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機關突破
"묻겠어요. 당신의 진정한 정체는 뭐죠?"
예사령은 막 깨어난 오송학을 향해 바람처럼 무심한 어조로 물었다.
그러나 오송학은 공허한 눈길로 허공을 응시할뿐 묵묵무답이었다.
"누구라 해도 상관없어요.
하지만 일개 여자 때문에 그토록 경솔한 행동을 하다니...실망이 크군요."
오송학은 여전히 침묵을 지켰다.
그는 예사령이 수하들을 끌고 와서 자신을 공격했던 일을 기억했다.
필경 그것은 자신을 살리기 위한 고육지책이었으리라.
하지만 그는 솔직히 예사령을 신뢰할 수가 없었다.
암흑마천이 그녀의 부모를 죽인 불공대천의 원수라는 말도
한낱 속임수에 불과할지 모른다.
아니 그런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단지 의아한 것은 밖에서 끊임없이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처절한 비명성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들려오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미 시작됐어요."
"저들은 자기편끼리 서로 죽이고 있어요. 나의 음모에 의해서.."
예사령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피어올랐다.
오송학의 얼굴에 순간 경이의 빛이 가득 떠올랐다.
헌데 이건 또 무슨 말인가?
그렇다면 그녀는 잠입세력을 속인게 아니라
오히려 도남강과 탈혼부주를 속였단 말인가?
그렇다.
본래 그녀는 오송학 때문에 자신이 추진해 온 계략이
일시간에 물거품으로 화할 위기에 처하자
재빨리 임기응변으로 상황을 역이용한 것이었다.
오오..
실로 무서운 심계(心計)가 아닌가?
지금 그녀가 건네준 명단대로 죽어가고 있는 자들은
실상 진정한 탈혼부의 인물들인 것이다.
요악(妖惡) 하다고나 할까?
그녀는 자신을 철석처럼 믿고 있는 그녀의 사형 도남강을 철저히 이용했던 것이니..
이때 예사령이 미소를 멈추고 물었다.
"당신이 어떻게 막 대장과 이중으로 바꿔치기 되었는지는 다음에 듣기로 하고..
막대장이 이끄는 잠입세력과의 연결방법은 알고 있나요? "
침묵을 지키던 오송학의 입이 비로소 열렸다.
그러나 그의 말은 방향이 달랐다.
"저 싸움은 언제쯤 끝날 것 같소?"
"음..오늘 낮 오시(午時)는 되야 끝나겠지요.
그때 당신의 숨은 세력이 지칠대로 지친 탈혼도를 유린 하는 거예요."
그녀는 또 한 차례 흐드러진 교소를 터뜨렸다.
오송학이 무심한 음성으로 다시 물었다.
"당신 사형과 백팔철기대는 누가 대적하오?"
예사령은 웃음을 멈추고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들은 물론 당신이 상대해야지요."
"나더러 당신 대신 죽으라는 말이오?"
"흥, 여인을 위해선 죽음마저 불사하더니
정작 중요한 때엔 죽음이 두렵단 말인가요."
"잠입세력과의 연락방법이나 어서 얘기해 봐요."
"모르오."
"모른다고요? 그럼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갈 수밖에 없어요."
"당신은 똑똑한 줄만 알았더니 이제 보니 그게 아니군."
"내가 모른다 해도 알고 있는 사람이 있을 게 아니오."
이때 밖으로부터 한줄기 소녀의 음성이 들려왔다.
"각주께 아뢰옵니다. 내당의 혈매단주께서 각주를 뵙고자 청하십니다."
순간 오송학과 예사령의 눈이 허공에서 정면으로 맞부딪혔다.
오송학의 고개가 빠르게 끄덕여졌다.
이어 그는 재빨리 한 쪽에 놓인 황금면구를 뒤집어썼다.
예사령의 입이 열린 것은 거의 동시였다.
"들라 해라."
"네!"
밖으로부터 대답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문이 열리고 주렴이 걷히며
전신이 피에 물든 한 명의 은면구인(銀面具人)이 황급히 들어섰다.
바로 혈매단주 선총좌였다.
그는 들어서는 순간, 오송학을 발견하고는 기쁨의 눈빛을 발했다.
"막대장, 무얼하고 계시오? 지금이 절호의 기회요
. 빨리 봉화(峯火)를 올려야 하거늘 어찌 탈혼도에 설치된 기관을 파괴하지 않고..."
"봉화라고...?"
오송학은 부지불식간에 그렇게 내뱉고 말았다.
허나 워낙 경황이 없던 선총좌는 미처 눈치채지 못하고 말을 쏟아 놓기 시작했다.
"기관을 파괴해야 만도(滿島)와 우도(尤島)에 진(陣)을 치고 있는 우리의 세력이
탈혼도를 향해 짓쳐들 것 아니오? 탈혼도 주위에 쳐진 수진(水陣)이 지금껏 우리를..."
"알겠소. 당신은 어서 봉화나 피워 올리시오.
기관(機關)을 파괴하는 문제보다 나는 누가 백팔철기대를 맡느냐를 고심하고 있소."
순간 선총좌가 버럭 언성을 높였다.
"막대장, 정신은 어디다 두었소?
그들을 상대할 사람을 중원(中原)에서 보내온다는 전갈은 당신이 직접 받지 않았소?"
오송학은 자신도 모르게 흠칫했다.
그러한 사실을 그가 모르고 있었음은 당연한 일,
이때 예사령이 오송학의 어색한 입장을 해소시켜 주기라도 하려는 듯 재빨리 입을 열었다.
"알았어요. 기관 파괴는 우리에게 맡기고 선총좌(宣總座)께서 빨리 봉화나 올리세요.
여명이 트기 전에 기관은 파괴 될 거예요."
선총좌는 예사령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더니 오송학을 다시 한 번 힘주어 바라보았다.
