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
신외숙
병동(病棟) 창밖으로 긴 차량 행렬이 보인다.
붉은색을 띤 차량들이 꼬리를 물고 S자로 휘어진 도로를 지나 터널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어둠이 짙어가는 거리는 초겨울답지 않게 온기가 흐르고 사람들은 느릿 느릿 걸어가고 있다. 아무래도 겨울이 실종된 모양이다.
지구 온난화로 빙산이 녹으면서 종말론을 부채질하고 있다. 이제 몇 년 내에 지구 온도가 내리지 않으면 지구는 폭발할지도 모른다는 과학자들의 예측이 빈번하다. 그럼에도 지구인들은 계속 평안을 내비치고 있다. 언론매체마다 터지는 악재로 가득한데 사람들은 너무도 평안한 표정으로 살아간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가자 지구의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끔찍한 살상에도 딴 세상을 보는 듯 평안하다. 묻지마 폭행과 데이트 폭력 살인과 자살률 1위라는 보도에도 모두 딴 세상을 살고 있다. 정치판을 달구는 진영논리와 날마다 터지는 죄악상에 만성화 내지는 불감증에 걸린 모양새다.
세상은 종말론적 현상에 곧 종지부를 찍을 것 같은데도 이상한 평화가 분명 존재하고 있다. 자포자기 막가파식인가. 미래에 대한 잠재적 불안도 이젠 뇌리에서 사라진 모양이다. 나는 병동 밖을 빠져나와 습관처럼 거리를 나선다. 전철 역사 앞을 지나고 상가와 빌딩 숲속을 지나면서 인생 철학자가 된다.
인생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삶의 이유와 목적은 무엇이기에 사람들은 돈에 목숨 걸며 아등바등 살아가는 것일까. 엄청난 부를 축적한 사람들은 죽을 때 그 많은 재산을 두고 아까워서 어떻게 눈을 감을까.
별 걱정을 다하네 너나 잘하세요. 스스로 비웃으며 난 거리를 오가는 수많은 발걸음에 집중한다. 저들이 지나는 거리마다 인생 행로라는 단어를 생각나게 한다.
저 발걸음들이 살아왔을 지난날과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은 어디에 있을까, 자 발걸음들은 어디서 출발해서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걸까. 저마다의 사연을 갖고서 최종의 목적지는 어디일까. 가을과 겨울의 경계선이 사라진 탓인지 흔한 낙엽조차 보이지 않는다.
수명이 다한 말라 비틀어진 낙엽이 수북이 쌓였다가 비닐봉투에 담겨 사라질 뿐이다. 바람 공기가 훈훈하다. 거리는 고기 태우는 냄새와 커피향이 뒤범벅되어 속에서 욕지기가 날 지경이다. 지하철 입구로 향하는 발걸음들은 매우 혼잡하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다시 계단을 내려 전철에 탑승한다. 전동차 안은 이미 지옥철이다.
출퇴근 시간대도 아닌데 숨막힐 정도로 승객들로 꽉꽉 채워져 있다. 환승역에 이르자 비로소 숨통이 트인다. 전동차는 한강을 지나고 다시 지하를 달리다 다시 환승역을 지나 마지막 종점에 닿았다. 내가 여길 왜 왔을까. 처음 대하는 낯선 풍경이 두려움과 함께 확 가슴을 엄습한다.
불길한 예감으로 무릎이 떨린다. 갑자기 머릿속이 뒤죽박죽 엉키고 있다. 이런 걸 두고 멘붕이라 하던가. 또다시 걱정과 두려움과 불길한 예감이 뒤엉켜 정신적 파산을 예고하는 것만 같다. 하늘을 바라보니 먹구름이 흰 뭉게구름을 점점 밀어내고 있다. 집에 도착한 나는 샤워를 하고 자리에 누웠다.
밤새 악몽에 시달렸다. 누군가에 쫓겨 건물 안으로 들어섰는데 지하로 연결된 통로였다. 이상하다. 보통 건물이라면 지상으로 올라갈 텐데 왜 지하통로만 보이는 걸까. 나도 모르게 어떤 강력한 힘에 떠밀려 지하계단으로 내려섰다. 뒤에서 쾅하고 굉음이 들렸다. 강력한 폭발음이었다.
정신없이 지하통로로 뛰어 내려갔다. 긴 동굴이 보이고 개천이 흐르고 있었다. 영화에서 보던 끔찍한 장면이 연상되는 칠흙 같은 어둠이 퀴퀴한 냄새가 진동을 했다. 시커먼 개천물이 발목을 적시면서 공포는 극대화 됐다. 어디선가 물이 계속 흘러들어왔다. 점점 수위가 높아지더니 물이 목까지 차올랐다.
더 이상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수영을 하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끝간 절망이었다. 아! 이대로 마지막이구나. 오! 하나님
꿈에서 깨어나니 침상이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가슴이 패이는 것처럼 아파왔다. 이대로 심정지가 오는 건 아닐까. 비약적인 사고는 잠시도 멈추지 않는다. 먼 기억속으로 어린 날 친구들과 함께 놀라갔던 정릉 골짜기가 떠올랐다. 맑은 계곡물 소리를 들으며 친구들과 웃고 떠들던 어린 시절은 한편의 동화였다.
청소년 시절 이후 내 가슴은 피멍이 들기 시작했다. 온갖 안 좋은 단어와 수식어는 나를 위해 준비해 놓은 것만 같았다. 불행과 쓴뿌리가 생겨나기 시작했고 무엇보다 극심한 혼돈으로 분별력이 떨어졌다. 무슨 일을 만나도 이게 팩트인지 거짓인지 분별이 가지 않았다.
가난과 핍박은 기본이었다. 극심한 혼란속으로 악의 속삭임도 들려왔다. 어둠이 짙을수록 새벽은 밝아 온다던가. 하지만 난 그 말조차 믿지 않았다. 환란의 먹구름은 한꺼번에 들이닥치곤 했는데 채 어둠이 가시기 전 또다시 먹구름이 몰려왔다. 그러던 어느날 마음속에 한줄기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누군가 나를 향해 손짓하고 있는 게 보였다.
나는 그 빛을 향해 손을 마구 흔들었다.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벗어날 수 없는 한계처럼 나를 옥죄어 왔다. 마치 밀물과 썰물처럼. 그런데도 나는 삶을 주관한다는 어떤 절대자의 힘을 믿었다.
그는 의와 평강의 왕, 인자와 진리의 영 절대 권능주였다. 우주 만물을 다스리고 인과응보로 인류를 심판하시는 절대 권력자였다. 그는 가장 파워풀한 능력으로 역사를 주관하고 이끌어 가는 역사의 주인공이었다. 나는 믿었다. 그 절대자 앞에 늘 누군가와 동행하며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사람 인(人)자 한자를 봐라. 왜 인(人)자가 서로 연결돼 있는 줄 아니? 그건 사람은 결코 혼자 살 수 없는 존재란 뜻이야, 서로 공존하는 삶이어야 한단다. 서로 소통하면서 어려울 때는 돕고 남이 잘되면 칭찬해 주고 그것이 진정 행복한 삶이 아닐까. 누군가 내 귓가에 말해주고 있었다.
