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름 밤의 선물
(본명을 모르는 바우 형을 추모하며)
최 광 식
칠흑같이 캄캄한 그믐날밤 마당발 친구 도움을 받아, 셋이 한통씩을 따와서 둘러앉았다. 오래전 버려진 토담집이여서인지 쾌쾌한 냄새가 나기는 했어도, 모서리에 서있는 호롱불을 밝히니 그런대로 아늑한 장소가 되었다. 우리는 고사리 손날을 펴서, 장날이면 늘 구경했던 당수 8단 약장수 흉내를 내며, 돌아가며 어린수박을 깨뜨렸다. 한 움큼씩 집어 입에 막 넣었을 때였다. ‘얘들아, 익기는 익었냐, 달기는 하냐?’ 반쪽 창호지 여닫이문이 살짝 열리며 속삭이듯 들려온 낮은 목소리에, 셋이서 얼마나 놀랬는지 모른다. 아직 풋내 나는 하얀 속살을 입에 넣고서는, 삼키지도 뱉지도 못한 체, 영락없는 새장 안에 갇힌 참새요, 고양이 앞에 생쥐 신세들이 되고 말았다. 방금 전 기합을 넣어가며 수박을 깨뜨린 기세마저, 어둠보다 더 짙은 정적 속으로 사라지고, 처분만 기다리는 억겹의 시간이 흐르고 … .
슬며시 곁으로 다가온 그분의 목소리만 다시 들려왔다. ‘얘들아, 괜찮아. 얼마나 먹고 싶었냐, 십여 일 후, 이달 말쯤엔 잘 익어서 맛있을 거야.’ ‘그때 손등으로 톡톡 쳐봐서, 통통하고 맑은 소리가 나거든 잘 익었다는 신호야, 얼마든지 따먹어 ….’ 여전히 꿈쩍 않고 눈만 껌벅이는 얼어붙은 떡두꺼비들 …. 괜찮아, 괜찮다니까 그러네 소리가 두어 번 들리는가 싶더니, 느닷없이 울먹인 듯 한소리로 변해 들려왔다. ‘얘들아 실은 오늘 너희들에게 부탁이 하나 있다. 들어 줄 거지! 앞으로 형이라고 불러주면 안 되겄냐? 바우 형, 바우 형이라고 불러주기만 하면 돼!’ 애원에 가까운 사정을 들어야했다. 영문을 모르는 우리는 여태 입속에 든 것을 꿀꺽 삼키고,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그래요, ‘바우 형’이라고 더듬거렸었다.
아버지는 초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부터, 내 손에 송아지 고삐를 쥐어 주셨다. 한적한 시골이라, 지금처럼 무슨 학원이 있는 것도 아니고, 유일한 장난감인 대나무 도롱테(굴렁쇠)로 마당을 몇 바퀴 돌고나면, 올봄에 새 식구가 된 송아지와 많은 시간을 보냈었다. 삶은 고구마 두어개를 호주머니에 넣고, 송아지를 앞세워 둑방 길을 5리 정도 걸어가면 넓은 강변이 나왔다. 푸른 풀밭에 고삐를 매어 놓고, 친구들과 메뚜기를 잡아 강아지풀에 꿰어, 누가 많이 잡았나 견주어도보고, 방아깨비를 잡아 방아 찧기 시합을 벌이곤 하였었다. 그러다가 날이 무더워지면 송아지와 함께 강으로 들어가 놀다 나와서, 해거름에 풀을 배부르게 뜯기고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 방학 중 가장 큰 일과였다. 하루는 마당발 친구가 내게 ‘광식아, 여기서는 안 보이는 종술이 집 뒤에 수박밭이 있는데 내일 밤 서리하러 가자’고 꾀였다. 나는 그러다 걸리면 큰일 날 텐데 하면서도, 빈집도 봐놨고, 나와 절친했던 종술이도 함께 하기로 했으니 염려 말라는 말에 그러자고하며 쉽게 한 물에 쓸린 물고기가 되고 말았다.