"막대장, 만에 하나 실수하면 탈혼도 수복(修復)의 백 오십 년 염원이 수포로 돌아갈 것이오."
'수복이라고...?'
일순 오송학의 두 눈에 격동의 빛이 일었다.
그랬었던가?
잠입세력은 본래의 탈혼도 인물들이었던가?
그렇다면 그들은 바로 풍작(風爵)의 후예(後裔)들이란 얘기가 아닌가?
바로 자신에게 모든 것을 주고 흔적도 없이 죽어간 풍작의...
"알았소. 탈혼도 접수는 반드시 성사될 것이오. 선총좌의 무운(武運)을 비오."
오송학은 말을 마치자 선총좌의 두 손을 굳게 잡아 주었다.
자신의 의지를 심어주기라도 하듯.
선총좌는 그제서야 약간 안심이 되는 기색이었다.
그는 즉시 밖으로 몸을 날려 사라졌다.
오송학은 강렬한 눈길로 예사령을 돌아보았다.
"기관은...?"
예사령은 그가 갑자기 적극적이 된걸 보고는 내심 의아한 느낌이었으나
이내 차분하게 대답했다.
"탈혼도 서쪽에 위치한 해골 모양의 거대한 암동(暗洞) 안에 설치되어 있어요.
만년오금석(萬年烏金石)을 파괴해야 하는데..."
예사령은 만년오금석을 파괴할 수 있겠느냐는 듯 오송학을 바라보았다.
오송학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여 대답을 대신했다.
지옥겁화천(地獄劫火泉)의 양강지력(陽剛之力)으로
두께가 무려 다섯 자도 넘는 혈부(血府)의 철문(鐵門)도 파괴했던 그가 아닌가?
예사령은 문득 밖을 향해 손뼉을 두 번 쳤다.
그러자 문이 열리며 한 명의 흑의소녀(黑衣少女)가 들어섰다.
순간 오송학의 눈빛이 흠칫 굳어들었다.
날렵한 야행복(夜行服) 차림의 흑의소녀는 바로 빙옥교가 아닌가?
그녀는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푹 떨군 채 문 옆에 서 있었다.
예사령이 잘게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호...사랑싸움은 나중에 하도록 하세요."
"이제 해가 뜨려면 반 시간 밖에 남지 않았어요.
그 안에 일을 마무리 지어야 해요. 어서 서두르세요."
오송학이 냉랭하게 입을 열었다.
"나 혼자 가겠소."
"왜요? 저 소저의 무공은 초절해 큰 도움이 될텐데..."
"틀렸소. 오직 귀찮을 뿐이오."
오송학은 냉랭한 투로 한 마디 내뱉고는 성큼성큼 빙옥교 앞을 지나 문을 나섰다.
빙옥교는 쓸쓸한 시선을 들어 예사령을 바라보았다.
예사령은 재미있다는 듯 다시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상황을 보건대 이제부터는 소저께서 그를 죽자사자 쫓아다녀야 할 것 같군요."
빙옥교의 고개가 푹 수그러 들었다.
"자, 어서 가서 그를 도와 주세요. 겉으로 그래도 본심을 그렇지 않을 거예요."
빙옥교는 잠시 머뭇거렸으나 이내 결심을 굳힌듯
재빨리 오송학이 사라진 방향을 향해 몸을 날렸다.
휘익!
* * *
"크아악!"
"으아악!"
여명이 희뿌옇게 밝아오고 있었다.
그 사이로 선홍색 피무지개와 단말마의 비명성이 끊임없이 터져오른다.
한순간 그 처절한 싸움터 위를 유령처럼 날아가는 두 그림자가 있었다.
허나 어느 누구도 그들의 존재에 눈을 돌릴 틈이 없었다.
죽고 죽이기에 경황이 없었으므로...
아니 설혹 누군가 그들을 보았다고 하더라도 필경 한줄기 바람으로 여겼으리라.
두 인영은 천하제일신법인 분광환영표(分光幻影飄)를 펼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두 인영이 신형을 멈춘 곳은 기암(奇岩)과 괴석(怪石)이 난립한 어느 난석지(亂石地)였다.
스윽!
문득 앞서 떨어져 내린 인형이 막 자신의 곁에 떨어져 내리고 있는
가냘픈 몸매의 인영을 냉막하게 돌아 보았다.
"나는 이제 네가 어떻게 되어도 도와줄 수 없다."
오송학과 빙옥교.
그들의 눈길과 눈길 사이로 피비린내 섞인 바람이 간단없이 스쳐 지나갔다.
원래도 그랬지만 빙옥교는 말이 없다.
오송학의 눈빛이 일순 미세하게 흔들렸다.
.저 말 없는 차가움이 좋았는데..
오송학은 그녀를 외면하고는 주위를 살폈다.
이내 그의 시야에 죽음의 화신(化身)인 양 음산하게 도사리고 있는
하나의 거대한 바위가 들어왔다.
뻥 뚫린 위쪽의 두 구멍과 그 아래로 움푹 패인 삼각의 철형(凸形),
그리고 지옥(地獄)의 입구(入口)인 양 시커먼 입을 쩍 벌리고 있는 거대한 동혈(洞穴)..
영락없는 해골의 형상이다.
지금껏 지나온 곳과는 달리 이곳은 몹시 조용했다.
스산한 새벽바람만이 높이 백여 장의 암벽을 핥듯 스쳐 지날 뿐..
오송학은 지면을 박차고 암벽 위를 향해 신형을 솟구쳐 올렸다.
휘- 이- 익!
빙옥교의 신형이 그의 자취를 놓칠세라 뒤따랐다.
한 번 도약에 무려 삼십여 장!
턱!
단번에 삼십여 장을 날아 오른 오송학은
전면의 바위를 살짝 걷어차며 다시 도약했다.
헌데 그때였다.
"침입자다!"
돌연 쩌렁쩌렁한 외침성과 함께
위에서 벌떼처럼 청동면구인들의 모습이 나타났다.
