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회 임원회의 개최
우즈베키스탄 한인회는 4일 임원회의를 갖고 정기이사회 상정 안건을 심의했다.
이흑연 한인회장은 체육대회를 비롯한 기타 안건 등을 협의하고 임원들에게 이사회의 준비 등에 만전을 기해달라고 당부했다.
한편 한인회는 오는 6일 정기이사회의를 갖고 상정된 각종 의안 등을 심의할 예정이며 ‘발로 뛰는 영사상’ 전달식도 거행할 방침이다.
(취재 = 한인일보 편집국)
일산백병원, 우즈베키스탄과 MOU
일산백병원(원장 서진수)이 4일간 우즈베키스탄(이하 우즈벡)을 방문해 6건의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서진수 원장은 2월 25일부터 28일까지 우즈벡의 수도 타슈켄트를 방문해 우즈벡 보건복지부 국제담당부서와 해외 의료관광 환자 유치 활성화를 위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하고 국립병원(비뇨기과병원·정형외과병원·응급병원·외과병원) 4곳과도 양해각서를 체결했다고 밝혔다.
이번 협약을 통해 양 기관은 △중증환자 치료를 위한 교류 활성화 △의료 컨퍼런스 및 포럼 참가 △상호 의료인 연수 및 기관 투어 △환자 관리체계 등 의료서비스 개발을 돕기로 했다.
특히 한국 의료기관으로는 최초로 우주벡의 사마르칸트 의대와도 협약을 맺어 의료진 교류 및 학술분야 협력, 환자교류 등을 명시한 협약을 체결해 이 지역의 환자유치를 위한 교두보를 마련했다.
일산백병원 방문단은 별도로 간담회를 개최해 우즈벡 보건복지부장관과 관계자들이 함께한 자리에서 일산백병원의 최첨단 의료장비 및 진료 구축 현황을 소개하고 상호 우호 협력 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실직적인 업무기반 구성을 다졌다.
서진수 원장은 “우즈벡 많은 관계자들이 일산백병원의 우수한 의료시설과 수준에 많은 관심을 보이며 무엇보다 본원에서 치료받고자 하는 우즈벡 환자들의 수요가 급증할 것으로 기대된다”며 “앞으로도 지속적인 해외 의료진과의 교류를 통해 일산백병원의 선진의료수준을 알리고 우즈벡 국민들의 건강증진과 나아가 해외 의료관광 환자 유치 활성화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노력 하겠다”고 밝혔다.
한편, 일산백병원은 현재 우즈벡 대통령 비서실장 어머니의 무릎수술을 치료하고 있으며, 지난 1월에는 우즈벡 보건부 고위급 인사의 디스크 수술을 성공적으로 진행해 이번 협약체결의 계기를 마련했다.
(출처 = CNB뉴스)
코밀 케리모프 교수 등 전문가 10여명 인하대 IT 단기 교원 프로그램 수료
“한국에서 목격한 IT 발전상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모든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들여다 보고 있는 장면은 신기할 따름이었다. 심지어 옆자리에 앉아 있는 친구끼리도 스마트폰을 통해 대화하는 것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최근 인하대학교에서 실시된 IT 단기 교원 양성 프로그램 수료식에서 코밀 케리모프(Komil Kerimov·30)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정보기술대학(TUIT : Tashkent University of Information Technologies) 교수는 이같이 소감을 밝혔다.
프로그램에 참석한 10명 모두가 30대 IT 전문가들이다.
케리모프 교수는 “웹 디자인, 프로그래밍, 모바일 분야 개발 업무 등을 하다 4~5년 전 정부의 적극적인 IT 인력 양성 계획에 따라 대학에서 근무를 시작했다”고 밝혔다.
그는 “모두가 우즈벡에선 나름 IT 분야에서 최고라고 자부했는데 막상 한국에 와서 수업을 들어보니 절로 고개가 숙여지더라”라며 “인하대에서 제공한 맞춤형 프로그램은 매우 체계적이었고 선진적이었다.
무엇보다도 우즈벡 학생들을 어떻게 가르쳐야 될지에 대한 교수법을 전수받은 것이 가장 큰 소득이었다”고 말했다.
우즈벡 교원들의 적응을 위해 인하대 교수들도 소매를 걷어 붙였다.
