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산서원(七山書院) 복설(復設) 원정비명(院庭碑銘)
원정비(院庭碑)라 함은 서원의 역사를 기록한 비석을 말하며[廟庭碑(묘정비)는 서원 앞에 세워 서원의 건립취지와 그 서원의 주인 · 모시는 인물에 대한 문장 등을 기록해 두는 것으로 강학(講學)기능을 상실하고 향사(享祀)기능만 있는 경우에 쓴다고 함으로 원정비나 묘정비나 그 뜻은 같다고 사료됨] 최초에 서원을 창설하거나 서원을 중건하거나 재 영건하거나 한 경우에 그 내역을 역사로 보존하기 위해 쓴 비석을 말하며 내용을 비석에 기록한 것을 비명(碑銘)이라고 하며 비명을 지은 분은 근찬(謹撰)이라고 기록하고 그 글씨를 쓴 분은 근서(謹書)라고 하였고 글씨를 비석에 각자(刻字)한 사람은 근각(謹刻)이라고 기록을 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원정비<전면>
원정비<후면>
전면(확대)
<좌측면> 확대
<후면>확대
<우측면 1>확대
<우측면 2>확대
칠산서원 내삼문 밖 오른편에 칠산서원(七山書院) 복설(復設) 원정비가 세워져 있으며 원정비명(院庭碑銘)을 지은 분은 조남철씨이고 글씨를 쓴 분은 유인혁씨이고
두전(頭篆 : 비석 몸체의 머리부분에 전자체(篆字體)로 횡서(橫書)하여 돌려가며 새겨 놓은 글을 말한다.)은 문충공 시남 유선생 원정비명(文忠公 市南 兪先生 院庭碑銘)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글을 쓰신 분은 방(傍) 7대손 되시는 우리 문중에서 추앙 받으시는 일창 문장어른 (諱 致雄)의 글씨입니다.
칠산서원 복설(復設) 원정비명(院庭碑銘)의 글을 지은 (근찬 - 謹攢)한 조남철 회장)
전국유림원로 유창회 61정례회의 인천향교재단서 개최
신중균 기자 2012/ 06/ 18 09:31
<사진이 있습니다만 ........ > 별표만 보여 첨부 생략(편집자)
‘제61차 유창회(회장 조남철) 정례회의가 6월14일 10시 인천남구 학익동 인천향교 유림회관 4층 회의실에서 인천향교재단이사장(서호근)의 주최로 개최되었다. 인천시장을 대리하여 문화재 과장을 비롯해 정책심의관 성균관유도회 변온섭 고문, 전국 유창회 회장단, 박우섭 남구청장 향교 전교 및 유림 지도자 등 4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됐다.
지난 3월 30일 부산에서 개최된 60차 회의에 이어 전국을 순회하며 분기별로 실시되는 정례회의는 지방유림사회와 지방의 모습을 살펴보고 유림사회의 발전을 도모코자 개최 하는 친목모임이다. 중식의 자리로 이동하며 인천자유공원계단에 모셔진 공자님동상에 회의간부들이 헌화 하는 것을 시작으로 회의는 진행 됐다.
유창회는 1999년 7월 15일 노 병 덕 회장 을 초대회장으로 변 온섭 당시 유도회총본부회장을 2대회장으로 현 조남철 회장을 3대회장으로 추대하여 유교진흥과 전통윤리 도덕성회복을 목적으로 성균관유도회 시도 본부 장 및 전국 향교재단이사장을 구성원으로, 지방향교의 육성발전을 위한 경전번역 및 학술연구 발표, 정치·경제의 연구발전, 교화 및 출판에 관한 사항 등을 추진하고 있는 단체다.
이날 조남철(경기도유도회본부장)회장은 “각 시도재단이사장님들과 사문 진작 에 힘쓰는 유림들을 만나 매우 반가우며 열린 유림들의 의식으로 국민들과의 교감을 이뤄 나가자.” 강조했다. 또한 인천향교와·부평향교의 깊은 배려에 감사드린다. 고 말했다.
박 우 섭 남 구청장은“물질에서 정신으로의 의식변화를 위해 올바른 도덕적 인륜으로 국가사회에 기여하는 여러분들의 인천방문을 진심으로 환영한다.”며 “앞으로도 한국의 효도사상 등 우리나라의 전통 사상을 계승시키는데 많은 노력을 해주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칠산서원 원정비를 쓴(근서 - 謹書) 유인혁씨
류인혁[柳寅赫 : 字 赫汝. 號 靑坡, 1914. 10. 26 生 - 忠淸南道 參事官, 林川鄕校 典校, 扶餘 車柳宗親會長, 文化柳氏大宗會 顧問, 忠景公派 大丞公 31世孫, 부여군 세도면 청송리 출신, 2010년 11월 3일 졸(卒)
누운 기현(老雲 基賢)의 자(子)로 부여군 세도면 청송리에서 태어났다. 모친은 한산이씨 준식(韓山李氏 俊植)의 따님이다.
어려서 부터 성품이 온후하고 재예가 영민하여 부친의 엄한 교훈을 받고 자라면서 부모를 모시고 힘을 다하여 봉양(奉養)하며 잠심역학(潛心力學)하여 사서(四書)를 통효(通曉)하고 동정언행(動靜言行)이 성인의 가르침에 총독(忠篤)하니 칭선(稱善)이 끊이지 않았다.
