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 일본과의 교류
(1) 백제와 일본의 교류
백제와 일본은 신라, 고구려에 비해 물리적으로 가깝고 그로 인해 문화적 교류가 잦았다. 고대의 백제는 중국의 남조로부터 묘제·건축·회화·조각·학문 등 고도의 문화를 흡수하여 독자적인 것으로 발전시키는 데 성공했다. 백제의 우수한 문화는 한성시대 초부터 웅진·사비 시대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일본에 전파되었는데, 한학·불교·천문·지리·의학·음양·음악·공예와 여러 가지 산업기술이 고대 일본 문화에 씨를 뿌렸으며 점차 꽃을 피우게 된 것이다.
백제가 언제부터 왜와 외
교 관계를 맺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 에는 전혀 기술되어 있지 않다. 다만 『일본서기』 와 『고사기』에 따르면 진구(神功)황후 46년(366)에 양국이 최초로 국교를 맺었다고 서술되어 있다. 백제와 일본의 교류가 가장 활발했던 시기는 근초고왕대로, 국교 수립 후 양국은 꾸준히 사신을 교환하며 문화를 교류하였다. 1,5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일본 곳곳에는 백제의 문화가 남아 있다.
백제가 일본 역사에서 큰 의미를 갖는 것은 발달된 선진 문화와 학문의 전파 때문이다. 학문과 기술을 전하며 일본인의 스승으로 남은 백제인들, 그 대표적인 이가 바로 왕인(王仁) 박사 를 비롯해 궁월군(弓月君), 아직기([阿直岐) 등을 꼽을 수 있다. 아마도 최초의 ‘한류’는 왕인 박사와 아직기에 의해 전래된 한국의 선진 문물들일 것이다.
아직기는 백제 근초고왕 때 일본에 건너간 학자로서 근초고왕의 지시로 말 2필을 일본 왕에게 진상한 후 말을 기르던 일을 맡아 보던 중 그가 경서에 능통한 것을 안 일본 천왕이 쇼토쿠 태자 의 스승으로 삼았다. 이 무렵 백제는 고구려의 계속적인 침략으로 국가의 존망이 위태로운 상태였으며, 17대 아신왕 은 왜와 수교를 맺고 태자 전지(腆支)를 일본으로 보냈다. 오진(応神) 천황은 백제의 태자 전지를 7년 만에 다시 고국으로 돌려보내면서 훌륭한 학자를 청하였는데, 이에 왕인은 논어 10권과 천자문 1권을 가지고 도공, 야공, 와공 등과 함께 도일하였다. 왕인은 일본인들에게 글을 가르쳐 학문과 인륜의 기초를 세웠으며, 일본가요를 창시하고 기술 및 공예를 전수하여 아스카(飛鳥)문화와 나라(奈良)문화의 바탕을 세웠다. 그 외에도 궁월군은 백제 아신왕 14년(403년)에 인부 120명을 이끌고 귀화해 각종 기술을 전수하기도 하였으며, 백제는 그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다섯 가지 유교 경전에 능통한 5경 박사와 의학, 천문, 지리 등 각종 기술을 가진 전문가들을 일본으로 보내 학문과 기술을 전수해 주었다.
『일본서기』는 왕인 박사를 일컬어 ‘후미노비토(書首)들의 선조’라 했고 『고사기』는 ‘후미노니토(文首)들의 선조’라고 적고 있다. 오사카의 츠루하시 역에는 ‘왕인 박사 묘’가 있다. 왕인 묘의 진위 여부는 의문의 여지가 있지만, 옛 기록과 주민들에게 구비전승의 형태로 전해지고 있다. 왕인 박사가 전달한 『논어』와 『천자문』은 일본 지방 라이온스 클럽에서 청동 조형물로 제작하여 전시되어 있다. 왕인 박사는 아직도 일본 문화의 시조로 존경받으며, 후세 사람들은 에도시대부터 이 자리에서 제를 올리며 왕인 박사를 기리고 있다.
신도(神道)와 더불어 오늘날까지 일본인의 정신과 내세관에 깊이 영향을 끼치고 있는 불교가 백제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은 현대 일본인들도 익히 아는 사실이다. 문헌상으로 확인된 일본으로의 불교 전파 시기는 서기 538년이지만, 한반도에 불교가 전파된 것이 4세기 후반임을 고려하면 더 일찍 전래되었을 것이라는 추정이 일반적이다. 552년 백제 성왕이 귀족이자 승려였던 노리사치계(怒利斯致契) 를 일본에 보내 불상 한 개와 경전 몇 권을 전하였다.
