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都市佛敎의 文化的 使命
- 法蓮寺의 예를 中心으로 -
공종원/ 조선일보 논설위원
1. 머리말
우리 나라에는 불교 사찰이 많다. 한국종교연감의 통계로는 사찰이 무려 1만 2천개를 넘는다고 한다. 그 중에는 물론 오래 전에 건립된 것도 있고 근래에 세워진 것도 있으며 도시 안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 있는가 하면 몸을 감추듯 산속 깊숙이 자리한 것도 있다.
하지만 우리 국민의 통상적인 관념으로 보면 절은 경치 좋은 산속에 자리하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고, 그러다 보니 산자수명(山紫水明)한 곳이라면 의례 사찰이 자리를 잡고 있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렇게 된 것은 물론 우리 국토의 7할이 산지라는 것이 원인이 되었을 것이고 수도에 정진하려면 번잡한 도시보다는 자연의 은밀 정적한 분위기가 훨씬 나을 것이라는 생각도 작용했음직하다. 조선조의 숭유배불(崇儒排佛) 정책의 여파로 승려의 도성출입 금지 등 여러 제약이 그렇게 만든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원래 사찰은 부처님의 죽림정사나 기원정사이래 도시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깊은 산중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도시에서 1~2마일 정도 떨어진 조용한 숲이 가장 보편적인 수행처였다고 한다. 그것은 정밀한 곳에서의 정진수행과 중생제도라는 두 가지 목적을 함께 달성하는 데 가장 적합한 곳이 최선의 선택이겠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스님들의 탁발행각을 위해서도 불가피했다고 보인다.
물론 그런 인도불교 초기의 전통이 시대를 거치면서 여러 가지로 바뀌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시대변화와 풍토에 따른 변화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 이후 중국이나 우리 나라에서 사찰이 도시 변두리뿐만 아니라 도심에까지 생겨났던 것도 그렇고 도시에서 아주 먼 깊은 산속에 자리잡는 절이 나타난 것도 그렇다고 할 것이다.
우리의 경우 깊은 산속의 절은 너무 보편적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국민에게는 그것이 이상한 현상이 아니라 당연한 것으로 생각되는 정도다. 그에 비해 도심사찰의 존재는 오히려 낯선 것이 되고 그 존재의미가 새삼 물어지게 되는 경우도 없지 않다. 그만큼 우리 국민에게는 절은 산에 있는 것으로 인식되고 시중에 자리잡은 절은 이상스럽게 생각할 정도라고 해야할 형편이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도 가만히 따져보면 도심사찰의 존재가 아주 낯선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신라의 고도 경주에는 지금도 분황사(芬皇寺)니 불국사(佛國寺)니 하는 절이 남아 있지만 그 옛날에도 흥륜사(興輪寺)니 황룡사(皇龍寺)니 영묘사(靈廟寺)니 황복사(皇福寺)니 사천왕사니 하는 절들이 자리잡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고려의 수도인 개성(開城)에도 흥국사(興國寺) 등 십찰(十刹)이 있었고 조선조의 수도였던 한성(漢城)의 중심에도 초기에는 원각사(圓覺寺) 같은 대찰이 있었다. 물론 조선조의 억불숭유 정책으로 해서 그 원각사는 연산군의 유흥장으로 전락하고 말았지만 지금까지도 탑과 탑비가 보존될 수 있었다는 사실로 보아 도성 중심사찰의 위치가 새삼 느껴진다.
이들 도성 중심에 있던 사찰은 주로 왕족의 원찰로서 왕권의 유지와 국리민복(國利民福)이라는 큰 사명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고 그에 봉사했다고 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들 사찰이 일반 불자 등에게는 물론 사회문화적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넉넉히 짐작된다.
그러나 오늘의 한국사회에서 불교사찰의 도심 진출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도성에 존재할 수 없었던 불교사찰이 서울에 당당히 세워지게 되었다는 측면에서는 물론이지만 도시화․산업화 시대를 맞으며 불교가 어떻게 종교적 기능을 새롭게 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관심도 간과할 수 없고 더욱이 다종교 사회에서 다른 종교들과 더불어 대중을 대상으로 한 포교경쟁에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가를 보기 위해서도 중요한 의미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2. 도심사찰의 변화
광복당시 서울에는 이렇다 할 절이 별로 없었다. 인구가 아직 수십만에 불과하던 시절이었고 일제치하 일본불교의 영향으로 그나마 겨우 스님이 도성안에서 활동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 형편이었으니까. 일본계 사찰이외에 우리 절이 많이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런 가운데 태고사니 봉원사니 봉은사니 선학원이니 탑골승방이니 신흥사니 하는 절이름을 들을 수 있는 정도가 고작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시대이니 만큼 대부분의 신도들은 변변히 절 이름을 내걸지도 못한 보살절에 다니며 신행생활을 했다고 할 것이다. 그런 보살절들이 각기 종단 소속을 찾고 절의 이름을 갖게 된 것은 그후 시대변화의 결과다. 비구・대처의 싸움으로 알려진 조계종의 정화불사이후 그 경향은 현저해졌고 새로 작은 규모의 사찰이 도시 변두리를 따라 여기저기 만들어지게 된 것도 하나의 경향이라 할 것이다. 아마도 전국의 사찰 1만 2천여 개 가운데 1만개 가량은 이런 작은 규모의 도시사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 군소사찰이 도시민을 대상으로 그 나름의 신앙의 보금자리가 되고 있는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그들의 역할과 기능이 과거 보살절이 감당했던 기능과 역할에서 더 발전된 측면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이들은 대부분 신자들의 가정이 평안과 위안을 얻을 수 있는 여러 가지 기복행사를 주로 집행하는 것으로 그 존재의미를 다한다고 할 수도 있다.
