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 장 생(生)과 사(死)의 갈림길
(1)
숭산(嵩山) 소림사(少林寺)……
천하 무예의 조종(祖宗)으로 일컬어지기에 한 점 부족함이 없는 당당한 위세.
고풍스런 멋이 배어있는 웅장한 불당과 전각들이 숭산의 봉우리 속에 감싸여 고즈넉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느낄 수 있었다.
소림사의 모습 속에서 세찬 풍랑을 일으키는 한 줄기 세찬 바람이 불고 있음을……
소림사 방장실에선 은은한 차 향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탁자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찻잔 세 개가 놓여져 있었다.
놀라운 것은 그 찻잔의 주인들이었다.
흰 수염을 가슴 앞에 길게 드리운 소림 장문인 홍우선사(弘宇禪師).
머리는 봉두난발한 죄수처럼 헝클어져 있고 옷에선 땟국물이 줄줄 흐르는 개방 방주 노각자(老覺子).
불그레하고 윤기가 도는 얼굴에 흰 도복을 말쑥하게 차려 입은 무당파 장문인 송엽도장(松葉道長).
한 사람만 움직여도 천하가 움찔한다는 그들이 지금 한 곳에 모여 있는 것이다.
좌중의 분위기는 어두웠고, 암담하기까지 했다. 침묵은 길게 이어졌고, 세 사람이 번갈아 내쉬는 한숨 소리만 간간이 들렸다.
오랜 침묵 끝에 홍우선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늘 아침 자금성으로부터 황명이 하달되었소. 향후 백 년 간 소림을 봉문조치하라는……."
귀가 번쩍 뜨일 이야기였지만 그 얘기를 들은 노각자와 송엽도장의 반응은 대수롭지 않았다.
송엽도장은 씁쓸한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무당과 아미가 보름 전에 봉문을 당했으니 이미 예견된 수순이 아니겠소이까?"
홍우선사는 믿기지 않는 사실 앞에 공허한 웃음만 나왔다.
"헛허……! 정말 걱정이외다. 백 년은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니거늘 그동안 뭘 어떻게 하고 지내야 할지……."
송엽도장은 눈을 지그시 내리 깔며 찻잔을 들어올렸다.
"참으로 난감 하외다. 그나마 제자들이라도 흩어지지 않게 하려면 도적질을 해서라도 재물을 모아야 할 판이니……."
지금까지 잠자코 있던 노각자가 불쑥 끼어들며 핀잔이라도 주듯 내쏘았다.
"팔자 편한 소리들만 하시는군. 소림과 무당이야 그동안 받아놓은 시주돈이라도 그득하겠지만 우리 개방은 완전히 깡통뿐이오."
그는 손을 들어 손날로 목을 치는 시늉을 해보이며 계속 엄살을 떨었다.
"거기다 전국적으로 비렁뱅이질과 동냥질을 금지하라는 황명이 떨어졌으니 이거야말로 아예 죽으란 소리가 아니고 무엇이겠소?"
송엽도장은 더욱 암울해지는 듯 긴 탄식을 터뜨렸다.
"거렁뱅이들이야 버린 음식을 주워 먹어도 욕될 게 없지만 우린 그럴 입장이 못 되니 그게 문제지요."
노각자의 눈썹이 찌푸러졌다.
"지금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하는 거요?"
홍우선사가 그러지 말라는 듯 두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우리가 이래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소. 후우……! 실로 역대 조사께 뵐 낯이 없소. 쓸데없이 오래 사는 바람에 이렇게 험한 꼴을 겪게 되고…… 그렇다고 추상 같은 황명(皇命)을 거역할 수도 없음이니……."
노각자는 손바닥으로 탁자를 탕탕! 두드리며 신경질적으로 쏘아붙였다.
"그 빌어먹을 황명이 문제요! 황실 그늘에 현현교가 있다는 건 이미 만천하가 알고 있는 사실 아니오? 그리고 현현교의 무리들이 황권을 등에 업고 동조세력을 무차별 흡수하고 반대세력은 가차 없이 봉문 시켜 손발을 묶고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 왜 이런 조치를 받아들여야 하냔 말이오!"
송엽도장이 덧붙였다.
