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장 끝없는 내란과 음모
가장 득의양양해 한 사람은 철시 매초풍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그녀는 마차 안에서 노로의 곁에 앉아 잠을 자는 척하였다. 마차가 흔들릴
때마다 그녀의 보드라운 몸은 자연스레 노로의 쪽으로 기울어졌다. 때로는 그녀의 아름다운
머리칼이 노로의의 얼굴을 간지럽혔고 그때마다 여인의 향긋한 체취를 풍기곤 하였다.
그 황폐한 집은 그럭저럭 쓸 만한 집이었는데 초천의가 사람들을 데리고 가서 세 칸만 비가
새지 않도록 남겨두고 일부러 못쓰게 만들었던 것이다. 또 집 안의 방마다 땅굴을 만들어
주보가 담긴 상자가 어느 방에 있든지 손쉽게 손쓸 수 있게 하였다.
그들은 땅굴에서 나와 한대웅 패들을 견제한 다음 그 틈을 타서 나무상자를 훔쳐가려 하였
다. 그런데 마침 악처후와 구처기가 뛰어들어 한대웅 등을 뜨락으로 끌어내었던 것이다. 그
리하여 매초풍은 나무상자를 지키던 육대 제자를 죽이고 쉽사리 나무상자들을 훔쳐갈 수 있
었으며, 또 이것을 이용해 개방과 전진교 사이에 이간을 시켜 싸움을 하게 만들었다.
개방과 전진교 사람들이 옥신각신 싸우고 있을 때 오혈궁 사람들은 벌써 사십여 리 밖으로
도망하였다.
휘뿜하니 새벽빛이 마차 안으로 스며들자 매초풍의 얼굴에는 발그레한 노을빛이 비쳐 더욱
아름다워 보였다.
매초풍은 태호에서 있은 일을 회상하였다. 그때 여소교가 선창에서 진현풍을 유혹하던 정경
이 떠올랐다. 그녀는 그 생각을 더듬으면서 천천히 옷깃을 젖히고 가슴을 풀어헤쳤다.
여인의 앞가슴이 노로의의 눈앞에 나타나자 그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매초풍을 보지 않
으려고 하였으나 두 눈이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마찬가지의 부드럽고 횐 살결이라고 하여
도 못생긴 여인과 미녀의 경우는 아주 다른 것이다. 미녀의 젖가슴은 각별히 사람들을 자극
하는 법이다. 노로의가 이를 악물고 속생각을 하였다.
'제기랄, 매초풍은 정말 너무나도 아름다워. 내가 스무 살만 젊었어도. 아니 열 살만 젊었어
도 한번 덤벼들어 보겠는걸. 하지만 이젠 오혈궁의 못난 계집애들마저 날 본 척 만 척하지.'
그는 워낙 자기의 체신을 생각하여 스스로 여인을 탐하지 않고 여인이 자기를 따르게 되기
를 기다리는 그런 성격의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너무나 늙었고 온 얼굴에 주름살투
성이여서 만일 자기를 따르는 여인이 있다손 치더라도 아주 큰 결심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되
었다.
그런데 지금 곁에 너무도 아름다운 미인이 있고 풍만한 젖가슴까지 자기한테 헤쳐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는 큰 한숨을 내쉬면서 더 생각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매초풍한테
자기가 그녀를 가만히 훔쳐본 것이 들켰을 수도 있겠다 싶어 얼른 눈을 감고 자는 척했다.
날이 환히 밝자 다섯 대의 마차가 관목 숲 속에 들어와 멈추었다. 노로의는 낮엔 쉬고 밤에
길을 가는 것으로 개방 제자들에게 발견되지 않도록 조심하였다.
노로의는 나무가 듬성듬성 서 있는 송림 속에 들어와 청신한 공기를 마시자 각별히 몸에 생
기가 돌고 상쾌해졌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안으로 걸어 들어가다 보니 마차와 아주 멀어졌
다. 노로의는 맑은 물이 졸졸 흐르는 시냇가에 앉아 문득 물 속을 들여다보았다. 물 속에는
한 늙은이의 볼품없는 얼굴이 내비쳤다. 그는 몹시 기분이 언짢고 서글퍼졌다.
그때 갑자기 등뒤에서 가벼운 발자국 소리가 났다. 몸을 움직이지 않았지만 잔뜩 긴장한 노
로의는 잠시 후 익숙한 향기를 맡았다. 그는 마차 안에서 그의 코끝을 간지럽혔던 바로 그
향기라는 걸 알았다. 그의 가슴이 설레기 시작했다.
발자국 소리가 멎으면서 노로의는 물에 비친 아름다운 얼굴을 보았다. 그 얼굴에는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그런 미소까지 담고 있었다.
매초풍이 노로의 가까이 다가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큰사형, 뭘 그리 생각하고 계셔요?"
노로의는 사방을 한번 둘러보았다.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그의 가슴은 젊은이
들처럼 세차게 뛰었다.
"아냐, 아무것도 아냐……."
그는 속으로 자기는 이젠 쓸모 없는 놈이라고 한탄하면서 말을 이었다.
"하룻밤새 길을 다그치느라 피로했겠는데 왜 가서 쉬질 않나?"
"난 지금 생각이 많아 잠을 이룰 수가 없어요."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난 큰사형님이 이런 연세에도 가족이 없는 걸 생각하고 있었어요."
"나 같은 사내한테 어느 여인이 시집오려 하겠나?"
"큰사형님은 세상에 소문난 영웅 호한인데 얼마나 많은 여인들이 시집오려 할까요?"
매초풍이 눈웃음을 치면서 자연스럽게 그의 팔짱을 끼며 앉았다. 노로의가 흐뭇해 하며 대
꾸했다.
"나도 젊었을 때야 오혈궁의 처녀들이 모두 나한테 시집오겠다고 야단이었지. 허 참, 그땐
참 살맛 났었는데……."
"휴, 그때 제가 오혈궁에 있지 않았으니 그렇지 오혈궁에 있었더라면……."
매초풍이 노로의를 힐끗 쳐다보면서 말을 이었다.
"난 영웅 호한을 제일 좋아해요."
노로의의 팔꿈치가 저도 모르게 매초풍의 젖무덤에 닿자 그는 깜짝 놀라 몸을 움츠렸다. 그
는 용기를 내어 얼굴을 그녀한테로 돌리면서 물었다.
"임잔 날 영웅 호한으로 생각하나?"
매초풍은 그가 낚시에 걸려들자 노로의의 품에 살며시 안기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였다.
"큰사형, 난…… 난 정말 당신을 좋아해요. 헌데 당신은 날 좋아하지 않는군요."
노로의는 미인이 자기 품에 뛰어들자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매초풍의 입술과 볼에
마구 입을 맞춰 대면서 아주 자연스레 손으로 여자의 허리띠를 아주 익숙한 솜씨로 풀어헤
쳤다.
두 사람은 송림 속에서 한차례 격렬하게 정사를 치렀다. 매초풍은 노로의가 약간 경계심을
갖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고 소녀공을 쓰지 않았다. 만에 하나라도 신중하지 못해 여지껏 애
써 온 보람을 일순간에 수포로 돌아가게 만들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노로의는 만족감을 느끼며 풀밭에 드러누운 채 그대로 잠이 들었다. 매초풍은 옷으로 아름
다운 몸매를 살짝 가린 채 옆에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노로의가 눈을 떴다. 그는 매초풍이 아직 옷도 입지 않은 것을 보자 탐욕스런 눈을
이글거리며 또다시 달려들었다. 노로의는 이번엔 모든 경계심을 깡그리 털어 버리고 아주
방종하게 나왔다. 그의 변화를 읽은 매초풍은 소녀공을 썼다.
노로의는 즉시 진기가 치솟는 노도처럼 자기의 하체에서 콸콸 흘러 나가는 것을 느끼고 그
것을 제지하려고 애썼으나 그에 못지않은 힘으로 온몸을 휘감는 쾌락에 어찌하는 수가 없었
다. 매초풍은 아무런 연민과 동정심도 없이 소녀공을 힘껏 써서 반시진도 안 되는 사이에
노로의가 반생 동안 쌓아 올린 원양진기를 칠팔 할이나 빨아들였다.
매초풍은 일이 끝나자 훌쩍 일어나 알몸으로 시냇물에 들어섰다. 그녀는 손으로 물결을 갈
겼다. 그러자 즉시 그 힘에 놀라 죽은 고기 세 마리가 물 위로 떠올랐다.
매초풍의 입가에 만족스런 미소가 번졌다.
'이처럼 계속 나아간다면 이 년도 못 되어 동사, 서독, 남제, 북개 이 으뜸가는 네 사람의
고수들과 어깨를 겨눌 수 있을 거다.'
기진맥진해 축 늘어져 있던 노로의가 천천히 정신을 차리더니 일어나 앉았다. 그는 자기가
알몸인 것을 발견하고는 얼른 옷을 입었다. 그는 훌쩍 일어나려 했으나 다시 넘어지고 말았
다.
매초풍이 다가와서 부축하며 말하였다.
"큰사형, 조심하세요. 그러다가 상하시겠네요."
노로의가 속으로 생각을 추스렸다.
'이상한 일이군. 내 몸동작이 왜 이처럼 둔해졌지?'
그는 방금 매초풍과 운우지정을 나누면서 진기가 걷잡을 수 없이 쏟아져 나가던 것이 생각
났다. 그러자 그는 매초풍을 힘껏 떠밀면서 물었다.
"매 사매, 임자가 내게 무슨 사공(邪功)을 사용한 게 아니냐?"
매초풍이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
"큰사형님, 정신 나간 소리를 하고 계시네요. 제가 무슨 사공을 알고 있겠어요. 아마 착각이
드신 게로군요."
강호에서 반생을 보내면서 산전수전 다 겪는 노로의인지라 감언이설에 쉽사리 속아넘어갈
리가 없었다.
"못된 년 같으니. 네 년이 감히 사공으로 이 늙은 것의 진기를 빨아들이다니. 죽고 싶어 환
장을 했구나!"
노로의는 대로하여 곧바로 오혈장법의 '개산파석(開山破石)' 초수를 쓰며 장을 날리기 시작
했다.
매초풍은 그가 공력의 삼 할 정도밖에 남아 있지 않은 것을 알고 있는지라 내력을 쓰지 않
고 암굴 속에서 도소정한테서 배운 오혈장법을 이기는 초수로 맞섰다. 그녀는 몸을 뒤로 젖
히고 왼손을 내밀어 그의 장을 막으면서 오른팔로 그의 팔꿈치를 올려쳤다.
노로의는 팔꿈치가 부러져 나가는 듯한 아픔을 느끼고 비명을 질렀다. 매초풍이 살짝 떼어
밀었는데도 그는 일여덟 발자국이나 밀려갔다. 그는 자기의 내공이 태반이나 줄어든 것을
알아차리고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노로의는 실패를 무릅쓰고 또다시 달려들면서 장으로 매초풍의 왼쪽 태양혈을 후려
갈겼다. 매초풍이 뒤로 몸을 비키면서 방장으로 그의 오른팔을 막았다. 노로의는 매초풍이
그의 팔을 잡고 내리누르는 바람에 뒤로 나자빠지고 말았다.
매초풍이 냉랭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오혈장법이 이처럼 쓸모 없게 되었으니 오혈궁 놈들은 강호에서 점차 견디기 어려울 거
야."
노로의가 일어나 앉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임잔…… 임잔 오혈장법을 이기는 초수를 어떻게 알게 되었나?"
"오혈궁에는 궁주만이 이 초수를 알게 한다는 규칙이 있다고 하던데 그렇지요? 큰사형, 제
말이 옳은가요?"