그러나 세상을 살아갈수록 그 말이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현실이 반대로 나타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모두 가식적인 위선자로 느껴졌다. 세상의 문명이 발달할수록 인과응보에 대한 가치관은 더더욱 떨어지는 것 같았다. 도대체 신의 전능성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만 높아졌다. 그러다 어느날 깨달았다.
인간의 자유의지와 책임성 그리고 내세에 대해. 언젠가 지인이 내게 말했다.
”난 하느님의 존재에 대해 믿지 않아요, 신이 계신다면 왜 악인은 번성하고 선인과 의인은 패망하는 걸까요 그래서 난 신을 믿지 않아요,“
그때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 있었다.
”그러니까 더욱 천국과 지옥을 믿어야 해요, 살아서 온갖 악행을 저지르면서 못된 짓 한 인간은 지옥에서 영원토록 형벌을 받아야 하고 살아서 선행을 한 사람은 죽어서 천국에서 그 상급을 받아야 하는 거예요.”
지인은 잠시 묘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고개를 외로 꼬았다. 긍정인지 부정인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갑자기 급보가 전해져 왔다. 난 급하게 집을 나와 전철 역사를 향해 정신없이 뛰어갔다. 다리가 후들거려 자꾸만 발을 헛디뎠다. 전동차 문이 수없이 열렸다 닫히면서 지옥의 문도 수없이 열렸다 닫히기를 반복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난 기적을 믿었다. 만약 신이 살아 있다면 기적의 은총을 베풀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랐다.
중환자실에서 생사의 갈림길에 선 내 아버지의 생명줄을 신의 은총으로 연장시켜 주실 것을 난 기적이라는 표현으로 믿고 싶었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고비를 넘겨 안정기에 접어 들었다고 하지 않았던가. 젊은 담당의는 전문적인 단어를 동원하며 병실 옮길 준비를 하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제 와서 심정지라니.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았다 전철은 굉음을 뚫고 계속 전진했다. 인생의 최종 목적지를 향해 전진한 끝에 드디어 종착역에 닿았다. 전동차에서 내려 에스컬레이터에 오르는 순간 가슴 한켠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마음은 앞으로 달려가는데 발걸음은 자꾸만 뒤로 밀려나는 것만 같다. 가슴 속에서 쿵쾅 쿵쾅 긴박한 울림이 요동친다. 수없이 많은 계단을 오르고 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밖으로 나오니 거대한 의료타운이 보였다.
수많은 차량이 드나들며 삶과 죽음의 문턱을 넘고 있다. 이 병원의 환자들의 연령은 80대를 상회한다. 병원의 특성상 국가에서 지정한 특별한 예우를 받는 환자들만 이용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병원비도 식비 정도만 내는 거의 무료에 가깝다. 병원은 본 건물과 요양병동이 마주 보고 있는데 규모로는 최상급 병원 못지 않다.
맞은편에는 일직선으로 곧게 뻗는 산이 푸른 숲향을 펼치고 있다. 서울 끝자락이라 그런지 공기는 맑고 신선한 편이다. 수백명에 달하는 전문의가 있다지만 대부분 30 초반의 젊은 의료진들이라 신뢰도는 반반이다. 언젠가 응급실에서 들것에 실려 온 환자를 강남에 있는 대학병원으로 돌려보낸 일이 있었다.
신뢰가 떨어지면서 불안감이 물밀 듯이 다가왔다. 병원은 각종 의료장비가 그것도 최신의 것으로 구비돼 있음을 알림판을 통해 알 수 있다. 한쪽 알림판에는 의료노조가 알리는 소식란에 불안이 스며 있었다. 병동은 엄청나게 큰데 비해 서비스 질은 별로였다. 이곳에선 각종 검사를 받으러 갈 때 환자 스스로 움직이거나 보호자가 따라가야 한다.
말하자면 셀프인 것이다. CT 촬영이나 MRI를 할 때도 환자 스스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검사실에 가서 받아야 한다. 결과는 담당 간호사를 통해 고지 받는다. 아침에 한번씩 도는 회진도 환자와 보호자에게 일회에 걸쳐 설명할 뿐이다. 담당 간호사도 수시로 바뀌고 금요일 저녁 담당의가 퇴근하고 나면 응급 상황이 발생해도 처치가 더디게 이루어진다
이것이 바로 상급 병원과 2급 병원의 차이다. 병원 건물 규모가 크다고 다 상급병원이 아닌 것처럼. 딸린 보호자가 없는 경우 간병인이 환자를 돌보는데 일당이 20만원을 상회해 웬만한 경우가 아니면 고용하기가 힘들다. 대부분 고령의 환자들이라 해도 생에 대한 집착은 강하다.
그들은 실낱같은 생명을 붙잡기 위해 철저히 의사의 지시를 따르고 순응한다. 삶을 향한 마지막 발버둥을 포기하지 않는다. 죽음의 서곡을 알리는 대목에서도 삶의 끈을 놓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생명은 일회성이기에 죽음이라는 마지노선을 넘지 않기 위해 연명치료를 선택하는 것이다.
몇 년 전 친구 엄마가 대학병원 응급실에 실려 갔을 때의 일이다. 응급실에서 간단한 처치가 끝나 일반 병실로 옮겼는데 의료진들은 별다른 설명도 없이 고령이란 말만 되풀이 했다. 완치가 어려우니 각오하란 뜻이기도 했다. 노환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별다른 치료 방법이 없으니 더 이상 병원에서 해줄 게 없다고 했다.
한마디로 환자를 살리려는 의지가 없어 보였다. 그때 친구와 내 입에서 동시에 말이 나왔다.
지들은 안 늙을 건가? 늙었다고 그냥 치료를 포기하란 말인가. 고령이란 이유로 생명의 가치가 홀대받는 느낌이었다. 어린 생명 젊은 생명은 어떡하든 살려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데 고령이라는 이유로 연명치료 포기 각서를 내밀지를 않나. 천국 문이 가깝다는 이유로 환자를 방치하는 듯한 발언을 너무 쉽게 하는 것이다.
친구 엄마는 병원이 싫다며 집에 돌아가겠다고 딸을 재촉해 결국 퇴원했다. 그리고 집에서 요양하다 급성 뇌출혈로 사망했다. 최상급 병원 장례식장에서 치러진 장례식은 지인들은 물론 자녀들조차 눈물을 보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겉으로 말은 안해도 속으로 호상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당시 95세였으니까.
