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 1592년 1월부터 1598년 11월까지
이순신 장군이 직접 쓴 일기로 제목은 없으며 난중일기는 나중에 붙여진 것이다
장군의 사정이나 전쟁 중이거나 잠시 통제사 자격이 박탈되었던 때의 일기는 빠져 있으며
매일 날씨를 자세히 기록하였다(여기는 날씨 선택 기록함) 사람들의 실명을 그대로 적었으며
전쟁 말기에는 일기의 글귀가 뭉개지거나 문장이 완성되지 못한 곳이 많다
장군이기 전에 한 사람으로서의 고뇌와 솔직한 감정이 담겨있으며 아들로 어머니께 극진한 효,
자식에 대한 걱정, 주위 사람에 대한 보살핌, 자신의 병이 깊어 가는 것에 대한 소상한 기록과
전쟁 중에도 폭발하는 감성과 번뇌가 뒤섞인 장군의 흔적이 눈물겹다
- - - - - - - - - - - - - - - - - - - - - -
1592년 [왜적의 침략이 시작되다]
1월 임진년 아침이 밝다
초1일
맑다. 새벽에 아우 우신과 조카 봉과 아들 회가 같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만 어머니 곁을 떠나서 두 해째 남쪽에서 설을 쇠니 슬픔이 복받쳐온다
12일
궂은비가 그치지 않았다.
동헌에서 본영과 각 진포의 진우(군의 실무담당자)와 활쏘기 시합을 하였다
19일
동헌에 나가 공부를 본 뒤 각 부대를 점검했다
2월 좌수영에 다섯 진포를 순시하다
초4일
북쪽 봉우리에 봉화대 쌓은 곳에 갔다. 축대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다.
이봉수가 부지런히 일한 것을 짐작하였다. 해질 무렵 내려와서 성 주변 해자를 둘러보았다
초8일
동헌에 나가 거북선에 쓸 돛베 29필을 받았다. 정오에 활쏘기를 하였다.
이몽구가 방답진을 순시하고 돌아와 방답첨사가 심혈을 기울여 방비한다고 매우 칭찬하였다
17일
나라의 제삿날(세종)이어서 일을 하지 않았다
19일
맑다. 순시를 떠나 백야곶(여수시 백도)에 감목관이 있는 곳에 이르렀다. 순천부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기생도 왔다. 비 온 뒤라 산마다 꽃이 활짝 피어 경치가 빼어나서 이루 말로 다 하기 어려웠다
20일
아침에 여러 가지 방비 실태와 전선을 점검했다. 전선은 모두 새로 만들었고 무기도 갖춰져 있었다
22일
녹도전(고흥)으로 갔다. 먼저 배 만드는 곳에 갔다. 여러 가지 물건을 직접 점검했다.
애쓴 정성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아울러 대포 쏘는 것도 지켜보았다.
홍양현감과 능성현감과 만호와 함께 취하도록 마셨다
25일
사도진(고흥 사도)의 전쟁 방비는 결함이 많았다.
군관과 책임 맡은 서리(아전)들은 처벌하고, 첨사는 잡아들이고, 교수(종6품 유학 교관)는 내보냈다
27일
북쪽 봉우리를 올라가 지형을 살폈다.
외톨이 섬이라 사방 적의 침입을 받을 텐데 성과 해자가 엉성하여 걱정스럽다
3월 거북선의 대포를 실험하다
초5일
좌의정(유성룡)이 편지와 <증손전수방략>이라는 책을 보냈다.
수륙전과 불 공격, 전술 등에 관한 것이 설명되어 만고에 보기 드문 저술이다
초6일
동헌에 무기를 점검하였다.
활, 갑옷, 투구, 화살통, 환도 등이 깨어지고 낡아서 담당 서리와 활 만드는 장인, 감고 등을 처벌하였다
20일
동헌에 나가 일을 하다가 각 부서 회계를 하였다.
순천 부사가 정해진 날짜에 관내를 조사하지 못하였기에 대장과 색리와 도훈도(향교에서 교육하는 훈도 중 으뜸)등을 처벌하였다.
사도 첨사(김완)에게 모일 것을 약속하는 공문을 보냈다.
