌궐의 침입에 방비하는 사이 남쪽지방을 빼앗는다. 이에 위협을 느낀 고구려는 신라와 특별한 약속을 함으로써 백제와 신라의 동맹을 붕괴시키려 했다.
남쪽의 나라들이 고구려에 위협이 되지 않도록 고구려는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백제와 신라가 고구려의 천하에서 벗어나 중국세력과 연합하여 보다 큰 위험세력이 되는 것을 몹시 두려워했다. 그래서 백제와 신라 사신이 서해를 건너는 것을 중간에서 막았던 것이다.
598년 수나라의 침입이 가시화되자 고구려가 가장 먼저 취한 행동은 수가 고구려를 공격할 때 보급로가 되는 요서지방의 전진기지들과 해안의 수군기지들을 선제 공격하여 무력화시키는 일이었다. 612년 수나라가 수백만 대군으로도 고구려에게 패배한 가장 큰 원인이 바로 군량조달 문제였다.
고구려가 대륙의 강국으로, 천하의 중심국으로, 수 당과의 대전에서 크게 승리할 수 있었던 요인에는 바로 제해권을 장악했기에 가능했다.
고구려가 동방에서 중국과는 다른 독자적인 천하관을 수립하자, 중원을 통일한 수나라는 이를 참지 못하고 113만의 대군(실전투병 및 병참보급 총수)을 이끌고 요하를 건너 고구려를 침공하기 시작한다. 당시 고구려는 50여만의 군사(실전투병 33만 및 병참보급 20여만명)를 동원했다. 하지만 수나라군이 강력한 요동 방어선에 묶여 움직이자 못하자, 수 양제는 우문술, 우중문을 시켜 별동대 30만 5천명을 이끌고 고구려의 수도 평양을 함락시키라고 한다. 하지만 이들은 을지문덕의 전략에 걸려, 살수에서 대패한다. 이를 살수대첩이라고 한다.
그런데 고구려가 살수대첩의 승리를 이끌 수 있었던 요인에는 고구려 수군의 활동이 크다. 당시 수나라 해군 내호아는 수나라 별동대에게 식량을 공급해주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왕제(王弟) 건무의 계략에 의해 패강에서 크게 패한다. 이를 패강대첩이라고 한다. 즉 고구려의 수군이 패강에서 수나라 수군을 무력화 시켰기 때문에 수나라 별동대는 수군(水軍:수나라 수군)에게 식량을 공급받지 못해, 퇴각하다 을지문덕에 의해 크게 패배한 것이다. 『조선상고사』를 저술한 단재 신채호 선생은 패강대첩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고구려가 이 때(건무가 내호아의 수군을 박살낸 패강대첩을 말하는 것) 이미 이길 지위를 차지하였으니 만일 전공의 차례를 따진다면 왕제 건무가 을지문덕보다 앞섰다고 할 것이다. 왕제 건무의 공이 이같이 컸지마는 역사를 읽는 사람들이 흔히 을지문덕만 아는 것은 무슨 연고인가? 사마온공(司馬溫公)의 통감고이(通鑑考異)에 내호아가 양식 배를 잃지 아니했더라면 우문술의 살수의 패전이 없었을 것이라고 하였으니 대개 옳은 말이다.”
당시 고구려가 제해권을 장악하였기 때문에 고구려는 능히 수와 당의 엄청난 대군을 막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제해권을 장악함으로써, 고구려는 수와 당의 수군이 육군에 보급할 군량을 빼앗을 수 있었고, 게다가 수와 당의 수군기지를 위협함으로써, 수나라와 당나라와의 대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고구려가 제해권 장악에 큰 노력을 기울인 이유에는 중계무역의 이익을 얻고자 함도 있었다.
고구려는 북위의 표현대로 동방의 모든 나라를 제어하면서 동방의 맹주로 군림했다. 고구려는 북위와 엄청난 양의 무역을 했고, 그러한 무역품들은 발달된 도로와 수레를 이용한 국내 상업망을 통해 전국으로 배급되었다. 뿐만 아니라 중국과 교역이 자유롭지 못한 신라, 물길, 왜, 실위 등에 중계무역을 함으로써 막대한 이익을 챙겼다. 이것이 고구려 번영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였다.
한나라가 위만조선을 공격한 이유 중 하나도 위만조선이 동방의 여러 나라들이 중국과 직접 교역하는 것을 막고 중간에서 엄청난 중계무역의 이익을 챙겼기 때문이었다. 고구려도 초기에 책구루라는 곳에서 후한과의 무역을 독점하고 주변 여러 나라에 중계무역을 함으로써 주변 나라들보다 빠르게 국력이 커질 수 있었다. 대릉하 중류의 조양지방은 유목민과 중국인, 고구려인이 함께 모여 거래하는 거대한 국제시장으로 당시 각국의 첨예한 이익이 교차하는 곳이었다.
마찬가지로 서해의 제해권도 고구려의 상업적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필수 불가결한 것이었다. 송나라에 800필의 말을 수출할 정도의 엄청난 배를 갖고 있던 고구려는 기록되지 않는 민간의 교역 규모까지 합치면 어마어마한 이익을 바다를 통해 얻었을 것이다. 이 때문에 당에서 신라로 돌아오는 김춘추 일행을 검문할 만큼 고구려 해상 순찰대의 활동이 대단히 활발했던 것이다.
제해권을 가지고 활발히 대외교역을 했던 고구려가 서해의 제해권을 완전히 포기하고 해외무역에 소극적이었던 조선과 경제의 활력도가 크게 달랐음은 당연한 일이다. 고구려를 제국으로 번성하게 만든 힘의 하나는 서해와 동해를 고구려의 내해로 삼을 정도의 강력한 해군력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고구려는 해상제국으로 불리워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부록....☆고구려가 중국과 동방제국(諸國)간의 교류를 막은 기록
472년(개로왕 18년): 고구려가 북위로 가는 백제 선단을 막음 472년: 북위가 파견한 백제 사신단을 고구려가 중간에서 길을 끊음 476년(문주왕 2년): 백제가 송에 사신을 파견했으나, 고구려가 길을 막아 사신 파견을 못함 484년(동성왕 6년): 남제로 파견된 내신좌평 사약사가 고구려군을 만나 가지 못함 626년(영류왕 9년): 백제와 신라가 당에게 고구려가 길을 막았다고 하소연 함 648년(진덕여왕 2년): 당에서 돌아오던 김춘추가 고구려 순라군에 의해 사로잡힐 뻔함
5세기 장수왕 시기와 고구려 말기인 7세기에 고구려 해군력은 최고 절정기에 이른다. 특히 648년 사건은 구체적으로 고구려 해상순찰함이 당에서 돌아오는 신라의 배를 검문한 기록이다. 해상제국 백제 뿐만 아니라 중국의 선단까지 막을 만큼 당시 서해에서 고구려 해군력의 위상이 얼마나 대단했는가를 알려준다 할 수 있다. 그리고 고구려가 연이은 수와 당의 침입을 물리칠 수 있었던 요인 중의 하나가 바로 이 해상권에 있다.
고구려는 수(隋) 나라와의 전쟁 때 병선을 이용하여 적의 수군을 격퇴하였다. 위(魏)와 연합 전선을 편 고구리는 수군 함대를 요하(遼河)에 진입시켜 공손연을 토멸하였다. 광개토대왕은 병선을 거느리고 남하하여 한강 유역을 공략하고 백제의 성을 공격하여 항복을 받았다. 멀리 탐라도(제주도)를 공략하고 고구려에 귀속시켰다. 서해를 건너 산동반도의 등주에 이르는 해상 교통로를 개척하고 육로와 해로를 이용하여 중국과 무역을 하였다.
2) 가야 가야는 가야지방에서 출토한 통나무 쪽배(퉁궁이) 모양의 토용과 같이 생긴 통나무배를 이용하여 왜국과 일찍부터 왕래를 하였다. 일본에서는 규슈(九州) 미야자키현(宮崎縣)의 사이도바루(西都原) 古墳에서 가야의 통나무배 모양과 닮은 배 모양의 토용 埴輪([하니와]= 흙으로 만든 모형)이 출토된 바 있다.
3) 백제 백제는 372년에 서해를 건너 동진(東晋))과 해상을 통한 조공 무역을 시작하였으며 중국의 서해안 일대에 진출하여 영역을 넓혔다. 백제는 흑산도를 지나는 해상 남로를 개척하였고, 양진(兩晋) 남북조 수(隨) 당(唐)과 교역을 하였다. 왜국(倭國)과는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왜국을 경영하며 선박을 이용하여 왕래하였다. 왜국에서는 650년에 아기(安藝)국에 명하여 백제인으로 하여금 백제식 견당사선(遣唐使船)을 건조하게 하였다. 그 후에도 계속해서 아기(安藝)국에서 견당사선을 건조하도록 하였다.
일본 일향지역 고분에서 발굴된 고대 백제 선박 토기는 전형적인 한국 선(배)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이 왜열도 지역은 오래 전, 해상제국 백제 22담로 중 한 곳이었다.
22담로 해상제국 백제(남부여)는 자신들의 기술로 만든 배를 타고
그 당시에 쌓은 인적 및 국가적 네트워크를 통해 대양을 누빈 것이다
4) 신라 경주의 금령총에서 출토한 통나무배 모양의 제사 토기와 같은 통나무 쪽배를 이용하여 어로 활동도 하고 돛을 매어 달아 멀리 왜국으로 항해하며 왕래하기도 하였다. 통나무 쪽배의 유물로 경주 안압지에서 출토한 3쪽 짜리 통나무 쪽배가 있는데 이것은 제 5 발달 단계에 속하는 아주 잘 발달된 배이다. 신라는 왜국과 인접한 지리적 여건으로 300년경에 신라의 사신선을 왜국에 파견하였으며 선장을 왜국에 보내서 신라식 해선을 건조하게 하였다.
라. 남북국시대
1) 반도통일신라 반도통일신라는 백제의 조선기술과 항해술을 수용하고 계승하여 당과 해상을 통한 교역을 하였다. 장보고(張保皐)는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대사가 되어 수군의 본거지로 삼아 해적을 소탕하고, 교관선(交關船=交易船)을 이용하여 신라와 당 그리고 일본을 잇는 삼국간의 해상 무역을 활발히 하였으며 삼국간 해역의 해상권을 장악하였다.
2) 대진국 발해 ◆고구려 후예 대진국(발해) 해군 2만명, 당나라 등주를 공격(732년)
발해가 건국한 초기는 동아시아의 국제질서가 전면적으로 재편되는 시기였다
당나라, 국방의 혹수말갈과 신라는 사방에서 신흥국가인 발해를 압박하였다. 이러한 위기상황을 타래하고, 전세를 역전 시키기 위한 몇가지 정책을 취했다. 즉 북으로 흑수말갈을 공격하였다. 또한 해양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옇다.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여 우호관계를 맺은 발해는 신라와 적대적인 일본과 적극적인 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732년에는 대규모의 수군을 동원하여 당나라의 등주(현재 산동반도 봉래시)를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당의 배후를 공격하여 해양력을 활용하면 효율적인 군사행동을 할 수 있다는 현실적인 힘과 의지를 당과 신라에 인식시켜 준 것이다. 뿐만 아니라 흑수말갈은 물론 기타 여러 말갈부 및 일본에게도 발해가 국제질서 재편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려는 목적 때문이다
◆고구려 후예 대진국(발해)의 국제교역로 = 발해가 ‘일본도(道)’ ‘신라도’ ‘조공도’ ‘영주도’ ‘거란도’ 등 다섯 개 교통로를 국제교역로로 이용했음을 사료를 통해 밝혀냈다. 특히 윤재운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발해는 선박의 규모가 최대 300t에 이르는 해상무역의 강국이었다”며 “당나라에 120여 회, 일본에 34회의 공식 외교사절단을 파견했을 정도로 해외 교역도 활발했다”고 말했다. 이외에도 임석규 조계종 연구원은 발해의 토기와 자기가 고구려의 것으로부터 시작해 당의 영향을 받았음을 규명했고, 전현실 박사는 발해의 주거문화가 고구려의 온돌 형식을 발전시킨 것임을 밝혔다.
복원된 발해의 선박
마. 중세고려시대
고려는 막강한 수군 함대를 거느리고 있었으며 고려의 왕건은 여섯 차례나 후백제의 견훤을 공략하여 섬멸하였다. 해양 세력을 주축으로 반도를 통일하게 된 통일 고려는 수군 함선 뿐 만이 아니라 조운선과 기타 전투선도 크게 발달하였다.
1) 고려도경(高麗圖經)에 소개된 고려선(高麗船) 1123년에 송나라의 서긍(徐兢)이라는 사신(使臣)이 고려에 와서 보고 들은 것을 적어 놓은 견문록인 「고려도경(高麗圖經)」이 있는데, 여기에는 주즙(舟楫=船舶) 편에 고려의 순선(巡船), 관선(官船), 송방(松舫), 막선(幕船) 등에 대한 배의 생김새와 만듦새에 대한 설명이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순선(巡船=순라를 도는 배)의 구조 “배 가운데에 돛대를 하나 세웠다. 배의 겻집(鋪板=甲板) 위에는 뱃집(棚屋=樓屋)이 없다. 다만 노를 걸고 고물에 치를 꽂았다. 배에는 정기(旌旗=군의 임무를 나타낸 깃발)를 꽂았으며, 뱃사람과 순라꾼은 모두 푸른색 옷을 입었다.” 순선의 구조에 대한 설명은 한선의 야거리(돛대가 하나뿐인 작은 배) 평선(平船)의 구조와 똑같다.
관선(官船=관에서 쓰는 배)의 구조 “뱃집의 위는 뜸으로 지붕(덮개)을 덮었다. 그 아래에는 문짝과 창문을 달았다. 뱃전 둘레에는 난간이 있다. 멍에(橫木=가로로 댄 나무)로 양쪽 삼판을 서로 꿰뚫어 내었으며 그 끝은 뺄목이 된다. 배의 윗면은 배밑 바닥 보다 넓다. 배의 선체 안의 (船艙)에는 나무 판자(隔艙壁)나 대나무 삿자리로 가로막아 대지 않았다. 다만 구부려 바로 잡은 긴 통나무 막대기(참나무 장쇠)를 걸고. 그 양끝은 삼판에 꿰어서 박아 서로 쐐기 물림을 하였다. 배의 앞쪽 이물에는 닻줄 물레가 있다. 뱃집 위에는 허리 돛대를 세우고 스무 폭 정도의 돛을 늘였다. 접반선에만 옥막(천막을 친 집)을 설치하였다.”
송방(松舫=소나무 배)의 구조 “송방은 군산 섬의 배다. 배 앞의 이물비우와 뒤의 고물비우가 다 같이 평평하고 곧게 되어 있다(方頭 方). 배 위의 가운데에 다섯 칸의 뱃집이 있다. 위는 뜸으로써 덮개를 하였다. 앞과 뒤에 작은 선실 방 두개를 들였다.”
막선(幕船=막을 둘러 친 배)의 구조 “중급과 하급의 사절들이 타고 기다리는데 쓰인다. 위는 푸른 천으로 집을 만들고 아래는 기둥 대신에 긴 장대를 썼으며 네 귀퉁이를 붉게 칠하고 장대를 동아줄로 잡아 매었다.
2) 고려동경 속의 고려선(高麗船)
고려동경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에 고려시대의 구리거울(銅鏡)이 있는데 이 거울의 뒷면에는 바다를 항해하는 배가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다. 배의 이물과 고물은 높이 솟아있고 거친 파도를 헤치고 바다를 항해하고 있는 모습이다. 조각의 그림으로 보아 앞에서 본 고려의 관선의 모양과 똑같이 생겼다. 그림의 위쪽에는 해(세 발가락이 달린 까마귀가 들어 있는 것)와 달(계수나무와 토끼가 들어 있는 것)이 떠있다. 세 발가락이 달린 까마귀(三足烏)는 고구려 벽화에 그려져 있는 것과 똑 같다. 이 동경의 조각 그림에서 고구려의 역사적 전통과 문화를 계승한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조각 그림의 맨 위에는 황비창천(惶丕昌天) 이라는 명(銘=새겨 넣은 글씨)이 있다.
송의 동경 1981년에 중국의 강소성 보응현(江蘇省 寶應縣)에서 출토한 동경이 있는데 중국에서는 해선문동경(海船紋銅鏡)이라고 한다. 거울의 명(銘)은 황비창천이다. 이 거울의 조각 그림은 국립중앙박물관의 고려동경의 거울 조각과 비슷하다. 다만 해와 달이 없다. 공주박물관 소장품에 고려동경(惶丕昌天 銘)이 있는데 이 동경의 모양이나 조각의 그림이 중국의 해선문동경과 똑같다.
3) 고려전함 몽골-고려 연합군은 1274년과 1281년 2차례에 걸쳐서 일본 큐슈의 하까다(九州 博多)를 공략하였다. 이때 타고 갔던 배는 전라도의 천관산 해안, 변산반도 해안과 마산의 합포 등지에서 고려식 선형으로 건조한 전함이다. 고려의 전함에는 평전선(平戰船)과 누전선(樓戰船)이 있다.
4) 완도(莞島)에서 발굴 인양한 고려선(완도선) 1985년에 완도 근해에서 10-11세기 경의 도자기 운반선이 인양되었는데, 배밑은 통나무를 옆으로 이어 마치 뗏목배와 같은 평저선(平底船) 구조로 되어 있으며 첫 번째 뱃전(杉板)인 부자리(不者里)를 뱃밑 가장자리 토막(庶子) 위에 턱홈을 파서 얹어 놓고 나무못을 박아 무으었다. 그 생김새가 마치 안압지에서 출토한 통나무배의 양쪽 뱃전과 똑 같으며, 그 뱃전을 그대로 가져다 얹어 놓은 것 같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한선의 선형은 10-11세기 이전에 이미 정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완도 근해에서 발견하여 인양한 이 고려선은 해남 완도 장흥 일대의 연근해를 항해하면서 생활용 도자기와 생활용 토기 등을 무역(貿易)하던 배였다. 이러한 배를 상고선(商賈船) 또는 무역선(貿易船)이라고 한다. 이 고려선(莞島船)이 발굴됨으로써 문헌을 중심으로만 논의되어 왔던 한선의 선형이 밝혀지게 되었고, 전래되고 전승되고 있는 전통 한선에 대한 조선 공작 기법(技法, 法式)이 사실로 확인되는 등 여러 가지 의문이 풀리게 되었다. 이 고려선을 기준으로 해서 전시대와 후시대의 한선의 선형과 조선기술, 조선기법 등을 추정할 수 있게 되었다.
바. 근세조선시대
1) 싸움배(戰艦) 싸움배(戰船)를 판옥선(板屋船)이라고도 한다. 전선은 당두리의 기본 구조로 되어 있다. 전선은 포판 위에 판옥을 꾸며 적의 총탄으로부터 노군과 군사들을 안전하게 엄호하였으며 피해를 막았다. 통제사(統制使)가 기선(騎船)하는 싸움배를 상전선(上戰船) 또는 좌선(座船)이라고 한다. 싸움배 중에서 제일 크다. 큰 대포(天字砲 地字砲 玄字砲 黃字砲)를 탑재하고 좌우 현(舷)의 멍에 뺄목의 노창(櫓窓)에 노 10척씩을 건다. 절도사(節度使)가 기선하는 싸움배를 읍전선(邑戰船), 수군만호(水軍萬戶), 부사(府使), 군수(郡守)가 기선하는 싸움배를 진전선(鎭戰船)이라고 한다. 싸움배 중에서 두 번째 세 번째로 크다. 중간 대포를 탑재하고 좌우 현의 멍에 뺄목의 노창에 노 8 척씩을 건다.
각선도본(各船圖本) = 전병각선도(戰兵各船圖) 이 배 그림들은 정조(1776-1800) 때 그려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모두 6장의 투시 설계도가 들어 있는데 전선도(戰船圖) 1장, 상장을 떼어낸 전선도(撤上粧戰船圖) 1장, 평전선도(平戰船圖) 1장, 병선도(兵船圖) 1장, 조선도(漕船圖) 1장, 북조선도(北漕船圖) 1장 등이다. 옛날의 조선용 설계도로서, 건축용 설계도를 그리는 기법으로 그렸다. 45°투시도법으로 배를 자세하게 그렸고 채색도 하였다. 그리고 배의 만듦새와 칫수도 기록하였으며 구조에 대한 설명도 해 놓았다
전선(戰船) = 판옥선(板屋船) 판옥 전선은 2층으로 되어 있는데, 1층은 삼판 7쪽을 이어 붙여 올린 뒤에 멍에를 걸고서 그 위에 귀틀을 짜고 겻집(鋪版)을 깔았다. 여기까지를 평선(平船)이라고 한다. 2층을 상장(上粧)이라고 한다. 1층의 멍에 뺄목 위에 신방(建築의 기둥 밑 防材)을 걸고 그 위에 상장을 올릴 기둥을 세운다. 기둥 위에는 언방(建築의 上防)을 건다. 언방에 상장 멍에를 걸고 그 위에다가 널판을 깔았는데 이것을 청판(廳板)이라고 한다. 상장의 네 주위에는 여장(女牆)을 둘렀으며 방패의 역할을 한다. 상장의 청판에서 이물 돛대와 한판 돛대를 뉘었다 세웠다 할 수 있게 장치를 하였다. 또 청판 위 한가운데에 다락을 만들고, 그 위에 좌대(座臺)를 만들어 가마 지붕을 씌운 뒤 장막을 쳤다. 통제사는 이 좌대에서 모든 배와 군사를 지휘한다. 이 좌대를 장대(將臺)라고 한다.
거북배(龜船) - 이순신 전라좌도수군절도사가 창제한 거북배 귀선은 1592년(임진년)에 전라좌도수군절도사 이순신(全羅左道水軍節度使 李舜臣)이 창제하였는데 그 구조와 성능을 보면 대략 아래와 같다. “장차 왜적의 침입을 염려해 따로 전선 크기 만한 배를 만들었는데 배 위를 둥그스름하게 판자로 덮고 그 위에 창칼을 꽂았다. 적군들이 배에 기어오르거나 뛰어 내리면 그 창칼에 찔려 죽게 된다.” “배의 앞에는 용머리를 달고 그 용의 입을 통하여 대포알을 쏘았다. 뒤에는 거북꼬리를 달고 총구를 냈다. 배의 좌우에는 각각 6개의 대포 구멍을 냈다. 거북배에는 돌격장이 타고 함대의 선봉이 되어 나간다. 적이 에워싸고 덮치려 하면 일시에 대포를 놓아(放砲=射擊) 가는 곳마다 휩쓸어 임진왜란의 크고 작은 해전에서 크게 공을 세웠다. 모습이 엎드린 거북과 같으므로 ‘거북배’라고 하였다.”(이충무공전서)
통제영 거북배(統制營 龜船) (정조19)에 편찬한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의 책머리에 통제영 거북배와 전라좌수영 거북배의 그림과 그 설명이 있다. 모두 694자로 되어 있는데 거북배의 주요 치수와 만듦새, 기능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전라좌수영 거북배(全羅左水營 龜船) 1795년 통제영 거북배의 설명문 다음에는 그 당시의 전라좌수영 거북배의 치수와 구조에 대한 설명을 덧붙여 놓았다.
돛단 거북배(雙帆龜船) 선체의 형태는 앞의 전라좌수영 거북배의 그림과 거의 같다. 다만 이물에는 용두를 달았으며 고물에는 꼬리를 달았다. 장대(將臺)를 세우고 좌대를 꾸미고 가마 지붕을 하고 장막을 둘렀으며 차일을 쳤다. 이물 돛대와 한판 돛대를 세우고 돛을 올려 행선하는 모습이다. 돛대 꼭대기에는 꿩의 깃털을 꽂았다. 그 아래에는 바람의 방향을 알려 주는 풍향기 깃발을 꽂았다.
병선(兵船) 병선(兵船)의 선형은 전통적인 한선의 평선(平船)과 같다. 병선(兵船) 또는 방패선(防牌船)은 당두리의 기본 구조로 되어 있다. 포판 위에 난간을 설치하고 방패를 둘렀다. 수군 군사(水軍 軍士)들이 기선한다. 작은 대포를 탑재하고 좌우 현에 노 4척씩을 건다. 주위 난간에 방패를 설치한다.
사후선(伺候船) 사후선(伺候船)은 야거리 또는 작은 당두리의 구조로 되어 있다. 사후선은 선단의 맨 앞으로 나가 적정을 살피고 적선을 발견하게 되면(有事時) 신기전(神機箭)으로 신호를 보내 적의 동태를 알린다. 신기전통을 탑재하고 노 2척을 거는데 기선 인원은 5명이다.
2) 조선(漕船) 조선을 조운선(漕運船)이라고도 한다. 경상도와 전라도 남부 지방의 세곡(稅穀)을 이 배로 한양(漢陽=서울) 근처 서강(西江)으로 운반하고 경창(京倉)까지 납곡(納穀)을 한다. 조운선(漕運船)은 당두리의 기본 구조 위에 삼판 두 장을 더 올려서 선복 즉 선창의 용적을 더 늘렸다. 노량진에 주교(舟橋)를 가설할 때 조운선이 징집되어 주교 다리의 밑 받침배 역할을 하기도 했다.
3) 사견선(使遣船) = 통신사선(通信使船) 임진년(1592년)에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은, 1598년 8월에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죽고 조선에 침입하였던 일본군들이 패전을 거듭하자 패퇴하여 철군하게 된다. 그 뒤 이에야쓰(德川家康)가 일본의 대권을 잡게 되자 대마도의 종의지를 통하여 히데요시의 침략을 사죄하는 사신을 조선에 보낸다. 조선에서는 사명대사를 일본에 파견하여 접촉하게 하였다. 그 뒤로 1607년부터 1811년까지 모두 12차례나 공식적인 통신사를 파견하였다. 이 때 통신사 정사(正使), 부사(副使), 종사관(從事官) 일행과 역관(譯官)들을 태우고 바다를 건너가는 배를 사견선(使遣船=사신 파견선) 또는 통신사선(通信使船=통신사가 타는 배) 또는 도해선(渡海船=바다를 건너가는 배)이라고 하였다. 공식 명칭은 조선통신사선(朝鮮通信使船)이다. 사견선(使遣船)은 전선의 기본 선형 구조로 되어 있다. 다만 포판(鋪板) 위에 판옥(板屋) 대신 객실 누각(客室 樓閣)을 꾸몄다. 돛폭에는 가장자리에 청색 단을 둘렀다. 사견선은 통영과 각 수영에서 건조하게 하고 기선(騎船)할 사람들도 수군에서 충당하였다.
4) 관선(官船)
쌍돛을 단 바닷배(雙帆 海船) 우리나라 배의 만듦새를 사실적으로 잘 나타낸 그림이다. 배의 길이는 약 10발, 너비는 3발 반, 배의 높이는 1발 반 정도가 된다. 뱃전은 7폭을 무으어 올렸다. 이물 돛대와 한판 돛대는 겻집(鋪板) 위에서 뉘었다 세웠다할 수 있게 하였다. 돛은 부들 풀(香蒲)로 짠 자리돛(風席) 또는 사자리 자리돛(風席)을 돛대에 매어 달았다.