9층에 있는 병실은 순환기 내과나 이빈후과 비뇨의학과 환자들이 상주한다. 대부분 거동이 불편한 환자들이다. 코로 연동식 급식을 하거나 소변줄을 단채 겨우 화장실 가는 정도이거나 대소변도 못 가리는 경우도 있다. 들어올 때 걸어서 들어왔다가 상태가 나빠져 중환자실로 옮기는 경우도 있다.
수술하려고 개복했다가 상태가 나빠 도로 닫고는 방사선실로 가기도 한다. 획기적인 의료 기술이 발달했다지만 고령의 환자들에겐 그림의 떡인 경우도 많다. 갑자기 상태가 나빠져 합병증과 함께 심정지 상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보호자 없이 입원한 환자들도 있다.
식사를 마치면 다용도실에 손수 식판을 갖다 놓고 휴게실에 가서 텔레비전을 시청한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환자들이기에 보호자와의 연락 체계는 긴밀하게 이루어진다. 꺼져가는 생명줄이라도 환자 본인에게는 절박한 것이기에 최선을 다해 치료에 임한다.
집에서는 그렇게 밥맛 없다고 반찬 타령 불평 불만이 가득하더니 병원 밥은 한그릇 뚝딱 해치운다. 수시로 찔러대는 주사 바늘도 아야 소리 없이 감내한다. 전에 하던 짜증이나 볼멘 소리도 없이 의사 말에 그대로 순종한다. 고분 고뷴 말 잘 듣는 어린아이 같다. 눈물이 난다.
살고 싶어 몸부림치는 모습이 가슴을 후벼판다. 수혈했다가도 얼마 지나지 않아 도로 피를 뽑아 간다. 정상적인 혈액수치가 나왔는지 검사하기 위해서란다. 수시로 혈압을 체크하고 체온측정과 수액을 보기 위해 밤새 병실을 들락거린다. 옆 베드에서 나는 신음소리도 귀에 거스린다.
수술 부위가 아파 죽는다고 뭔가 잘못된 거 같다고 담당의를 수시로 불러대는 바람에 잠을 1초도 못 잔 날이 허다하다. 코로 유동식을 하던 앞 베드에 있던 할아버지는 이틀 후 요양병원으로 옮겨갔다. 손발이 묶인 채로 지내다 겨우 눈으로만 의사 표시를 하다 간병인의 손에 이끌려 나갈 때는 모두 눈물을 흘렸다.
수술을 받고 안정기에 접어들어 이제 살만하다 싶었는데 갑자기 상태가 나빠져 중환자실로 갔다가 영영 못 돌아온 경우도 있다. 어떤 노인환자는 지병에다 치매현상마저 겹쳐 간호사와 한참 입씨름한 적도 있다. 환자가 자꾸 떼를 쓰며 집에 가겠다고 링거줄을 빼자 간호사가 다가와 심문(?) 아닌 심문을 한 것이다.
“할아버지 이름이 뭐에요?”
“할아버지 몇 살이이에요?”
두 번째 질문까지는 잘 대답했는데 문제는 3번째였다.
“여기 어디에요?”
“여긴 춘천이지.”
“아니에요, 여긴 서울이고 병원이에요.”
“나 춘천 우리집에 갈 거야.”
노인은 링거줄을 잡더니 침대에서 일어나려 했다.
“안돼요, 여긴 병원이고 집에 못가요.”
간호사는 야멸차게 쏘아부쳤다. 노인은 간병인에게도 계속 횡설수설했다.
“아줌씨 아줌씨 나이가 몇인고?”
“나이는 왜 물어요.”
“아니 어제 아줌씨가 하도 친절하게 굴기에 내 애인인 줄 알았어.”
“애인이 여기에 왜 있어요, 딴소리 하지 말고 내일이 수술하는 날이니까 마음이나 단단히 준비하세요”
“그럼 아줌씨 우리 집사람한테 전화나 해주소.”
“전화번호가 어떻게 되는데요?”
“그러니까 010에 뭐더라. 아 생각났다. 어서 돌려봐 주소. 그리고 내 아줌씨한테 할 말 있는데 자식 다 소용없으니까 절대 재산 물려주지 마소, 못된 놈들이 말이야 돈만 알고 제 애비는 안중에도 없어 죽든 말든 신경도 안 써.”
그러나 1시간도 못 돼 도착한 아들은 선물 보따리를 싸들고 와서 의료진들에게 돌렸고 이어 도착한 아내에게 노인은 손녀의 안부를 묻더니 곧바로 통화를 시도했다.
“우리 예쁜이 손녀 잘 있었어요, 유치원 잘 다녀오고 밥도 잘 먹고요.”
“네 할아버지 밥도 잘 먹고 공부도 열심히 했어요, 할아버지 사랑해요, 보고 싶어요.”
“아이구 그랬어요. 할아버지도 우리 손녀 많이 사랑하고 보고 싶은데 내일 만날까요, 할아버지가 우리 손녀 보러 갈께요.”
“아이 좋아라, 그럼 할아버지 내일 꼭 만나 우리집에 와서 만나, 꼭 약속 지켜.”
전화를 끊자 아내가 말했다. 내일이 수술날짜인데 왜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했냐. 그러자 그가 말했다. 내일이 수술이라고 언제 그런 말 했어, 나 모르게 수술하다니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아까 좀 전에 간호사가 와서 말했잖아, 내일 수술 들어가니까 준비하라고.
노인의 아내는 기가 막힌 듯한 표정을 짓더니 밖으로 나갔다. 아들한테 전화하면서 계속 간병인을 써야겠다고 말했다. 남편과 함께 있다 보면 계속 불화가 발생할 게 뻔했다. 쓸데없는 고집을 피우거나 난동을 부려서 자신과 의료진들을 골탕 먹일 것이다. 일단 간병인에게 맡기고 뒤로 물러날 참이었다.
노인은 지병인 당뇨에다 합병증으로 신부전증을 앓고 있었다. 게다가 치매 초기 증상에다 방광암 수술을 앞둔 중증 환자였다, 그럼에도 노인은 기운이 팔팔해 큰 소리로 고함치듯 말해 병실이 꽝꽝 울릴 정도였다. 노인은 수술이라는 말에 지레 겁을 집어먹더니 곧 거부의사를 밝혔다.
“내 나이가 몇인데 수술이고? 이제 곧 90을 바라볼 나이에 이만큼 살면 됐지 얼마나 더 살겠다고 수술을 한다 말이고, 안 할란다.”
“수술 안 하면 죽어요, 수술하려고 입원한 거 아닌가요?”
“그래도 나 수술 안 할 거야 수술한다고 산다는 보장이 어딨어, 내 친구들도 보니까 수술받고 나서 얼마 안 되어 다 죽더라.”
“그거야 다 병명 나름이죠, 요새는 의료기술이 좋아져서 옛날같지 않아요.”