겨우 반나절만에 내나로도(고흥) 외나로도(고흥) 대평도(여수) 소평도를 모두 조사했다는 거짓 보고에 홍양현감과 사도첨사에게 공문을 보냈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일찍 들어왔다
27일
배를 타고 소포에 가서 쇠사슬을 가로질러 걸어매는 것과 기둥나무 세우는 것을 보았다.
거북선에서 대포 쏘는 것도 시험하였다
4월 드디어 전쟁이 일어나다
초2일
몸이 몹시 불편하더니 차츰 더 아팠다
초3일
기운이 없고 어지러워 고통에 시달렸다
초4일
아침에야 비로소 통증이 가라앉았다
12일
거북선과 지자포(큰 총통) 현자포(다음으로 큰 총통)를 쏘아보았다
15일
해 질 무렵 경상우수사가 통첩을 보냈는데 왜선 90여 척이 부산 앞 절영도에 정박했다고 함과 동시에
경상좌수사의 공문에 왜선 250여 척이 부산포 건너편에 도착했다고 하였다 (14일 임진왜란 발발)
16일
밤 10시쯤 영남우수사 공문에 부산이 벌써 함락되었다고 하여 즉시 장계를 올리고 삼도에도 공문을 보냈다
17일
영남우수사 공문에 왜적이 부산을 함락하고 계속 머무르며 물러가지 않는다고 하였다
18일
순찰사가 공문으로 발포 권관은 이미 파직되어 임시로 맡을 장수를 보내라 하여 나대용을 보냈다.
오후 2시쯤 경상우수사의 공문에 동래는 이미 함락되었고, 양산과 울산의 두 수령도 패배하고,
경상좌병사와 경상수사가 동래까지 이르렀다가 곧바로 돌아왔다니 더욱 원통하다
(4.23~4.30까지의 일기가 빠져 있음)
5월 옥포에서 처음 적과 싸우다
초2일
삼도 순변사 이일과 우수사 원균의 공문이 왔다.
남해 현감과 미조항 첨사, 상주포, 곡포, 평산포 만호 등이 소문을 듣고 벌써 달아났고
무기와 물자도 흩어져 남은 것이 없다고 하였다
초4일
우척후(김완) 우부장(김득광) 중부장(어영담) 후부장(정운)등을 개이도에 들어가 수색하고
나머지 대장선은 평산포, 곡포, 상주포를 거쳐 미조항을 지나도록 약속하였다
(5.5~5.28일 일기가 빠져 있음 이때 옥포, 합포, 적진포 싸움)
29일
새벽에 노량에 이르렀다.
왜적들이 배를 대고 산봉우리로 올라가 진을 치고 배는 봉우리 밑에 벌려놓고 달려들었다.
나는 모든 장수를 독려하여 화살을 퍼붓고 각종 총통을 바람과 우레같이 쏘아대니 적들이 물러났다.
화살에 맞은 자가 몇백인지 알 수 없고 적의 머리도 많이 베었다.
군관 나대용이 총에 맞았고 나도 왼쪽 어깨에서 등으로 뚫고 지나갔으나 중상은 아니었다.
사부(활꾼)와 격군들도 탄환을 맞은 사람이 많았다. 적선 13척을 불태우고 물러났다
6월 당포에서 싸우다
초1일
맑다. 사량(통영) 뒷바다에 진을 치고 밤을 지냈다
초2일
당포 앞 선창에 이르니 적선 20여 척이 정박하여 우리 배가 둘러싸고 싸움을 벌였다.
적의 큰 배 누각에 앉아 있던 왜장이 화살에 맞아 굴러 떨어졌고 승자총통을 비 오듯 쏘아대며 왜적을 남김없이 무찔렀다.
조금 뒤 큰 왜선 20여 척이 들어오다가 우리 군사를 보고 개도(통영)로 도망쳤다
초4일
정오에 우수사와 지원 장수가 도착하여 장병들이 기뻐하였다
초5일
고성 당항포에 이르니 중간 배 12척, 작은 배 20척의 왜선이 버티고 있는데
한꺼번에 깨뜨리고자 비 오듯 화살을 쏘면서 왜장의 머리 일곱을 베었고 살아남은 몇 놈은 육지로 달아났다.