5) 전통 한선(傳統 韓船)
民間의 바닷배(海船) - 魚鹽 商船(地土船) 바닷배에는 돛대가 없는 거루(삼판은 셋), 돛대가 하나 달린 야거리(삼판은 닷섯), 돛대가 둘 달린 당두리(삼판은 일곱)가 있다. 민간 한선의 바닷배의 치(=舵))는 고물비우의 바깥 쪽에서 배밑 앞쪽으로 내리 꽂게 되어 있다. 배가 낮은 곳으로 지나가다가 모래뻘에 걸리게 되면 키는 저절로 뒤로 빠져 올라가게 된다. 그림의 야거리는 인천 앞 바다에서 잡은 고기를 노들강(鷺梁津江)으로 싣고 올라와 고기를 풀고 강가에 대어 놓고 있다. 치(舵)는 위로 솟아 나와 있다.
민간 한선의 구분
한선의 바닷배는 기본 선형은 같으나 그 사용하는 용도에 따라서 짐배(貨物船), 상고선(商賈船), 고기잡이배(漁船) 등으로 구분한다. 아래의 배는 1964년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던 전통적인 고기잡이배이다. 이 배는 강화도 어류정(漁遊井) 앞 바다에서 새우잡이를 하고 있는 ‘곶배’이다. 만듦새는 전통적인 한선(韓船)과 같다. 배밑은 평평(平平-平底)하고 삼판에는 피쇠(皮=참나무 못)를 윗판에서 아랫판으로 때려 박았다. 선체의 내부를 보면 장쇠가 삼판 마다 꿰어 있고 굵은 한판 멍에 뒤에는 돛대가 세워져 있다.
한선(韓船)의 고물비우 고물비우는 고물의 배밑에서부터 좌우 삼판 사이의 공간을 가로로 된 방향의 널로 막는데 배밑에서부터 위로 비스듬히 올라가면서 바깥쪽에서 삼판 단면에 덧대어 박는다. 치(=舵)는 고물비우의 바깥쪽에 설치한다. 칫다리(舵身)를 위쪽 뒤에서 비스듬히 앞쪽 아래로 고물비우를 따라 내리면서 나무 고려 사이에 꽂아 배의 물밑으로 내리 꽂는다. 이러한 치(舵)를 전향타(前向舵)라고 한다. 이것이 한선의 고물비우와 치의 독특한 만듦새이다.
나룻배 조선 시대의 나룻배는 강의 길목에 있는 도진(渡津)에 소속되어 있어서, 나루를 건너려면 도진 별장의 검문 검색을 받아야만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널 수 있었다.
* 참 고 자 료 *
역사스페셜20 영상복원 - 해상왕국 고려의 군함
고려는 아직까지 많은 부분에서 베일에 쌓여 있는 나라이다. 하지만 고려에 대해서 우리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한가지는 고려가 우리의 마지막 해상 왕국이었다는 사실이다. 백제, 가야, 발해, 통일신라의 장보고를 잇는 우리 역사상 마지막 해상왕국 고려. 고려가 해상왕국이었다는 단적인 증거는 바로 고려 군함이다.
세부설명
1. 700년 전 일본의 기억
일본의 하이타마현 박물관에서 전시된 '몽골습래회사' 라는 그림에는 700년 전 일본에게 패배를 안겨 준 고려, 몽고 연합군과의 전쟁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연합군의 일본 원정은 모두 두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는데, 1차 원정 때 연합군은 단 하루 만에 큐슈 일대를 휩쓸어 버리며 일본을 두려움 속으로 몰아 넣었다. 그 이듬해 일본은 고려, 몽고 연합군의 침략을 대비해서 방루를 쌓는데, 그 이름도 몽고방루이다. 그런데 유목 민족인 몽고가 어떻게 바다를 건너 일본을 원정할 수 있었을까?
2. 전북 부안군 구진 마을
한적한 바닷가 마을에서 발견되는 통나무와 마을 뒷산에 있는 울창한 소나무 숲. 전북 부안군 구진 마을에는 조선소가 있었던 흔적이 여기저기서 발견되었다. 천혜의 입지조건을 갖춘 구진마을은 고려인들이 군함을 만들며 일본 원정을 준비했던 마을이다.
3. 신의 바람 카미카제를 이긴 고려 군함
1281년 여몽연합군은 일본 2차 원정에서 대참패를 당했다. 하지만 당시 여몽연합군을 물리친 주역은 일본이 아니라 신의 바람이라 불리는 카미카제였다. 당시의 상황을 묘사한 원사에는 ‘원나라 전선들은 모두 돌풍에 깨졌으나 고려의 배는 대부분 무사했다.’고 전하고 있다. 4. 고려군함 복원
고려의 군함 복원작업에서 중요한 것은 고증된 사실을 토대로 정확한 설계도를 그리는 일이다. 먼저 과선의 설계도를 완성했다. 과선은 실제 해전에서 그 위력을 톡톡히 발휘한 고려의 대표적인 군함이다. 이어 완성된 과선의 설계도를 바탕으로 운동장에 실제크기의 대선을 세웠다. 고려에 대선이 등장했을 때 사람들은 배위에서 말을 달릴 만했다고 하는데 그건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5. 고려군함에 사용된 무기들
일본 고기록 소우기는 '고려전함은 돌에 화약을 넣어서 적선을 부순다'라고 적고 있다. 고려 군함에서 사용된 강력한 무기 중에 적선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가는 불화살 주화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불화살보다 더 강력한 무기는 화포였다. 고려는 까다로운 모든 조건을 갖추고 세계최초로 군함에 화포를 설치했다.
6. 해군사령관 왕건
고려가 동북아 최고 수준의 군함을 보유할 수 있었던 데에는 과학적이고 뛰어난 조선술 외에도 다른 배경이 존재한다. 바로 후삼국을 통일하고 새 왕조를 건설한 왕건이다. 왕건의 조상은 대대로 해상무역을 벌인 해상 호족세력이었다. 따라서 해상 호족출신인 왕건은 철저하게 바다를 이용할 줄 알았다.
7. 해상무역이 가져다 준 풍요
고려는 성능이 우수한 군함을 바탕으로 바다를 장악했다. 그리고 그 힘을 통해 여러 나라와 교역을 벌이며 국제적으로도 우세한 지위를 확보했다. 고려는 동북지역, 일본, 중국의 북,남부, 그리고 동남 아시아에 이르기까지 폭 넓은 항로를 가지고 있었고 이 해상무역은 고려에 풍요로움을 안겨주었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우리나라는 이러한 지리적 조건을 이용하여 근처 바다에서 많은 해산물을 채취해서 주요한 식생활의 하나로 이용해왔다. 그래서 바다에 나아가기 위한 수단으로 고대부터 배를 이용하게 되었는데, 이렇게 사용하기 시작한 배가 점차 문명이 발달하고 기술이 진보해짐에 따라 이러한 고기잡이배에 그치지 않고 나라의 해안을 지키거나, 이웃나라와 교역을 하거나, 조세나 물건을 옮기는 운송수단으로 사용되게 되었다.
백제시대에는 일본과의 교류가 활발하여 잦은 왕래가 있었고, 신라 말기에 장보고는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여 남해안 일대에 출몰하는 왜구를 섬멸하고, 세력을 형성한 후에 남해안 해상제해권을 장악하고, 이웃 나라와의 해상무역을 독점하였는데, 이것으로 당시의 배를 건조하는 주조기술이 얼마나 발달하였는가를 충분히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건조기술의 축적을 되물림 받은 고려에서는 과연 어떠한 배가 건조되었을까?
918년 왕건에 의해 건국된 고려는 지방호족출신과 해상세력의 영향으로 건국된 나라로, 이 나라의 가장 근본적인 토대는 바로 해양력이었다. 사실상 왕건의 조상과 그의 가문도 해상무역을 담당한 해상세력이었다. 이런 까닭에 그는 해군을 지휘했으며 직책도 백선장군 해군대장이었고 당시의 해군력 또한 막강했는데, 909년에는 해군을 이끌고 나주를 공격하여 화공전법으로 승리함으로써 서남해 일대에 확고한 기반을 다지면서 후삼국시대의 혼란을 수습해 가는 결정적인 전기를 마련한다. 그리고 나주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호족의 딸이기도 한 장화왕후는 왕건이 해상활동 중에 맺어진 사랑이기도 하다.
기록에 의하면 왕건이 건조한 대선은 그 길이가 각 방 16보(36.6m)에 무게만도 250∼280톤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는 15∼16세기경 콜룸부스가 항해한 배의 규모인데 이미 5∼6백년 전에 고려에서 건조된 것으로 이를 통해서 당시 고려의 해상세력의 배의 건조기술을 가늠해 볼 수 있다. 이렇게 큰 규모이다 보니 배 위에서 말이 달릴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할 만하다.
((서양 과학이 동양을 앞선 것은 1730년대 - 서양 학자들의 주장, 1730년대 이전 곧 산업혁명 이전까지는 동양과학이 서양보다 높았다))
당시 고려의 배에는 대선, 과선 등의 군함에서부터 순찰선인 순선, 행정지도선인 관선, 소나무로 만든 큰 배인 송방, 막선, 지방의 조세를 서울로 옮기는 조운선 등 매우 다양하였다(고려사에 대선·과선 등에 대한 기록이, 1123년 서긍이 지은 《고려도경》에 순선·관선·송방·막선 등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대선은 현재까지 밝혀진 고려의 배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전함이며, 과선은 고려의 대표적인 군함이다. 일본의 《소우기》 기록에 따르면 고려의 배, 그 중에서도 과선은 철로 뿔을 만들어 적을 부수게 만들었다고 한다. 이에 비추어 보면 거북선이 바로 고려군함을 원형으로 하여 개발된 것임을 유추해 볼 수 있다.
고려배에는 세계최초로 '과포'라 하여 포를 설치하였다. '1019년 고려전함이 화약을 넣어 공격한다.'고 기록하고 있기도 하다.(일본 《소우기》). 이렇게 보면 중국이 4대 발명품으로 자랑하는 것 중에 이미 한국이 원조이자 종주국으로 밝혀진 인쇄술과 더불어 '화약'도 한국이 최초로 발명했다는 새로운 사실도 밝혀진 셈이다. 특히 고려가 일본원정시 화약성 폭발무기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어 그 객관적 정황을 더욱 부각시켜 준다. 뿐만 아니라 일본의 《백련초》에서는 997년 고려가 일본이 계속적인 통상요구를 거절하자 3차 요구 이후에는 큐슈를 침공했다고 하며, 5백여 척을 앞세운 고려군의 침공 기록을 남기고 있기도 하다.
중세고려 이후로 근세조선시대에 나온 거북선도 3층 구조인데, 고려 배의 건조 방식과 대포 설치를 이어받았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고려 배는 한선(韓船 - 한국배) 기능 보유자인 이원식이 밝힌 대로 바닥이 평평하며 배의 앞뒤가 부드러운 유선형으로 굽어져 올라간 형상이다. 그리고 밑바닥에 돌을 두어 15˚의 기울기에도 원상회복이 가능하게 했으며 배나무 펌프를 설치하는 등 고도의 과학을 동원했다.
고려 전함의 닻과 닻돌 (일본 나카사키 현에 보관) → 닻과 닻돌 2개를 합쳐 무게가 1톤에 육박한다.
이러한 해양국 고려의 면모가 있었기에 활발한 해상교역이 가능했고 문화와 예악, 보화, 각종 물자 등이 늘 오갔으며 화려하고도 풍요로운 사회가 가능했던 것이다. 당시 서긍은 고려의 객관(여행객이 묵는 여관)이 궁궐만 했다고 하여 활발했던 국제무역을 엿볼 수 있기도 하다. 이규보는 자신의 시(詩) 가운데 고려 배가 베트남 등은 물론이고 대식국(아라비아), 마팔국(인도), 섬라곡국(태국) 등지까지 오갔다고 했다. 사실 오늘날 한국을 가리키는 영문자 'KOREA'도 아라비아 상인들이 고려를 보고 부르던 말에서 유래된 것이다. 해상제국 백제의 해양활동과 장보고의 청해진 시대를 이어받은 고려인 것이다. 그래서 고려 배도 그 조선술과 전통을 이어받는다.
이에 힘입어 해상왕국 고려는 3개월만에 9백척을 건조했다고 한다. 지금도 전하고 있는 고려의 청동거울 중에는 항해 중인 고려 배의 그림이 새겨져 있다.
거북선 실물을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17세기경 고서화가 재미 기업인 윤원형씨에 의해 현지시간으로 17일 미국 뉴욕에서 공개됐다. 이 그림은 그동안 학계에서 논란이 되어 온 거북선 원형에 대한 귀중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가로 140cm, 세로 239cm의 크기로 2장의 비단 천에 그려진 이 그림에는 거북선 모양의 배 위에서 회의 중인 장수들과 소형 선박에서 무기를 점검하는 병사들, 물건을 나르는 민간인들이 그려져 있다.
특히 거북선 모양의 배는 1795년 편찬된 ‘이충무공 전서’에 대략적인 스케치 형태로 그려져 있는 2층 구조가 아니라 3층 구조로 돼 있어 눈길을 끈다. 또 왼쪽 하단에 육안 해독이 불가능하긴 하지만 바랜 서체로 거북선 제원이 기록되어 있어 주목된다. 학계는 적외선 촬영을 통해 이 글씨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윤씨는 “평양 숭실학교 교장을 역임한 미국인 선교사 데이비드 마우리의 손자며느리인 마우리 여사로부터 지난해 1월 구입했다”면서 “1867년 일본 니가타(新潟)현 인근의 나가오카 성벽을 허물 때 발견된 그림이라는 설명을 마우리 여사로부터 들었다”고 밝혔다.
윤씨는 또 “조지아대에서 탄소동위원소 방식으로 연대를 측정한 결과 300~350년 전 제작된 그림으로 추정된다는 통보를 받았다”고 말했다. 따라서 최고 1640년대의 그림으로 추정이 가능하며 이 경우 임진왜란 후 거북선을 비롯한 당시 군선과 수군 장병의 모습을 실제로 보고 그린 그림일 가능성이 크다. 윤씨는 “그림을 그릴 당시에 사용했던 석채(광물성 물감)가 용머리 방패 깃발 등 일부분에 남아 있고, 나머지 부분은 일본에 건너간 뒤 덧칠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조선시대 거북모양으로 만든 전선(戰船). 일반적인 거북선에 관한 기록은 조선 초기의 《태종실록》에 처음 보인다. 즉, 1413년(태종 13)에 “왕이 임진강 나潁?지나다가 귀선과 왜선으로 꾸민 배들이 해전연습을 하는 모양을 보았다.”라는 구절이 있고, 또 1415년(태종 15)에는 좌대언(左代言, 조선태종 때 좌승지의 다른 이름) 탁신(卓愼)이 “귀선의 전법은 많은 적에 충돌하더라도 적이 해칠 수가 없으니, 결승의 양책(良策)이라 할 수 있으며, 거듭 견고하고 정교하게 만들게 하여 전승의 도구로 갖추어야 한다.”는 뜻을 상소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내용으로 보아, 거북선은 왜구의 격퇴를 위하여 돌격선으로 특수하게 제작된 장갑선(裝甲船)의 일종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거북선의 기원을 왜구의 침해가 가장 심하던 고려 말기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와 같이 거북선은 고려 말, 또는 조선 초에 이미 제조, 사용되었으며,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이순신(李舜臣)에 의하여 전래의 거북선을 개량하여 철갑선으로서의 거북선이 창제, 실용화되었는데 이를 ‘창제귀선(創制龜船)’이라 한다. 창제귀선은 임진왜란 초반의 잇따른 해전에서 함대의 선봉이 되어 돌격선의 위력을 남김없이 과시하였다.
임진왜란 후의 거북선은, ‘창제귀선’의 제원(諸元)에 대한 기술적인 전승을 이루지 못한 채 시대에 따라 변모하며 조선 말기까지 각 수영에 존재하였다. 따라서, 오늘날 가장 큰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에 의하여 창작, 구사된 바로 그 거북선인 것이다. 한편, 비록 실현되지는 못하였으나 거북선의 유형에 속하는 배가 따로 구상된 예가 있다. 이미 이순신의 귀선이 용맹을 떨치고 있던 1592년 태자를 호종한 이덕홍(李德弘)은 왕세자에게 올린 상소문에서 귀갑거(龜甲車)의 전법과 귀갑선의 이로움을 아뢰고 있다. 그는 귀갑선의 체제를 “등에 창검을 붙이고, 뱃머리에는 쇠뇌〔弩〕를 매복시키고, 허리에는 판옥(板屋)을 지어 사수를 그 속에 두고……”라 하고, 또 “듣건대 호남의 장수들이 이것을 써서 적선을 크게 무찌르고 있다.”고 언급한 뒤 이듬해 왕에게 올린 상소에서 귀갑선의 구상도를 첨부하여 그것의 제작을 건의하고 있다(艮齋先生文集 卷二). 이와 같은 귀갑선의 구상은 그 발상에 있어서 이순신의 창제귀선과 비슷한 데가 있으나, 구조상의 개념은 판이하게 다른 것 같다. 이 귀갑선의 발상과는 별도로 지금도 거북선에 대하여 귀갑선이라는 명칭이 종종 혼용되고 있다.
(1) 이순신의 창제귀선 왜란이 일어나기 바로 전해인 1591년(선조 24) 2월 13일 전라좌도수군절도사로 임명된 이순신은 왜구의 내침을 미리 염려하여 본영을 비롯한 각 진(鎭)의 전쟁준비를 급속히 강화하는 한편, 배짓는 기술이 뛰어난 장수 나대용(羅大用) 등과 함께 돌격전선인 거북선의 건조에 착수하였다. 이것은 접근전과 백병전에 능한 왜병을 상대하기 위한 비책이었을 것이다.
이순신은 1592년에 쓴 《난중일기》에서 “거북선에 사용할 범포(帆布: 돛을 만드는데 쓰는 베) 29필을 받았다(2월 8일).”, “거북선에서 대포 쏘는 것을 시험하였다(3월 27일).”, “비로소 포범(布帆: 돛)을 만들었다(4월 11일).”, 그리고 “식후에 배를 타고 거북선에서 지자포(地字砲)와 현자포(玄字砲)를 쏘아보았다(4월 12일).”고 하여, 거북선은 임진왜란 발발(4월 13일) 직전에 그 첫 모습을 바다 위에 드러낸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 ‘창제귀선’의 설계나 체제에 관한 자세한 기술적 자료가 전란 후에 기록되지 못하였다. 따라서 여기저기 남아 있는 단편적인 사료들을 종합적으로 평가하여 그 모습과 특징을 대강 살펴보는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거북선을 직접 체험 또는 곁에서 목격한 사람이 남긴 기록이나 공문서등, 소위 일차사료로 간주되는 거북선 관련 기사를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1) 임진년 이순신의 장계 이순신은 1592년(임진년) 6월 14일에 써올린 <당포파왜병장 唐浦破倭兵狀>에서 자기 자신이 제작한 귀선의 구조와 기능에 대하여 간략하게 설명하고, 귀선의 실전상황을 역력히 기술하고 있다. 즉, 사천선창의 전황을 보고하는 대목에서 “신이 일찍부터 섬 오랑캐가 침노할 것을 염려하여 특별히 귀선을 만들었사옵니다(別制龜船). 앞에는 용머리(龍頭)를 설치하여 입으로 대포를 쏘게 하고(口放大砲), 등에는 쇠송곳을 심었으며(背植鐵첨), 안에서는 밖을 내다볼 수 있으나, 밖에서는 안을 엿볼 수 없게 되어, 비록 적선 수백척이 있다 하더라도 그 속으로 돌입하여 대포를 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번 싸움에 돌격장으로 하여금 이 귀선을 타고 적선 속으로 먼저 달려들어가 천자포(天字砲)·지자포(地字砲)·현자포(玄字砲)·황자포(黃字砲) 등의 각종 총통을 쏘게 한즉 산 위와 언덕 아래와 배를 지키는 세 군데의 왜적도 또한 비오듯이 철환을 함부로 쏘아…”하고,
또 당포 선창의 해전실황에서는, “… 왜선은 판옥선(板屋船)만큼 큰 배 9척과 아울러 중소선 12척이 선창에 나누어 묵고 있는데, 그 가운데 한 큰 배 위에는 층루가 우뚝 솟고 높이는 서너 길이나 되며 밖에는 붉은 비단휘장을 쳤고, 사면에 ‘황자(黃字)’를 크게 썼으며 그 속에는 왜장이 있는데 앞에는 붉은 일산(日傘)을 세우고 조금도 겁내지 아니하였습니다. 먼저 거북선으로 곧장 층루선(層樓船) 밑으로 돌격한 후 용의 입으로 현자철환을 윗쪽으로 쏘고(仰放), 또 천자, 지자포와 대장군전을 쏘고나서 들이받아 그 배를 깨뜨리고(撞破其船)…”라고 쓰고 있다.
2) 정랑 이분(李芬)의 행록 이순신의 조카인 이분이 원균(元均)의 패전으로 귀선이 상실된 정유년(1597)에 본영에 와서 행정적인 업무에 종사하였으나, 귀선이 건재하였던 정유년 이전에도 작은아버지 이순신을 방문하고 있음을 ≪난중일기≫에서 볼 수 있다. 그가 적은 <행록 行錄> 속에는 ‘창제귀선’의 모습을 후세에 전하는 귀중한 내용이 담겨 있다. 즉, “공(충무공)이 수영에 있을 때 왜구가 반드시 쳐들어올 것을 알고, 본영 및 소속 포구의 무기와 기계들을 수리, 정비하고 또 쇠사슬을 만들어 앞바다를 가로막았다. 그리고 또 전선을 창작하니(創作戰船), 크기는 판옥선만한데(大如板屋), 위에는 판자로 덮고, 판자 위에 십자모양의 좁은 길을 내어 사람이 다닐 수 있게 하고, 나머지 부분은 모두 칼과 송곳(刀錐)을 꽂아 사방으로 발붙일 곳이 없도록 했으며, 앞에는 용머리를 만들어 입은 총혈(銃穴)이 되게 하고, 뒤는 거북꼬리처럼 되었는데 그 밑에도 총혈이 있으며, 좌우에 각각 여섯 개의 총혈이 있다. 대개 그 모양이 거북의 형상과 같아 이름을 ‘귀선’이라 하였다. 뒷날 싸울 때에는 거적(編茅)으로 송곳과 칼(錐刀) 위를 덮고 선봉이 되어 나아가는데, 적이 배에 올라와 덤비려 들다가는 칼송곳 끝에 찔려 죽고, 또 적선이 포위하려 하면 좌우 앞뒤에서 일제히 총을 쏘아 적선이 아무리 바다를 덮어 구름같이 모여들어도 이 배는 그 속을 마음대로 드나들어 가는 곳마다 쓰러지지 않는 자가 없기 때문에 전후 크고 작은 싸움에서 이것으로 항상 승리한 것이었다.”
3) 당시 일본측의 기록 <고려선전기 高麗船戰記>는 왜함대에 종군한 69세의 도노오카(外岡甚左衛門)가 1592년 7월 28일 부산포에서 작성한 전황기록문서이다. 임진왜란을 일으키게 된 자국 내의 사정과 부산포 침공 이후 왜의 수군이 겪은 연패의 참상을 기록한 것으로 “어리석은 노인의 붓끝이 후일의 비웃음을 무릅쓰고 써놓고자 하는 것이다.”라고 맺고 있다.
여기에는 한산대첩에 이어 7월 10일에 있었던 안골포해전(安骨浦海戰)의 실전상황이 목격한 대로 충실하게 기술되어 있다.
“구키(九鬼嘉隆)와 가토(加藤嘉明)는 와키자카(脇坂安治:한산해전의 패장)가 전공을 세운 것을 듣고, 같이 6일에 부산포로부터 나와 바로 해협 입구에 이르러, 8일에는 안골포의 오도(烏島)라는 항(港)에 들어갔다. 그리하였더니 9일(朝鮮曆 10일)의 진시(辰時:오전 8시경)부터 적의 대선 58척과 소선 50척 가량이 공격해 왔다.
대선 중의 3척은 맹선(장님배: 盲船, 거북선)이며, 철(鐵)로 요해(要害)하여 석화시(石火矢), 봉화시(棒火矢), 오가리마따(大狩鉢) 등을 쏘면서 유시(酉時,오후 6시경)까지 번갈아 달려들어 쏘아대어 다락에서 복도, 테두리 밑의 방패에 이르기까지 모두 격파되고 말았다. 석화시라고 하는 것은 길이가 5척 6촌(약 117.6cm)의 견목(堅木)이며, … 또 봉화시의 끝은 철로 둥글게 든든히 붙인 것이다. 이와 같은 큰 화살(大箭)로 다섯칸(1칸은 약 1.25m), 또는 세칸 이내까지 다가와 쏘아대는 것이다.…” (鍋鳥家에 소장된 筆寫原本에서).
4) 임진왜란 후의 나대용의 상소 1606년(선조 39) 나대용이 창선(柶船: 승무원 42명의 쾌속 무장선)의 효용을 상소하는 가운데, “… 거북선이 비록 싸움에 이로우나 사부(射夫, 사격수)와 격군(格軍, 노를 젓는 수부) 등의 수가 판옥선의 125인보다 적지 아니하고…” 라는 내용이 있어, 창제귀선의 승무원이 125∼130인 정도임을 알 수 있다. 이순신의 임진년 12월 10일자 장계에는 “한 전선에 사부와 격군을 합하여 130여 명의 군사를…”이라는 언급이 있다.
5) 명나라 화옥(華鈺)의 기록 《이충무공전서》의 안설(按說)에 “명나라 화옥의 《해방의 海防議》에서 ‘조선의 거북선은 돛대를 세우고 눕히기를 임의로 하고 역풍이 불건, 퇴조 때이건 마음대로 간다.’ 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충무공이 창제한 거북선을 가리킴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것은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을 직접 보고 간 명나라 사람들의 기록 내용으로 간주된다.
6) 명나라에 통지된 을미년의 수군현황 을미년(1595) 명나라에 수군현황을 통지하는 내용 속에 거북선의 보유 척수도 명시되고 있다. 즉, “수군통제사 이순신은 … 전선 60척, 귀선 5척, 초탐선(哨探船) 65척을 거느리고….” (《事大文軌 권 12》).
이상의 기록으로 창제귀선의 체제와 주요기능에 관계되는 것을 종합해보면 다음과 같다.
① 거북선의 크기는 주력전함인 판옥선의 크기와 같다.
② 뱃머리에 용두(龍頭)를 설치하여 용의 입을 통하여 대포를 쏘았다. 또 사각(射角)의 조정이 가능하였다(仰放玄字…)
③ 거북의 등처럼 만든 귀배판(龜背板)에는 철첨(쇠송곳)을 꽂아 적병의 등선(登船)을 막았다.
