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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문화유산 스크랩 배롱꽃이 만개한 명옥헌원림
눌인 추천 0 조회 51 11.09.03 10:03 댓글 4
게시글 본문내용

배롱꽃이 만개한 명옥헌원림

 

 

우리나라의 지정 문화재들은 그 중요성에 따라 국보, 보물, 사적, 사적 및 명승, 명승, 천연기념물, 중요무형문화재, 중요민속문화재, 시도유형문화재, 시도무형문화재, 시도기념물, 시도민속문화재, 문화재자료, 등록문화재 등으로 분류되어 지정된다. 최고 즉 으뜸은 국보요, 그 다음은 보물인 셈이다. 시도기념물에서 국가지정문화재인 명승으로 바뀌었다는 것은 그만큼 격상되었다는 뜻이며, 보존을 위한 국가의 지원도 달라진다. 그렇다고 국보가 보물보다 꼭 훌륭하다고만 할 수는 없다. 각 문화재들은 그 나름대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대통령이 시골 촌부보다 꼭 우월하지 않은 것처럼…….

 

명승 제40호 담양 소쇄원(潭陽 瀟灑園)

전남 담양에는 명승으로 지정된 문화재가 세 곳이 있다. 명승 제40호로 지정된 담양 소쇄원(潭陽 瀟灑園)과 제57호인 담양 식영정 일원(潭陽 息影亭 一圓), 그리고 제58호인 담양 명옥헌 원림(潭陽 鳴玉軒 苑林)이 그곳이다. 남면 지곡리 123번지 등에 위치한 소쇄원은 지정구역이 4,399㎡, 보호구역 117,051㎡으로 2008. 5. 2 지정(등록)되었다. 남면 지곡리 산75-1 등 28,039㎡에 있으며 명승 제57호인 담양 식영정 일원(潭陽 息影亭 一圓)은 2009. 9. 18 시도기념물(담양군)에서 명승으로 승격되었다. 이 날 함께 승격된 유적이 바로 고서면 산덕리 511번지 등에 있는 담양 명옥헌 원림(潭陽 鳴玉軒 苑林)이다. 그러나 천안전씨 종중소유로 전남 담양군 남면 연천리 산91 일원에 있는 독수정원림(獨守亭園林)은 시도기념물 제61호(담양군)로 1982.10.15 지정되었지만 명승으로 승격되지는 않았다.

독수정원림(獨守亭園林) 시도기념물 제61호(담양군)

1980. 6. 2 시도기념물 제44호(담양군)로 지정되었을 때 지정 명칭은 담양후산리명옥헌원림(潭陽后山里鳴玉軒苑林)이었으나, 2009. 9.18 명승으로 승격되면서 13,484㎡ 가 담양 명옥헌 원림(潭陽 鳴玉軒 苑林)으로 그 이름이 바뀌었다.

 

나는 담양을 너무나 좋아한다. 이곳에는 면앙정 송순, 송강 정철, 고봉 기대승, 서하당 김성원, 하서 김인후, 제봉 고경명, 옥봉 백광훈, 귀봉 송익필 등 당대의 명유(名儒)와 사림(士林)들이 학문을 연찬하던 곳이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많은 정자들이 그곳인데, 면앙정, 송강정, 식영정(息影亭) 등 그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는 정자 수십여 개가 사방 수 km 이내에 포진해 있다. 송순의 면앙정가와 정철의 사미인곡을 비롯한 우리나라 가사문학의 산파역할을 한 그 아름다운 시가들은 모두 이들 정자 안에서 탄생하였다. 서로 교우하던 그들은 아름다운 경치가 보이는 높은 언덕에 정자를 짓고 음풍(吟諷) 영월(迎月)을 즐기면서, 시문을 익히고,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살린 우수한 작품들을 남겼던 것이다. 그 외에 사촌 김윤제(沙村 金允悌: 1501∼1572)의 집인 환벽당도 빼 놓을 수가 없다.