노로의가 놀란 마음으로 생각했다.
'도 궁주가 당년에 궁주 자리를 아무한테도 물려주지 않았으므로 묘상이 틈을 보아 도소정
을 감금하고 궁주가 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저 년이 암암리에 도 궁주가 세워 놓은 궁주
란 말인가?'
매초풍은 그가 의심하고 있는 것을 알고는 입을 열었다.
"비록 나는 오혈궁에 있지는 않았지만 오혈궁에서 발생한 모든 일을 다 알고 있어요. 노로
의, 당신은 오혈궁에 대하여 네 가지 죄를 지었단 말이에요."
노로의가 정신을 가다듬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못된 년 같으니. 내가 돈을 테니 어서 말해 보아라!"
"도 궁주가 갑자기 사망하자 묘상은 궁주의 보좌를 차지할 생각이 났지요. 당신은 이 일을
다 알면서도 제지하지 않았으니 이게 첫번째 죄이지요. 당신은 묘상이 궁주의 자리를 찬탈
하는 것을 도와주었는데 이게 두 번째 죄란 말입니다. 당신은 또 묘상과 함께 궁주의 딸 도
소정을 해쳤는데 이게 세 번째 죄예요. 노로의, 그래 죄를 시인하나요?"
"임……임잔 어떻게…… 이 일을 알고 있나?"
노로의는 벌벌 떨면서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식은땀을 훔칠 생각도 못했다.
매초풍이 코방귀를 한번 뀌더니 계속 말을 이었다.
"네 번째 죄상은 당신이 본 궁주한테 폭행을 가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람을 죽여 버리는 것
으로써 증거를 없애 버리려 한 것이지요."
노로의가 깜짝 놀라서 더듬거리며 물었다.
"당……당신이 과연 궁……궁주십니까?"
"난 궁주가 아니에요. 그래 또 누가 감히 궁주로 자처할 수 있단 말이에요?"
매초풍은 노로의를 쏘아보고 나서 준엄하게 말했다.
"노로의, 네 놈이 네 가지 죄를 지었으니 용서받을 수 없으며 죽어야 마땅하다!"
노로의는 묘상과 짜고들어 오혈궁 궁주의 자리를 찬탈한 일을 아무도 모르는 줄 알고 있었
다. 오늘 매초풍이 그 내막을 손금처럼 환히 알고 있자 그는 겁이 나서 혼백이 다 달아날
지경이었다. 노로의는 땅에 풀썩 무릎을 꺾으며 입을 열었다.
"제가 지은 죄는 죽어 마땅하오니……, 궁……궁주님께서 목숨을 살려 주십시오."
매초풍은 속으로는 코웃음을 쳤지만 정색을 하고 말했다.
"본 궁주가 네 놈의 진기를 좀 빌려 쓰면 안 된단 말이냐?"
"저의 온몸은 궁주의 것입니다. 저는 궁주를 위해서라면 칼산에도 오르고 불바다에도 뛰어
들겠습니다."
"본시 내가 나의 공력으로 널 죽이는 것쯤은 여반장이라는 걸 알아야 해, 안 그래?"
"그렇지요. 그렇고말고요!"
"하지만 네가 도 궁주를 따라 여러 해 일을 했고 또 나이가 많은 걸 감안하여 본 궁주
는…… 에, 차마 널 죽일 수 없는 거야."
노로의는 살아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자 감격하여 눈물 콧물을 흘리면서 말하였다.
"매 궁주께서는 절 다시 살아나게 한 부모님이십니다. 저는 감격을 금할 수 없습니다."
"네가 감격을 금할 수 없다고 하면 내가 그 말을 믿을 줄 아느냐. 죽지 않으려고 그따위 말
을 하는 거지. 어서 눈물을 닦으란 말이다."
매초풍은 그의 아첨하는 말을 듣자 비록 내심의 말은 아닐지라도 기분은 좋았다.
"당신이 나한테 아직 쓸모가 있으므로 죽이지는 않겠어요. 하지만 당신이 이 일을 조금이라
도 누설한다면……."
매초풍은 장으로 시냇물을 내리쳤다. 그러자 굉장한 소리를 내며 물이 사처로 날리면서 죽
은 물고기 몇 마리가 떠올랐다.
"본 궁주가 이미 격산타우(隔山打牛) 초수와 벽공장(壁空掌)을 익혔으므로 나의 최심장은 이
전보다 더욱 무서운 거예요. 나의 뜻을 알 만하겠지요?"
"알 만합니다. 제가 만일 비밀을 조금이라도 누설한다면 벼락을 맞아 죽겠습니다."
"그 대답에 난 만족해요. 허 참, 묘상이 뭐가 좋아 당신은 그런 놈을 따른단 말이에요?"
매초풍은 말문을 딴 데로 돌려 그의 의중을 떠보았다.
"전 그 놈이 심지가 바르지 못하다는 걸 벌써 알고 있었지요. 하지만 칼자루를 잡고 있는
놈한테 제가 무슨 수가 있겠습니까?"
"음, 그런 일이 있었나요? 어서 말해 봐요."
노로의가 잠시 망설이자 매초풍이 매서운 눈초리로 쏘아보았다. 그는 그녀의 심상치 않은
눈초리에 황급히 입을 열었다.
"사실대로 말씀드리지요. 당년에 소궁주 도소정도 미인이었지만 소궁주의 시중을 드는 하녀
무청의(武靑衣)도 그녀에 비하여 짝지지 않는 미인이었답니다. 저도 그때는 혈기가 방장한
장년이었던지라 도소정은 비록 선녀처럼 아름다웠으나 감히 건드리지 못하고 무청의를 바싹
따랐지요."
"당신도 그처럼 풍류를 좋아하는 사내였군요."
노로의가 약간 얼굴을 붉혔다.
"무청의도 절 맘에 들어하여 우린 은밀히 사랑을 속삭였지요. 그런데 뜻밖에 이 일이 묘 궁
주…… 아니 묘상한테 들킬 줄 어찌 알았겠습니까? 그자가 절 위협하면서 자기 말을 고분고
분 듣지 않으면 도소정한테 일러 바치겠노라고 을러대더군요."
"남녀가 서로 좋아하는 건 있을 수 있는 일이고 오혈궁에서도 남녀 제자간의 거래를 금지하
는 것도 아닌데 두려워할 게 뭔가요?"
"도소정은 무청의를 따르는 사내를 친히 죽인 일이 있습니다. 그녀는 그 뒤로 자기의 남제
자들이 무청의와 절대 관계를 가지지 못하게 하였지요. 그 당시 전 영문을 몰랐는데 그 뒤
도소정이 묘상한테 감금당한 뒤에야 그녀가 사내를 좋아하지 않고 같은 여색을 각별히 좋아
한다는 걸 알게 되었지요."
매초풍이 얼떠름해진 기색을 지었다.
'도소정이 음양이 전도된 여인 같아 보이지는 않던데?'
노로의가 말을 이었다.
"제가 묘상의 비밀을 알게 되지 못했던들 도소정이라는 이 선녀 같은 여자가 기실은 괴물이
었다는 것을 도저히 믿지 않았을 것입니다."
"엉? 묘상한테 또 무슨 비밀이 있나요?"
"매 궁주님께서는 묘상이 거세한 사람인 줄 이미 알고 있지 않나요?"
그 말에 매초풍이 머리를 끄덕였다.
"묘상의 난봉기는 아마 소요공자보다도 더 했을 겁니다."
"그래서 엽첩비란 여인이 자정신침을 들고 오혈궁에 찾아가 묘상과 결판을 내려고 드는 바
람에 도소정이 사람들을 거느리고 그 여인을 쫓아내는 일까지 생겼다지요."
"매 궁주께서는 그 일까지도 아시는군요."
"그래요. 아마 당신은 모든 걸 솔직하게 말해야만 할 거예요."
내심 화들짝 놀란 노로의는 속였다가는 큰일 나겠다고 생각했다.
"묘상은 도소정과 결혼하게 되면 아주 행복하게 될 줄로만 알았던 겁니다. 하지만 유감스럽
게도 그는 도소정이 여색만 좋아하는 괴물일 줄은 몰랐지요. 결혼한 그날 밤에 묘상은 도소
정한테 칼로 거세를 당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보름 동안이나 묘상은 집에서 상처를 치료하
고 있었는데 제자들은 그가 도소정의 미모에 반해서 밤낮 그 짓을 하는가 보다고 생각했더
랬지요. 참,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우스운 일인지……."
매초풍이 도소정의 행위를 괴이쩍게 생각하며 물었다.
"사내를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묘상한테 시집갈 건 뭔가요?"
"묘상이 거세당한 처지이면서도 왜 절정공자의 미혼처인 유정아를 빼앗아다가 일곱째 부인
으로 맞아들였을까요? 그걸 생각하면 도소정의 심사를 알 수 있지요."
"그렇지, 묘상이 명성이 자자한 탁운백의 미혼처를 빼앗아 간 건 자기가 결코 병신이 아니
라 정력이 왕성한 사내라는 걸 온 세상에 알리자는 거겠지요. 마찬가지로 도소정이 묘상한
테 시집간 건 사람들의 이목을 가려 자기의 추악한 일이 남한테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
지요."
"매 궁주께선 이제 묘상이 무엇 때문에 자기의 처를 그처럼 가혹하게 대처하게 되었는지를
아시겠지요. 휴, 천하의 일이란 다 인과관계가 있는 거지요."
얘기를 다 듣고 난 매초풍은 참지 못하고 키드득 웃고 말았다.
"당신은 마치 큰 섭리나 알고 있는 스님처럼 꾸며대는군요. 어서 가 보세요. 이젠 시간도 제
법 지났으니 이자의네들이 의심을 할지 모르겠어요."
노로의는 매초풍이 비웃자 내심 비감한 생각이 들었다.
'일이란 이렇게 손쉽게 뒤집히는 것인가? 이젠 매초풍이 나와 마음껏 풍류를 즐길 수 있는
매 사매가 아니로구나.'
두 사람은 천천히 돌아오기 시작하였다. 매초풍이 입을 열었다.
"마차에 돌아간 다음부터는 여전히 큰사형 행세를 하세요. 당신은 내 앞에서 절대로 굽실거
려서는 안 돼요."
"명심하겠습니다!"
"오혈궁에 돌아간 뒤 당신은 수시로 나의 명령대로 해야 하며 내가 다시 궁주의 자리를 빼
앗는 걸 도와야 해요."
"묘상이 중상을 입었으므로 그자를 죽이는 것쯤이야 여반이지요. 매 궁주님에선 시름을 놓
으십시오."
"내가 근심하는 건 묘상이 아니라 초천의와 여혈의 두 사형이에요."
"초천의는 비록 음험한 자이기는 하지만 오혈궁에 대해서는 충성스러운 사람이지요. 만일
매 궁주께서 진정한 궁주인 것을 알게 된다면 절대 간섭하지 않을 것입니다. 가장 시끄러운
자는 여혈의인데 그자는 묘상이 친히 발굴시킨 자이고 무공도 대단하니 방법을 잘 강구하여
대적해야 할 겁니다."
"노로의, 오혈궁에서는 여혈의한테 다른 무공을 가르쳐 준 신비한 사부님이 누구인가 하는
것을 아는 사람이 없나요?"
"아직 모르고 있지요. 하지만 그자의 사부님은 꼭 고수일 겁니다. 그자가 일년도 채 안 되는
사이에 무공이 대단히 늘어 묘상과 어슷비슷한 수준에 이른 것만을 보아도 똑똑히 알 수 있
지요."