“하이고, 다 듣기 싫다, 내 나이 이제 구십이다, 얼마나 더 살라고 수술한다 말이고, 안할란다.”
그는 가족과 의료진들에게 생떼를 쓰면서 억지를 부렸다. 내가 볼 때 그에게는 수술의사가 확연히 있었다. 그럼에도 일부러 억지를 부리는 것 같았다, 수술할 생각도 없으면서 입원을 왜 했겠는가. 문제는 그의 잦은 건망증 치매인 것이다. 그는 하루에도 수없이 간병인을 간호사와 애인으로 착각했다.
성적인 농담도 서슴지 않았고 수시로 처자식에 대한 원망을 쏟아냈다. 그때마다 간병인에게 자식들한테 단 한푼도 재산 물려주지 말라고 했다. 아내는 그런 남편을 두고서 춘천으로 내려갔다. 더 이상 상대하기 싫다는 것이었다. 간병인을 쓰는 걸로 보아 재산은 분명 있을 터였다. 하루 간병비가 최소 20만원을 상회했다.
그나마 중국 동포들이었다. 간병비가 비싸다고는 하지만 그럴만도 했다. 환자의 일거수 일투족을 보조하며 대소변을 받아내는 경우도 있었다.
환자와 동행해 검사실을 가는 것은 기본이고 밤잠도 제대로 못 잤다. 잠들만 하면 간호사가 다가와 혈압 체크와 체온을 재고 갔다. 수액이 다했는지 와서 체크하고 배액관은 다 찼는지 수시로 체크하고 갔다, 그런가 하면 옆 베드에 누운 환자가 갑자기 통증을 호소하며 난리를 치는 바람에 병실 환자가 모두 잠을 설치기도 했다.
불면을 호소하는가 하면 갑자기 숨을 못 쉴 것 같다며 의료진을 부르기도 했다. 단 하루도 그냥 넘어가는 일이 없었다, 간병하러 온 아내와 밤새 싸우는 환자도 있었고 옆 병실에서는 노인 환자끼리 주먹 다짐이 벌어지는 바람에 경찰이 출동하기도 했다. 경찰은 피해자로부터 수없는 자기 주장과 하소연을 듣더니 결국 환자의 병실을 옮기게 했다.
소문은 급하게 번져 다른 병실에 있던 환자들도 몰려와 피해자와 가해자를 구경하고 갔다, 피해자는 가해자에게 계속 깡패 할아버지라고 우기고 있었다. 갑자기 욕을 하면서 주먹으로 자신의 면상을 갈겼다고 했다.
경찰은 한참동안 조사를 이어 갔다. 그들은 가해자에게 다가가 조서를 받고 어딘가로 계속 연락을 취하며 서로에게 눈짓을 했다. 환자들끼리 쌈박질이라니 별 희한한 일도 다 있다. 환자들과 보호자들 간병인들은 서로 알게 모르게 흥미로운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심심하던 차에 좋은 구경거리를 만난 것처럼.
일주일 후, 다시 병실을 찾았을 때 노인 환자는 퇴원하고 없었다. 그가 수술을 받았는지 마음이 변해 그냥 퇴원했는지 알 수는 없었다. 내가 병실을 다시 찾은 이유는 간병인이 갑자기 그만두고 가버렸기 때문이었다. 간병인은 그전부터 계속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자주 짜증을 내고 의사의 지시도 따르지 않아 의료진들이 골머리를 앓는다고 했다. 화장실에 갔다가도 물을 내리지 않고 그냥 나오기 일쑤이고 옆 침대에서 작은 소리만 나도 짜증을 부리며 다른 병실로 옮기겠다고 억지를 부린다는 것이었다. 잠을 자다가도 몇 번씩 깨우고 병원 밥이 맛이 없으니 외부 음식을 시키라고 호통을 친다고 했다.
외부 음식은 절대 안되니까 영양사가 작성한 식단대로 먹어야 한다고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었다. 수혈할 때마다 성질을 내고 검사하기 위해 피를 채혈하면 불같이 화를 낸다고 했다. 나중에는 혈관을 찾지 못해 다리에서 채혈을 했다. 참지 못하고 성질을 내는 건 아버지의 고질병이었다.
의사가 다가와 증상에 대해 말하면 꼬치 꼬치 캐묻고 의심을 했다. 의사보다 더 전문가 행세를 하는 바람에 의사가 분노가 폭발해 진료거부 일보직전까지 간 적도 있었다. 간병비가 아깝다고 수시로 가족을 불러댔다. 한때는 MRI 검사 비용이 백만원이라고 하자 도둑놈들이 돈 벌 궁리만 한다며 퇴원하겠다고 난리를 쳤다.
도저히 안 되겠는지 병원에서 퇴원 명령이 떨어졌다. 막상 퇴원 명령이 떨어지자 당황하며 병원에 있을 테니 계속 치료해 달라고 했다. 그러자 담당의는 수련의를 통해 의견을 전해 왔다. 모든 검사를 거부하니 더이상 해줄 게 없다. 당장 퇴원하라. 입원할 환자가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쫒기듯 퇴원해 집에 오니 의사에 대한 원성이 날로 커져 갔다. 환자의 의견을 무시하고 제멋대로인 의사가 치료도 거부하고 내쫒았다. 법적 소송을 벌이겠다. 분노로 숨이 차서 씩씩대더니 마구 폭식을 했다. 병원에서 영양사가 짜준 식단에서 독이 되는 음식만 먹으며 한다는 말이 내 나이 90을 넘겼으니 무슨 한이 있겠는가.
먹고 싶은 음식 양껏 먹으며 살아야지 음식 조절한다고 몇 년이나 더 살겠는가. 옆에서 아무리 말려도 소용없었다. 젊었을 때부터 쓸데없는 고집 부리는 데는 선수였다. 남들이 다 옳다고 주장하는 상식에도 꼭 반기를 들며 혼자 똑똑한 척은 다하는 성격이었다. 언제든지 사람들 앞에 나서서 선생 노릇하고 싶어했다.
누군가 인정해 주고 높여주면 간이고 쓸개고 다 갖다 바쳤다. 가족들한테는 단돈 1000원 한 장 못 쓰면서 자신의 위신 세우는 데는 거금도 아낌없이 투척했다. 자식들한테는 늘상 효도를 강조하면서 몸이 좋다는 음식은 가리지 않고 먹어댔다.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죽기 전까지는 절대로 유산 상속을 안하겠다고 공언했다.
믿을 건 건강뿐이라며 그렇게 호언장담하며 체력유지에 힘쓰더니 나이는 속일 수 없는 모양이었다. 나이 90을 넘어서자 자주 병원에 가는 일이 발생했다. 심장으로 가는 혈관에 혈전이 발생해 풍선효과로 시술 받은 적이 있었다. 젊은 의사가 컴퓨터 모니터를 통해 막힌 혈관을 보여주며 시술한 끝에 금세 숨찬 증상이 사라지자 신기하다며 웃었다.