 

매화꽃이 필 때는 어김없이 이곳 담양을 찾는다. 명매(名梅) 특히 고매(古梅)가 곳곳에 숨어있기 때문이다. 창평면 장화리 장전마을의 장전매(長田梅), 미암 유희춘(柳希春)의 부인이자 여류시인인 송덕봉(宋德奉)의 후손이 사는 장화리 화양마을 홍주송씨 종택(宗宅)인 하심당(下心堂)의 하심매(下心梅), 고서면 분향리 죽림재(竹林齋;전라남도기념물 제99호)의 죽림매(竹林梅), 고려 충신 전신민 장군 후손들이 모여 사는 남면 연천리 독수정원림(獨守亭園林;전라남도기념물 제61호)의 독수정매(獨守亭梅), 소쇄원(瀟灑園)의 소쇄매(瀟灑梅), 환벽당(環碧堂)의 환벽매(環碧梅), 창평면 해곡리 유종헌가옥(柳宗憲家屋;전남문화재자료 제192호)의 와송당매(臥松堂梅), 대덕면 장산리 "미암일기"의 본향에 있는 미암매(眉巖梅) 등등이 그것이다. 그 중 호남오매(湖南五梅)로 선정된 전남대의 대명매(大明梅), 담양군 지곡리 지실마을의 계당매(溪堂梅)는 이곳에서 자란 나무들이다. 대명매는 광주의 전남대 교정으로 거처를 옮겼지만....(이들 중 일부는 나의 블로거 세계의 아름다운 정원> 탐매여행에 소개되어 있다. 참고바란다.)

 

그러나 담양지역 답사여행을 갔을 때마다 이들 정자보다, 명매(名梅)가 자라는 곳 보다 더 많이 들리는 곳, 아니 빠짐없이 들렸던 곳이 있었으니, 바로 '소쇄원(瀟灑園)'과 '명옥헌원림'이다. 내가 꿈꾸는 눌인원림 경영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여서도 하지만 이곳을 방문할 때마다 너무나 안온한 느낌이 들곤 하였기 때문이다.

 

오늘 소개할 '명옥헌원림'에서 만개한 배롱나무를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담양지방은 매화 뿐 아니라 배롱나무로도 유명한 곳이었다. 환벽당과 직선거리로 100m 정도 떨어져 있는 식영정 사이에는 자미탄이라는 하천이 흘렀다고 한다.

 

자미탄(紫薇灘)은 자미 즉 백일홍, 즉 자미(紫薇)의 꽃이 핀 개울이란 뜻이다. 또 하늘의 상제(上帝)가 거처하는 별자리로 알려진 자미원(紫微垣)을 인간 세상에 재현해 놓은 곳이라는 뜻도 된다. 해마다 7월부터 9월까지 100일 동안 만발한 진홍색 배롱나무(백일홍)가 증암천 여울에 비추어 졌고, 임억령?김성원?고경명?정철 등 사선(四仙)이 식영정과 환벽당을 오가며 백일홍 꽃이 만발한 여울을 찬미하는 시가(詩歌)를 읊었던 곳이라 하여 자미탄(紫薇灘)으로 불려 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광주댐이 건설되기 전인 1974년 이전까지만 해도 식영정 앞 절벽 아래에 오솔길이 있었고, 길 아래에는 원효계곡에서 흘러내린 증암천이 있었으며, 오솔길과 증암천 사이에는 높이 10여 미터의 낭떠러지와 암벽이 있었다고 한다. 또 담양군 남면 학선리에서 성산에 이르는 증암천과 오솔길 주변에는 백일홍이 숲을 이루었는데, 광주댐 공사로 그 아름다운 절경이 모두 물속에 잠겨 버렸다 한다. 이는 우리의 귀중한 문화 유적과 자연경관을 무차별하게 훼손해버린 사례의 하나인 것이다.

