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跋)
나의 선조 담암선생의 높은 절의와 떳떳한 행실은
남추강(枏秋江)의 사우록(師友錄) 및
신쌍괴헌(辛雙槐軒)의 만어(輓語)에 나타나있다
이 문헌이 후세에 전해내져 사람들의 이목에 비취고 있으니
이는 족히 선생의 평일을 개괄한 것이다.
다만 문고가 교동(喬桐) 초기에 불태워 졌고, 남쪽으로 내려오던 날
들에 자취를 감추고 더는 저술에 일삼지 않았으므로,
지금 세상에 한두 줄도증빙할만한 것이 없다.
후세 자손들의 탄식 할 바가 될 뿐만 아니라 또 역시
사문(斯文)의 불행이 된다.
그러나 눌은장(吶隱丈)이 빗돌 후면에 새긴 글을 저술하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나누어 실었고, 대산공(大山公)의 비각기(碑閣記)에
그 숨겨진 덕을 자세히 드러냈을 뿐만 아니라,
권릉서(權陵署)의 발어(跋語)와 이상상(李像庠)의 비음발(碑陰跋),
권지헌(淃持憲)의 명후서(銘後敍)에 하나하나 들어서 찬양하였고
또 그 전말을 다하였다.
여러 군자가 높이 사모하고 칭찬해서 서술하기 수백 년 뒤에 하였으니,
길이 스러짐이 없는 도모가, 어찌 불행 가운데의 행이라 아니할 수 있겠는가.
그 문자가 각 권질(卷帙)에 산재해 있어 상고하기에 불편하고
또 앞날 없어질 근심을 생각하여,
이에 종중의 여러 노장과 선배의 문집 가운데에서
찬양 내용과 유허비,
창화(唱和)한 시를 수집하여 차례로 정하고 편성해서,
한 부(部)를 만들고 또 세계(世系)를 책머리에 붙이되
정문헌공집(鄭文獻公集)의 예처럼 하여,
뒤에 보는 자로 하여금 상고하고 증빙하여 믿도록 하였다.
후세 자손 가운데 다행히 박학 한자 있어,
다시 널리 구하여 얻는 데로 따라서 기록하고,
유실된 것을 보충하도록 꾀하면
이는 나의 대인(大人)의 전하는 뜻이다. 그런데 일에 어긋남이 많아
그 일을 미치지 못하고
갑자기 어버이 상을 당하는 쓰라림에 얽혔으니
멀리 옛날을 생각하면 눈물이 흐른다.
아! 편차(編次)의 중한 일을 어리석고 앎이 없는 소자(小子)와 같은
자가 가벼이 손댈 일이 아니다.
시일을 천연하며 어물어물 성치시키지 못해
일을 끝내지 못한다면, 여러 군자가 선조의 덕을 찬양한 문자가 도리어
상자 가운데의 페기물이 되는 경우,
선대인께서 마음을 다해 추원하는 정성이 어찌 되겠는가.
이에 감히 외람됨을 피하지 않고 편집하였으니
어찌 감히 찬술(纂述)이라 하겠는가.
이는 대체로 선인의 뜻을 저버리지 않겠다는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이다.
임인 5월 일 10세손 홍식(弘式)은 삼가 쓰다.
소자(小子)신해년 겨울에
청원재(靑城院齋)에서 후산(后山) 이선생(李先生)을 모시고
이야기 할 때
선생이 선조의 일을 말씀하시며 인하여 그 기록을 보기를 구하였다.
소자가 가져다 올리면
‘선조께서 남쪽으로 오실 때 서적을 모두 불에 넣어,
한 말씀, 한 글자도,
세상에 전하는 것이 없었다. 오직 이 절행(節行)이 지금 전해 오는 것은
다만, 여러 선배의 기록에 나오는 것을 모아 권질을 이룬 것이다.
이와 같이 매몰스러운 것은 실은 후세 자손의 한입니다.
’ 하니 선생이 탄식하기를
‘무오사화에 한때의 명현 들이 모두 희생 되었다.
그 가운데 초연히 홀로 벗어난 이는 선생 한 사람이다.
조짐에 앞선 지혜와 몸을 보호한 슬기는,
한 사람에게 한 등 높을 뿐만 아니라,
구슬과 같은 말씀이 전해지는 것이 있다면,
세상의 도의를 돕고 후학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 아마도 찬연히 볼만한 것이 있었을 것이다,
문고를 불태운 한 가지 일에 있어서는 비록 망령되이 논의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군자가 명예를 귀히 여기지 않음은 실속이 없기 때 문이다.
만약 그 명예가 실속이 있다면 절로 알려져서, 아마도 가리고 없기를
밝은 불을 꺼버리듯이 한다면, 혹시 과중한 일에 가까운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숨기어 감추고 겸양 하는 것도 군자의 진실한 덕이다.
소부와 허유의 문제는 없으나 만고 높은 명성에 해가 되지 않았고,
백이와 숙제의 글은 없으나 백세에 맑은 절개에 손이 되는 일이 없다.
