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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랑길 31코스(수포마을회관-매곡마을 삼강공원)
여행일 : ‘23. 7. 8(토)
소재지 : 전남 무안군 해제면 일원
여행코스 : 수포마을→석산마을→감정마을→송전마을→백학마을→백학산 임도→백림사→대사리입구→슬산마을→사야마을→내분마을→매곡마을(거리/시간 : 13.1km/ 실제는 13,27km를 3시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31코스를 걷는다. 10개로 이루어진 무안북부·신안 구간의 여덟 번째 코스이기도 한데, ‘백학산 임도’를 빼고는 대부분 마을과 마을을 잇는 농로로 이어진다. 주요 볼거리로는 백학산 임도에서 바라보는 바닷가 풍경과 감정마을 곰솔, 매곡마을 삼강공원을 꼽을 수 있다.
▼ 들머리는 수포마을회관(무안군 해제면 임수리)
무안-광주고속도로 북무안 IC에서 내려와 24번 국도를 따라 ‘지도’방면으로 들어오다 수암교차로(무안군 해제면 유월리)에서 77번 국도(영광방면)로 바꿔 탄다. 잠시 후 만나게 되는 학천교차로(해제면 용학리)에서 805번 지방도(해제·지도방면)로 옮기면 얼마 지나지 않아 수포마을(臨水里의 자연부락)에 이르게 된다. 서해랑길(신안 31코스) 안내도와 시작점 표지판은 마을회관에 기대듯 설치해놓았다.
▼ 서해랑길 중 가장 짧은 코스 중 하나(13.1km). 거기다 마을과 마을을 잇는 농로를 따르는 여정이라서 걷는데 부담도 없다. ‘백학산 임도(2km)’도 오르내림이 거의 없는 데다, 꼬맹이 섬들로 가득 찬 서해바다나 길가 야생화 등 주변이 온통 아름다운 풍광들로 치장되어 있어 오히려 눈이 호사를 누리는 구간으로 변해버린다.
▼ 버스정류장 맞은편으로 난 마을안길로 들어서면서 트래킹이 시작된다. 참고로 옛날 이곳은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드나들었다고 한다. ‘수포(水浦)’라는 지명이 붙게 된 이유이다. 또한 ‘조답’이라는 방죽이 있었는데 두렛물이랄 정도로 수량이 많아 인근 간척지의 농업용수로까지 사용했단다. 덕분에 인근에서 가장 부촌으로 소문났었다나?
▼ 5분쯤 걸어 마을 뒤 구릉지를 넘자 ‘민대들’이 드넓게 펼쳐진다. 이어서 805번 지방도(봉대로)로 내려선다.
▼ 석포마을(돌과 바위가 많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을 지나 만나게 되는 삼거리(이정표 : 종점 11.2㎞/ 시점 0.9㎞)에서 도로를 벗어난다. 서쪽 바닷가를 향해 널찍하니 쭉 뻗어나간 농로를 따르면 된다.
▼ 이 일대는 ‘민대들’이라 불리는 넓은 평야로 이루어져 있다. 석산마을에 최초로 정착한 조씨 문중의 ‘민대’라는 홀로 된 여자가 마을의 부족한 농토를 보충하기 위해 막은 간척지라고 한다. 19세기 말 무안의 동학군들이 훈련을 받던 연병장이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염해에 강한 목화를 기르기도 했단다.
▼ 저 들녘 너머에는 ‘아시래’라는 염전이 있다고 했다. 본동(석산마을)에서 볼 때 아스라이 보인다고 해서 붙은 지명인데, 천일염을 생산하는 염전이 들어서 있단다. 하지만 옛날 저곳에는 화렴(火鹽, 불꽃소금)을 생산하는 염전이 여럿 있었다고 전해진다.
▼ 석산마을로 들어가기 전 애송재(愛松齋)라는 제각을 만났다. 석산마을의 터줏대감인 해주최씨 문중의 사당이라는데, 근래(1985년)에 지어져서인지 사당이라기보다는 여염집에 더 가까운 모양새이다.
▼ ‘아시래 잔등’으로 여겨지는 곳(무안향토사연구소에서 얘기한)에는 정자와 당산나무가 서 있었다. 원래의 아름드리 당산나무는 태풍에 쓰러져 죽고, 새로 돋아난 나무가 대신 그 자리를 지키는데도 신기(神氣)는 여전한 모양이다. 아직도 당산제를 지내고 있다니 말이다. 봄철, 당산나무의 잎이 어떻게 피는가를 보고 그 해의 농사를 점치던 풍속을 지켜가기 위해서일지도 모르겠다.
