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 교회에서 정통성의 지지 기반으로 삼는것은 칼빈의 기독교 강요,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 등입니다. 이것은 성경 진리를 내포합니다. 하지만 유일무이한 정통 교리는 아닙니다. 기독교 정통교단안에서 칼빈주의와 다른 가장 큰 줄기는 바로 감리교 성결교의 기반이 되는 알마니안 주의입니다. 칼빈주의 5대교리와 알미니안주의 5대항론은 구원론에 있어 많은 부분 차이점이 있으나 한 분 예수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성도의 믿음이 유일무이한 구원의 조건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으며 둘 다 정통교단에서 인정받는 교리입니다. 사랑하는 교회의 성경 해석은 정통교단의 교리 안에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더욱더 철저히 성경적입니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는 데에는 다음의 세 가지 근거가 있습니다.
첫째는, 철저히 ‘성경의 문맥’과 ‘성령의 조명’에 기반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사랑하는 교회에서 성경 해석에 있어 가장 기본으로 삼는 것은 성경의 문자적인 의미와 문맥입니다. 아무리 깊은 연구를 통해서 내린 결론이라고 하더라도, 이 결론이 성경의 문자적인 의미 또는 문맥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성경 진리가 아닙니다. 성경은 항상 성경으로 해석해야만 합니다. 더불어서 사랑하는 교회의 말씀 해석은 성령님을 철저히 의지합니다. ‘그 발 앞에 엎디어’라는 책에서 예수님께서는 썬다싱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을 이해하는 데는 히브리어나 헬라어가 필요한 것이 아니요, 그것을 쓴 선지자와 사도들 중에 임하였던 성령과 친히 교제하는 것이 필요하다. 의심할 것 없이 성경의 의미는 영적이다. 학자든지 아니든지 유식 무식을 물론하고 다만 영으로 거듭난 자만이 잘 이해할 수 있다.”
출처: 썬다 싱 ‘ 썬다 싱 전집’ 제 1권 ‘그 발 앞에 엎디어’ 강흥수 역. 서울: 성광문화사, 1980. p.24.
이 말씀은 니고데모가 거듭남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여 예수님께 질문했던(요3:4) 장면을 떠오르게끔 합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으로서는 성경의 의미를 제대로 깨달을 수 없습니다. 육신으로 성경을 해석하려다보니 자유주의 신학과 같은 이단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은 살아 역사하기 때문에 말씀에 대한 참된 해석을 위해서는 성령님의 조명이 필수적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교회는 성경 해석에서 철저히 성령님을 의지합니다.
둘째는, 본문에 흐르는 사상의 흐름을 따라가는 해석입니다. 담임목사님께서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은 성령의 조명과 성경의 문맥에 의지하여 해석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것들은 문맥을 보아도 그 의미를 잘 알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산상 수훈이나 바울서신 같은 설교나 편지들은 문맥에 주의하면 대개 그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복음서나 사도행전에 나오는 특히 본문과 같은 일화나 대화체의 글들은 문자적인 문맥이 상대적으로 불분명합니다. 그래서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운 것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구절들을 바르게 해석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방법은 단지 문자적인 문맥이 아니라 그 단락의 주제가 무엇인지 파악해야 합니다. 그래서 본문에 흐르는 사상의 흐름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 결과 그 의미가 자연스럽게 수면 위로 떠오르게 해야 합니다. 그럴 때 상상의 산물인 주관적인 해석이 아니라 열린 마음을 가진 자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객관적인 해석을 할 수가 있습니다.
출처: 변승우 ‘천국의 가장 작은 자가 어떻게 세례 요한보다 클 수가 있나? ’ pp.13~14
본문에 흐르는 사상의 흐름을 따라가는 것은 쉬운일이 아닙니다. 성경의 문자적인 의미나 문맥과 같이 바로 파악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상의 흐름을 따라가기 위해서는 학자들의 전문적인 연구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세밀한 검토 과정이 필요합니다.
1. 이 구절이 누구에게 하신 말씀인가?
2. 성경 본문의 전개 과정은 어떠한가?
3. 성경 해석이 전체 성경의 통전적 흐름과 일치하는가?
4. 해당되는 주제에 대해 학자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일반적 해석은 무엇인가? (물론, 학자들사이에 통용되는 일반적인 해석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학자들의 통상적인 해석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예상되는 반론을 정직하게 대면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답을 찾아 성경적으로 정확한 답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세밀한 검토를 통해 성경의 궁극적인 의미에 대한 원만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통전적인 구조를 보여주는 계시입니다. 이에 대하여 담임목사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계시록 해석이 소설이 되지 않으려면 계시록의 구조를 볼 수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두 달 동안 저에게 부어주신 계시도 황충은 뭐다 이런 계시가 아니었습니다. 계시록의 구조를 계속 보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각 장이나 단락이 무엇에 대해 쓴 것인지 알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 (중략) ... 세부적인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몰라도 되는 것이고, 알고 싶으면 이 구조 속에서 주석과 강해집을 보면서 연구하면 알 수 있습니다. 각 주석에서 맞는 내용이나 설명들을 찾아서 더 세부적인 의미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물론 완벽하게는 안 됩니다. 계시록은 그것을 가르쳐주는 것이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완벽하지는 않지만 다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구조를 이해하는 것이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출처: 변승우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다.’ pp.462~463
저는 계시록 설교를 들으며, 무척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가장 큰 충격은 절대로 해석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계시록이 해석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해석이 강력한 성경적 지지기반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경의 구조입니다. 이전까지 계시록 해석이라고 하면 황충은 무엇이냐와 같이 상징에 대한 해석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계시록은 앞서 언급한 성경 문맥이나, 본문에 흐르는 사상의 흐름을 통해 해석할 수 없기 때문에 말세지말이 되어 상징의 의미가 직접 드러나기전까지는 해석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구조라는 측면에서 접근하니 계시록이 해석이 되었습니다. 계시록의 구조에서 중요한 것은 계시록이 시간 순서대로 기록되었다는 것입니다. 간혹 뒤죽박죽처럼 보이는 것은 ‘삽입’ 때문입니다. 이러한 기반 위에서 계시록 해석을 접하게 되니 그동안 안개와 같이 가려져 있던 모든 것이 명쾌하게 풀렸습니다. 최근의 은사에 대한 설교에서도 “지혜의 말씀”이 무엇인지 “지식의 말씀”이 무엇인지 다른 성경 구절에서 단서를 찾을 수 없기 때문에 해석이 안된다고만 생각했는데 ‘은사는 중요도 순서대로 기록되었다’는 통전성에 기반한 기본 구조를 통해서 명확하게 해석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교회의 성경 해석을 그림으로 제시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최근의 놀라운 말씀 해석을 들으며, 이것이 죽은자가 살아나는 것보다 더 큰 기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죽은자가 살아나는 것보다 더 큰 기적을 매주 경험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님의 은혜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자가 되기로 결단합니다.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교회와 담임목사님을 하나님께서 보내주심에 감사드리고, 주님께서 더욱더 풍성한 은혜를 교회가운데 내려주셔서, 이러한 성경진리가 4단계 5단계로 더욱더 돌파해 나가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후발 주자들을 세워주시고, 엘리야의 칠갑절의 영감을 받은 엘리사와 같은 자들이 일어나길 기도합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개혁되고 하나님의 진리와 영광이 세계 만방에 드러나게 되길 기도합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