물론 그런 사찰의 역할 자체가 문제라고 할 수는 없다. 사찰의 규모나 재정형편, 스님들의 능력 등을 감안할 때 소속 신자 가정의 관혼상제와 일상 기복행사 등이라도 충실할 수 있다면 그것만도 대단한 일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서울 등 대도시의 도심사찰들의 기능과 역할은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 도심에 사는 불자들이라고 해서 신앙행태가 다른 절의 신자들과 완전히 다를 수는 없는 일이다. 이들에게도 생일불공이 중요하고 망인의 사십구재가 중요한 것은 물론이다. 자녀들을 위한 대학입시 합격축원이나 무운장구를 위한 기원도 중요하다. 하지만 도심의 불자들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사찰과 스님들에 대해 더 많은 요구를 하고 있고 기대도 하고 있다. 대도시의 생활환경이 그만큼 변한 것이며 시대변화가 그런 종교생활을 필요로 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도심사찰은 이런 도심불자들의 요구와 기대를 저버릴 수 없고 그에 상응한 대응을 해야 하며 신자들을 만족시키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근래 서울을 중심으로 도심 포교당들이 출현하고 있는 것도 그런 신도들의 요구에 부응한 불교의 대응 노력이라 할 것이다.
물론 이렇게 생겨난 도심의 포교당이 오늘의 도시불교의 만족스러운 모습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들 도심포교당들은 변화된 사회여건과 시대변화에 부응하여 불교인들의 요구와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한 불교계의 노력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되지 않을 수 없다.
도심포교당이 근래에 처음 생겨난 것은 아니다. 일제시대에도 일부 본사들은 도시에 작은 포교당을 두어 대중교화를 위한 거점을 마련해 활동한 바 있다. 그런 일부 본사들의 노력이 보편화되지 못하고 그 실질적 기능도 기대에 못 미쳤다는 것은 대체로 알려져 있지만 그 시대에 그런 포교대응 전략을 세웠던 불교계의 노력은 간과할 수 없는 일이다.
어떤 면에서 근래 서울 등 도심에 나타나고 있는 불교 포교원들은 그런 과거의 포교당운동을 되살려 발전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측면이 없지 않다. 불교의 포교당은 과거 도시를 중심으로 세력을 확대하던 기독교의 예배당이나 천도교의 포덕소 등에 대항하는 도시 선교기지로 창안되었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고 새로운 시대를 맞아 불교의 전위적 선봉이 된다는 종교 문화적 자부심도 적잖게 작용하였다고도 보인다.
3. 서울 포교원들의 출현
서울의 도심사찰과 포교당이 본격적으로 출현하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80년대 초반이었던 것 같다. 송광사의 서울 포교원인 법련사가 중앙청 옆 나지막한 한옥에서 활발한 도심포교 활동을 벌인 것을 필두로 85년에는 강남 양재동에 통도사 서울 포교당인 구룡사가 들어서고 이어 강남포교원, 불광사, 능인선원, 수안불교회관, 법안정사, 은평포교원, 사천왕사, 광도사, 은불사 등이 잇따라 문을 열었다.
이들이 서울 도심에 자리잡게 된 동기와 과정은 물론 똑같지는 않다. 도심사찰의 필요를 통감하고 절을 세우게 된 목적은 같겠지만 그 추진과정과 성패가 모두 일정한 것은 아니었다. 절을 일으킨 스님의 개인적 원력과 신도확보 방법이 중요한 경우도 있을 것이고 때에 따라서는 스님의 개인적 인망이 신도들을 끌어 모으는 무기가 되었으며 위치한 지역의 경제적 여건도 적지 않게 성패를 좌우했다고 보인다.
그러나 이 여러 경우 중에 주목되는 것은 아무런 사전 기반이 없으면서도 스님의 열화 같은 원력에 따라 예상외의 성공을 거둔 경우가 적지 않다는 점이다. 승랍과 수행경륜으로 불자들 사이에 널리 알려진 스님의 경우는 신도들이 모여들어 따르는 만큼 불사가 그렇게 어렵지는 않겠지만 산사에서 수도하던 젊은 스님이 갑자기 도심에 들어와서 일을 성취하고 있는 모습은 놀랍기도 하다.
20대 혹은 30대의 스님이 산사생활을 걷어치우고 서울에 뛰어올라와 도시변두리 공터에 천막을 치거나, 작은 건물이나 빌딩의 방 한 칸을 세내어 도심포교를 시작한 경우가 보편적이라는 것이다. 이런 불교의 포교행태는 물론 불교의 독자적 방법은 아니다. 이미 50년대, 60년대에 기독교 목사들은 이른바 개척교회를 이렇게 세웠던 것이다. 그들은 초기에 도심교회를 그런 식으로 개척했고 점차 농어촌과 산촌을 그런 식으로 파고들었던 것이다. 신학교를 갓 나온 젊은 목사들이 맨주먹으로 현장에 뛰어들어 신도들을 모으고 마침내는 큰 교회를 이룬 과정은 그들의 신앙심과 자랑거리로 즐겨 인용되곤 한다.
그러나 불교의 도심포교활동은 물론 기독교의 개척교회 양상으로 출발하고 있기는 하지만 꼭 형태가 같지는 않은 것 같다. 불교의 경우는 이미 기독교에 의해 도심포교가 거의 완성된 상황에서 비로소 도심포교를 시작했기 때문에 신도를 새로 모으는 것이 어렵다는 측면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이미 잠재적인 불교신도였던 이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게 된 것이기 때문에 기독교의 경우만큼 어렵지는 않다고 하는 견해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어쨌든 처음에 별다른 주목을 끌지 못했던 서울의 도심사찰들이 근 10여 년의 세월을 경과하는 동안에 비약적 발전을 하고 있는 모습은 불교계에 적잖은 감동을 준다. 특히 서울 강남지역에서 단기간에 많은 불자를 모아 불교계 뿐만 아니라 사회적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능인선원과 구룡사 등 두 개의 대표적 도심사찰의 성공은 거의 전설적이라고 할 만하다. 이들 사찰의 성공과 발전이 어떻게 가능했는가를 보는 것은 바로 도시불자들의 도심사찰에 대한 요구와 기대가 무엇인가를 알게 하는 점에서나 도심사찰의 목적과 운영방향을 아는 데 적지 않은 시사점을 준다.