노로의는 약간 생각을 더듬고 나서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매 궁주께서는 근심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여혈의가 보름 전에 오혈궁을 떠나 고향
으로 갔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틈을 타서 묘상을 죽여 버리고 아씨께서 궁주의 지위를
이어받은 뒤이면 여혈의가 돌아온다고 하더라도 대세가 이미 결정되어 그로서도 어찌는 수
가 없을 겁니다."
이윽고 그들은 마차로 돌아왔다. 매초풍은 여전히 노로의를 큰사형으로 대접하였고 노로의
도 제법 큰사형의 노릇을 틀지게 해 초천의, 이자의 등은 아무 눈치도 채지 못하였다.
저녁 무렵 오혈궁 사람들은 다시 길을 떠났다.
그날로 그들은 오혈궁의 높은 산밑에 당도하였다. 노로의가 제자들을 독촉하여 열여섯 상자
의 주보들을 무사하게 오혈궁까지 날라갔다.
오혈궁 궁주 묘상은 병상에 누운 채 여러 사람들을 만나보고 공을 세운 사람들마다 상을 내
리고 매초풍에 대해서는 각별히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매초풍은 뭇사람들과 작별한 뒤 자기의 숙소로 돌아왔다. 갑자기 누구인가가 뒤에서 불렀다.
"언니!"
머리를 돌려 보니 소궁주 엽청청인지라 매초풍이 웃는 얼굴로 말하였다.
"동생, 무슨 일이 있나?"
엽청청이 곁에 다가와 망설이는 투로 말하였다.
"언니, 난…… 한사람에 대하여 알아보고 싶어서 그래요."
"그래 누구를 알아보려나?"
엽청청이 머리를 수그린 채 앵두 같은 입술을 슬며시 깨물더니 입을 열었다.
"하…… 하 공자에 대하여 알고 싶어서 그래요."
"하 공자라니 어느 하 공자 말이야?"
"철선서생 말이에요."
"철선서생 하종 말이야? 동생이 그 사람을 알아서는 뭘 하려구? 아, 알 만해. 동생이 그 사
람한테 반한 모양이군."
엽청청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언니 함부로 말씀하지 말아요. 난 그런 뜻이 아니에요."
매초풍이 재미있다는 듯이 웃어대었다.
"이런 급해 하는 꼴 좀 봐. 언닌 동생과 농담한 것뿐인데. 그래 그 사람의 무얼 알고 싶어서
그래?"
"주보를 호송하여 오는 사람들 가운데 하 공자가 있었다고 그러더군요. 언니네들은 무서운
싸움을 치렀는데 혹여 그분이 상하지는 않았나요?"
매초풍이 눈알을 굴리더니 한탄하는 듯한 어조로 말하였다.
"웬일인지 그 철선서생이 개방 사람들 편에 서 있더군. 그때 궁노를 마구 쏘아댔는데, 휴,
그 사람은 살을 세 대나 맞았어. 그런데 그 살촉에는 극독을 발라 뒀기 때문에 아마 벌써
죽었을 거야……."
엽청청은 그 말에 대경실색하며 낯빛을 흐리더니 떨리는 소리로 말하였다.
"그 사람…… 그 사람……."
그녀는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그 하종은 우리 오혈궁과는 철천지 원수여서 죽어 마땅한데 동생은 왜 그런 사람 때문에
우나?"
"하 공자, 난…… 당신한테 미안해요."
엽청청은 이렇게 혼자 중얼거리더니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통곡을 하였다.
매초풍은 엽청청이 이처럼 슬퍼할 줄은 몰랐던지라 농담이 지나쳤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녀는 엽청청을 끌어안으며 말하였다.
"됐어, 울지 말어. 하종은 안 죽어."
"독전(毒箭)에 피가 묻기만 하면 목구멍이 졸아붙는데요. 그분은…… 분명 죽었을 거예요."
"그 사람은 안 죽어."
매초풍이 웃으며 말하자 엽청청은 눈물 어린 얼굴로 그녀를 건너다보았다.
"그 사람이 살을 맞고도 자유롭게 몸을 움직이니까 우린 모두 이상하게 생각했었지. 후에
알아보니까 철선서생은 장삼 속에 호신연갑(護身軟甲)을 입어 칼과 창도 들어가지 않는다는
거야."
그러자 엽청청의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런 걸 제가 왜 몰랐을까요?"
"이런 멍청이 같으니. 네가 그와 몇 번이나 만났다고 그러니. 그 사람이 너한테 털어놓지 않
고 네가 그 사람 의복을 벗겨 보지 않은 다음에야 그걸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이냐?"
엽청청은 그 말을 듣고 부끄러움에 눈물이 가득 묻은 얼굴로 배시시 웃었다.
"언닌 또 허튼소릴 하시네요."
매초풍이 미소 띤 얼굴로 그녀를 부추겼다.
"내가 만일 그 사내를 좋아한다면 난 직접 찾아가서 속마음을 털어놓겠어. 그런데 계집애들
이란 자기가 사내를 좋아하면서도 그걸 남이 알까 봐 두려워 그저 맘속으로 애만 태우거
든."
"언니, 언니가 말씀하시는 계집애들이란 나를 두고 하는 말은 아닐테죠?"
매초풍이 깔깔 소리내어 웃었다.
"이곳에 우리 자매 두 사람밖에 없는데 내가 널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면 누굴 두고 하는
말이겠니?"
엽청청이 눈을 깜빡거리더니 정색을 하였다.
"언닌 오해하고 계셔요. 하 공자는 의로운 사람이어서 위험을 무릅쓰고 절 구해 주었고, 또
저 때문에 우리 아버지 목숨까지 해치지 않고 살려 주었거든요. 저는 그분한테 감격해서 그
럴 뿐 다른 뜻은 없어요."
"다른 뜻이 없다면 얼굴은 왜 빨개지는 거야?"
엽청청은 빨개진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리면서 종알거렸다.
"그런 일이 아니란데두요. 언니, 날 놀리지 마세요!"
"좋아, 내 놀리지 않으마. 하지만 이 언니한테 똑똑히 말해 줘야 해. 동생이 철선 공자한테
반한 게 아니라면 사형 여혈의한테는 반했겠지?"
엽청청은 얼굴이 새하얗게 되더니 세차게 도리질했다.
"아니, 아니에요. 전 그 사람을 좋아하지 않아요!"
"여 사형은 풍채가 늠름한데다가 무공도 대단한데 동생은 왜 그 사람을 좋아하지 않지?"
엽청청은 머리를 숙인 채 속삭이듯 작은 소리로 말하였다.
"전…… 전 그가 두려워요. 어쩐지 그 사람은 좋은 사람 같지 않아요. ……언니, 여 사형이
고향에 돌아가기 전에 아버지한테 혼사 문제를 꺼낸 사실을 아시나요?"
"그래 궁주님께선 대답하셨어?"
엽청청은 눈물을 머금고 머리를 끄덕였다.
"여 사형이 돌아오면 결혼시켜 주겠다고 아버님께서 대답하셨어요."
"그럼 왜 궁주님께 싫다고 말씀드리지 않았니?"
엽청청이 머리를 가로 저으며 대답했다.
"아버지가 중상을 입으셨는데 전 근심을 끼쳐 드리고 싶지 않았어요. 또 여 사형은 절 구해
준 일도 있으니까요……."
매초풍은 비록 차갑고 잔인한 여자이긴 하였지만 엽청청에 대해서는 친자매간의 감정을 갖
고 있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불평을 토로하였다.
"동생, 그렇게 억울한 노릇을 할 게 뭔가? 싫은 사내한테는 시집가지 말아야지."
엽청청이 눈길을 내리깔며 자조적으로 대답했다.
"천하의 여인들이란 모두 부모의 명을 따르기 마련인걸요. 자기가 좋아하건 안하건 상관없
이 말이에요."
"여인도 사람이야. 결코 사내의 노리개가 아니란 말이야. 넌 마땅히 이 언니처럼 처신해야
해.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해야지 사내가 하자는 대로만 해서는 안 되는 거야."
매초풍은 속으로 생각을 가다듬었다.
'엽청청을 오혈궁에 놔두면 내가 묘상을 죽이게 될 때 우리 사이에 감정이 상하게 될 거다.
여혈의가 돌아오면 내가 청청의 일을 가지고 그자를 위협하기 유리하게끔 만드는 게 필요
해. 그럼 그자가 부득불 천산의 마귀할멈을 나한테 찾아주게 될 거다.'
매초풍은 갑자기 밝은 표정을 지었다.
"동생, 나한테 방법이 하나 있는데 동생 마음에 들지 안 들지 모르겠군."
"어서 말씀하세요. 무슨 좋은 방법이 있나요?"
"산에서 내려가 이십 리쯤 되는 곳에 작은 시가지 하나가 있는데 정안성(定安城)이라고 불
러. 그곳에 '취붕객점(聚朋客店)'이란 곳이 있지. 만일 동생한테 담력이 있다면 도망해 가서
그곳에 있는 게 어때?"
"제가 도망치면 아버지에서 근심하실 텐데요. 전 아버님의 몸이……."
"일없어. 우리가 지금 주보들을 훔쳐 왔기에 궁주님께서 아주 기뻐하고 계셔. 그 일에 대해
선 이 언니는 다 방법을 댈 수 있어."
"일시 숨어 있을 수는 있지만 한평생 숨어 있을 수는 없잖아요. 제가 숨어 있는다고 해서
아버님께서 생각을 고칠 리 만무해요. 아버님은 여 사형을 몹시 아끼고 여 사형도 저를 놓
치려 하지 않을 거예요."
"무슨 걱정이 그리도 많니? 동생은 정안성의 취붕객점에 가서 조용히 숨어 있기만 하면 돼.
길면 반년이고 짧으면 한 달 동안이면 충분해. 이 언니가 동생을 데리러 갈 때면 모든 일이
다 순조롭게 처리돼 있을 거야."
"언니는 정말 그렇게 자신이 있나요?"
"이 언니가 언제 동생을 속인 적 있었나? 됐어. 어서 물건들을 챙기러 돌아가라구. 은냥과
값진 주보들을 되도록 많이 갖고 가는 게 좋아."
"언니 말씀을 명심하겠어요. 언니께서 꼭 책임져 주셔야 해요."
"시름을 놓으라니까. 취붕객점에 가면 네 이름을 이청청(李靑靑)으로 바꾸도록 하고 이 언니
가 찾으러 가기 전엔 그 누구도 만나지 말구."
"알겠어요."
엽청청은 될 듯이 기뻐하며 제 방으로 돌아갔다.
그날 밤 매초풍은 오혈궁 사람들이 잠든 틈을 타 엽청청을 산 아래로 내려보냈다. 매초풍은
엽청청이 사라지자 다시 나무상자에 올라 오혈궁에 내렸다.
"어서들 나오너라!"
매초풍이 명령하자 나무 뒤에서 네 제자가 나와 인사를 하였다.
"똑똑히 기억해 둬. 누가 만일 묻거든 소궁주 혼자서 갔다고 말해야지 날 끄집어 넣어서는
재미없을 줄 알란 말이다!"
네 제자는 매초풍이 오혈궁을 위해 큰 공을 세우고 신분도 지난날과는 다른데다가 손가락으
로 대번에 나무에 다섯 개의 구멍을 뚫던 일을 생각하고는 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명심하겠습니다."
매초풍은 네 사람에게 은자 열 냥씩을 찔러 준 뒤 오솔길로 해서 자기의 숙소로 돌아갔다.