 

백일홍은 중국 남부가 원산지이고, 우리나라에는 중부이남 지역에 자생하거나 사원이나 마을 근교에 관상용으로 심었다. 학명은‘Lagerstoemiamdical’ 이며 통상 '배롱나무’로 불리고 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일반적으로 백일홍(百日紅)이라고 하며, 특히 묵객이나 중국에서는 자미화(紫薇花)라고 한다. 또한 영국에서는‘Crape Myrtle’이라고 하며, 일본에서는‘サルスぺ’이라고 한다. 백일홍은 줄기가 적갈색이고 껍질이 벗겨지는 부분은 흰 반점이 남는다. 잎은 마주나기 또는 어긋나기를 하고 도란형이나 타원형이다. 특히 백일홍은 7월부터 9월까지 백일 동안 진홍색, 담홍색, 연보라색, 박색 등의 아름다운 꽃이 피어있어 멀리서도 아름다움을 관상할 수 있다.

 

다음은 식영정 사선(息影亭 四仙)이라 불리는 임억령, 정철, 김성원, 고경명이 자미탄을 읊은 시들이다.

紫 薇 灘 백일홍 꽃핀 여울

誰把中書物 누가 있어 붓으로 그림 그려 놓았듯이

今於山澗栽 여기 산골 물가에 백일홍 심어 놓았나

仙粧明水底 선녀 같은 고운 단장 물아래 비쳤으니

魚鳥亦驚猜 물고기와 날새들 놀라 시샘을 하네.

- 석천 임억령

 

灘響已堪聽 여울 물소리 계속 들리는데

名花誰復栽 이름난 백일홍 누가 또 심어 놓았나

山家新濯錦 산 가에서 새롭게 빨아놓은 비단이라

賈客莫相猜 장사치 길손아 시샘을 하지를 마오.

- 서하당 김성원

 

天姿元富貴 생긴 자태 본디 부귀가 으뜸인데

寧待日邊栽 어찌 또 때맞추어 여울 가에 심었는고

夾岸紅霞漲 골짜기 언덕엔 붉은 노을 가득하니

漁郞恐眼猜 고기잡이들, 시새워볼까 두렵네.

- 제봉 고경명

 

花能住百日 아름다운 꽃 백일이나 필 수 있기에

所以水邊栽 그래서 물가에 심은 거라네

春後有如此 봄이 지난 뒤에도 이처럼 피어 있으려니

東君無乃猜 봄이여! 이에 시샘을 하지를 마오.

- 송강 정철

 

다음은 송강 정철이 자미(백일홍)에 대해서 읊은 시이다.

 

詠紫薇花 백일홍을 노래 함.

一園春色紫薇花 봄빛 무르익은 동산의 배롱나무꽃

看佳人勝玉釵 아름다운 그대 잠깐 보니 옥비녀보다 곱구나

莫向長安樓上望 정자에 올라 서울을 향해 바라보지를 마오.

滿街爭是戀芳華 거리에 가득한 사람들, 꽃다운 모습을 다투어 연모하리라.

 

오늘 찾은 명옥헌원림에 대하여 알아보자.

 

명옥헌원림의 주인들

 

명옥헌 입구에는 명곡오선생유적비(明谷吳先生遺蹟碑)가 세워져 있다. 조선 중기의 문신인 오희도<吳希道;1584(선조 17)∼1624(인조 2), 향(享) 40세>가 주인이란 말이다. 본관이 나주(羅州)로 자(字)는 득원(得原), 호(號)는 명곡(明谷), 망재(忘齋)이다. 증조부는 오세훈(吳世勳), 조부는 오원(吳?), 부는 오언표(吳彦彪)로 진사(進士)를 지냈다. 처부는 언양(彦陽) 김복흥(金復興)으로 문과방목에서 몇 번 나타나는 분이다.

