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은 가슴에 묻고 사는 사람들은 행복할 것이다. 바야흐로 이 시대는
오로지 동물적 충동만 남았을 뿐 그리움 따위는 고전 소설의 소재 정도로 생
각하는 각박함뿐이다.
그래도 그렇지 않다. 그리움이야 말로 우리를 존재하게 하는 이유이자 마
지막 구원인 것을. 누가 무어라 해도, 세상이 아무리 바뀌었다 해도 그리움
은 그리운 정으로 남아있어야 한다. 누구를 사랑함으로써 일기 시작하는 그
설래는 마음은 인류의 미래가 끝나는 날까지 지속되어야 할 것이다.
일생을 그리움 속에 살다간 두 사람의 예인을 이야기 하고자 한다. 한 사
람은 조선조 선조 때 기생 매창이며 다른 한사람은 전라북도 고창에 살았던
동리 신재효다. 나는 부안 군청 뒤 상소산 서림공원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매창 시비를 둘러볼 때까지 그녀가 어느 시대에 태어나 무엇을 했던 사람인
지 전혀 알지 못했다.
아무 장식 없는 조촐한 시비에는 “이화우 (梨花雨)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
별한 임/ 추풍낙엽에 저도 날 생각하는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하도
다. “라는 사무치게 그리운 정을 표현한 시 한 수가 적혀 있었다. 예나 지금이
나 기생이라 하면 한두 푼이면 입술도 팔고 젖가슴도 파는 하찮은 계집이라
는 게 일반적인 관념이다. 그런데 이 시에서 보듯 “저도 날 생각하는지” 라는
표현을 미뤄 짐작하면 나는 수 천 수 만 날을 임 생각 하였네“ 란 말이 생략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는 이 시를 읽는 순간 이미 매창은 기생으로서가
아니라 가을비 내리는 고적한 밤 소복단장한 여인이 사모하는 임에게 기나
긴 편지를 쓰고 있는 여인상으로 각인되고 말았다.
매창은 조선조 선조 6년(573) 부안현 아전의 서녀로 태어났다.
이름은 계화(桂花) 또는 향금(香今)이었다. 매창 (梅窓) 호, 자는 천향 (天香)
이었다. 출신이 서녀로 기생이 되었으나 타고난 미모보다는 시창금 (詩唱琴)
에 능해 그윽한 인품으로 사람의 마음을 끌었다. 그런 여인이었다. 기생이 되
고 난 후 찾아오는 많은 문인묵객을 만났겠지만 유독 마음을 붙잡고 놓아 주
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 그가 바로 천민 출신인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자 시
인인 유희경었다.
유희경이 부안 근처에 머물 때 매창을 만났던 모양이다. 아마 모든 사랑하
는 선남선녀들이 그런 경험을 갖고 있듯 첫 눈에 반한 유희경은 이런 시를
매창에게 바친다. “일찍이 남쪽에 계량이란 시인이 있었는데/ 시 노래가 한
양까지 울렸도다./ 오늘에서야 고운 모습 직접 보니/ 어찌하여 선녀가 지상으
로 내려 왔는고“ 유희경의 타고 난 사나이다움과 정중한 매너로 매창을 선녀
로 격상시켰으니 도도했던 매창 이지만 “뿅” 하고 안 넘어 갈 도리가 없었
을 것이다.
매창의 답시가 걸작이다. “ 비바람에 울기가 몇 해던가/ 내게는 달랑 거문
고 하나 / 이제 외로운 곡조는 타지를 말자/ 죽도록 임과 함께 노래 부르리“
이렇게 만난 인연도 잠시 유희경은 서울로 떠나고 다시 매창은 고독한 빈방
에 홀로 버려지게 된다. 암색 낸 개새끼 곁에 수케 안 따르는 날 없다더니 이
이때 소설가 허균이 나타난다. 허균 또한 매창의 매력에 끌려 이 곳 부안에 눌
러 살 궁리까지 했으며 일설에는 홍길동전을 이곳에서 썼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유희경이 놀다 떠난 빈자리에 허균이 들락거리자 부안의 참새 떼들은 조
잘대기 시작했다. “매창이 소설을 쓴다는 허모야와 좋아 지낸단다.” 대충 이
런 소문이 읍내로 퍼져나가자 매창은 소문이 괴로워 주점의 문을 걸어 잠그
고 이런 시를 쓴다. “부질없는 풍문이 세상에 떠돌아/ 세상의 말들이 시끄러
워라/ 공연한 걱정과 원한만 쌓여/ 병 핑계 삼아 문을 닫았소“
한편 서울로 올라간 유희경은 이런 시를 보내온다. 그대는 파도 소리 들
리는 집에서 살고/ 내 집은 서울에 있네/ 서로 그러면서도 만나지 못하네/
애간장은 타는데 오동나무엔 비만 내리네“ 심란한 마음을 추스릴 수 없는 겨
룰에 이런 시를 받았으나 자칫 허균에게로 쏠리던 마음을 다시 곧추 세울 수
밖에 없었다. 흐뜨러질 뻔 한 마음을 시 한편으로 가다듬고 나니 허결의 집요
한 집접거림도 더 이상 유흑은 아니었다. 마침내 허균은 그 어른이 너를 알
고 네가 그 분을 아는데/ 백 년을 못 만난들/ 마음이야 변할 손가“ 라는 시
한편을 던져두고 이 곳 부안 땅을 떠나고 만다.