"들리는 말로는 구파일방과 육문오가의 절반 이상이 그들과 손을 잡았다고 하더이다만……."
노각자는 말을 하면 할수록 열이 받는 듯 얼굴을 붉히며 씩씩거렸다.
"그러니까 한심하다는 거 아니오! 백 년 전 현현교는 단지 힘으로만 군림했지만 지금은 황실과 만만치 않은 무림 세력을 등에 업고 있소! 마음만 먹으면 무림천하를 독식하는 건 시간문제나 다름없는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인 거요!"
그의 눈에서 날카로운 비수와 같은 빛이 번뜩였다.
"두고 보시오! 아직까진 조용하지만 천하패권을 장악하면 그때부턴 무자비한 피의 숙청이 감행될 거요! 모르긴 해도 자신들의 뜻을 따르지 않는 자는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할 거외다. 눈 깜짝할 사이에 십팔봉회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듯이……!"
"그건 아니 될 말씀!"
홍우선사는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미구(未久)에 닥쳐올 혈겁을 뻔히 알고도 이렇게 손발을 묶인 채 기다릴 수만은 없소."
송엽도장과 노각자의 눈이 번쩍 떠졌다.
"하면 선사의 뜻은……?"
홍우선사는 가슴 가득 끓어오르는 노기를 차분히 가라앉힌 다음 입을 열었다.
"이제 방법은 하나뿐이오!"
노각자와 송엽도장은 아연 긴장하며 홍우선사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 시간, 소림 산문 밖에서는 때 아닌 소동이 일고 있었다.
부득불 안으로 들어가려는 칠채월화 벽소운과 산문을 지키는 두 명의 호법승(護法僧)이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옥신각신 실랑이를 벌이는 것이다.
"비켜!"
"아니 되오!"
"나 말 많은 거 질색이야. 좋은 말로 할 때 비키는 게 좋아!"
"설사 달마조사께서 오신다 해도 출입을 막으라는 장령(掌令)이 계셨소. 돌아가시오!"
"죽고 싶지 않으면 비켜!"
"불가하외다!"
같은 얘기가 벌써 몇 번째 똑같이 반복되고 있었다.
"제발 좀 비켜줘요. 이렇게 사정할게요, 네?"
두 손을 맞잡고 사정도 해보았지만 들려오는 대답은 한결같았다.
"돌아가시오!"
마침내 벽소운의 인내심이 한계에 이르렀다.
그녀는 두 눈을 부릅떴다.
"뭐 이런 것들이 다 있어? 돌부처도 그만큼 사정했으면 돌아앉겠다, 이 꽉 막힌 돌중 놈들아!"
고함과 함께 쌍장을 벼락같이 내질렀다.
파팡!
두 호법승의 가슴에 일장씩 적중했다. 그러나 두 호법승은 멀쩡했다. 마치 웬 파리가 앉았다 갔냐는 듯한……
벽소운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엉? 끄덕도 안 해?"
그녀가 펼친 쌍장은 비록 전력을 다하진 않았지만 어지간한 바위는 가루로 만들고도 남을 위력이었다.
"어디 다시 한 번……!"
벽소운은 이번엔 팔성의 공력으로 쌍장을 날렸다.
파팡!
허나 이번에도 두 호법승은 태산처럼 우뚝 서 있었다.
"우욱!"
오히려 벽소운이 답답한 신음성을 토하며 서너걸음 쿵쿵! 뒷걸음질을 쳤다.
벽소운은 흥! 코웃음을 쳤다.
"어쩐지 여유를 부리더라니 금종조를 익힌 금강호법승(金剛護法僧)들이셨군, 그래!"
두 호법승은 소림의 예법대로 한 손을 가슴 앞에 세우고 엄숙하게 말했다.
"소림의 무상금강력(無上金剛力)과 금종조는 외부의 어떤 힘에도 굴복하지 않소. 여 시주께선 이쯤에서 부디 물러나주시길……!"
"우린 급소가 없으니 어떤 공격을 해도 결과는 똑같을 것이외다."
벽소운은 같잖다는 듯 피식 웃었다.
"잘났군, 잘났어."
그녀의 손이 허리춤으로 내려갔다. 흰색의 채대가 풀려나오는가 싶더니 어느새 두 호법승의 몸을 휘감았다.