오송학은 허공에 뜬 채 주춤했다.
바로 그때다.
그의 시야로 한줄기 굉렬한 불기둥이 파고든 것은.
멀리 탈혼도 정상으로부터 피어오른 불기둥!
그것은 봉화(峯火)였다.
탈혼도를 취하기 위해 백 오십 년의 세월을 참아온 봉화가 마침내 피어오른 것이었다.
이제 저 봉화가 피어 올랐으니 인원을 알 수 없는 인물들이 배를 띄워
탈혼도를 향해 밀어닥칠 것이다.
그러므로 탈혼도를 겹겹이 에워싼 기관을 반드시 파괴시켜야 한다.
만에 하나 실패하면 백 오십 년을 한(恨) 속에 살아온 사람들을
영원히 수장(水葬)시키게 되는 것이다.
오송학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해내고 말 것이다!"
쐐- 애- 액!
그의 신형이 거침없이 허공을 갈랐다.
한둘기 빛살과도 같은 몸놀림...
"제일관(第一關)을 작동시켜라!"
석벽 위로부터 악받친 고함소리가 터져나왔다.
순간,
휘휘휘휘휘휙-!
수천여 자루의 핏빛 혈리표(血狸飄)가 지면으로부터 폭죽터지듯 쏘아져 올랐다.
전혀 예상도 못한 느닷없는 암공(暗攻)!
허나 그것으로도 끝은 아니었다.
"제이관(第二關), 제삼관(第三關)도 동시에 작동시켜라!"
츠츠츠츠츳!
파파파파...
뿌옇게 터오던 여명이 마치 수억의 점(點)으로 화하듯 산산이 갈라지며 처절히 울어댔다.
암기(暗器)의 소나기!
수도 헤아릴 수도 없이 전신으로 폭사해드는 암기, 암기들!
순간이다.
번쩍!
오송학의 몸에서 눈이 아릴 정도로 시뻘건 혈광(血光)이 폭사되었다.
그리고 그 혈광은 오송학의 몸과 일체(一體)가 되어 암기의 숲으로 쏘아져 들었다.
챙! 챙! 챙!
파파파파팟!
고막을 찢을 듯한 금속성과 함께 혈광으로부터 새파란 불똥이 무지개처럼 튀어올랐다.
오송학의 신형은 찰나지간 또다시 삼십여 장을 비상(飛上)해 올랐다.
그의 오른손엔 혈혼검이 들려 있었다.
암벽으로부터 다급한 음성이 터져나왔다.
"놈을 막아라!"
순간 백여 명에 달하는 청동면구인들이 일제히 오송학을 향해 공격해들었다.
휙! 휙! 휙!
그러나 오송학은 추호도 흔들림없이 오로지 한 방향,
해골모양의 암동(暗洞)을 돌진했다.
동시 그의 우수에 들려진 혈혼검에선 시뻘건 혈광이 섬전처럼 흩뿌려지고 있었다.
"크아악!"
"카아악!"
파공성이라든가 격타음이 들리기도 전에 비명이 먼저 터졌다.
피분수와 찢겨진 살점들이 분분히 날렸다.
아아...
그것은 일방적인 도륙(屠戮)이었다.
그때 쉴새없이 가공한 살검(殺劍)을 작렬시키고 있는 오송학의 귓전으로
한줄기 음성이 파고들었다.
"시간이 없어요! 이곳은 제게 맡기세요!"
그 음성은 분명 빙옥교의 음성이었다.
헌데 비록 황망중에 토해내 다급한 음성이라 하나 너무도 부드럽지 않은가.
예전의 싸늘함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존칭까지 곁들여 있었던 것이니..
오송학은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물찬 제비처럼 청동면구인들 사이를 누비고 있었다.
'옥교..!'
오송학은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두고는 다시 전광석화처럼 위로 신형을 솟구쳐 올렸다.
이윽고 하나의 거대한 동혈이 그의 시선을 파고들었다.
파아앗!
그의 신형이 동혈 속으로 번뜩 쏘아져 들어갔다.
그는 동혈 속으로 들어서자마자 한 쪽 석벽을 향해 매섭게 일장(一掌)을 후려쳤다.
꽈르르릉!
천외기환록(天外奇幻錄)과천붕파해공(天崩破解功)을 익힌 그다.
기관이 매복된 석벽을 부수는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꽈꽈꽝-!
재차 일장이 발출되자 석벽이 균열을 일으키며 쩍쩍 갈라기지 시작했다.
순간 갈라진 석벽안에서 일단의 청동면구인들이 쏟아져 나오며 그에게 달려들었다.
"놈을 막아라!"
허나 이미 오송학의 무시무시한 기세는 그들의 힘으로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풍차처럼 몸을 회전시키며
연달아 오행(五行)의 방향으로 경천동지할 장력을 발출해냈다.
"으아악!"
"아악!"
달려들던 청동면구인들은 그의 장력에 휩쓸려 추풍낙엽처럼 날아갔다
. 한순간 동혈 전체가 금방이라도 무너져내릴 듯 굉렬한 진동을 일으켰다.
두두두두...
허나 그 진동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동혈의 칩입자를 막기위한 기관이 완전히 파괴된 것이었다
. 달려들던 청동면구인들도 그 와중에 모조리 처참한 몰골로 죽어 있었다.
"이제 해안에 설치된 기관 조종장치들을 파괴할 차례로군!"
스슥!
오송학은 즉시 균열이 나서 갈라진 동혈 틈으로 신형을 날려 스며들었다.
동혈 입구에 빙옥교가 내려선건 바로 그때였다.
그녀는 장내의 상황을 보고는 대충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자신을 향해 막 추격해드는 청동면구인들을 노려보았다.
"오너라! 어느 누구도 이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을 것이다!"
오송학은 아래로 비스듬히 뚫려있는 새로운 통로를 질주하고 있었다.