그 후 554년 위덕왕 때는 도심, 담혜 등 9명의 백제 승려가 일본으로 건너가 불교를 전하는 등 이후에도 많은 승려들이 일본 불교 성립에 영향을 미쳤다. 588년에 백제 위덕왕은 혜총(惠總) 스님 등 10명 가까운 백제 승려들과 사찰건축가 태량미태(太良未太) 를 비롯하여 문가고자(文賈古子) , 기와박사 마나문노(麻奈文奴) 등 수많은 기술진을 아스카의 왕실로 파견해 주었다. 위덕왕의 이 같은 불교 전파 사업은 아스카시대로부터 500년이 지난 헤이안시대(794∼1192)까지도 위덕왕을 신격화해 ‘대위덕명왕’으로 추앙하며 목조 좌상이나 탱화(불화)를 그려 왕실에 모시기도 하는 결과를 낳았다. 오사카의 백제왕신사
를 이러한 백제왕들을 모시는 신사이다. 당시 백제로부터 건너온 건축가들에 의해 아스카에는 일본 최초의 칠당가람이 서게 되었고(596), 이어 호류지 대가람도 완성되었다(607).
아스카, 나라시대 일본의 사원은 백제인 등 한반도 이주민들의 기술로 건립되었으며, 불상도 처음에는 한반도에서 직접 들여왔고 삼국계 이주 호족들과의 밀접한 연관 하에 제작되었다. 스이코(推古) 천황 (재위기간: 592-628년) 시기 46개의 일본 내 사원 중에는 삼국계 호족의 우지데라(氏寺: 씨족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한 사원)가 상당수인데, 이는 한반도인들의 일본 내 지위와 일본 불교 수용시의 그들의 역할을 능히 짐작케 한다. 이후 8세기 덴뽀문화(天平文化)의 개막을 알리는 도다이지(東大寺)
의 건립에도 한반도 이주민들이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결국, 일본 불교는 한반도로부터 자양분을 공급받으면서 형성되고 발전되었다.주1)
역사학계에서는 백제로부터 불교가 전승되자 그 영향에 일본문화가 꽃핀 6-7세기를 ‘아스카(飛鳥)시대’라고 부른다. 아스카시대의 시대적 구분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쇼토쿠 태자의 섭정시대를 중심으로 보는 관점이 일반적이다. 쇼토쿠 태자는 중신 소가노 우마코의 협력을 얻어 조정의 중앙 집권을 강화하고 관료제를 확립시켜 관위 12계층을 제정, 이어 유교사상과 불교적 사상을 바탕으로 헌법 17조를 만들어 지방의 호족이 나아갈 바를 명시하였고, 불교를 공식적으로 후원했다. 그리고 수나라에도 사신을 보내어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왕권이 강화된 중국적 정치 체제를 골격으로 율령 국가를 건설하려 했다.
이 시대의 문화인 아스카문화는 백제 문명의 연장이라고도 할 수 있을 만큼 우리나라로부터 많은 제도, 문물이 수입되었는데, 유·불교를 비롯하여 건축, 조각, 회화 등의 대부분이 우리나라의 학자, 승려, 백제유민 등에 의해 전수되었다. 아스카 지역의 아스카데라(飛鳥寺)
같이 백제의 문화가 고스란히 드러난 사찰도 건립되었다. 뒤이어 607년에 백제는 백제의 기술자를 총동원하여 나라 지역에 호류지(法隆寺)
를 지었다. 호류지는 670년에 한번 전소되었지만 680년이나 690년경에 통일신라에서 파견된 기술자 집단이 재건했다. 지금의 호류지는 창건 호류지가 아니고 재건 호류지라고 한다. 창건 호류지는 일본에서는 약초가람(若草伽藍, 와카쿠사가람)이라 부르는데, 호류지 남대문 바로 오른쪽 공간에 위치하고 있다. 발굴한 창건 호류지의 가람은 1탑 1금당 양식인데, 우리나라 삼국시대의 대표적인 가람배치와 같다. 부여 정림사 터
의 배치와도 같은데, 이를 통해 백제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2) 고구려와 일본의 교류
고구려와 일본과의 관련성은 백제 또는 신라, 혹은 가야에 비한다면 다소 관련이 없어 보이는 듯싶다. 이는 고구려와 일본의 물리적 거리가 양국의 교섭에 장애로 작용했다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고구려의 문화가 평양을 중심으로 하여 발달하였으며, 많은 사람들이 직접 거기에 가서 실제로 그 시대의 고구려 문화에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적었다는 국제 관계의 어려움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일본열도에는 고구려의 유적이나 유물을 쉽게 발견할 수 있으며, 이것은 곧 고구려와 일본 사이에도 밀접한 교류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구려-일본 간의 교류는 승려들이 중심이었다. 영양왕 때 일본에 건너간 혜자 는 일본 쇼토쿠 태자의 스승이 되었고, 담징 은 유교의 5경과 그림을 가르쳤으며, 종이와 먹의 제조 방법까지 전해 주었다. 대표적으로 호류지 금당벽화는 이 담징의 그림으로 알려져 있다. 또 영류왕 때에는 혜관 과 도징이 일본에 건너가 삼론종을 전하였다.