▼ 몇 걸음 더 걸어 석산마을로 들어선다. 법정 동리인 석룡리(石龍里)를 구성하는 3개 자연부락(석산·용흥·감정) 중 하나로 ‘석산(石山)’이란 지명은 동네 어귀에 커다란 바위가 있다는 데서 유래했다.
▼ 마을 앞 ‘방정각(芳井閣)’이란 정자는 주민들의 식수원이던 ‘방정샘’에서 빌려왔다. 지금은 지하수 개발로 그 기능을 잃었으나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주민들의 식수원이었단다. 동학군들이 마셨다고 해서 ‘동학샘’으로도 불린다.
▼ 방정각은 ‘천객만래(千客萬來)’라는 편액도 달았다. 기웃거리던 나는 문득 ‘천상운집(千祥雲集)’을 덧대본다. 온갖 좋은 기운이 구름처럼 모이고 수많은 귀한손님이 이 마을을 찾아온다. 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 마을 앞에는 ‘해주최씨 삼의사 숭모단’이 조성되어 있었다. 삼의사란 농학혁명의 지도자로 활동하다 처형당한 민제 최장현(崔璋鉉)과 청파 최선현(崔善鉉), 춘암 최기현(崔寄鉉)을 말한다. 이 마을에 살던 삼형제는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인근 장정들을 모아 봉기했고, 마을 앞 들녘에서 동학군을 훈련시켰다고 한다. 추모비는 삼의사의 생애와 동학혁명 당시 활동내용을 후세에 전해준다.
▼ 마을회관에 이르니 ‘돌뫼동’이란 시비가 눈에 띈다. 마을의 유래와 지세 등을 시로 읊었다. 부정과 외세에 맞선 동학혁명의 역사도 빠졌을 리가 없다.
▼ 7분쯤 더 걷자 이번에는 ‘감정마을’이다. 석룡리의 또 다른 자연부락으로 감정(甘井)이란 마을 앞 샘물을 마신 인근 원갑사의 노승이 물맛이 참 좋다고 한데서 유래됐다. 하긴 물이 귀한 바닷가를 지나다 한 모금 얻어 마셨으니 얼마나 달고 시원했겠는가. 지금이야 ‘민대들’이라는 너른 들녘을 끼고 있지만 옛날에는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들락거렸다니 말이다. 동구 밖 어림인 ‘개어덕’도 바닷가와 관련된 지명이란다.
▼ 마을 앞에는 전라남도 지정 기념물(제175호)인 ‘곰솔’이 있다. 입향 시조가 전염병을 예방하고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며 심었다는데, 수형이 제대로 잡혀 무안의 기념물 중 가장 잘 생겼다고 한다.
▼ 수령이 400년이나 되다보니 영험해졌나보다. 무슨 소원이든지 다 들어준단다. 감정마을의 신목(神木, 매년 2월 초하룻날 당제를 지낸다)이 된 이유다. 하지만 썩 편치 않은 경고판이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 외지인들은 이 나무에 치성을 드리지 말라는 것이다. 좋은 것은 서로 나누는 게 배달민족의 미풍양속이 아니었던가?
▼ 이 마을에는 ‘담양전씨 삼강비’라는 빗돌이 있었다. 병인양요 때 순국한 전준엽(田俊燁, 1806-1882)과 그의 처인 ‘연안차씨’의 열행(烈行) 그리고 전성기(田聖淇, 1865-1950)의 효행을 기리는 비이다.
▼ 마을 앞에는 ‘석룡저수지’가 있다. ‘민대들’의 넓디넓은 들녘은 간척사업에 의해 태어났다. 소금기로 찌든 간척지는 항상 목이 탄다. 그러니 저런 저수지를 곳곳에 만들 수밖에 없었고, 석룡저수지도 그중 하나로 보면 되겠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40분. 감정마을을 빠져나와 805번 지방도로 올라선다. 그렇다고 도로를 걷는다는 얘기는 아니다. ‘대전 찍고 부산’이라던 어느 유행가의 가사처럼 도로로 올라서자마자 다시 내려와 버린다.(전신주에 서해랑길 방향표식이 붙어있다)
▼ 서해랑길은 이제 구릉지로 올라선다. 상품성 떨어지는 양파가 길가에 나뒹구는 구간이다. 맞다. 이 부근은 알아주는 조생양파 생산지라고 한다. 사질양토와 해양성 기후 등 지역적 특성 덕분에 양파의 맛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단단하고 아삭하며 즙이 풍부하단다. 그게 소문이라도 났는지 이삭을 줍는 둘레길 나그네들이 두엇 보였다.