주위 석벽엔 군데군데 야명주가 밝혀있어 사위를 밝혀주었다.
'서둘러야 한다!'
그에겐 한시도 망설일 여유가 없었다.
이제 곧 태양은 떠오를 것이다.
대선단(大船團)은 이미 탈혼도를 향해 만경창파(萬頃蒼波)를 헤치고 몰려들고 있을 것이다.
그들이 도착하기 전에 바다에 설치된 기관의 조종장치를 파괴해야만 했다.
한순간 동혈이 왼쪽으로 급선회했다.
오송학의 신형이 그 방향을 따라 바람처럼 흘러들었다.
바로 그때였다.
파아악!
파악!
십여 줄기의 시퍼런 검광(劍光)이 그를 향해 짓쳐들었다.
일초 변식(變式)도 없이 곧 바로 숨통을 조여드는 살수(殺手) 특유의 발검(拔劍)!
순간,
번- 쩍!
오송학은 혈혼검을 일직선으로 내뻗었다.
허나 방향은 일직선이되 열 방향으로 갈라져 폭사되는 시뻘건 검광(劍光)!
오오...
바로 고혼유찰(孤魂幽刹)의 살수지검(殺手之劍)이 아닌가?
"으아악!"
"크악!"
정확히 열번의 핏빛 무지개가 작렬하고 열번의 비명성이 터졌다.
그 순간 오송학의 신형은 이미 나뒹구는 열 구의 시체 위를 스쳐 지나고 있었다.
둥! 둥! 둥!
선단(船團)-
한 떼의 선단이 탈혼도를 향해 몰려들고 있었다.
일견해 보기에도 무려 백여 척...
그 모든 배의 선수(船首)엔 사각의 깃발이 하나씩 펄럭이고 있었다.
<大意(대의).>
눈처럼 흰 깃폭에 황금색의 수실로 수놓여져 있는 그 두 글자!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필시 깊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듯 한데..
붕...부우웅...
선두의 배로부턴 연신 고동소리가 울려퍼져 새벽 바다의 정적을 길게 길게 깨뜨리고 있었다.
한순간 선단 중앙의 묵선(墨船)으로부터 우렁찬 외침이 울렸다.
"탈혼도가 보인다! 전대(全隊), 전속으로 항진하라!"
촤-아-아!
촤- 아!
백여 척의 배는 일제히 속력을 가해 물결을 가르기 시작했다.
때마침 그들을 맞이하기라도 하듯 탈혼도의 한곳에선 거대한 불기둥이 칫솟아 오르고 있었다.
봉화(峯火)!
바로 봉화였다.
헌데 돌연,
꽝-!
앞서 질주하던 한 척의 거선이 굉렬한 폭음과 함께 심한 요동을 쳤다.
수진(水陣)!
탈혼도의 전체를 수십 겹으로 둘러친 수진에 걸려든 것이었다.
"으악!"
"아아악!"
비명을 지를 새도, 빠져 나올 틈도 없었다.
수진 속에 말려든 거선은 순식간에 물속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멈춰라! 방향을 돌려라!"
다급한 외침이 터져올랐다.
"아직 기관이 파괴되지 않았다!"
콰앙!
우지끈!
"으- 악!"
"크- 악!"
수진(水陣)에 말려든 세 척의 배가 다시 바닷속으로 침몰해 갔다.
선단 중앙의 묵선 위로 두 명의 인물이 황급히 모습을 드러낸 것은 바로 그때였다.
신발도 신지 않은 맨발에 털이 숭숭한 다리가 무릎까지 드러날 정도로
짧은 바지를 걸친 홍의괴승(紅衣怪僧),
그리고 일신에 단아한 백의(白衣)를 걸친 문사(文士)차림의 청수한 중년인이다.
그렇다.
그들은 바로 주육광승과 유작이었다.
그들은 돌처럼 굳어진 신색으로 섬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럴수가...!"
"실패했단 말인가?"
바로 그 시간,
콰드득!
오송학은 하나의 회색빛 대리석 문을 박살내며 한 석실내부로 들어서고 있었다.
허나 다음 순간 그는 자신도 모르게 그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그의 시선을 가득 파고든 것은 일곱 명의 노인(老人)이었다.
놀라운 사실은 그들이 모두 두 다리가 절단된 채
만년한철(萬年寒鐵)의 사슬에 의해 온몸이 칭칭 결박당해 있다는 사실이었다.
대체 이 칠인(七人)의 괴노인(怪老人)들은 누구인가?
빙옥교,
그녀의 전신은 성한 곳이 없었다.
곳곳의 상흔(傷痕)으로 하여 마치 피로 목욕을 한 듯 했다.
그러나 그녀는 잠시도 손속을 멈추지 않았다.
"물러서라!"
"으악!"
"으으악!"
망아존자의 신공절학(神功絶學)들이 그녀의 손을 통해 연속적으로 쏟아져 나왔다.
처절한 죽음의 절규를 불러일으키는 가공할 살초(殺招)들,
허나 아무리 적을 쓰러뜨려도 적들의 숫자는 도무지 줄어들줄을 몰랐다.
한순간 그녀는 너무 탈진한 나머지 기혈이 역행하여 울컥 선혈을 토해내고 말았다.
"우욱!"
휘청!
그녀의 신형이 쓰러질 듯 비틀거렸다.
이제 남은 청동면구인들은 이십여 명, 그동안 족히 백여 명은 죽였으리라.
빙옥교는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그녀의 흐릿해지는 의식 속에 그 이십여 명이란 숫자는 태산같이 느껴지고 있었다.
거의 탈진 상태에 이른 그녀는 동혈 석벽에 몸을 기대고 간신히 버티고 섰다.
청동면구인들은 그녀가 갑자기 흔들리는 모습을 보자 갑자기 기세가 등등해졌다.
"저 악독한 계집을 죽여라!"
쐐- 애- 액!