4. 能仁禪院과 九龍寺
능인선원과 구룡사는 모두 조계종 소속의 사찰이다. 하지만 능인선원이 지광스님이라는 한 스님의 노력에 의해 일궈진 개인사찰처럼 보이는 데 비해 구룡사는 정우스님 개인이 일궈낸 절이기는 하지만 통도사 서울 포교당이란 특별한 제한속에 존재한다. 이 중에서 구룡사는 1985년 봄에 20평짜리 천막에 스티로폴을 깔고 부처님을 모셔 10여 가구의 불자가족을 모아 법회를 열기 시작했다. 이듬해엔 가건물을 세우고 만불전 불사를 시작했으며 20면짜리 월간 「구룡」을 창간했다. 30대 중반의 정우스님은 신심과 원력으로 불사를 발원하여 기도하던 중 하나의 지혜를 얻었다. 통도사에 모셔져 있는 부처님의 금란친착가사와 자장율사의 가사를 모셔와 친견법회를 열면 효험이 있으리란 아이디어였다.
그 법회의 성공이 계기가 되어 건물의 기공식도 가지고 만불전 불사도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그 이후 계속된 기도와 정진법회, 그리고 3년 간의 화엄경 백고좌법회 등으로 신도들의 뜨거운 참여를 유도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처음에 이십여 가구에 불과했던 구룡사 신도가 단 10년 사이에 1만 7천 가구로 늘어나고 11개소의 포교당 분원과 10개소의 유치원을 세울 수 있게 되었다. 구룡사는 지금 지하 3층, 지상 5층의 연건평 2천 8백평의 일산포교당 여래사 만불전 원불봉안을 위해 또 한 번의 신도동참을 발원하고 있다.
그러나 구룡사의 운영이 일반 도시사찰과 큰 차이가 있는 것 같지는 않다. 한 달에 대체로 8회 정도의 법회를 열고 있는 것이 조금 많기는 하지만 그게 특별한 것도 아니다. 신도가 많아서 두 방향으로 세 차례씩 버스를 운행하고 있는 것도 대단한 일은 아니다. 또 기재, 49재, 천도재, 생신재, 사갑재 등 각종 제사를 모시는 것이나 지장재일 영가축원, 가족을 위한 각종 축원을 모시는 것도 다른 절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구룡사가 자체 사찰운영에서 나아가 많은 분원을 연다거나 유치원을 운영하는 것은 주목되는 일면이다. 거대도시 서울의 전체 주민을 상대로 하나의 절을 운영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에 지역별로 분원을 개설하고 신도시에도 진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대중불교․생활불교를 표방하는 사찰의 포교지향에 따라 지역주민과 밀착된 종교생활을 유도하기 위해서도 그것은 불가피하다. 그리고 신도들의 실제 생활에 밀착한 사찰, 미래의 신도를 확보하는 장기적 포교방안으로 유치원 운영이 매우 효과적이라는 점도 누구나 이해할 수 있다. 또 월간 사보를 발행하여 신도들의 신행에 지침을 주는 일도 무시할 수 없다. 더욱이 월간 구룡의 경우는 어느덧 지령 1백호를 돌파하고 있어 그 권위도 상당히 축적했다고 할 것이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이 절이 지역주민과 불자들을 위한 각종 문화복지사업을 활발히 벌이고 있다는 점이다. 우선 절안에 구룡문화센터를 가지고 3개월 단위의 강좌를 갖는 일이다. 강좌의 내용은 경전연구, 선체조 등 불교와 관계있는 것에서부터 꽃꽂이, 수지침, 사진촬영, 예절과 다도, 구연동화, 올바른 부모와 자녀대화법, 서예는 물론 영어, 중국어, 일어회화 등을 망라하고 있다.
또 하나 관심을 끄는 것은 구룡사 진리의 전화를 개설해서 외로운 이들에게 인생상담을 하는 한편 매년 부처님 오신 날을 기념해 수백 명의 노인을 초청하여 경로잔치를 베풀고 있다. 구룡사 구내에는 서점도 운영하고 있어서 법회 때 가졌던 큰스님들의 법문들을 법문집, 카세트와 비디오로 만들어 판매하기도 한다. 구룡사 성지순례부를 통해서는 해외 불교성지 여행을 주선하기도 한다. 부설 결혼상담실도 운영해 불자의 결혼과 중매는 물론 무료합동 결혼식을 열고 있다.
그러나 구룡사가 사회적으로 주목을 받게 된 것은 현대적 사찰을 건립하면서 다양한 문화행사를 연 것에서 비롯했다고 할 것이다. 중광스님의 그림 전시회니 극단 신시의 연극 ‘싣달다’ 공연은 그렇다 치고 사물놀이, 박명수 서울현대무용단, 정재만 무용단, 그룹사운드 아리아스, 극단 현대극장, 한국 정악원 등의 공연이 잇달았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것은 사찰안에 연극전용 구룡사 소극장을 마련하여 극단 신시(神市)와 함께 신도와 주민을 위한 문화공간으로 과감히 개방했다는 점이다.
능인선원의 경우도 이와 큰 차이는 없다. 그러나 짧은 기간의 포교활동으로 강남지역에 엄청난 규모의 사회복지회관을 세운 실적에서 보듯이 이 사찰은 다른 도심사찰과 다른 특색을 보이고 있다.
그 특색 가운데 하나는 단연 능인불교대학이란 이름의 신도교육 과정이다. 일주일에 두 번씩 3~4시간씩 갖는 수업을 4개월간 계속하는 과정은 96년 9월 현재 벌써 22기를 뽑고 있다. 불교교리의 현대적 조명을 통해 불교의 현대화, 대중화, 조직화를 이루겠다는 이 교육에 매기 수강생이 3천 명을 헤아리는 성황을 이루고 있는 것은 괄목할 만한 일이다. 그리고 이 교육을 끝낸 후 경전반 공부를 계속하는 이외에 각종 불사와 지역단위의 가정법회에 적극 동참하도록 신도들을 관리하는 모습이 다른 사찰과 완연히 다르다. 지금 이들 신도는 각 지역별로 3백여 개의 가정법회를 구성해 신심을 더욱 굳건히 다진다.