젊은 의사가 친절하고 실력이 좋다며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했다. 평생 자신했던 건강이 90 고개를 넘기면서 느닷없이 당뇨가 발생하더니 합병증으로 신부전증이 겹쳤다. 당뇨와 신부전증은 식이요법이 정반대다. 당뇨는 주로 잡곡밥에 야채 위주의 식단이라면 신부전증 즉 콩팥병은 잡곡밥은 인과 칼륨이 많아 절대 금지 식품이다.
야채도 마찬가지다. 과일은 물론 웰빙 식품으로 알려진 채소류도 견과류도 대부분 금지 식품이 많다. 그래서 암보다도 더 무서운 병이 신부전증이다. 한번 망가진 신장조직은 소생되지 않는다. 더 이상 악화를 막기 위해 약을 쓰는데 식이요법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악화일로 치닫는다.
그런데 당뇨와 콩팥병이 겹치면 더 이상 식이요법을 할 방안이 안 서는 것이다. 업친 데 덥친 격이다. 식이요법을 깡그리 무시한 채 독되는 음식만 먹었으니 요독증 증상이 온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어느날 아침에 일어나자 마자 소변이 안 나오다며 울상을 짓더니 곧바로 119를 타고 응급실을 찾았다.
당연하게도 급성 신부전증이었다. 신장지수가 최소로 떨어져 투석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입원한 지 열흘만에 옆구리 통증이 발생해 진통제가 투여됐다. 혈전이 발생해 급하게 배악관이 시술됐다, 옆구리에 구멍을 내 인공 소변줄을 단 것이다. 그나마 임시방편이었다.
그러더니 어느날인가부 소변줄에 혈뇨가 비치기 시작했다. 최악의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의사는 조심스레 암일 가능성이 많다고 이야기했다. 혈뇨는 날로 증가해 나중에는 간장색처럼 배액관을 채웠다. 그러더니 온몸에 마비 증상이 발생했다. 급격하게 헤모글로빈 수치가 떨어지면서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거의 이틀에 한번 꼴로 수혈에 들어갔다. 수혈하기 전 간호사는 이름과 혈액형을 체크했다. 그리고 수혈이 끝나자 마자 또다시 혈액검사를 했다. 헤모글로빈 수치가 정상으로 환원 되었는지 하는 검사였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신장지수가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진퇴양난이었다. 혈뇨는 밤낮없이 배액관을 채웠고 수혈도 이어졌다. 어느날 담당의가 다가와 방사선 치료를 제의했다. 요즘은 방사선 치료가 발달해 안전하니 우선 암세포부터 없애자고 제안했다.
암이라니? 그러면 내가 그동안 암을 앓고 있었던 거요.
아버지는 거의 경악했다.
“저희 의료진을 믿고 방사선 치료를 받으시면 혈뇨는 곧 사라질 겁니다.”
반대할 줄 알았는데 의의로 순순히 응했다. 이전에 검사를 거부했다가 강제 퇴원 당했던 기억이 떠올랐던 것일까. 5번에 걸친 방사선 치료는 확실히 효과 있었다. 혈뇨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증세는 날로 악화되고 있었다. 이상했다. 식사도 잘하고 거동하는 것도 좋아지는 것 같은데 계속 숨이 차다고 했다.
한밤중에 고열이 발생해 응급상황으로 의료진이 출동했고 긴급한 조치로 일단 마무리된 듯했다. 혈뇨가 사라졌으니 이젠 괜찮겠지. 안심하듯 말했지만 표정은 불안해 보였다. 열이 오르면 해열제와 얼음찜찔을 했고 혈압을 계속 체크해 나갔다. 혈뇨가 멈춘 것은 기적 같았다.
매일 배액관을 채우던 혈뇨가 사라지다니 현대 의학의 진수를 보는 것 같았다. 방사선의 기술은 날로 발전해 요즘은 표적 치료로 완치가 가능하다고 한다. 예전에는 암세포를 죽이다 정상세포까지 파괴하는 부작용이 있었지만 요새는 표적 치료를 통해 암세포만 파괴하고 통증없이 완치가 마무리 된다.
뿐이랴. 국내 가장 오래된 대학병원에서는 외국에서 3000억원이라는 거금을 들여 중입자 치료기를 도입했는데 이는 단 2분만에 암세포를 없애는 뛰어난 기술력을 가졌다고 한다. 그것도 치료가 가장 어렵다는 희귀암을 입원이나 통증없이 단 2분만에 완치한다. 금년 10월부터 신청자를 받고 치료는 내년도 3월부터 들어간다고 하는데 높은 관심사와 함께 신청자가 봇물 터지듯 넘쳐나고 있다고 한다,
입원 당시 아버지의 증세에 대해 전공의에게 질문한 적이 있다. 담당의가 퇴근하고 난 후 전공의가 병실에 들렀을 때의 일이다.
“요즘은 의료기술력이 발달했다는데 치료 방법이 전혀 없는 건가요?”
“무슨 말씀이시죠?”
“혈뇨를 멈출 방법이요”
“현재로선 없습니다. 그걸 알기 위해 검사를 실시했다간 도중에 돌아가실 수도 있어요.”
“수술도 안되나요?”
“워낙 고령이라 수술은 힘듭니다. 마취에서 못 깨어날 수도 있어요, 수술은 80 이전까지 권하고 있습니다.”
“만약 암이 확실하다면 앞으로 얼마나 더 생존이 가능할까요?”
“앞으로 요양병원에 가시는 걸 전제로 3년 정도입니다. 전 담당의가 아니고 전공의라 자세한 건 주치의 선생님과 상담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얼굴에 천사라고 써진 수련의는 곤란한 표정을 짓더니 말을 아꼈다.
“그렇다면 더 이상 방법은 없는 걸까요?”
“현재 상태론 수혈 받는 방법 이외 없습니다. 그리고 현재 상태가 그리 나쁜 편은 아니니까 좀 더 두고 봐야겠습니다.”
어떡하든 살리는 방법을 모색하고 싶었다. 주변사람들은 고령이라 하늘에 처분에 맡길 수밖에 없다고 했고 설사 죽는다 해도 호상(好喪)이라고 악담까지 했다. 그때 난 속으로 생각했다. 그렇게 말하는 너도 죽을 때 호상(好喪)이겠다. 아무리 고령이어도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변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병실에 있으면서도 자식들 간의 모든 일을 참견했고 심지어 전기세 수도세 통신비까지 챙겼다. 병원비는 어떻게 했냐고 물으니까 입원한 지 한달이 지났는데도 내라는 소식이 없다고 했다, 이상하다. 앞서 입원했던 병원에서는 당장 돈부터 내라고 성화였는데.