우리 군사의 기세를 크게 떨쳤다
초 7일
정오쯤 영등포 앞바다에 적선 5척을 발견하고 뒤쫓아 가서 목을 베니 머리가 모두 36개였다
(6.11~7.3까지 일기가 빠져있음)
8월 다시 부산으로 출정
(8.1~23까지 일기가 빠져있음 부산포에서 싸움)
24일
객사 동헌에서 정공(조방장 정걸)과 아침을 먹고 침벽정으로 갔다
28일
새벽녘에 앉아 꿈을 생각하니 도리어 길한 것 같았다
(12월까지 일기가 빠짐 8.24 노량,관음포 8.25 당포 8.26 거제 8.27 원포 8.28~29가덕진 9.1절영도 싸움)
1593년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1월 (한 달간 일기가 빠져있음)
2월 웅헌의 적을 쫓아 출격
초4일
늦게 날이 갰다. 성 동쪽 가장자리가 아홉 발이나 무너졌다.
오후 6시경부터 밤새도록 빗발이 세고 바람까지 극성을 부려 여러 배를 겨우 지켰다
초7일
새벽에 떠나 견내량에 이르니 원균, 기숙흠, 이영남, 이여념이 왔다
초8일
이억기가 늦게 도착했으나 거느린 배가 40척이 되지 않았다
초10일
오전 6시에 웅천현 웅포(창원)에 나가 줄지어 정박한 적선을 꾀어냈으나 지레 겁을 먹고 나서지 않았다
12일
웅포에 이르러 적을 꾀었으나 끝내 바다에 나오지 않았다. 어찌할꼬 분하고 분하였다!
14일
맑다. 증조부 제삿날이다.
아침에 삼도 수사들이 모여 작전을 정하고자 하였는데
경상우수사가 병으로 오지 못하여 전라좌우수영의 장수들만 모여 작전을 정하였다.
그런데 전라우수영 우후가 술주정을 하여 마음대로 지껄였다.
어란포 만호 정담수 남도포(진도)만호 강응표도 마찬가지였다.
큰 적을 무찌르려 작전을 약속하는데 이 지경에 이르니 분통을 이길 길이 없었다
15일
순찰사로부터 공문이 왔는데 명나라가 또 수군을 보내니 미리 대처하라 하였다
20일
새벽 배를 출발시켰는데 동풍이 불었다.
적과 마주치자 갑자기 큰바람이 불어 배들끼리 부딪쳐 파손이 되어 즉각 초요기를 세워 싸움을 그치게 하였다
22일
새벽에 구름이 끼고 동풍이 세게 불었다. 그러나 적을 치는 일이 시급하여 출항하였다.
웅천에 도착하여 두 승장(삼해와 의능)과 의병장 성응지를 보내 제포로 보내 상륙하는 체하니
왜적들이 갈팡질팡하는 사이 배를 모아 일시에 쳐들어가니 적들이 흩어지고 힘이 약해져 거의 섬멸하였다.
그러나 발포 2선, 가리포 2선이 명령도 없이 뛰어들다가 좌초에 걸려 적들에 공격당하고 말았다.
분하고 분하여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얼마 뒤 진도 지휘선이 적에게 포위되어 위험할 지경에 이르니 오후가 바로 뛰어들어 구해내었다.
경상좌위장과 우부장은 못 본 체하고 끝내 도와주지 않았다. 괘씸하여 말조차 하기 싫다.
분하고 분하다.
이 때문에 경상도 수사 원균을 꾸짖었지만 통탄스럽다.
오늘의 분함을 어찌 다 말하며 모두가 경상도 수사 때문이다
25일
바람의 흐름이 순조롭지 않아 그냥 칠천량에 머물렀다
28일
새벽에 출항하여 가덕진에 이르니 적들이 기가 죽어 맞서 싸울 생각이 없는 듯하다.
