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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1993. 작사가·극작가·연출가·월북작가
본명은 조영출(趙靈出)이다. 이 밖에도 조명암(趙鳴岩), 김다인(金茶人), 김운탄(金雲灘), 김호(金湖), 남려성(南麗星), 부평초(浮萍草), 산호암(珊瑚岩), 양훈(楊薰), 이가실(李嘉實), 함경진(咸璟進) 등을 사용했다. 필명 중 김가인은 극작가 겸 작사가인 박영호(朴英鎬)와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1913년 11월 10일 충청남도 아산에서 태어나 15세 무렵 건봉사 부설 봉명(鳳鳴)학교에서 수학하였다.
1930년 한용운(韓龍雲)의 추천으로 서울로 가서 보성고등보통학교로 전학해 1935년 3월 졸업하였다. 졸업 후 바로 일본 와세다대학 불문과에 입학해 1941년 졸업하였다. 졸업 후 귀국해서 오케이 레코드 문예부에 입사하여 가요 작사와 음악극의 대본 집필 및 연출을 담당하였다.
봉명학교에 다니던 1929년부터 다양한 지면을 통해 시문을 발표하였고, 193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서 시 「동방의 태양을 쏘라」가 당선되어 정식으로 등단하였다. 이때 시와 함께 유행가 부문에서도 「서울노래」가 가작으로 뽑혔다. 이 작품이 처음으로 1934년 5월 컬럼비아 레코드사에서 음반으로 발매되었다. 이 노래의 가사가 일제에 항거하는 내용이 암시적으로 표현되어 있다고 해서 발매 일주일만에 판매 금지곡이 되었다. 레코드사에서는 조명암에게 「서울노래」를 개작해 줄 것을 부탁하여 개작된 「서울노래」가 재발매되었다.
1930년대 중반부터 1945년까지 70여 편의 시를 발표하였다. 주로 모더니즘 계열의 시를 썼는데 대표적으로 「추억의 건축」·「항로」·「제3해협」·「노스탈쟈」·「북행 열차」 등이 있다.
하지만 시보다 대중가요 작사가로 더 유명하다. 해방 전에 쓴 대중가요 가사로 현재 확인되는 것이 대략 600여 곡이 넘는다. 대표 작품으로 1935년 「서울노래」를 비롯해 「추억의 소야곡」·「청춘 부두」가 있고, 1937년 「구십리 고개」· 「알뜰한 당신」· 「한양은 천리 원정」· 「꼬집힌 풋사랑」· 「토라진 눈물」· 「앵화 폭풍」· 「청노새 탄식」· 「총각 진정서」· 「바다의 교향시」· 「타향의 술집」· 「항구마다 괄세더라」· 「꼴망태 목동」· 「님 전 화풀이」· 「기로의 황혼」 등이 있다. 1939년 「항구의 무명초」· 「어머님 전 상백」· 「세상은 요지경」· 「다방의 푸른 꿈」· 「코스모스 탄식」 등이 있다. 1940년 「울며 헤어진 부산항」· 「쓸쓸한 여관방」· 「북경의 달밤」· 「화류 춘몽」· 「잘 있거라 단발령」· 「눈오는 네온가」· 「불어라 쌍고동」· 「꿈꾸는 백마강」 등이 있다. 1941년 「역마차」· 「진달래 시첩」· 「아주까리 등불」· 「요즈음 찻집」· 「가거라 초립동」· 「무정 천리」· 「집 없는 천사」· 「선창」· 「진주라 천리길」· 「차이나 달밤」· 「열일곱 낭랑」 등을 지었다. 1942년 「낙화 삼천」· 「목단강 편지」· 「경기 나그네」· 「낙화유수」· 「남매」· 「목포는 항구다」· 「내 고향」· 「목화를 따며」· 「소주 뱃사공」· 「천리 정처」· 「더벅머리 과거」· 「고향설」· 「아주까리 수첩」· 「인생선」· 「청년고향」 등을 지었다. 1943년 「어머님 안심하옵서」· 「남아 일생」· 「알성급제」· 「황포돛대」· 「서귀포 칠십리」· 「고향소식」· 「양산도 봄바람」 등을 창작하였다. 이 가운데 1939년 「하누님 맙쇼」· 「타향의 술집」· 「기로의 황혼」과 1939년 「편지와 전화」· 「겁쟁이 촌 처녀」 등은 조선총독부로부터 ‘치안방해’ 혹은 ‘풍속 괴란’이라는 이유로 각종 금지 처분을 받았다.