교수교류회를 결성, 정기적인 모임을 가졌고 매주 화요일 축구 시합 등을 하며 친목 도모의 장을 마련했다.
또한 연구실 투어와 다양한 기업체 견학 등을 통해 우즈벡 교원들이 선진 학문에 눈을 뜰 수 있도록 힘을 쏟았다.
한국에서 짧은 기간 체류하는 동안 가장 힘들었던 점이 무엇이었냐는 질문에 ‘음식’이라고 답한 케리모프 교수는 “처음에는 음식문화가 너무 달라 적응하는데 꽤 힘들었지만 2개월 동안 많이 익숙해졌다. 우즈벡에 돌아가면 한국음식이 그리울 것”이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우즈벡 IT 교원연수 프로그램은 지난 1월3일부터 2개월간 우즈벡 타슈켄트 정보기술대학(Tashkent University of Information and Technology) 교원들을 대상으로 운영됐으며, 소프트웨어 공학, 데이터베이스 관리시스템, 소프트웨어 개발방법론, 운영시스템, 컴퓨터 보안, 모바일 컴퓨팅 등 IT 관련 다양한 분야의 학문전수와 교수·학습법 등을 내용으로 강의가 진행됐다.
(출처 = 인천일보)
연개소문이 사마르칸트에
사신을 보낸 이유
‘연(淵)은 성이고, 개소문은 이름이다. 외모가 뛰어나고 아름다우며, 기운이 호방해서 작은 일에 대범했다.’ ‘잔인무도하고, 몸에는 크고 작은 칼 다섯 자루를 차고 다녔다.’
이상은 삼국사기의 기록이다.
연개소문은 왜와 가까웠던 백제와 공동 군사 작전을 펼치지만 강력한 동맹관계는 맺지 못했다.
하지만 전쟁 도중에 왜국에 사신을 자주 파견하여 고립을 타개하려 했다. 또 돌궐에도 사신을 보냈고, 멀리 중앙아시아의 강국(康國·현재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에도 사신을 파견했다. 이때 당시 당이라는 거대 제국에 맞서기 위해 활발한 외교활동을 전개한 것이다.
사마르칸트에 보낸 고구려 사신은 아프라시압 궁전 벽화(Afrasiab Painting)에 나타나 있다.
그렇다면 그때의 정세는 어땠을까.
당 태종 이세민은 고구려를 치면서 몇 가지 명분을 내세웠다. 그 가운데 하나는 연개소문이 임금을 시해하고 백성들을 학대하며, 당의 명을 듣지 않아서 토벌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연개소문을 악의적으로 평가하고 전쟁을 도발하는 명분으로 삼은 것 자체가 연개소문이 뛰어나고 두려운 상대라는 반증이 아닐까?
그렇다면 연개소문은 어떤 인물이고, 그가 추진한 정책은 고구려와 우리 민족사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연개소문은 스스로 물에서 탄생했다고 말해서 사람들을 현혹시켰다고 한다. 동부(서부?)대인인 아버지가 죽자 귀족들은 그가 대대로 내려온 직위를 계승하는 것을 한사코 반대했다. 그의 잔혹한 성품을 이유로 내세웠다.
결국 연개소문은 정변을 일으켜 대막리지(행정과 군사를 장악한 최고의 권력자)가 되어 무려 23년 동안 고구려의 모든 권력을 장악한다.
그를 역사적 인물로 등장시킨 계기는 당나라와의 전쟁이었다. 당시 동아시아의 역학 관계로 보아 (패권을 놓고) 고구려와 당이 갈등을 빚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당은 수나라의 큰 패배를 설욕하려 했고, 한반도를 완전히 정복하려 했다. 하지만 건국 초기에는 민란과 권력 쟁탈전 등으로 내부가 혼란스러웠고, 국제적으로도 주변국들의 침입 등으로 불안정했다.
따라서 본격적인 전쟁 준비에는 시간이 걸렸다.
현실적으로 당나라에 비해 국력이 열세였던 고구려는 국가의 존엄을 지키면서 기존의 세력을 유지하려면 당나라 건국 초기에 주변국들과 우호관계를 만들면서, 전쟁 준비를 서둘러야 했다. 하지만 영류왕과 대부분 귀족들은 당과 유화정책을 취하고 있었다. 결국 온건파와 강경파로 나눠졌다. 영류왕은 612년 평양성 방어전에서 대승을 거둔 인물이었지만 당의 공격에 수비전과 지구전을 택했다.