문병 한번 안 오는 막내한테는 수시로 전화를 걸어 아가 잘 있냐, 아빠는 우리 막내딸을 제일 많이 좋아하고 예뻐한단다. 기분 좋게 너스레를 떨었다. 꼭 막내한테만 친절과 호감을 표하며 행복한 표정으로 말했다. 막내가 홍삼과 치료비에 보태라고 돈을 보내주자 병실에 있는 환자들과 간병인들에게 자랑을 하며 기뻐했다.
집에 있을 때는 화장실도 못 가더니 입원해서는 화장실은 폴대를 잡고서 출입했다. 그뿐 식사할 때 말고는 잠시도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이상했다. 분명 상태는 좋아진 것 같은데 더 이상 몸이 기력은 회복되지 않았다. 다시 간병인에게 맡기고 직장에 복귀한 지 이틀째 되는 날이었다.
갑자기 병원에서 호출이 왔다. 환자가 위급하니 빨리 내원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했더니 심정지 올 가능성이 많다고 했다. 심정지라니? 정신이 아득해지더니 현기증이 일었다. 직장에서 일하다 말고 급하게 전철역사로 달려갔다. 걸어가는데 걸음이 자꾸 뒤쳐지는 것 같았다.
거리는 수많은 발걸음이 세월을 앞질러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9호선 전철은 한참만에 도착했다. 중환자실 앞에 이르러 벨을 눌렀더니 나이가 20대로 보이는 의사가 나왔다.
“오전에 심정지가 와서 처치했고 아직 무의식 상태입니다. 혹시 연명치료 동의하신다면 도와 드리겠습니다.”
“연명치료 각서라니요? 그런 거 필요 없고 할 수 있는 조치 다 해주세요,”
“그렇다면 심페소생술도요?”
“네 무조건 할 수 있는 조치는 다 해주세요.”
중환자실에 들어서기 전 비닐로 된 가운과 장갑을 착용했다. 가까이 다가가니 몸속에 연결된 줄이 투석기에 고정돼 계속 돌아가고 있었다. 간밤에 신장의 기능이 완전히 사라지면서 심장과 폐에 물이 차는 증상이 발생했다고 했다. 물을 1리터씩 뽑아내고 있고 기도 삽관을 삽입해 호흡기능을 하고 있다고 했다.
입안으로 긴 삽관이 연결돼 있었다. 기도삽관이 움직이면 위험할 수 있어 수면제를 투여했으니 말을 시키지 말고 보라고만 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눈을 뜨고 가족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자녀를 바라보면서 할 말이 많아 보였다. 하지만 기도삽관이 막혀 있어 대화는 전혀 불가능했다. 그때 내 입에서 폭포수 같이 말이 터져 나왔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함이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 아버지 예수님 믿어야 천국에 가서 엄마도 만나니까 믿어, 안 믿으면 지옥 가. 예수 그리스도.”
누군가 내 팔을 확 낚어챘다.
“여기서 종교 행위 하시면 안 됩니다. 지금 환자에게 수면제 투여해서 잠들게 했는데 깨나서 움직이면 기도 삽관 빠져서 위험해집니다. 빨리 나가세요.”
“안돼요, 예수 그리스도 저 사람들도 예수님 안 믿으면 지옥 가요, 예수 천당 불신 지옥.”
준비된 대사도 없이 나는 마구 지껄였다. 체면도 위신도 없었다. 아버지는 분명 듣고 있었다. 나는 의료진들 의해 반강제적으로 끌려 나왔다. 나오면서 말했다. 여기에 이곳에 예수 믿는 분 안 계신가요? 그건 왜죠? 여기서 종교 행위는 금물입니다. 그리고 그런 분 없어요.
그날 밤 중환자실 문틈으로 계속 안을 살폈다. 투석기가 24시간 내내 돌아가고 있는 게 보였다. 신장 기능이 사라지면 심정지가 올 수 있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투석도 어느 정도 체력이 받쳐주어야 가능하다. 투석기가 돌아가는 동안 혈전이 발생하면 곧바로 심정지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튿날이었다. 담당의는 세미나에 가고 없고 임시 담당의가 나왔다. 상태에 대해 물었더니 호의적으로 대답했다.
“일단 위기는 벗어났고 안정기에 접어 들었습니다. 자력으로 호흡도 가능하고 일주일 내에 기도 삽관 빼고 투석도 이틀에 한번씩 하는 걸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상태를 봐서 순환기 내과나 신장내과로 병실을 옮겨야 하니까 준비해 주세요.”
나와 동생은 안심했다. 입에서 감사합니다 소리가 수십번도 더 나왔다. 기존에 있던 병실에서 소지품을 모두 꺼내 가방에 넣었다. 짐의 부피가 엄청났다. 옷은 정리해 세탁기에 돌렸고 기타 소지품도 모두 정리해 놓았다. 공중 목욕탕에 가서 긴장된 몸을 께끗하게 샤워하고 나왔다.
언젠가 꾼 꿈이 생각났다. 내 방 안에 아버지가 누워 있는데 누군가 내 마음속에 말했다. 아버지의 죽은 사체라고 했다. 그때 내 맘속에 또다른 음성이 들렸다. 어떡하지 아직 예수님도 못 전했는데 벌써 가버리면 안 되는데 큰일이네. 후회하면서 잠을 깨었다. 너무도 기분 나쁜 꿈이었다.
하지만 금세 잊었다. 어제 의사가 이제 위기는 넘겼고 안정기에 접어 들었으니 병실 옮길 준비하라고. 그렇지 이젠 혈뇨도 그쳤고 나머지 치료만 잘 받으면 퇴원도 가능하지 않을까. 최악의 경우 요양병원 가는 것도 생각해야지. 습관처럼 스마트폰을 여는데 갑자기 가슴 속에 단어가 떠올랐다.
아버지 이름 뒤에 사망이란 단어였다. 에잇 사탄아 물러가라. 생각을 떨치려는데 전화 벨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여기 병원인데요, 환자가 매우 위급해요 곧 심정지 올 거 같으니까 가족분들 빨리 내원해 주세요.”
아니 어제만 해도 위기 상황 넘겼다더니 이게 무슨 소리야?
정신없이 병원에 도착하니 심폐소생술을 하고 있었다. 의사 두명이 교대로 하는데 이미 투석기도 빼놓은 상태였다. 난 정신없이 외쳤다.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보혈. 그리고 사망선고가 공식적으로 떨어졌다. 다 끝났다. 의사가 기도삽관을 빼자 입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저희가 20분 동안 심장박동을 시도했는데 한번도 심장이 뛰지 않았습니다. 나머지 절차를 진행하려고 하니 가족들은 나가서 대기해 주십시오.”
“어제 담당의 말로는 위기는 벗어났고 안정기에 접어들었다고 했는데 왜 이런 결과가 나온 거죠?”
난 따지듯이 말했다.
“그건 그 의사가 잘못 알고 말한 거예요.”