④ 포혈(砲穴)은 좌우 각 현(舷)에 6개, 용두에 1개, 선미(船尾)에 1개가 있어 모두 14문이 사용되고 있다.
⑤ 포의 종류로는 천자포·지자포·현자포·황자포 등의 각종 총통을 장비하여, 실전에서는 탄환 이외에도 대전(大箭)을 많이 발사한 것 같다.
⑥ 즉 철갑(鐵甲)을 하여 많은 적선 속으로 뚫고 들어가도 적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었다.
⑦ <고려선전기>에 의하면 임진년의 거북선은 3척이었다. 《나주목지 羅州牧志》의 “나대용이 임진년 난리를 당하자 이충무공을 좇아 거북선 세척을 꾸몄다.”라는 사실과 상통된다. 그러나 을미년(1595)의 거북선은 모두 5척인 것이다.
⑧ 승무원의 수는 당시의 판옥선에 준하여 125∼130인 정도이다.
⑨ 돛대는 세우고 눕히기를 임의로 하였다. 전투에 임할 때는, 돛을 보호하고 기동성을 높이기 위하여 돛대를 눕히고, 노(櫓)만으로 추진한 것 같다.
(2) 거북선의 철장갑
창제귀선에 대한 원전이 계승되지 못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거북선이 철갑을 입힌 배라고 하는 이른바 철갑전설(鐵甲傳說)은 임진왜란 이후 꾸준히 전승되었다. 그리고 거북선은 세계 최초의 철갑선으로 국내외에 널리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전설 그 자체도 구승적 사료(口承的史料)로서 중요하지만, 거북선의 철갑은 당시의 실전상을 신중히 살펴본다면 과학적으로 수긍되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다. 당시의 기록에서와 같이 거북선은 적선들의 집중공격을 능히 이겨낼 수 있는 배였다. 특히, 가공할 왜적의 화공(火攻)과 화술(火術)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철갑을 이용하는 방법 외에는 없었을 것이다. 철장갑이 쇠송곳만을 귀배판에 꽂았다면 화공에는 더없이 불리한 것이다. 물론, 거북선이 다소의 사상자를 기록한 것은 사실이나, 배가 가진 원래의 기능과 활동력을 상실한 일은 없었다. 한편 철갑에 대한 당시의 기술을 보여주는 유물이 우리 주변에 적지 않게 남아 있다. 조선시대에 건축된 남대문이나 남한산성의 성문 등 여러 도성과 산성에 현존하는 성문의 철갑비(鐵甲扉)는 그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이들 유물은 단조로 만든 2∼3㎜ 두께의 장방형 철엽(鐵葉)을 목판 위에 비늘모양으로 입힌 성문의 철갑문짝이다. 이는 고려 말과 조선 초에 실용화된 통형(筒型) 화기의 성능에 따라 창과 방패의 대비에서 관례화된 철갑방패의 기본양식과 같은 것이다. 철갑문의 제조공법은 거북선의 철갑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철갑전설을 비롯하여 귀선철갑에 관계되는 현존 사료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구전적 전승으로서의 철갑전설 전설은 과거의 복원을 위한 유익한 사료인 것이다. 철갑귀선을 비롯하여 명량해전(鳴梁海戰)에서?‘강강술래’, 행주산성싸움에서의 ‘행주치마’, 곽재우(郭再祐)의 ‘홍의장군’ 등, 임진왜란이 낳은 이야기들은 앞으로도 끊임없이 전승될 것이다. 철갑전설은 필경 철갑을 직접 만든 대장간의 대장장이들과 해전에 참가했던 병사들의 회고담에서 비롯되어 구전으로 전승된 대중의 전설이며, 동시에 대중의 정설(定說)이었음을 특기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전설의 성립에 대한 이와 같은 확신은 이 ‘전설’이 임진왜란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400년의 전승경력을 지닌 원천성 있는 전설로서, 결코 최근 한말 이후의 외래문헌의 영향에 의하여 유발된 것이 아님을 전제로 하고 있다. 철갑전설 자체의 발단과 유래에 깊이 유의한 바 있는 언더우드(Underwood,H.H., 元漢慶)는 1934년에 발표한 그의 논문 〈Korean Boats and Ships〉에서 다음과 같은 흥미있는 내용을 보고하고 있다.
“……그러한 철갑전설을 창작해 낸다는 것은 철갑 그 자체를 발명하는 것만큼이나 비범한 재주라고 말할 수 있겠다. 또 이 전설은 아주 최근의 것이 아니다. 대원군 시절, 프랑스의 원정이 예상되었을 때, 한 불운한 관리가 그 독재군주로부터 ‘거북선과 같은 철갑선을 건조하라.’는 명령을 받게 되었다. 그는 절망적인 불안 속에서 명실상부한 철갑선을 만들기 위한 시도에 그의 모든 재물을 소비하였으나, 그 철갑선은 비정하게도 뜨기를 거부하였다.……”
또한, 저자는 이 관리가 이 이야기를 직접 들려준 연희전문학교 교수의 친척이었음을 밝히고 있어, 위의 내용의 신빙성을 더욱 높여주고 있다. 즉, 1860년대 천주교도들의 처형에 이어 서양 선박들이 근해에 출몰할 무렵, 대원군은 ‘거북선과 같은 철갑선’을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불운한 관리가 겪은 ‘철갑선 건조의 하명사건’은 철갑전설의 유래를 최소한 120년 이전으로 소급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한편, 구전내용이 후일의 기록으로 옮겨질 수도 있으나, 그것은 문필을 향유한 상층사회의 관심 여하에 달린 것이다. 따라서, 구전에 대한 기록적인 흔적이 남아 있지 않는 경우는, 그 구전 자체의 구승경력조차도 쉽게 추적할 도리가 없다. 철갑전설 성립에 대한 논의는, 그 발단이 한말 개화기보다도 훨씬 앞선다는 사실의 확인만으로 충분한 것이다. 이상의 구전적 철갑전설의 보이지 않은 전승경력에 연관하여 다음에 제시될 회화적 전승으로서의 (귀선문도 龜船紋圖)가 전설의 끊임없는 명맥을 입증해 주고 있다.
2) 회화적 전승으로서의 <귀선문도> 구전적 철갑전설의 성립과 그 명맥을 같이하는 회화적 사료 한 점이 현재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입지름 10.8㎝, 몸지름 20.3㎝, 밑지름 9.5㎝, 높이 16.7㎝의 작은 조선 중기(17세기 초반) 청백항아리에 북화풍의 강한 필치로 철갑귀선 한 척이 그려져 있다. 이 청백철화귀선문항아리〔靑白鐵怜龜船紋壺〕는 1910년경 경상남도 고성에서 발굴된 것으로, 부봉미술관(富峰美術館)의 관장 김형태(金炯泰)가 소장하다가 해군사관학교에 기증한 것이다. 황불연기를 토하고 있는 용머리의 묘사가 특이하나, 그 해학적 표현이 회상적인 감회를 전해주는 듯 흥겹다. 이 귀선도는 심미적 관점에서뿐만 아니라, 귀선구조의 각 부분을 놀라우리만치 사실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이 철갑귀선은 철갑을 제외하고도 ≪이충무공전서≫의 거북선과는 그 면모를 판이하게 달리하고 있다. 따라서, 철갑 자체는 물론이려니와, 이 귀선도에 대한 사료성의 평가를 겸하여 우선 선체구조의 주요 부분을 살펴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① 돛대:앞뒤 2개가 가지런히 눕혀져 있는데, 이는 임전태세를 갖춘 모습이다. 앞에서 당시 기록으로 인용한 명나라 화옥의 ≪해방의≫에 “조선의 거북선은 돛대를 세우고 눕히기를 임의로 하고……”라고 한 기록과 부합되는 광경이다.
② 귀배판(龜背板):철갑 위에 철첨이 꽂혀 있다. 장방형 철엽이 사용된 것같이 보이나, 실제로는 거북무늬의 육각형 철엽을 붙인 경우도 빛에 따라 같은 인상을 줄 수 있으므로 철엽의 형상을 판정하기는 어렵다. 또, 장방형으로 뚫린 통용구(通用口) 2개가 명확하게 표시되어 있다. 귀배판 좌우에 각각 2개로 보아 모두 4개인 셈이다. 이는 돛대의 조작 및 정비·관측·채광·통풍 등 다목적인 용도로 추리된다.
③ 노(櫓):현판(舷板)에 노공(櫓孔)이 10개 있으므로 노의 수도 좌우 각각 10개가 될 것이다. 그러나 좌현의 1·2번 및 마지막 10번째 노는 그려져 있지 않다. 전투 중에 파손되어 상실된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노형(櫓型)은 오어식(oar式) 노의 하장노역(下粧櫓役)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보기에 따라서는 1·2번 및 10번 노공을 노공으로 해석하지 않을 수도 있어, 소묘상(素描上)의 불확실성을 감안한다면 좌우 각각 7개의 상장노역으로 간주될 가능성도 있다.
④ 포혈(砲穴):현(舷)의 패판(牌板)에는 선미쪽의 한 칸을 제외하고 6문의 포혈이 있어, 이분의 〈행록〉에 “좌우에 각각 6개의 포혈이 있다.”고 한 것과 일치된다. 또한, 뱃머리에는 횡량(橫梁) 위의 좌우 패판에 포혈이 한 개씩 명확하게 표시되어 있다.
⑤ 용두(龍頭):패란(牌欄)에 이어 깐 판자 위에 우뚝 세워진 용두는 방포(放砲)하는 포문으로서의 기능이 아니라, 유황불 연기를 토하는 목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즉, 이것은 이순신의 장계(唐浦破倭兵狀, 壬辰年 6월 14일)에 나타난 포문으로서의 ‘방포형용두(放砲型龍頭)’가 아니라, 연기를 토하는 소위 ‘토연형용두(吐煙型龍頭)’인 것이다. 임진왜란 전반기에 활약한 5척의 자매함(姉妹艦) 사이에는 이미 실전경험에 따라 국부적으로 개조되었을 가능성도 있으며, 또한 그 중에는 판옥선에서 개작된 것도 있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따라서, 이 〈귀선문도〉에 나타난 ‘토연형용두’도 싸움이 없던 후대라기보다는 이미 임진왜란 당시에 추가된 유형일 가능성이 있다. 이 〈귀선문도〉의 거북선 묘사가 〈행록〉 등의 기록에 의존한 것이 아님은, 이 용두의 표현이 잘 입증하고 있다.
⑥ 노판(蘭板):노판은 6(7)쪽의 곡목(曲木)을 이어붙였는데, 위쪽에 또 다시 6쪽을 이중으로 이어붙여 횡량 밑 부분을 견고하게 보강하고 있다.
⑦ 선미형(船尾形):항아리 자체의 연대는 고사하고 이와 같이 선미의 만곡형 쌍미엽(彎曲型雙尾葉)이 절미(截尾)된 거북선 또는 판옥선이 정조 때(이충무공전서 출판) 이후의 그림에 나타난 예는 거의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은 특징으로도 이 〈귀선문도〉의 시기는 정조시대 이전 또는 거북선의 변화가 뚜렷해지기 이전, 즉 숙종대 이전의 연대로 소급되어야 할 것이다. 이상의 관찰에서 각 항의 특징을 종합해 볼 때 이 ‘철갑귀선도’는 임진왜란 당시의 귀선상(龜船像)을 은연중에 암시해 주고 있으며, 철갑전설의 성립 진의를 묵묵히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3) 고려선전기의 거북선 현존하는 사료로서 거북선의 철갑에 관련된 기록으로는 임진년에 도노오카가 남긴 이 〈고려선전기〉가 가장 오래된 것이다. 저자는 왜의 수군에 종군하여 이순신 함대의 날카로운 공격에 연전연패하는 왜수군의 참상을 직접 목격하고 체험한 사람이다. 그는 임진년 7월 10일(倭曆 7월 9일)에 있었던 안골포해전에서 번갈아 달려드는 3척의 거북선을 지척에서 목격하고, “……큰 배 중에 3척은 장님배이며, 철로 요해(要害)하여……”라고 쓰고 있다. 여기서 음미해야 할 문구가 바로 “철로 요해하여(鐵ニテ要害シ)”이다. 이는 해당 구절에 대한 구어문체인 “鐵でおおわれており”(桑田忠親, 山岡莊八監修, 日本の戰史 5, 1965)에 준하여서 “철로 덮여 있고”라고 옮기면 적합할 것이다. 아울러 원문의 뜻을 따라 “철판을 입혀 방비하였다.”는 뜻으로 새겨 마땅한 것이다. 이로부터 240년 뒤인 1831년에 일본의 ≪정한위략 征韓偉略≫은 거북선에 관하여 〈고려선전기〉를 인용, “……적선 중에는 온통 철로 장비한 배가 있어, 우리의 포로써는 상하게 할 수가 없었다.……”(川口長孺, 征韓偉略 卷之二, 水藩彰考館, 天保二年, 1831)라는 해설을 가미하고 있다. 하지만 ≪정한위략≫은 1차사료 즉, 원천사료가 아니다.
(4) 경상좌수사의 인갑기록
〈인갑기록 鱗甲記錄〉은 1748년(영조 24)에 작성된 경상좌도수군절도사의 장계 초본에 나오는 내용으로, 거북선의 철갑을 뜻하는 내용이 국내 기록으로는 처음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문서는 문장에 정정한 곳이 없어 장계 초본이라기보다 보관용으로 정서한 필사본이라 함이 더 적합할 것이다. 아뢰는 사람이 ‘慶尙左道水軍節度使臣李謹’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바로 당시의 경상좌수사인 이언섭(李彦燮)으로 밝혀져 있다. 한편, 이 귀중한 사료가 240년간 보존되어 온 내력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이 경상좌수사의 장계는 거북선에 대한 건의문인데, 거북선과 누선(樓船)을 비교하여 거북선이 전술적으로 뛰어남을 거듭 지적하고, 또한 임진왜란 때 이순신의 공적을 높이 칭송하면서 누선을 거북선으로 대치할 것을 극구 주청하고 있다. 거북선에 관계되는 주요 부분은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①“인갑으로 덮개를 하고〔鱗甲爲蓋〕 그 안을 넓혔으며, 굽은 나무로 가슴을 꾸미고, 가파르고 뾰족하여 가볍고 날래니, 외양은 신령한 거북이 물 위를 달려가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것을 누선과 비교한다면 그 빠르고 둔함이 하늘과 땅의 판이함으로나 비할 수 있겠습니다. 위에 인갑이 있어서 시석(矢石)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 속에 군사와 기계(무기)를 감추어서 재주를 떨치며 부딪쳐 나아감에 빠르기가 육군의 갑마(甲馬)와 같으니, 그것으로 선봉을 삼아 파도가 도도한 가운데로 달리어 공격하며 나는 듯이 쳐들어 간다면 실로 막강한 이기(利器)이온바, 수군이 믿는 바는 오로지 이 전함인데……”
②“이른바 거북선은 누각을 만들지 않고, 판으로써 덮개를 하고 그 위에 거듭 인갑을 하였고〔所謂龜船則不以爲樓以板爲蓋仍作鱗甲〕, ……노젓는 군사가 노를 젓는 데 편하여 나가고 물러가는 것을 뜻대로 할 수 있어 바람을 맞아 물을 가름에 빠르기가 날랜 말과 같사온바……”
③“오호라! 저 전란(임진왜란)의 때에 충무공께서 왜구를 맞아 순식간에 충성으로 분발하여 상담의 고통으로 진력하매, 거북선을 처음 만들어 용감하게 승리하였으니, 후세의 변란을 다스리는 방법이 되었습니다. (충무공은)처음부터 끝까지가 참으로 병법을 아는 뛰어난 장수였는데, 혹시 사변이 일어나면 걱정 없이 나아가 진(陣)에 임하여 흉포한 적을 다스림에 있어, 빠르게 나아가 부딪쳐 쳐들어 감에 충무공이 만든 거북선의 전략에 부합되어야 할 것인즉, 진에 임하여 적을 무찌르는 용기가 비록 충무공의 싸우면 반드시 승리하는 지혜로움과는 같지 못하다 하더라도, 외방의 진을 굳게 지키는 도리에 있어서는 결코 빠름을 버리고 둔함을 취할 수는 없는 것이옵니다.”
장계는 위의 구절 외에도 같은 취지의 뜻을 거듭 강조하고, 끝으로 누선과 귀선의 제도를 별지에 도면으로 그려 비변사에 올린다고 쓰고, 거북선 건조에 대한 승인이 조속히 내려질 것을 강력하게 주청하고 있다. 위의 문장 속에는 그때부터 150년 전의 이순신과, 또 이순신의 창제귀선의 얼이 생생하게 부활되어 있다. 이 경상좌수사의 장계는 철갑에 대한 언급이 없는 ≪이충무공전서≫의 출판(1795)보다 47년 전에 작성된 것이다. 책임감이 왕성한 후대의 한 수사(水使)가 자신이 비록 이순신의 지혜로움에 미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방법만은 반드시 계승되어야 할 것임을 아뢰는 대목은 심금을 울리듯 감동적이다. 이 기록에서 귀선철갑의 가장 핵심이 되는 부분은 ②항의 첫 구절이다. 여기서 “이른바 거북선”의 ‘이른바’는 바로 이순신의 ‘창제귀선’으로부터 그 특징이 유래된 바로 그러한 거북선을 지칭하는 것이며, 그것은 누각을 만들지 않고, 목판으로 덮개〔背甲板〕를 하여, 그 위에 거듭 “인갑을 입혔다.”라는 것이다. 그러면 과연 이 ‘인갑’은 무엇인가? 이것은 쇠비늘 또는 놋쇠비늘을 비늘모양으로 연결하여 만든 갑옷을 지칭하는 데 쓰이는 낱말이다. ‘철갑’은 쇠로 만든 갑옷을 통칭하므로 ‘인갑’은 철갑 중에서도 그 구조가 비늘모양으로 만들어진 철갑의 일종이다. 따라서 거북선에 입혀진 철갑의 종류는 바로 ‘인갑’인 것이다. 즉 쇠비늘을 비늘모양으로 장착한 것이다. 쇠비늘은 대장간에서 단조(鍛造)된 철엽이며, 두께는 조선 철갑의 전형에 따라 2∼3㎜ 정도일 것으로 추정된다.
[철갑귀선에 대한 역사적 평가]
1862년 3월 9일 미국의 남북전쟁 당시 북군의 철갑선 모니터(Monitor)와 남군의 철갑선 메리맥(Merrimack)은 서로의 전세를 걸고 용감무쌍하게 싸웠다. 이 전투는 장갑선 사이의 싸움이었고 결국 에릭슨(Ericsson,J.)에 의해 창제된 모니터가 승리하여 북군의 전세가 크게 회복되었다. 1866년 병인양요 때 흥선대원군이 “거북선과 같은 철갑선을 만들라.”고 명령한 것은, 시대에는 부합되었으나 기술의 공백으로 실패를 면하지 못하였다. 모니터에 3년 앞선 1859년 진수된 프랑스의 글루아르(Gloire)는 현(舷)의 흘수(吃水) 부위에 12.2㎝, 상부 현판에는 11㎝ 두께의 철판을 장착함으로써 근대철갑선의 전조를 이루었으나, 이듬해인 1860년에 진수된 영국 최초의 철장(鐵裝) 주력선 워리어(Warrior)는 46㎝ 두께의 티크판에 11.4㎝ 두께의 철판을 입힘으로써 프랑스를 능가하였다. 미국의 모니터(1862)에 270년이나 앞선 소위 장갑전법의 비조(鼻祖)가 이미 우리 나라에 존재하였다. 목조전선시대(木造戰船時代)가 낳은 세계 최초의 철갑선, 즉 이순신에 의하여 창제된 철장 장갑선이 바로 그것이다. 해전사상 화포가 실용화된 이후 함대운동과 포격전을 주전법으로 한 근대식 해전의 특색을 가장 성공적으로 보여준 것은 이순신의 수군이었다.
또한, 접전 때마다 선봉이 되어 전세 확립에 크게 이바지한 거북선은 장갑전법의 선구로서, 속도와 기동성이 주력전선인 판옥선(항해시 약 7노트)보다 앞서는 이른바 장갑돌격선이었다. 한편, 일반 전선도 관심 여하에 따라 주요 부위에 대한 철판의 장착이 수시로 가능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분의 〈행록〉에 “적은 배를 쇠로 싸고 젖은 솜으로 가리었는데……”라 하였듯이 이미 임진왜란 초기의 해전에서 왜선 중에 철로 방어한 배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부분적인 방어의 보강은 장갑선으로서의 철갑은 아니며, 당초 장갑선의 목적으로 고안된 거북선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왜군의 별칭에 따라 장님배로 기록된 거북선은 ‘밖에서는 배 안을 엿볼 수 없는’ 명실상부한 장갑선이며, 교전 때는 물론 평소의 항해 때라도 승무원이 배갑판 밖으로 나올 기회는 돛의 조작 등 필요한 때를 제외하고는 별로 없지 않았을까 생각되어, 승무원의 불편함이 짐작되고도 남음이 있다. 거북모양을 본떠서 만든 철저한 갑각형장갑(甲殼型裝甲)이다. 거북선의 철장은 귀배판의 철갑과 철첨뿐만이 아니라, 포혈 주변의 패판도 적절히 보강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소요된 철의 양은 척당 9t 정도로, 특히 선고(船高)가 낮은 거북선의 경우, 배의 안정성에는 무리가 없는 것이다. 거북선의 체제와 위력이 종종 몽충(蒙衝)의 이름으로 상징된 것은 흥미있는 비유라 하겠다. 몽충은 소의 생가죽을 등에 덮어 보강하고, 양편에 노젓는 구멍을 내었으며, 전후좌우에는 활과 창을 사용할 구멍을 내어서 적이 가까이 올 수 없게 한 고대 중국의 맹렬한 돌격선의 이름이다(通典).
완벽한 장갑선인 이순신의 거북선은 세계 역사에서 최초의 시도였으나, 국부적으로 철판을 이용하여 방비를 보강한 사례는 임진왜란 이전에도 적지 않았다. 예컨대, 1585년 네덜란드 안트워프(Antwerp)의 공략 당시 부분적으로 철판을 붙여놓았으나 좌초되어 노획된 피니스 벨리스(Finis Bellis)의 경우를 예로 들 수 있겠다. 그 밖에도 1578년 갑판 위의 망루 부분을 철로써 방비한 구키의 아다케형(安宅型) 군선, 1370년 원나라에서 뱃머리를 철로 싼 류영충(廖永忠)의 군선, 그리고 1203년 남송 때 현측(舷側)을 철로 보강한 진세보(秦世輔)의 수소차륜식(水搔車輪式) 해골선(海結船) 등이 있다(J. 니덤, 중국의 과학과 문명, 1971). 진세보의 해골선만 하더라도, 석궁(石弓)·투석기(投石機) 및 투탄기(投彈機), 그리고 화창을 장비한 배이므로 개방된 발사공간의 확보가 불가피하였다. 장갑선의 역사를 일괄한다면, 시석시대(矢石時代)에 탄생한 중국의 몽충, 화포의 실용화시대에 고안된 이순신의 거북선, 그리고 근대적 장갑선으로 성공을 거둔 미국의 모니터를 같은 계보에 특기하는 데 이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거북선의 역사적 의의는 어디까지나 이순신의 승리에 있음을 잊어서는 아니된다.
임진왜란 후의 거북선
7년간의 임진왜란이 끝나자 거북선은 이미 그 존재가치를 잃고 말며, 실질적 운영에 있어서도 한때 도외시된다. 국방의 증강과 수군의 정비가 이루어짐에 따라 전선과 거북선에 대한 규격상의 복구책이 강구되었으나, 전선의 변천에 따라 거북선의 크기도 증대추세를 면하지 못하였다. 1795년(정조 19)에 간행된 ≪이충무공전서≫ 속에는 거북선의 제도를 기술한 내용이 있어, 비록 후대의 거북선에 관한 기록이지만, 거북선의 제원(諸元)을 아는 데 귀중한 사료로 이용되고 있다.
[거북선의 변천상] 1606년(선조 39) 조선차관(造船差官) 나대용은 임진왜란 후에 봉착한 수군의 운영난을 통감하여 자신이 고안한 창선(柶船)의 사용을 다음과 같이 상소하고 있다. “거북선이 비록 싸움에 쓰기에 이로우나 사격(射格)의 수가 판옥선의 125인보다 적지 아니하고, 사부(射夫) 또한 불편한 연고로 각 영에 한 척씩만 두고 더 만들지 않습니다. 신이 항상 격군(格軍)을 줄이는 방책을 생각해 왔는데, ……판옥선도 아니고 거북선도 아닌 다른 모양으로 만들어 검과 창을 숲처럼 꽂아 이름지어 창선이라 하였고, 격군 42인을 나누어 실어 바다에서 노젓는 것을 시험하니 빠르기가 나는 듯하였고……”(宣祖實錄 39年 12月 戊子). 임진왜란 후에 병력의 충원이 뒤따르지 않자 거북선의 운영은 곤란한 상태에 처하고, 각 영에 한 척씩만 배치된 채 제도의 형식만이 유지되고 있는 형편이었다. 척수도 모두 5척으로 임진왜란 당시나 다름없었다. 봄·가을에 훈련할 때면 사수와 격군은 임시로 충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1615년(광해군 7)에 비로소 순검사(巡檢使) 권분(權盼)이 수군을 검열하고 이순신이 정한 바의 전선의 옛 제도를 감정하여 구제도로의 복귀를 시도하니, 이때 작성된 것이 소위 구제도에 대한 〈감정절목 勘定節目〉이다. 이 무렵의 사정은 전선과 거북선의 고대화현상(高大化現象)을 심각하게 거론했던 숙종 때의 기록에 잘 나타나 있다(備邊司謄錄 第41冊).
국방의 증강과 수군의 정비 등이 논의되던 무렵인 1686년(숙종 12) 12월 영의정 김수항(金壽恒) 등 중신들이 전선의 체제가 전에 비해 커졌으니 이순신의 옛 제도에 따라 개선되어야 한다는 의견을 놓고 토의하게 된다. 모두가 권분의 〈감정절목〉을 가리켜, “당초 절목을 꾸밀 때, 난이 지난 지 오래지 않아 이순신의 휘하 장교나 늙은 병사가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이 있어……모든 장수와 함께 묘당에 모아 감정한 것으로, 그 정한 바 치수는 필경 이순신 때의 옛 제도에서 나온 것이고……” 하니 왕도 그 절목을 준수하라는 뜻을 내린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영의정의 말에 따르면, 거북선에 대한 제도와 치수에 대해서는 이 〈감정절목〉에도 기재되어 있지 않아, 거북선도 다른 전선과 같이 점차 고대해졌다는 설은 근거가 있다 하겠다. 결국 창제귀선에 대한 규격상의 체제는 복원되지 못하고 말았다. 전선의 크기의 증대 추세에 대한 비판이 많았으나, 특히 거북선의 비대화는 곧 퇴화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1751년(영조 27) 영남균세사(嶺南均稅使) 박문수(朴文秀)는 “신이 전선과 귀선의 제도를 소상히 살펴보매 전선은 개조시에 선체가 점차 길어져 반드시 운영이 어렵사옵니다. 귀선에 미쳐서는 당초의 체제 몽충과 같사옵고, 위에 두꺼운 판자를 덮어 시석을 피하오니 신이 이순신의 소기를 살펴보매 귀선의 좌우 각 6총혈이 열리매 지금은 8혈을 열었사오니, 귀선은 전에 비하여 과대하나이다. 또 아뢰올지니, 개조 아니치 못할 바를……”(英祖實錄 27年 2月 己丑)이라고 하여 전선과 귀선의 퇴화상을 지적하고 있다.