1941년부터 1944년 초까지 지원병을 선전 선동하고 대동아공영권을 찬양하며 침략전쟁에 협력하는 노래 가사를 다수 지었다. 아들을 전쟁터에 보내면서도 웃는 얼굴로 분투를 바라는 ‘총후의 어머니’를 그린 「지원병의 어머니」, 조선인 지원병이 전쟁터에 나가서 천황의 적자(赤子)로 목숨을 바친다는 내용의 「아들의 혈서」를 비롯하여 중국 오지의 전쟁터에서 적의 철조망을 뚫고 돌격하는 결사대에 참가한 용사의 아내가 후방에서 나라님께 바친 참사랑을 거울 삼아 살아가겠다는 「결사대의 아내」, 조선인 젊은이들이 솔선해서 군대에 입대하는 「혈서지원」과 「2500만의 감격」 등이 대표적이다. “나라님의 병정 되기 소원입니다”라는 후렴구를 반복해서 부르는 「혈서지원」은 「2500만의 감격」과 함께 ‘조선 징병제 실시 축하 기념’으로 만들어져 조선지원병 실시 기념 음반에 수록되었다.
그가 지은 대표적인 군국가요로 다음과 같은 노래가 있다. 1941년 8월 「지원병의 어머니」, 1942년 1월에 「그대와 나」· 「강남의 나팔수」, 2월 「벽오동」· 「진두의 남편」, 3월 「만주 신랑」· 「아들의 혈서」, 4월 「병원선」· 「총후의 자장가」, 5월 「고성의 달」, 8월 「이 몸이 죽고 죽어」· 「남쪽의 달밤」, 9월 「위문편지」· 「마지막 필적」· 「낭자 일기」, 11월 「아세아의 합창」, 12월 「소년초」· 「모자상봉」· 「군사우편」(일명 아들의 소원)이 있다. 1943년에는 「동백꽃 피는 망루」를 비롯하여 1월 「망루의 밤」· 「단심 옥심」· 「결사대의 아내」, 2월 「행복한 이별」, 3월 「동아의 여명」· 「아가씨 위문」· 「옥퉁소 우는 밤」· 「옥토끼 순정」· 「산 천리 물 천리」· 「참사랑」, 4월 「봄날의 화신」, 8월 「아름다운 화원」· 「조선해협」, 11월 「혈서지원」· 「이천오백만 감격」, 12월 「지원병의 집」· 「교실의 커튼」, 1944년 3월 「바다」· 「배」를 작사하였다. 그가 작사한 군국가요는 오케이 레코드와 컬럼비아레코드사에서 음반으로 발매되었고 경성방송국에서 방송되었다.
1940년대 악극과 연극 대본도 집필해 극작가와 연출가로도 활동하였다. 대표적으로 1941년 「추석제」, 1943년 「왕소군」· 「영 넘어 팔십 리」, 1944년 「노예선」· 「열사의 화원」, 1945년 「현해탄」· 「도화만리」· 「맹강녀」· 「유충렬」 등이 있고 작품 상당수는 조선악극단에서 공연하였다.
1944년부터는 징병을 선전하는 연극 대본을 집필하였다. 1944년 3월 22일부터 26일까지 공연한 대동아 음악극 「노예선」 대본을 집필하고 연출하였다. 「노예선」은 조선군 보도부 추천작품으로 미국과 영국에 대한 적개심을 앙양시키려는 의도로 만든 가극이다. 9월 징병을 선전하는 연극 「성난 아시아」 대본을 공동 집필하였다. 1945년 2월 17일부터 26일까지 신생극단이 3회 연극 경연대회 공연한 「현해탄」 대본을 집필하였다. 「현해탄」은 세균병기를 개발하기 위해 헌신 노력하는 주인공을 중심으로 지원병에 나서는 대학생들, 그런 대학생들에게 “훌륭한 폭탄이 되어”달라고 부탁하는 여인들의 모습을 그림으로써 노골적으로 징병과 전쟁 협력을 선전 선동하는 내용이다.
해방 직후 1945년 8월 좌익 연극인들이 주동이 되어 조직한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 산하 조선연극건설본부의 극작 부원으로 참여하면서 프로연극동맹의 핵심요원이 되었다. 12월 6일에 결성된 조선 문학가동맹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소설가 이태준(李泰俊)·이원조(李源朝)·김남천(金南天), 시인 임화(林和) 등과 함께 활동하였고, 1945년 12월 25일 조선연극동맹이 결성될 때 조영출이라는 본명으로 함세덕(咸世德)과 함께 부위원장을 지냈다. 시인으로서 해방기념 13인 공동시집 『횃불』에서 시 「슬픈 역사의 밤은 새다」를 발표하였다.