또 하나 특징은 이곳이 사회복지법인 형태를 취하여 사회복지관을 운영한다는 점이다. 사찰운영과 사회복지관 운영에 신도들의 적극 참여가 이루어지는 것은 물론이지만 그 기반이 자원봉사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도 특징이다. 사회복지관은 교양강좌 과정이 있는 것은 물론이지만 심지어 간병인 과정, 컴퓨터 워드반, 꽃꽂이 과정 등까지 두어 운영하고 있다.
능인선원에는 보통의 사찰에는 없는 ‘능인상조회’가 운영되는 것도 특징이다. 상을 당한 가정에 신도들이 나와 독경과 염불로 봉사하는 것도 이 상조회의 몫이다. 카톨릭이나 순복음교회 등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지만 불교에서는 선례가 없는 일이라서 신도들의 환영을 받고 있다. 아울러 사회복지관에는 납골당도 있어서 매장에 따른 묘지문제도 해소해 주고 있으며 능인결혼 예식장의 운영으로 신도들의 고민을 해소해 주고 있다. 능인법우 상담실을 통해서는 신도들의 고민을 전화상담으로 함께 해소하는 노력도 하고 있다.
구룡사와 능인선원 이외에도 서울에는 잘 알려진 포교원이 몇 군데 있다. 송광사 서울 포교당인 법련사와 삼보사 은평포교원, 그리고 정토포교원 등이 그것이다. 이들이 도심사찰로 주목받는 것은 그 독특한 활동 때문이다. 주지 지원스님이 작사한 시를 포교원 소속 국악관현악단과 합창단이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까지 한 것은 은평포교원이고, 사단법인 한국 불교환경교육원을 운영하며 적극적인 환경운동으로 유명한 것은 법륜스님의 정토포교원이다.
5. 再認識되는 도시 전통사찰
이와같이 도심 포교원은 현대사회에 적응하는 불교의 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도시인들의 요구는 물론 다양하다. 그러나 경제생활의 향상에도 불구하고 도시인들의 정신적 공허와 군중속의 고독이나 소외감은 더욱 커져가고 있기 때문에 그 부족과 공허를 메워주어야 할 도시사찰의 역할은 커질 수밖에 없다. 삶의 현장에 밀착하여 불교 교리를 배우고 익히며 수행의 깊이를 더하는 생활을 열어주는 도시 포교원의 역할은 점점 중요할 수밖에 없다.
도시 포교원이 이렇게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도시 가운데 있는 절이라는 점이 장점으로 작용해서이다. 바쁜 생업으로 항상 뛰어다니며 사는 도시인들이 시간을 내서 잠깐 절에 올 수 있다는 점이 강점이 되는 것이다. 시간과 비용이 덜 들고 마음의 부담이 적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도시포교원에 가는 불자들 가운데는 마음이 허전한 이들이 적지 않다. 도시 포교원에도 분명 부처님이 계시고 보살상도 조성되어 있으며 훌륭한 스님들도 있고 그럴 듯한 건물도 있으며 수시로 법회와 행사도 많아서 부족할 것이 없을 것 같은데도 불자들은 무엇인가 부족함을 느낀다는 것이다.
그래서 적지 않은 불자들은 도심포교원이나 지역사찰에 적을 두고도 다시 도심의 전통사찰을 찾고 있다고 한다. 원래의 절에 대한 향수가 그런 불자들의 행태를 낳고 있다고 보는 것도 무리가 아닌 것 같다. 전통사찰에는 도심에 드물게 남아 있는 숲을 느낄 수 있다. 빌딩 숲속에서 도시인은 매일매일 답답한 공기와 잡담을 경험할 뿐이다. 그런데 도심 가운데 작으나마 야외의 경치를 보존하고 있는 것은 그래도 전통사찰밖에 달리 없을 것 같다. 그리고 그 도시의 숲속에 여전히 전아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여유로운 전통사찰 건물 자체가 도시인에게는 무한한 편안함을 마련해 준다고 할 것이다.
그렇지만 사실은 그런 도심속의 전통사찰이 지금 많이 남아있는 건 아니다. 강남의 봉은사(奉恩寺)와 강북의 봉원사(奉元寺)가 아마도 대표적인 전통사찰의 예일 것이다. 부족하지만 조계사(曹溪寺)와 수국사(守國寺), 경국사(慶國寺)를 포함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들 전통사찰이 하는 일도 도시안에 있는 이상 포교원과 크게 다르지 않다. 법회와 기도, 재와 정진이란 이름의 행사가 잇따르고 불교대학과 경전학교, 노인대학, 혹은 사군자 교실이나 꽃꽂이 교실, 서예교실 등 문화교양강좌의 운영으로 신도의 관리를 게을리하지 않는 점에서 추호의 차이를 느낄 수 없다. 사보발행과 사찰순례 행사 등도 그렇다.
이들 전통사찰이 다른 점이 있다면 바로 자연의 숲과 정원을 연상시킬 만한 땅을 가지고 있고 거기에 도시의 빌딩류가 아닌 전통사찰 건축양식의 편안함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점이 사실은 도심 전통사찰의 최대의 장점이기도 하다. 비록 좋은 스님이 없어도, 훌륭한 법문이 없어도 잘 지켜진 사찰의 분위기만으로도 불자들은 무한한 정도 느끼고 신심도 생긴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도심사찰 봉은사는 TV 프로에 숲속의 고찰의 모습과 연등이 달려있는 아름다운 경관이 소개된 것만으로 엄청난 포교효과를 올렸다고 자랑하고 있을 정도다. 특별히 선전하고 포교하지 않아도 도시속에 유지된 숲과 전통 건물의 아름다움만 보여주고도 새로운 신도가 줄을 잇게 되었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이야기다.
6. 미국 도시사찰의 예
미국이 기독교의 나라라는 것은 누구나 안다. 국민의 대다수가 개신교 신도이고 나머지 일부가 카톨릭과 유대교, 이슬람교 신도라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이다. 그러나 근래 미국사회에도 불교바람이 불고 있다는 소식이 간간이 들린다. 지난 96년 6월 26일자에서 뉴욕 타임스는 최근 캘리포니아주에 대규모 불교사찰이 건립되는 등 미국 도처에 절이 들어서고 있으며 신도도 날로 늘어나 현재 최소 80만 명이 넘는다고 보도하고 있다. 이 신문은 또 명상과 선문답을 강조하는 일본의 선불교에서 신비주의 색채가 강한 티벳 불교쪽으로 관심이 바뀌고 있다는 경향까지 전하고 있다.