기가 막혔다. 이젠 안심이다 생각하고 좋아했는데 이게 무슨 참담한 결과란 말인가. 전혀 마음의 준비도 없이 이런 결과를 맞아야 하다니. 모두가 한꺼번에 벌어진 일이었다. 갑자기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들었다. 이럴 줄 알았더면 미리 마음의 준비라도 시킬 것이지. 그동안 내가 받은 기도 응답은 다 어디로 가고 사망 선고라니.
곧이어 도착한 가족들은 중환자실에 들어가지도 못한 채 대기실에 앉아 망연자실 했다. 생과 사의 차이가 종이 한 장 차이라더니.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라더니 어쩌다 상황이 이 지경까지 왔을까. 어제 말한 의사를 만나 따지고 싶었다. 당신이 말하지 않았나. 이제 위험한 고비는 넘겼고 일주일 후에 병실 옮길 준비하라고.
따져 봐야 소용없는 일이었지만 누군가를 향한 원망과 분노가 끝도 없이 새어 나왔다. 생각할수록 급작스런 죽음이었다. 입원 당시만 해도 신장지수가 높게 나왔고 심장도 튼튼해 상태가 좋은 편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앞으로의 생존 기간이 3년이라고도 했다. 그런데 어떻게 입원한 지 한달만에 생명줄을 놓는단 말인가.
그렇다면 방사선 치료가 잘못된 것일까. 꼭 그렇다고 단정 지을 수도 없다. 방사선 치료 후 기적처럼 혈뇨가 멈추지 않았던가. 그런데 갑자기 신장 기능이 사라지다니, 이후에도 발열 증상과 호흡이상이 발생해 응급조치를 통해 호전된 상태라고 했다. 식사도 여느 때와 같이 잘하고 괜찮았는데. 워낙 긍정적으로 생각하다 보니 죽음에 대한 전조 증상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걸까.
아니 있었다 해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나이에 비해 항상 건강한 편이었고 응급상황이 발생할 때마다 기적처럼 회생하곤 했었으니까. 그렇다면 죽음은 예고 없이 찾아오는 것인가. 당사자에게도 전혀 예감이라는 조치도 없이. 아버지는 생에 대한 의지가 워낙 강했었다. 무엇보다 죽음을 무서워했다,
한밤중에 이상 증상이 발생하면 새벽 2시에도 구급차를 불러 응급실로 달려갔다. 나중에는 사설 구급차를 불러 밤이고 새벽이고 달려갔다. 수술을 거부하고 강제 퇴원조치를 당했을 때도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지 죽음을 위한 마지막 수순은 아니었다. 막내한테도 전화를 걸어 이제 혈뇨도 멈추었으니 퇴원할 일도 남았다며 좋아했다고 한다. 단 한번도 죽음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그런데 단 이틀만에 안정기에 접어 들었다는 의사의 말을 뒤집고 사망선고가 떨어진 것이다. 동생이 장례식장을 알아본 후 30분만에 아버지의 사체가 나타났다. 검은 천으로 온몸을 칭칭 감은 모습으로 침대에 눕힌 채로. 사체는 엠뷸런스에 실려 장례식장으로 옮겨졌다.
장례식 절차는 사망선고라는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복잡하고 억장이 무너지는 슬픔보다 더한 고통이 기다리고 있었다. 요즘은 사망자가 많아 화장장 예약하기도 너무 힘들어 보통 4일장 내지는 5일장으로 치른다고 했다. 동생이 들어둔 상조보험에 국가 유공자라는 신분으로 50퍼센트 할인이란 혜택을 받았음에도 장례 비용이 1300만원 넘게 나왔다.
장례식장에 퍼지는 향냄새도 가슴을 찌를 듯이 고통스러웠다. 일가 친척이 몰려와서 건네는 위로의 말도 비수가 되어 다가왔다. 때에 찌든 상복은 거추장스럽고 웬 절차는 그리도 많은지 생지옥 같았다. 태어나는 건 간단한데 비해 죽음의 과정은 너무나 복잡하고 고통 자체였다.
입관 과정에서는 통곡이 터져나왔고 악마가 총출동한 것처럼 슬픔과 고통이 가중됐다. 나이 어린 동생은 아버지의 얼굴을 만지며 아빠 어서 일어나 집에 가자며 통곡을 쏟아냈다. 고인의 마지막 모습이 끝나자 장례지도사는 사체의 얼굴에 몇겹이나 되는 천으로 감싸고 또 감쌌다.
수의 위에 또다른 천조각으로 감싼 뒤 뒤에 있는 시체 안치실 냉동실에 들어갔다. 칸칸이 된 시체 안치실은 감염병으로 죽은 시체는 다른 칸으로 들어갔다. 죽음은 잔혹하고 슬프고 또 장례 절차는 어느 한순간도 고통 아닌 것이 없었다. 입관 다음날 장지동 화장장에 도착했을 때는 또다른 생소한 고통이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 뼈를 태우는 듯한 매캐한 냄새가 건물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상당히 기분 나쁜 냄새였다. 사방 어디를 둘러보아도 죽음 아닌 것이 없었다. 식당에 가서 밥을 먹을 때도 죽음이란 단어가 목울대를 채웠다. 버스에서 사체를 꺼내 소각장으로 들어가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내 안에서 찬양이 들렸다.
주 십자가 못 박힘은 속죄함 아닌가
그 긍휼함과 큰 은혜 말할 수 없도다
십자가 십자가 내가 처음 볼 때에
나의 맘에 큰 고통 사라져
오늘 믿고서 내 눈 밝았네
참 내 기쁨 영원하도다.
순간 마음속으로 생전 경험해 보지 못한 평화가 밀려오면서 어떤 확신이 들었다. 아버지는 오늘 천국에 입성했구나.
1시간 40분 뒤 다시 소각장 앞으로 갔다. 모니터에 화장중이란 단어와 완료라는 단어가 연이어 보였다. 직원이 흰 뼛가루를 흰 종이에 잘 싸서 함에 넣은 뒤 내밀었다. 평생을 살아온 결과가 뼛가루 한줌이었다. 누구나 죽으면 한줌의 재로 남는다더니 너무나 허망한 순간이었다.
저렇게 끝나버릴 인생을 너무 아등바등 살았구나. 돈 한푼 더 만져보겠다고 안간힘을 쓰고 천년 만년 살것처럼 행동했구나. 황망하고 서러운 순간이었다. 그때 또 내 마음속으로 찬양이 들렸다. 방금 전에 들었던 찬양이었다.
십자가 십자가 내가 처음 볼 때에
나의 맘에 큰 고통 사라져
오늘 믿고서 내 눈 밝았네
참 내 기쁨 영원하도다.