매초풍의 앞에 갑자기 검은 그림자 하나가 언뜻거렸다. 자세히 살펴보니 변홍의였다. 몽롱한
달빛 아래 그의 얼굴은 더욱 창백 하여 보였으며 눈에 정기라고는 없고 머리카락은 마구 흐
트러져 실혼낙담(失魂落膽)한 몰골이었다.
매초풍이 이맛살을 잔뜩 찌푸렸다.
"어찌하여 이곳에 있는 건가요?"
그녀에게로 다가온 변홍의는 그녀의 양어깨를 와락 잡았다.
"아씨, 난 당신을 생각하느라 혼났어요."
변홍의의 얼굴을 가까이 대하자 매초풍은 역겨운 생각이 들어 그의 두 손을 홱 밀쳤다.
"난 몹시 지쳤으니 귀찮게 굴지 말아요."
그녀가 옆으로 비켜 지나가려고 하자 변홍의가 다시 막아섰다.
"아씨, 당신은 이젠 날 좋아하지 않는 거죠?"
"비키라니까요! 이젠 내가 본 궁의 사저임을 잊지 말아요. 당신은 날 좀 존중하란 말이에
요!"
변홍의가 이를 악물더니 코방귀를 뀌었다.
"이제 보니 아씨는 날 놀린 셈이었구료. 나의 진기를 다 빨아 들이고 나서는 헌신짝처럼 차
버린다는 말이지? 흥, 그렇게 쉽게는 안 될걸!"
"변홍의, 방자하게 굴지 말아요!"
변홍의는 그 말을 들은 척만 척하고 매초풍을 껴안더니 얼굴에 마구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매초풍은 화가 나서 그를 와락 떠밀면서 소리 질렀다.
"변홍의, 당신이 감히 이런다면 내가 지난날 정분을 다 팽개쳐도 나무라지 말아요!"
변홍의가 잠시 멍하니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뭔가 결심한 듯 성난 어조로 소리쳤다.
"좋아요. 당신은 참 사나운 여자예요! 난…… 난 궁주님한테 가서 고발하고 말해야!"
변홍의가 뒤돌아서자 매초풍이 몸을 훌쩍 날려 변홍의 앞에 와 서면서 물었다.
"변흥의, 당신은 뭘 고발하겠다는 거예요?"
"난 당신이 소궁주를 꾀어 내어 보내고 본 궁의 제자들한테 뇌물을 준 걸 일러바치겠소!"
대경실색한 매초풍이 속궁리를 하였다.
'이 변홍의가 나한테는 큰 우환거리야. 가만히 내버려두어서는 안 되겠구나.'
매초풍은 갑자기 얼굴에 싸늘한 미소를 머금고 그에게로 한발 다가섰다. 그러더니 그녀는
오른손을 갈고리처럼 만들어 가지고 변홍의의 정수리를 끌어 잡으려 하였다. 변홍의가 급히
두 손으로 막으려 하였으나 이제는 무공이 퍽 약해져 당해낼 수가 없었다. 다섯 손가락이
두개골을 뚫고 뇌장 깊숙이 박혔다. 그는 비명 한마디 내지르지 못했다.
매초풍이 손가락에 묻은 피를 닦고 나서 변홍의의 시체를 풀 숲에 감추어 놓았다. 오혈궁에
서는 매일 아침마다 조련을 하면서 사람 수를 점검하게 되는데, 만일 변홍의가 실종된 것이
발견되기만
하면 사처로 수색할 것이 뻔하였다.
매초풍은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노로의의 사가부(邪哥俯)로 바삐 걸음을 옮겼다.
이튿날 오경(五更)이 되자 산마루 위에는 벌써 아침 햇살이 비끼었으나 오혈궁은 여전히 자
욱하니 운무로 덮여 있었다.
묘상은 예전 같으면 그전에 침상에서 일어나 본궁 제자들의 아침 훈련을 순시할 것이겠지만
지금은 중상을 입은 몸이라 아직도 꿈나라에서 헤매고 있었다.
그때 시중을 드는 여제자가 문밖에서 알렸다.
"궁주님, 큰사형님과 사저님께서 만나 뵈려 하옵니다."
침대 곁을 지켜 섰던 다섯째 부인이 급히 문 옆으로 와서 낮은 소리로 말하였다.
"궁주님께선 아직도 주무시고 계신다. 좀 후에 오도록 해라."
"급한 일이 있어 궁주님께 꼭 알려야 한답니다."
다섯째 부인이 살며시 묘상을 깨웠다.
"큰사형과 매 사제가 급한 일로 만나겠답니다."
묘상은 기분이 나쁘지 않았던지라 웃는 얼굴로 말하였다.
"들어오게 하오."
이윽고 노로의와 매초풍 두 사람이 들어오자 묘상이 물었다.
"두 분에서는 무슨 급한 일이 있나?"
매초풍이 침대 곁으로 다가들며 차가운 목소리로 내뱉었다.
"궁주님, 당신은 이제 제자들을 거느리고 강호를 넘나들 수 없게 되었으므로 우리 둘은 지
금 누가 그 자리를 물려받으면 좋겠는가를 상론하는 중이에요."
묘상이 어리벙벙한 기색으로 물었다.
"매초풍, 임잔 지금 농담을 하고 있는 건가?"
매초풍이 방종하게도 묘상의 얼굴을 툭툭 치며 말했다.
"묘상, 그래 내가 농담하고 있는 것 같나요?"
묘상이 깜짝 놀라 노로의를 건너다보면서 소리쳤다.
"로의! 어서 저 년을 붙잡게! 저 년이…… 무례하기 그지없구나!"
그러나 노로의는 자기에 대한 묘상의 커다란 은총을 생각하여 고개를 푹 숙이곤 있었지만
꼼짝하지 않았다.
"너희들이…… 그래 반란을 일으킬 작정이냐?"
다섯째 부인이 달려와 묘상의 앞을 막아서며 매서운 눈길로 매초풍을 쏘아보았다.
"못된 년 같으니! 네 년이 감히 궁주님께 이토록 무례하게 굴수 있단 말이냐? 어서 썩 나가
지 못할까!"
매초풍은 표정이 험악해지더니 갈고리 손으로 다섯째 부인의 정수리를 끌어잡아 방 한 귀퉁
이에 내동댕이쳤다. 매초풍이 손가락에 묻은 피를 이불에 닦으며 차갑게 내뱉었다.
"묘상, 죽고 싶지 않거든 어서 궁주의 신물인 오혈도를 내놓아라!"
묘상이 노로의를 흘겨보며 소리 질렀다.
"임……임잔 그래 저 년이 허튼 짓을 하도록 내버려둘 셈인가?"
노로의가 머리를 숙인 채 대답하였다.
"당신은 아직 모르시는군요. 철시는 이미 본 궁의 무공을 이기는 초수를 알고 있소이다. 그
러니 저분이야말로 오혈궁의 궁주입니다."
그 말에 묘상은 아연실색하였다. 매초풍이 다섯 손가락을 묘상의 정수리에 갖다 대고 을러
댔다.
"그래 오혈도를 안 바칠 셈이냐?"
다섯째 부인이 죽은 비참한 꼴을 본 묘상은 목숨을 구하기 위해 사람을 시켜 밀실에서 오혈
도를 꺼내 오게 했다.
또한 묘상은 매초풍의 협박에 못 이겨 통고문(通告文)을 써서 매초풍이 진정한 궁주라는 것
을 승인하고 자기가 음모를 꾸며 궁주 자리를 빼앗은 변절자라는 것을 오혈궁 문하의 사람
들에게 알리지 않을 수 없었다.
매초풍과 노로의는 묘상을 들것에 담아 가지고 암동(岩洞) 밖으로 나왔다. 영문을 통 모르는
뭇제자들이 달려왔다. 그들은 매초풍의 허리에 오혈도가 있고 매초풍이 묘상에게 통고문을
넘겨 주는 것을 보게 되었다.
묘상은 제자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말하고 나서 친히 통고문을 읽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도 궁주님의 은총을 입어 오혈무공을 배웠고 소궁주 도소정에게 장가를 들
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 은혜에 보답하기는커녕 도소정을 해치고 궁주의 자리를 찬탈하였
으니 그 죄를 용서받을 수가 없소이다. 오늘 도 궁주님의 유언으로 매초풍이 오혈궁의 궁주
자리를 물려받게 됨을 알립니다. 부끄러운대로 이 묘상은 궁주의 자리를 매초풍한테 넘겨주
어 본 궁의 대업을 이어 나가게 하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통고문을 읽고 난 묘상은 창백해진 안색으로 눈물을 펑펑 쏟았다.
초천의가 달려와 땅바닥에 엎드리며 큰소리로 물었다.
"묘 궁주, 이게 웬일이오니까? 매초풍이 당신을 협박한 것이 아니옵니까?"
그는 매초풍을 무서운 눈초리로 쏘아보았다. 묘상이 머리를 가로 저으면서 눈을 감은 채 탄
식하였다.
"천의, 본 궁주는……."
매초풍이 손가락을 묘상의 정수리에 얹자 묘상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매초풍이 입을 열었
다.
"초천의, 나야말로 진짜 궁주이니라. 임자는 나에게 절을 올리도록 하라!"
초천의가 코방귀를 뀌며 일어서더니 노로의를 향해 말하였다.
"큰사형, 이게 대체 웬일입니까? 왜 하룻밤 사이에 철시가 진정한 궁주라고 하는 겁니까?"
"오로지 궁주만이 본 궁의 무공을 이기는 초수를 알게 한다는 본 궁의 규칙이 있네. 사제도
그걸 알고 있겠지?"
초천의가 머리를 끄덕 이면서 대답했다.
"그 규칙이야 본 궁의 상하가 다 똑똑히 알고 있지요."
"문제는 묘상이…… 묘상이 본 궁의 무공을 이기는 초수를 모르고 있다는 걸세."
그 말을 들은 뭇제자들이 깜짝 놀라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초천의가 다시 물었다.
"묘 궁주, 그게 …… 참말입니까?"
묘 궁주는 두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약간 끄덕였다. 그러자 제자들이 다시 웅성거렸다. 십여
년 동안이나 묘상이 이런 사실을 속이고 있을 줄 몰랐던 그들은 배신감에 마구 욕설을 퍼부
었다.
초천의가 놀란 기색으로 매초풍한테 물었다.
"철시, 그럼 당신은 본 궁의 무공을 이기는 초수를 배웠단 말이오?"
"그래, 그 초수를 배웠을 뿐만 아니라 그것도 도 궁주님께서 나한테 친히 전수해 주었지."
초천의가 공지로 달려나와 칼을 뽑아 들더니 소리를 질렀다.
"좋다! 철시, 임자가 오혈도법을 이길 수만 있다면 이 초 모가 복종하고 임잘 궁주로서 존중
하겠다!"
뭇제자들도 소리 질렀다.
"옳습니다. 말로만 들어서는 믿을 수 없으니 눈으로 보아야겠습니다!"
뭇제자들의 시선이 매초풍의 몸에 집중되었다. 매초풍이 오혈도를 절반쯤 뽑다가 칼집에 도
로 꽂아 넣더니 입을 열었다.
"병장기란 사정이 없는 거야. 본 궁주는 초천의를 해칠 생각이 없어. 이렇게 하지. 초 사형
은 오혈장법을 쓰고 본 궁주가 오혈장법을 이기는 초수를 쓰기로 하지!"
뭇제자들은 그 말을 듣고 부하를 아끼는 매초풍에 대하여 이구동성으로 칭찬하였다.
초천의는 칼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매초풍이 다가오자 초천의는 그녀가 멈춰 서기를 기다
리지 않고 대번에 오혈장법 중의 '발운견일(拔雲見日)'이란 초수를 쓰면서 매초풍의 왼쪽
태양혈을 장으로 후려갈겼다.