▼ 5분쯤 소요되는 구릉지를 넘자 ‘송전마을(이정표 : 종점까지 9.3km)’이 얼굴을 내민다. 법정 동리인 학송리(鶴松里)를 구성하는 2개의 자연부락(송전·학암) 중 하나로 송전(松田)이란 지명은 울창한 소나무가 마을을 둘러싸고 있다는 데서 유래됐다. 주민들은 봉대산 기슭에 소쿠리처럼 들어앉은 마을이 배산임수의 전형적인 명당이라고 했다. 이때 물은 옛날 바닷물이 마을 앞까지 들락거렸다는 데서 찾고 있었다. 또한 열부가 많음을 이 마을의 자랑거리로 꼽고 있었다. 토지가 비옥해 먹고사는 게 풍부한데다, 주민들이 서로를 아껴주기 때문에 혼자된 여자가 재가를 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 서해랑길은 이제 이름값을 해보려는 모양이다. 학송리 앞 서해바다를 향해 길을 재촉한다. 하지만 고대하던 일은 쉽게 이루지지는 않는 법, 엊그제 시작된 장맛비가 길을 방죽으로 만들어버렸다. 덕분에 둘레길 나그네들은 수로에서 평균대 놀이를 할 수밖에 없었다.
▼ 학송리 앞 들녘, 그 너머로 서해바다가 드넓게 펼쳐진다. 백학마을로 가는 도중 눈에 들어오는 풍경이다.
▼ 그렇게 10분쯤 걷자 또 하나의 마을, 주민에게 물어보니 ‘백학마을’이란다. 법정동리인 대사리(大士里)를 구성하는 2개 자연부락(신사·백학) 중 하나인데, 농토가 협소한 탓에 마을이 3개로 나누어져 있다더니 그중 하나인 모양이다. 참고로 백학(白鶴)이란 지명은 뒷산인 ‘백학산’에서 따왔다. 하나 더, 이 마을은 해제의 8명당(花蟹弄珠, 捶馬渡江, 天馬施風 , 梅花落池, 玉女彈琴, 白鶴歸巢, 將軍大座, 九龍爭珠) 중 ‘백학귀소’의 명당 터로 꼽히고 있었다. 백학귀소는 백학이 집으로 돌아오는 형국을 뜻한다.
▼ 마을을 지나자 탐방로는 백학산 자락의 아랫도리를 따라 이어진다. 왼편은 간척사업이 만들어놓은 들녘, 하지만 웃자란 갈대가 시야를 차단해버렸다.
▼ 바닷가에 가까워지자 소담스런 방죽들이 줄을 잇는다. 널브러져 있는 시설들로 보아 양식장이었던 걸로 보이는데, 왜 문을 닫았을까?
▼ 트레킹을 시작한지 55분 만에 첫 대면한 바닷가. 감정마을(시점에서 3km쯤 되는 지점)에서 출발한 집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으로 만난 바닷가가 경치까지 하도 곱다보니 인생샷이라도 하나 건지고 싶었던 모양이다.
▼ 이곳에는 선착장이 만들어져 있었다. 30년쯤 전까지만 해도 앞바다에 황금어장이 형성되었었다는 ‘백학포구’일지도 모르겠다. ‘구래포구’로도 불리었는데 당시는 철마다 칠산 바다의 낙월군도 사람들이 찾아와 땔감이며 식량 등을 준비해갔으며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흥청거렸다고 한다. 주막이 4곳이나 되었다니 이를 말이겠는가.
▼ 선착장 끄트머리에는 ‘다드락섬’이라는 앙증맞은 섬 하나가 놓여있다. 섬으로 연결되는 저 노두길은 날마다 모세의 기적을 연출한다나? 썰물 때 물이 차오르면 물속에 길이 잠겨버리기 때문이다.