천국에 무사히 입성했구나. 이제 곧 엄마를 만나 보겠구나. 영생복락이 무엇인지 체험하겠구나. 생각하는데 느닷없이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은 보혈로 샤워하는 중이란다. 그렇지 죄지은 상태로 그대로 천국에 입성할 순 없을 테니까. 난 나름대로 해석하며 속으로 웃었다.
교회에서 위로예배 차 다녀갔고 또다른 절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에는 장례절차 보다 더 복잡하고 어렵고 힘든 관문이었다. 유산 상속 절차였다. 평생 겪어보지 못한 낯선 법적 용어와 낯선 단어들이 극심한 혼란을 초래하고 있었다. 동생이 세무사 사무실과 법무사 감정평가사를 통해 일을 처리하는데 꼬박 열흘 이상 걸렸다.
은행에서 원터치 형식으로 처리하는 과정에서도 며칠이 소요됐다. 십년치 거래 내역을 다 조회해야 한다고 했다. 다행히 유산상속세는 물지 않았다. 재개발 된 아파트에 들어갈 때 재산 가치를 따져 계산하는데 무슨 말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무슨 말을 해도 귓등으로 들렸고 내가 죽을 때 나는 어떻게 할지 그것에 대해서만 온갖 시나리오가 다 써졌다.
잠시 보이다 사라지는 인생, 사람들은 천 년 만 년 살 것처럼 돈에 목숨 걸고 살아간다. 자신과 죽음은 별개인 것처럼 생각하면서. 내 지인 중에는 신실한 목회자 가문임에도 부친의 사망 이후 재산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일년 째 소송 중이라고 했다. 또 한 지인은 시아버지의 재산이 너무 많아 국세청에서 나왔는데 상속세만 수억원이 나왔다고 한다.
또다른 지인은 평상시 시부의 죽음을 노래처럼 불렀었다. 재산 가치를 따져 유산 상속분을 미리 계산해 카드빚을 끌어 쓰다 끝내 정지 사태가 왔는데 그 이후의 소식은 잘 모른다. 파산신청을 했는지 카톡도 전화번호도 결번이 되었기 때문이다. 시부한테 사망선고가 떨어지기 전부터 카드를 너무 빨리 끌어 썼기 때문인 것이다.
그 외에도 그녀는 지인들에게도 빚을 엄청 끌어 썼다고 한다. 그래서 카톡과 핸드폰을 결번처리한 건 아니었는지 난 가끔 상상한다. 장례식을 끝내고 집에 왔을 때였다. 습관처럼 아버지 방에 들어갔는데 이상한 점이 발견됐다. 아버지 방에 있던 벽시계가 고장 난 것이다.
수년째 잘 돌아가던 벽시계가 먹통이 되어 멈춰져 있었다. 방 주인의 죽음과 함께 시계도 수명을 다한 것이었다. 전에 지인들이 말했었다. 아버지의 사후를 대비해 유산상속에 대한 다짐을 미리 받아 놓으라고. 그럴 생각도 없었고 그래봤자 돌아올 건 욕이나 험담뿐이었으리라.
난 어릴 때부터 돈 고생으로 온갖 악담과 치욕스런 상황을 많이 겪었지만 돈 욕심은 없었다. 그저 의식주 해결하며 사느라 거기에다 병치레로 삶과 죽음의 경계선 속에 헤매는 날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돈이 조금 모일라치면 병원비로 뭉텅 뭉텅 들어가고 늘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사느라 여념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돈에 목숨 거는 사람들을 보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리고 돈 많은 부자도 전혀 부럽지 않았다, 저 사람들 저 많은 돈 두고 어찌 죽을까. 가져가지도 못할 텐데 아까워서 어쩌나. 노후대책 핑계로 쉴 틈 없이 일중독에 빠지는 사람들도 이해가 안 갔다. 미래 준비에 목숨 걸다 한순간에 현재가 사라지는 경우를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돈 한푼 더 벌겠다고 야근하고 일중독에 빠져 지내다 한순간에 새상을 등진 사람들, 그들 뒤에는 남은 유산 서로 많이 차지하겠다고 싸우는 유족들의 끝없는 논쟁이 있었다. 돈이 사람 목숨보다 더 귀중한 건 영화나 드라마 뉴스 시간에 너무 많이 보여 준 때문이 아닐까. 난 쓸데없는 핑계를 대본다.
나는 아버지의 사후 늘 내 곁에 와 있는 죽음을 느낀다. 난 나의 사후를 위해 하나씩 정리해 나가는 중이다. 언제 들이닥칠지 모를 죽음을 항시 대비하며 살아야 하기에. 며칠 전에는 여고 동창 어머니 장례식장에 다녀왔다. 친구는 왜 이버지의 부고장을 보내지 않았냐며 서운한 티를 냈지만 그녀 역시 장례식 치르느라 정신이 없었다.
천주교 성당에서 치러진 장례식은 개신교와 차이가 났다. 천주교는 장례식을 성당에서 치르는데 미사는 물론 조문객 식사대접도 성당 식당에서 했고 시체 안치실은 물론 시체 염도 봉사자들이 직접 손으로 했다. 참 편리하고 유족들한테도 많은 위로가 될 것으로 생각됐다.
친구들과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하면서 위로와 함께 허망함을 동시에 느꼈다. 천주교 신자인 친구는 영안실에 들어서자 두손을 앞으로 모으더니 큰 절을 두 번이나 했다. 일순 당황스러웠다.
“너는 절 안 하니?”
“우리 개신교는 장례식 할 때 절 안 해.”
“응 그렇구나.”
성당 앞을 나서는데 도봉산에 흰 구름이 천사 날개처럼 펼쳐져 있었다. 마치 고인을 마중하기 위해 인사 나온 것처럼. 친구 남편이 따라 나오면서 말했다.
“바쁘실 텐데 이 먼곳까지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저랑 소주 한잔 하시죠?”
“뭐야? 지금 뭐라고 했어?”
언제 나왔는지 친구가 남편의 옆구리를 찌르며 눈짓을 했다. 산 공기가 폐를 정화시킬 듯이 몰려왔다. 선선한 기분 좋은 초겨울 날씨였다. 교각 밑으로 맑은 개울물이 흘러가고 있었다. 하긴 바로 눈앞이 도봉산이었다.
“어차피 한번 살다 가는 인생 마음 고생 덜하고 후회없이 살다 가자.”
“그게 어디 마음 먹은 대로 되는 일이니?”
친구는 한숨을 폭 쉬며 말했다. 평생을 가족사랑으로 헌신한 친구는 몸과 마음이 병들었다며 하소연을 했다. 그런데 난 그 하소연이 부러웠다. 난 그렇게 살지 못했던 것 같다. 이젠 나도 좀 더 내 삶에 대해 심사숙고할 때가 온 건 아닐까. 그때 내 마음속에 무언가 캥기는 게 있었다. 그것이 무엇일까.
난 흘러가는 개울물을 바라보며 계속 생각에 잠겼다.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