최근 샌프란시스코에서 3시간 차로 달려야 하는 곳에 건립된 오디얀 사원도 티벳 절이다. 이 절은 1백 8피트(약 32m) 높이의 황금빛 본당과 수십 개의 승방을 갖춘 거대한 수련장, 그리고 수만 권의 불교성전을 보관한 도서관 시설로도 단연 미국사회의 주목을 받고 있다는 소식이다. 21년 간의 공사 끝에 최근 공개된 오디얀 불교센터는 특히 버클리 등 인근에 사는 지식인인 열성 신도들의 직접 참여로 조성한 2백 60기의 소형불상과 신도들이 직접 심은 20만 그루의 벚꽃이며 장미들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정원으로도 일반인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다고 한다. 그리고 타탕 툴쿠 린포체가 세운 이 오디얀 불교센터는 따로 버클리에 불교서적을 출판하는 달마 퍼블리싱과 명상 수련센터인 니잉마 인스티튜트 등을 두어 도시불교 포교에 적극 나서고 있다.
그러나 이런 보도가 아니라도 이미 미국 불교의 성장은 여러 매체를 통해 알려지고 있다. 불교인구도 벌써 6백만 명을 넘고 있다는 관측조차 나오고 있을 정도다. 그리고 그런 경향은 과거 대학 연구기관에서 동양 종교의 하나로서만 관심거리가 되었던 불교가 이제는 일본과 중국, 한국 등의 아시아 각국 이민자들 사이에서 중심종교로 유지되는 데 그치지 않고 점차 미국의 일반 시민사회에 번지고 있다는 증언으로 확인되고 있다. 1960년대에는 일부 엘리트 계층의 관심과 연구대상으로 근근이 명맥을 이어가던 불교가 1990년대는 평범한 소시민의 종교로 차츰 부각되고 있다는 것이다. 물질적 풍요를 이룬 현대인에게 서구사회의 전통신앙인 기독교가 만족스러운 해답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아쉬움으로 불교 등 동양종교가 관심의 초점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자신의 주체성과 합리성을 강조하는 불교교리가 서구인들에게는 무조건 전지전능자를 믿어야 한다고 하는 기독교 교리보다 더 설득력이 있다는 이야기다. 심리적 공허와 불안을 느끼는 현대인들에게 마음의 안정을 줄 수 있는 처방으로 불교는 크게 호소력을 갖는다는 이야기다.
이를테면 샌프란시스코에는 앞에 언급한 오디얀 사원 이외에도 이미 중국계의 만불성성(萬佛聖城)이 있어서 유치원에서 대학생에 이르기까지 유기적으로 불교적인 교육을 선도하는 사찰이 미국인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또 뉴욕의 일본계 젠 마운틴 사원은 80년대부터 재가불자 중심으로 환경 보전운동과 함께 죄수들의 재활을 돕는 운동을 벌이고 있다.
미국 불교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로스앤젤레스의 대만계 불광산 서래사(佛光山 西來寺)의 존재다. 이 절은 우선 그 외양에서 중국과 중국인, 그리고 중국 불교와 중국의 건축문화를 미국사회에 자랑하는 모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도시의 사찰로는 너무 크고 광대하며 호사스럽다는 것이 그 곳을 찾는 사람들의 공통된 인상일 것이다.
거대한 건물이 많은 미국이라지만 서래사의 건물규모와 그 외양은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불교사찰의 모습을 훨씬 뛰어넘고 있다. 마치 북경의 자금성을 일부 옮겨온 것처럼 거대하고 위풍당당하며 아름다운 중국식 건축양식미가 관람자를 압도하기도 한다. 그 점에서 이 절은 건축규모와 건축미에서 단연 미국에 진출한 동양불교의 문화전통을 대표하는 상징적 의미를 표현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이곳은 중국 불교를 미국에 심는다는 원대한 뜻을 표현하면서 주변에 중국인 거리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중국인들은 절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 몰려사는 특성을 가지고 있어서 이 절이 세워지면서 주변이 중국인 마을로 바뀌었다는 이야기다. 그렇지만 이 절이 중국인을 위한 절만으로 남은 것은 물론 아니다. 이 절이 인근의 어린이들을 위한 교육장으로 자주 이용되기도 하기 때문에 중국 어린이들 뿐만 아니라 미국의 다양한 인종들의 어린이들이 몰려오고 있는 것이 그 일례이다.
이는 서래사 스님들이 절이 인근 지역사회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얼마만큼 중요한 일인가를 충분히 알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서래사는 중국인 중심의 이민자 법회 이외에 외국인을 위한 법회와 참선 프로그램을 마련해서 지역민을 대상으로 한 포교에도 열심이다. 이 절이 운영하는 서래대학에서는 성인 재교육 프로그램도 적극 펼치고 있으며 청소년 문화활동 공간으로 이 절 시설을 적극 개방하기도 한다. 그 뿐만 아니라 이 절에는 탁아소도 있어서 인근 주민의 직업생활을 간접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서래사는 종교채널을 통해 TV 설법 시간도 가지고 있으며 중국어와 영어로 된 신문 잡지도 발간한다. 특히 이 절의 방문객이 감탄하는 것은 이 절안에 있는 박물관이다. 보물장(寶物藏)이란 이름의 이 박물관은 입장료 1달러로 일반에 공개되어 늘 많은 관객을 모으고 있다.