그런데 경상 수사의 군관과 가덕첨사의 탐색선이 들락날락하여 살펴보니 고기잡이하는 사람들의 머리를
베어가니 하는 꼴이 황당하여 잡아다가 경상수사(원균)에게 보내니 크게 화를 내었다
30일
하루 내내 비가 내렸다. 배를 덮는 누추한 뜸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3월 웅천을 둘러싼 싸움은 계속되고
초2일
누추한 뜸 밑에 웅크리고 있었다. 온갖 생각이 떠올라 번잡하고 어지러웠다.
영남과 이여념이 원균의 비리를 전하였다. 깊이 탄식할 따름이다
13일
수사 이억기와 첨사 이홍명과 함께 바둑을 두었다
14일
여러 척의 배 만들 나무를 실어 왔다
15일
우수사가 와서 여러 장수와 관덕정에서 활쏘기를 하였다. 우리 장수들이 이긴 것이 66번이었다.
우수사가 떡과 술을 만들어 왔다
16일
또 활쏘기를 하였는데 내가 거느린 장수들이 30여 번을 이겼다. 원균이 크게 취하여 돌아갔다
21일 맑다
22일 맑다
(이후 4월까지 일기가 빠져 있음 2월 6일~4월까지 원포, 웅포에서 5차 해전)
5월 다시 경상도로 출격하다
초2일
선전관 이춘영이 임금의 교지를 가져왔다. 도망가는 적을 무찌르라는 것이었다
초4일
어머니 생신이지만 적을 토벌하는 일로 술잔을 올리지 못하니 평생의 한이다
초5일
선전관 이술일이 경상도에서 돌아와 명나라에서 나에게 ’은자금자광록대부‘라는 작위를 주었다고 하나
잘못된 소문일 게다
초10일
견내량에 다다르니 우수사와 가리포첨사와 이야기를 나누는데 갑자기 선전관 고세호가 임금의 교지를 가져왔다. 부산에 적을 토벌하라는 내용이었다
초12일
선전관 성문개가 왔다. 피난 중에 계신 왕의 사정을 자세히 전하였다. 통곡할 일이로다!
13일
달빛이 배에 가득한데 혼자 앉아 뒤척뒤척하였다. 온갖 시름이 가슴을 쳐서 자리에 들었으나 잘 수 없었다
14일
선전관 영산령 예윤이 왕의 교지를 가져왔다. 피난 중인 왕의 사정과 명나라 군대가 하는 짓을 들었다.
애통하고 애통하였다!
16일
마음이 불편하여 드러누워 끙끙 앓았다.
명나라 장수가 중도에서 머뭇거리는데 다른 생각이 있는 듯하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나라를 위해 배우 걱정스럽다. 일마다 이러하니 탄식이 절로 나고 눈물이 흘렀다
18일
몸이 몹시 불편하여 온백원(위장약) 네 알을 먹었다.
오후 2시쯤 명나라 관리 양보가 진 앞에 도착하여 우별도장 이설을 마중 보내어 데려왔더니 매우 기뻐하였다.
내 배에 오르도록 청하고 황제의 은혜에 고맙다고 인사하였다.
그는 우리 전함의 위용이 대단하다고 칭찬하였다. 예물을 주니 사양하는 듯하더니 즐거워하면서 거듭 고맙다고 하였다
25일
통사 표현을 오라고 하여 명나라 장수가 하려던 말을 물었으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보고에 따르면 송시량이 우리 수군의 허실을 알아보려고 양보를 보냈는데 수군의 위세가 대단하니 기쁘다고 하였다
29일
원균이 송경락이 보낸 불화살 1천5백30개를 자기만 쓰려고 하였으나
병사 편에 공문을 보내 나누어 달라 하니 매우 못마땅해하면서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을 했다고 한다
6월 한산도로 진을 옮기다
초1일
어머니가 평안하시다는 편지와 아들과 조카 봉의 편지도 함께 왔다
초10일
저녁에 영등포 척후병이 와서 웅천의 적선 4척 본토로 돌아갔고
김해 바다 어귀에 있던 150여 척 중에서 19척도 돌아갔고 나머지는 부산으로 향했다고 하였다
12일
아침에 흰머리털 여남은 오라기를 뽑았다.