휘리릭!
퍼퍽!
두 호법승이 땅바닥에 처박혀 의식을 잃어버린 것은 한 호흡도 걸리지 않은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별 것도 아닌 것들이 까불고 있어!"
끼이익!
육중한 문이 듣기 거북한 쇳소리를 내며 열렸다.
벽소운은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의 몸은 몹시 지치고 피곤해져 있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그녀는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수많은 소림승들과 혈전에 가까운 싸움을 벌여야 했던 것이다.
칠흑과 같은 어둠 속에서, 벽소운은 어둠이 눈에 익을 때까지 기다렸다.
차츰 어둠이 가셔지면서 석실 안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모습이 드러났다.
벽소운은 화들짝 놀랐다.
네 사람이 일렬로 앉아 있었는데 맨 앞에는 석비룡이, 그 뒤에 차례로 홍우선사, 송엽도장, 노각자가 앉아 있었다. 그들은 각자 앞 사람의 명문혈에 장심을 밀착시키고 진기를 주입키고 있는 것이다.
석비룡을 제외한 세 사람은 모두 비 오듯 땀을 흘리고 있는 반면 석비룡의 낯빛은 죽은 자의 그것처럼 푸르뎅뎅하게 변색돼 있었다.
벽소운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비룡의 호흡이…… 호흡이 느껴지지 않아!'
벽소운은 다급하게 석비룡 앞으로 다가갔다.
"어떻게 된 거예요? 지금 무슨 짓들을 하고 있는 거죠?"
그때 쉬잇! 바람소리와 함께 벽소운의 앞을 막아서는 그림자 하나, 벽소운이 보니 만박신승이었다.
만박신승은 그녀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
"함부로 나설 상황이 아니다. 잠자코 구경만 하도록!"
벽소운은 메몰찬 소리로 맞받아쳤다.
"당신이 뭔데 이래라 저래라야? 이 손 치우지 못해?"
만박신승은 흠칫 놀랐다. 벽소운의 이글거리는 눈을 보고 그녀가 석비룡을 얼마나 걱정하고 있는가를 깨닫고 안색을 누그러뜨렸다.
"어리석게 굴지마라, 칠채월화! 이럴수록 천리무영에게는 해가 될 뿐이야. 그래도 좋다면 멋대로 행동해라."
벽소운은 뭔가 심상찮게 돌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다급히 물었다.
"천리무영이 지금 어떤 상황이지?"
"그건 천리무영 밖에 모른다."
"뭐야?"
"내가 그를 처음 발견했을 때도 저 상태였고 이곳으로 데려와 소림의 영약인 대환단(大還丹)을 여섯 알이나 먹고도 여전히 저 상태다. 그러니 내가 무슨 대답인들 해줄 수 있겠나?"
벽소운은 두 눈을 치떴다.
대환단이라면 황제가 요구해도 한 알 이상은 주지 않는다는 소림의 영약이다.
만박신승은 계속 말을 이었다.
"한 가지 분명한 건 상상을 초월하는 세 갈래의 엄청난 힘이 저 몸속에서 맹렬히 충돌하고 있다는 사실이지. 내 짐작이 맞다면 그 충돌은 세 갈래의 힘이 하나로 합쳐지기 위한 과정이 틀림없을 테고……."
벽소운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럼 좋은 쪽으로 되는 건가요?"
"성공한다면…… 예전보다 몇 배 강한 괴물이 되겠지."
벽소운의 눈가에 그늘이 깔렸다.
"실패한다면……?"
만박신승은 어둠 속으로 초점 없는 시선을 던지며 시무룩하게 말했다.
"살점 한 조각 남기지 못하고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될 거야."
벽소운은 아연실색, 입을 다물지 못했다.
'맙소사!'
가슴팍으로 땀이 고랑을 파고 흘러내렸다.
(2)
석비룡이 생과 사의 갈림길을 헤맨 지도 어느덧 백일이 지났다.
벽소운을 비롯해 수많은 사람들이 그가 깨어나기를 목을 빼고 기다렸지만 석비룡의 몸에서는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 사이 강호에는 무수한 변화가 생겼다.