▼ 선착장(이정표 : 종점까지 7.5km)을 지난 서해랑길이 이번에는 백학산(126.3m) 자락으로 파고든다. 주민들 말로는 서해낙조와 칠산 앞바다 등의 자연경관을 관광자원화하기 위해 내놓은 일주도로라고 했다.
▼ 사람들을 끌어들이려면 그에 합당한 유인책이 필요한 법. 무안군은 그 첫째로 서해낙조와 칠산 앞바다 등 자연경관을 꼽았다. 2% 부족한 것은 흐드러지게 피는 동백꽃으로 채우고 싶었나 보다. 가로수 삼아 심어놓은 굵직한 동백나무가 줄지어 길손을 맞는다.
▼ ‘앗! 사과 닷!’ 호들갑을 떠는 집사람의 말마따나 동백나무에 ‘꽃 사과’를 쏙 빼닮은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게 아닌가. 옛날 우리네 조상들은 저 열매로 기름을 짰었다. 그 기름을 머리에 바른 아낙네들은 참빗으로 곱게 빗은 다음 쪽을 지어 비녀를 꽂았었다.
▼ 빼어난 풍광의 다도해를 뜨락 삼은 언덕, 그곳에 동화책에서나 볼 법한 예쁜 집이 들어앉았다. 그게 부러웠던 내 입에선 ‘홍천의 농장을 팔아 이곳으로 이사오자’가 서슴없이 튀어나온다. 하지만 집사람의 표정은 웬 뚱딴지같은 소리냐다.
▼ 백학산 자락을 에두르는 임도는 관광자원화가 주된 임무다. 그러니 벤치 하나 놓아두지 않았겠는가. 하나 더, 이곳에서 바라보는 서해낙조가 국내 제일이라는 주장이 있다는 것도 알아두자. 진도의 세방낙조보다도 한수 위라는 것이다.
▼ 대·소 각시도와 상·하 낙월도, 임병도 등 크고 작은 섬들로 가득 찬 칠산 앞바다는 아름다운 경관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완전한 게 어디 있겠는가. 바다는 그 부족분을 김 양식장의 지주로 메꾸고 있었다. 물결모양으로 겹겹이 늘어선 지주들이 조물주가 그린 풍경화에 방점을 찍는다.
▼ 오늘도 반가운 이들이 남긴 흔적을 만났다. 서해랑길을 함께 시작했는데, 어느덧 한참이나 앞서가고 있다.
▼ 길섶에는 ‘원추리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났다. 예덕나무 꽃도 심심찮게 보인다. 참! ‘쑥부쟁이 꽃’을 눈에 담는 행운도 누렸다. 가을에나 만날 수 있는데...
▼ 엉겅퀴도 꽃망울을 활짝 터뜨렸다.
▼ 임도를 빠져나오자 시야가 툭 트이면서 칠산 앞바다가 또 다른 모습으로 손님을 맞는다. 이후부터는 둘레길을 산책하는 기분으로 걸으면 된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1시간 40분. 임도를 빠져나온 발걸음은 자연스레 ‘백림사(대한불교조계종)’로 향한다. 해수관음상이 칠산 앞바다를 바라보고 있는가 하면, 경내를 오가는 사람들도 여럿 보인다. 한적한 산사치고는 제법 붐빈다는 얘기일 것이다. 하지만 여염집 느낌이 강한 전각들로 보아 최근에 지어진 사찰일 게 분명하다.
▼ 백림사 부근에서 바라본 함해만(또는 함평만)과 칠산대교, 이 또한 흔치않게 아름다운 풍광이다.
▼ 8분쯤 더 걸어 ‘대사길’로 내려선다. 805번 지방도와 ‘대사선착장’을 잇는 도로로 최근 2차선으로 확·포장됐다. 도로변 이정표는 종점까지 4.6km가 남았음을 알려준다.
▼ 선착장으로 가는 옛 도로를 잠시 따르다가 이번에는 도로를 횡단한다. 이어서 구릉지로 오른다. 이렇듯 이 일대는 높은 산지가 없고 고만고만한 언덕들이 굽이굽이 펼쳐진다. 그 너른 땅이 농지로 잘 활용되고 있다는 점도 이곳 무안의 특징이라 하겠다.
▼ 구릉지 오른편은 ‘신사마을’이다. 대사리의 또 다른 자연부락인데 서해랑길은 마을로 들어가지는 않는다.