이에 연개소문은 반발했다. 그는 공격전을 선호한 강경파였다.
연개소문이 당에 선제공격할 것을 주장하자 영류왕은 그를 천리장성 감독관으로 쫓아낸다.
하지만 연개소문은 이를 받아들이는 대신 반란을 택했다. 그는 영류왕을 추종하던 온건파 대신들 100여 명을 죽이고, 영류왕까지 죽인 후에 스스로 대막리지로 등극하며 정치권과 군권을 장악하게 된다.
이제 연개소문과 당 태종의 정면 대결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 되었다.
645년 5월, 당나라의 대공격이 육지와 바다에서 시작됐다. 요하(서만주의 요동과 요서를 나누는 강·고구려의 서쪽 경계) 전선이 무너지고 성들은 함락당했다. 안시성 전투가 벌어지자 연개소문은 즉시 압록강 방어를 맡은 15만 명의 고구려군과 말갈군으로 구성된 혼성군을 파견한다.
이 혼성군은 대패하지만 성주(城主)인 양만춘은 고군분투해 안시성 방어에 성공한다.
연개소문 군대는 퇴각하는 당 태종 군대를 계속 추격하여 당 태종을 여러 차례 위기에 몰아넣었다.
단재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연개소문이 이끄는 고구려군이 북경 근처까지 진격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면서 북경 주변에 ‘고려성’이라는 이름의 성이 있고 ‘고려’가 들어가는 지명이 여러 군데 있다는 것을 근거로 제시했다. 어떻든 당 태종은 연개소문과의 첫 대결에서 대패한 이후 647, 648년 계속해서 요동반도 해안과 압록강을 공격하지만 끝내 실패하고 죽었다.
이런 국제 정세 속에서 당시 국내 정세는 어땠을까.
642년 신라의 김춘추가 연개소문을 찾아온다.
백제를 공격하고 고구려에 우호를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연개소문은 빼앗긴 한강 유역의 영토를 요구했고, 김춘추가 이를 거절하자 그를 옥에 가두고 만다.
우여곡절 끝에 탈출한 김춘추는 훗날 당과 동맹을 맺어 고구려를 공격하게 된다.
당나라는 산발적으로 고구려 국경을 넘보기도 했지만 연개소문이 살아있는 한 고구려 정벌을 성공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연개소문이 665년(?)에 죽으면서 고구려의 운명도 내리막길을 걷는다.
연개소문의 죽음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없다.
역사가들은 고구려 멸망 원인을 연개소문 사후의 내분 탓으로 돌리고 있다.
20여 년에 걸친 전쟁으로 민심이 떠났으며, 자식들이 권력 쟁탈전에 몰입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기록에 의하면 큰아들인 연남생은 동생들의 배신으로 당나라로 도피했다가 도리어 고구려를 공격했다.
동생인 연정토는 많은 군사와 백성들을 데리고 신라로 망명하였다.
절대 권력자 아들들의 권력 투쟁은 국가의 멸망으로 이어졌다.
연개소문의 타계 3년 후인 668년 9월에 평양성은 함락되고 고구려는 700년의 장구한 역사를 마감한다.
(출처 = 동아일보)
크림반도의 운명
러시아는 긴 국경선을 가졌다. 아시아부터 유럽까지 수많은 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안정된 국경도 있으나 여전히 분쟁 중인 곳도 있다.
구소련 붕괴 후 서쪽으로는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등 발트 3국이 독립해 EU 가입을 선언했다. 동쪽으로는 우크라이나, 벨라루스가 독립국가가 됐다. 이로 인해 러시아는 유럽으로 가는 직접 통로가 차단됐다.
▼석유와 천연가스의 육로 수송이 만만치 않다. 파이프라인을 통한 수송이 힘들어지면서 정치, 경제적으로 곤경에 처하기도 했다. 남쪽으로는 그루지야,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등과 영토분쟁을 지속하고 있다. 결국 흑해와 극동지역만이 유일한 외부로의 출구 역할을 한다. 하지만 새로운 항구 건설이나 다른 지역과의 연결성 측면에서 그리 만족할 수준은 아니다.