어쨌든 매창은 평생을 그리움 속에서 살다가 외롭게 숨진 비극의 주인공
이다. 광해군 2년이었으니 향년 37세. 개성의 황진 이와 더불어 조선 기생의
양대 산맥을 이루던 매창은 만년에는 가난과 질병에 시달렸지만 유희경도
허균도 그 외에 매창을 탐하던 많은 남정네들도 발길을 끊은 지 오래였다.
“독수공방 병에 찌든 이 몸/ 굶고 떨며 사십년 세월 길게도 살았네/
묻노니 사람살이가 얼마나 되는가/ 어느 날도 울지 않은 적 없네 “이런 시를∼
남긴 매창의 속사정을 유희경인들 짐작이나 했겠는가.
매창의 진짜 연인은 유희경이 아니라 마지막 사랑은 허균이 아니었을까.
허균과는 몸이 부딪치지 못한 바보 같은 아가페 적 사랑만 했다손 치더라도
숨지기 전 마지막 정념이 불타오르는 순간에는 단 하룻밤이라도 인연 맺기
를 원했던 허균의 에로스적 사랑을 받아주지 못한 못난 자신을 원망스러워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서울의 본처 품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편지질이나 해
대는 유희경에겐 아름다웠던 기억까지도 배신감으로 증폭 되었을 것이다. 사
랑하는 사람이 떠난 자리는 추억조차 주인을 잃고 헤매기 마련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생각의 너울 속을 헤집고 다니다 보니 답사 버스는 ‘매창의 무덤 앞에 선
다. 붉은 황토가 속살을 드러내고 있는 공동묘지였던 부안읍 봉덕리 속칭‘
매창이 등‘ 에 묻혀 있는 무덤은 개발 바람이 불어 닥쳐 다른 묘들은 타지로
이장되고 명창 이화중선의 동생 이중선의 묘화 함께 단 2기만 남아있다. 매
창과 이중선을 사랑하는 부안사람들의 집요한 요청으로 이곳이 예인의 공원
으로 조성된다니 그나마 다행이다.
매창이 살았을 땐 그녀의 말마따나 그리움에 떨며 살았지만 그녀가 죽은
지 45년 만에 무덤 앞에 비가 세워 졌으며 사후 60년이 지나선 부안의 아
전들이 시편들을 모아 그녀가 살아생전에 자주 찾았던 개암사에서 책으로
엮어주었다. 매창의 시 61편이 남아 있는 것도 보배로운 일이다.
동리 신재효(1812∼1884)는 조선조 고종 때 사람이다. 매창과는 240년이
란 세월이 서로 격해 있다. 그러나 시공을 초월하여 두 사람을 같은 반열 위
에 올려놓은 까닭은 그들은 똑같이 예의 길을 걸었으며 그리운 사람을 그리
워 할 줄 아는 그리움의 깊이가 사뭇 깊었기 때문에 두 사람을 한 두름으로
묶어 봤을 따름이다.
동리는 타고 난 멋쟁이었다. 그는 오백 석을 하는 중인 신광흡의 1남3녀
중 마흔 둥이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관 약방을 하여 부를 쌓아다.
그의 아버지가 재력을 앞세워 양반 자녀들이 공부하는 장성의 필암서원으로
신재효를 유학 보냈다. 그러나 중인 신분이 탄로 나는 바람에 학동들에게 몰
매를 맞고 쫓겨나고 만다. 필암 서원은 거유인 하서(河西) 김인후 (金璘厚)를
배향하는 호남 최고의 서당으로 현종3년(1662) 에 필암이란 사액을 받는 곳
이다. 필암서원은 사액서원으로 한 기에 15명만이 글공부를 할 수 있었다.
당시 양반들 사이에서도 필암서원에 입원하는 자체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
었다. 그러니 중인 신분이 탄로 난 신재효는 왕따를 당할 수밖에 없었다.