더구나 지금 선생이 향약을 설치하고 강학한 사실에,
추강(秋江)의 믿음이 가는 붓이 아직도 남아 있다,
조짐에 앞선 높은 자취가 국담(菊潭)의 유허(遺墟)에 완연하니
저 시문(詩文)의 유무가,
선생 실질의 덕과 높은 명성에 무슨 손익이 되겠는가,‘ 하였다
이어서 구사당(九思堂)이 쓴
창화시소서(唱和詩小序)를 높은 소리로 3 번을 내리
읽고 탄식하기를 ‘가만히 비각운(碑閣韻) 한 수(首)를 차(次)하여
그 사이에 이름을 붙이려 하였으나
갑자기 구성이 어려워 후일을 기다려야겠다.‘ 고 하였다.
소자는 이때 아직도 어리석어 감히 한 말씀을 ,이 기록의 머리에
넣을 것을 청하지 못하였는데 갑작스럽게도 선생이 세상을 떠났다.
지금 생각하니 비록 미처 그러지 못한 것이 한이었으나,
당일 몸소 받든 지극한 가르침과 논설은 끝내 마음에 잊혀지지 않아
지금 실기(實記)를 수정하는 날 책 끄트머리에 써서 감개한 뜻을 표한다.
경신 봄에 10세손 홍규(弘奎)는 삼가 쓰다.
아, 나의 선조 담암선생은 점필재옹의 고족제자(高足弟子)로서
태학에 향약을 설치함은 대체로 옛 도리를 밝히려는 것이다.
무오사화가 일어 날것을 미리알고 조짐을 보아
남쪽으로 내려가 은거하였고 ,
운명에 임하여 책상위의 글을 불살라
문헌에 증빙할만한 것이 없음을 면하기 어렵다.
사적이 인멸되어 드러나지 않음이 실은 후생의 책임이며 더구나
은둔 때의 초고(草稿)와 용산(龍山)의 용계서원(龍溪書院) 철향(掇享)은
지금 사림(士林)의 한이 되고 있다.
지난 숭정(崇禎) 무인에 유허비를 세울 때, 눌은, 대산 두 선생의
명((銘)과 기(記)가 있어 족히 당일의 원거(援據)가 되고
또 일시의 여러 대가(大家)가
권하는 시(詩)를 창화(唱和)하여 높이 사모하는 마음을 폈다.
이는 나의 선조 삼사와부군(三思窩府君)이 앞장서 주장하였고,
앞뒤 방선조(傍先祖) 제공(諸公)이 이어서 편집해서
세상에 전하려 했으나,
사적은 간략하고 힘은 허약하여, 몇 해가 지나도록 겨를이 없었다.
임인년 가을에 국재(菊齋)의 준석(餕席)95)으로 인하여
4파가 모두 모이게 되었고 논의가 크게 일면서
, 각 가정에 있는 글을 널리 구하여
조목별로 더 집어넣고, 앞사람들이 기술한 서(序)와 발(跋),
그리고 갈(碣)과 명(銘)을 다시
당시의 문필(文筆)에게 구하여 인쇄에 붙였다.
아, 선생의 높은 명성과 떳떳한 절의가 혹 이로 인해 만에 하나라도
영향을 얻을 수 있을지를 상상해 보았다.
그러므로 주제넘음을 헤아리지 않고
감히 그 전말을 얽어 세상의 읽은 자에게 고한다.
95)국재의 준석 :제를 올리고 참석자들이 음식을 나누는 자리.
단기(檀紀) 4296년 계묘 여름에 후손 영중(榮中)은 삼가 쓰다.
아, 나의 선조 담암 선생은 세상을 경영하고 인륜을 밝힐 학문으로서
황야에서도 고민을 하지 않는 뜻을 지니고도
시운(時運)의 성쇠와 크게 연관이 있다.
향약계첩 및 남추강 선생의 사우록을 상고하면 자세하다.
뒤의 현자가 높이고 사모함이 오래일수록 시들지 않고
서술하여 드러내고 밝히고 제를 올려 숭모한다.
후손 삼사와 휘 광현(光鉉)은 유허비를 세웠고,
섬계 휘 인탁(寅鐸)은 또 위하여 창화(唱和)해서 노래하니
찬연히 한 부의 순후한
덕을 기록한 사서(史書)를 이루어 상자에 소장한지 여려해 되었다.
지금에 와서 종중의 부로(父老)가 발의해 인쇄해서
재경(在敬), 황수(璜洙), 헌수(憲洙), 명수(命洙), 용섭(容燮) 등 제씨가
그 일을 간검하였고, 영중(榮中)씨가 그 전말을 알았다.
역을 마치자 아득히 먼 손자인 내가 실마리가 머리 떨어져
고향을 생각하는 슬픔에 삼가 절을 하고 이에
글을 써서 책의 끝에 붙이니 외람됨이 두렵다.
17세손 덕중(德中)이 단정 엄숙히 삼가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