그는 조선 중기의 문신 오겸<吳謙;1496년(연산군 2)∼1582년(선조 15)>의 종손(從孫)이기도 하다. 담양부사·광주목사호조참판·병조참판·대사헌을 거쳐 이조·병조·호조의 판서를 거쳐 지경연사가 되었으며, 1564년에 좌찬성에 오르고 왕으로부터 궤장(?杖)을 하사받았고, 지춘추관사가 되어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고 우의정에 이르던 분이다.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오희도는 1602년(선조 35) 사마시에 합격하고, 졸(卒)하기 1년 전인 1623년(인조 1)에 알성문과(謁聖試)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예문관(藝文館)의 관원인 검열(檢閱), 즉 한림(翰林)으로 천거되었고, 기주관을 대신하여 어전에서 사실을 기록하는데 민첩하여 여러 대신들의 칭찬을 받았다. 금성(錦城)의 옛 고향 대명곡(大明谷)에 거처하면서 명곡(明谷)이라 자호하며, 만년에는 뒷산 기슭에 집을 지어 망재(忘齋)라 하였다. 사람들을 대하는 데에는 소장귀천(少長貴賤)을 막론하고 두루 환심을 얻었다.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그의 장남 오이규<吳以奎, 1608(선조 41)∼1653(효종 4)>는 자(字)가 빈중(贇仲), 호(號)는 지천(支川)이다. 송강의 4남 정홍명<鄭弘溟; 1592(선조 25)~1650(효종 1)>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616년(광해군 8) 증광문과에 급제한 후 여러 벼슬을 지내다 1646년 대제학을 끝으로 은퇴하여 주자학 연구에 진력했던 분이다.

 

이 때 이시백(李時白)·이식(李植)·오두인(吳斗寅) 등을 포함한 당대의 명사들과 폭넓은 교유를 가졌다. 1635년(인조 13) 진사시에 합격하여 음공으로 세자익위사세마에 서임되었으며, 그뒤 의금부도사에 재임하던 중 이시백을 도와 1644년에 일어난 심기원(沈器遠)의 역모사건을 진압하여 영국원종공신(寧國原從功臣)1등에 녹훈되었다. 그 뒤 경양도찰방(景陽道察訪)·전주판관 등을 지내고, 1650년(효종 1)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사간원정언·세자시강원사서·성균관전적, 예조 및 병조의 좌랑을 두루 역임하였다. 1653년 영남지역에 흉년이 들어 경상도사의 임무를 띠고 신속한 구제정책을 전개하여 기민을 구제하는 데 매진하다가 함양의 여사(旅舍)에서 객사하였다. 죽은 뒤에 승정원도승지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지천일고》 1권 1책과 유묵(遺墨)1책이 있다.

 

삼남은 오이익<吳以翼;1618(광해군 10)∼1666(현종 7)>인데, 삼촌 오희유(吳希有)에게 양자로 갔다. 자는 우서(于敍)로 1646년(인조 24)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652년(효종 3)에 임진증광시(壬辰增廣試)에 급제한 뒤 승문원정자· 승정원 주서(注書), 정언(正言), 함평현감(咸平縣監)을 역임하였는데 어머니상을 당하여 귀향하였다가 3년 상을 마친 뒤 춘추관기주(春秋館記注)에 서임되었다. 또, 성균관전적을 거쳐 예조좌랑에 승임되었으며, 그 뒤 병조 겸 지제교(兵曹兼知製敎)·함평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함평군수로 있을 때 형장을 받은 자의 무고로 초산에 유배되었다. 유배에서 돌아온 뒤 벼슬할 뜻을 버리고 깊은 산속에 서실(書室)을 세우고 석문거사(石門居士)라고 자칭하였다. 성품이 단정하고 깨끗하였고, 학문연구를 잠시도 멈추지 않았으며, 특히 성리서(性理書)를 연구하여 정신수양에 힘썼다.