매초풍은 초천의의 장이 세 치도 못 되게 가까워지자 갑자기 오른쪽으로 머리를 돌리며 오
른손을 뻗쳐 상대방의 팔을 잡음과 동시에 왼손으로 초천의의 팔꿈치를 드세게 올려 밀었
다.
연관된 동작이 마치 번개처럼 신속하여 단 한 합에 초천의는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었다.
매초풍이 손을 놓고 두 걸음 물러섰다.
"초 사형, 상하지 않았나?"
초천의가 일어나서 오른팔을 움직이며 생각했다.
'매초풍이 사정을 봐 주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던들 난 필시 오른팔이 부러지고 말았
을 거다.'
그러나 초천의는 승복할 수 없었는지 무서운 소리를 지르며 오혈장법 가운데서 가장 위력이
있는 '질풍팔타' 초수로 쌍장을 흔들었다. 그것은 곧 팔장(八掌)으로 변하고 그 팔장은 또
육십사 방향으로 장을 내뻗었다.
하지만 매초풍은 조금도 대수로워하지 않았다. 도소정이 그녀한테 오혈장법을 이기는 초수
를 배워 줄 때 '질풍팔타'에 대하여 각별히 지적한 바가 있었던 것이다. 매초풍은 그대로 훌
쩍 뛰어 오르더니 손은 앞으로 향하고 발은 뒤로 향하고는 화살처럼 장의 그림자의 중심으
로 날아들었다. 순식간에 육십사 장은 그녀의 몸 밖에서 움직여 그녀의 몸을 조금도 다칠
수 없게 되었다.
초천의는 깜짝 놀랐다. 그는 종래로 질풍팔타 초수에 이처럼 큰 구멍이 나 있으리라고는 생
각지 못하였다. 만일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매초풍의 쌍장에 얻어맞기 십상이었다. 그는
급히 쌍장을 철회하면서 뒤로 훌쩍 물러나려 하였다.
하지만 매초풍의 동작은 아주 빨라 벌써 초천의의 앞으로 다가와 쌍장으로 가볍게 초천의의
가슴을 떠밀었다. 초천의는 한 장이나 넘게 밀려 뒤로 벌렁 넘어지고 말았다.
두 제자가 달려와 초천의를 부축하였으나 그는 벌써 숨이 막혀 있었다. 두 제자가 한참 안
마를 해주어서야 비로소 점차 정신을 차렸다.
초천의가 두 제자를 밀어젖히고 매초풍에게 넙죽 절을 하였다.
"부하 초천의가 매 궁주님께 배알합니다!"
매초풍이 오혈장법을 쉽사리 이기는 것을 본 뭇제자들은 더 의논할 여지도 없이 분분히 땅
바닥에 엎드려 소리 높이 외쳤다.
"매 궁주님!"
매초풍은 득의 양양한 기색으로 제자들더러 자리에서 일어나라고 분부한 다음 묘상을 동굴
안에 연금하게 하였다.
뭇제자들 가운데는 완고한 무리들이 적지 않았다. 그들은 매초풍이 진짜 궁주라는 것을 인
정하면서도 내심으로는 여전히 묘상이 궁주로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들은 묘상이 중상을
입은데다가 오혈도가 매초풍의 수중에 있는지라 잠시 참을 수밖에 없었다.
뭇제자들은 흩어져 매초풍이 궁주로 취임하는 대전(大典)을 준비하려 하였다.
"여러분, 잠깐 기다리시오!"
이때 누구인가의 목소리가 높지는 않았으나 매우 똑똑히 들려 왔다.
뒤를 돌아다본 매초풍은 가슴이 철렁했다.
'여혈의, 네 놈이 아닌 때에 너무 빠르게 돌아왔구나!'
여혈의가 사람들을 헤치고 매초풍 앞에 서더니 쌀쌀한 기색으로 노려보았다.
"매초풍, 넌 담도 크구나. 감히 묘 궁주를 가두다니!"
초천의는 평소에 여혈의와 사이가 나빴던지라 오히려 여혈의를 꾸짖었다.
"여혈의, 너야말로 하늘이 높은지 땅이 높은지도 모르는 자이다. 어서 매 궁주 앞에 머리를
조아려 빌어라. 그럼 널 죽이지는 않을 거다!"
여혈의가 코방귀를 뀌면서 말하였다.
"누구든지 이 여 모를 때려눕혀야 말이지. 그러지 못한다면 매초풍이 나한테 빌어야 할걸!"
매초풍이 약이 올라 부르짖었다.
"여혈의, 날 핍박하지 마라! 그러잖으면 내가 명을 내려 네 놈을 잡아들이게 할테다!"
여혈의가 쓴웃음을 짓더니 제자들에게 큰소리로 말하였다.
"매초풍이 음모를 꾸며 궁주의 자리를 찬탈하려 하오. 그러니 여러분은 이 여 모와 함께 저
마귀년을 없애 버려야 하오!"
그러자 몇십 명의 불만을 품은 무리들이 호응해 나섰고 뒤이어 여혈의를 믿는 젊은 제자들
도 그 편에 섰다.
노로의가 소리를 질렀다.
"무슨 짓들인가? 그래 반란을 일으켜 매 궁주를 해칠 작정들인가? 어서 돌아서라!"
강금의와 반채의가 여혈의의 뒤에 서 있었다. 반채의는 평소에 묘 궁주의 총애를 몹시 받던
터였다. 그리하여 그녀는 노한 기색으로 질책하였다.
"노로의, 묘 궁주께선 당신을 가장 신임했었는데 당신이 먼저 나서서 배반할 줄은 정말 생
각지 못했어요!"
강금의와 여혈의는 사실 그리 교분이 깊지 않았으나 반채의때문에 강금의는 매초풍을 반대
하게 되었다.
"여 사형, 영만 내리시우. 그러면 우린 쳐나가서 저 역적들을 죽이고 묘 궁주를 구해 내겠
소."
몇몇 제자들도 호응하여 막 달려들 태세를 취하였다.
다른 한쪽에서는 매초풍이 다른 한패의 제자들을 거느리고 호시탐탐 노려보면서 수시로 달
려들 준비를 하였다. 팽팽한 긴장 상태에서 사위는 쥐죽은듯한 침묵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여혈의가 양쪽을 살펴보면서 속으로 생각을 가다듬었다.
'나를 지지하는 제자들이 저쪽의 절반도 안 되는데다가 대부분 젊은 제자들이다. 혼전을 하
게 되면 아마 당해내지 못할 게다. 적을 이기자면 우두머리부터 사로잡아야 하는 법. 철시를
먼저 죽이는 것이 나을 거다.'
강금의가 뒤에서 여혈의한테 속삭였다.
"여 사형, 매초풍이 이미 본 궁의 무공을 이기는 초수를 알고 있답니다."
조금 전 여혈의는 제자들이 모여 서 있는 뒤에 서서 매초풍이 질풍팔타 초수를 물리치는 것
을 보았었는데 강금의의 말을 듣고 나서야 그 원인을 똑똑히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어
쨌든 매초풍이 노궁주 도천룡의 적계(嫡系) 제자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매초풍
이 자기와 마찬가지로 딴마음을 품은 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혈의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제안을 했다.
"방금 임잔 오혈장법을 이겼는데 지금 여 모가 오혈도법을 쓰겠으니 어디 이겨 보시오!"
여혈의가 칼을 빼들자 초천의가 코방귀를 뀌었다.
"임자가 비록 본 궁의 무공을 쓴다고는 하지만 내공은 어떤 놈한테서 배웠는지 모르지. 매
궁주는 임자와 싸울 필요가 없어!"
그 말을 들은 매초풍은 약간 시름이 놓였다. 그녀는 비록 내공이 많이 늘어나기는 하였지만
여혈의를 꼭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은 없었다. 만일 제자들 앞에서 지게 되면 지금까지 쌓
은 노력이 일순간에 물거품이 될 판이었다.
매초풍은 여혈의를 쏘아보면 서 입을 열었다.
"그래, 본 궁주는 임자처럼 무공의 내력이 불투명한 놈과 싸울 필요가 없어."
여혈의가 칼로 매초풍을 가리키며 무서운 눈길로 쏘아보았다.
"매초풍, 설사 임자가 정말 도 궁주한테서 신공을 전수받았다고 하더라도 궁주의 풍도(風度)
는 있어야 하는 거다. 본 궁의 일은 제쳐놓더라도 이 여 모와 임자는 개인적인 원한이 있다.
그래도 감히 응전하지 못하겠단 말인가?"
"이 여가야! 내가 네 놈과 개인적인 원한이 있다면 자연히 제자들의 힘에 의거하여 널 눌러
이겨서는 안 되겠지. 호한은 호한답게 처신해야지. 본 궁주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아
니다!"
매초풍은 쓴웃음을 짓고 나서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아주 유감스럽게도 본 궁주는 임자와 아무런 개인적 원한이 없다."
"매초풍, 만일 임자가 이백 리 밖에 있는 여가집에서 임자와 동시 진현풍이 살해한 사람들
을 생각해 본다면, 이 여 모가 왜 이렇게 말하는가 하는 걸 알게 될 거다."
이렇게 말하는 여혈의의 눈길은 칼끝처럼 날카로웠고 그 날카로움은 벌써 매초풍을 수백 토
막 내고 있었다.
매초풍이 눈을 깜박거리면서 여가집을 떠올렸다. 여가집에는 여가부가 있었는데 그 여가부
의 주인 여원외는 그녀의 원수였다. 매초풍은 여부 휘하의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고 그의 딸
여소교를 처참한 처지에 떨어지게 만들었다. 그 집 가족들은 모두 죽었고 단 하나 밖에 나
가 학문을 닦는 아들이 남아 있었다. 그 아들은 여강이라고 불렀으며 둘째 부인의 소생이었
다. 매초풍이 의심어린 눈길로 여혈의를 바라보면서 떠듬거렸다.
"임자…… 임자가……?"
여혈의가 냉랭한 어조로 내뱉었다.
"여원외는 나의 아버지이고 둘째 부인은 나의 어머니시다. 여승, 여통은 나의 이복 형님들이
고 여소교는 나의 이복 여동생이다. 그리고 난 여가네 셋째 아들 여강이다."
"임……임자가 여……여강이었구만!"
여혈의가 머리를 끄덕이며 말하였다.
"노로의가 여부로 갈 땐 내가 허락한 오만 냥 은자와 삼천 냥 황금을 받으려고 갔던 거다.
하지만 그들이 여가집에 이르렀을 땐 여부는 이미 잿더미가 된 상태였지. 그런데 노로의 무
리는 원래 나와 사이가 버성겼던 탓으로 돌아와서 여부가 잿더미가 되었다는 것만 전해 주
었지. 우리 가족들의 행방에 대해선 알아보지 않았단 말야. 당시 오혈궁의 사무가 번망했던
까닭에 이 여 모는 고향에 가서 상세한 형편을 알아볼 짬도 없었지."
이때 강금의가 둘 사이에 끼여들었다.
"원래 이러한 판이었구려. 그때 나와 반 사매가 여가집 밖에서 흑풍쌍살을 만났던 게 이상
한 일이 아니었구만. 연놈들이 여부에 가서 이미 살인을 했던 거군 그래?"
여혈의가 다시 말을 이었다.
"만일 해검계 시냇가에서 막가권 장문인 막여인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 여 모는 영원히 집
식구들의 행방을 모른 뻔했지."
매초풍이 한스러운 듯한 어조로 말했다.