▼ 구릉지를 넘으면 대사리 방조제(이정표 : 종점까지 3.4km). 신사마을 부촌으로 만들어준 일등공신이다. 하지만 서해랑길은 둑길을 고집하지는 않는다. 둑 아래로 난 농로를 따른다. 덕분에 난 아름답기로 소문난 함평만(함해만) 풍경을 그냥 지나쳐버리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 부지런한 농부는 오뉴월 삼복더위도 두렵지 않나보다. 무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는 한낮, 그것도 바람 한 점 없는 날씨인데도 밭일이 한창이다. 수확을 끝낸 양파 밭에서 저 농부는 대체 무엇을 찾고 있는 중일까?
▼ 트레킹을 시작한지 2시간 10분. 서해랑길은 또 다시 805번 지방도와 만난다. 신사마을의 입구(표지석은 ‘대사리’로 적고 있었다)라서인지 삼거리에 버스정류장(신사)이 설치되어 있었다.
▼ 100m쯤 도로를 따르다가 왼편으로 갈려나가는 농로로 들어선다.
▼ 이번에도 길은 구릉지로 연결된다. 아니 숲이 우거진 게 영락없는 산이다.
▼ 고갯마루의 숲속 터널을 지나면 ‘슬산마을’이다. 법정 동리인 덕산리(德山里)를 구성하는 3개 자연부락(슬산·내분·사야) 중 하나로, ‘슬산(瑟山)’이란 지명은 마을의 주산인 옥녀봉(봉대산의 맥을 잇는다)에서 유래됐다. 마을이 옥녀가 거문고를 타는 지형이라는 것이다. 해제면의 8명당 중 하나인 ‘옥녀탄금’의 명당으로 꼽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마을 입구에는 이홍복(李弘福)의 유적비가 세워져 있었다. ‘함평 이씨’의 선조로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워 인근 ‘쥐머리산’ 일대를 사패지로 하사받기도 했단다.
▼ 함평이씨와 함께 마을의 세거 씨족인 함평노씨(고려 문하시중 ’노목‘을 시조로 모신다) 한림공파 슬산종가의 ‘서당’이란다. 옥녀탄금형의 명당에 장춘오헌을 짓고 때론 북벌을 상소하고 때론 서당을 열어 계몽에 앞장서 온 가문이란다. 하지만 서당은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라고나 할까?
▼ 동구 밖(이정표 : 종점까지 2.3km) ‘해당화’도 마을의 자랑거리로 꼽을 만 했다. 때를 못 맞춘 탓에 연분홍빛 꽃무리는 보지 못했지만 윤기가 자르르 한 황적색 열매가 나그네의 눈을 즐겁게 만들어주었다.
▼ 마을을 빠져나오면 또 다시 805번 지방도. 이곳에서 의외의 풍경을 만났다. 오가는 차량이 하나도 없는 벽지 도로에 교통신호등이 설치되어 있는 것이다. 눈에 들어오는 신호는 ‘점멸’, 저게 제대로 된 신호를 보낼 때도 있을까?
▼ 마을입구(신호등 사거리) 안내도는 ‘소풍(笑豊)의 명소’란 부제를 달았다. 그런데 우리가 익히 아는 ‘소풍(消風, 학생들이 좋아하는)’이 아니다. ‘웃을 笑’에 ‘풍성할 豊’자를 썼다. 웃음이 넘치는 마을이라는 얘기가 아닐까 싶다. 그것도 가슴이 확 트일 정도로...
▼ 서해랑길은 도로를 따르거나 횡단하지 않는다. 도로에 발을 걸치자마자 다시 내려와 ‘슬산저수지’의 둑길을 걷는다.
▼ 둑길 끝에는 ‘나주정씨절효비’가 세워져 있었다. 하지만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후기를 쓰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는 ‘무안문화원’의 자료에서도 찾아내지 못했다.
▼ 둑길 끄트머리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튼다. 이어서 민가 두어 채가 전부인 작은 마을(분재와 묘목을 기르는 농원이 볼만하다) 뒤 고개를 넘는다. 그러자 한 폭의 수채화 같은 풍경이 눈을 즐겁게 해준다. 평탄한 구릉지의 초록 밭들과 녹음 짙은 산자락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데, 그 너머로는 갯벌이 드넓게 펼쳐진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2시간 40분. 구릉지를 넘어 사야마을에 이른다. 원래 이름은 ‘샛들’, 슬산과 내분마을 사이에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사잇들’이란 의미인데 이게 음차되면서 ‘사야(沙野)’로 변했다. 다른 해석도 있다. 간척사업이 이루어지기 전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는데, 그 바닷물에 유난히도 많은 모래(沙)가 밀려왔다는 것이다.
