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림사
서울특별시 종로구 홍지동 80에 위치한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본사인 조계사(曹溪寺)의 말사입니다.
법당 뒤의 암벽에는 깊은 굴이 있는데, 이성계(李成桂)가 등극하기 전에 이 굴 속에서 수도하고 뜻을 이루었으므로, 1396년(태조 5)에 혜철(惠哲)스님에게 명하여 절을 짓게 하고 달마(達磨)가 9년 동안 면벽좌선(面壁坐禪)한 숭산(崇山) 소림사의 이름을 따서 소림굴(少林窟)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뒤 기도 및 수행처로서 전승되어오다가 1817년(순조 17)에 관해(觀海)가 중건하고 소림사라 하였으며, 1913년에 두삼(斗三)스님이 큰방을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조선 초기에는 교종(敎宗)에 속하였으나 근대에 불교정화운동이 일면서 선종사찰로 바꾸었으며, 현재는 비구니들의 수도처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과 삼성각(三聖閣)·종루(鐘樓)·요사채 등이 있으며, 대지가 협소한 관계로 가람의 배치가 일렬로 되어 있습니다.
진관사
진관사(津寬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직할사찰로, 동쪽의 불암사, 남쪽의 삼막사, 북쪽의 승가사와 함께 서쪽의 진관사로 예로부터 서울 근교의 4대 명찰(名刹)로 손꼽힌 이름난 사찰이며, 거란의 침입을 막아내고 국력을 수호한 고려 제8대 현종(顯宗)이 1011년(顯宗 2년)에 진관대사(津寬大師)를 위해 창건했으며, 6.25 당시 폭격으로 폐허가 되었다가 복구된 고찰로 전해집니다. 또한 '신라시대 고찰'이란 설과 조선 후기 승려 성능(聖能)이 찬술한 「북한지(北漢誌)」에서는 원효대사가 진관대사와 더불어 삼천사와 함께 세웠다는 설도 전해집니다
조선시대의진관사와 수륙사
고려시대 이래로 역대 왕들의 왕래가 빈번했던 진관사는 조선시대에 수도를 서울로 옮기면서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수륙재(水陸齋)의 근본도량으로서 명성을 떨치게 되는데, 권근(權近)이 지은『수륙사조성기(水陸社造成記)』에 그 전모가 전해집니다.
1397년(太祖 6) 정월에 태조는 내신 이득분(李得芬)과 조선(祖禪)스님에게 조상의 명복을 빌고 나라일로 죽어 제사조차 받지 못하는 굶주린 영혼을 위해 수륙사(水陸社)를 설치할 것을 명하게 됩니다. 이에 이득분과 상충달(尙忠達), 지상(志祥)스님은 북한산과 도봉산을 답사한 결과 수륙재를 열기에 가장 적합 곳으로 진관사를 선정하게 됩니다.
근,현대의진관사
근대에는 1908년에 송암(松庵)선사가 경내에 오층석탑을 조성하였으며, 1910년에는 경운(慶雲)선사에 의해 대대적인 중창불사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는 대웅전 삼존상을 개금하고, 아울러 명부전의 지장보살상과 시왕상, 시왕탱화 등을 개금ㆍ보수하였습니다. 또한 독성전과 칠성각을 신축하고, 자신이 소유했던 토지를 사찰에 무상으로 돌려 '백련결사염불회' 의 자원으로 쓰게 함으로써 근대 진관사 중창주로서 족적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근대기의 열성적인 노력으로 일신한 진관사는 1950년 한국전쟁 때 나한전 등 3동만을 남기고 모두 소실되었습니다.
이에 폐허만 있던 진관사는 1963년 비구니 최진관(崔眞觀)스님이 발원하여 건물을 차례로 재건하여 오늘에 이르게 됩니다.
진관(眞觀) 스님은 1965년에 현재의 대웅전(大雄殿)을 신축하고, 1966년에 삼존불(三尊佛) 을 조성하였으며, 1967년에 후불탱(後佛幀) 및 신중탱(神衆幀) 을 조성하여 진관사 주법당(主法堂)을 여법(如法)하게 일신하였습니다. 또 1968년에는 명부전(冥府殿)을 비롯하여 1969년에 지장보살과 시왕상을 조성하였으며, 1970년에는 일주문과 동별당을 신축하고, 1972년에 나가원(那迦院) 을 신축, 1974년에 범종(梵鐘) 조성, 1975년 동정각(動靜閣) 신축 등 진관스님의 불사로 옛 가람(伽藍)의 자취를 찾는 여법한 가람(伽藍)이 복원되었습니다.
또한 진관스님은 부처님의 자비사상과 중생구제의 원력을 사회복지와 포교 활동을 통하여 실현하고자 1996년에 진관사 부설 포교당인 보현정사와 코끼리유치원을 신축하였으며, 2007년 9월에 사회복지법인 진관무위원을 설립하여 지역사회 복지증진을 위한 또 다른 장을 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