"모두 내가 뿌리를 채 뽑아 버리지 못한 탓이다! 막여인, 이…… 이 놈을 죽여 버렸어야 했
는데……!"
여혈의가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빛을 빛내며 말을 씹어 뱉었다.
"이 여 모는 어려서 집을 떠났지만 다행히도 막여인과 이전에 몇 번 만난 적이 있었거든.
막여인은 날 알아보지 못했지만 다행히도 난 그분을 알아볼 수 있었지. 철시, 그렇기 때문에
너는 나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게 된 거야!"
매초풍이 쓴웃음을 지으면서 대꾸하였다.
"듣자니까 여원외는 임잘 좋아하지 않았고 여승과 여통은 이미 임잘 대적할 준비를 하였다
더군. 본 궁주가 임자의 눈에 든 가시를 빼 주었으니 오히려 임잔 나한테 감사를 해야 할
게 아닌가?"
여혈의가 침을 뱉으면서 말하였다.
"그래도 그분들은 분명 이 여 모의 부형(父兄)들이야. 그들이 이 여 모를 아무리 미워했다고
하더라도 너 따위 여마귀가 참견할 일은 아니다. 자, 매초풍. 어서 나와 판가름을 해보자!"
여혈의는 말을 끝내고는 곧바로 나는 듯이 달려들었다. 매초풍도 약간 당황한 기색으로 독
룡은편을 뽑아 들었다. 독룡은편은 길이가 사 장이나 되는데다가 매초풍의 내공은 이젠 그
전과 비길 바가 아니었는지라 채찍이 울리기 시작하자 여혈의는 뒤로 몇 발짝 물러서지 않
을 수 없었다.
매초풍은 분주하게 속궁리를 하였다.
'내 쪽이 숫자가 많을 때 이 점을 이용해서 이겨야지. 그러지 않다가는 일이 재수없이 뒤틀
릴 수도 있겠어.'
그러자 그녀는 제자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초천의, 제자들을 거느리고 이 못된 역도들을 죽여 버려라!"
초천의는 매초풍과 마찬가지로 여혈의를 미워하였던지라 제자들을 거느리고 함성을 지르면
서 지쳐 나갔다. 여혈의는 비록 뛰어난 용맹을 가진 사람이기는 하였지만 몇백 명의 포위
속에 들었는지라 쉽게 빠져 나갈 수가 없었다.
매초풍은 쌍방이 혼전을 일으키자 사람들이 주의를 돌리지 않는 틈을 타 가만히 빠져 나와
수림 속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재빨리 벼랑 옆에 와서 나무상자에 앉아 산마루 쪽으로 올라
갔다.
그녀는 서둘러 암동에 들어가 횃불 한 자루를 들고 또 예비로 세 자루를 가진 다음 오혈궁
의 금지 구역으로 들어가 도소정을 찾았다.
도소정이 불빛에 눈이 부신지 얼굴을 옆으로 돌리며 물었다.
"누구냐? 개 놈의 자식 묘상이냐?"
"도 궁주, 난 매초풍이에요. 내가 오늘 당신을 구하러 왔어요."
조금 지나자 도소정은 빛에 적응되는지 두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며 말했다.
"철시, 오혈도법을 이기는 초수를 배워 내려고 왔겠지? 흥, 이번에는 절대 너의 속임수에 들
지 않을 거다!"
매초풍이 눈알을 굴리더니 얼굴에 미소를 띄웠다.
"도 궁주, 그런 억울한 말씀은 하지 마세요. 난 당신을 속인 게 아니에요. 전번에는……."
도소정이 말끝을 가로챘다.
"전번에 그래 네 년이 오혈장법을 이기는 초수를 알아내고는 도망가지 않았더냐? 그 무슨
단도를 가지러 간다면서 말이야!"
매초풍은 여전히 명랑한 어조로 말을 받았다.
"단도는 찾지 못했지만 긴 칼을 찾았어요."
매초풍이 오혈도를 뽑아 들자 사방에 붉은 빛이 퍼졌다.
"도 궁주, 이 칼을 알아보겠지요?"
도소정이 눈을 좀더 크게 뜨다가 화들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아니 그건…… 본 궁의 오혈도가 아닌가?"
매초풍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맞아요."
도소정이 큰소리로 말했다.
"철시, 오혈도는 본 궁 궁주의 신물이야. 절대 바깥 사람의 수중에 들어가서는 안 되는 거
야. 임……임잔 그걸 나한테 주어야 해!"
도소정이 다급한 심정에 앞으로 달려 나오는데 몸에 매어 있는 쇠사슬이 절그럭거렸다. 매
초풍이 몇 걸음 뒤로 물러서자 도소정은 더는 가까이 다가올 수가 없었다.
"도 궁주, 너무 급해 말아요. 난 정말로 구해 주러 왔어요."
"구해 주러 왔다면 어서 오혈도로 쇠사슬을 끊어 줘야지."
매초풍이 다가가서 칼을 휘둘러 쇠사슬 한 개를 내리쳤더니 대번에 끊어져 나갔다.
"과연 예리한 무기로군요."
"본 궁주의 신물이 어찌 흔히 볼 수 있는 물건이겠느냐? 어서 나머지 네 개의 사슬도 끊어
버리라구!"
매초풍이 다시 뒤로 물러선 뒤 입을 열었다.
"하지만 한 가지 할말이 있어요."
"어서 말해, 어서 말하라니까!"
"도 궁주, 난 당신을 위해 오혈도를 가져왔고 당신을 대신하여 그 묘상이란 자를 연금까지
하여 놓았는데 당신은 나한테 어떻게 감사를 하겠어요?"
도소정은 그 말에 놀라움과 기쁨으로 표정이 아주 환하게 밝아졌다.
"본 궁주는 낙언을 실천하여 오혈도법을 이기는 초수를 임자한테 가르쳐 주지."
매초풍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하였다.
"난 당신을 믿어요. 그런데 당신이 다시 궁주의 보좌에 오르자면 한 가지의 큰 시끄러움이
있을 거에요."
"말해 보게. 무슨 시끄러움인가?"
"지금 오혈궁에는 여혈의라 부르는 사형 한 사람이 있지요. 내가 애를 써서 묘상을 연금해
놓았더니 여혈의가 나쁜 심보를 품고 몇십 명 제자들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켰어요. 그 놈
이 지금 오혈궁의 궁주가 되려고 해요."
"이런,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인가?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고 묘상이란 역적 놈이 생겼
으니 본 궁의 제자들이 그 본을 따서 나쁘게 되었단 말야. 그 여혈의란 놈은 어떤 자인가?"
"스물두세 살 먹은 놈인데 아주 영준하게 생긴 놈이지요. 몸에 핏빛이 도는 붉은 비단 두루
마기를 입고 허리에 쾌도를 찼는데 무공이 출중하여 묘상에 못지않지요."
"그 놈이 그 젊은 나이에 어찌 이렇듯 고명한 무공을 가질 수 있단 말이냐? 아마도 따로 스
승을 가졌던 게지?"
"도 궁주께선 과연 영명하시군요. 여혈의는 내공을 어느 마귀한테서 얻었는데 그 마귀의 별
호는 천산 마귀할멈이라고 한답니다. 내가 제자들을 타일러 잘 다스려 놓은 뒤 북을 치고
꽹과리를 울리면서 도 궁주를 영접하려 했었는데 여혈의란 놈이 이런 야심을 가지고 있을
줄 몰랐군요. 이 시각에 그 놈은 지금 본 궁의 제자들과 혼전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 놈이
자기의 야심을 성사하게 될까 봐 근심되는군요."
도소정이 발을 동동 구르면서 소리를 질렀다.
"어서 날 풀어 놓아라. 내가 가서 그 여혈의인지 뭔지 하는 놈을 죽여 버려야겠다!"
매초풍이 맘속으로 아주 기뻐하면서 속궁리를 더듬었다.
'도소정과 여혈의를 붙여 놓으면 난 어부지리를 얻게 되는 거다.'
매초풍은 두말없이 오혈도를 도소정에게 넘겨주었다. 도소정이 칼을 네 번 휘두르자 네 개
의 쇠사슬이 끊어져 나갔다. 도소정이 두 눈을 부릅뜨고 소리쳤다.
"철시, 앞에서 길을 안내해라!"
매초풍이 기뻐하며 앞장서 달려나갔다. 그녀가 경공으로 동굴 어귀까지 와서 머리를 돌려
보니 도소정은 뒤에 겨우 두세 걸음 밖에 떨어지지 않고 바싹 따라오고 있었다. 매초풍은
혀를 차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십팔 년 동안이나 갇혀 있었던 여인의 경공이 이러하니 실로 기녀자(奇女子)가 아닐 수 없
다.'
도소정이 동굴 밖의 밝은 빛에 적응되지 못하여 또다시 눈을 감고 탄식하였다.
"모두 묘상이란 놈 때문이야. 내가 돌아가면 그 놈을 여러 토막을 내어 승냥이 밥으로 던져
줄테다!"
도소정이 능히 눈을 뜰 수 있게 된 다음 그들 두 사람은 다시 걷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나
무상자를 타고 오혈궁에 당도하여 함성 소리가 요란한 곳으로 달려갔다.
이때 오혈궁 제자들은 이미 삼십여 명이나 죽었고 그 나머지는 아직도 악전고투하고 있었
다. 여혈의네 패들은 워낙 소수인지라 노로의, 초천의가 거느린 제자들한테 물샐 틈 없이 포
위당해 있었다. 하지만 여혈의네 악당들은 오혈궁에서 무공이 훌륭한 호수들이라 아직도 버
텨내고 있었다.
여혈의는 혈안이 되어 사정없이 칼을 휘둘렀는데 그때마다 오혈궁 제자들이 어김없이 부상
을 당하곤 했다. 초천의가 여혈의를 대적하고 있었는데 매번 여혈의가 휘두르는 칼에 쩔쩔
매며 수세에 몰렸다.
매초풍이 손으로 여혈의를 가리켰다.
"도 궁주, 쾌도를 휘두르는 저 놈이 여혈의예요."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도소정이 나는 듯이 사람들 속으로 뛰어들었다. 오혈궁 제자들은 봉
두난발이 되어 얼굴조차 알아볼 수 없는 야인(野人)이 갑자기 하늘에서 강림하듯 내려오자
강적이 죽이러 오는 줄 알고 각기 병장기를 들고 덤벼들었다.
도소정은 오혈궁의 무공을 이기는 초수를 알고 있는데다가 평소에 묘상한테 복수를 하려고
별러 오던 터였기에 오혈궁 제자들의 병장기들을 대수롭지 않게 헤치고 들어와 여혈의 앞에
섰다.
"역적 놈아, 내 칼을 받아라!"
그녀는 대뜸 이렇게 소리치면서 오혈도로 여혈의를 내리찍으려 하였다. 초천의 등은 그 여
인이 여혈의를 죽이려 하고 또 오혈도를 사용하는 것을 보자 매초풍이 청해온 고수가 싸움
을 도우러 온 줄 알고 분분히 그 여인과 함께 여혈의를 공격하였다.
겨우 오혈도의 공격을 피한 여혈의는 생각했다.
'오혈도는 본디 매초풍의 수중에 들어갔는데 어찌하여 다시 이 야인 같은 여인의 수중으로
들어갔을까? 철시한테 이런 벗이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는데……. 이 야인의 도법이 귀
신 같고 공력이 대단한 걸 보면 십중팔구 매초풍이 사전에 이 오혈궁에 잠복시켰다가 날 대
적하게 한 고인이 분명하구나!'
노로의도 뒤에서 이 야인의 매서운 도법을 보고 속으로 생각을 가다듬었다.