불교와 관계있는 문화재들을 전시 보관하고 있는 이곳은 중국의 문화예술을 과시하면서 기기묘묘한 중국 역사상의 불교예술의 진수들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관람자들은 우선 전시품의 진귀함에 놀라고 그 종류와 수량이 무궁무진한 데 다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서래사는 이처럼 거대하고 아름다운 불교사원을 세계적 대도시의 일각에 세움으로써 중국 불교를 널리 미국 땅에 전파하며 동시에 중국의 우수한 문화예술의 전통을 유감 없이 과시함으로써 중국인의 긍지와 자랑을 널리 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현대의 도시사찰이 지역사회에 어떻게 서비스하는가를 모범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7. 달라지는 교회와 성당 건물
최근 새로 짓는 우리 나라 종교건물 가운데는 전통파괴, 혹은 형식파괴라고 할 만한 변화의 모습이 드러나고 있다. 전통종교인 불교의 경우도 그렇지만 전교역사가 1백년 혹은 2백년밖에 안된 개신교와 카톨릭의 경우에 그 점이 특히 두드러지고 있다. 우리 나라의 교회 건물은 거의 뾰족한 첨탑을 가진 고딕식 건물이 대부분이다. 서울의 성공회 대성당같이 로마네스크 양식을 가진 것도 있지만 그 수는 그리 많지 않다. 그런데 최근에는 그런 형식을 완전히 탈피한 건물들이 등장해 우선 외양에서부터 새로운 느낌을 주고 있다.
개신교의 서울 월계동 장석교회의 경우, 첨탑양식의 서구풍 교회 건물의 이미지와는 근본에서 차이가 나는 순한국식 건물양식을 외양에 도입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건물의 맨 윗부분을 한식 기와를 얹은 궁전양식 건물과 팔각정으로 꾸민 것이다. 물론 건물의 중간이하 부분은 서양식 석조건물 양식을 그대로 도입하였으며 지하에 초기 기독교인들의 열정적 신앙행태를 모방한 카타콤 형식의 예배당도 만들었다.
카톨릭 수원 발안성당도 우리 전통사찰의 건축양식을 도입, 건축을 통해 종교간의 벽을 허물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건물 앞마당조차 사찰의 대웅전 앞을 연상시킬 정도다. 부천의 심곡성당도 지하 1층과 지상 3층으로 된 8백 20평 규모의 건물을 달걀모양의 외양으로 만들어 벌써부터 유명해졌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우리 전통의 난생설화(卵生說話)와 접목하려는 시도다.
그런데 사실은 우리의 독자적인 교회건물의 시험은 전교 초기에도 있었다. 1900년 강화도의 성공회 건물은 불당식(佛堂式) 교회건물의 효시로 태어났다. 약간 높은 지대에 건물을 세우고 둘레에 담을 쌓아 기와지붕의 큰 대문을 세웠다. 한국재래의 건축양식에 바시리카 양식이 가미되었다고 하며 주위환경과 잘 조화된 건물이란 평가를 얻은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한국적 교회건축의 전통은 오랜 단절을 겪었다. 그로부터 근 1백년이 지난 요즘에 와서야 그것이 다시 소생하고 있다. 이는 개신교와 카톨릭이 요즘에 와서야 비로소 한국화, 토착화의 의미를 진정으로 깨닫게 된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교회와 성당의 변모는 그 목적이 분명하다. 교회라는 것이 신자들과 하나님이 만나는 공간으로 만들어지지만 그것은 시대변화에 수반한 신자들의 신앙관과 문화적 전통, 건축기술, 시대상황을 총체적으로 표현하는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오늘의 신자들은 교회가 신자들 사이의 친교 공간으로 더욱 봉사하기를 바라고 있다. 뿐만 아니라 교회가 지역사회의 문화공간으로도 적절히 기능해야 한다는 요구도 커지고 있다. 교회와 성당이 단순히 신앙생활을 위한 공간만이 아니라 지역주민에게 열린 장소로 가꾸려는 시도가 건물의 모습과 기능에서 드러나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 않아도 교회의 강단은 전부터 신자들의 문화활동을 위한 공간으로 이용되곤 했다. 크리스마스 때의 연극공연도 있지만 신자들을 위한 결혼예식장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앞으로의 교회는 그런 임시 방편적인 이용보다 더 효과적인 이용을 가능하게 하는 시설을 미리 감안해야 할 것이다. 초기 교회의 기능을 보면 예배와 세례 혹은 공동묘지 등 다양했다. 중세이후 큰 교회는 파이프 오르간 시설과 합창단 운영으로 고급스런 문화적 기능을 수행하기도 했다.
8. 새로 지은 법련사
승보종찰 송광사(松廣寺)의 서울분원인 법련사(法蓮寺)가 새로운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났다. 과거의 법련사가 이미 서울 강북지역 불교사찰로서 차지하고 있던 위치가 작은 것이 아니지만 새로 태어난 법련사는 불교계 뿐만 아니라 사회일반에도 적잖은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우선 건물의 모양이 눈을 끈다. 일견하여 화강암 성채 위에 삼층 높이의 전통 한식 사찰을 세운 모습이라 산뜻하면서도 전아한 느낌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당장 헐리지 않고 있는 구 총독부 건물의 화강암과 멀리 경복궁 구내에 새로 지은 조선왕조 역사박물관, 그리고 남향한 경복궁 돌담이 모두 화강암 건조물이라서 특별히 이 건물이 어울리는 것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구 총독부 건물이 완전 철거되고 경복궁의 화강암 담장마저 철거되고 나서 과연 법련사 건물이 계속 돋보일 것인지는 아직 미심쩍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일부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법련사 영산대법전 건물이 경복궁 복원 후에도 이 일대에서 단연 주목받는 건물로 두고두고 사람들의 사랑을 받게 될 것은 틀림없을 것 같다. 복원된 경복궁이 한국의 전통적 건축미를 한껏 자랑하게 되는 바로 곁에서 동십자각과 더불어 있는 법련사 영산대법전 건물의 전통미가 한결 어울릴 것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법련사의 중요성은 특히 이 지역이 문화의 거리로 발돋움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두드러진다. 