하여튼 그 일이 있고난 후 며칠간은 쫒기는 꿈, 가위눌림으로 식은땀을 흘린 것 말고는 일과는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별일이라면, 수박밭쪽으로 가까이 가면 반대편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것과, 더 빠른 걸음걸이로 지나가는 것 정도였다. 바우 형과의 관계도 천천히 친밀해지면서 바우 형과의 관계도 거리감이나 서먹함을 느낄 수 없었을 때 쯤 이었다. 호남 형 얼굴에 이름처럼 다부진 체격을 지닌 형은 특히 잠수를 잘해서 맨손으로 메기, 붕어, 잉어등 물고기를 잘 잡는 남다른 재주를 지니고 있었다. 형이 물고기를 잡아 손을 들어 올릴 때마다, 우리는 바우 형이 또 잡았다고 소리 지르며 즐거워했었다. 그러데 이상한 것은, 가끔 형은 잠수를 멈추고 한참 동안 둑방 길을 주시하곤 하는 것이었다. 그 길을 바라보면 자전거로 통학하는 중고등학생들 뿐인데,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형은 한참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열 살 차이나는 내 큰형보다 한두 살이 더 많았던 바우 형, 내가 그 분, 그 때 나이가 되고서 어렴풋이 그 사연을 짐작 할 수 있게 되었다.
본 마을과 뚝 떨어져 행정구역이 다른 아랫마을과 가까운 외딴집에서, 일찍이 홀로 모시던 어머니마저 일찍 여의고 일가친척, 형제, 누이 하나 찾을 수 없는 외톨이가 된 형. 말붙이고 싶은 또래 친구들은 학교로, 객지로 다 떠나고 아무도 없는데, 마침 우리가 손님으로 그 분 수박밭을 찾아 준 셈이었다. 애원하다 시피 했던 ‘얘들아 실은 오늘 너희들에게 부탁이 하나 있다. 들어 줄 거지! 앞으로 형이라고 불러주면 안 되겄냐? 바우 형, 바우 형이라고 불러주기만 하면 돼!’ 그 말이 쉽게 이해되기 시작했다. 아울러 덤으로 관용(寬容)이라는 덕목도 체득하는 계기가 되었다. 어느 하굣길에 우리 집 감나무에 돌팔매질을 하다 유리창을 깨뜨리고 도망치려던 애를 불러 세웠다. 나는 이름도 묻지 않고서 ‘애야, 이 단감은 가을에 누렇게 익거든, 그 때 마음껏 따먹어, 괜찮아, 알았지.’ 이해했다는 듯 새파래진 얼굴로 고개만 끄덕거리며 집으로 갔다. 그 해 가을에 그 이름 모르는 동생이 우리 감나무에 올라가 있었다. 모른 체 하려다 숨죽이고 있는 그에게 나는 ‘괜찮아, 네 오른쪽에 있는 것이 잘 익었다야! 그런데 감나무는 가지가 약하니 조심해라.’고 말해 주고 자리를 비켜 주었다. 이 정도면 그 때 교육 잘 받았다고 바우 형한테 자랑해도 괜찮을 일인가 했었는데 ….
광주 근교로 이사 가서 묘목사업을 한다던 바우 형이 얼마 전 타계하셨단 소식을 지인을 통해 들었다. 어찌 속이 상하던지 자책을 하면서 그 날은 하루를 그냥 걸렀다. 나는 유난히 과채 가운데 가장 크고 맛있는 수박을 무척 좋아 한다. 수박 철이 돌아올 때마다, 자연스레 함께 떠올라 생각나는 형, 형을 생각만 해도 떠오르는 수박, 손등으로 두드려서 통통 맑은 소리가나는 잘 익은 놈으로 선물하고 싶었는데 여느 사람들처럼 또 세월 탓을 해야 하는가….
모두다 가난으로 어려웠던 시절, 가난보다 더 힘든 것이 외로움이라고 바우 형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는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한 기꺼이 우리에게 관용을 베풀었고, 우리는 그를 형이라고 부르며 따라준 셈이 되었다. 한 여름 밤 평생 간직해온 소중한 덕목을 가르쳐주신 고인께, 이 글을 통해 감사드린다. 아울러 하늘나라에서는 부디 외로움이 없으시기를 빌면서 성경 말씀 한 구절로 끝을 맺는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빌립보서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