'이 사람의 무공이 너무나도 익숙하구나. 누구일까?'
노로의는 도소정까지는 생각지 못했던지라 이 야인의 초수가 순수한 오혈궁의 도법인 것을
알아보고는 대경실색하였다.
노로의가 매초풍에게 안절부절못하면서 물었다.
"매 궁주, 저 사람…… 저 사람은 누구입니까?"
"노로의, 저 사람은 당신과는 구면일 텐데 왜 알아보지 못하나?"
노로의가 그제야 놀라 더듬거렸다.
"저 여자가? 그래, 도……도소정, 소궁주란 말이오?"
노로의는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매초풍이 노로의의 표정을 지켜보면서 비웃는 투로 물었다.
"그래 내가 여혈의를 대적하도록 청해온 방조꾼이 어떤가?"
노로의가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애원하였다.
"매 궁주님, 저의 목숨을 살려 주십시오."
매초풍은 노로의가 절을 하면서 애걸하자 처음에는 얼떠름해 졌다가 금세 그 영문을 알아차
렸다. 노로의는 일찍 묘상과 단짝이 되어 도소정을 감금하였기에 도소정이 자기한테 보복을
할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생각해 보란 말야, 저 도소정은 내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나? 내가 여혈의를 죽이라고 하
면 죽인단 말야. 그러니 본 궁주가 임잘 죽이라고 하면……."
노로의가 겁이 나서 부들부들 떠는 것을 보고 매초풍이 깔깔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임잔 본 궁주의 공신인데 내가 어찌 임잘 죽이게 하겠나?"
그 말에 노로의는 얼른 머리를 조아렸다.
"매 궁주님, 가, 감사합니다."
이때 여혈의네 패들은 죽을 놈은 죽고 상할 놈은 상하고 강금의, 반채의 등 칠팔 명은 사로
잡혔다. 뭇제자들은 도소정과 여혈의의 주위를 둘러싸고 긴장한 상태에서 둘을 주시했다.
도소정은 칼로 여혈의의 오른쪽 어깨를 엇비스듬히 내리쳤다. 칼날이 미처 닿기도 전에 칼
바람에 여혈의의 목이 따끔거렸다. 여혈의는 뒤로 물러서면서 칼로 오혈도를 물리치고는 재
빨리 오혈도법 중의 정화라고 일컫는 '요운자일(燎雲刺日)'이란 초수로 도소정의 가슴을 들
이찔렀다.
도소정이 쓴웃음을 지으며 몸을 비스듬히 누이면서 칼을 피하는 동시에 오혈도로 여혈의의
허리를 내리쳤다.
여혈의는 미처 칼을 건사하지 못한 채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도소정이 뒤이어 칼끝으로 그
의 쇄골(鎖骨)을 들이찌르다가 그 칼을 피하는 여혈의의 아랫도리가 비틀거리는 것을 보자
재빨리 발로 그의 왼쪽 다리를 걷어찼다. 여혈의는 왼쪽 다리가 끊어지는 듯이 아팠다.
도소정은 또 발길을 날려 그의 오른쪽 옆구리를 걷어찼다. 여혈의는 더 서 있을 수가 없어
땅바닥에 나가자빠졌다. 도소정은 오른쪽 다리로 여혈의의 복부를 짓밟고 나서 오른손에 든
오혈도로 그의 목을 겨누었다.
그러자 뭇제자들이 큰소리를 질렀다.
"그 놈을 죽여 버리시오. 반역자를 어서 죽이시오!"
여혈의는 칼끝이 목에 닿을 무렵 갑자기 무서운 소리를 내질렀다. 그러면서 몸을 비틀며 뒹
굴어 도소정의 칼을 피하였다.
도소정은 속으로 깜짝 놀랐다. 이 괴이한 몸놀림은 오혈궁의 무공이 아니고 분명 천산의 마
귀할멈인가 하는 이한테서 배워온 것이 틀림없으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도소정은 검
법을 쓰듯이 칼로 여혈의의 요해처를 겨누고 마치 하늘의 유성처럼 연거푸 열일곱 번이나
내리찔렀다.
여혈의는 무서운 소리를 지르면서 땅에서 한 장 남짓이나 먼 곳까지 굴러갔다. 가까이에 있
는 한 제자가 굴러오는 그를 발로 걷어차다가 여혈의한테 발목을 비틀리어 탈골이 되는 바
람에 제자는 비명을 지르면서 쓰러졌다.
여혈의가 벌떡 일어나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어떻게 해서 오혈궁의 무공을 이기는 초수를 알고 있는 거요? 그렇지 않았
던들 이 여 모는 절대로 당신을 두려워하지 않았을 겁니다."
도소정이 앙천대소를 하더니 입을 열었다.
"내가 바로 전임 궁주 도천룡의 딸 도소정이고 현임 궁주이다. 여혈의, 어서 무릎을 꿇고 용
서를 빌어라. 그렇지 않았다가는 죽는 길밖에 없느니라!"
여혈의는 그 말을 듣고 양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생각을 굴렸다. 그도 동문 사람들한테서
전임 궁주한테 도소정이란 딸이 있었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그녀가 실종된 지 이미 십팔
년이나 되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 야인이 바로 도소정일 줄은 생각지 못하였다. 여
혈의가 쓴웃음을 지으면서 입을 열었다.
"당신이 어찌 노 궁주의 딸일 수 있겠소? 당신은 철시가 청해 온 도움꾼일 따름이오. 철시
가 당신한테 본 궁의 무공을 이기는 초수를 가르쳐 주었지요?"
"난 진짜 도소정이야. 묘상이란 놈에 의해 동굴 속에 십팔 년이나 갇혀 있었는데 철시가 본
궁의 무공을 이기는 초수를 알게된 건 내가 친히 가르쳐 준 것이니라. 여혈의, 어서 본 궁주
앞에 절을 하지 못할까?"
도소정이 한걸음 나서자 여혈의가 냉소를 퍼부었다.
"좋아, 아주 좋아. 네 년이 도소정이라니 마침 잘됐어!"
뭇제자들은 이 야인이 도천룡의 딸 도소정이라는 데 대하여 이상하게 생각하였으며 또 여혈
의가 이젠 겁이 나서 저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여혈의가 갑자기 입을 벌리고 승냥이의 울음 소리 같은 괴상한 소리를 질러대는 것
이었다. 그가 무슨 짓을 하려고 저러는지 몰라 모두들 겁이 났다.
이윽고 먼 산에서 마치 여인의 목소리 같은 소리가 메아리쳐 왔다. 그 목소리의 메아리가
사라지자 이윽고 운무 속을 헤치고 한 사람이 내려왔다. 그 사람은 검은 옷을 입었는데 극
히 빠른 동작으로 산세를 타고 벼랑에서 마치 평지 걷듯이 날아내리는 것이었다.
모두들 깜짝 놀랐다. 그들은 종래로 이곳의 산벼랑을 제 마음대로 오르내리는 사람을 본 일
이 없었으며 이런 벼랑을 날아내린다는 것은 당년의 노궁주인 도천룡도 할 수 없었던 일이
었다.
사람들은 놀라움에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저게 어디 사람인가? 기필코 마귀일 거야."
"귀신일지라도 실수하여 넘어질 수 있는 거야. 내 보기엔 신선같아. 신선만이 하늘을 날 수
있거든."
그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은 벼랑에서 내린 뒤 일단 나무 숲 속으로 사라지더니 다시 고함소
리가 들리면서 나는 듯이 사람들의 머리 위를 날아서는 여혈의 앞에 와 섰다.
그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은 여인이었다. 몸집은 왜소하고 여위었으며 머리에 검은 수건을 두
르고 얼굴은 검은 면사포로 가렸으며 검은 비단으로 지은 긴 치마를 입었는데 그 치맛자락
이 땅에 질질 끌리고 있었다.
그 여인의 두 눈은 아주 컸으나 눈길은 북극의 얼음처럼 싸늘하였고 눈썹이 아주 가늘었다.
그녀가 여혈의를 바라보며 물었다.
"여혈의, 무슨 일 때문에 내가 친히 나서야 하는 거냐?"
여혈의가 절을 여러 번 하고 나서 대답하였다.
"사부님, 사부님께서 가부를 결정해 주어야 할 일이 있나이다."
"그런가? 어서 말해 보아라."
여혈의가 손으로 도소정을 가리키며 다시 말을 이었다.
"사부님, 저 사람이 바로 도소정인데 묘상에 의해 동굴 속에서 십팔 년 동안이나 감금당하
였다고 합니다."
검은 옷을 입은 여인이 도소정을 쏘아보며 물었다.
"당신이 정말로 도소정이오?"
도소정이 오혈도를 비껴든 채 대적이 앞에 왔다는 것을 알아 차렸는지라 경계하며 대답했
다.
"그렇소. 내가 바로 본 궁주요. 당신은 누구시오?"
검은 옷을 입은 여인이 여혈의한테로 몸을 돌리면서 물었다.
"묘상이란 놈은 어디 있느냐?"
"묘상은 철시 매초풍이 이미 동굴 속에 연금했습니다. 좀 있다가 이 제자가 친히 죽여 버리
겠습니다."
검은 옷을 입은 여자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철시가 저도 모르게 날 위해 좋은 일 한 가지를 하였군."
그녀는 이렇게 중얼거리더니 도소정을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내가 바로 천산의 마귀할멈일세."
도소정은 머리를 끄덕 이면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녀는 이 천산의 마귀할멈 때문에 묘
상이 항상 불안에 떨고 있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매초풍은 속으로 경탄해 마지않았다. 이 천산의 마귀할멈이 비록 면사포로 얼굴을 가리기는
했지만 그녀의 눈을 보니 눈귀에 아무런 주름살도 없었다. 그러니 서른 살도 안 되었을 이
여인이 이런 절기를 갖고 있다는 것은 실로 탄복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매초풍은 당장 달려나가 천산의 마귀할멈한테 절을 하고 스승으로 모시고 싶었지만 아직 때
가 이르다고 생각하였다.
'여혈의가 바로 여강이라니 저 놈은 분명 나를 가만두려 하지 않을 거고 천산의 마귀할멈더
러 날 죽이라고 부탁할 거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매초풍이 한창 그 방도를 궁리하고 있는 판에 천산의 마귀할멈이 도소정을 사납게 쏘아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도소정, 만일 당신이 날 알아보지 못한다면 내가 알려 주지. 십팔 년 전에 한 처녀가 당신
한테 사내를 빼앗기고 또 오혈궁에서 쫓겨난 일을 기억하겠지."
도소정이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당……당신이…… 엽……."
천산의 마귀할멈이 마술을 부리는 듯하더니 그녀의 손에 갑자기 길이가 두 자 남짓한 자주
빛 물건이 나타났다.
"이것이 기억나겠지!"
도소정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였다.
"자정신침이구만. 그럼, 다, 당신이…… 엽첩비?"
천산의 마귀할멈이 머리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래, 맞았어. 내가 바로 엽첩비야. 유감스럽게도 오늘은 넌 날 오혈궁에서 쫓아낼 능력이
없어. 하하하!"
천산의 마귀할멈은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노로의가 매초풍의 곁에서 중얼거렸다.
"바로 엽 아씨가 틀림없어. 눈매를 보니 십팔 년 전과 꼭 같이 아름답군……!"
매초풍이 비웃었다.
"당신은 줄곧 저 여자를 짝사랑해 왔나 보군요."
"저 같은 거야 짝이나 되겠습니까? 엽첩비는 성미가 변화 무쌍하고 제멋대로 하기 때문에
묘상조차 감히 겨루려 하지 못했지요. 만일 저 여자가 성미가 저렇지만 않았더라면 묘상이
싫다고 할 리도 없고 이런 복잡한 일들이 생기지도 않았을 겁니다. 휴―!"