이것은 경상좌수사 이언섭의 소위 ‘인갑귀선’의 상소가 있은 지 3년도 지나지 않아 왕에게 보고된 내용이다. 장소도 같은 영남인데, 박문수는 경상좌수사가 주청한 바의 ‘누선에 비하여 판이하게 예리하고 날랜’ 이른바 이순신의 창제귀선의 정신을 계승한 예외적인 거북선은 볼 기회가 없었던 모양이다. 또, 정조 때에는 같은 선체에 조립식으로 상체 부분〔上粧部分〕만 바꾸면 판옥선도 되고 또 거북선도 될 수 있는 소위 병용전선(橙用戰船)도 있었지만(正祖實錄 22年 正月 丙戌), 이와 같은 운영방식은 전투를 위한 목적이 아니라 물건을 실어나를 때 편리하도록 한 방책이었다. 임진왜란 후의 거북선은 수영(水營)에 따라, 혹은 수사(水使)의 관심과 재량에 따라 그 변천의 양상에 적지 않은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아 마땅하나, 퇴화설이 자주 거론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순조 때의 영의정 김재찬(金載瓚)은 “근일 들은 바에 따르면 각 수영에 있는 거북선은, 이름은 거북선이라 하되 화호불성(怜虎不成)이라, 다른 배와 다를 바 없다.”(日省錄, 純祖 9年 4月 17日 丙午) 하여 당시의 소문을 전하고 있다.
[이충무공전서의 거북선] ≪이충무공전서≫는 이순신이 전사한 뒤 200년이 지난 1795년(정조 19) 어명에 의하여 출판된 책이며, 이순신의 일기·장계·행적과 그를 예찬하는 시문, 비명 등 여러 가지 관련 기록을 집대성한 전문 30여만 자에 달하는 책이다. 편집은 당시의 규장각 문신 윤행임(尹行恁)이 담당하였다. 이 책의 권수도설(卷首圖說)에는 ‘통제영귀선(統制營龜船)’과 ‘전라좌수영귀선(全羅左水營龜船)’의 판화귀선도(版怜龜船圖), 그리고 700자 정도의 ‘안설(按說)’이 실려 있다. 거북선의 제도에 관계되는 사료 중에서 가장 체계적으로 기술된 자료이다. 이것은 물론 정조 때의 거북선을 나타낸 것이나, 숙종에서 영조 때의 거북선도 체제에 있어서는 대략 이와 비슷하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안설 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거북선의 제도:저판(底版, 밑판. 속명은 本版)은 열 쪽을 이어붙였는데, 길이는 64척8촌이고, 머리쪽 넓이 12척, 허리 넓이 14척5촌, 꼬리쪽 넓이 10척6촌이다. 좌우 현판(舷版:속명은 杉版)은 각각 일곱 쪽을 이어붙였는데, 높이는 7척5촌이고, 맨 아래 첫째 판자의 길이는 68척이며, 차츰 길어져서 맨 위 일곱번째 판자에 이르러서는 길이가 113척이 되고, 두께는 다같이 4촌씩이다. 노판(蘭版:짐판. 속명은 荷版)은 네 쪽을 이어붙였는데, 높이는 4척이고 두번째 판자 좌우에 현자포 구멍 1개씩을 뚫었다. 축판(熄版:짐판. 속명은 荷版)은 일곱 쪽을 이어서 붙였는데, 높이는 7척5촌, 윗넓이는 14척5촌, 아랫넓이는 10척6촌이다. 여섯번째 판자 한가운데 지름 1척2촌의 구멍을 뚫어 키〔舵:속명은 悉〕를 꽂게 하였다. 좌우 현(舷)에는 난간〔舷欄:속명은 信防〕을 설치하고 난간 머리에 횡량(橫梁:속명은 駕龍)을 건너질렀는데, 바로 뱃머리 앞에 닿게 되어 마치 소나 말의 가슴에 멍에를 메인 것과 같다. 난간을 따라 판자를 깔고 그 둘레에 패(牌)를 둘러 꽂았으며, 패 위에 또 난간〔牌欄:속명은 偃防〕을 만들었는데, 현란에서 패란에 이르는 높이는 4척3촌이며, 패란 좌우에 각각 열한 쪽의 판자(덮개. 속명은 蓋版 또는 龜背版)를 비늘처럼 서로 마주 덮고 뱃등에는 1척5촌의 틈을 내어, 돛대를 세웠다 뉘었다 하는 데 편하도록 하였다. 뱃머리에는 거북머리를 설치하였는데 그 길이는 4척3촌, 넓이는 3척이다. 그 속에서 유황염초를 태워 벌어진 입으로 연기를 안개같이 토하여 적을 혼미하게 한다. 좌우의 노는 각각 10개이고, 좌우 패에는 각각 22개의 포혈을 뚫었으며, 12개의 문을 만들었다. 거북머리 위에도 2개의 포혈을 뚫었고, 그 아래에 2개의 문을 냈으며, 문 옆에는 각각 포혈 1개씩이 있다. 좌우 복판(覆版)에도 각각 12개의 포혈을 뚫었으며 ‘귀(龜)’자 기를 꽂았다. 좌우 포판(鋪版) 아래 방이 각각 열두 칸인데, 두 칸에는 철물을 넣어두고 세 칸에는 화포·활·화살·창·칼 등을 넣어두고, 열아홉 칸은 군사들의 휴식처로 하였다. 왼쪽 포판 위의 방 한 칸은 선장이, 오른쪽 포판 위의 방 한 칸은 장교들이 거처하는데, 군사들은 쉴 때는 포판 아래에 있고 싸울 때는 포판 위로 올라와 모든 포혈에 대포를 대어놓고 쉴새없이 쟁여 쏜다.
상고하건대 충무공의 행장에 이르기를 ‘공이 전라좌수사가 되어 왜적이 장차 쳐들어올 것을 알고 지혜를 써서 큰 배를 만들어, 배 위는 판자를 덮고 판자 위에는 십자(十字)로 좁은 길을 내어 사람이 겨우 다닐 만하게 하고 그 밖에는 다 칼송곳을 깔았는데 앞은 용머리로, 뒤는 거북꼬리로 되었으며, 총구멍은 전후좌우에 각각 6개씩으로 큰 탄환을 쏘는데, 적을 만나면 거적으로 위를 덮어 칼송곳을 가리고 선봉이 되어 적이 배에 오르려 하면 이 칼송곳 끝에 부딪치며, 와서 덮치려 하면 한꺼번에 총을 쏘아 가는 곳마다 휩쓸지 못하는 일이 없어, 크고 작은 싸움에서 이것으로 거둔 공적이 심히 많으며, 형상이 엎드려 있는 거북과 같으므로 거북선이라고 이름을 붙였다.’라고 하였다. 명나라 화옥의 ≪해방의≫에 이르되 ‘조선의 거북선은 돛대를 세우고 눕히기를 임의로 하고 역풍이 불건 퇴조 때이건 마음대로 간다.’고 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충무공이 창제한 배를 가리킴이다. 그런데 모두 아울러, 그 치수에 대해서는 자세히 말한 것이 없다. 지금의 통제영귀선이 대개 충무공의 옛 제도에서 유래된 것이나 역시 약간의 치수의 가감은 없지 않다. 충무공이 이 배를 창제한 곳은 실로 전라좌수영이었는데, 이제 좌수영귀선은 통제영 배의 제도와 약간 서로 다른 것이 있기 때문에 그 제도를 아래에 붙여 써 둔다.
전라좌수영귀선의 치수·길이·넓이 등은 통제영귀선과 거의 같으나, 다만 거북머리 아래에 또 귀신의 머리를 새겼으며, 복판 위에는 거북무늬를 그렸고, 좌우에 각각 문이 2개 있으며, 거북머리 아래에 포혈이 2개, 현판 좌우에 포혈이 각각 1개씩, 현란 좌우에 포혈이 각각 10개씩, 복판 좌우에 포혈이 각각 6개씩이며, 노는 좌우에 각각 8개씩이다.” 안설의 뱃머리 부분의 설명에서 “노판은 네 쪽을 이어붙였는데〔蘭版聯四〕”라고 하였으나, 거북선의 그림을 보면 일곱 쪽의 곡목(曲木)을 이어붙인 것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노판의 제원 설명이 누락되고, “네 쪽을 이어붙였는데……”는 상장(上粧)의 앞쪽 패판에 대한 설명이 아닌가 한다. 또 그림을 보면 거북의 머리는 용의 머리로 되어 있다.
이순신의 ‘창제귀선’에 대해서는 이분의 〈행록〉을 인용하고 있을 뿐 새로운 것은 없다. 그러나 이 ≪이충무공전서≫의 권수도설은 정조 때만이 아니라 포괄적으로 후대의 귀선상(龜船像)을 보여주는 본보기로 그 의의가 큰 것이다. 포혈의 수는 통제영귀선이 모두 74개, 전라좌수영귀선이 모두 36개로, 이순신 귀선의 14개에 비한다면 그 변천상이 현저하다. 같은 시기로 보여지는 전라우수영 소속의 장자제3·4호귀선(張字第三四號龜船)에서 정원의 배치내용을 보면, 선장 1인, 사부·좌우포도(左右捕盜)에 16인, 화포수 10인, 포수 24인, 타공(舵工)·무공(舞工)·요정수(拈允手)·선직(船直)에 10인, 능로(能櫓) 90인, 기라졸(旗羅卒) 10인 등 정원은 모두 161인에 이르고 있다(全羅右水營誌).
또, 거북선의 척수를 연대별로 알아보면, 임진왜란 당시 을미년(1595)에 5척, 난 후 8년이 지난 1606년(선조 39)에도 5척, 그리고 1716년(숙종 42)에도 그대로 5척이나, 1746년(영조 22)에는 14척(續大典), 1808년(순조 8)에는 30척(萬機要覽) 등으로 점차 증가되었다. 현재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고증에 따라 만든 거북선모형이나 1980년 진해 해군기지에서 최초로 진수된 실물크기의 복원귀선은 ≪이충무공전서≫의 도설 중 주로 전라좌수영귀선을 본떠서 만든 것으로, 철갑과 철첨을 더함으로써 이순신의 거북선을 상징적으로 기념하고 있다. 안설에 의한 복원연구에 따르면, 선체길이(雙葉尾를 제외한 상장부분) 26∼28m, 선체너비 9∼10m, 선체높이 6∼6.5m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조선수군의 주력 전투선인 판옥선의 그림이다.
≪참고문헌≫
太宗實錄, 宣祖實錄, 肅宗實錄, 英祖實錄, 正祖實錄, 備邊司謄錄, 高麗船戰記(外岡甚左衛門, 1592), 李忠武公全書(尹行恁, 1795), 朝鮮科學史(洪以燮, 正音社, 1946), 李忠武公全書(李殷相 譯註, 1960), 龜船考(崔永禧, 高麗大學校 史學會, 史叢 3, 1958), 龜船考(趙成都, 海軍士官學校硏究報告 2, 1963), 壬辰倭亂後龜船의 變遷過程(金龍國, 學術院論文集人文社會科學篇, 1968), 龜船의 造船學的考察(金在瑾, 學術院論文集, 1974), 龜船의 科學的硏究(浪元植, 國防史學會論文集, 1976), 龜船構造에 대한 再檢討(南天祐, 歷史學報 71, 1976), A Short Note on the Ironclad Turtleboats of Admiral Yi SunSin(Bak, HaeIll, Korea Journal Vol.17 No.1, 1977), 李舜臣龜船의 鐵裝甲과 李朝鐵甲의 現存原型과의 對比(朴惠一, 한국과학사학회지 11, 1979), 李舜臣龜船의 鐵裝甲에 對한 補遺的註釋(한국과학사학회지 41, 1982), 李舜臣龜船(1592)의 鐵裝甲과 慶尙左水使의 鱗甲記錄(1748)에 대한 註釋(한국과학사학회지 71, 1985), Korean Boats and Ships(Underwood,H.H., Transactions of the Korean Branch of the Royal Asiatic Society XXⅢ, Seoul, Korea, 1934).
이 분의 행록에 의하면 ".....전선을 비로소 만드니(創作戰船) 그 크기가 판옥선만 하였다(大如板屋)....."라고 해서 충무공은 기존의 전선(판옥선)을 개조하는 쉬운 방법을 놔두고 새로이 전선을 지었음이 나타난다. 이것은 거북선과 판옥선의 구조가 서로 달랐을 가능성이 크다는 의미가 된다. 왜적의 침입이 임박한 것을 염려하였다는 충무공이 공기를 단축시킬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도 굳이 거북선을 새로 만든 것은 판옥선을 약간 개조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함이 했기 때문일 것이다.
거북선은 3층이었다?
국방부 장학근 박사 “기동력위해 노·대포 별도층에”
거북선은 2층짜리가 아니라 3층 구조의 돌격선이라는 군사전문가의 주장이 나왔다.
“그동안 거북선의 내부를 2층 구조로 보았던 것은 군사적 측면에 대한 무지의 결과였습니다. 노 젓는 층과 포 쏘는 층을 구분한 3층 구조라야 돌격선의 본래의 기능을 할 수 있습니다.”
국방부 산하 군사편찬연구소 장학근 박사는 28일 충무공 탄신 459주년을 앞두고 이같이 주장했다. 해군사관학교 교수와 박물관장을 역임한 장 박사는 최근 ‘군사(軍史)’ 51호에 기고한 논문에서 “노와 포가 한 층에 있는 2층 구조였다면 거북선은 순간의 기동력이 승패를 좌우하는 해전에서 연전연패를 면치 못했을 것”이라며 자신이 복원한 3층으로 된 내부구조도를 공개했다.
그동안 거북선은 한국 조선사의 개척자인 고 김재근(전 서울대 조선공학과) 박사가 주장한 대로, 내부가 2층 구조를 갖고 있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전쟁기념관 거북선 등 실제로 그동안 복원된 거북선들은 김재근 박사의 2층 구조설을 토대로 제작돼, 장 박사의 문제 제기는 사회적 논란으로 이어질 수 있는 사안이다.
장 박사는 “3층 내부구조의 거북선을 만들어 운행 실험을 해본 뒤 기존의 복원 거북선에 대해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3) 거북선
◆ 거북선의 종류
현재까지 알려진 거북선 종류는 세가지가 있다.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이충무공전서에 실린 통제영 거북선과 전라좌수영 거북선이다. 이순신 종가집에도 거북선 그림 2장이 전해져 오는데, 이 거북선은 이충무공전서의 거북선과는 또다른 모양을 가지고 있다.
이충무공전서에서는 통제영 거북선이 이순신이 만든 거북선과 유사하다고 설명하고 있다. 당연히 통제영 거북선이 임진왜란 당시의 거북선의 모습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나, 이충무공전서에는 전라좌수영 거북선이 언제 개발된 것인지 아무런 구체적 설명도 하지 않고 있다. 다시말해, 이미 임진왜란 당시에 이미 몇가지 다른 종류의 거북선이 존재했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순신 종가에 소장된 거북선 그림은 판옥선처럼 장대(將臺)가 존재한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다. 이충무공전서에는 이런 형태의 거북선이 나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충무공전서가 편찬된 정조대(1776~1800) 이후에 개발된 새로운 종류의 거북선인 것 같다. 이순신 후손 중에 수군 통제사를 역임한 사람이 여러 명이므로, 후손 중에 한명이 조선 말기의 거북선 그림을 집안에 소장하게 된 것 같다. 이순신 종가 거북선 그림 중에 하나는 거북머리가 없다. 이 때문에 '머리없는 거북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머리 없는 거북선'은 거북선의 구조를 보여주기 위해 머리와 장대를 제거한 그림일뿐, 종류가 다른 별도의 거북선은 아닌 것 같다. 일부 연구가들은 이 그림을 근거로 거북선의 머리가 안밖으로 움직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 주장을 이해할 수 없다. 만약 위의 그림을 가지고 그런 주장을 할 수 있다면, 위 거북선 그림의 장대도 상하로 움직일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10여종이 남아 있는 조선 후기 수군 훈련도에 묘사된 거북선 중 상당수가 장대가 있는 거북선이다. 적어도 19세기 이후에는 장대가 있는 거북선이 일반화되었던 것 같다.
◆ 거북선의 발명자
거북선의 구체적인 개발과정은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태종(1401~1418)대에도 거북선이라는 배가 있었다는 기록이 태종실록에 두차례 남아있다. 이 때문에, 이순신이 거북선을 새롭게 발명한 것이 아니고, 기존의 거북선을 개조 혹은 재발명한 것일 뿐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태종대의 거북선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전혀 없으며, 태종대 이후 임진왜란 발발시점까지 180여년동안 거북선에 관련된 단 한차례의 기록도 남아있지 않다. 더구나, 임진왜란 당시의 거북선은 구조상 판옥선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데, 이 판옥선이 개발된 시점은 1555년이므로, 임진왜란 당시의 거북선은 태종대의 거북선과는 차이가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일부에서는 거북선을 개발한 사람은, 이순신 장군이 아니고 나대용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사실 이순신 장군은 전라좌수사에 임명되기전 대부분의 군경력을 육군에서 보냈을뿐, 수군에서 복무한 것은 1580년 6월~1582년 1월 사이 (약 18개월)뿐이다. 따라서, 배에 대해 상당히 경험이 많았던 나대용이, 수군 복무 경험이 부족한 이순신 장군을 도와, 거북선 제작과정에 일정한 기여를 했을 가능성은 있다. 나아가 나대용이 이순신 장군에게 거북선 제작 건의를 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현재 남아있는 사료로서는 거북선의 최초 제작과정에 이순신 장군과 나대용이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을 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그 구체적 진실이 어떻든간에 거북선 제작을 결정할 수는 있는 지휘관은 나대용이 아니고, 이순신 장군이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나름대로 엄격한 법치주의에 기반한 조선왕조에서, 기존 규정에 없는 새로운 군함을 만든다는 것은 지휘관의 결단을 요구하는 일이었으며, 그 결단을 이순신 장군이 내렸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 거북선의 구조
1934년, 언더우드(Underwood)가 최초로 거북선을 연구한 이래, 지금까지 최석남, 김재근, 이원식, 남천우, 정광수, 최두환 등 10여명의 연구가들이 거북선을 연구해 오고 있다. 거북선은 대체로 판옥선에 지붕을 씌운 배라는 점, 거북선도 다른 많은 한국 전통 배와 마찬가지로 한국식 노를 사용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그러나, 거북선의 구체적인 구조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의견이 분분한 실정이다. 이들의 의견을 왜곡없이 제대로 소개하려면 책 한권으로도 모자랄 지경이므로, 간단하게 여러 학자들의 주장을 덧붙이겠다.
이충무공전서는 통제영 거북선이 이순신 장군이 개발한 거북선의 원형에 가깝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충무공전서에도 통제영 거북선의 내부 구조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설명이 부족하다. 이 때문에 통제영 거북선의 갑판 구조에 대해서 1층 구조였다는 주장, 반 2층 구조였다는 주장, 2층 구조였다는 주장이 대립하고 있다. (갑판 아래의 선실을 감안할 경우 각 2층, 반3층, 3층구조가 된다) 1층 구조일 경우 판옥선에서 2층 갑판을 완전 제거하고 그 위에 지붕(개판)을 씌운 셈이되며, 2층 구조일 경우 판옥선의 구조를 그대로 두고 그 위에 지붕을 씌운 셈이 된다.
통제영 거북선이 이순신이 개발한 거북선 원형에 가깝다는 사실을 긍정하는 이상, 거북선 원형의 갑판은 2층 구조일 가능성은 없다고 본다. 통제영 거북선의 그림을 보면, 1층 갑판의 천정 위치에서부터 곡면의 개판(지붕)이 씌워진 모습이 너무도 분명하기 때문이다. 전라좌수영 거북선의 경우 그림상 2층 구조일 가능성이 있으나, 통제영 거북선의 경우 순수한 2층일 가능성은 전혀 없다.
문제는 거북선의 개판(지붕) 좌우에 있는 포구멍이다. 통제영 거북선 그림을 보면 지붕(개판) 좌우에 12개의 구멍이 그려져 있는데, 이충무공전서 본문을 보면 이 구멍에 대해 포혈(砲穴)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만약 거북선을 순수한 1층 구조로 볼 경우 이 포구멍을 설명할수가 없게 된다. 1층 구조라면 지붕 부근에 포혈을 만들 필요가 없고, 설사 만든다해도 사용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외관상 2층이 아니면서도 지붕 부근에 포혈이 존재하는 구조라면, 거북선의 내부구조는 반2층 구조일 수 밖에 없다. 반 2층 구조일 경우에도 판옥선의 상층갑판을 그대로 두고 여장만 제거한체 지붕만 씌운 경우(①)와, 판옥선의 상층 갑판을 완전 제거한 경우(②) 두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판옥선의 상층갑판을 그대로 둔 경우(①)에는, 판옥선에서 개조하기에는 간편하나, 지붕의 높이가 낮아서 사람이 설 수있는 공간은 상층갑판을 제거한 경우(②)와 별로 차이가 없으므로 별 실익은 없다. 일부 연구가들은 판옥선에 상층갑판을 제거하는 식의 개조는 조선학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나무못으로 제작한 한선은 필요할 경우 해체, 재조립이 가능하다는 것은 상식에 속하는 문제이다. 채광이나 활동의 편의성을 고려한다면 필자는 상층갑판을 제거하고 반2층 갑판을 설치한 경우(②)가 좀 더 합리적이라고 생각된다. 이 경우 이렇게 좁은 반2층 공간에서 대형총통 특히 대장군전 등을 발사하기는 어려울 것이며, 소형의 승자총통이나 활을 사격할 수 있었다고 보는 것이 현실적이다.
일부 연구가들은 거북선 원형이 1층 구조나 반2층 구조일 경우, 사실상 2층 구조의 판옥선에서 퇴보한 것이며, 판옥선의 2층 갑판을 단순히 지붕으로 개조한 것일 뿐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또한, 만약 1층 구조나 반2층 구조일 경우 노를 젓는 격군과 대부분의 전투요원이 같은 층에 있게 되므로, 운용하기에 상당히 불편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비판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의견이다. 그러나, 실물 복원 거북선을 타본 사람이라면 다소 불편하기는해도, 같은 층에서 노를 젓고 전투를 수행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다는 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통제영 거북선이 2층 구조였다면, 이충무공전서의 통제영 거북선 그림을 설명할 방법이 없게 된다. 최초의 거북선 원형이 아무런 결점이 없는 완벽한 배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거북선 원형에는 나름대로 결점이 있었을 것이며, 그러한 결점을 개량하기 위해 전라좌수영 거북선이나 이충무공 종가 거북선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용머리(혹은 거북머리)의 용도에 대해서도 학자들간에 의견이 일치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이 난중일기에서 직접 용머리에서 현자화포를 쏘았다고 기록한 이상 임진왜란 당시의 용머리는 화포발사용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경우 용머리 내부에 현자화포를 발사할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을 확보해야하므로, 지금 복원된 거북선 보다는 용머리가 커야 할 것이고, 그 높이도 조금 낮아져야 할 것이다. 거북선 이물비우(船首材)에 그려진 귀면은 충각용 돌기(Ram)일까, 아니면 단순한 장식용 그림일까? 학자들간에 의견이 분분하지만, 현재 밝혀진 사료로서는 단정적으로 말하긴 어렵다.
이 거북선은 전쟁기념관에 전시 중인 거북선 축소 복원 모형이다. 기본적으로 이충무공전서의 통제영 거북선을 모델로 만든 것이나, 거북선 지붕(개판) 부분은 좌수영 거북선과 통제영 거북선을 절충해서 임의로 만든 것이다. 해군사관학교와 서울 이촌동에는 실제 운행 가능한 실물 크기 복원 거북선이 있다. 이 실물 크기 복원 거북선들은 모두 해군본부에서 복원설계한 거북선인데, 순수한 1층이라기보다는, 반2층에 가까운 내부 구조를 가지고 있으나, 지붕(개판)에는 포혈을 만들어 놓지 않아 반2층에서 전투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래 사진은 해남에 위치한 명량해전 기념관에 전시된 거북선 절개 모형이다. 이 거북선 모형도 기본적으로 반2층 구조로 제작되어 있으나, 지붕(개판)의 각도와 반2층의 높이가 적당하지 않아, 반2층에서 전투를 수행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어 있다.
◆ 거북선은 철갑선일까? - 가능성은 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이미 일제시대에 거북선이 철갑선이 아니라고 주장한 바 있다. 해방 이후 학계의 통설도 거북선이 철갑선이 아니라는데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난중일기, 이충무공전서나 이순신행록 같은 기본 사료에 거북선이 철갑선이라는 직접적인 설명이 전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반대로 철갑선이 아니라고 나오는 사료도 없다) 사실 거북선이 철갑선이라는 직접적인 기록을 굳이 찾는다면, 한국측의 기록이 아닌 일본측의 임진왜란 기록에서나 발견될 뿐이다. 나아가 조선공학을 전공한 저명한 학자인 김재근 교수가 거북선이 철갑선이라면 전체적인 구조상 복원력이나 부력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고 의견을 밝힌 것이 결정타가 되었다.
그러나, 거북선이 철갑선일 가능성이 있다고도 생각한다. 일본의 유명한 전통 선박 전문가 교수에 따르면, 일본 전통 선박인 아다케(안택선)에 설치되는 방패는 대부분 두께 3치(寸)의 녹나무로 되어 있다고 한다. 일부 방패는 나무 위에 얇게 철판을 붙이기도 하는데, 이 경우 두께 1치(寸)의 녹나무에 두께 2푼(分)의 쇠판을 붙인다고 한다. 이 경우 두께 2푼의 쇠판은 두께 2촌의 녹나무와 면적과 무게가 같다고 한다. 이러한 일본 전통 배의 실제 사례는 대단한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어차피 거북선이 철갑선이라는 것은 물 밖에 나오는 부분만 쇠판을 입혔다는 이야기이므로, 두께를 달리해서 쇠판과 나무판을 같은 무게와 크기로 만들 수만 있다면, 배의 복원력이나 부력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판옥선이나 거북선의 삼판(외판) 두께는 보통 4치(12.26cm) 정도이다. 지붕(개판)의 두께도 이 수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판옥선의 여장이나 방패판은 소나무가 아닌 주로 참나무(상수리나무,졸참나무,녹나무) 계통의 나무를 쓴다. 만약 판옥선의 지붕(개판)이 참나무 계통으로 되어 있다면, 4치(대략 12cm) 두께의 참나무 지붕은 대략 4푼(대략 1.2cm)의 쇠판 지붕과 무게가 동일하다.