▼ 사야마을과 내분마을 사이 구릉지, 거대한 팽나무(당산제를 지낸다는 ‘신목’일지도 모르겠다) 한 그루가 내분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다. 그늘에 평상까지 만들어놓은 걸 보면 내분마을 주민들의 참새사랑방 노릇까지 톡톡히 수행하는 모양이다.
▼ 사야마을에서 5분쯤 거리에 ‘내분마을’이 있다. ‘내분(內盆)’이란 지명은 마을의 생김새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지형이 소쿠리형으로 멀리서 보면 항아리처럼 생겼는데, 그 안에 마을이 위치한다는 것이다. 이 일대를 지칭하던 ‘분매동’을 위치에 따라 외분·내분·매곡으로 나눠부른다는 설도 있으니 참조하자.
▼ 고삭을 지나는데 금줄을 쳐놓은 ‘샘’이 눈에 띈다. 주민들이 ‘샘거리제’를 지낸다는 그 영험한 샘일지도 모르겠다. 샘을 메우자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상사가 마을에 자주 일어났고, 이에 놀란 주민들이 다시 복원하고 제사를 지내주었더니 그치더란다.
▼ 내분마을의 마을회관(이정표 : 종점 0.4km)을 지나자 드넓은 평야지대가 나타난다. 양매제방(내분제방이라고도 함)을 쌓아 만든 들녘인데, 탐방로는 이 들녘의 상부 어림을 가로지른다.
▼ 몇 걸음 더 걸으면 ‘양매마을’. 법정 동리인 양매리(兩梅里)의 5개 자연부락(매곡·토치·외분·양간1·양간2) 중 하나로 원래 이름은 분매동(盆梅洞)이었다, 마을 지형이 와우형인데 매화까지 많았다나? 그러다가 양대 씨족 중 하나인 광산김씨 측에서 파평윤씨가 주로 살던 분매동과 구분하기 위해 ‘매곡(梅谷, 입향조의 아들인 김득남을 모시는 사당이 ‘매곡사’이다)’이란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 날머리는 삼강공원(무안군 해제면 양매리)
매곡마을 앞에는 ‘삼강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삼강(三綱)이란 유교 도덕의 기본이 되는 세 가지 강령. 즉 임금과 신하(君爲臣綱), 부모와 자식(父爲子綱), 남편과 아내(夫爲婦綱) 사이에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말한다. 그러니 매곡마을에 이를 몸소 실천한 조상들이 있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 맞다. ‘광산김씨 충렬문(光山金氏 忠烈門)’과 ‘광산김씨 7효열각(光山金氏 七孝烈閣)’이 그 증거다. 정려편액(旌閭扁額) 2점이 걸려있는 충렬문(정려각)은 충의공 득남(병자호란 때 순국)과 부인인 밀양김씨를 그리고 효열각에서는 문중에서 배출한 5효자 2열부의 숭고한 정신을 기린다. 이들의 충효열(忠孝烈)을 기리기 위한 삼강비(三綱碑)는 충열문과 칠효열각 사이에 있다. 아니 있어야만 했다. 하지만 주인공인 빗돌은 어딘가로 떠나가고 빈 전각만 자리를 지키고 있을 따름이다.
▼ 분매동의 역사를 적은 유래비도 눈에 띈다. 첫발을 디딘 광산김씨 가문의 얘기가 주를 이룬 가운데, 나중에 들어온 파평윤씨 가문을 살짝 끼워 넣었다.
▼ 삼강공원은 광산김씨 가문의 얘기로 가득하다. 하지만 분매동에는 파평윤씨가 또 하나의 축을 이룬다. 그러니 그들이라고 해서 가만히 손 놓고 바라보고만 있겠는가.
▼ 서해랑길 안내도(무안 32코스 이정표는 삼강공원 앞, 팽나무 그늘에 세워져 있었다. 오늘은 3시간을 걸었다. 앱에 찍힌 거리는 13.27km,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평지에 가까운 길이 그만큼 수월했다는 얘기도 될 것이고... 참! 사진은 시점(수포마을)의 안내도(무안 31코스)를 게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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