쐐-액!
위기의 순간 빙옥교의 입술을 피가 나도록 질끈 베어물었다.
'내가 죽기 전에는 누구도 여길 지날수 없다!'
그녀의 손이 번쩍 쳐들렸다.
"분광환영섬(分光幻影閃)!"
순간,
번-쩍!
오오...
이것이 무엇인가?
푸른색 청광(靑光)을 발하는 옥환(玉環) 하나가 빚어내는 저 엄청난 광경을 보라!
옥환은 고막을 갈가리 파열시킬 듯 날카로운 소성을 몰고
닿으면 닿은대로, 닥치면 닥치는대로 허공을 섬전처럼 날고 있지 않은가?
"으아악!"
"크악!"
이십여 청동면구인들의 입에서 거의 한꺼번에 처절한 비명이 터져울렸다
. 그것은 실로 눈깜짝할 새에 벌어진 일이었다.
빙옥교는 그만 자신의 눈을 의심하고 말았다.
"이럴수가..!"
청동면구인들은 모두 시체로 변해 지면에 나뒹굴고 있었다.
사위에는 갑자기 쥐죽은듯 고요한 정적이 찾아들었다.
"취록신환(翠綠神環)의 위력이 이토록 무서울 줄이야..!"
빙옥교는 갑자기 전신의 긴장이 풀리는걸 느끼며 석벽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았다.
그녀는 새삼 망연자실 자신의 손가락에 있는 취록신환을 내려다보았다.
그래...이 취록신환은 그가 준거야.
나는 이것을 받지 않겠다고 그의 뺨을 열 세대나 호되게 때렸었지.....
하지만 그는 그렇게 맞으면서도 얼굴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어.
아니 그는 오히려 웃었지...
웃으며 사정하듯 내게 주었던 거야.
그래...
나는 나쁜 계집이었어.
아니 눈이 먼 계집이었어.
복수라는 미명(美名) 아래 자신조차 망각해 버린..
하지만...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후훗...
*
너는 기관을 파해하러 왔느냐?"
일곱노인 가운데 한명이 물었다.
"그렇소. 당신들은 누구요?"
오송학이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되물었다.
그러자 질문을 했던 노인이 괴이한 눈빛을 발하며 대꾸했다.
"너는 불가능한 일을 하려 하고 있다. 늦지 않았으니 물러가라."
"당신들은 묶여있는 처지같은데 왜 날 제지하려 하시오?"
"우리 몸에 연결된 만년한철의 쇠사슬을 잘 살펴보아라."
오송학은 그제서야 일곱노인의 몸에 연결된 사슬들이
하나의 반추형의 둥근 오금석(烏金石)에 연결되어 있음을 발견했다.
'이제보니 저것은..!'
노인이 다시 스산한 음성으로 입을 떼었다.
"너는 이제야 알겠느냐? 우리는 그냥 묶여 있는게 아니다.
위에서 신호를 보내면 그에 따라 우리가 사슬을 잡아당기고..
그 힘으로 바다에 설치된 기관들이 작동하는 것이다."
아아..
그러했던가?
오송학의 눈에 일순 번갯불같은 신광이 폭사되었다.
"그렇다면 나는 당장 당신들을 죽이고 저 오금석을 폭파시켜야 하겠구료."
"광오하기 짝이 없는 놈이로구나. 허나 네가 알아야 할 사실이 있다.
이 오금석을 잘못 건드리면 이곳에 묻혀진 엄청난 양의 폭약이 터지게 되어 있다."
"네가 죽는 것은 상관없지만 우리는 결코 함부로 죽을 수 없는 몸이다.
그러니 당장 물러가도록 해라."
"설령 그렇게 된다고 해도 어쩔수 없소!"
오송학은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벼락같은 기세로 혈혼검을 휘둘러갔다.
번-쩍!
순간 일곱노인이 일사불란하게 오금석을 중심으로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까가가강!
오송학의 눈가에 일순 경악의 빛이 떠올랐다.
혈혼검이 노인들의 몸에 연결된 만년한철의 사슬에 뒤엉켜버린 때문이었다.
동시 노도같은 잠력이 쇠사슬에 얽매인 그의 검날을 통해 그의 몸으로 밀려들었다.
그것은 실로 상상을 초월하는 어마어마한 공력이었다.
'우욱! 이건...!"
오송학은 하마터면 들고있던 혈혼검을 놓치고 뒤로 물러설뻔 했다.
그는 그제서야 한가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그것은 자신의 검을 향해 밀려드는 공력이 한 명의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렇다.
선두의 노인을 중심으로 나머지 여섯 명의 노인들은
서로의 등 뒤 명문혈(命門穴)에 장심(掌心)을 붙이고 대항하고 있었다.
연수합일(練手合一)!
바로 여러 사람의 공력을 한 사람에게 집중시켜 대항하는 수법이 아닌가?
'으윽...!'
오송학의 전신이 벼락을 맞은 듯 세찬 진동을 일으켰다.
검신(劍身)을 통해 노도처럼 짓쳐드는 한줄기 잠력(潛力)!
정녕 가공했다.
이미 시체에 가까운 참혹한 몰골의 노인들이 펼쳐내고 있는 것이라 여길 수 없는
무시무시한 공력이었다.
오송학의 이마 위로 송글송글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얼굴도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도 지금 마주 공력을 쏘아보내고 있는 것이었다.
다른 방도는 없었다.
여기서 공력을 회수하거나 상대방의 공력을 견뎌내지 못한다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방법이 있다면 쌍방이 동시에 공력을 회수하는 것 뿐...
오송학은 만박여의심공(萬博如意心功)을 운용해
지옥겁화천(地獄劫火泉)에서 흡수한 극양진기(極陽眞氣)를 급속도로 끌어올렸다.
순간, 석실 내부로 화염(火炎)이 폭발하듯 뜨거운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다.
"멈추어라!"