실제로는 일본의 배 방패와 유사하게 나무판자 2치(대략 6cm)에 쇠판 2푼(대략 0.6cm)을 덧붙인 형태나, 혹은 나무판자 3치 (대략 9cm)에 쇠판 1푼(대략 0.3cm)을 덧붙인 조합을 생각해 볼 수 있다. 50여년 동안 이순신을 연구하고 있는 최석남 장군이나 서울대 원자핵공학 박사 박혜일씨가 이미 지적했듯이 이런 형태는 우리나라의 성문에서 흔하게 발견할 수 있는 방식이다.
이 경우 순수하게 나무판자로만 만드는 경우와 비교해서, 두께만 얇아질뿐 무게는 동일하기 때문에 복원력이나 부력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실상 김재근 교수는 지붕을 철갑으로 씌울 경우의 복원력이나 부력에 대한 어떤 구체적인 수치나 계산도 제시한 적이 없이, 막연하게 추정만으로 철갑선설을 부정했을 뿐이다.
일부 학자들은 쇠판을 씌웠을 경우 철갑 위에 쇠송곳을 부착하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바다 위에서 운용하면 녹이 잘 쓸어 별로 실용성이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4) 임진왜란 당시의 일본 배
◆ 아다케
아다케 후네(安宅船, 안택선)은 임진왜란 당시의 일본 군함 중에서 가장 큰 배이다. 아다케란 이름이 무슨 뜻인지에 대해서는 일본에서도 정설이 없는 실정이다. 한자의 의미 그대로 매우 튼튼하고 안전하다는 뜻이라고 해석하는 주장도 있고, 혹은 일본 지명 안택포(安宅浦)에서 유래했다는 주장도 있다. 일본 전통 배의 권위자인 石井謙治에 의하면, 아다케란 '적을 두려워하지 않고, 마구 날뛰는 배'라는 뜻이라고 한다.
임진왜란 당시의 일본은 한국과 달리 중앙집권적 군대를 보유하지 못했기 때문에, 지역별로 군편제나 무기의 차이가 심한 편이다. 아다케도 예외는 아니어서, 각 배마다 차이가 너무 심해 어떤 통일적인 특성을 논하기가 매우 어렵다. 아래 아다케의 모형은 일본의 신송원(新松院)에 소장된 것인데, 일본 학계에서는 아다케에 대한 가장 권위있는 자료로 인정하고 있다. 이 모형은 임진왜란 당시 고바야카와 히데야키(小早川秀秋)를 섬긴 가신이 만든 모형으로, 정확한 제작시기는 알 수 없으나 1714년에 신송원에 기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다케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는데 첫번째는 이른바 이세형(伊勢船型)이며, 두번째는 후다나리형(二成船型)이다. 이세형은 이물(船首)이 우리나라 전통 배처럼 평평한 것(Blunted Stem)이 특징이다. 이세형 아다케의 평평한 이물(船首)을 일본에서는 도다데쯔구리(戶立造), 상조(箱造), 오처표(吾處表) 등 여러가지 명칭으로 부른다. 일본에서도 그 실체를 두고 논란이 많은 니혼마루(日本丸)도 그 이세형 아다케이며, 악명 높은 가토 키요마사(加藤淸正)의 배나, 명량해전에 참전한 하치스카 이에마사(蜂須賀家政)의 배도 이세형 아다케였다고 한다. 신송원 모형도 이세형 아다케이다.
후다나리형은 다른 일본 전통 배와 마찬가지로 이물(船首)이 뾰족한 구조(Pointed Stem)로 되어 있다. 이세형의 상조(箱造)에 대비되는 구조로 상치(箱置)라고 부른다. 후다나리형은 주로 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나 큐수 지역에서 주로 발전된 양식이다. 아래 그림은 후다나리형 아다케이다. 갑판에 가려서 이물(船首)이 평평해 보이지만, 물에 접하는 부분은 뾰족한 구조(Pointed Stem)로 되어 있다. 방패판(楯板) 중에 일부는 경첩이 달린 특수 구조(投垣)로 되어 있어, 밖으로 넘어 뜨리면 다른 배로 건너갈 수 있는 다리 역할을 한다.
아다케의 크기는 편차가 심하므로, 승선 인원을 단정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일본측 기록에는 수천명식 승선하는 아다케가 있었다는 기록도 많다. 일본측 기록에는 판옥선에도 수천명이 탑승한다고 과장하는 경우도 있으므로, 그런 식의 과장된 기록들을 믿기는 어렵다. 일반적인 아다케라면 30명의 조총병을 포함해서 대략 60명 정도의 전투요원이 승선했던 것 같다. 비전투요원인 수부(水夫)는 노(櫓)에 따라 조금식 차이가 있으나, 80개의 노를 가진 후다나리형 아다케라면 수부(水夫)도 80여명 정도가 승선하게 된다. 이 정도 인원이라면 소형 판옥선과 거의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크기도 작은 것은 저판 길이가 43자(尺) 정도부터 큰 것은 93자 정도까지 되는 것도 있었다. 이충무공전서의 거북선 저판 길이는 64.8자이고, 광해군 7년 경의 판옥선 저판 길이가 47.5~70자 정도, 조선 후기의 통영상선(통제영 기함)의 저판 길이가 90자 정도이므로 아다케와 판옥선의 크기는 거의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한국 전통 배와 일본 전통 배는 내부 구조와 목재 결합방식에 상당한 차이점이 있다. 하지만, 이세형 아다케 중에 일부는 우연의 일치로 보기 어려울 정도로 판옥선과 외관상 유사하다는 점은 메우 흥미롭다. 여러 차례 이야기 했듯이 다른 한국 전통 배와 구별되는 판옥선의 가장 큰 특징은 2층 갑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아다케의 경우도 하층 갑판에는 노를 젓는 요원들이 들어가게 되며, 상층갑판에는 전투요원이 탑승하게 된다. 더구나, 이세형 아다케의 경우 이물(船首)의 모양도 한국 전통 배처럼 평면이다. 또한, 후다나리형 아다케는 노 1개를 1명이 운용하는 소노(小櫓)지만, 이세형 아다케의 경우 노 1개를 2명 이상이 운용하는 대노(大櫓)이다. 또한, 세끼부네의 방패는 단순한 대나무 다발에 불과하지만, 아다케의 방패판은 판옥선과 마찬가지로 두터운 참나무로 만들어져 있다. 세끼부네나 고바야의 경우 예외없이 돛대가 1개인 단범(單帆)이지만, 아다케의 경우 돛대가 2개인 쌍범(雙帆)인 경우도 많다. 또한, 키 구조도 동일하다.
이 정도라면 이세형 아다케와 판옥선 사이에 외관상 뚜렷한 차이점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다. 현재로서는 단정적인 결론을 내리기는 어렵지만, 이세형 아다케와 판옥선 중에 어느 한쪽이 모방했을 가능성을 부정하긴 어렵다. 혹은 16세기 중반~16세기말 사이에 상호접촉을 통해 서로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하긴 어렵다. 굳이 판옥선과 이세형 아다케의 차이점을 찾는다면 기본적으로 아다케는 1~3문 정도의 대포 밖에 싣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림 속의 후다나리형 아다케의 경우도 이물(船首)에 단 1개의 대포용 총구(狹間)가 있을 뿐이고, 다른 곳의 총구는 모두 조총(鐵砲)용 총구이다. 조선군은 판옥선을 주력선으로 운용하고, 기타의 배들은 단순 보조전력으로 운용했을 뿐이다. 이에 반해 일본군의 경우 아다케는 지휘관급의 기함으로 운용되었을 뿐이고, 실질적인 주력선은 세키부네였다. 아다케가 판옥선의 크기와 비슷하다고는 하지만, 실제 전장에서 아다케의 숫자는 그렇게 많지 않았던 것이다.
◆ 세키부네
세키부네(關船, 관선)은 일본 전통 배의 전형적인 양식이다. 하야부네(早船)라고 부르기도 한다. 일본에서 흔히 야마토형 군선(大和型 軍船)의 대표적 존재로 간주하고 있다. 1609년 도쿠가와 바쿠후 (德川幕府)에서 제후들의 아다케 소유를 금지했기 때문에, 17세기에는 제후들의 어좌선(御座船)도 아다케 대신 세키부네로 만들게 되었다. 이 때문에 17세기 이후 세키부네의 크기가 조금식 커지게 되었다.
아다케와 마찬가지로 세키부네란 이름의 기원도 불분명하다. 해적에 대비하기 위한 관소(關所)에서 기원했다는 주장이 있는가하면, 반대로 해적이 통행세를 받던 관소(關所)에서 세키부네(關船)이란 이름이 나왔다는 주장도 있다.
세키부네는 뾰족한 선수(Pointed Stem)를 가지고 있으며, 아다케에 비해 장폭비가 더욱 커, 길고 폭이 좁은 날렵한 선체 구조를 가지고 있다. 세키부네의 경우도 기본적으로 노를 젓는 요원들은 하층갑판에 위치하게되고, 전투요원은 상층갑판(矢倉:아구라)에 위치하게 된다. 그러나, 세키부네는 판옥선처럼 하층갑판 위에 같은 크기의 상층갑판을 덮은 구조가 아니라, 높이가 다른 몇개의 상층갑판을 복합적으로 설치해 놓은 구조이다.
세키부네의 크기는 여러가지 종류가 있으나, 임진왜란 당시에는 길이 36~46자(尺), 폭 12~16자 정도였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노(櫓)가 40~50개 정도가 보통이었다. 만약 노가 40개 정도인 세키부네라면 비전투요원인 수부(水夫)가 40명 정도 타게되며, 조총병 20명을 포함해서 대략 30명 정도의 전투요원이 승선하게 된다. 경우에 따라 대포(大筒) 1문 정도를 탑재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대부분의 세키부네에는 대포를 탑재하지 않았다.
위 그림에는 마치 판옥선이나 아다케처럼 세키부네에도 좌우에 참나무 방패판(楯板, 筒壁)이 있는 것처럼 그려 놓았다. 하지만, 이런 구조는 임진왜란 이후의 양식이며, 임진왜란 당시의 세키부네에는 단순히 대나무 다발(竹束)로 된 방패가 있었을 뿐이므로, 그림과 같은 튼튼한 구조는 아니었다. 아래 사진은 신송원에 소장된 세키부네 모형으로, 좌우 방패판이 단순히 대나무 다발 (竹束) 방패임을 잘 보여준다.
◆ 고바야
세키부네의 별명이 하야부네(早船)이므로, 고바야(小早)는 '작은 세키부네'란 뜻이다. 당연히, 일반적으로 세키부네 보다 크기가 작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보통 노가 30개 이하 17세기 이후는 40개 이하이다). 좌우에 방패판이 없는등 방어력이 약한 편이다. 또한, 선수(船首)에 장대(將臺) 형태의 간단한 망루가 있을 뿐, 그외 갑판은 기본적으로 1층으로 되어있다.
노(櫓)가 20개인 임진왜란 당시의 고바야라면, 비전투요원인 수부(水夫)가 대략 20명 정도 타게되고, 전투요원은 8명의 조총병을 포함해서 10명 정도가 탑승한다. 임진왜란 당시의 고바야는 대략 길이가 36자(尺) 미만이었다.
1) 한국의 전통 배(韓船)
◆ 한선의 기본 구조
한국의 전통 배(韓船)는 먼저 두터운 배밑판(저판:低板)을 평탄하고 깔고, 그 옆으로 삼판(외판)을 붙여 올리고, 삼판이 안쪽으로 찌그러들지 않도록 삼판 사이에 가로로 게롱(가룡목:加龍木)을 걸치는 구조로 되어 있다. 그 위에 다시 멍에(가목:駕木)를 올려, 갑판(포판)을 지탱하는 대들보의 구실을 하게한다. 아래 그림은 20세기 초 일본 학자에 의해 조사된 전라남도 진도 지역 어선의 그림이다. 이 어선 그림은 한국 전통 선박의 기본 구조를 잘 보여주는 자료로 인정받고 있다. 판옥선, 거북선, 사신선 등 거의 대부분의 한국 전통 선박들은 이 한선 기본형의 변형에 지나지 않는다. 아래 그림에서 패란 위에 멍에(가목)를 걸치고 갑판을 2층으로 만든 것이 바로 판옥선이고, 그 위에 지붕을 씌운 것이 바로 거북선이다.
◆ 한선의 배 모양(船型)에 있어서의 특징
판옥선과 거북선을 포함한 한국의 전통 배(韓船)들은 대부분 비슷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구조적인 면에서 볼때 한선은 원시적인 특성을 많이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원시적인 특성이 반드시 한선의 약점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한국 해안의 특수한 지리적 조건하에서는 한선의 원시적 특성이 유리하게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배 길이를 폭으로 나눈 값을 장폭비(長幅比: L/B)라고 한다. 배 길이가 길고, 배 폭이 좁을수록 장폭비가 커진다. 반대로 배가 짧고, 넓적할수록 장폭비는 작아진다. 일반적으로 조선 기술이 진보하면서, 장폭비가 커지는게 일반적인 경향이다. 다시말해 고대 선박일수록 장폭비가 작다. 프리깃급 이상의 현대 군함의 경우 장폭비는 10 내외이다. 예를들어 배수량 1200톤급 정도의 현대적인 프리깃함이라면 길이 100m에 폭이 10m 정도이다. 이에 반해 한국 전통 배의 장폭비는 2.64~3.39 정도이다. 장폭비가 3 내외라는 것은 대단히 작은 수치이며, 배 길이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폭이 넓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큰 장폭비는 평면 형태의 이물(船首) 구조, 바닥이 평평한 평저선 선형과 함께 전체적으로 배의 속도를 느리게 만드는 요소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한선(韓船)들은 기본적으로 배의 이물(船首)과 고물(船尾)이 넓고 평평하다. ①은 한국 전통 배의 상면도인데, 세끼부네가 출현하기 전의 일본 전통 배들도 이런 형태였다. ②은 고대~중세의 유럽과 중동 지역 갤리선들의 일반적인 모양이다. ③은 근대 이후 범선에서 부터 현대 군함에 이르기까지의 전 세계의 표준적인 배 모양이며, 일본의 전통 배인 세끼부네도 이런 형태이다. ①처럼 이물이 평면(Blunted Stem)인 한국 전통 선박은 파도를 헤쳐나가는 능력이 별로 좋지 않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서양의 전통 선박이나 현대 선박 보다는 다소 원시적인 형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 전통 선박 처럼 이물이 평평할 경우 제작이 좀 더 간편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배 앞부분을 더 튼튼하게 만들수도 있다는 점은 장점이다.
한선(韓船)은 배 밑바닥이 평평한 평저선(平底船)이다. 현대 군함을 포함한 대부분의 배들은 바닥이 뾰족한 첨저선이다. 서양의 전통선박은 거의 대부분 첨저선이며, 중국의 전통선박 중에도 첨저선이 적지 않다. 일본의 전통선박인 세끼부네는 첨저선에 가까우나, 전형적인 첨저선은 아니며, 평저선에서 첨저선으로 발전해가는 과정상의 절충적인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한국의 전통 선박은 거의 예외없이 평저선이다. 평저선은 첨저선에 비하면 원시적인 구조의 배라고 할 수 있다. 평저선은 선체저항이 커서 속도가 느려지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동일한 배수량일 경우 평저선은 첨저선에 비하여 흘수가 작아진다. 흘수가 작아지면 배가 직진할 수 있는 능력(Dirctional Stability)이 떨어진다. 이런 단점들 때문에 평저선은 연안이나 내륙 하천에서 주로 사용한다.
우리나라에서 이렇게 원시적인 평저선 형태를 고집한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한국의 대표적 전통 선박 전문가인 김재근 교수는 그 그 이유로 세가지를 들고 있다. 첫째는, 바로 한국 해안의 지리적 조건 때문이다. 한국의 남~서해안은 조수 간만의 차가 심한 지역이다. 첨저선 형태의 경우 배 밑바닥이 뾰족하므로 썰물 때 갯벌 위에 좌초할 위험이 크다. 이에 반해 평저선 형태의 경우 썰물 때 갯벌에 안전하게 내려 앉을 수 있다. 둘째로, 바람이나 노에 의존하는 범노선(帆櫓船)의 경우, 대양이 아닌 연안지역에서는 대부분 마찰저항(주로 배에서 물에 잠기는 부분이 물과 마찰하면서 생기는 속력저하)이 문제될뿐, 조파저항(주로 배 앞부분의 파도에 의한 속력저하)은 생각만큼 그렇게 영향이 크지 않다고 한다. 마찰저항에 의한 속력손실은 감안하더라도 조파저항에 의한 속력손실은 그렇게 크지 않으므로, 전체적인 속도에선 그렇게 손해를 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세째로, 흘수가 작은 배는 선회성능이 좋아서 좌우 방향 전환을 쉽게 할 수 있으며, 선회반경도 작다. 결정적으로 한국 해안처럼 좁고 섬이 많은 연안 지역 해전에서는 선회성능은 속도보다도 더 중요할 수 있다는 것이다.
◆ 한선의 목재 결합 방식
우리나라 전통 목조건축에서는 철제 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건물은 짓는 경우가 있다. 한국의 전통 배도 마찬가지이다. 지역이나 시대에 따라 몇몇 예외가 있으나, 대다수의 한국 전통 선박은 철제 못을 사용하지 않고 목제 못만 사용하여 배를 건조한다. 반대로 일본의 전통 배는 철제 못을 사용하여 배를 건조한다.
철제 못과 목제 못은 그 나름의 장단점이 있다. 철제 못을 사용하면, 배를 처음 건조했을때 강도가 강하다. 그러나, 철제 못은 바다 위에서 일정한 시간이 흐르면 부식이 일어나서 강도가 조금씩 떨어진다. 또한, 시간이 흐를수록 철제 못과 나무 사이에 틈이 벌어져서 나무 사이의 결합 강도가 떨어지게 된다. 목제 못을 사용할 경우, 처음 배를 건조했을 때는 철제 못보다 강도가 약하지만, 철제 못에 비해서 부식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또한, 철제 못과는 달리 시간이 경과해도 나무 사이에 틈이 벌어지지 않는다.
서양 목재 배의 외판 결합 방식에는 카벨 이음방식과 클링커 이음방식이 있다. 한국 전통 배의 삼판(외판) 결합 방식은 그 중간방식으로 턱붙이 클링커 이음방식(Rabetted Clinker Joint)이다. 위 한선 기본 구조도에서 볼 수 있듯이 아래 위 삼판을 부분적으로 겹치면서 그 사이로 못을 넣어 고정시키는 것이 턱붙이 클링커 이음방식이다. 전남 완도 앞바다에서 인양된 고려시대(대략 11세기)의 완도선(莞島船)의 외판 결합방식도 턱붙이 클링커 이음방식이다. 중국 전통 배의 경우도 턱붙이 클링커 이음방식을 사용한 예가 적지 않다.
◆ 한선에 사용되는 목재
목조문화재의 재질 분석 전문가인 박상진 교수에 따르면, 한국 전통 선박에 사용되는 목재는 다음과 같다.
한국 전통 배에서 가장 기본적으로 사용되는 목재는 소나무다. 소나무를 비롯한 침엽수는 비중은 약간 낮으나 가볍고 가공하기 쉬우며 상당한 내수성(耐水性)을 갖는다. 이 때문에 배의 외부를 꾸미는데 적합한 재질을 가지고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한국 전통 선박의 배밑판(저판)과 삼판(외판)은 거의 대부분 소나무로 되어 있다. 특히 배밑판(저판)의 경우 물이 스며드는 것을 막기 위해 송진이 많은 소나무를 주로 사용한다.
반대로 참나무류를 비롯한 활엽수는 비중이 높고 가공하기 어려우나 강도가 높다. 이 때문에 게롱(加龍木)이나 멍에(駕木)처럼 배의 구조를 지탱하기 위해 힘을 받는 부분에는 상수리나무나 졸참나무 같은 참나무 계통의 나무를 주로 사용했다. 나무 못으로는 주로 단단하고 잘 썩지 않는 녹나무, 산뽕나무, 느티나무를 주로 사용했다. 즉, 기본적으로 한국 전통선박의 주된 재목은 소나무이며, 강도보강 재료로 참나무 계통(상수리나무, 졸참나무)의 나무를 사용했을 뿐이다.
일반적으로 전형적인 곧은 나무가 아니고 옹이가 있거나 구부러진 나무는 압축응력재 혹은 인장응력재라는 특별한 조직을 만든다. 이런 나무는 부러지기 쉬운 결점을 가지고 있으며, 갑작스러게 부러지는 경우가 많다. 한국의 소나무는 평균적으로 옹이가 많고 굽어있는 경우가 많다. 이런 소나무를 사용하여 배를 만들 경우 얇게 가공하는 것은 위험하며, 뚜껍게 가공하여 강도를 보완할 수 밖에 없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한국 전통 배들은 매우 두꺼운 판자를 사용한다.
일본 전통 선박은 주로 삼나무(衫木)이나 전나무(檜木)로 만들어져 있다. 삼나무나 전나무는 소나무에 비하여 더욱 가볍고 가공하기 쉬운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 때문에 삼나무나 전나무는 판자를 얇고 정밀하게 가공하는 것이 가능하다. 일본 전통 배는 이런 삼나무나 전나무의 특성을 살려서 배에 사용되는 판자가 매우 얇고 정밀한 구조로 만들어져 있다. 그러나, 강도면에서 삼나무나 전나무는 소나무보다 약하다는 약점이 있다. 특히 한국에서 주로 선박 재료로 사용한 소나무 종류인 적송(赤松)은 일본의 선박재료인 삼나무나 전나무에 비해 훨씬 강한 재질을 가지고 있다. 결국 일본 전통 선박은 약한 재료를 얇게 가공한 셈이되는 반면, 한국 전통 선박은 보다 강한 재료를 두껍게 가공한 셈이 된다.
전통 선박 삼판(외판)용 목재
비중 (kg/㎤)
굴곡강도 (kg/㎠)
브리넬 경도
한국 강원도 적송(赤松)
0.548~0.728
526~977
2.20~5.80
일본 삼나무 (杉木)
0.330~0.410
300~750
1.50~2.30
일본 전나무 (檜木)
0.340~0.470
510~850
1.80~3.30
배의 전체적인 튼튼함은 삼판(외판)의 강도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게롱(加龍木) 같은 강도보강 구조의 강도에도 영향을 받는다. 그렇다고해도 전투용 선박의 경우 삼판이 약하다는 것은 그만큼 각종 화약무기의 공격이나 충돌시에 약점으로 작용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선박용 목재의 특성 차이는 임진왜란 당시 해전의 승패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 한국식 노
한국식 노(櫓)는 한국 전통 배의 중요한 특징 중에 하나이다. 흔히 한국식 노라고 하지만, 실제로 한국만의 특유한 노 젓는 방식은 아니며, 중국과 일본에도 흔히 사용하는 방식이다. 중국 학계에서는 이러한 형식의 노가 한(漢)나라 시대에 처음 개발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서양식 노(Oar)가 배의 진향방향과 평행하게 움직인다면, 한국식 노는 배의 진향방향과 90도 각도로 움직인다. 비유하자면 한국식 노의 운동은 물고기 꼬리 지느러미의 움직임과 유사하다.
◆ 한선의 돛
한선의 돛은 대체로 직사각형 모양이며, 돛의 아래 위쪽에 상활대와 질활대를 달고 그 사이에 돛감을 매달았다. 돛감 중간에는 2~3척 간격으로 7~30개의 활대를 궤게 된다. 활대의 끝에는 아디줄(도부줄)을 매단다. 아디줄을 모아 연결한 아디채(도부채)를 가지고 돛을 조작하게 된다.
전투용 배나 국가 소유의 배들은 돛감(범포:帆布)으로 삼베나 면포를 사용했다. 민간용 배들은 돛감으로 부들로 짠 자리를 사용했다. '부들로 짠 자리'가 무엇인지 조금 이해하기 어려울지 모르겠으나, 여름에 가정집에서 사용하는 돛자리와 비슷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한국의 돛은 전체적인 형태상으로 러그 세일형(Lug Sail)이며, 중국식 돛이 약간 간략화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판옥선이나 거북선 같은 큰 배들은 거의 대부분 돛이 2개인 쌍범(雙帆)이다. 쌍범일 경우 앞부분의 돛대를 '이물 돛대'라고 부르고, 뒤쪽의 돛대를 '한판 돛대'라고 부른다. 두 돛대의 크기는 거의 비슷하지만, 대체로 뒤쪽에 있는 한판 돛대가 조금 더 큰 기본 돛대가 된다.
대부분의 한국 전통 배는 돛대를 눕히는 것이 가능하다. 돛대로 사용하는 나무는 강도가 우수한 참나무 계통의 상수리나무, 졸참나무, 조록나무를 쓴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특히 큰 배에는 다오목(多吾木)이라는 특수한 참나무를 쓰기도 했다.
중국이나 한국의 러그 세일형 돛은 역풍이 불때도 항행이 비교적 자유로운 것이 특징이다. 이에 반해 일본 전통 배의 횡범(橫帆)은 역풍이 불때는 항해가 거의 불가능하다. 또한, 일본의 전통 배들은 대부분 돛이 하나인 단범(單帆)이다. (단, 아다케의 경우 돛이 2개인 경우가 많다) 이런 점들은 당시 일본 배의 중요한 약점 중에 하나이다.
◆ 한선의 키
한선에서 사용되는 키(치,타:舵)에는 두가지 종류가 있다. 첫번재 방식은 이물(船尾) 판재에 키 구멍을 뚫는 방식이다. 이 방식은 한국, 중국, 일본의 전통 배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형식이다. 판옥선이나 거북선 같은 조선 수군의 싸움배들도 보통 이런 방식을 쓴다. 이 방식은 위에서만 고정이 되므로, 키의 높이를 상하로 쉽게 조절할 수 있다. 두번째 방식은 이물 판재에 평행하게 타축(舵軸)을 붙이는 방식이다. 이런 방식은 다른 나라의 전통 배에선 거의 발견되지 않는 방식으로 한국 전통 배에만 나타나는 독특한 형식이다. 이 방식은 배 밑바닥 보다 더 깊이 키가 깊숙하게 잠기게 되므로, 키의 효과가 우수하다.
아래 왼쪽 사진은 서울 이촌동의 한강에 정박중인 실물 크기 복원 커북선의 키 손잡이다. 근대 이후의 각종 선박은 원형의 조종타를 가지고 있지만, 한선의 키 손잡이는 단순히 좌우로 꺽는 방식이다. 그림과 사진 속의 키 손잡이는 모두 앞을 향하고 있지만, 뒤쪽 방향으로 키 손잡이가 부착된 경우도 있다. 물론, 뒤쪽 방향으로 키 손잡이가 달린 경우라도 작동방식은 같다. 아래 오른쪽 사진은 국립해양유물전시관에 전시 중인, 조선시대 일본을 왕래하던 사신선의 복원 모형이다. 이 사진 속의 키가 바로 전형적인 동양식 현수타이다.