법련사 일대는 벌써부터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인사동 일대와 더불어 화랑 거리로 정평이 나 있었다. 기존의 갤러리 현대니 국제화랑 등 주요 화랑들의 증축공사가 잇따라 이루어지고 또 금호미술관이니 서울선재미술관들이 새로 들어설 계획이어서 문화거리 조성은 무르익는 감이 있다. 근처의 국군서울지구병원과 미국대사관 숙소가 다른 곳으로 옮겨가고 그 자리에 현대미술관이나 예술센터 등 예술시설이 들어올 수 있다면 이 지역의 문화거리 조성은 더욱 박차를 가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도 나오고 있다. 그럴 경우 도심쪽으로 면한 이 지역의 서남 핵심부를 차지한 법련사의 입지조건은 더욱 화려해질 것이 분명하다. 그런 입지조건을 반영이라도 하듯 법련사 새 건물에는 지상 1층과 지하 1층을 합쳐 불일미술관으로 할애하고 있다. 화랑거리의 중심에 위치한 도심사찰답게 미술관을 운영하는 것은 아주 적절한 대응일 것 같다. 그것 자체가 사찰이 운영하는 미술관의 효시가 될 것이란 지적도 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이 지역이 미술을 중심으로 한 문화의 거리로만 그칠 수 없다는 점이다. 종로구는 경복궁과 창덕궁을 잇는 1km의 샛길을 조선시대 풍물거리로 조성할 계획을 세우고 있는데 이는 가회동과 사간동, 원서동 등의 지역일대가 전통한옥 보전지구로 지정되어 비교적 우리 전통가옥이 많이 남아있다는 점을 이용하려는 의도다. 그런 계획이 뜻대로 잘 추진될 경우 법련사는 전통한옥과 조선시대 풍물을 결합한 전통문화 거리의 상징건물로서도 유감 없는 역할을 수행할 것이란 기대다.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이 지역의 사찰과 불교용품점 등을 연계하는 불교거리의 조성에서 법련사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점이다. 우리의 역사문화를 알리고 우리의 전통풍속을 알리는 역할에서 불교사찰의 의미는 크다. 이 거리에는 법련사 이외에도 태고종의 법륜사도 있고 삼청동에는 칠보사도 있으며 바로 언덕을 넘으면 조계사와 선학원 등 불교사찰이 있고 안국동과 인사동 일대에는 불교용품을 파는 상점과 불교관계 기관들이 줄을 잇고 있다. 그 점에서 법련사는 조계사 등과 더불어 이 지역을 불교거리로 조성하는 데 큰 역할을 다할 수 있을 것 같다.
9. 법련사의 문화적 기능
새로 건축된 불교의 도심사찰들이 앞에서 말한 개신교와 카톨릭 교회의 그런 변모와 무관할 수는 없다. 도심의 사찰이 불자들과 부처님이 만나는 장소가 되고 불교 포교와 수행의 장소가 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불자들 사이에 친교와 단합을 위한 공간도 되어야 하는 것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지역주민을 위한 열린 문화공간도 되어야 하는 것이 당연하게 되었다.
그 점에서 새로 지어진 법련사는 도심사찰의 새로운 전형으로 주목되는 존재다. 비록 도심 전통사찰의 자연환경을 갖춘 사찰은 아니지만 주어진 여건, 주어진 면적, 주어진 주변 건물의 조건에 비추어 결코 손색이 없는 건물로서 부각되는 것이 우선 반갑다. 화강암 기층 건축의 실용성을 충분히 살리면서도 전통사찰의 건물양식을 되살린 외양미가 널리 도시민의 주목을 받으며 사랑을 받는 것은 다행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법련사는 도시불자들의 귀의처가 될 만한 영산대법전을 마련해 그 곳에 아름다운 조각기법으로 삼세여래상과 사대보살상을 모셨다. 성스러움과 아름다움을 두루 갖춘 성보들로 장엄된 대법당 등 시설들이 우선 귀의와 포교의 기틀을 든든히 하였다는 인상이다.
그러나 여기에 뺄 수 없는 것은 이 법련사에 상설미술전시관인 불일미술관(佛日美術館)이 마련된 것이다. 사찰에 미술관이 마련된 것 자체가 전례 없는 일이라는 점에서도 법련사나 불일미술관이 사회적 관심과 주목의 대상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또 법련사가 다른 문화시설보다 하필이면 미술관을 선택한 것이 주목될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법련사 주변을 화랑거리, 문화의 거리로 조성해야 한다는 여론에 비추어 고려한다면 역시 미술관을 선택한 것이 합리적이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여기서 열린 전시회들의 성공에 비추어 보아도 그 선택이 옳았다고 생각되기도 한다. 현호 스님의 「인도성지 순례사진전」이니 「근세고승 유묵전」이니 혹은 조정현 교수의 「상감질그릇전」 같은 전시가 새로 개장된 미술관의 성가를 높이고 있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불일미술관이 결코 작은 면적의 미술관이 아니라는 점도 주목된다. 물론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도시에 적지 않은 미술관이 생겨나고 있어서 흔히 전시장의 사정도 이제는 많이 해소되었다는 것이 일반인의 생각이다. 그러나 그런 예상과는 달리 우리 나라에는 큰 전시회를 열만한 대형 전시장이 크게 부족하다. 그래서 웬만한 규모의 국제전을 기획하여 유치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여기저기 흩어진 여러 화랑을 빌려 근근이 땜질하듯 전시를 여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이다. 이와 같은 현실에서 지상 1층과 지하 1층을 합친 불일미술관의 전시면적은 만족스럽지는 않으나 그래도 적지 않은 공헌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그리고 법련사에는 불일미술관 이외에도 불일서점(佛日書店)과 전통찻집인 연다원(蓮茶苑) 같은 문화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이런 시설들은 종교생활과 문화생활을 둘 아닌 하나로 꿰는 불교정신에 비추어 매우 적절한 것이라 하겠다. 사찰서점의 효시로 알려진 불일서점은 새 건물에서 불교서적과 불교용품, 그리고 불교전통 생활용품에 이르는 풍부한 재료들로 불자들의 요구에 응해야 할 것이며, 속세의 풍진에 시달리는 중생들이 연다원의 전통차를 통해 고고한 선승들이 산사에서나 즐기던 다선일여(茶禪一如)의 경지를 잠시 음미할 수 있었으면 더할 나위 없을 것 같다.