매초풍이 그가 한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기 시작하였다.
'만일 엽첩비가 성미가 유순한 여인이었더라면 묘상은 도소정한테 장가들지 않고 그녀를 아
내로 맞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면 도소정은 편안하게 궁주 노릇을 할 수 있었을 것이고 십팔
년의 감금 생활도 겪지 않았을 것이다. 여혈의 또한 아무리 큰 야심을 갖고 있더라도 하는
수 없이 이곳에서 무예를 닦는 일에 열성을 다했을 것이다.'
갑자기 노한 외침 소리가 들리더니 도소정이 오혈도를 휘둘러 천산의 마귀할멈을 내리찍었
다. 도소정은 자기의 공력이 천산의 마귀할멈보다 못하다는 것을 알아차리자 선수를 써서
기습하여 한번에 죽여 버리려고 했던 것이다.
땅―!
천산 마귀할멈의 무공은 완미한 지경에 이르렀으므로 도소정에 비길 바가 못 되었다. 자정
신침이 오혈도의 칼끝을 막자 한 갈래의 대력이 오혈도를 통하여 도소정의 오른쪽 어깨로
전해졌다. 도소정은 팔이 마비되면서 하마터면 칼을 떨어뜨릴 뻔하였다.
천산의 마귀할멈이 냉소를 퍼부었다.
"도소정, 네가 감히 나의 사내를 빼앗았으니 분명히 죽는 길밖에 없다!"
천산의 마귀할멈이 자정신침으로 검술의 초수를 쓰자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검기(劍氣)
가 나갔다. 도소정이 칼로 그것을 막으면서 반격하려 하였으나 자정신침이 또다시 도술(刀
術)의 초식으로 엇비스듬히 날아왔다. 도소정이 머리를 숙여 그것을 피한 다음 머리를 다시
쳐들면서 오혈도로 상대방을 들이찔렀다. 자정신침은 마치 몽둥이가 되어 오혈도를 비껴 물
리쳤다. 그리곤 판관의 붓 끝이라도 된 듯이 도소정의 가슴에 있는 화개혈을 향했다.
천산 마귀할멈은 바로 이 순간에 자정신침을 검, 칼, 곤봉, 그리고 판관의 붓으로 네 수를
연거푸 썼다. 이 네 수는 서로 뗄 수 없는 병장기였다. 하지만 천산 마귀할멈은 한곳이라도
흠잡을 데가 없었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취한 듯이 바라보면서 혀를 찼다.
매초풍도 속으로 저도 모르게 감탄을 했다.
'저러한 무공은 아마 세상에서 둘도 없이 총명하다는 황 사부님도 만들어 내지 못할 거다.
저 할멈을 스승으로 모신다면 내게는 끝도 없을 이익이 돌아올 것이다. 무림에서 마음껏 활
개를 펼칠 수 있을 것이다.''
천산 마귀할멈은 이미 십여 수나 썼다. 그 자정신침을 매우 가볍게 휘두르는 것 같았지만
사람들의 혼을 빼놓기에 충분했다.
도소정은 오혈도를 휘두르면서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막아냈다. 그러나 차츰 힘이 빠져 밀리
기 시작했다. 이쪽을 겨우 막으면 반대로 다른 쪽이 허점으로 드러나곤 했다.
천산 마귀할멈은 전력을 다하지 않고 마치 고양이가 쥐 한 마리를 가지고 놀듯이 도소정을
괴롭혔다.
"소궁주님, 왜 이 모양이오? 오늘따라 왜 이처럼 나약한가? 어디 한 군데 상처를 내주고 싶
어도 불쌍해서……."
그 말에 도소정은 화가 나서 두 눈을 크게 뜨며 씩씩거렸다. 그녀가 갑자기 오혈도를 바람
개비처럼 휘두르기 시작했다. 붉은 섬광이 번뜩였다. 바람개비처럼 회전하는 몸뚱이와 함께
봉두난발을 한 머리카락들이 어지럽게 흩날려 마치 요귀 같았다.
천산 마귀할멈은 이윽고 냉랭한 눈길로 쏘아보았다. 그녀의 입에서 날카로운 음성이 터졌다.
"그따위 구역질 나는 모양을 한다고 내가 겁을 낼 줄 아느냐?"
그녀가 갑자기 오른손을 부르르 떨어댔다. 자정신침이 순간 천만 갈래로 변하며 자줏빛 섬
광이 눈부시게 쏟아졌다. 그 빛은 오혈도에서 나오던 붉은 섬광을 커다란 천으로 감싸듯 덮
어 버렸다.
두 사람이 한데 어우러져 싸우는 동작은 갈수록 더 빨라졌다. 여혈의와 매초풍 외 몇몇 고
수들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제자들은 누구도 이들의 무공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저 붉은
빛과 자줏빛이 합쳐졌다가 분리되는 것만을 볼 뿐이었다.
붉은 빛은 점점 사그라들고 자줏빛은 강하게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붉은 빛은 가물거리다
가 자줏빛을 향해 곧장 날아갔다.
째앵―.
요란한 금속성이 들리면서 오혈도는 자줏빛으로부터 튕겨져 사람들의 머리 위를 날아갔다.
오혈도는 수림 속으로 멀리 사라지고 말았다. 뒤이어 나뭇가지들이 잘려 나가는 소리가 들
려 왔다.
자줏빛은 갑자기 빛들을 한가운데로 모으더니 우왕좌왕하는 도소정을 빈틈없이 에워쌌다.
곧 단발마적인 비명 소리가 처참하게 들렸다. 핏물과 살점들이 마구 튀며 옷마저 갈기갈기
찢어져 사방으로 흩어졌다.
자줏빛이 갑자기 사라지자 천산 마귀할멈이 뒷짐을 진 채 태연히 머리를 쳐들고 있는 모습
이 보였다. 그녀의 손에는 자정신침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발 밑에 어지럽게 쌓여 있는
한 무더기의 살점 더미에는 피가 흥건하게 고였다가 천천히 땅속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도소정은 이미 고깃덩어리에 불과했다. 그녀는 원래 자신이 오혈궁 궁주의 보좌에 다시 오
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원혼이 되어 저승으로 가버린 것이다.
매초풍마저도 도소정의 처참한 최후를 보고 탄식하고 말았다. 그녀는 동굴 속에서 십팔 년
동안이나 갇혀 있다가 방금 전 겨우 햇빛을 보았던 것이다.
오혈궁의 제자들은 오래도록 침묵 속에 잠겨 있었다. 모두들 갑작스레 일어난 일이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윽고 초천의가 칼을 높이 쳐들었다.
"여러 형제들, 천산 마귀할멈이 백주에 본 궁에서 소궁주님을 살해했소. 우린 소궁주님을 위
해 복수를 해야 할 것이오!"
이자의도 격분을 참지 못하고는 맞장구를 쳤다.
"맞소. 오혈궁의 제자인 이상 천산 마귀할멈이 본 궁에서 행패를 부리는 걸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는 없소. 양심이 있는 제자들은 날 따라 저 요귀를 죽입시다!"
이자의가 먼저 달려가 천산 마귀할멈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뒤를 이어 초천의가 나섰다. 이
자의와 힘을 합친 그가 천산 마귀할멈의 가슴팍을 겨눈 채 칼을 뻗었다.
"야앗!"
천산 마귀할멈은 몸을 슬쩍 피하며 순식간에 두 사람의 등뒤로 돌아갔다. 그녀가 검은 소맷
자락을 휘젓자 펑펑 하는 굉음이 일었다. 그녀가 이자의와 초천의 등을 강하게 쳤다. 이자의
와 초천의는 졸지에 그 거대한 힘에 떠밀려 앞으로 고꾸라질 듯했다.
바로 이 순간 여혈의가 냉소를 홀리며 칼을 내리쳤다. 칼날은 곧바로 이자의와 초천의의 숨
통을 끊어 버렸다. 삽시간에 잘려 나간 목에서는 검붉은 피가 솟구쳤다. 두 사람은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하고 절명했다.
여혈의는 한칼에 두 사람을 요절내고는 주위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아직도 덤빌 자가 있느냐?"
모두들 겁에 질려 비실비실 뒤로 물러섰다. 그런데 한 제자가 사람들을 헤치면서 달려나왔
다. 칼을 들고 여혈의를 향해 삿대질을 했다.
"너 같은 반역자는 이 칼에 죽어야 한다!"
이때 다른 제자 넷이 사람들 속에서 뛰어나와 역시 칼을 휘둘렀다. 여혈의가 냉소를 씹어댔
다.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는 것들이 또 있군!"
여혈의는 맞받아치며 달려드는 그들의 가슴을 공격했다. 제자 두 사람이 양쪽에서 공격해
왔다.
여혈의는 두 손으로 땅바닥을 짚으며 몸을 낮추었다. 두 발로 번개같이 달려드는 제자의 아
랫배를 걷어찼다.
"헉!"
두 사람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뒤를 따르던 두 제자가 몸을 솟구치며 쌍칼로 여혈의의 목과 등을 내리찍었다. 여혈의는 이
미 칼을 시체에서 뽑아낸 뒤라 얼른 한 제자의 왼쪽 옆구리를 칼로 찔렀다.
이어서 왼쪽 손바닥으로 다른 한 제자의 칼등을 내리쳤다. 그러자 그 제자의 칼이 떨어졌다.
여혈의가 기다리지 않고 단칼에 그의 목을 베어 버렸다.
연거푸 제자들이 죽자 모두들 더욱 겁에 질렸다.
"아직도 나설 자가 있느냐?"
바들바들 몸을 떠는 사람들뿐이었다.
여혈의의 시선이 노로의의 얼굴에 가 멎었다.
"큰사형, 도소정을 위해 복수할 생각이 없소?"
노로의는 한참 동안 고심을 하더니 대답했다.
"여혈의, 네 놈이 천산 마귀할멈에게 빌붙어 본 궁의 제자들을 무참하게 살육한 죄는 용서
할 수 없다. 네 놈이야말로 악마다. 하지만 내 늙은 몸에는 네 놈을 죽일 힘이 남아 있지를
않구나!"
그는 욕설을 퍼부으면서 제 가슴만 쥐어뜯었다.
여혈의가 다가서며 비웃었다.
"큰사형, 무섭다면 무섭다고 솔직히 말하시오. 무슨 핑계가 그리도 많소? 그런다고 네 놈을
살려 둘 줄 알았느냐?"
여혈의가 갑자기 태도를 바꾸면서 칼을 들었다.
"아니!"
노로의가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노로의는 매초풍에 의해 진기의 대부분을 빼앗겼기에 공력이 얼마 남아 있지를 않았다. 그
래서 그는 여혈의의 칼을 피할 수가 없었다.
"아악!"
결국 그는 여혈의의 칼에 그대로 당하고 말았다. 핏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노로의는 가슴이
터지는 아픔을 참아 가며 피 묻은 칼이 자기 몸에서 다시 뽑히는 것을 보았다. 칼이 뽑아지
자 더욱 힘찬 피가 솟구쳤다.
그는 마지막으로 탄식했다.
"이 칼 끝에도 숱한 적수들의 피를 묻히면서 반평생 강호에서 지내왔는데, 오늘은 이 사악
한 놈의 손에 목숨을 잃는구나……!"
그는 더 이상 입을 벌릴 수가 없었다.
오혈궁 안에 있는 모든 적수들이 죽어 나가자 여혈의는 자기와는 원수지간인 매초풍을 찾느
라고 혈안이 되어 날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