◆ 한선의 닻
우리나라 전통 배의 닻은 나무로 된 큰 닻이 대부분이다. 한국 전통 배의 주된 연안 항로인 서해안은 넓은 갯벌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갯벌에서는 목제 초대형 닻이라야, 갯벌 속에서 닻이 잘 고정된다고 한다. 아래 사진은 국립해양유물전시관의 한국식 초대형 목제 닻 이다. 이 닻은 우리나라 전통 어선 중에 하나인 '멍텅구리 배'에서 사용하는 닻이다. 배에 따라 닻의 크기는 조금식 다르지만, 우리나라 전통 배의 닻은 대체로 아래 사진과 비슷한 모양이다. 아래 사진의 닻은 닻장도 나무로 만들었지만, 닻장대신 돌로 만든 정석(碇石)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닻을 내리거나 감아올릴 때는 닻줄 물레를 사용한다. 일부 연구가들은 이충무공전서에 그려진 전라좌수영 거북선 그림의 닻이 너무 커서 실제로는 좀 더 작았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한국식 닻을 잘 모르고하는 이야기이다.
2) 판옥선
◆ 판옥선이란 무엇인가?
조선 전기의 기본법전인 경국대전에는 군함을 대맹선,중맹선,소맹선으로 구별하고 있다. 이에 반해 조선 후기의 법전인 대전회통에는 전선, 방선, 병선으로 군함 종류를 구별하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의 조선 수군의 주력 군함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판옥선(板屋船)이다. 임진왜란 당시의 판옥선은 조선 전기의 대맹선과는 전혀 다른 배이며, 대략 조선 후기의 전선(戰船)에 해당한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판옥선, 판옥전선, 전선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웠다.
다른 전통 한국 선박과 구별되는 판옥선만의 특징은 무엇일까? 판옥선의 가장 큰 특징은 판옥선이 조선 전기의 가장 큰 군함인 대맹선보다도 더 큰배라는 점과, 판옥선이 2층 갑판을 가진 배라는 점이다. 갑판이 2층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에, 노를 젓는 요원인 격군(格軍)은 갑판(1층) 위에서 안전하게 노를 저을 수 있으며, 전투요원들은 상갑판(2층) 위에서 적을 내려다보면서 유리하게 전투를 수행할 수 있다. 판옥선도 거북선처럼 갑판 아래에도 선실이 존재했다면 전체적으로는 3층이 되는 셈이다. 이것이 판옥선의 가장 큰 특징이다.
아래 그림은 정조 대에 작성된 각선도본(各船圖本)의 판옥선으로, 판옥선에 관한 가장 기본적인 자료중에 하나로 인정받고 있다.
판옥선이란 이름은 어디에서 유래했을가? 판옥(板屋)은 '판자로 만든 집'이란 뜻이다. 판옥선 이전의 주력 군함인 대맹선은 갑판 위가 평평한 평선형(平船型)인데 비하여, 판옥선은 갑판 위에 다시 갑판(상갑판)이 추가되어 있고, 장대(將臺)도 설치되어 있기 때문에 '판옥선'으로 부르게 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중종 39년에 판중추부사 송흠은 당시 전라도 지역에 침입하는 중국 해적선이 "백여명이 탑승할 수 있을 정도로 매우 크고, 판자를 사용하여 배 위에 집을 만들었으며(以板爲屋), 나무 판자로써 방패를 세웠다(用板爲障)"는 점을 지적하면서, 이와 같은 방식으로 배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보이는 以板爲屋이라는 문구는 판옥선이라는 이름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의 역할은 상당 부분 과장되어 왔다. 거북선이 훌륭한 군함인 것은 틀림 없으나, 거북선이 조선 수군의 주력 군함은 아니었다. 오히려 판옥선이 실제 전력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조선 수군의 주력 군함이었다. 판옥선과 각종 화약무기야말로 이순신의 뛰어난 군사적 자질을 물질적으로 뒷받침한 핵심적인 토대였다.
◆ 판옥선의 개발과정-대함주의자들의 승리
판옥선의 개발과정은 아직 명쾌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대략 중종 말~명종 초에 걸쳐서 판옥선이 개발되었다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명종 10년(1555년) 9월 16일 한강에서 새로 만든 전선(戰船)을 시험했다는 기록이 있다.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이 기록에 보이는 "새로 만든 전선"이 판옥선을 의미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뒤이어 명종 12년의 기록에 판옥선이란 이름이 처음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부 학자들은 '호남동순록'의 기록을 근거로, 이때 판옥선을 개발한 것이 다름아닌 정걸(丁傑) 장군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야사가 아닌 믿을 만한 기록에서 정걸이 판옥선을 개발했다는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다만, 정걸 장군은 1555년에 전라도 도순변사의 군관으로 활약했고, 1556년에는 전라도 남도포 만호로 활약하고 있었으므로, 이 당시 판옥선 개발에 참여했을 가능성은 있다.
명종대에 아무런 전후관계도 없이 갑자기 판옥선이 출현한 것은 아니다. 조선 전기 성종~연산군~중종대에 걸쳐 어떤 배가 가장 해전에 효율적인가에 대해 일종의 전략전술적 논쟁이 존재해왔다. 척수가 적더라도 큰 배를 중시하는 대함주의(大艦主義)와, 작은 배를 사용하더라도 많은 수의 배를 보유해야 한다는 소함주의(小艦主義)가 대립했던 것이다. 특히 삼포왜란과 사량왜변을 경험한 중종대에는 이와 관련된 논쟁이 그치지 않았다.
대함주의 (大艦主義)
소함주의 (小艦主義)
성종 9년 7월16일
광산부원군 김국광, 병조참판 김순명
우참찬 이극증
연산군 3년 8월17일
군기시 첨정 강겸
중종 11년 10월17일
前 병조판서 신용개
병조판서 고형산
중종 16년 5월7일
승지 서후
중종 18년 6월26일
영의정 남곤 외 10여명이 난상토론 (대함주의,소함주의,절충주의)
중종 39년 9월8일
지중추부사 송흠
명종 10년 9월16일
신형 전선 건조
명종 12년
기록상 최초의 판옥선 등장
물론, 이러한 논쟁이 판옥선의 개발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오랜 논쟁이야말로 판옥선이라는 새로운 군함을 탄생하게한 이론적 밑바탕이라고 할 수 있다. 판옥선은 100여년에 걸친 오랜 논쟁 끝에 대함주의자 (大艦主義者)들이 완전하게 승리했음을 보여주는 상징물인 것이다.
◆ 판옥선의 구조
일반적인 전통 한선을 크게 만들어, 갑판을 2층으로 설치한 것이 바로 판옥선이다. 따라서, 2층 갑판구조를 제외한 기본적인 구조는 다른 한선과 같다. 일반적으로 1층 갑판에 노를 젓는 병사(격군,노군)가 탑승하고 2층 갑판에 전투요원(사부, 포수, 화포장)이 탑승한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각종 판옥선 그림 중에 2층 갑판에 대포를 탑재하고 있는 경우는 단 한 차례도 없다. 필자도 사부를 비롯한 전투요원 대다수는 2층 갑판에 탑승했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1층 갑판에도 포수를 비롯한 적지 않은 전투요원이 탑승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충무공전서에 따르면 거북선의 경우 1층 갑판 아래에 다시 24개의 선실이 있다고 한다. 판옥선의 경우 거북선처럼 1층 갑판 아래에 선실을 두었는지, 아니면 1층 갑판에 선실을 두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구조적인 측면에서 현호가 작다는 점도 판옥선의 또다른 특징이다. 현호(舷弧:Sheer)란 쉽게 말해 선체 측면의 휘어진 정도를 의미한다. 판옥선의 경우 선수현호가 거의 없으며, 선미현호도 아주 작다. 판옥선의 경우 현대 선박은 말할 것도 없고, 다른 전통 한국 배와 비교해도 현호가 작은 편이다. 거북선의 경우도 판옥선처럼 선수현호가 작은 편이다. 일반적으로 약간의 현호를 주는 편이 전체적인 배의 성능을 좋게함에도, 판옥선에 현호를 거의 주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이물(선수)에 화포를 쉽게 설치하기 위해 선수현호를 작게 만들었다고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다.
판옥선과 거북선의 이물비우(船首材)는 세로로 결합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다른 한국 전통 배의 이물비우는 가로로 결합되어 있지만, 판옥선의 이물비우는 강도를 강화하기 위해 세로로 결합되어 있다고 한다. 각선도본의 판옥선 그림을 보면 배 이물의 판자가 세로로 결합된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위 판옥선 그림을 보면 판옥선 이물비우(船首材)에는 귀신그림(鬼面)이 그려져 있다. 이것이 단순한 그림인지, 아니면 적선을 파괴하기 위해 배로 충돌할때 사용하는 충각용 돌기(Ram)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많은 학자들이 단정적인 결론을 내리고 있으나, 대부분 단순한 추정에 불과한 것이다.
판옥선의 갑판 가운데에는 장대(將臺)가 위치하고 있다. 장대는 현대 군함의 함교와 유사하게 갑판 위에 높게 만들어진 구조물로 지휘관이 높은 곳에서 지휘할 수도 있도록 만든 시설이다. 판옥선 그림에 그려진 장대의 위치가 그림마다 조금식 차이가 있어서, 장대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각선도본 속의 판옥선은 두 돛대가 모두 눕혀진 상태이다. 다른 한선과 마찬가지로 판옥선의 돛대도 눕힐 수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판옥선에는 돛대 외에 신호용 깃발을 올리는 별도의 깃대(승기죽:昇旗竹)도 세워져 있다. 각선도본의 판옥선 그림에 그려진 키는 마치 허공에 매달린 것처럼 그려놓았으나, 이는 키의 구조를 보여주기 위해 그렇게 그린 것이고, 실제로는 동양식 현수타로 생각되며, 아래 복원 모형에도 동양식 현수타로 만들어져 있다. 각선도본 상의 판옥선에는 상층갑판에 키를 조작하는 키 손잡이(舵柄)가 보이지 않는다.
키 손잡이가 하층갑판(1층)에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으나, 다른 판옥선 그림에는 상층갑판(2층)에 키 손잡이가 설치된 경우도 있다. 각선도본의 판옥선 그림에는 닻을 조작하는 닻줄물레도 보이지 않는다. 닻줄물레가 없었다고 생각할 수 없으므로, 닻줄물레가 단순히 생략된 것이거나, 하층갑판(1층)에 닻줄물레가 존재할 것이다. 상층갑판과 하층갑판을 오르내리는 출입구도 분명하지 않다. 각선도본 상에는 외관상 어떤 출입구도 보이지 않는다. 아래 판옥선 복원 모형에는 장대 1층에 출입구를 만들어 놓았다.
아래 사진은 학계의 기존 연구성과를 토대로 실제로 복원한 판옥선의 모형으로, 국립 해양유물전시관에 전시 중이다.
◆ 판옥선의 크기와 승선인원
한국 전통 배의 경우 배 밑판의 길이를 기준으로 삼을뿐, 다른 규격은 배마다 약간식의 편차가 있다. 특히, 판옥선의 각 부분 치수가 누락없이 완벽하게 기록된 사료는 없다. 임진왜란 당시의 판옥선 크기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은 없지만, 임진왜란 종전 직후인 광해군대 (1608~1623)의 판옥선 배밑판 크기 기록은 남아있다.
이때의 크기는 배밑판(저판,본판)의 길이①를 기준으로 소선이 47.5~50자(尺), 중선이 55자, 대선이 70자이다. 배의 구조상 배밑판 길이는 배 전체 길이보다는 짧다. 이러한 구조를 고려한다면 배밑판 70자의 대선을 기준으로 선체길이②는 대략 80~90자, 전체 배 길이③는 대략 90~110자(약 28~34m) 정도 되었을 것이다. 물론, 파(把) 단위법을 영조척으로 환산하고 이를 다시 미터법으로 환산해서, 현호는 추정수치를 대입했으므로, 28~34m라는 길이는 단순한 참고 수치에 불과한 것이다.
판옥선의 일반적인 구조상 저판 길이 70자 정도라면 배밑판의 넓이⑤는 가장 폭이 넓은 곳을 기준으로 15자(약 4.6m)이며, 선체의 넓이⑥는 26~30자(8~9.2m) 정도로 추정할 수 있다. 1~2층 갑판의 넓이④는 선체 폭에서 노를 꽂을수 있는 여유분을 추가하여 대략 36자(약 11m) 정도가 된다.
각선도본을 보면 최대급 판옥선인 통영상선의 경우 선체 높이⑦는 8자(약 2.5m)이며, 하층신방패고(下層信防牌高)는 5자(尺)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 '하층신방패고'가 정확하게 어디에서 어디까지의 높이를 말하는 것인지는 애매하다. 일부 학자들은 2층 방패판의 높이라고 해석하고 있지만, 단어 자체의 의미는 1층 갑판(하층 갑판 높이)⑧의 높이를 의미하는 것 같다. 조선시대 영조척 1척을 미터법으로 환산하는 기준은 영조척 1자(尺)=30.7cm / 31.195cm / 31.21cm / 31.22cm / 31.24cm / 31.25cm / 31.55cm 등 여러가지 견해가 있다. 가장 길게 계산해도 높이는 157.75cm 가 된다. 구한말을 기준으로 조선인 남성의 평균 신장은 155~162cm 정도이다.
만일, 최대급 판옥선인 통영상선의 1층 갑판 높이를 대략 153.5~157.75cm 내외로 가정한다면, 판옥선이나 2층 구조 거북선의 경우 1층 탑승자(주로 격군,노군)의 키를 제한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현재로서는 단정적인 결론을 내리기는 어려우나, 앞으로 좀 더 정밀한 검토가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사실 이충무공전서에 규정된 통제영 거북선의 경우도 패란과 현란 사이의 높이가 4자3치(약 1.31m)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이 높이라면 직립자세로 서있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의 높이이다. 이 경우에는 현란 자체의 높이가 있으므로 현란의 정확한 높이에 따라 하층(1층) 갑판의 정확한 높이⑧가 결정될 수 있다. 거북선 지붕(개판)의 구조와 기울기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사람들을 무리없이 탑승시키기 위해서는 1층 갑판의 높이는 6자(약 1.84m) 정도는 되어야 할 것이다, 이 경우 현란(신방) 자체의 높이가 1~1.5자 (약 0.3~0.5m) 정도는 되어야 한다.
임진왜란 종전 후의 판옥선 크기와 승선인원에 대해서는 많은 기록이 남아있다. 예를들어 숙종(1674~1720) 시대의 판옥선과 거북선 승선 인원은 다음과 같다. 표에서 통영상선은 수군 통제사 기함이며, 수사 전선은 각 수사의 기함이다.
(선장)
선직
무상
타공
요수
정수
좌우포도장
사부
화포장
포수
노군
계
통영상선
2
2
2
2
2
2
22
14
26
120
194
(수사) 전선
2
2
2
2
2
2
20
12
24
110
178
전선
2
2
2
2
2
2
18
10
24
100
164
통영거북선
2
2
2
2
2
2
14
8
24
100
158
거북선
2
2
2
2
2
2
14
8
24
90
148
임진왜란 당시의 판옥선의 승선인원과 직책명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실록등에 남은 산발적인 기록을 보면 임진왜란 당시의 판옥선의 최소 승원인원은 대략 125명 정도였던 것 같다.
이 125명이라는 수치가 당시의 표준적인 판옥선 승무원수인 것 같지는 않다. 전반적으로 병력 부족에 시달리다보니 어쩔 수 없이, 적게 타는 경우도 있고, 경우에 따라 그보다 많이 승선한 경우도 있었던 것 같다. 아래는 난중일기나 장계등을 참조하여 임진왜란 당시의 판옥선 승선인원과 직책명을 필자가 추정한 것이다.
직책
(선장)
선직
사공 + 무상
도훈도,훈도 도진무,진무
사부 (사군)
방포장
방포
격군
계
인원
1
?
5~8
?
대략 23~40명
56~120
120~188
상기자료는:
임진왜란 한일 수군 함선/ 신재호 Defence Korea 전쟁이론분야 자문위원
수조병풍도水操圖倂風
12폭 병풍에 대소전선 총 548척(거북선 43척, 장졸 36,900명)이 첨자진(尖字鎭)을 펼치고 있는 장엄한 모습이 섬세하게 그려져 있다. 『수조』란 요즘의 해군관함식(海軍觀艦式)과 비슷한 것으로, 이충무공이 처음 시작하였고 제6대 통제사 이경준(李慶濬)이 격식화하여 매년 두 번씩 행해 왔었다. 이 수조도병풍은 통제영 말기, 본영의 파총(把摠, 종4품)으로 봉직하던 정효현 (鄭孝峴, 1848∼1928)이 그린 것으로 충렬사에 소장되어 있다.
1. 충무공의 유물
충무공의 장검 : 이 칼은 선조 27년(1594) 4월에 한산도 진중에서 당시 칼을 만드는
충 무 공 의 칼
대표적인 장인으로 이름난 태귀연과 이무생이 만든 것으로 충무공께서 항상 벽에 걸어두고 보면서 정신을 가다듬으시던 칼이다. 칼 위에는 각각 장군의 친필 검명(劍銘)이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 "三尺誓天 山河動色 一揮掃蕩 血染山河" (삼척서천 산하동색 일휘소탕 혈염산하) 『석자되는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과 물이 떨고 한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강산을 물들인다.』 장검은 크기가197.5cm나 되며 무게 5.3kg 비천성 무늬와 칼을 제작한 장인의 이름이 적혀 있다.
옥로 :
옥 로(玉 鷺)
옥로란 옛날 우리나라에서 높은 벼슬을 하는 사람이나 혹은 명을 받고 외국에 가는 사람이 갓 위에 꽂던 장식품이다. 이 유물은 장군께서 사용하시던 백옥제(白玉制)로써 연화(蓮華)와 해오라기 세 마리를 매우 정교한 솜씨로 투각(透刻)했다. 원형 금 받침대에 얹어 놓은 이 유물은 1962년 12월 20일 보물 제326호로 지정되었다
요대 :
요 대(腰帶)
요대는 관복을 입고 허리에 띠는 것으로 품계에 따라 그 띠 돈 모양 에 차이를 두었다. 이 요대는 명나라 제품이며 띠돈은 모양이 장방형이나 심엽형(心葉形) 으로 그 주위에는 금속으로 둘림을 하였고 호랑이와 서운(瑞雲)등이 매우 정교하게 부조(浮彫)된 것으로 그 길이는 140cm에 너비는 5.5cm이다. 보물 제326호.
도배와 구대:
도배구대(桃盃俱臺)
도배(桃盃) 및 구대(俱臺)는 한쌍의 술잔으로 장군께서 친히 쓰시던 유물이다. 모양이 복숭아와 같아서 도배(桃盃)라고 이름한 것으로 표면에 복숭아 잎 세 잎이 받치고 있어 한층 아름답게 보인다.구대(俱臺)는 좁은 전을 가진 무늬 없는 둥근 쟁반 모양이다.
도 배(桃盃)
이는 모두 동판(銅版)으로 만들어 도금한 것이나 오랜 연륜으로 나무줄기와 잎의 깊은 부분에 만 도금의 흔적이 남아있고 그 외는 모두 구리 빛의 아름다움만을 간직 하고 있다. 이 도배는 장군의 친필 난중일기 무술년 초고(10월초 4일)에 진파총으로 부터 화주배 일대(花酒盃 一對)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진국경 (陣國敬)으로부터 선물로 받은 것임을 알 수 있게 한다. 이 유물도 1962년 12월 20일 보물 제326호로 지정되었다.
2. 명조 팔사품(明朝八賜品)
명조팔사품 일부
임진왜란 당시 같은 진영에서 함께 지내던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이 충무공의 탁월한 지휘능력과 빛나는 진공을 명(明)나라 황제에게 보고하자, 명 황제인 신종은 충무공에게 당시의 8가지 군사장비를 선물로 보냈다. 진품은 통영 충렬사에 보존되어 있으며 1966년 2월 4일 보물 제440호 로 지정 되었는데 팔사품이란 1.도독인 2.영패 3.귀도 4.곡나팔 5.참도 6.남소령기 7.홍소령기 8.독진기 등으로 모두 8개의 선물을 말한다.
① 도독인(都督印) : 당시의 명나라의 수군 도독(요즘의 사령관)이 사용하던 구리로 만든 관방인(關防印:도장)으로 이는 충무공을 명나라 해군 사령관급으로 인정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을 것이다.
도독인과 도장함
당시 명나라는 동양권에 있어서 일종의 세계국가로 우리나라나 다른 주변국가들이 모두 명나라의 지방 봉건국에 해당 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 문화권 아래에 속해 있는 우리나라는 한 국가로서 독립적이지만 형식적으로는 명나라 황제의 신민이었기 때문에 조선이 세워질때에도 명나라의 책봉을 받는등의 일이 있었다. 실제로 임진왜란을 일으킨 토요토미히데요시에게도 휴전의 조건으로 그를 일본왕에 봉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는 점과 일본이 개전초 명나라에 조공하는 길을 열어주지 않은 불만을 선전포고에 넣은 것도 이런 문화 때문이다.(그는 이미 자신의 실력으로 일본의 지배자가 된 사람인데도 말이다)
② 영패(令牌) : 나무로 만든 것으로 옛날 장군이 명령을 내릴 때 어깨에 매거나, 죄인을 잡아올 때 이 영패를 보냈다고 한다.
영 패
③ 귀도(鬼刀) : 호신용으로 사용하던 칼로써 손잡이가 귀신모양 같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귀 도
④ 곡나팔(曲喇叭) : 전쟁에서 갖가지 신호용으로 사용하던 굽은 나팔이다.
신호용 곡나팔
⑤ 참도(斬刀) : 무거운 죄를 지은 사람 들의 목을 칠 때 사용하던 칼이다.
죄를 벌하는 참도
⑥ 남소령기(藍小令旗): 남색 바탕에 붉은 비단으로 영(令)자를 오려 붙였는데, 이는 무관에게 영을 내리는 신호기이다.
⑦ 홍소령기(紅小令旗): 붉은 바탕에 남색비단으로 영(令)자를 오려 붙였는데, 이는문관에게 영을 내리는 신호기이다.
⑧ 독전기(督戰旗): 전쟁터에서 전투를 독려하기 위해 지휘관이 사용하는 것이다. 붉은 바탕에 남색 비단으로 督戰이라 오려 붙였고 중앙에는 범군임적불용명자처 참(凡軍臨敵不用命者處斬) 이라고 씌여져 있다 : 모든 군사는 적을 대함에 명을 어기면 참한다라는 뜻인듯 하다 (혹시 잘못 번역했다면 연락을...)
3. 기타유물 : 각종 교지(敎旨)와 사부유서(賜符諭書)
무과급제교지(武科及第) : 선조(宣祖) 9년(1576) 3월 충무공에서 32세 때 무과시험에서 병과(丙科)에 제4인자로 합격하였을 때 받은 과거급제 증서이다.
증시교지(贈諡敎旨) : 이순신 장군께서 선조31년(1598) 11월 19일 경상남도 남해군 관음포 해상에서 장렬히 전사 하신지 45년 후인 인조(仁祖) 21년(1643) 3월 28일에 생전의 공덕을 기리기 위하여 "충무공"이라는 시호를 내린 교지이다. 이때부터 ☞ 이순신 장군은 충무공으로 불러지고 있다.
사부유서(賜符諭書) : 선조(宣祖) 임금께서 삼도수군통제사인 충무공에게 하명한 업무수행에 따른 유서(諭書)이다. 위 : 선조 24년(1591) 2월 15일 전라좌수사 재임 시 받은 것이다. 아래 : 선조 27년(1594) 7월 14일 삼도수군통제사 때에 받은 것이다.
4. 난중일기(亂中日記)
난중일기(亂中日記)는 충무공(1545~1598)께서 임진왜란때 7년동안 싸움터에서 직접 쓰신 진중일기 로써 공의 성품이나 국정에 대한 솔직한 심정,군사에 대한 비밀계책,친지 부하나 내외 요인들과 내왕한 내용,부하들에 대한 상벌등이 상세히 묘사되어 있어 임진란 당시 정치. 군사에 관한 전체사를 연구함에 있어서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 난중일기는 연도별로 7권으로 나누며 임진란이 일어난 다음달에서 시작되어 중간이 약간 끊어진 데가 있으나 공이 순국한 전달까지의 기록으로 다음과 같이 보존되어 오고 있다
임진일기(壬辰日記) : 선조 25년(1592) 5월1일부터 동와 26년 3월까지 27매 계사일기(癸巳日記) : 선조 26년(1593) 5월1일부터 9월15일 까지 30매 갑오일기(甲午日記) : 선조 27년(1594) 1월1일부터 7월28일 까지 52매 병신일기(丙申日記) : 선조 29년(1596) 1월1일부터 10월11일까지 41매 정유일기(丁酉日記) : 선조 30년(1597) 4월1일부터 10월8일 까지 27매 정유일기(丁酉日記) : 선조 30년(1597) 8월4일부터 31년(1598)1월4일 20매 무술일기(戊戌日記) : 선조 31년(1598) 9월15일부터 10월 7일 까지 8매 원래 이 일기의 이름은 본시 적혀 있지 않던 것을 정조때 이충무공 전서를 편찬 하면서 편의상 난중일기라고 한데서 지금까지 난중일기라고 전해지고 있다
충무공 이순신께서 진중에서 6년 9개월간에 걸쳐 붓으로 쓴 초서체의 일기본이다. 읽기가 어려워 정조때의 해서체로 쓰여진것을 날짜별로 비교 번역한 것이다.
사진 : 명랑 해전도
우리배의 역사 (김재근, 서울대 출판부)
한국의 배 (이원식, 대원사)
거북선의 신화 (김재근, 정우사)
삼가 적을 무찌른 일로 아뢰나이다 (정광수, 정신세계사)
집요한 `역사공정` [중앙일보]
이젠 한반도 문화 뿌리까지
중국이 한반도와 만주 문화의 뿌리로 알려진 랴오허(遼河) 일대의 북방 신석기 문화를 자국 문명권에 편입하려는 노력을 가속하고 있다. 선사(先史)시대 중국문명의 판도를 기존 학계가 주장해온 황허(黃河)와 창장(長江) 유역에서 여타 지역으로 확대하려는 이른바 '중화문명 탐원공정(探源工程)'에 따른 것이다.
17일 중국 언론에 따르면 국가문물국은 랴오닝(遼寧)성 뉴허량(牛河梁) 신석기 유적 등 35개를 세계유산위원회에 등재 신청할 중국의 세계문화유산 예비 목록에 포함했다.
국가문물국은 적어도 10년에 한 번씩 세계문화유산 등재 신청 예비 목록을 수정해 제출하도록 한 '세계문화.자연유산 보호협약'에 따라 1996년에 이어 이번에 목록을 수정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뉴허량 유적을 랴오허 유역에 분포한 북방 신석기 문화의 대표적 유적의 하나로 분류해 왔다. 랴오허 일대 문화는 한반도와 만주 문화의 원류를 형성한 것으로 평가돼 왔다.