 

명옥헌(鳴玉軒)을 지은 이는 사남은 오이정<吳以井;1619(광해군 11)∼1655(효종 6)>이다. 자는 명중(明仲), 호는 장계(藏溪)이다. 백형 오이규처럼 송강의 4남 정홍명(鄭弘溟)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1639년(인조 17) 사마양과(司馬兩科)에 합격하고, 1640년 고두강(高斗綱)·정한(鄭漢)을 찾아 산사로 가서 함께 《주역》을 강론하였다. 1650년(효종 1) 태학(太學)에 들어간 뒤 이듬해 정시(庭試)에 응하였으나 자급(資級)이 없다는 이유로 낙방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학문에 전력하였다. 학문에 조예가 깊었으며, 기예(技藝)에도 능하였는데, 거문고는 사악한 생각을 금한다 하여 특히 좋아하였다. 1653년 어머니가 죽자 장사와 제사의 모든 절차를 주자의 《가례》에 따라 행하였고, 1655년 병에 걸려 37세에 요절하였다. 저서로는 《장계유고藏溪遺稿》 1책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인 아담한 정자는 1652년 경 지었다.

 

 

명옥헌(鳴玉軒)이라는 이름은 이곳의 물 흐르는 소리가 옥이 부딪치는 소리와 같다고 하여 우암 송시열이 이름지었다. 오이정(吳以井)의 아들인 오기석(吳祺錫;1651~1702)이 우암의 제자였기 때문이다. 오기석의 아들 오대경(吳大經;1689~1761)이 연못을 파고 세운 정자가 현존하는 건물이다.

 

입구에 세운 안내판에는 오대경을 오기석의 손자라 명기하였는데, 국조방목 등을 보면 오기석의 아들로 되어 있다. 정정해야 할 듯

 

그 후 오대경의 아들인 오현주(吳鉉胄), 손자 오정원(吳鼎源)과 오한원(吳翰源)이 대를 이어 명옥헌을 관리하였다. 이들은 모두 문과에 급제한 분들로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등의 자료에 나타나는 분이다.

 

자가 여옥(汝玉)인 오현주(吳鉉胄;1715~ ?)는 영조(英祖) 42년(1766) 병술(丙戌) 정시(庭試) 병과(丙科) 1위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그의 나이는 52세였다. 그 전에 통덕랑(通德郞)을 지냈다. 부 오대경(吳大經), 조부 오기석(吳祺錫), 증조부 오이정(吳以井)등으로 나타난다. 헌납(獻納)을 지낸 것 같다.

 

오정원(吳鼎源;1741년∼미상)에 대하여《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규장각[奎106])에 찾아보면 영조(英祖) 39년(1763) 계미(癸未) 증광시(增廣試) 생원 3등(三等) 36위를 하였으며, 영조(英祖) 42년(1766) 병술(丙戌) 정시(庭試) 병과(丙科) 9위로 급제하였음을 알 수가 있다. 부는 오현주(吳鉉胄), 조부는 오대경(吳大經), 증조부는 오기석(吳祺錫)이라 나타난다.

 

 

즉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자는 공보(公甫)·공보(公輔)인 오정원(吳鼎源)은 1763년(영조 39)에 계미증광사마시(癸未增廣司馬試)에 생원 3등으로 합격하였고, 1766년(영조 42) 병술정시문과(丙戌庭試文科)에 병과 9등으로 급제하였음을 알 수가 있다. 1769년(영조 45)에 한림원설서(翰林院說書)의 벼슬에 제수되었다. 1789년(정조 13) 3월 20일에 홍문관(弘文館)의 후보자를 선발하는 도당록(都堂錄)에 권점(圈點) 6점을 받고 옥당(玉堂)이 되었으나 같은 해 4월, 교리(校理)였던 그가 김이성(金履成)을 변호하는 상소를 올려 관적(館籍)에서 삭제되기도 했다. 1801년(순조 1)부터 여러 번 사간원대사간(司諫院大司諫)에 임명되었고, 1805년(순조 5)에 정순대비(貞純大妃)의 승하를 알리는 사신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오정원(吳鼎源)의 제(弟) 오한원(吳翰源; 1750 ~ ?)은 자(字)가 공예(公藝)인데 <국조 문과 방목>에 보면 1774(갑오) 생원시에 입격한 뒤 영조(英祖)51년(1775년), 별시(別試) 병과6(丙科6)위로 급제하였음을 알 수가 있다.