돌연 혈혼검의 검끝을 움켜쥐고 있는 노인의 입에서 벼락같은 호통이 터져나왔다.
그 순간,
오송학은 상대의 공력이 급속도로 감소됨을 느끼고 자신도 재빨리 공력을 회수했다.
허나 여섯 명의 노인들은 먼저 공력을 회수한 까닭에
오송학이 미처 회수하지 못한 공격의 여파로 극심한 충격을 받아야 했다.
"으윽!"
"헉!"
여섯 줄기의 고통스런 신음성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오랫동안 햇빛을 못받은 탓에 백지장처럼 창백하던 노인들의 안색이 잿빛으로 돌변했다.
그리고 입가로 주르르 흐르는 선혈...
그들은 필시 엄중한 내상(內傷)을 입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오송학의 두 눈에 짙은 의혹의 빛이 어렸다.
저들은 어찌하여 죽음을 불사하고 먼저 공력을 거둬들였단 말인가?
이때 혈혼검을 잡았던 노인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아이야...우리는 기문칠로(奇門七老)라고 한다."
'기문칠로...?'
오송학은 내심 당혹감을 금치 못했다.
명호로 보아 노인들은 기문(奇門)이라는 문파에 소속된 인물들인듯 했다.
허나 오송학은 무림에 그런 문파가 존재한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허나 강호의 일부 지인(知人)들 사이엔 아득한 옛날부터
기문(奇門)에 대한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져오고 있었다.
기문이 언제 창시되었는지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대부분의 무림인들은 실상 기문이란 문파(門派)가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기문은 기관진학(機關陣學)과 수리역학(數理易學)에 있어
독보적인 경지를 소유했으며,
전통적으로 무림의 대소사(大小事)에 일체 관여나 간섭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또한 기문의 역사는 최소한 천여 년이 넘는다고도 했다.
헌데 지금으로부터 일백여 년 전,
기문에 대한 또하나의 소문이 세상에 흘러나왔다.
그것은 기문이 하루아침에 의문의 멸문(滅門)을 당했으며
최고고수들인 기문칠로(奇門七老)도 동시에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었다는 내용이었다.
한데...
뜻밖에도 그 기문칠로가 바로 이 탈혼도에 모습을 나타낸 것이니
실로 괴이한 일이 아닌가?
"아이야..우리는 단지 널 시험하고자 했을 뿐이다.
우리가 중도에서 손을 거둔것은
네 몸에 지옥겁화천의 극양지기가 흐르고 있음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너는 이제 마음대로 이 오금석에 숨겨진 기관을 파괴해도 된다."
노인의 얼굴에는 만감이 한꺼번에 교차하고 있었다.
그는 엄숙한 신색으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극양진기(極陽眞氣)을 이용해서 충격을 주지 않고 오금석을 녹여야 한다.
성공한다면 너는 죽지않고 여길 나갈수 있을 것이다."
오송학은 아직도 내심 풀리지 않는 의문이 많았지만
상황이 촉박한지라 더이상 묻지 않고 오금석을 향해 접근했다.
이어 그는 전신의 공력을 서서히 극성까지 끌어올렸다.
기문칠로는 기대감에 찬 눈으로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었다.
터질듯한 긴장속에 잠시 고요한 정적이 흐르고...
한순간 오송학은 허공에 달을 그려내듯 느리지도 빠르지 않게 손을 앞으로 내뻗었다.
휘류류륭!
순간 그의 양손에서 은은한 혈광(血光)이 벼락같은 기세로 뿜어졌다.
그 혈광은 만년오금석에 닿는 순간 새파란 청광(靑光)으로 돌변했다.
츠츠츠츠츳...!
청광에 휩싸인 오금석에서 새파란 불똥이 폭죽터지듯 튀어올랐다.
만년오금석이 스물스물 녹아내리기 시작한건 그 직후였다.
석실 안은 순식간에 용광로처럼 달아올랐다.
그 엄청안 광경을 보며 기문칠로는 일제히 몸을 부르르 떨며 격동성을 토해냈다.
"오오...실로 가공할 극양진기(極陽眞氣)로다!"
"역시 짐작대로 지옥겁화천(地獄劫火泉)의 신비(神秘)를 푼 것이 틀림없다!"
이윽고 만년오금석은 형체도 없이 완전히 녹아버렸다.
순간 석실전체가 은은한 진동을 일으키더니
이내 오금석 아래쪽에서 우뢰와 같은 굉음이 들려왔다.
쿠쿠쿵!
오송학은 이미 기문칠로에게서 오금석을 잘못 건드리면
주위가 통째로 폭발하며 붕괴한다는 사실을 들은터라 내심 바싹 긴장했다.
허나 하늘이 도왔음인가?
진동은 이내 거짓말처럼 조용히 가라앉았다.
'성공했구나!'
그렇다.
완벽한 성공이었다.
마침내 탈혼도 주위에 펼쳐졌던 가공할 수진(水陣)이 거두어진 것이었다.
촤아악-!
촤-아-아-악!
돌연 탈혼도 주위의 물결이 해일(海溢)을 만난 듯 미친 듯 광란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허공으로 수십여장 높이의 거대한 물기둥들이 치솟아 올랐다.
그러나 그것은 한순간이었을 뿐, 파도는 이내 거짓말처럼 잔잔하게 잦아들었다.
선단의 중앙 묵선에서 우렁찬 대갈이 터져 나온 것은 그때였다.
"오오...수진이 파괴되었다!"
"전대(全隊), 전속력으로 돌진하라!"
뿌우우-!
고동소리가 장엄하게 허공에 울려퍼졌다.
그것을 신호로 백여 척의 선단은 일제히 탈혼도를 향해 쾌속하게 질주해 갔다.
"성공이오! 성공이외다!"
주육광승은 한시도 손에서 떼지 않던 술호로를 바닥으로 떨어뜨리며
유작의 손을 덥석 잡았다.