현현교는 이제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황산(黃山) 태을관(太乙館)을 개축, 현현교의 총단으로 선포하였는데 더욱 기가 막힌 사실은 당금 황제가 친히 현현교의 현판을 써주었다는 것이다.
이 일은 엄청난 사실을 뜻했다.
현현교와 적대하는 것은 황제를 거역하는 일, 곧 대역죄인(大逆罪人)이 되는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깨어나야 해…… 죽는 건 내가 용서 못해…… 절대로……."
석비룡은 의식이 없는 상태지만 벽소운은 마치 그가 잘 듣고 있는 것으로 착각한 듯 나지막한 소리로 계속 읊조렸다.
"멋대로 나타나서 멋대로 내 마음을 뒤흔들어 놓고 그냥 가게 내버려둘 것 같애……?"
그녀의 목소리는 어느새 흐느낌으로 변했다.
"웃기지마! 날 그렇게 호락호락한 여자로 봤으면 넌 실수한 거야……."
벽소운은 손으로 석비룡의 뺨을 쓰다듬었다.
"나 한 가지 고백할 게 있는데……."
그녀의 입가에 쓸쓸한 미소가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난 황족도 아니고 공주도 아냐. 이건 아무도 모르는 비밀인데 우리 엄만 기녀였어. 아무 놈팽이에게 돈만 주면 웃음도 팔고 몸도 팔아야 했던……."
벽소운은 석비룡의 가슴에 자신의 볼을 대었다. 그가 포근히 자신을 안아주는 것을 상상하면서……
"그래서 난 아버지가 누군지도 몰라. 알고 싶어 한 적도, 알려고 노력한 적도 없고……."
한동안 석실 안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간혹 벽소운의 울음을 참느라 숨을 들이키는 소리만 들렸다. 벽소운의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이 석비룡의 가슴을 흠뻑 적셨다.
이윽고 벽소운은 석비룡의 가슴에서 얼굴을 들어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내가 왜 이런 말을 해주는지 알어?"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데 그녀의 두 볼이 잘 익은 사과처럼 붉어졌다.
"당신을 좋아하기 때문이야. 뿌리도 없이 잡초 같은 인생을 살아오면서 누군가를 좋아해 보긴 당신이 처음이거든……."
석비룡이 자신의 말을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 어쩌면 이런 상황이 아니었으면 벽소운은 자신의 비밀을 가슴 속에 묻고 살았을 것이다. 죽어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벽소운의 목소리는 드문드문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누군가를 위해서 죽어도 좋다는 감정을 느낀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거든…… 알았어? 그러니까 빨리 일어나란 말야, 이 바보야……!"
벽소운은 소맷자락으로 눈 주위를 훔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문득 하늘을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석실 문 앞에 서서 밖을 쳐다보니 하늘은 낮게 내려와 있었다.
소나기를 머금은 먹구름이 땅과 맞닿을 듯 침하하면서 비를 가득 머금은 바람을 쏟아냈고, 바람은 그녀의 얼굴을 상쾌하게 식혀 주었다.
꽈르르릉!
쏴아아……!
뇌성벽력과 함께 드디어 비가 쏟아졌다.
하늘과 땅을 아름답게 채색했던 빛은 자취를 감추었고 눅눅한 습기로 대기는 가득 찼다.
벽소운은 망연히 서서 녹슨 칼처럼 무뎌진 몸과 머릿속을 빗줄기에 깔끔히 씻어 내리고 있었다.
소나기는 더욱 거세져 우두두……! 커다란 소리로 땅을 울리고 있었다.
"으으음……."
벽소운은 우렁찬 빗소리 속에서 희미한 신음소리를 들었다.
혹시?
황급히 고개를 돌려 석비룡을 쳐다봤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벽소운은 적잖은 실망감에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런데 그때였다.
"으으음……."
가느다란 신음과 함께 석비룡의 배 위에 포개진 손이 가늘게 떨리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
벽소운의 얼굴에서 한 줄기 밝은 생기가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비룡……."
그녀의 목소리는 자기도 모르게 흥분으로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벽소운은 사람을 찾아 황급히 석실 밖으로 뛰쳐나갔고, 소림 경내는 벌집이라도 뒤진 것처럼 소란스러워졌다.