흰 머리카락이 있다고 싫어할 일이겠냐만 위로 늙으신 어머니가 계시기에 그리한 것이다
21일
새벽에 진영을 한산도 망하은도(통영시 한산면)로 옮겼다
22일
배를 만들기 위해 자귀로 나무를 깎기 시작했다
23일
아침 일찍 목수들을 점검하였더니 한 명도 빠지지 않아 새 배의 밑판을 다 만들었다
25일
진양성(진주성)이 포위당했는데, 날마다 비가 와서 적들이 물에 막혀 악독한 짓을 못 하는 걸 보면
하늘이 돕는 것이다
28일
강진의 탐색선이 적과 싸운다고 하여 진을 이끌고 견내량에 도착하니 적의 무리가 우리 군사를 보고 놀라
달아났다
7월 진주성이 함락되다
초5일
새벽에 망보는 군졸이 견내량에 적선 10척이 넘어왔다고 보고하여 모든 배가 한꺼번에 출동하니 적선이 부리나케 도망하였다.
광양으로부터 진주성이 함락되었다는 급한 보고가 왔다
13일
본영의 탐색선이 들어와서 행주에서 크게 이겼다고 떠들어댔다
14일
진영을 두을포(통영 한산면)로 옮겼다. 몸이 불편하여 신음하였다
15일
가을 기운이 바다에 들어 나그네의 가슴이 어지럽다.
혼자 배에 뜸 밑에 앉아 있으니 마음이 몹시 산란하다.
달빛이 뱃머리에 들고 정신이 맑아지네 누워서도 잠을 이루지 못하는데 어느덧 닭이 우는구나!
16일
몸이 몹시 불편하였다
17일
비가 계속 내리고 몸이 몹시 불편하였다
18일
몸이 불편하여 앉았다 누웠다 하였다
19일
광양 현감이 보낸 진주에서 전사한 장병들의 명부를 보니 가슴이 아파 견딜 수가 없었다
8월 아들 염의 병을 걱정하다
초3일
아들 염이 종기를 침으로 찢던 일을 전하는데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만약에 며칠만 늦었어도 목숨을 구할 수 어려웠다는 것이다
초9일
경상수사는 매복병을 같이 보내기로 약속하고 먼저 보냈다고 한다. 해괴한 일이다
12일
몸이 몹시 불편하여 앓았다. 식은땀이 때도 없이 흘러서 옷을 적셔 억지로 일어나 앉았다
9월 왕께 수군의 폐단을 보고하다
초7일
순찰사에게 수군의 폐단을 진술하는 공문과 또 군대를 다시 배치하는 공문을 만들어 보냈다
초10일
공문을 처리하여 탐색선에 보내다
15일 맑다
(이후 12월까지 일기가 빠져있음)
1594년 [명. 일 간에 강화가 진행되다]
1월 나라의 치욕을 씻어라
11일
아침에 어머니를 뵈러 배를 탔다.
고음천(여수시 응원동. 1592년부터 5년간 기거함. 현재 이 집은 사람이 살고 있으며 안내 팻말이 있음)에
어머니를 뵈러 갔더니 아직 주무시고 계셨다.
큰소리로 부르니 놀라 깨어서 일어나시는데 기운이 가물가물하시고 살아 계실 날이 얼마 남지 않으신 듯했다.
하릴없이 눈물만 흘러내렸다. 그러나 말씀하시는 것은 조금도 어긋남이 없으셨다.
왜적을 물리칠 일이 급하여 오래 머무르지 못했다
12일
아침을 먹고 어머니께 돌아가겠다고 말씀드리니
"잘 가서 나라의 욕됨을 속히 씻거라" 말씀하시며 몇 번이고 거듭 타이르며 헤어지는데 조금도 슬픔을 나타내지 않으셨다.
선창에 들어와 몸이 불편하여 바로 뒷방으로 들어갔다
15일
동궁의 명령이 내려왔는데 군사를 거느리고 적을 토벌하라는 독려였다
24 일
경상원수사가 군관을 보내 좌도의 적 300명을 베었다고 보고하였다. 기쁘기 짝이 없다
2월 거제로 모여드는 적을 무찔러라
초1일
겸사복(정예 기병 중심의 친위병)이 왕의 분부를 가져왔다.