 

명옥헌(鳴玉軒)원림의 현황

정원의 면적은 1,386평이다. 못 주위에 소나무와 배롱나무를 심었는데, 배롱꽃이 피는 계절에 가면 그 모양이 일품이다. 정자의 앞, 뒤에 네모난 연못을 팠다고 한다.

 뒷면의 연지(蓮池)는 토사에 반 이상 매몰괴어 상부 석축만 남아 있었으나 명승으로 승격되면서 정비되었다. 이 연지는 중앙에 작은 섬 하나를 둔 일도장방형지(一島長方形池)이다.

 

 

 

명옥헌 원림 방형지(2009년 2월 촬영)

명옥헌 원림 방형지(2011년 9월 촬영)

 

2009년  명옥헌 원림의 연지내 섬

 

전면에 축조하였다는 연지(蓮池)는 우리나라 여느 전통연지의 것 보다 그 크기가 매우 큰 편이다. 네모난 연못을 판 뒤 석축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석축은 찾아볼 수 없으며, 그 모양도 타원형이 되었다. 중앙에는 연지에 비하여 비교적 작은 원도(圓島) 1기가 배치되어 있는데, 이곳에도 배롱나무 한그루를 심어 두었다. 다른 곳에서는 보기 드문 구조를 가지고 있어 조선시대 중엽의 정원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시냇가 암벽에는 '명옥헌계축(鳴玉軒癸丑)'이라는 글씨가 새겨 있고, 명옥헌 뒤에는 이 지방의 이름난 선비들을 제사지내던 도장사(道藏祠)의 터가 남아 있다.

 

도장사(道藏祠)

 

도장사(道藏祠)에서는 오이정(吳以井)의 부 오희도(吳希道)와 소쇄원을 경영한 양산보(梁山甫), 정진명(鄭振溟), 고부천(高傅川) 등 당대의 명사들을 제향한 곳이다. 정진명(鄭振溟)은 정송강의 삼남으로 송강이 강화(江華) 우거(寓居)에서 졸하자 모부인(母夫人)을 담양 창평으로 모시고 내려온 자이다. 고부천은 고조(高祖) 고운(高雲) - 증조(曾祖) 고맹영(高孟英) - 조부(祖父) 고경명(高敬命) - 부(父) 고인후(高因厚)로 이어지는 선대(先代) 모두가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또 삼촌 고종후(高從厚)와 고용후(高用厚)도 문과에 급제하였을 정도로 명벌가(名閥家)였다. 그 역시 문과에 급제 후 장령(掌令), 춘추관편수관(春秋館編修官), 백부(栢府: 사헌부), 춘방(春坊: 세자시강원), 시정(寺正), 사예(司藝)를 역임하였던 분이다. 우리나라 최고의 명매로 꼽히는 전남대 교정의 <대명매(大明梅)>를 중국에서 가져온 분이기도 하다.

 

또 명옥헌 남쪽에 그 유래를 적은 비석 두 개가 세워져 있다.

 

 

2011년 5월 31일의 명옥헌원림

2011년 9월 1일의 명옥헌원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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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1.09.03 11:18

    첫댓글 연락도 없으시고....
    저는 대구 가면 연락 드리는데....
    맛 있는 남도 음식 대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 작성자 11.09.03 14:43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일행들이 많은터라 연락드릴 수 없었습니다. 지난번처럼 아들놈과 또는 혼자 가게될 때 꼭 연락드리리다.

  • 11.09.04 09:01

    네에. 교수님.
    그러셨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아드님은 잘 있지요?

  • 작성자 11.09.04 23:42

    예 아들놈도 선생님께 감사 인사드리고 싶어 하였습니다. 이제서야 대신 전해 올림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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