"선사(禪師)!"
마주 잡는 유작의 손에 힘이 가해졌다.
"그 아이는 결국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는 않았구료!"
"그렇소이다! 그렇고 말고요!"
바로 그 시간.,
오송학은 혈혼검으로 기문칠로의 몸을 묶고 있던 만년한철 사슬을 차례로 절단하고 있었다.
이윽고 그는 자유의 몸이 된 그들을 응시하며 담담히 말했다.
"어쨌거나 마지막 순간에 날 도왔으니 지금까지 당신들이 놈들을 위해 살아온것은 용서하겠소."
그는 말을 마치자 마자 빙글 몸을 돌렸다.
순간 한 노인이 침중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아이야, 너는 우리의 얘기를 듣고 가야 한다."
휘이익!
휘익!
기문칠로는 유령처럼 신형을 번뜩이며 오송학의 앞을 가로막았다.
다리가 없는 사람들이 펼친 것이라고는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기쾌무비한 신법이었다.
오송학의 입가에 냉소가 떠올랐다.
"아무래도 당신들을 잘못 풀어준 모양이오."
"아이야, 우리는 이미 삶에 대한 미련을 버린 지 오래다."
"하지만 죽기 전에 반드시 해야할 일이 있다.
그것 때문에 백년 세월을 굴욕 속에서도 살아 온 우리이다."
"너는 우리의 부탁을 들어 주어야 한다."
단호한 음성이었다.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투의 어조..
"왜냐하면 너는 천강치우지성(天剛稚尤之星)이기 때문이다.
지옥겁화천의 신비를 풀 수 있는 자, 천강치우지성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좋소. 어디 부탁이란 것을 한 번 들어나 봅시다."
"우선 너는 천외기환록(天外奇幻綠)과 환영경(幻影鏡)을 반드시 찾아야 한다."
순간 오송학의 두 눈에 의혹의 빛이 스쳤다.
천외기환록과 환영경이라는 이름이 어찌 가환칠로의 입에서 새어 나온단 말인가?
"아이야, 원래 그것들은 본문(本門)의 것이었다.
본문의 조사(祖師)이신 천외기환인(天外奇幻人)께서 만드신 것이다."
일순 오송학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천외기환인이 기문의 조사란 말이오?"
"오오..너는 그분의 이름을 알고 있었단 말이냐?"
반문하는 기문칠로의 놀라움은 오송학 보다 더욱 컸다.
설마하니 오송학이 천외기환인을 알고 있으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으리라.
오송학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나는 이미 천외기환록을 글자 하나 빼놓지 않고 외우고 있소.
또한, 환영경도 반쪽을 지니고 있소."
"뭐...뭣이? 그게 사실이냐?"
"틀림없는 사실이오."
오송학은 품속에서 반쪽의 환영경을 꺼내 들어보였다.
그것을 확인한 노인들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트... 틀림없는 환영경이다!"
"오오..조사의 칠백년 유시(遺示)가 이제 드디어 이루어지는구나!"
그들은 한결같이 감격을 주체하지 못한듯 눈가에 뿌연 안개가 서리고 있었다.
내면에 이는 격동이 얼마나 큰지 능히 짐작할 수 있는 모습들이었다.
처음 입을 열었던 노인이 다시 말을 계속했다.
"너는 천외기환록의 마지막 장에 남겨진 그림과 싯귀를 기억하고 있느냐?"
"물론이오."
"그 그림과 싯귀가 바로 천외기환인의 진전(眞傳)이 숨겨져 있는 장소의 암시이며,
환영경은 그곳을 열 수 있는 열쇠이다.
그리고 그곳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천강치우지성뿐이다."
"그런 즉, 너는 하루 빨리 나머지 환영경의 반쪽을 찾아 천외기환인의 진전을 잇도록 해라.
그것만이 암흑(暗黑)의 도탄에 빠진 천하를 구하는 길이다."
노인의 입에서는 실로 오송학이 상상하지도 못했던 엄청난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과거 본궁이 자리했던 곳이 십만대산(十萬大山)이니
그 그림은 십만대산의 어딘가를 암시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 일로 인해 노부들은 그동안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었다.
암흑마천이 본문을 멸문시키고 이곳 탈혼도에 기문둔갑을 설치코자
노부들을 이곳으로 끌고 왔어도..
노부들은 암흑마천의 요구대로 모두 해주었다.
비록 본문 조사의 유시를 그대로 흙속에 묻을 수없었기에..."
"아...!"
"이제와 생각하면 부질없는 짓이었지...네가 이미 그것을 풀어가고 있었으니 말이다."
회한(悔恨)인가, 안도인가?
노인의 얼굴에 허탈한 웃음이 번져올랐다.
하기사 무려 백년 동안을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겪으면서도 살아왔던 그들이었다.
지금 그들이 느끼는 감정를 어느 누가 헤아릴수 있겠는가.
문득 노인의 얼굴에 엄숙한 신색이 떠올랐다.
"우리가 이렇게 만난 것은 실로 천운(天運)이 아닐 수 없다.
하여, 노부들은 너에게 한가지 선물을 주고자 한다."
"몸이 분리되거나 부서져 버리지 않는한 절대 죽지 않는 불사(不死)의 대법(大法)..
우리는 회혼불사대법(廻魂不死大法)으로 너를 세수할 것이다."
"그...그건 가당치 않소!"
오송학은 안색이 대변해 다급히 뒤로 물러섰다.
허나 기문칠로의 움직임을 그보다 빨랐다.
오송학에겐 더이상 무어라 말할 틈도 주어지지 않았다.
오행(五行)과 구궁(九宮)을 점하고 닥쳐온 그들은 일제히 오송학을 에워싸더니
그의 몸 십이대요혈(十二大要穴)에 장심(掌心)을 갖다댔다.
천령개(天靈蓋), 단전(丹田), 명문(命門), 기해(氣海), 용천(勇泉)등등..