‘좌도의 적이 거제로 모여들어 전라도를 침범하니 그대는 삼도의 수군을 합하여 왜적을 무찌르도록 하라 ‘는
것이었다
초2일
아침에 도망가는 군사를 실어내던 자들을 처벌하였다.
사량첨사가 약속한 날짜에 오지 못하여 벌을 주었다
초10일
오후에 조방장과 순천부사가 와서 적을 토벌할 방도를 의논하였다
12일
선정관이 서울 소식과 영의정의 편지를 가져왔다.
위에서 애쓴다는 소식을 들으니 고마움과 그리움이 끝이 없다
13일
영의정에게 편지를 썼다
21일
몸이 불편하여 앓았다.
순천부사와 우조방장 어영담이 견내량에 매복한 곳을 살펴보았다고 보고하였다.
오후 6시쯤 벽방 망대에서 고성 구화역 앞바다에 왜선 8척이 정박했다고 보고하였다.
그래서 배를 풀어 삼도에 진격하자고 약속하고 제홍록의 보고를 기다렸다
(2.23~2.27 일기가 빠져있음)
3월 당항포에서 웅크린 적선을 불태우다
초4일
진해 앞바다에서 왜선 6척을 추격하여 불태웠다.
저도에서 2척을 불태우고 소소강에 14척이 들어와서 조방장과 원수사에게 토벌하라 명하고
고성땅 아자음포에서 진을 치고 밤을 보냈다
초6일
당항포에서 왜선 21척을 모조리 불태웠다고 긴급 보고가 왔다.
명나라 군가 두 명과 명나라 도사부 당종인이 적을 치지 말라고 하였다.
나는 심기가 매우 괴로워서 앉고 눕기조차 불편하였다
초7일
몸이 괴로워서 뒤척이는 것조차 어려웠다. 공문을 아랫사람을 시켰더니 글 꼴이 말이 아니었다.
할 수 없이 병을 무릅쓰고 일어나 글을 짓고 정사립에게 쓰게 하여 보냈다
초10일
이제야 병세가 나아졌으나 열기가 올라와서 찬 것만 마시고 싶었다
19일
몸이 불편하여 하루 내내 앓았다
20일
몸이 불편하였다
21일
몸이 몹시 불편하였다
24일
몸이 조금 나아지는 듯하였다
4월 조방장 어영담이 죽다니
초4일
별시를 열었다.
시관인 나와 우수사 충청수사 장흥부사 삼가현감 웅천현감이 시험감독을 하였다
초7일
일찍 모여 시험을 보았다
초8일
몸이 불편하여 저녁때 시험장에 올라갔다
초9일
아침에 시험 결과를 알리는 방을 내다 부쳤다.
조방장 어영담이 세상을 떠났다. 이 슬픔을 어찌 말로 할 수 있으랴!
26일
내 병세가 더욱 심해져서 거의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5월 바다 위에 떠 있는 수많은 우리 배를 바라보며
초7일
침을 16곳이나 맞았다 기운이 나아진 듯하다
초8일
원수(권율)의 군관 변응각이 왕의 유지를 가지고 왔다.
수군을 거제로 진격시켜 적이 겁을 먹고 도망가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경상우수사와 전라우수사 불러 의논하였다
초9일
비가 계속 내렸다.
하루 내내 빈 정자에 혼자 앉아 있었더니 온갖 생각이 가슴을 치고 머릿속이 매우 어지러웠다.
무슨 말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가슴이 막혀 취한 듯 꿈꾸는 듯 바보가 된 듯 미친 듯하였다
6월 명나라 수군이 오다
초4일
겸사복이 왕의 분부를 가져왔다.
그 글 가운데
‘수군이 여러 장수와 경상도의 장수가 서로 화목하지 못하니 예전에 나쁜 습관을 모두 바꾸라는 말씀이 있었다.'
