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부가 수행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무슨 수행을 말하는 것인가. 앞의 네 가지 수행문을 닦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결과적으로 이 止觀을 닦기 위해서이다. 이 지관에 목적을 두지 않은 보시는 그저 주는 것으로 끝이 나고 지계는 사람이 응당 지켜야 하는 도리를 지키는 것으로 끝이 난다.
그리고 인욕 역시 참는 것으로 끝이 나고 정진은 그냥 원하는 것을 가지기 위해 매진하는 수준에 그친다. 세속에서도 더러 사람들이 이 수준까지는 한다.
하지만 지관에 나아가게 되면 앞의 네 가지 행위는 거룩한 수행이 된다. 그 수행은 결과적으로 이 지관수행을 하기 위한 바탕이 되기에 그렇다.
그러므로 보시없는 지계는 있을 수 없고 지계없는 인욕은 성립되지 않는다. 인욕없는 정진은 기대할 수 없다. 정진없는 지관수행은 되지 않는다는 말이 이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앞에 네 가지 수행 문을 닦아야 복이 이뤄지고 마음이 안정되게 된다. 그때서야 지관수행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말에 대해 의문을 가진다면 그 사람은 불자가 아니다. 불자는 반드시 이 기신론의 잣대로 수행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름만 불자지 그 속은 사교도나 이교도다.
이교도는 기신론의 말을 믿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은 진여삼매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들은 이 세간이나 내생에서 천국이나 천상같은 향락을 누리고자 한다.
■기신론■ 誹謗 重罪業障 我慢 懈怠 如是等人所不能入
비방하는 사람이거나 중죄로 업장이 두꺼운 사람, 아만에 차 있거나 게으른 자들과 같은 그런 사람들은 여기에 들어가지 못한다.
기신론을 비방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부처님에 대한 도전이고 불교에 대한 저항이다. 왜냐하면 기신론은 몇번이나 말했지마는 대승불교의 교과서이면서도 지침서이기 때문이다.
몰라서 비방했다면 지금부터라도 그 비방을 멈추어야 한다. 문제는 기신론을 잘못 배웠거나 죄업이 두꺼운 사람이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이 기신론이 똑바로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 그들의 시각이 비틀어져 있기에 그렇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아만에 차 있는 그들도 기신론은 하나의 논서에 불과하다고 평가 절하한다. 그러면서 자기가 좋아하는 경전 하나를 내세운다. 기신론은 경전이 아니지마는 이미 모든 경전의 골수를 다 가지고 있다. 그리고 수많은 논서 가운데 하나의 논서가 아니다. 기신론은 그 논서들을 모두 탄생시킨 바탕이다.
거기다가 게으른 자들도 문제다. 자신을 구제하거나 자신을 변혁시키기를 꺼리는 자들이다. 그래서 止의 수행에 임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은 이 기신론의 취지와 거리가 멀다. 이와 같은 사람들은 결코 진여삼매에 들어가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해동소□ 初中言住靜處者 是明緣具 具而言之 必具五緣
처음 가운데서 말한 정처에 안주한다는 것은 바로 지를 닦는 인연의 갖춤을 밝힌 것이다. 갖추어 말하자면 반드시 다섯 가지 조건이 구족되어야 한다.
진여는 우리 마음의 근본이다. 즉 불순물인 불각이 없는 상태의 순수마음이다. 그것이 불성이며 법성이다. 그 진여가 완전체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진여삼매라고 한다.
물고기를 잡으러 나가도 마땅한 장소와 도구가 있다. 학교에 가더라도 공부할 수 있는 준비물과 학구열이 갖춰져야 한다.
그런데 항차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렵다는 진여삼매에 들고자 하는데 어찌 조건과 마음자세를 따지지 않겠는가. 거기에 다섯 가지가 있다고 했다.
□해동소□ 一者閒居靜處謂住山林 若住聚落 必有喧動故
첫째는 편안하게 정처에 안거해야 한다. 말하자면 산림에 주거하는거다. 만약 취락에 살면 반드시 시끄럽고 다투는 일이 있게 된다.
참선을 하려면 정처에 머물러야 한다고 했다. 정처는 고요한 곳이다. 이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런데 어디 천지에 조용한 곳이 있던가. 산림 속인가? 산림은 산과 숲이다. 옛날 말이지 요즘은 산림 속이라 해도 정처가 될 수 없다. 산림이 깊으면 깊을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기에 그렇다.
취락은 마을이다. 마을에 살면 어쩔 수 없이 사람들과 음으로 양으로 부딪힌다. 안 부딪힌다고?! 반드시 시비에 휘말리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참선을 할 수가 없다. 여기에서 動은 움직일 동이 아니라 다툴 동 자이다.
그럼 아파트는 어떤가? 누가 그랬다. 아이들 다 결혼시키고 나니 자기 아파트가 절간 같다고.
"절간이라는 말 쓰지 말라고 했지?" "TV에 나온 어느 스님도 절간이라고 하던데요."
이조시대에 성리학자들이 사찰의 품격을 완전 격하시켰다. 그들은 사찰을 절간이라고 절하했다. 똥간 헛간 잿간 푸줏간과 같은 수준으로 하대했다. 그 영향으로 아직도 어떤 사람들은 절간이나 절집이라고 부른다. 그 스님도 마찬가지다. 미쳤는 모양이다.
맞다. 아파트. 그럴 수도 있겠다. 옆집과도 단절하고 산다는 도심의 아파트라면 최고의 정처가 될 수가 있을 거도 같다.
첫댓글 보시 지계 인욕 정진의 복으로 마음을 안정시켜 그때서야 비로소 지관수행을 시작할 수 있다니?!
動을 움직일 동이 아니라 다툴 동 자로 푸신게 재미있습니다.
하기야 가만히 있을 수 있는데 왜 다투겠습니까?
기신론해동소를 이렇게 재미있게 봅니다.
친절하게 때로는 엽기적인 터치까지.
정말 감사합니다 _()_
대승기신론해동소 정말 대단한 논서인것을 증명해주셨습니다.
너무 즐겁게 보고있는데
글올려수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