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무용의 위대한 발전은 1801년 초빙된 프랑스인 선생 디드로 (Didelot)에서부터 시작하여 알렉세이 블라체(Alexis Blache) 까지 이어진 프랑스 발레 마스터들에게 힘입은 바 크다. 제정러시아 시대의 발레는 상업중심지인 모스크바보다 뻬쩨르부르그에서 훨씬 우세했는데, 이곳의 끼로프(마린스키) 발레단과 바가노바 발레학교는 현재까지 계속 유지되고 있다. 키로프 발레단은 라브롭스키나 현재 영국에서 후진을 양성하고 있는 그리고로비치와 같은 가장 영향력 있는 러시아 안무가들을 모스크바로 배출했으며, 모스크바가 러시아의 정치적 수도가 되었을 때 모스크바 발레단을 강화하기 위해 1930,40년대에 많은 무용수를 모스크바로 보냈다.
20 세기의 초반 10년 동안 러시아의 발레는 매우 위험한 형편에 있었다. 대부분의 대작들은 구식이 되어 버렸고, 1910년에 새로 창립된 러시아 발레단은 사실상 러시아에서는 한번도 공연하지 않았던 디아길레프의 발레 뤼스의 후신이었다. 발레 뤼스의 영향은 전적으로 서구에만 국한되었던 것이었다. 작품 '화조'의 발표를 기회로 디아길레프적인 발레가 새로이 시작되었다. 그의 발레는 안무, 작곡, 미술이 일체가 되었는데 발레에 음악을 제공한 스뜨라빈스끼는 포낀에 이어 니진스끼, 마신, 리파르, 발란친에게도 음악을 제공하였다.
파리에서 공연된 천일야화를 주제로 한 작품 '세라자데'도 림스끼 꼬르사꼬프 작곡과 포낀의 안무로 육감적인 춤이 문제시 되었으며, 니진스키의 죽음의 장면, 흑인이 백인 여인을 애무하는 장면은 빠리 사람들에게 매우 쇼킹한 것이었다. 그러나 육체의 해방을 뜻하는 획기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었다.
1911 년 베뜨르슈까의 공연은 러시아 발레단의 제일기의 정점을 뜻하는 작품으로 음악에는 스뜨라빈스끼, 안무에 포낀, 무용에 니진스끼, 깔사비나, 미술에 박스뜨 등 러시아 발레단의 총출연과 대규모의 작품으로 포낀의 능력를 과시하였다. 니진스키는 마치 자신의 미래상인 베뜨르슈까라는 비극적 존재를 잘 나타냈으며 그 기술적인 도약도 좋았다. 또 그 연기력을 새로운 방향으로 끌어갔으며 자유로운 군무의 움직임은 새로운 무대를 보임으로써 발레의 신선미를 충분히 발휘함에 손색이 없었다.
이러한 작품의 공연을 계기로 '무도회의 권유', '장미의 정' 등 고전주의와 완전히 손을 끊은 새로운 작품을 요구하기 시작하였다. 디아길레프는 이것을 민감하게 느끼고 고전주의를 탈피하려고 하였다. 그렇다고 무조건 던컨의 자유무용을 제창한 것은 아니며 발레의 테두리 안에서였다. 그리하여 1912년 러시아의 발레는 크게 전향하는데 성공하였다.
1913 년 포낀이 러시아 발레단을 떠나자, 니진스끼가 지휘를 맡게 되었는데 작품 '유희'와 '봄의 제전'으로부터 출발하였다. 작품 '유희'에서는 스포츠를 춤의 주제로 선택하여 그 동안의 전통을 깨뜨리고 작품의 근대성을 창시하기도 하여 20세기의 새로운 무용의 개혁을 예고하였다. 작품 '봄의 제전'은 스트라빈스끼의 심포니에 맞춘 대작으로서 종래의 무용미학에 결정적 도전장을 낸 셈이 되었다. 즉, 아름답고 우아하며 가볍고 경쾌한 발레의 특유한 미적 규범을 깨뜨리고 오히려 추악한 몸짓으로 표현되는 무용은 원시적인 생명의 탐색이라 하겠다.
이것은 분명 미래의 예술로서 니진스끼의 혁명적 무용관이 발레계 뿐만이 아니라, 무용계 전반으로 번져서 새로운 형태의 무용이 발전되기도 하였다. 모든 것의 근원이며 원점인 대지, 한없이 뻗어가는 힘과 풍요성과 번식력, 혼돈과 폭위의 화신인 대지, 무용을 통하여 인간의 육체가 그 대지위에 귀환하였음을 보여준다. 맑은 하늘, 정적의 세계, 경쾌한 미풍, 빛나는 공간, 이러한 천상의 이론 속에 살아 숨쉬는 인간육체의 움직임을 '봄의 제전'이라는 작품의 전개로서 더욱 돋보이게 하였다. 육체의 예술, 무용의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된 20세기 초에는 니진스끼가 활동하던 그 시기에서부터 새로운 발레와 모던 댄스로 나뉘어 발전하게 되는 시기였다.
러시아의 발레를 되살려야 한다는 강한 욕구는 러시아 사회의 모든 질서를 바꿔놓은 1917년 혁명 이후 생겨났다. 혁명이 일어나자 많은 지도급 무용수들이 이민을 떠났고 그들 가운데 몇몇은 빠리와 미국에서 아주 영향력있는 교사가 되었다. 뻬쩨르부르그와 모스크바의 발레단은 왕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으므로 그 미래는 매우 암담했다. 이 때에 문화부 장관이자 레닌의 충실한 부관이었던 루나차르스끼가 발레를 존속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20년대에 이르러 발레는 인민을 위한 예술로서 점차 수용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불가피하게 양식이나 본질에 있어 그 형태를 변화시켰다. 대부분의 19세기 고전 발레는 가끔 상당 부분이 재편집되긴 하였으나, 기실 그대로 보전되고 새로 등장한 프롤레타리아 관객들에게 관람되어 발레 중의 왕자나 요정 등의 역할은 다른 것으로 대체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무용의 양식에 있어서는 금세기 최고 스승 가운데 한 사람으로 한때 마린스끼 극장의 무용수였던 바가노바의 가르침을 통해 체계적인 발전이 이루어졌다. 그녀는 전통적인 제국 스타일을 변형하지 않은 채 스스로 개발한 독특한 교수법과 이미지로 레닌그라드 무용수들을 가르쳤고, 이를 곧 러시아 전역에 걸쳐 발레 교수법의 기본으로 정착시켰다. 대담하고 활기찬 이 교수법은 사실상 전통적인 제국 발레 양식으로 오늘날 러시아 발레의 약대 산맥을 이루고 있는 볼쇼이 발레단과 키로프 발레단을 세계적인 발레단으로 만들었으며 우리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앞의 두 발레단 못지않은 끄레믈 발레단, 끼예프 발레단,스따니슬랍스끼 등 많은 발레단과 세계적인 무용수를 배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