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자매여! 지난 시간에 그리스도인인 우리의 참 형제란 누구? 에 대하여
<<<나 말고 동일하게 성령태반으로 거듭나 자라는 것인, 나말고 "형제(자매) 안으로도 있는 '영원한 생명(그리스도의 씨인 믿음, 속사람)의 성장을 위한 사랑의 염려"'>>>가 형제 우애 로 함께 살폈습니다.
그럼 사랑으로 염려해야 할 덜자란 참 형제는 누구며, 현 세상에 우리와 똑같이 '주의 이름은 부르나 실은 가라지 무리인 종교로기독교'를 분별하여 가보겠습니다.
예슈아 그리스도께서 열두제자들 앞 자기곁에(막9장,눅9장)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파이디온παιδίων)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마가복음 9:36~37)로 말씀주십니다.
이 말씀에서 '이런 어린아이' 는 어떤 누구 말씀하시는가?
● 그보다 먼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의 하반절을 보면, 예슈아 주님께서는 자기를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의 뜻(영접함)이 자신과 하나요 같음을 먼저 나타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또한 예슈아 주님을 영접하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를 영접하는 것이고, 이 모든것 무엇보다 우리는 주와 하나되어 "주를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실현"하고 영광을 돌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본문제시 성경 말씀은 이와 같은 원리로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것이 예슈아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고, 예슈아 주님의 뜻을 실현하는 것이 됩니다.
당시 하나님 아버지와 예슈아 그리스도 주님의 뜻은 하나로 일치하여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는 대속사역' 이었습니다.(누가복음 9장 31절)
ㅡ 하나님 아버지와 장성한 아들 품안의 뜻 "믿음소망사랑이 십자가" ㅡ
예슈아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분명히 장성한 자(주와 선생)로서의 자신의 뜻을 말씀해주셨습니다.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더라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하더라.'(막9장31~32)
따라서 여기서의 가르침은 표면적으로 보여 칭하는 어린아이라는 것은 또한 진리의 말씀을 가르쳐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는 당시 제자들과 같은 영적 어린아이를 또한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중 파이디온(παιδίων,어린아이)은 표면적으로는 소년, 소녀를 의미하지만, 이면적으로는 성숙되지 못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의미가 있겠습니다.
예슈아 주님이 자신의 뜻을 누차 말했지만, 제자들이 도무지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하므로, 여기에서는 당시 제자들이 또한 영적(하나님의 뜻 헤아림에 대하여)으로는 어린아이가 됩니다.
제자들은 심지어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심각하게 말씀하셨는데도, 엉뚱한 생각들 “우리중 누가 크냐” 라는 말로 다투었습니다.
마가복음 9장 35절 '그들(제자들)이 잠잠하니 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그렇다면 오늘날에도 영적 어린아이는 하나님 나라의 일보다 세상일과 세상권위와 세상영광에 관심을 더 갖는 자들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슈아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지만, 부활하신 예슈아 주님의 큰 권능을 이용해서 세상에서 권세를 얻고 누리겠다는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종교성이 이끄는 믿음 마음을 가진 자'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국가기관에 종교단체등록을 마친 교단교회에 속한 모든 자가 스스로 여타종교중 하나임을 시인한 기복신앙이요. 여기에 속한자 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늘이 아닌 땅에 공력,재물을 쌓으므로 국가권력의 보호와 지원 혜택을 필요로 함)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내 이름으로는 내 이름 안에서 라는 의미입니다.
예슈아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은 ''십자가에서 예슈아와 함께 내 과거사람은 못박혀 죽고, 이 후로는 그리스도 안으로 내 생명이 감추어 있되, 내 혼이 아직 육체가운데 있으나 우선 부활하신 주께서 다시살려 일으켜 주신 영이 심령안에 살아 부활하여, 내 혼까지 이끌에 새롭게 하여 동행하는 자''라 함입니다.
그리고 영적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것은 곧 예슈아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하는 것인데, 영적 어린아이 같은 자에게 '예슈아 주님과 함께 죽는 '주님의 십자가와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주와 함께하여 다니는 자가 주의 날에 얻게되는 부활의 의미를 받아 들이도록 잘 가르쳐' 알게 하라는 것이겠습니다.
이것이 복음이 참으로 바라는 바요, 목표요, 길이 되겠습니다.
마가복음 9장 42절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소자, 아이같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여기 작은 자는 영적 어린 아이를 의미하는 것으로, 교회 지도자들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의미를 정확히 가르쳐 주어야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임에도,
인본주의 율법주의로 잘못된 것을 그들에게 심어주므로 하나님의 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게 하는 거짓선지자, 종교중 하나 다만 월등하게 복주는 힘있는 신으로 여기게하며 가르치는 지도자들에 대한 경고가 되는 말씀입니다.