통탄스럽기 짝이 없었다. 이는 원균이 취하여 망발을 부렸기 때문이다
초10일
찌는 듯이 더웠다. 활을 5순 쏘았다
12일
격군 7명이 도망갔다
7월 유성룡을 걱정하는 마음
초3일
저녁에 새로 지은 수루를 보았다
초10일
아침에 들으니 면의 병이 심해져서 피를 토하는 증세까지 있다고 하니
울과 신경황, 정시립, 배응록 등을 같이 보냈다
22일
저녁에 수루에 올라가서 밤까지 앉았다가 돌아왔다
8월 원수 권율을 만나다
초2일
비가 퍼붓듯이 내렸다. 초하루 한밤중 꿈에 부안사람(첩)이 아들을 낳았다.
달 수를 계산하니 낳을 달이 아니므로 꿈에서도 쫓아버렸다
17일
낮 12시에 사천에서 원수가 만나자고 청하였다
18일
원수가 초청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원(원균)수사는 취하여 일어나지 않는다.
혼자 배를 타고 삼천포에 도착하여 하룻밤을 머물렀다
27일
아침에 조카 울의 편지를 보니 아내의 병이 심하다고 하여 아들 회를 보냈다
30일
아내의 병세가 매우 심하다고 한다. 나랏일이 이러하니 아들 셋, 딸 하나는 어떻게 살아갈까
가슴이 아프고 괴롭구나
9월 왕은 싸우지 않는다고 독촉하니
13일
어제 마신 술이 깨지 않아 방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21일
저녁 무렵 여러 장수들에게 뛰어넘기를 하게 하고 군사들에게는 씨름을 겨루게 하였다
22일
다가오는 27일 군사를 출동시키라는 원수의 밀서가 도착했다
26일
새벽에 곽재우, 김덕령 들이 견내량에 도착하여 건너온 까닭을 물으니
원수가 수군과 합세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27일
아침 늦게 여러 배와 한꺼번에 출발하니 적도 앞바다에 도착하였다.
곽재우 김충남 주몽룡도 모두 도착하여 각자 원하는 곳으로 나누어 보냈다
29일
거제 장문포 앞바다로 갔으나 적의 부리가 험난한 곳에서 웅크리고 나오지 않았다.
맨 앞에 나선 적의 배 두 척을 공격하니 육지로 도망쳤다.
빈 배만 불태우고 칠천량에서 밤을 지냈다
10월 수륙 양군이 호응하여 장문포의 적을 공격하다
초1일
장문포에 도착 왜적들이 도무지 싸우려고 하지 않았다
초2일
여러 장수를 끌고 장문포에 갔으나 적이 대항하지 않아 칠천량으로 돌아왔다
초4일
곽재우 김덕령 등과 약속하고 군사 수백 명과 함께 산으로 올라가게 하였다.
선봉이 먼저 장문포를 들락거리며 싸움을 걸고 중군을 거느리고 진격하니 적이 기세를 잃고 급히 달아났다
초6일
선봉 부대를 적의 소굴로 보내니 왜놈들이 패문을 써서 땅에 꽂아 놓았다
26일
장인어른 제삿날이어서 관청에 나가지 않았다
11월 항복한 왜인을 훈련시키다
초1일
몸이 몹시 불편하여 하루 내내 나가지 않았다
초4일
대청에 나가 항복한 왜병들을 문초하였다
초5일
송한령이 대구 10마리를 잡아 왔다
11일
동지라서 군사들에게 팥죽을 먹였다
12일
견내량에서 제멋대로 방어선을 넘어 고기잡이를 한 24명에게 곤장을 때렸다
13일
15일은 아버지 제삿날이라 오늘부터 관청에 나가지 않았다. 혼자 방 안에 있으니 슬픈 마음 말할 수 없다.
상주에 사는 사촌 누이가 편지를 가지고 그 아들 윤엽이 본영에 왔다. 영의정이 보낸 편지도 왔다
26일
메주 10섬을 쑤었다
27일
항복한 왜적을 모두 모아서 총 쏘는 연습을 시켰다
첫댓글
【 1592년 】
1월 - 임진년 아침이 밝다
2월 - 좌수영에 다섯 진포를 순시하다
3월 - 거북선의 대포를 실험하다
4월 - 드디어 전쟁이 일어나다
5월 - 옥포에서 처음 적과 싸우다
6월 - 당포에서 싸우다
8월 - 다시 부산으로 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