신재효는 서당 공부를 그만두고 부모 뵐 면목도 없어 백암산 백양사로 공
부 장소를 옮기게 된다. 이 곳 백양사는 두 계곡이 합친 곳에 세워진 절로 예
부터 소리꾼들이 자주 찾던 곳이다. 신재효는 이 곳 백양사 계곡에서 어느
고수(鼓手)를 만난 것이 계기가 되어 그의 인생항로가 바뀌게 된다. 중인 신
분으로 어렵디 어려운 공부를 하여 과거라는 불확실성한 미래에 청춘을 거느
니 소리의 길 ‘에 평생을 바칠 각오를 하게 된다. 신재효는 백양사 생활을
끝내고 남원 순창 임실 전주 등지를 돌며 우리가락과 우리 소리를 귀로 직
접 듣고 몸으로 느낀 후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동리는 38세 때 고창군 고창읍 읍내리 고창읍성 바로 코밑에 초가 일자집
을 짓고 명창을 불러 모아 노래 청을 열었다. 이 집에는 한 때 50여명의노래
꾼들이 기숙했다니 규모는 물론이거니와 동리의 소리에 대한 열정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하고 남는다. 동리의 마음 한 구석에는 양반 서당에서 쫒
겨난 기억이 한으로 남아 있었다. 출입문인 동문을 낮게 낮춰 양반 아니라
고관대작이라도 소리를 듣기 위해 이 집을 출입할 땐 절하는 자세로 머리 숙
여야 들어 올 수 있었다.
동리는 가진 부로 자신만 호의호식하는 졸부는 아니었다. 그는 선친이 물
려준 재산을 배로 불려 1천석 부자가 되어 있었다. 어느 해 이 지방에 흉년이
들자 그는 곳간을 풀어 배고픈 이웃을 도왔다. 그러면서 그는 이웃들의 자존
심이 상하지 않도록 아무 쓸모없는 물건이라도 한 가지씩 갖고 오게 하여 떳
떳하게 양식을 가져가도록 배려했다고 한다.
동리는 1950년 서른여덟 살 때 그의 풍류와 뜻을 펼칠 지금 고택자리에 집
을 짓는다. 그는 일흔 둘로 죽을 때 까지 명창들을 불러 모아 소리를 즐겼고
한편으론 문하생을 길렀다. 그는 또 춘향가 심청가 적벽가 박타령 토끼타령
가루지기타령 등 판소리 여섯마당의 가사를 정리했다. 그러나 동리의 내면
세계는 항상 밝지 못하고 어두운 우수의 그림자가 따라 다녔다. 우선 뛰어난
지적 깨침이 있었지만 중인 신분이어서 자신의 이상을 펴지 못한 것도 하나
의 원인이었다. 게다가 아내를 얻기만 하면 상처하는 가정적 불행이 그를 고
독의 심연으로 내몰았을 것이다.
이때 진채선이란 낭자가 제자로 입문했고 얼마가지 않아 두 사람의 인연
은 연인 사이로 발전해 갔다. 아마 동리가 사랑을 느끼고 자신의 정열을 오
롯이 퍼부은 사람은 채선이가 유일 한 것 같다. 호사다마랄까. 두 사람의 사
랑놀이도 훼방꾼이 등장하여 끝내 이들을 갈라놓고 만다.
고종4년에 경복궁 낙성식 축하연이 열렸다. 전국의 명창 명기를 비롯하여
이름난 재주꾼들이 다 모였다. 동리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채선을 남장
차림으로 공연 잔치에 보냈다. 동리는 여색질의 명수인 고종의 아버지 홍
선대원군의 음흉한 행보를 미리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예감은 적
중했다. 채선은 그 날로 고창 땅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대원군의 애욕의 포로
가 되어 버리고 만다.
먼 훗날 대원군도 죽고 궁에서 벗어난 채선이 딱 한번 고창을 찾아 왔지만
스승이자 연인인 목메이도 잊지 못하는 동리선생을 차마 뵙지 못하고 한 때
나마 정들었던 담 벽을 쓸어안고 울면서 뒤돌아섰다고 한다. 권력 앞에 희생
된 사랑이 얼마나 슬프고 가련한 것인지를 저지를 자는 알기나 하겠는가.
동리는 채선을 떠나보낼 때의 나이가 쉰다섯. 그는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채선을 그리며 “스물네 번 바람 불어 만화방창 봄이 되니 귀경가서 귀경가
서“ 라는 ‘도리화가’를 지었으며 복받치는 격정을 ‘성조가’ ‘광대가’ 등에
표현하고 했다.
동리는 채선을 잃은 슬픔을 이렇게 달래기도 했다. 그가 기거하던 방을 온
통 검정색으로 도배한 후 그 칠흑 같은 고독의 심연 속에서 떠나고 없는 채
선을 끓임 없이 그리워하고 그리워하다 생을 마쳤다. 그리움을 가슴에 묻고
사는 사람들은 행복하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정말 그리움이 한으로 남은 매
창과 동리도 행복했을까. 다음 생에 그들을 만나면 물어 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