성도가 십자가에서 예슈아 주님과 함께 자기의 옛사람과 그 정욕들이 못박혀 죽는 것은 곧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슈아께서 바로 자신의 죄 때문임을 깨닫고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이었음을 고백하고 그 죽음을 내 일로 받아들이고 또한 거듭난 나 또다른 어린양으로 제십자가인 산제사로의 일상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입니다.
성도가 십자가에서 예수와 함께 죽고 하나님 앞으로 살아가는 것의 걸음인 회개를 표현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인 본향을 찾는 신앙행위 침례'를 합니다.
물침례는 육신의 죄에 대한 죽음과 본향으로 돌이킴이고, 성령의 침례 불세례는 세상 육신을 좇아살던 옛혼에 대한 죽음과 하나님의 성령으로 혼까지도 새롭게 되어 영(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사는 삶 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예슈아와 함께 죽은 자를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시켜 주시는 방법이 하나님의 비밀인 경건입니다.
이 방법이 사랑의 성령의 법 인치심과 견인의 실체 경건의 과정이요 또한 성령세례의 궁극적인 목표인 것이겠습니다.
우리 주의 십자가의 죽음은 먼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의 죽음과 주와의 연합이며, 부활도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 바로 현재 내 안에서 영의 부활이 일어나 혼을 새롭게 하여 장성하는 과정인 것입니다.
현재적 내면에서의 죽음과 부활을 믿고 삶으로 체휼하지 않는다면 영적 어린아이와 같은 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아는 성도라면, 교회의 형제들을 영접하여, 예슈아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것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곧 예슈아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18장 7절에서는'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이들은 거짓 선지자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성경의 의미를 정확히 깨닫지도 못하고, 정확하게 전달하지도 못하는 자들이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성경 말씀을 왜곡해서 엉뚱한 방향으로 성경 여기저기 몇몇구절을 편집하여 교인들로 믿게하고 다그쳐 자신들의 사심을 채웁니다. 누가복음 9장 37절의 어린아이는 영적으로 어린아이인데, 나이가 적은 어린아이로 말하므로, 부모가 능력이 없는 어린아이를 잘 양육해야 한다거나,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것이 곧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므로, 자기를 낮추는 삶을 살아야 한다던지, 어린아이는 부모에게 순종하므로, 성도 역시 하나님 말씀에 잘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거나 하는 말로 연결시킨다. 그들은 성경 말씀의 핵심을 말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마가복음 9장 47절에서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게헨나)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눈은 세상을 바라보는 눈과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눈이 있다,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눈이 세상을 바라보게 되면 실족할 수 있으며, 그로 인해서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도 실족하게 된다. 그래서 실족하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게헨나는 쓰레기장에서 쓰레기를 태우는 불(심판)을 상징한다. 심지어는 마가복음 9장48-49절『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예레미야 7장 31-32절에서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 도벳 사당을 건축하고 그들의 자녀들을 불에 살랐나니 내가 명령하지 아니하였고 내 마음에 생각하지도 아니한 일이니라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날이 이르면 이 곳을 도벳이라 하거나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라 말하지 아니하고 죽임의 골짜기라 말하리니 이는 도벳에 자리가 없을 만큼 매장했기 때문이니라』
힌놈의 골짜기에서 게헨나가 나타났다. 힌놈의 골짜기는 예루살렘 밖 남동쪽의 쓰레기 장이었다. 동물의 사체를 태우는 것이다. 사체에서 구더기가 나온다. 그런데, 힌놈의 골짜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몰렉에게 자녀를 태워 제사를 한 것이다. 이는 당시 성전의 타락을 의미한다. 오늘날을 비유하자면 교회의 타락을 의미한다. 인본주의 율법주의가 만연한 교회가 그렇다는 것이다. 교회 사람들이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날마다 하나님의 아들을 죽여서 피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예수님이 율법에서 자유를 주고자 하지만, 신도들은 이를 믿지 못하는 것이다.
게헨나는 쓰레기를 태우는 의미가 있지만, 혀(비진리)의 불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태우거나, 심지어 신도들에게 세상의 복을 빌어주기 위해, 과거 이스라엘이 몰렉제사를 한 것 같이, 하나님의 아들도 계속 제물이 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신도 자신에게 떨어진 불은 연단이 되지만, 타인을 비진리의 불로 태울 때는 그야말로 지옥불이 된다. 그래서 그들은 지옥불에 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