1946년 1월 1일 동양극장이 신정 공연작품으로 김백희(金白姬)를 중심으로 새로 조직한 조선악극단의 제1회 작품인 「카츄샤」(톨스토이 원작 『부활』)를 각색하고 연출하여 막을 올렸다. 5월 28일에는 을지로4가에 있던 성보극장(城寶劇場)이 국도극장(國都劇場)으로 개명 개관할 때 첫 작품으로 그의 신작 가극 「가면무도회」를 선택하였고 이때 이가실이라는 예명을 써서 연출하였다. 같은 해인 1946년 희곡 「독립군」도 발표하였다. 1947년 「위대한 사랑」·「미스터 방」 등 창작희곡을 발표하였고, 라미라가극단의 공연물 「산하 유정(山河有情)」·「항우와 우미인」의 극본을, 그리고 다분히 경향적인 작품인 「소낙비」라는 희곡도 발표하였다. 대중가요 가사도 해방 이후 새로 설립된 오케이 레코드사와 케이비시(K.B.C.) 레코드사를 통해 1948년 「울어라 은방울」· 「몽고의 밤」· 「아내의 노래」· 「고향초」 등을 발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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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건국되자, 좌익계열 문인들과 함께 월북하여 박영호(朴英鎬)가 주도한 북조선연극동맹의 핵심요원으로 활약하기 시작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 때는 인민군 종군작가로 활동하며 「조국 보위의 노래」· 「청년 유격대」 등을 작사하였고, 1953년에는 작가동맹중앙위 후보위원, 1956년 10월에는 작가동맹 정회원으로 중앙상무위원에 선출되었다. 1957년 11월 국립민족예술극장 총장, 1958년 북한교육문화성 부상(副相)에 임명되었다. 1957년 『조영출 시선집』과 1961년 『조영출 희곡선집』을 발간하였다. 1962년 12월 문학예술동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았다. 이후에도 평양 가무단장, 평양학생소년예술단장 등을 역임하여 북한에서 계속 영향력 있는 문인으로 활동하였다. 예술단을 이끌고 버마·불가리아·중국 등 공산권 국가들을 방문하여 공연하였고, 그러면서도 꾸준히 희곡을 발표하였을 뿐 아니라 시나리오 등을 썼다. 주요 작품으로 피바다식 대본인 「춘향전」, 영화 대본 「사랑 사랑 내 사랑」, 연극 대본 「심청전」·「맑은 태양(太陽)이야」, 가극 대본 「바다의 처녀들」·「견우직녀」·「배뱅이굿」·「물새」·「선화공주」 등이 있다. 1973년 북한으로부터 국기훈장 제1급과 ‘김일성상 계관인’ 칭호를 수여받았고, 1993년 5월 8일 사망한 후 북한의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박시춘(朴是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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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가. 1913년 10월 28일 경상남도 밀양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박순동(朴順東)이다. 밀양 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중도에 그만두었고, 이후로도 별다른 음악교육은 받지 않았다. 원래 집안이 부유한 편이었으나, 아홉 살 때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병 치료에 가산을 다 써 버려 곤궁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악기 연주에 능했고, 열한 살 무렵 가출하여 약 10년 동안 여러 공연단체 소속으로 각지를 떠돌아다니는 유랑생활을 했다. 다양한 악기를 다 잘 다루었으나 특히 기타 연주에 능했고, 이후 음반으로 발표한 작품에도 기타를 사용한 것이 많았다.
박시춘이라는 예명을 써서 작곡가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때는 1935년으로, 시에론(Chieron) 레코드에서 발매된 <희망의 노래>가 현재 확인되는 첫 작품이다. 1936년까지 시에론 레코드, 럭키(Lucky) 레코드, 태평(太平) 레코드에서 간헐적으로 작품을 발표했고, 이후 오케(Okeh) 레코드 전속작곡가가 되어 본격적으로 인기곡들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항구의 선술집>, <물방아 사랑>, <불망의 글자>(이상 1937년), <애수의 소야곡>, <왕서방 연서>, <앵화 폭풍>, <꼬집힌 풋사랑>, <총각 진정서>, <괄세를 마오>, <남장미인>, <항구마다 괄세더라>, <기로의 황혼>, <눈물의 춘정>(이상 1938년), <세상은 요지경>, <감격시대>, <안개 낀 상해>(이상 1939년), <울며 헤진 부산항>, <쓸쓸한 여관방>, <선부의 아내>, <눈 오는 네온가>(이상 1940년), <무정 천리>, <집 없는 천사>, <인생 출발>(이상 1941년), <천리 정처>, <목단강 편지>, <내 고향>, <청년 고향>(이상 1942년), <황포돛대>, <서귀포 칠십 리>(이상 1943년) 등이 있으며, 1943년까지 발표한 작품 수는 확인되는 것만 270곡 이상이다. 이 가운데 <기로의 황혼>은 ‘치안 방해’를 이유로 가두 연주가 금지되었다.