▼소비에트연방 퇴장 뒤 우크라이나와 그루지야는 친서방 노선을 택하며 탈러시아에 국운을 걸었다. 반면 카자흐스탄을 비롯한 중앙아시아 일부 국가는 친러시아 성향을 유지하며 대외정책 노선으로 친러시아를 필수로 인식했다. 친서방과 친러시아 등 두 경향이 나타났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 탈소비에트 국가들은 서방과 러시아 간 헤게모니 쟁탈의 장이 됐다.
▼흑해 연안에 자리 잡은 우크라이나의 긴장 국면도 그렇다. 우크라이나의 지정학적 특징과 정치적 무게는 다른 독립국가연합과 비교할 수 없다. 유럽 등 서방은 여기를 통해 러시아의 군사 전략을 견제하고 러시아는 해상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해 물러설 수 없는 곳이다. 크림반도에 감도는 전운도 같은 맥락이다. 크림반도의 운명이 외세(外勢)에 달린 형국이다.
(출처 = 매일신문)
나라 이름 바꾼다고 부패가 없어지나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Kazakhstan)은 풍부한 오일머니로 잘 알려진 국가다.
하지만 카자흐스탄 사람들은 다소 우스꽝스럽고 엉뚱한 사람들로 묘사되고 있다.
이런 이미지는 2006년 ′보랏′이란 영화를 통해 더욱 강조되며 세계인들의 머리 속에 각인됐다.
이코노미스트 최근호는 카자흐스탄은 중산층이 늘어나며 양호한 경제성장을 보여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경제적으로 뒤처진 주변 국가들(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과 종종 비슷한 나라로 취급된다고 보도했다.
특히 ′-스탄′이란 이름을 가진 국가들 중 하나로 분류되는데, ′스탄(stan)′은 페르시아어로 ′장소′라는 의미를 갖고 있으며 러시아어로는 ′거주지′란 뜻이다.
잡지는 카자흐스탄이 주변 국가들과는 다른 길을 걸어왔음에도 아프가니스탄이나 파키스탄과 같은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국가들과도 비교되곤 한다며 이로 인해 카자흐스탄에서 국가명을 바꾸자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고 소개했다.
국가명을 바꿀 것을 주장하고 있는 이는 바로 카자흐스탄의 대통령이다.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은 지난달 6일 국가명을 ′카자흐 엘리(Kazakh Yeli)′ 또는 ′랜드 오브 더 카자흐(Land of the Kazakhs)′로 바꿀 것을 제안했다.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은 TV와 신문, 소셜네트워크(SNS) 등을 통해 자신의 제안에 대한 공론화를 요구하며, 이웃나라인 몽골을 예를 들어 국명 변경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인구가 고작 200만명인 몽골에 대해 외국인들이 관심을 갖는 것은 몽골의 이름에 ′스탄′이 들어가지 않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카자흐스탄의 인구는 무려 1700만명이다.
또 몽골의 투자 규모는 최근 10년간 가파르게 증가했으나 여전히 카자흐스탄의 투자 규모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국가명을 바꾸는 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이를 위해서는 상당한 불편과 비용을 감수해야만 한다.
실제로 ′카자흐 엘리′라는 국가명은 많은 이들의 호응을 얻지 못하고 있으며, 다른 대안인 ′카자흐히야(Kazakhiya)′는 마치 몽골이나 말레이시아를 연상시킨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국가명을 둘러싼 여러 주장들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카자흐스탄 사람들이 더 걱정하는 것은 질 낮은 의료 수준과 교육비 증가, 만연한 부정부패 등이다.
나라의 이미지를 개선시키기 위한 더 좋은 방법은 이같은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이라는 게 이코노미스트의 조언이다.
(출처 = 뉴스핌)
나보이 물류규모 30만톤으로 확대
우즈베키스탄 대외무역부의 Shavkat Tulyaganov 차관은 나보이 공항 복합물류센터의 화물 용량을 연간 10만톤에서 30만톤으로 확대할 계획이라고 한-우즈벡 비즈니스 포럼에서 밝혔다. Shavkat Tulyaganov 차관은 이를 위해 지난해 12월 관련 협정에 서명했다고 덧붙였다.
대한항공은 2008년 12월, 나보이 공항에 복합물류센터를 설립하고 이를 위탁받아 운영해왔다.
(출처 = uzdai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