1947년 충남도참사(忠南道參事)로 배임되어 세도면 근무 후 52년 지방자치제가 실시됨에 따라 지방의회 의원에 피선되고 다음에 임천향교 장의(掌議)로 피선되어 조남술(趙南述), 이병세(李炳世), 김두진(金斗鎭), 이해홍(李海弘), 구행서(具行書)등 여러 재임(齋任)들과 함께 이미 농지분배(農地分配)로 들어간 교토(校土)를 정부(政府)에 진정하여 환원시키고 의연금(義捐金)을 모아 6.25 사변(事變)으로 훼손된 삼문(三門)을 복원(復原)하고 제기(祭器)와 제복(祭服)을 비롯한 많은 집기(什器)를 완비하여 춘추석전(春秋釋典)을 다시 성하게 되었다.
한편 칠산서원 유사(七山書院 有司)로서 원정비(院庭碑) 건립을 주동하고 세도초등학교 증축을 주관하여 후생의 면학을 장려하였다.
1957년 임천 수리조합장으로 지방 하천을 개수하고 1967년 고을 노인들의 복지를 위해서 세도면에 경노당을 창건하니 이것이 고을의 첫 번째 경노당이 되었다.
1969년 선조 노곡공(老谷公)을 타령(妥靈)한 간곡서원(艮谷書院)이 년구세심(年久歲深)으로 훼손되어 항상 부끄럽게 여기던 차 종의(宗議)를 모아 중건하고 다음 해 원정비(院庭碑)를 세워 유덕(遺德)을 천양하고 그 해 세도중학교를 창립하고 기성회장으로 취임하는 한편 1971년도 세도 대흥장학회를 조직하여 회장을 역임하면서 1972년 의연금 1천7백만원을 모금하여 초등학교 부교재 및 집기(什器), 운동기구 등을 갱신하고 효열(孝烈), 애국지사, 향토발전 유공자를 발굴하여 추진위원장으로서 향리의 발전과 교육진흥(敎育振興)에 혹은 전래풍화(傳來風化)에 끼친 공덕이 실로 컸었다.
1973년 양산사 장의(梁山祠 掌議)로써 낡은 기와를 벗겨내고 새 기와로 갈고 1980년 칠산서원 장의(七山書院 掌議)로서 동 서원을 중수하고 1984년 임천향교 전교(典校)로 추대되어 명륜당(明倫堂)과 대성전(大成殿) 담장을 개수하고 제상(祭床)과 제기(祭器)를 구비(具備)하였다. 또 충효교실을 개설하여 중교생들에게 충효사상과 전통예절 등을 강의하며 올 바른 가치관을 일깨워 주고 있다.
이렇듯 일에는 청렴하고 인의(仁義)로 조화(調和)를 이루니 향인 여러 사람들이 마음을 같이 하여 복지사업을 쉬지 않고 매진하여 지역사회 발전에 진력하되 오직 공(公)으로써 하고 사사로움이 없게 하니 유림(儒林)이 그 공적을 흠경(欽敬)하여 1976년 돌을 다듬어 청파방사유인혁공적비(靑坡房士柳寅赫功績碑)를 세웠다. 그 비(碑)에
“착한 행실, 뛰어난 공적 그 이름 멀리 퍼졌네.
도를 지키고 성인을 앙모하며 제가를 생각하고 성심 다 하였네.
관직에서 봉공하며 모든 일에 규정 있었네.
초, 중 두 학교에서 학문 장려하여 인재 길렀네.
풍습을 다스려 문교 세우고 경로당 이루어 공경하였네
수로를 들어 물을 다스리니 복리가 민생에 미쳤네.
온유한 성품에 두터운 덕망 무릇 백가지 정을 칭송하네
우뚝 솟은 일좌의 빗돌 그 모습 영세에 밝으리....
한편 남 다른 위선심과 돈목의 정의로 항상 종중에 화의 훈풍이 충만하게 하고 종중사를 괴롭다고 피하지 않고 몸소 앞장서서 어려운 일을 능히 처리하였으니 즉 종토등기에 따라 잘못 부과된 1천8백만원의 세금을 관계요로에 진정하여 끝내 면세(免稅)토록 한 공적은 그 하나의 예요, 부여 차류 종친회장으로 혹은 문화유씨 대종회 부회장 또는 고문 등을 역임하면서 쌓은 업적 등 그 수를 헤아리지 못한다.
이로서 추참공 종중(秋岩公 宗中)에서 지난 1988년 가을 “청파 유인혁 위선공적비”를 세우니 비명은 족질 명열(明烈)이 짓고 글씨는 남열(南烈)이 썼다.
배위 순천박씨(順天朴氏)는 심규(心奎)의 따님인데 15세 혼인하여 슬하에 4년 3녀를 두니 아들 장열(璋烈)은 부여농지개향조합 이사요, 봉열(琫烈)은 충남면직 상무이사요, 찬열(찬열)은 덕수목재 영업부장이요, 익열(翊烈)은 충청은행 차장이요, 따님은 달성 서정호(達成 徐廷浩), 남양 홍성남(南陽 洪性南), 영월 엄범석(寧越 嚴範錫)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칠산서원 원정비의 내용 - 국역(國譯)한 자료를 입수 중
입수하게 되면 게재하겠습니다.........
첫댓글 잘 보았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