오케 레코드에서 작곡가로 활동하는 동시에 조선악극단에서도 기타 연주, 지휘, 작곡 등을 맡아 활동했고, 남성 보컬팀 아리랑 보이즈의 일원으로 무대에 직접 서기도 했다. 1944년부터는 조선 악극단 외에 약초(若草) 가극단, 라미라(羅美羅) 가극단, 신협(新協) 악극대 등의 공연에도 참가했다. 1939년부터 1940년 사이에는 박시춘 기타 작곡집 세 권이 동인(同人) 음악출판사에서 간행되었다.
광복 이후에는 1946년에 직접 박시춘 악단을 조직해 공연을 하기도 했고, 그밖에 K.P.K 악단, 악단 제일선(第一線), 은방울 악극단, 빅타 가극단 등의 공연에도 참가했다. 1947년 서울 중앙방송국 경음악단이 조직되자 지휘를 맡았고, 1947년 8월 이후 음반 생산이 재개되면서 고려(高麗) 레코드, 오케 레코드, 럭키 레코드 등에서 <가거라 삼팔선>, <고향초>, <눈물의 오리정>, <몽고의 밤>(이상 1948년), <금박댕기>, <낭낭 십팔 세>, <신라의 달밤>, <청춘 블루스>, <럭키 서울>, <비 내리는 고모령>, <여인 애가>, <고향 만리>, <애수의 네온가>(이상 1949년), <애정 산맥>(1950년) 같은 인기곡을 발표했다. 특히 현인(玄仁)이 부른 <신라의 달밤>은 당시 대중 가요계의 판도를 바꿀 정도로 널리 유행했다.
6ㆍ25 전쟁 발발 이후에는 <전우야 잘 자라>, <승리의 용사>(이상 1950년) 같은 이른바 ‘진중(陣中) 가요’를 작곡하는 한편, 군예대를 이끌고 위문공연을 하기도 했다. 1951년부터는 대구에 있는 오리엔트(Orient) 레코드와 부산에 있는 스타(Star) 레코드에서 <님 계신 전선>(1951년), <영 너머 고갯길>, <전선야곡>(이상 1952년), <굳세어라 금순아>, <샌프란시스코>(이상 1953년), <승리 부기>, <삼다도 소식>(이상 1954년) 등을 발표했고, 서울로 돌아온 뒤인 1954년부터는 유니버살(Universal) 레코드, 미도파(美都波) 레코드, 신세기(新世紀) 레코드, 지구(地球) 레코드 등에서 전속 작곡가로 활동하면서 <아메리카 차이나타운>, <봄날은 간다>, <이별의 부산정거장>(이상 1954년), <나는 울었네>, <물새 우는 강언덕>, <청춘고백>(이상 1955년), <나는 사람이 아니외다>, <청춘 쌍곡선>, <아베크 토요일>(이상 1956년), <부산 행진곡>, <인생은 나그네>, <가거라 슬픔이여>, <정순의 노래>(이상 1957년), <남성 넘버원>, <딸 칠 형제>, <두 남매>, <오부자의 노래>, <신라의 북소리>, <하이킹의 노래>(이상 1958년), <가는 봄 오는 봄>(1959년), <사월의 깃발>(1960년), <사랑의 메아리>, <피리 불던 모녀 고개>(이상 1963년), <우중(雨中)의 여인>(1965년), <돌지 않는 풍차>(1966년), <일자 상서>(1970년) 등 수많은 인기곡을 발표했다. 그런 가운데 1956년에는 직접 노벨(Nobel) 레코드를 설립해 운영했고, 대한 레코드 축음기 제작가 협회 임원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해에 설립된 대한 레코드 작가 협회에서는 이사장을 맡았고, 1961년에는 한국 연예협회 이사장에 취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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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중반 이후 영화 제작이 활기를 띠자 영화 음악에도 참여해, 1960년에 설립된 한국 영화음악 작곡가 협회에서 위원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나아가 오향(五響) 영화사를 직접 설립해 영화 제작에 나섰고, 몇몇 작품에서는 감독을 맡기도 했다. <삼등 호텔>, <딸 칠 형제>(이상 1958년), <가는 봄 오는 봄>, <육체의 길>(이상 1959년), <장미의 곡>(1960년) 등이 오향 영화사의 대표적인 작품이며, <삼등 호텔>과 <딸 칠 형제>는 박시춘이 직접 감독을 맡았다.
1970년대 이후로는 작품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고, 1982년에 문화훈장 보관장을 받았다. 1996년 6월 30일에 노환으로 타계했다.
歌皇남인수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