혜자(惠慈, ?-622)는 595년(영양왕 6) 일본에 건너가 섭정이었던 쇼토쿠 태자의 사부가 되고, 이듬해 대신(大臣)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가 세운 호코지(法興寺)가 낙성되자 백제의 승려 혜총 과 더불어 그 사찰에 있으면서 포교에 힘쓰다가, 615년 쇼토쿠 태자가 지은 소(疏)를 가지고 귀국하였다. 621년(영류왕 4), 쇼토쿠 태자의 부음이 전해지자 재(齋)를 올려 명복을 빌며 이듬해 2월 5일에 자기도 죽으리라 예언했다. 그리고 바로 그 날 자신도 죽었다. 수의술(獸醫術)에도 능통하여 그 방면으로 일본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담징(曇徵, 579–631)은 일찍 출가하여 스님이 됐는데 불교의 경전에 밝았을 뿐 아니라 그림을 잘 그렸으며 다재다능하였다. 담징이 신라에 머물고 있을 때 이 명성을 들은 일본의 쇼토쿠 태자는 당시 일본에서 제일 큰 호류지의 벽화를 그리기 위해 담징을 모셔 가려고 사람을 보냈다. 백제를 거쳐 일본에 도착한(610) 담징은 스님들에게 불교의 경전을 가르치며 절이 완성되기를 기다렸다. 담징이 그린 호류지 금당벽화는 ‘인류문화사를 빛낸 명화’로 손꼽힐 만하다. 이 그림은 석가·아미타·미륵·약사여래로 구성된 ‘사불정토도(四佛淨土圖)’로, 안타깝게도 1948년에 불탔다. 1989년에는 같은 호류지 5층탑 벽화의 덧그림 밑에서 그가 그린 화려한 ‘관음보살상’이 1,300년 만에 발견됐고 지금은 컴퓨터로 재생돼 그의 솜씨를 다시 확인할 수 있다.
호류지 금당 벽화
진품은 화재로 인해 소실되고 현재는 복원한 벽화가 전시되고 있다.
“ 스이코(推古) 천황 18년(610) 3월에 고구려왕(영양왕)이 승려 담징과 법정(法定)을 바쳐 올렸다. 담징은 오경을 알고 있었다. 그는 그림에 능했으며, 종이와 먹을 만들었고 또한 물레방아 맷돌을 만들었다.”
이 『일본서기』의 기록을 통해 스님이 일본에 종이와 먹, 물레방아, 멧돌 만드는 법을 전하고 『시경(詩經)』, 『서경(書經)』, 『주역(周易)』, 『예기(禮記)』, 『춘추(春秋)』 등 유교경전을 가르쳐 일본의 문화 발전에 이바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후 일본에서는 담징 스님을 종이와 먹의 시조로 삼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일본 나라현 아스카의 기토라 고분
과 다카마스총
에서 발견된 벽화는 고구려에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예로 볼 수 있다. 고분 내에서는 사신도와 천문도 등의 벽화가 발견되었고, 특히 기토라 석실 고분에서 출토된 천문도는 고구려의 영토인 평양성 부근에서 관측된 별자리를 바탕으로 고구려계 화공들이 그린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주1)
이것은 당시 고구려의 천문 관측기술이 일본에 전래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볼 수 있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일본에서는 고구려의 음악(고려악) 에 관한 기록이 서기 684년, 고구려가 멸망한 지 16년 이후에 기록이 나타난다. 이때는 고구려악과 백제, 신라악이 모두 연주되었다고 한다. 그 후, 삼국의 음악은 발해악을 흡수하면서 고려악으로 통일되어 궁중음악인 가가쿠(雅樂)의 한 장르로써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일본의 가가쿠는 제도상 많은 변화가 있었고 전체적으로 규모도 축소되었다. 현재의 고려악곡이 전래 당시의 양상을 어느 정도 남기고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음악적으로 당악과는 다른 고려악만의 특징이 있는데, 그러한 점이 어쩌면 당시의 모습을 어느 정도 나타내고 있는지 모른다. 고려악에는 당악과 구별되는 중요한 관악기로 고마부에(高麗笛)가 사용된다. 이것은 삼국악이 통합되기 이전의 고려악, 즉 고구려악에서 사용되었던 횡적(橫笛)을 가리킨다. 이 악기는 집안 제17호분 벽화에 보이는 횡적과 같은 종류의 고구려 관악기로 7세기 이전부터 고구려음악의 주요 선율악기로 쓰였을 것이다. 