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 101장면 - 한국 최초 내한 음악인 1902년 내한을 한 4인조 혼성 성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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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4.05.22. 19:17조회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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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 101장면
한국 최초 내한 음악인
1902년 내한을 한 4인조 혼성 성악단
요약 1920년 7월 30일 오후 8시, 서울 종로 중앙기독교 청년회관에서 있던 서양 음악인의 공연.
미국인 칙스와 레이스, 페인 러시아계 여성 라이슨벅 총 네 사람이 내한.
라이슨벅을 제외한 세 사람이 모두 흑인 남성이라는 점이 화제가 됨.
입장료는 2원, 1원, 50전 세 등급으로 나뉨. 흑인들의 대중적이고 코믹한 노래가 환호를 받음.
혼성 성악단이 왔을 때 천리구 김동성이 <동아일보>에 그렸던 삽화
흑인들의 내한은 뉴스의 초점이 되었고, 그들의 노래는 깊은 감명을 주었다. 김동성은 언론인으로서 더 잘 알려져 있지만, 그는 우리 나라 만화계의 개척자이기도 하다. 삽화를 그리기도 했고, 만화 이론을 쓰기도 했다.
한국인이 한국 땅에서 최초로 서양 음악인의 공연 모습을 직접 목격하게 됐다는 것은 커다란 문화적 충격으로서, 그것은 세계를 알게 되는 일대 사건이라 할 수 있었다. 그 일은 1920년 7월 30일 오후 8시, 서울의 종로 중앙기독교 청년회관에서 있었다.
내한한 음악인들은 미국인 칙스와 레위스·페인 그리고 러시아계 여성인 라이슨벅 등 네 사람이었다. 이들은 당시 세계 각국을 순회 공연중이던 성악단으로, 종로 중앙 청년회의 초청으로 공연 나흘 전에 서울에 당도한 것이다.
그런데 이들이 내한했을 때부터 화제가 만발했다. 왜냐하면 성악단원들 중 라이슨벅을 제외한 세 사람이 모두 흑인 남성이었기 때문이다. 서양 음악인들이 내한하여 공연을 한다는 사실보다 그 세 사람이 더 흥미를 끌었다. 한국 땅에 흑인이, 그것도 음악가가 나타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말로만 듣던 흑인을 처음 본 것이다. 당시 일간지들은 이 사실을 두고 '조선 초유 미국 흑인의 성악회'라고 연일 보도했다.
입장료는 2원, 1원, 50전, 세 등급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당시 신문 한 달 구독료가 80전이었으니까 이 입장료는 결코 싼값이 아니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볼 때 공연 기획은 상당히 치밀하게 진행된 듯이 보인다.
그러면 사상 초유의 이 공연 모습은 어땠을까? 흑인들은 어떤 프로그램으로 순회공연을 하고 있었으며, 이를 지켜본 한국 청중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이에 대해서는 당시 <동아일보>의 취재 기사를 살펴보는 것이 좋을 듯 하다.
"(전략) 정각 전부터 살빛 다른 친구의 음성 다른 노래와 요절할 웃음거리를 듣고 보고자 모여드는 남녀 군중은 거의 청년회 층계가 빽빽하도록 몰려들어와서 사회자 구자옥(具滋玉)씨가 개회를 하겠다는 인사를 할 때에는 이미 아래 위층 넓은 회장에는 송곳 하나 세울 틈이 없게 되었으며, 원래 내외국에 소문이 높았던 흑인의 노래라 그런지 경찰서에서 쓰는 인찰지권이나 해산명령시킬 재료나 모으러 오는 각 경찰서 고등계 형사 이외에는 별로 오지 않던 일본인이 7, 8인이나, 그것도 모조리 꽃 같은 애기씨네가 반수 이상이 나온 것은 매우 신기하였으며, 청년회가 거의 떠나갈 듯한 박수갈채 중에 오입장이 지친 것 모양으로 큰 몸뚱이를 마음대로 흥청거리는 칙스 군, 검은 낯에 번득거리는 동자를 굴리며 금시에 누구에게든지 장난을 청할 듯이 입짓 눈짓을 하는 레위스 군, 난봉 아들의 빚 물어주기에 엉망이 된 듯이 이마에서 턱까지 50여 갈래의 주름살이 잡힌 페인 군이며, 푸른 눈썹, 붉은 입술은 가히 중국에 났더면 매란방이와 짝도 삼았을 만한 라이슨벅 부인이 다각기 검은 낯에 흰 웃음과 붉은 입술에 곱상스러운 웃음을 띄우고 무대에 올라 기다리고 기다리던 재미있고 우스운 흑인종의 진기한 노래는 경성에서 첫소리를 내놓게 되었다.
맨 처음에 경성악대의 양악이 있은 후 '닷주었다!'라는 노래로부터 흑인들의 우렁차고 유장한 노래는 시작되었다. 순서를 따라 차차 재미있는 곡조와 점점 우스워가는 표정과 동작은 1천여 인 청중으로 하여금 허리를 펴지 못하게 하였으며, 더욱이 1부 다섯째에 '토봉가(土峰歌)'와 2부 열째의 '고양이 노래'는 진실로 그 익살맞은 곡조와 요절할 동작이 조화되어 실로 초상 상주도 웃지 않을 수 없었으며, 오직 제1부 마지막의 '모세에게로'라는 애끓는 비애곡이 있어 한 조화를 주었으며···(후략)."
이때의 공연은 반주가 없었던 것으로, 성악단은 대중적이고 코믹한 노래를 주로 부른 듯하다. 초상을 당한 상주조차 웃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한 것을 보면 흑인들의 몸짓이나 표정 자체가 매우 익살스러웠던 것 같다. 또 그들을 처음 보기 때문에 한국인들은 흑인들의 모습을 무섭게도 보고, 또 우습게도 본 듯하다.
그러나 기사의 행간을 유심히 살펴보면 그들 흑인 성악단은 기독교 선교와 연관이 있는 듯하면서도, 매우 수준 높은 공연을 보여준 것으로 보인다. 아시아의 작은 나라에 왔을 때 그들은 그에 맞는 레퍼토리를 선정했을 것이다. 거기에 흑인 영가가 빠질 수 없었다. 제1부 마지막에 있었던 애끓는 비애곡은 흑인들이 아니면 제대로 표현할 수 없는 그들만의 곡조였을 것이다. 이로 볼 때 한국인들은 처음 맞이한 흑인들로부터 흑인음악의 진수를 선사받은 듯하다.
흑인 성악단은 한국의 청중으로부터 열렬한 환호와 갈채를 받았다. 그래서 일정을 바꾸어 수차레 지방공연을 갖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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