그러기 위해 법련사는 이들 직영 서점과 다원의 품위를 지키기 위한 남다른 정성이 필요할 것 같다. 서점에 비치되는 서적이나 물품의 질을 감안하여 정선하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맛과 향기로 표현할 수 있을 만한 품위있는 문화공간이 되도록 그 격조있는 운영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법련사에 마련된 불일문화원과 불일교양대학, 그리고 불일출판사의 역할이 주목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도시사찰에 있는 불교대학들이 불교교리 공부에 주력하는 데 비해 법련사의 불일교양대학은 문화원을 운영하는 사찰답게 종교보다는 문화에 비중을 두려는 듯하다. 물론 불교강좌를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지만 다양한 과목을 초보에서부터 점차 수준을 높여가며 실제 답사와 실기 실습을 통해 참맛을 느낄 수 있도록 한다니 기대가 크다.
법련사 불일교양대학의 신입생모집 안내에 보면 기초반은 낮반과 직장인반으로 나누어 각각 1백명을 뽑게 되었는데 예불문과 부처님 생애와 사상, 반야심강, 선화(禪畵) 강좌 등을 스님들이 맡고 어록반은 화두공부법, 선가귀감, 육조단경, 선화특강 등을 강의내용으로 하고 있다. 불일문화강좌에는 도자기나 서도 강의는 물론 선시(禪詩)감상이니 기공(氣功) 강의까지 다양한 과목을 마련한다는 소식도 있다.
법련사는 이런 문화공간과 기능을 통해 도심사찰의 문화적 기능에 전례 없는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럼으로써 법련사는 도심불교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을 뿐더러 도시문화의 중심적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는 희망도 갖게 한다.
10. 맺음말
도심사찰은 도시 가운데 자리잡은 불교사찰이다. 그러니까 도심사찰은 도시민과 도시 불자의 요구와 기대에 부응하는 사찰이 되어야 한다. 그 요구가 물론 일정하다고 하기는 어렵다. 사람의 취향과 견해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도시사찰의 필요와 역할, 그리고 그 기능에 대한 일반적 기대는 분명 존재한다고 할 것 같다. 따라서 지금 존재하는 도시사찰은 정도에 따라 다르기는 하겠지만 이런 도시민의 요구와 기대를 반영하며 존재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그 점에서 도심사찰은 몇 가지 기능을 하고 있다. 불자들의 귀의의 장이 되고 수행의 장이 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사찰의 본래적 목적인 종교적 기능을 원활하게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그렇지만 사찰은 그 종교적 기능을 함에 있어서도 그 접근법이 다양할 수 있다. 문화적 기능을 통한 접근법은 그 중에도 가장 중요하다고 할 것이다. 물론 문화라는 개념이 간단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문화적 기능 또한 속단이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하나의 도시사찰이 포괄적으로 어떤 문화적 기능을 할 수 있으며 해야 하는가를 생각하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의 도시사찰은 문화적 역할과 무관한 것처럼 잘못 인식되었다. 조선시대의 숭유배불(崇儒排佛) 정책으로 도시사찰이 존재할 수도 없었던 상황은 특히 우리 도시사찰 문화의 단절을 불가피하게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사찰은 도시민의 생활과 문화에 핵심적인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었다. 부녀들을 중심으로 한 실제적인 신앙의 귀의가 사찰의 문화적 역할을 떠날 수 없게 만들었다고 할 것이다.
사찰은 그 건물의 구조와 건축양식에서부터 문화와 연관되지만, 사찰이 자리한 주변의 자연환경을 포함해 더욱 문화적 가치를 갖는다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 건물 안에 혹은 건물 밖 구내에 조성되어 있는 불상과 탑, 성물들이 모두 문화적 의미를 갖는다고 할 것이다. 사찰이 가지고 있는 그런 역사적 유물 가운데는 바로 국가, 혹은 지방의 유형문화재로서 평가되는 것이 많다는 것도 그런 현실을 인식시킨다.
그 점에서는 도시사찰의 건물이나 성보 성물들 자체가 문화와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다. 성스럽고 아름답게 장엄된 사찰건물 자체가 문화를 표상하기도 한다.
사찰안에서 이루어지는 행사들이 바로 문화와 연관되는 것도 있다. 지금 우리는 불교의 특수한 의식작법 자체를 문화적 안목으로 평가할 수도 있다. 범패 같은 것이 무형문화재로서 평가되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다.
그렇지만 도시사찰이 현실에서 그런 불교의 문화적 전승을 시연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을 교육, 공연하는 일 자체도 분명 문화라고 할 것이다. 그것이 특히 불자만이 아니라 도시지역민을 위해 제공될 때는 더 말할 나위 없는 문화활동일 것이다. 특히 도시사찰이 그런 문화활동을 상설 공간과 기관을 설치해 한다면 더욱 확실한 문화활동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도시사찰의 문화적 기능은 소극적인 단계에서 적극적인 것으로 바뀔 필요도 있다. 우리 도시사찰의 문화적 기능은 아직 불자들과 시민들에게 모두 생소한 것으로 비치는 수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세하고 초보적으로 이용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이런 사찰의 문화기능을 문화자원화하고 관광자원화(觀光資源化)할 수 있는 여지는 충분하다고 할 것이다. 독일에 가면 쾰른 대성당 건물을 참관하고 로마에 가면 바티칸 사원을 관광하며 미켈란젤로와 같은 거장의 위대한 성화들에 감탄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리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프랑스 아비뇽 페스티벌의 가장 중심적인 연극공연은 아비뇽 교황청 앞에서 펼쳐지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감안한다면 서울 도심사찰의 새로운 모델로 등장한 법련사는 그 문화적 기능과 역할에 적잖은 주목을 받게 되었다. 비록 규모면에서 부족함이 없지 않지만 그런 대로 정성을 들인 사찰 건축및 조각들과 문화공간은 가꾸고 이용하기에 따라서는 점점 빛을 발할 수도 있을 것이란 기대다. 법련사 건물자체, 그 안에 모셔진 불보살상들이 모두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문화예술품으로 평가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 것이며 사중에 마련된 불일미술관과 불일서점, 연다원 같은 공간이 모두 도시지역민의 문화적 욕구와 기대에 부응하는 활발한 역할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법련사와 그 문화공간이 중요한 서울의 문화명소(文化名所), 관광명소로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보조사상10 에 수록된 논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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