이 고구려의 횡적을 일본에서 고려악생이 연주했기 때문에 고구려의 적이란 의미에서 고마부에(高麗笛)이라고 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일본서기』 스이코(推古)기 26년(고구려 영류왕, 618년)조에는 수 양제 가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대패한 사실과 또 고구려가 북 등의 악기와 큰 활(화살 돌을 연달아 쏠 수 있는 무기)·대포 등을 일본에 선물로 주었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고구려 음악은 대개 춤을 위한 반주곡으로 쓰였고, 고구려 춤은 일본에서 4인무(신토리소, 시키테), 6인무(고토리소) 등으로 전해지고 있다. 고구려 왕릉의 벽화로 확인된 것만 봐도 독무·쌍무·군무·탈춤·북춤·칼춤·창춤 등 그 종류가 무척 다양하다. 고구려 춤의 특징은 부드러운 동작도 가미되어 있지만, 대체적으로 씩씩한 상무(尙武: 무를 숭상함) 정신이 넘치는 세로 춤꾼들이 칼·창·북 등을 들고 있어 전투적 기상이 강조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3) 신라와 일본의 교류
신라는 지리적으로 일본과 가장 가까웠으나 군사적 대립이 잦아 오히려 문화 교류가 활발하지 못했다. 그러나 신라에서도 조선술(배 만드는 기술)·축제술(저수지 쌓는 기술)을 일본에 전하였는데, 이 밖에도 도자기 만드는 기술과 의약·불상 등을 전파하여 일본의 문화 발달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쿄류지(廣隆寺)
의 목조 미륵반가사유상은 진평왕 이 스이코 천황에게 보내준 불상으로 알려져 있다. 여러 문화교류 가운데 축제술의 전파는 일본에 큰 영향을 끼쳐 ‘한인의 연못’이라는 이름까지 생기게 하였다.
신라의 조선술은 당시 동아시아에서 최고 수준이었다. 일본에 조선술을 가르쳐 준 이나베(猪名部)는 신라 사람이다. 639년 선덕여왕 때 당나라 승려들이 신라 배를 타고 왜로 갔고 649년에는 일본의 승려가 신라 배를 타고 당나라에서 귀환했다. 658년엔 일본의 승려 두 사람이 신라 배를 이용하여 당에 유학을 갔다. 그때 왜는 백제와의 친교가 두터웠음에도 당나라에 오고갈 때 튼튼한 신라 배를 이용했다. 또한 신라 해군이 고대 일본 시기 오사카 부근 아카시노우라(明石浦)에 상륙하여 왜군을 격파했다는 기록도 전한다.
또한 일본에 외래악으로써 가장 먼저 일본에서 연주된 음악은 신라의 음악이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인교(允恭) 천황 420년, 즉 서기 453년에 신라왕이 천황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놀라고 슬퍼하면서 조공으로 배 80척과 음악인 80명을 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6세기 중엽 우륵 이 가야금을 갖고 신라에 투항하기 이전의 신라 음악은 춤과 노래 정도로 연주된 지방의 향토음악 정도를 크게 넘지 못했기 때문에 5세기 중엽 신라악인 80명이 일본에 파견됐다는 것은 과장된 것이라는 인식도 존재한다.
신라는 관개나 저수지 축조 부분에서도 그 기술이 뛰어났다. 당시 일본 천왕은 신라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들에게 명해 농사에 필요한 저수지를 파게 했고, 나중에 그 저수지를 만든 것이 한인이라 하여 한인의 연못이라 이름 지어졌다.
“ 오진(應神) 7년 (396년)
고구려인, 백제인, 임나인, 신라인이 같이 내조하였다. 무내숙이에게 명하여 여러 한인들을 거느리고 연못을 만들게 하였다. 그래서 이 연못을 한인지(韓人地)라 부른다. ”
특히 토다이지
의 쇼소인(正倉院)
에서 신라의 촌락문서가 발견되었다는 사실은 국가 통치체제의 수입과 신라, 일본간의 교류 현황을 잘 보여준다. 이상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이미 선사시대부터 일본 지역에 진출하여, 그 곳의 정치·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여러 시기 중 특히 강력한 영향을 미친 것은 삼국의 문화였다. 삼국은 대륙으로부터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이를 소화, 흡수하고 독자적인 문화로 발전시킨 후 다시 일본에 전파하였다.
가야와 일본의 교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