이번 조치에 대해 전문가들은 "고조선.부여.고구려.발해 등을 중국사에 편입하기 위해 이들 문화의 원류인 랴오허 일대의 북방 문화를 중국 문명권에 편입할 의도"로 파악하고 있다.
중국 사학계는 황허와 창장 유역을 중국문명권으로 분류하고 랴오허 일대는 중국문명과 뿌리가 다른 북방문명으로 파악해 왔다. 그러나 중국 정부가 올해 선양(瀋陽) 박물관에서 '랴오허 문명전'을 여는 등 일련의 역사 왜곡을 진행하면서 북방문명을 중화문명권에 편입하려 한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한편 새로 작성한 예비 목록에는 뉴허량 유적 외에도 ▶대운하(大運河)▶실크로드▶장경동(藏經洞) 등이 포함됐다. 그러나 헤이룽장(黑龍江)성 닝안(寧安)시 보하이(渤海)진에 있는 옛 발해의 수도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 유적은 복원작업이 진행 중이라는 이유로 목록에서 빠져 당분간 신청이 어려울 전망이다. 예비 목록에 오른 유산 중에서 2008년 32차 세계유산위원회 총회에 등재 신청할 유산이 최종 선정된다.
장세정 기자
◆ 뉴허량 유적=랴오닝성 링위안(凌源)시 젠핑(建平)현 근교에서 1981년에 발굴된 신석기 유적. 북방 신석기 문명(기원전 7000년)의 하나인 훙산(紅山)문화에 속하는 유적으로 황허 유역의 중원 신석기 문명보다 일찍 발생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랴오허강 일대에 기원전 3500년 무렵에 형성됐다. 섬세한 옥기(玉器)와 돌무지무덤(적석총) 등이 발견됐다. 특히 흙으로 빚은 여신의 두상(頭像)은 전형적인 몽골 계통의 피부색을 하고 있어 중원문명과 확연히 구별된다.
◆ 탐원공정=상고사를 고쳐 써서 선사시대 중국문명의 판도를 확대할 목적으로 중국 당국이 벌이고 있는 사업이다. 랴오허 일대에서 황허문명(기원전 3000년)보다 더 일찍 발생한 신석기 유적이 발굴되자 중국 당국이 이를 자국 역사에 편입하기 위해 2003년부터 해온 사업이다. 랴오허 일대를 편입하면 중국문명이 기원전 1만 년까지 올라간다. 현재의 정치 사정에 맞춰 역사 왜곡을 시도하려 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중국 내몽골자치구 적봉시 동북쪽에 紅山(홍산)이라는 산이 있다. 몽골사람들이 ‘우란하따(烏蘭哈達)’라고 부르는 이 붉은 바위산 인근에서 학계를 놀라게 한 거대한 제단(壇)과 신전(廟)`적석총(塚) 등 거대한 후기 신석기 문화가 발견됐다. 100여년 전의 일이다. 중국 요녕성과 내몽골, 하북성 경계의 燕山(연산) 남북, 만리장성 일대에 널리 분포된, 국가 체제를 완벽하게 갖춘 이 유적을 ‘홍산문화’라고 부른다.
◇홍산문화를 세상에 처음 알린 사람은 일본 고고학자 도리이 류조(鳥居龍藏)였다. 1906년 적봉 일대 지표조사를 하던 중 많은 신석기 유적과 적석묘 등을 발견했는데 동북지방과 만주, 한반도 일대에서만 발견되는 무덤 형태다. 1955년 이를 ‘홍산문화’로 이름 붙였는데 이후 1982년 요녕성 뉴허량(牛河梁)에서도 같은 유적이 대거 발굴되자 세계 각국 언론들은 ‘5천 년 전 신비의 왕국’이라며 대서특필했다. 이 일대는 현재 발굴작업이 계속되고 있으나 중국의 방해로 연구가 제대로 진행되지 못 하고 있다.
◇황하문명보다 앞선 서기전 4천500년~2500년경으로 추정되는 홍산문화는 통상 청동기 시대에나 출현 가능한 분업화가 이뤄진 국가형태를 띠고 있다. 특히 가면과 玉(옥) 장식 등에 곰 형상이 투영된 유물이 대거 발견돼 국내 학자들은 곰 토템을 지닌 웅족과 청동기 시대의 고조선 초기(고조선 중기 이후는 철기시대) 이전 한민족 원류 중 하나인 신석기 시대의 배달국 초기(한웅배달국 후기는 청동기시대)가 자리했던 곳이라고 주장한다. 즉 홍산문화는 단군조선 건국의 토대일 가능성이 높은 유적이라는 말이다.
◇2006년에 중국이 뉴허량 유적 등 35개를 중국의 세계문화유산 예비목록에 포함시켰다고 한다. 遼河(요하) 일대의 북방 신석기 문화를 중국 문명권에 편입하려는 중국의 探源工程(탐원공정)이 더욱 가속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에 국내 학자들은 “고조선과 부여`고구려`발해 등을 중국사에 편입하기 위해 요하 일대의 홍산문화를 중국문명권에 편입할 의도”라고 비난하고 있다.
◇30년 전 중화문명의 시발점을 앙소문화에서 하모도문화로 바꿔 재설정한 중국은 뉴허량 유적 발견 이후 홍산문화를 ‘요하문명’이라 부르며 중화 3대 문명의 시발점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漢族(한족)의 것과 엄연히 다른 동이족 문화인데도 과거 일제가 한 것처럼 한민족의 뿌리마저 잘라버리려는 역사왜곡 행위를 서슴지 않고 있다.
이런 의문을 가진 학자가 있었다. 중국 란저우(蘭州)대 생명과학학원의 셰샤오둥(謝小東) 교수. 회족(回族)인 그는 한족(漢族)과 서북지역 소수민족의 유전자(DNA)를 몇 년에 걸쳐 조사했다. 중국 서북지역 소수민족의 기원과 이동 경위를 파악하기 위한 연구였다.
조사 결과 세계에서 인구가 가장 많다는 한족은 실제로 1개의 민족이 아니었다. 한족이라고 부를 만한 순수한 혈통이 존재하지도 않았다.
중국 언론은 13일 셰 교수의 연구 결과를 자세히 보도했다.
셰 교수는 “오래 전부터 한족은 중원(中原)에 살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지만 이는 어느 한 시기에 한족을 주변 국가 또는 민족과 구별하기 위해 지역적으로 획정한 것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일반적으로 ‘염제와 황제의 자손(炎黃子孫)’으로 생각돼 온 한족이지만 연구 결과 염제와 황제의 발원지는 중원이 아닌 ‘북적(北狄·북쪽 오랑캐)’지역으로 드러났다는 점이다.
황제(黃帝)의 발원지는 현재의 간쑤(甘肅) 성 친양(沁陽)에서 톈수이(天水)에 이르는 지역이고 염제(炎帝)의 발원지는 간쑤 성 동부에서 산시(陝西) 성 서부에 걸쳐 있는 황토고원으로 이들 지역은 원래 ‘북적’ 지역이었다.
중국 역사에 나타나는 중원의 범위는 산시(山西) 성 남부와 장쑤(江蘇) 성 서부 및 안후이(安徽) 성 서북부를 포함한 허난(河南) 성 일대. 따라서 이 지역에 사는 사람이 바로 중원 사람이라고 생각돼 왔지만 이 역시 사실과 다른 것으로 나타났다. 셰 교수는 “연구 결과 현재 소수민족이 된 객가족(客家族)이 오히려 고대 중원인의 문화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드러났다”며 “순수한 한족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오랜 기간에 걸쳐 주변의 소수민족이나 주변 국가가 한족과 융합한 결과”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셰 교수의 연구결과에 중국의 일부 누리꾼은 셰 교수가 한족의 ‘동포감정’을 훼손했다며 사죄할 것을 요구했다.
한족의 비율은 중국 대륙이 92%, 대만이 98%, 홍콩과 마카오가 각각 95%와 97%이다.
중국을 여행해 본 사람이면 누구나 중국의 남쪽과 북쪽 사람의 생김새가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문외한이 보더라도 광둥(廣東) 지방 사람과 베이징 사람과는 겉모양이 뚜렷이 구분된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자신들을 같은 한족(漢族)이라며, 한족과 닮지 않았다는 말에 상당한 불쾌감을 표하곤 한다. 그러나 최근 중국에서는 이들을 몹시 불쾌하게 할 만한 발표가 있었다. 54개 소수민족으로 이루어진 다민족 국가임에도 13억 인구의 92%가 한족이라는 중국 정부의 공식 인구 통계를 부정하는 연구결과를 발표했기 때문. 거대 순수 혈통으로 인정받던 중국 한족이 단일한 민족이 아니라는 이번 연구 결과는 중국 사회를 뒤흔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번 발표가 중국 한족에게 더욱 충격적인 것은 중국 한족의 ‘순수혈통론’에 반기를 들고 나선 주체가 바로 중국 국영 연구소라는 점이었다. 중국 과학원 소속 유전연구소 인류유전자연구센터가 지난 5월 26일 15년 동안 진행한 중국인의 성씨와 유전자 관계에 대한 분석을 토대로 한족이 단일한 민족이 아니라고 전격 선언하고 나선 것. 분석자료를 통해 연구팀이 내린 결론은 중국 남부 지역인 푸젠성(福建省)과 장시성(江西省)에 걸쳐 있는 우이산(武夷山)과 난링산맥(南嶺山脈)을 경계로 남쪽과 북쪽에 거주하는 ‘한족’이 혈연상으로 확연하게 구분된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연구팀은 두 개의 ‘한족’이 한족과 소수 민족 간 유전적 차이보다 더욱 큰 차이점을 보였다고 발표해 파장을 더했다.
난링 산맥 경계 두 개의 ‘별개 집단’
이 연구팀의 한 관계자는 “한족이 통치하던 송나라와 명나라 시기,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등 모두 세 차례의 인구조사 내용을 분석하고 500여 편에 이르는 고문헌과 족보를 참조했다”며 “동시에 수백만 명의 중국인 혈액을 검사해 분석한 결과 이와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고 주장한다.
유전학자들의 이런 연구 결과는 일부 소장 역사학자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더욱 힘을 얻고 있다. 중국의 역사는 황허(黃河) 유역 한족세력의 남방 침략과 정복의 역사였고, 이 과정에서 남방의 토착민이 자신의 출신을 속이고 한족 행세를 하면서 이같은 결과가 빚어졌다는 게 학자들의 주장이다. 북경의 한 역사학자는 “한족만이 중국 사회에서 정치적 파워를 가질 수 있는 상황에서 토착민들이 우월한 중화문화권에 편입하기 위해 한족임을 자처했다”며 “중앙 정부도 소수민족 복속정책의 일환으로 그것을 묵인하고 장려해 왔다”고 말했다. 한편 이들 ‘가짜 한족’ 외에도 한족과 소수민족 간의 결혼으로 인해 태어난 후손 중 절대 다수가 소수민족을 포기하고 사회생활에 유리한 한족을 택한 것도 한족 양산의 주요인으로 꼽힌다. 현재 중국에서 부모의 출신 민족이 서로 다르면 자녀에게 선택 권한이 주어지지만, 소수민족을 택하는 자녀는 거의 없는 실정. 바로 이와 같은 상황이 수천 년 동안 이어져 온 것이다.
결국 한족은 ‘가짜 한족’에 대한 묵인과 ‘민족 선택제’라는 소수민족 통치 기술로 그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이는 거꾸로 지배민족으로서 한족의 위치를 수천 년 동안 보전하는 힘이 되었다. 역사학자들은 소수민족을 한족의 수로 압도하려는 중국 정부의 ‘인해전술식’ 인구정책의 결과물이 바로 92%라는 통계수치라고 비웃는다.
어쨌든 ‘중화주의’라는 민족적 개념을 통치 이념의 전면에 내세우는 중국 당국에게 ‘한족이 사실상 두 개의 별개 집단’이라는 사실은 커다란 부담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인지 인류유전자연구센터의 이번 발표는 국영 연구소의 발표임에도 중국 언론매체에 거의 소개하지 않고 있다. 한족의 이익이 중국 전체의 이익을 대변하였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단면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여러 ‘고기(古記)’ 등을 인용하고 있어 우리나라 고대국가에 관한 적지 않은 역사서적들이 존재했음을 말해준다. 특히 ‘세종실록(世宗實錄)’에는 ‘고조선비사(古朝鮮秘詞)’ ‘조대기(朝代記)’ ‘삼성밀기(三聖密記)’ ‘삼성기(三聖記)’ 등과 같은 한국의 고대사와 관련한 여러 책들이 거명되고 있어,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삼국사기’ ‘삼국유사’ 이외에 우리 상고사를 밝혀줄 기록들이 남아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임진왜란,병자호란과 같은 병란을 거치고 또 일제 36년 강점기를 경유하면서 이런 귀중한 자료들이 말살되고 인멸되어 오늘에 전하는 것은 거의 찾아보기가 힘들다.
동이는 고조선의 열쇠
이처럼 우리 상고사를 밝혀줄 문헌 자료가 극히 제한적인 현실에서 ‘삼국사기’ ‘삼국유사’ 같은 국내자료만으로 고조선 역사를 위시한 고대사를 연구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 오늘날 잃어버린 상고사를 체계적으로 연구하기 위해서는 국내에 남아있는 일부 문헌에 국한하지 않고 국내외 사료(史料)를 광범위하게 조사?연구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런데 우리 학계는 그 동안 자료가 없다는 핑계로 고조선을 찾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필자는 우리 역사의 뿌리요 또 반만년 역사에서 절반을 차지하는 고조선 역사의 복원이야말로 이 시대의 시대적 과제임을 통감하고 먼저 고조선 연구를 문헌적으로 뒷받침 할 수 있는 자료들을 국내외에서 널리 발굴, 조사, 수집, 정리하여 7권의 책을 펴낸 바 있다(‘조선세기’ ‘조선왕조실록 중의 단군사료’ ‘사고전서 중 단군사료’ 등).
이번에 다시 ‘사고전서(四庫全書)’ 경부(經部),사부(史部),자부(子部),집부(集部) 중에서 동이사료(東夷史料)를 발췌하여 ‘사고전서 경부중의 동이사료’ 등 4 권의 책으로 묶고 여기에 주요 내용을 간추린 ‘사고전서중의 동이사료 해제’ 1권을 덧붙여 2500쪽에 달하는 총 5권의 책으로 묶어 냈다. 앞으로 ‘사고전서’ 중에서 치우, 고조선, 복희 부분을 따로 책으로 펴낼 예정이다.
‘사고전서’에서 이처럼 방대한 동이 사료를 발췌하여 편찬한 것은 고조선은 고대 동이가 세운 대표적 국가로 동이를 추적하면 고조선의 실체를 복원하는 일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사고전서’는 청(淸)나라 건륭(乾隆) 때 연간 1000여명의 학자를 동원, 10년에 걸쳐 국력을 기울여 편찬한 동양 최대 총서(叢書)로 무려 7만9000여권에 달한다.
선진(先秦)시대부터 청나라에 이르기까지 역대 중국의 주요 문헌들을 거의 다 망라하고 있는 이 책은 그 사료적 가치를 국내외가 인정하는 동양의 대표적인 고전 총서다. ‘사고전서’ 중 동이 사료 안에는 한국역사?동양역사의 물꼬를 바꿀 수 있는 그야말로 새로운 발견에 해당하는 귀중한 자료들로 가득 차 있다. 이제 우리 사학계가 이 자료들을 충분히 활용한다면 고조선사 복원의 길이 열리는 것은 물론, 단절된 부여?고구려?백제?신라의 뿌리를 찾는 일도 그리 어렵지 않으리라 기대된다. 그러면 아래에서 ‘사고전서’ 동이사료 중에서 동이와 고조선의 실체를 밝혀준 새로운 내용 몇 가지를 골라 설명해 보기로 한다.
동이의 터전이었던 중국
동양 문헌에서 동이라는 말이 최초로 등장하는 것은 ‘서경(書經)’ 주서(周書) 주관편(周官篇)으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성왕(成王)이 동이를 정벌(征伐)하자 숙신(肅愼)이 와서 하례했다.(成王旣伐東夷, 肅愼來賀)”
성왕은 중국의 서방세력이 동방의 은(殷)나라를 멸망시킨 뒤 세운 서주(西周)의 제2대 왕으로 주무왕(周武王)의 아들이다. 여기서 우리는 서주세력이 집권하면서부터 동방의 이민족(夷民族)을 서주세력과 구분하여 동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이것이 동이라는 용어가 출현하게 된 배경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중국은 서주가 지배하기 이전에 이족이 먼저 지배했고, 따라서 서주의 건국은 동서남북 사방에 퍼져있는 이족의 거센 반발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최후까지도 서주에 저항한 것이 바로 동이족이었다.
그렇다면 서주세력이 동이라는 호칭을 쓰기 이전에 동방민족의 본래 호칭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그냥 ‘이(夷)’였다. 예컨대 ‘서경’에 등장하는 우이(嵎夷),회이(淮夷),도이(島夷),내이(萊夷)등이 그것이다. 이자(夷字) 앞에 지역명칭을 덧붙여 회하(淮河) 부근에 살면 회이(淮夷), 내산(萊山) 밑에 살면 내이(萊夷)라 불렀던 것이다. 그리고 이(夷)에서 더 거슬러 올라가면 여(黎) 즉 구려(九黎)가 이(夷)의 원형이었다고 본다.
그러면 이러한 이족(夷族)들은 언제부터 중국에 살게 됐을까. ‘사고전서’ 경부 ‘모시계고편(毛詩稽古編)’ 16권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 ‘서경’의 우공편(禹貢篇)을 살펴보면 회이,우이,도이,내이,서융(西戎)이 다 구주(九州)의 경내(境內)에 살고 있었다. 이것은 시기적으로 우(虞),하(夏)시대로서 중국 안에 융적(戎狄)이 존재한 것이 그 유래가 멀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그리고 이 자료는 이어서 이들 이적(夷狄)들은 사실 멀리 당(唐),우(虞)시대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개벽(開闢)이래로부터 중국 땅에 살고 있던 존재임을 밝히고 있다.
또 이들은 어느 국한된 지역이 아닌 전 중국에 걸쳐 사방에 골고루 분포되어 살았으나 나중에 화하족(華夏族)이 중국의 집권세력으로 등장하면서 동방에 사는 이(夷)를 동이, 서방에 사는 이를 서융, 남방에 사는 이를 남만, 북방에 사는 이를 북적이라 폄하하여 불렀던 것이다. 실제 삼대(三代)시대 특히 주(周)시대의 순수한 중국이란 9주(九州) 중 연주(兗州), 예주(豫州) 즉 오늘의 하동성과 하남성 정도가 고작이고 나머지는 순수한 중국인이 아닌 동이족들이 함께 사는 땅이었다는 이야기다.
동이가 중국의 토착민족이냐 아니면 외부의 침략세력이냐에 대해 고대 학자들 사이에 두 가지 견해가 존재했다. 하나는 동이족이 삼대(三代) 이전부터 중국에 토착민으로 살고 있었는데 진시황(秦始皇)이 이들을 축출했다는 것으로 한나라 때 학자 공안국(孔安國)이 대표적인 토착론자다. 다른 하나는 은(殷)나라 주왕(紂王) 때 융적(戎狄)이 중국에 침략해 들어와 살게 되었다는 것으로 왕숙(王肅)이 주장한 학설이다.
이 두 견해 가운데서 ‘모시계고편’의 저자는 공안국의 견해를 지지했다. 그가 왕숙보다 공안국의 견해를 지지한 이유는, 공안국이 시기적으로 진(秦)나라와 100년이 넘지 않은 가까운 시기에 살았던 사람으로서 그가 전해들은 내용이 비교적 정확하리라는 것이 그가 내세운 이유였다. 위의 기록으로 볼 때 동이족은 본래 중국의 변방세력도 아니고, 침략세력은 더더욱 아니었으며 개벽 이래로부터 줄곧 중국 땅에 터전을 이루고 살아온 토착인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오랑캐가 아니라 동방의 뿌리
‘사고전서-사부’ ‘후한서(後漢書)’ 115권에는 “동방을 이(夷)라고 한다(東方曰夷)”는 ‘예기(禮記)’ 왕제편(王制篇)의 내용을 인용하고 나서 이(夷)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이(夷)란 것은 저(柢)이다(夷者柢也).”
여기서 이(夷)를 저(柢)와 동일한 의미로 풀이했는데 그렇다면 저(柢)란 과연 무엇인가. 저(柢)란 ‘노자(老子)’의 ‘심근고저(深根固柢)’란 말에서 보듯이 일반적으로 근저(根柢),근본(根本),근기(根基),기초(基礎) 등의 의미 즉 뿌리라는 뜻으로 쓰인다. 그래서 ‘후한서’는 저(柢)의 의미를 다시 저지(柢地) 즉 “모든 만물이 땅에 뿌리를 박고 태어나는 것(萬物柢地而出)”이라고 설명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은 땅에 뿌리를 두고 있다. 땅에 그 뿌리를 두고서 움트고 자라고 꽃피고 열매 맺는 근(根),묘(苗),화(花),실(實)의 과정을 겪게 된다. 그런데 이 만물이 땅에 뿌리를 두고 생장하는 만물저지(萬物柢地)의 저(柢)와 동이의 이(夷)를 같은 개념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시사한다.
저(柢)와 이(夷)를 동일한 개념으로 본 이 고대 중국의 해석에서 동이의 이(夷)는 우리가 그 동안 알아 왔던 오랑캐 이(夷)가 아니라 뿌리 이자, 즉 동방의 뿌리라는 의미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숭고한 뜻을 지닌 동이의 이(夷)자가 어째서 오랑캐 이자로 변질했는지, 우리 스스로 비하하여 오랑캐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 이유는 또 무엇인지 안타까울 따름이다.
‘사고전서’에는,
“맹자가 추나라 사람으로, 추나라는 춘추시대에 주나라였고, 주나라는 동이국가”라고 기록돼 있다
강태공,맹자,묵자도 동이족
‘사고전서-자부’ ‘유림(喩林)’ 27권에는 “대우(大禹)가 동이에서 태어났다(大禹生於東夷)”라는 기록이 나온다. 그리고 ‘태평어람(太平御覽)’ 780권에는 “기(杞)나라는 하(夏)의 후예국인데 동이로 되었다(杞夏餘也 而卽東夷)”라는 기록이 나온다. 기나라가 하의 후예라고 하는 것은 공자도 언급한 사실로, 그 내용이 ‘논어’에 보이는데 이런 기록들은 하우(夏禹)가 동이족이었을 가능성을 강하게 뒷받침 해준다.
‘사고전서-자부’ ‘여씨춘추(呂氏春秋)’ 14권에는 “태공망(太公望)은 동이지사(東夷之士)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강태공(姜太公)은 문왕(文王)을 도와 은(殷)을 멸망시키고 서주(西周)왕조를 건립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런데 그가 원래 동이지인(東夷之人)이었던 사실이 여기서 증명되고 있다.
‘사고전서-자부’ ‘명현씨족언행유편(名賢氏族言行類編)’ 52권에는 “전국(戰國)시대 송(宋)나라 사람으로 ‘묵자(墨子)’의 저자인 묵적(墨翟)이 본래 고죽군(孤竹君)의 후예라”는 내용이 나온다. 고죽국(孤竹國)은 은(殷)나라의 현자인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살던 나라로 동이 국가였으며, ‘삼국유사’ 고조선조에는 “고구려가 본래는 고죽국이었다(高麗本孤竹國)”라는 기록이 보인다. 여기서 우리는 겸상애(兼相愛),교상이(交相利)를 제창한 위대한 사상가 묵자 또한 동이족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사고전서-경부’ ‘사서석지(四書釋地)’3, 속(續)권 하에는 “맹자(孟子)는 추(鄒)나라 사람인데 추나라는 춘추(春秋)시대에 주(?)나라였고 주나라는 본래 동이국가였으니 그렇다면 맹자 또한 동이사람이 아니겠는가”라는 내용도 나온다. 주는 노(魯)나라 부근에 있던 동이 국가로 공자가 쓴 ‘춘추(春秋)’에 그 이름이 자주 등장한다. 그런데 맹자가 본래 이 주나라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송대(宋代) 4대사서(四大史書) 중 하나인 ‘태평환우기(太平?宇記)’에 “요(堯)는 북적지인(北狄之人)”라 하였고 “순(舜)은 동이지인(東夷之人)”이라고 맹자가 말했다. 공자는 은(殷)의 후예인데 탕왕(湯王)에 의해 건립된 은은 동이의 선민(先民)이 세운 나라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이들뿐 아니라 하우(夏禹)?강태공?묵자?맹자까지도 모두 동이출신이었다고 한다면 중국의 화하족(華夏族) 가운데 문왕,주공 이외에 내세울만한 역사적 인물이 과연 몇이나 되는가.
이런 각도에서 본다면 동양의 사상과 문화를 일군 핵심 인물은 거의가 동이에서 배출됐다는 이야기가 되고, 따라서 동양의 사상과 문화는 중화사상,중국문화가 아니라 동이족에 의해 형성된 동이사상,동이문화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영국인은 인도와 셰익스피어를 바꿀 수 없다고 했는데 이는 한 위대한 인물이 지닌 의미와 가치가 어떤 것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강태공,묵자,맹자 등은 동양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다. 그 동안 우리와 전혀 상관없는 중국인으로만 알아왔던 이 위대한 인물들이 바로 우리의 조상인 동이족으로 밝혀지게 된 것은 참으로 의미가 깊다. 잃어버렸다 찾은 돈은 잃어버리지 않은 돈보다 더 귀하게 느껴지듯 잃어버렸다 되찾은 조상은 잃어버리지 않은 다른 조상보다 더 소중하게 여겨지는 것이 당연한 이치다.
‘書經’의 ‘우이’가 바로 고조선
‘사고전서-경부’ ‘우공추지(禹貢錐指)’ 4권에는 “동이 9족(族)을 우이(嵎夷)로 보고 우이를 고조선으로 본다”는 견해가 실려 있다. 우이라는 말은 ‘서경’ 요전(堯典)에 나온다(堯分命羲仲 宅嵎夷 曰暘谷). 우이는 바로 요(堯) 당시 존재했던 동양 고전의 기록에서 최초로 등장하는 ‘이’의 명칭이다. 그런데 이 ‘우이’가 바로 고조선이라면 우리 한민족(韓民族)이 동이 9족의 뿌리요 원류라는 이야기가 된다. 단절된 고조선 역사를 복원하는데 이런 자료 한 장이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 100권의 가치를 능가한다고 할 수 있다.