오송학은 이미 그들이 결심을 굳혔다는걸 알고는 당혹을 금치 못했다.
그는 이미 회혼불사대법(廻魂不死大法)에 대해선 천외기환록을 통해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기문칠로(奇門七老)는 모든 공력을 넘겨준 후 흔적도 없이 죽어가게 되는 것이다.
"아이야..거부하지 말고 마음을 가라앉히도록 해라.
우리는 이제 여한이 없는 몸..오직 하늘에 감사할 따름이다"
* * *
태양은 동천의 한뼘 높이로 떠올랐다.
그 여명(黎明) 아래 백여 척의 선단이 닻을 내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탈혼도의 곳곳에서는 생사(生死)를 가르는 죽음의 비명성이 끊임없이 터져 오르고 있었다.
"커헉...자네 미쳤나?"
"미친건 암흑마천의 주구(走狗)인 네놈이다!"
"도.. 도대체 자네는 누...누구...?"
"원래 탈혼도의 주인이다."
"크으윽...! 이..이런 음모...끝장..."
어제까지만 해도 같은 방을 쓰던 동료의 칼에 찔린 그 인물은
그 말을 끝으로 가슴에 피분수를 뿜어내며 쓰러졌다.
그렇다.
탈혼도 전체에서 똑같은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와아! 암흑마천의 주구들을 남김없이 도륙해라! 탈혼도 백 오십 년 한을 풀어라!"
"으-악!"
"이.. 이게 어찌된 일이냐?"
섬의 다섯 곳 동서남북(東西南北)에서 불기둥은 동시에 뻗쳐 올랐다.
그와 함께 벌떼처럼 새까맣게 쏟아져 나온 죽음의 사신(死神)들..
백 오십 년의 처절한 한을 차가운 검날에 뜨겁게 채우고,
그들은 죽이고 또 죽였다.
그리고 또 한 무리..
해변으로부터 탈혼도 중심부를 향해 새까맣게 밀려드는 무리들이 있었다.
그들은 바로 대선단으로부터 쏟아져 나온 인물들이었다.
암흑마천의 제자들은 완전히 혼돈에 빠지고 말았다.
대체 누가 적이며 누가 우군인가?
서로를 믿지 못하는 그들은 오직 살기 위해 다시 아군끼리 칼을 휘둘렀다.
그들은 꿈에도 알지 못했다.
밤새도록 자신들의 칼에 스스로 침몰해갔다는 사실을..
예사령,
모든것은 바로 그녀의 무서운 심계(心計)로 인한 결과였다.
그러나 도남강이 지휘하는 백팔철기대와 탈혼부주 섭시명 직 속의 사사혈기단은
아직도 그 위력을 잃지 않고 있었다.
오송학은 한 절벽의 위에 우뚝 서 있었다.
"풍작(風爵)...아니, 사사부(四師父).. 보고 계시오?
당신이 잃은 탈혼도가 당신의 후예들에 의해 접수되고 있는 저 모습을 말이오."
탈혼도의 곳곳에서 벌어지는 격전을 지켜보며 그는 긴 탄식을 흘려냈다.
"사사부.. 당신의 후예들은 정녕 훌륭합니다.
백 오십 년을 땅속에서 두더지처럼 살며 힘을 기른 그 인내는 그저 놀라울 뿐입니다."
오송학은 마치 풍작의 영혼이 자신앞에서 활짝 웃고있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허허...너 또한 노부의 후예가 아니더냐?
오송학의 두 눈에 뽀얀 물안개가 피어올랐다.
"물론이지요. 사사부께서는 항상 제 몸속에 살아 계시니까요."
바로 그때였다.
한줄기 백영(白影)이 그의 옆에 절륜한 신법으로 모습을 나타냈다
. 인자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그 백의중년인은 바로 유작이었다.
오송학은 그의 출현에 일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대사부(大師父)께서 어찌...?"
"수고했다. 송학, 이것이 네겐 큰 경험이 되었으리라 믿는다.
그러나 네겐 아직 할 일이 하나 남아 있다."
"백팔철기대..인성(人性)을 상실한 그들을 영원히 잠재워야 한다."
그말에 오송학의 뇌리를 퍼뜩 스쳐가는 것이 있었다.
'그렇다면 백팔철기대를 대적하기 위해 중원에서 보내져 온다던 인물이 바로 나였단 말인가?'
유작은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는 오송학을 바라보며 잔잔한 미소를 떠올렸다.
"어떠냐? 자신 있느냐?"
오송학은 정색을 하며 밝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대사부 답지 않으신 질문입니다. 대사부께선 제자를 믿지 않으십니까?"
"허허.. 내 어찌 너를 믿지 않겠느냐? 어서 가거라."
그말에 오송학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이제 유작은 그에게 있어 포근한 안식처나 다름이 없었다.
그렇기에 그의 한마디 한마디는 큰 힘으로 가슴에 와 닿는 것이다.
오송학은 유작을 향해 공손히 예를 취했다.
다음 순간 그의 신형이 한줄기 빛살처럼 허공을 가르기 시작했다.
유작은 절벽 아래로 쏘아져 날아가는 그의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긴 탄식과 함께 하늘을 응시했다.
"아우들..보고 있는가? 아우들이 키워낸 저 잠룡(潛龍)의 용트림을.."
밝아오는 햇살에 눈이 아리었음인가?
그의 눈가에 흐릿한 물기가 배었다.
"이제 나도 아우들 곁으로 갈 때가 다가온 것 같네. 잠시만 더 기다려들 주게.
송학을 위해 반드시 해야할 일이 아직 한 가지 남아 있으니...
그 일로 인해 송학은 큰 충격을 받을 것이네.
허헛...하지만 어쩌겠는가..."
대체 무슨 말인가?
유작의 눈가에는 그순간 어떤 고뇌의 그림자가
무겁게 드리워지고 있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