“ ‘후한서’와 ‘두씨통전(杜氏通典)’에 다 동이 9종(九種)을 우이라고 말하였는데 그 땅이 한(漢)의 낙랑(樂浪),현도군(玄?郡) 지역에 있었다. 그런데 ‘서경’ 우공(禹貢)에 청주(靑州)를 설명하면서 맨 먼저 우이를 언급한 것을 본다면 조선(朝鮮),구려(句麗)등 여러 나라가 우(禹) 임금시대에 실제 다 청주지역에 있었다(朝鮮句麗諸國 禹時實皆在靑域)”. 이것은 ‘경패(經稗)’ 3권에 나오는 기록이다. 이 자료는 구이(九夷)가 우이(嵎夷)이고, 우이가 바로 고조선이라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
‘오례통고(五禮通考)’ 201권에는 “한무제(漢武帝)가 설치한 현도,낙낭 두 군(郡)이 다 옛 ‘우이’의 땅으로서 청주(靑州)지역에 있었다”는 것과 “연(燕)과 진(秦)이 경략(經略)했던 조선은 대체로 우공(禹貢)의 우이지역이었다”는 내용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 자료에서 우리는 우이에서 조선으로, 조선에서 현도,낙랑으로 변화된 고조선의 역사를 읽을 수 있다. 그리고 또 연(燕),진(秦)시대의 조선과 한무제가 설치한 현도,낙랑이 모두 오늘의 한반도가 아닌 옛 청주지역, 즉 산동성과 요녕성 하북성 일대에 위치해 있었던 사실을 이 자료는 밝혀주고 있다.
‘사고전서-사부’ ‘통감기사본말(通鑑紀事本末)’ 29권에는 “당(唐)나라와 신라가 연합하여 백제를 공격할 때 신라왕 김춘추(金春秋)를 우이도행군총관(?夷道行軍總管)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당나라에서 신라왕 김춘추를 우이도행군총관으로 삼았다는 것은 중국인들이 신라와 백제를 우이의 후예국가로 인정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일연(一然)이 ‘삼국유사’에서 우리 건국시조 단군과 고조선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더라면 단군 및 고조선의 역사가 묻혀버렸을 수도 있는 일로서 생각하면 아찔하다. 그러나 일연이 ‘삼국유사’에서 밝힌 짧은 기록만 가지고는 고조선의 실체를 정확히 파악할 길이 없다. 단 우이가 바로 고조선이라고 하는 이 기록은 고조선 2000여 년의 역사를 되찾을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다. 마치 콜럼부스의 신대륙 발견에 비길 만한 참으로 중요한 발견이 아닐 수 없다. 앞으로 동양문헌상에서 우이를 추적하면 그 동안 잃어버린 채 살아온 고조선의 전모를 복원할 길이 열리게 될 것이다.
공자가 살고 싶어했던 나라 ‘구이’
‘사고전서-자부’ ‘명의고(名義考)’ 5권에 “구이(九夷)는 동이이고 동이는 기자조선(箕子朝鮮)으로서 공자가 가서 살고자 했던 곳이 바로 이곳이다”라는 내용이 있다. 또 ‘사고전서-경부’ ‘주례전경석원(周禮全經釋原)’ 8권에는 “동이 기자의 나라는 공자가 가서 살고 싶어하던 곳이다(東夷箕子之國 孔子所欲居)”라고 했다. ‘논어’에는 “공자가 구이에 가서 살고 싶어했다(子欲居九夷)”는 기록만 있고 구이가 바로 기자조선이라는 말은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런데 이 자료는 공자가 가서 살고 싶어했던 그 나라가 바로 기자조선이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우리는 이런 자료를 통해서 고조선이 여러 동이 국가들 중에서도 특별히 문화적 수준이 높은 대표성을 띤 동이 국가로 공자가 마음속으로 동경하던 나라였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십일경문대(十一經問對)’ 1권에는 “‘논어’ 자한편(子罕篇)의 ‘자욕거구이 혹왈누 여지하 자왈 군자거지 하루지유(子欲居九夷 或曰陋 如之何 子曰 君子居之 何陋之有)’”라는 대목을 논하여 여기서 말하는 군자는 기자를 가리킨 것이지, 공자가 자칭해서 군자라고 한 것이 아니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그 동안 우리는 ‘논어’의 이 부분을 주자의 해석에 따라 “군자거지(君子居之)면 하루지유(何陋之有)리요” 즉 “군자가 가서 산다면 무슨 누추함이 있겠는가”라고 하여 그 군자가 공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여 왔다. 그런데 이 자료는 “군자거지(君子居之)니 하루지유(何陋之有)리요” 즉 “구이에는 군자인 기자가 살았으니 무슨 누추함이 있겠는가”라고 해석해야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공자는 평소 겸양의 미덕을 강조한 분으로 자칭 군자라고 말했을 가능성이 적고, 또 ‘산해경(山海經)’에도 “동방에 군자의 나라가 있다”는 기록이 있다. 이런 점을 통해서 본다면 공자가 가서 살고자 했던 구이를 기자조선으로 보고 “기자조선은 일찍이 군자인 기자가 도덕정치를 펼친 문화국가이니 가서 산들 무슨 누추할 것이 있겠는가”라는 뜻으로 풀이하는 것이 훨씬 설득력이 있다. 이런 자료도 공자가 가서 살고 싶어했던 구이가 바로 고조선이었음을 뒷받침하는 좋은 근거라 하겠다.
고구려,부여,삼한의 기원
‘사고전서-경부’ ‘상서주소(尙書注疏)’ 17권에는 “성왕(成王)이 동이를 정벌하자 숙신(肅愼)이 와서 축하했다(成王旣伐東夷 肅愼來賀)”라는 주관서(周官序)의 내용과 여기에 대한 공안국(孔安國)의 다음과 같은 전(傳)이 실려 있다 “해동(海東)의 제이(諸夷)인 구려(駒麗),부여(扶餘),한(馯=韓),맥(貊)의 무리가 무왕이 상(商)나라를 이기자 다 길을 통하였는데 성왕이 즉위하자 배반하였으므로 성왕이 이들을 정벌하여 복종시킨 것이다.”
그리고 이 대목의 소(疏)에는 ‘정의(正義)’의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 “여기 말한 동이는 비단 회수상(淮水上)의 동이만이 아니기에 해동의 제이(諸夷)라고 말한 것이다. 구려,부여,한,맥의 무리는 이들이 다 공안국의 시기에도 이런 명칭이 있었던 것이다.”
공안국의 말처럼 주무왕이 당시에 정벌했던 동이가 해동에 있던 여러 동이, 즉 구려,부여,한,맥의 무리였다고 한다면 구려,부여,한,맥은 한대(漢代) 훨씬 이전인 주(周)나라 시기에 이미 존재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공안국은 한(漢)나라 때 유명한 학자로 그의 학설은 어느 누구의 주장보다도 설득력이 있다고 할 수 있는 만큼 이 자료는 한,당(漢唐) 이전 우리 고구려,부여,삼한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다.
‘삼국유사’는 신라가 중국 전한(前漢) 선제(宣帝) 오봉(五鳳) 갑자년(甲子年)(B.C57)에, 고구려가 전한 원제(元帝) 건소(建昭) 계미년(癸未年)(B.C38)에, 백제가 전한 성제(成帝) 영시(永始) 을사년(乙巳年)(B.C16)에 건국된 것으로 기술하여 고구려,백제,신라의 상한이 모두 중국 한(漢)나라 시대로 되어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우리 나라 고대사 연구에서 쌍벽을 이루는 자료지만 ‘삼국사기’는 우리 역사의 기술을 삼국시대로 국한시킨 한계가 있고, ‘삼국유사’는 단군 및 고조선의 역사까지 다루고 있지만 고구려,백제,신라의 출발을 모두 중국 서한(西漢)시대로 한정시켰다.
그것은 일연이 승려의 신분으로 몇몇 제한된 자료에 의존하고 ‘사고전서’와 같은 방대한 중국의 사료를 널리 섭렵할 수 없다보니 어쩔 수 없는 역부족에서 온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이제 ‘사고전서’와 같은 권위 있는 자료를 통해서 고구려,부여,삼한 등의 뿌리가 확인된 이상 잘못 된 국사교과서의 내용부터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그 동안 우리는 입으로는 반만년 역사를 이야기하면서도 ‘삼국사기’ ‘삼국유사’ 위주로 고대사를 연구하고 가르치다 보니, 한,당시대에 존재했던 고구려,백제,신라가 우리 역사의 뿌리인양 착각 속에 살고 있었다. .
중국의 동이와 한반도의 동이
현재 한국의 강단 사학자들은 한,당 이전 중국의 동이와 한,당 이후 한반도의 동이가 서로 다르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뚜렷한 학술적 근거는 없다. 그럼에도 이 논리를 수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한국의 동이와 중국의 동이를 연결시킬 경우, 고구려,백제,신라의 역사를 한반도에 국한시켜온 종래 주장의 모순을 스스로 드러내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라 추측된다.
그러나 한,당 이전 중국의 동이와 한,당 이후 한민족의 동이가 동일한 동이이며 서로 다르지 않다는 사실은 ‘사고전서’의 여러 동이 사료에서 여실히 증명된다. 예컨대 “동이 9족이 우이고 우이가 바로 고조선이다”라는 ‘우공추지’의 기록, “구이(九夷)는 현도,낙랑,고구려 등을 말한다”는 ‘사서혹문’의 기록, “당나라와 신라가 연합하여 백제를 공격할 때 신라왕 김춘추를 우이도행군총관으로 삼았다”는 ‘통감기사본말’ 등의 기록을 통해 볼 때 한,당 이전 중국의 동이와 고구려,백제,신라의 동이는 맥을 같이하고 있으며 둘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도 “신라는 조선의 유민에 의해 건립되었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고조선이 동이라면 그 뒤를 계승한 신라가 고조선의 동이와 동일한 동이인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이치다.
문학과 역사가 다른 점은 문학이 있을 수 있는 일을 쓰는 것이라면 역사는 있었던 일을 쓴다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는 참이어야지 거짓이 있어서는 안 된다. 있었던 일을 없었다고 해서도 안되고 없었던 일을 있었다고 해서도 안되며 동일한 것을 다르다고 해서도 안되고 다른 것을 동일하다고 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7만9000여권에 달하는 방대한 ‘사고전서’에서 동이에 관련한 사료만 따로 추려 묶으니 우리의 눈을 놀라게 하고 귀를 의심케 하는 대목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지금까지 밝혀진 동이에 관한 새로운 기록을 4가지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동이는 동양의 지류가 아닌 본류, 피지배자가 아닌 지배자, 아시아의 조역이 아닌 주역, 변방이 아닌 중심, 동양문화의 아류가 아닌 원류였다.
둘째, 문헌상 최초의 동이인 우이가 바로 고조선이었다.
셋째, 중국인으로만 알았던 요순과 공자, 백이, 숙제, 강태공, 맹자, 묵자 등이 모두 동이족 출신이었다.
넷째, 부여(夫餘)의 뿌리가 부유(鳧臾)이고 부유는 산동성 부산(鳧山)이 발원지이며, 고구려가 한나라 때 생긴 신생국가가 아니라 하우(夏禹)시대에도 존재했으며 당나라 때까지만 해도 내몽고 지역 적봉시(중국 요서지역 홍산문화유적지)가 고구려의 서쪽 영토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출발점이 없는 한국사
오늘날 중국에는 몽고족, 만족, 묘족, 회족, 장족 등 한족(漢族) 이외에 55개에 달하는 소수민족이 있지만 이들은 결국 동이족과 한족 양대민족으로부터 분파된 지류와 지맥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동양역사 발전의 양대 주역인 동이족과 한족, 두 민족 가운데 동방민족의 뿌리는 과연 누구인가. 다시 말해 어느 민족이 동양 역사의 여명을 열었으며 동양역사를 추동시킨 원동력인가. 바로 동이족이다.
한족의 시조는 황제헌원씨다. 사마천은 ‘사기’에 황제를 한족의 시조로 기술하였고, 오늘날 한족들은 자신들을 염,황(炎黃) 자손이라 말한다. 그런데 동이족의 시조는 황제보다 앞선 시기에 중국의 주인으로 군림한 태호 복희씨다. 공자는 ‘주역’ 계사(繫辭)에서 “복희시대를 지나 신농씨 시대가 도래하고 신농씨 시대가 지나 황제시대가 전개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한,당 이후 중국의 지배세력으로 등장한 한족(漢族)이 본래 중국의 중심세력이었던 동이의 역사를 이민족(異民族)의 역사로 왜곡,말살하기 시작했다. 또 동이의 중심세력이었던 한민족(韓民族)이 신라 이후 국력이 크게 약화되고, 조선조에 접어들어 중국의 아류인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함으로써 동이의 역사와 문화를 잃어버린 것이다.
우리나라는 이집트,바빌로니아,인도,중국 등과 함께 세계적으로 긴 역사를 자랑하는 나라 중 하나다. 그러나 반만년을 이어 온 우리 역사는 지금 뿌리가 없다. 고조선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현재 1권은 없이 2권부터 발행된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 42권이 뿌리 없는 한국사의 모습을 단적으로 반영한다고 하겠다.
한 나라에서 역사의 단절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곧 그 나라의 얼과 정신과 문화와 정기의 단절을 의미한다. 광복 후 60년이 다 되어 가지만 세계의 마지막 분단국가라는 오명을 씻는 것은 고사하고 다시 동서로 나뉘고 동서가 다시 보수니 진보니 두파 세파로 갈려 혼미에 혼미를 거듭하고 있는 원인은, 역사의 단절 그리고 역사의 단절로 인한 민족 얼의 상실에 있다.
국사교과서 새로써야
우리 국사교과서는 출발부터 기형이다. 왜냐하면 단군 조선 1000년은 역사가 아닌 신화로 취급하고, 기자조선은 ‘기자동래설’이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삭제되어 침략자 신분인 연나라 사람(燕人) 위만(衛滿)의 위만조선으로부터 우리의 실제 역사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뿌리가 잘려나간 이런 역사교육이 국민에게 민족적 긍지와 문화적 자신감을 심어줄 리 없다.
최근 일본 이시하라 도쿄도(東京) 지사가 “한일합방은 조선인들의 선택에 의한 것이었다”고 망언(妄言)을 하고 중국에서는 한국의 고구려사가 자기들의 역사라고 터무니없는 주장을 펴는 것도 따지고 보면 우리 역사가 제대로 정립되지 못하고 허점투성이인 것과 무관하지 않다. 따라서 광복이후 60~70년대는 가난에서 벗어나는 것이 시대적인 과제였고, 80~90년대는 민주화가 시대적 요청이었다면, 오늘 당면한 시대적 과제는 단절된 역사의 복원과 민족정체성의 확립이라고 생각한다.
그 동안 실증사학을 주장하는 강단사학계는 자료의 결핍을 이유로 고조선사의 연구와 복원에 적극성을 띄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사고전서’와 같은 국내외가 인정하는 권위 있는 자료를 통해 고조선의 실체 및 고구려,백제,신라의 뿌리가 밝혀진 이상, 이런 사료를 토대로 고조선 및 삼국사를 위시한 한국의 고대사를 다시 정립하여 국사교과서를 새로 써야 할 것이다.
앞으로 만일 동이 9족이 하나로 뭉쳐 대화합과 통일의 시대를 연 위대한 시대 고조선의 역사가 되살아난다면, 아직도 분단의 상처를 안고 있는 우리 민족이 분단의 장벽을 넘어 화합과 통일의 길로 나아가는 돌파구가 될 것이다.
심백강 沈伯綱
1956년 경기 파주 출생 국립대만사대 및 중국연변대 대학원 역사학 박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 연구직 전문위원,중국연변대 객원교수 월간 ‘한배달’ 편집인 저서: ‘사고전서중의 동이사료’ ‘조선왕조실록중의 단군사료’
심백강 박사, 중국 ‘사고전서’에 기록된 역사 밝혀내 … 역사학계 능력부족으로 실체규명 외면
"요(堯) 임금 때인 무진년B.C.2333년)에 신인(神人·성인보다 한 단계 위의 훌륭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 태백산 단목(檀木) 아래로 내려오니, 조선인(朝鮮人)이 그를 임금으로 모시고 단군(檀君)이라 칭했다.
이것이 조선이 나라를 세운 시초다. 정초(鄭樵)가 지은 ‘통지략’(通志 )에 이르기를 조선이라는 나라는 왕험(王險)에 도읍을 정했는데, 한(漢) 시기의 낙랑군이 그곳이다. 모씨(茅氏)의 ‘상서록’(象胥錄)에 의하면 단군과 아울러 기자(箕子)도 왕양(王壤)에 도읍을 정했다. 역사에서는 위만도 왕험에 도읍을 정했는데, 곧 평양이다.(하략)”
단군의 실존에 관한 중국측 역사기록 중 한 대목이다. 굴 속에서 21일 동안 마늘과 쑥을 먹어 여인으로 변신한 곰과 사람(환웅) 사이에서 단군이 태어났다는 식의 전설같은 이야기는 찾아볼 수 없다.
그것도 청나라 때의 유명한 역사학자 오임신(吳任臣)이 지은 ‘산해경광주’(山海經廣注)라는 정통 사서에 등장하는 글이다. 중국 진(晋)나라 학자 곽박이 지은 ‘산해경주’를 바탕으로, 오임신이 그 주석을 널리 보완하는 형식을 취하며 지은 ‘산해경광주’. 현재 전체 18권이 ‘사고전서’(四庫全書)에 수록돼 전해 내려오고 있다.
과연 ‘사고전서’란 어떤책인가. 중국 청나라가 국력을 기울여 편찬한 동양 아니 세계 최대의 총서로, 선진(先秦) 시대에서 청대 말기에 이르기까지 역대의 주요 전적들을 가려 수록한 책만 무려 7만9000여권. 연인원 3000여명이 동원돼 무려 10년에 걸쳐 완성된 대작이다. 그래서 중국 학자는 물론 한국과 일본 학자들도 사고전서의 학술적 가치에 대해서는 이의를 달지 않을 정도다.
단군역사 언급 9종류 확인
바로 그 ‘사고전서’를 일일이 뒤져 단군에 대해 기술한 저작들을 처음으로 밝혀낸 한국인 학자가 있다. 민족문화연구원(이사장·강동민) 원장인 심백강 박사(47·전 정신문화연구원 교수)가 그 주인공.
“사고전서는 경(經)·사(史)·자(子)·집(集)의 네 부분으로 나누어 편찬된 체제입니다. 이중 단군의 역사에 대해 언급한 것이 자부에 3개, 사부에 4개, 집부에 2개 등 모두 9종류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어요. 우리나라 강단 사학자들이 외면하는 단군역사를 중국 정통역사서가 뒷받침해준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최근 심박사는 중국을 수십 차례 드나들며 찾아낸 것들을 ‘사고전서 중의 단군사료’(민족문화연구원 학술총서 제7집)라는 자료집으로 엮어냈다. 원서 그대로 수록한 이 책은 대중서라기보다 역사학자들의 연구자료 성격이 짙은데, 단군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대목을 네모꼴 모양으로 굵게 표시해 두었다.
그중 한 대목을 찾아 띄엄띄엄 읽어보니 매우 충격적이다. “전부(錢溥)가 지은 ‘조선국지’에 의하면 세 종류의 조선이 있다. 하나는 단군조선이요, 또 하나는 기자조선이요, 나머지 하나는 위만조선이다….”(‘산해경광주’ 18권)
우리나라 국사 교과서가 단군이 B.C. 2333년에 조선(고조선)을 세웠다는 정도로 간단히 언급하고 넘어가는 것과는 달리, 이 중국측 기록은 고조선이 하나가 아니라 단군조선에서 시작해 위만조선에 이르기까지 세 단계의 역사를 밟고 있음을 분명히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심박사는 더 흥미로운 사실도 지적한다. 조선시대까지만 하더라도 널리 인정받던 단군의 실체가 일제 식민지 시기를 거치면서 철저히 은폐된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 이전에 조선을 속국으로 여겼던 명나라도 단군역사를 교묘하게 가리려 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고전서 집부(集部) 편에 역대의 부(賦)를 모은 ‘어정역대부휘’(御定歷代賦彙·청나라 때 편찬됨)라는 책이 있어요. 이중 단군에 대해 기술하고 있는 것이 조선부(朝鮮賦)라는 대목입니다. 저자는 명나라 효종 때의 동월(董越)이라는 사람인데, 조선에 사신으로 왔다가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하고 또 관련 자료를 참고해 조선부를 지었다고 하지요.
아마 중국인의 입으로 단군조선을 직접 언급한 현존 자료 중 가장 시기가 앞선 기록일 겁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고전서 사부(史部) 편에도 똑같이 실린 원래의 조선부에는 단군 기록이 쏙 빠져 있어요.”
“고조선은 하나 아닌 3단계 역사”
그러니까 명나라 때 처음 씌어진 조선부에는 단군 기록이 빠져 있는 대신, 그 후인 청나라 때 편집한 ‘어정역대부휘’ 안의 조선부에서는 똑같은 저자의 이름으로 단군조선을 언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객관성과 권위를 따져볼 때 어정역대부휘가 단연 앞섬은 두말할 나위 없다. 심박사는 이를 두고“명나라에서 우리 단군조선의 역사를 부정하려 했던 모종의 음모가 있었다는 의심을 지우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다.
즉 동이족보다 그 역사가 짧은 한족(漢族)이 주도적으로 세운 명나라는 대국의 자존심상 동이의 후손인 조선을깎아내려 했다는 것이다.
아무튼 우리의 단군과 고조선 관련 사료는 명나라의 직접적 간섭을 받던 조선조 때 많이 인멸됐고, 이후 일제의 지배를 받으면서 거의 말살됐다는 게 심박사의 해석. 그러다 보니 강단 사학계 일각에서는 단군역사를 실재로 인정하기를 거부해 신화로 취급하거나, 심지어는 고려 때 항몽전쟁이나 일제 때 항일민족주의 감정의 소산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는 것. 바로 그 때문에‘사고전서 중의 단군사료’는 중국의 문헌을 근거로 단군의 실재를 찾아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깊다.
심박사는 이 자료집 외에도 16∼17세기 문헌인 ‘조선세기’(朝鮮世紀)를 처음으로 발견한 학자로 유명하다. 명나라의 오명제(吳明濟)가 지은 이 책은 조선 영조 때 편찬됐다가 고종 때 중간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의 ‘역대서적’조에 제목만 전해져 오던 것이다. 지어진 지 400여 년만에 처음으로 빛을 본 ‘조선세기’는 특히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 등 삼조선의 역사를 차례로 소개하고 있는데, 위만조선부터 다룬 사마천의 ‘사기’나 기자조선 이후만 인정하는 대부분의 중국 사서들과 뚜렷한 차별성을 보이고 있다. 또 단군왕조의 시작을 소개하는 부분에서도 곰이 사람으로 변했다는 신화적 내용 대신 “가화합(假化合)을 이뤘다”고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의문점 하나. 우리나라 학자들은 광복 50여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기까지 중국 고전 문헌에 산재한 단군 및 고조선 사료를 왜 찾아보지 못했을까.
심박사의 해석은 의외로 간단하다. “첫째는 우리의 눈으로 역사를 보는 자주적 사관이 없었기 때문이고, 두번째는 한문 해독능력 문제를 꼽을 수 있을 거예요. 중국 원전을 해석하고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하는데, 아마 우리나라 역사학자 중 그런 정도의 능력을 가진 사람은 세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일 것입니다.”
이렇게 단언하는 심박사는 한학자 집안에서 자라 5세 때 천자문을 독파하고 16세 이전에 사서삼경을 독파한 수재. 19세 나이에는 당대의 유명한 학승 탄허 스님을 만나 한문으로 문답을 나누는 등 뛰어난 한학 실력을 선보이기도 했다.
1983년 정신문화연구원에서 연구하다가 10년 만에 교수직을 그만둔 그는 현재 민족문화연구원 원장으로 있으면서 한국 사학자들의 단군 및 고조선 연구를 돕기 위해 주로 중국측 사료를 체계적으로 수집 정리하고 있다.
<신동아 안영배기자>
‘역사왜곡 바로잡기’ 또 하나의 밑거름[중앙일보]
동북공정·임나일본부 등 동북아시아의 ‘뜨거운 감자’인 ‘역사 전쟁’을 풀기 위한 한국 측 관계자들의 노력이 잇따라 결실을 거두고 있다. 중국과 일본 측이 입맛에 따라 내놓는 ‘일방적’ 주장에 맞서기 위해 우리 쪽에선 사료적 근거를 찾는 데 집중해 왔다. 역사서에 남은 기록보다 더 객관적인 자료는 없기 때문이다.
올 초 국사편찬위원회(위원장 유영렬)가 펴낸 『한국고대사료집성-중국편』(전7권)과 2003년 민족문화연구원(원장 심백강)이 펴낸 『사고전서(四庫全書) 중의 동이(東夷) 사료』(전4권) 등은 그 같은 노력의 일환이다.
이런 가운데 최근 『동아삼국관계사료전집(東亞三國關係史料全輯)』(전5권·이하 『사료전집』)이 중국 옌볜(延邊)대출판사에서 출간됐다. 중국의 정사(正史)인 『이십육사(二十六史)』와 『명실록(明實錄)』 『청실록(淸實錄)』 등에 실린 한·중·일 3국 관련 사료를 발췌해 수록했다. 무엇보다 기존 자료집보다 수록된 자료가 방대하다.
이번 『사료전집』이 다루는 시기는 기록이 남아 있는 요순시대부터 1912년까지다. 옌볜대·지린대·랴오닝대 등 9개 단체의 중국측 전문가 60여 명이 참여했다. 1999년 시작해 올해까지 8년이 걸렸다. 총 7500쪽 분량이며, CD롬으로도 제작했다. 남겨진 숙제는 역주(譯注) 작업이다. 중국 학자들이 중국 역사책을 저본으로 옌볜대출판사에서 출간했지만, 제작 전 과정을 한국 관계자들이 책임졌다. 후암미래연구소장이자 한국불교신문 사장인 차길진(60·사진)씨가 기획·출간 등을 총괄했다. 제작비 5억여원은 이재욱 한국노키아 명예회장이 후원했다.
중국 역사서에서 한·중·일 3국 관련 사료를 발췌해 만든 『동아삼국관계사료전집 』이 최근 출간됐다. 우리 역사의 숨겨진 부분을 새롭게 밝혀낼지 주목된다. 사진은 당나라 시대의 수도였던 시안의 대상(실크로드를 오가던 낙타 상인 집단) 조각. 고구려 후예인 고선지 장군도 시안 일대에서 활약했다.[중앙포토]
차 소장은 “더 많은 인력과 비용을 들인다 해도 앞으론 이런 일을 해내기 힘들 것”이라고 강조했다. 동북공정 여파로 최근 중국 측의 견제가 심해져 사료를 수집하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570여 만여 자의 한자를 CD로 만드는 작업도 어려웠다고 한다. 잘 쓰지 않는 한자가 많았기 때문이다. 차 소장은 “이번 『사료전집』의 목차를 후암미래연구소 홈페이지(www.hooam.com)를 통해 공개해, 원하는 이들에게 복사비만 받고 내용을 제공할 계획이다”고 말했다.
국사편찬위원회 민덕식 교육연구관은 “학자 개개인이 엄청난 규모의 사료를 혼자서 다 찾아볼 수는 없기 때문에, 필요한 자료를 바로 선택해 볼 수 있게 한 이 같은 사료집의 편찬은 중요한 작업”이라며 “지금까지 학계에서 확인하지 못한 역사적 사실을 이들 사료집을 통해 새롭게 밝혀낼 수도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