이윽고 석실 안으로 찾아오는 분주한 사람들의 발길……
그들 중에는 홍우선사와 송엽도장, 노각자가 있었으며 만박신승과 화령귀객 임단하도 포함 돼 있었다.
이윽고 밤이 찾아왔다.
밖에는 언제 비가 내렸냐는 듯 땅이 무너지도록 내리던 폭우는 거짓말처럼 그쳤다. 한바탕 물을 끼얹고 난 뒤처럼, 먼지가 씻긴 대지는 한결 가볍고 깨끗해져 있었다. 별은 총총 빛났고 만물은 어둠 속에서도 생기 있게 빛났다.
소림사 경내의 조그만 석실에는 밤이 늦도록 유등 불빛이 어둠을 저 홀로 지키고 있었다.
* * *
중천에 떠있는 휘영청한 만월 아래 장엄하게 쏟아져 내리는 거대한 폭포가 한 폭의 산수화(山水畵)처럼 펼쳐져 있었다.
콰콰콰콰콰……!
물기둥은 어떤 것이라도 쓸어버릴 듯 무시무시한 기세로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수천관의 힘으로 떨어지는 폭포수 아래 언제부터인가 한 명의 인영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꾹 다문 입술과 지그시 감은 눈썹, 바로 천리무영 석비룡이었다.
양 무릎에 올려져 있던 그의 손이 위로 올라오면서 둥근 원을 그렸다.
'단전을 흐르는 기운이 천령(天靈)에 이르면 만화(萬華)가 형성되고…… 천령(天靈)의 만화(萬華)가 충만하면 무영신기(無影神氣)는 극점에 달하고 인간의 능력은 화경(化境)에 들어선다…….'
둥글게 올라온 그의 두 손 끝이 머리 위에서 마주치는 순간, 석비룡의 두 눈이 번쩍 떠졌다.
'건곤(乾坤)의 기운이 교차하매 십이중부(十二中府) 이십팔경락(二十八經洛)을 흐르는 기운이 하나로 응집되니 이는 곧 파천황(破天荒)의 거력(巨力)인 것!'
석비룡은 머리 위에 둥글게 모았던 손을 곧추 펴며 위를 향해 손바닥을 활짝 펼쳤다. 순간 폭포수가 갑자기 멈칫하는가 싶더니,
"천력(天力)!"
쩌렁한 고함과 함께 석비룡의 신형이 앉은 채 붕 솟아올라 그대로 폭포를 거슬러 올라갔다.
"마, 맙소사! 저게 인간의 힘이란 말이냐?"
놀람의 탄성은 폭포가 멀리 바라보이는 언덕 저 편에서 들려왔다.
뒤이어 나지막한 소리가 입을 막았다.
"제발 좀 조용히 해요! 그러다 듣겠어요!"
그들은 몸을 언덕 그늘 아래 숨긴 채 두 눈만 빼꼼히 위로 올려놓고 있었다. 그들의 면면은 무면귀왕과 만박신승, 벽소운, 임단하 등이었다.
석비룡은 의식을 차린 후 사흘도 되지 않아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벽소운과 임단하가 아직은 무리라며 말렸지만 말을 듣지 않고 이곳 폭포 아래에서 무공을 수련했다. 그 후로 삼 개월이 흘렀다.
석비룡의 신형은 폭포 위로 거슬러 올라 공중으로 슈욱! 솟구쳤다.
둥근 달 속에 그의 모습이 둥실 떠올랐다.
공중에서 팔과 다리를 움직이는 그의 모습은 마치 매혹적인 무희(舞姬)가 춤을 추는 것 같았다.
그런데 변화는 폭포에서 생겨났다.
파파파팟!
거센 물줄기를 뚫고 그의 주먹이 한 자 가량이나 깊숙이 아로새겨지는 것이다.
이 모습을 바라보던 만박신승의 얼굴이 아연 굳어졌다.
"최극성의 무영권(無影拳)…… 왕년의 무영자(無影者) 천금옥(天金玉)도 저걸 보면 눈알이 최소한 한 자는 튀어나오겠구먼.……."
무면귀왕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끔찍한 일이야! 저토록 가공할 기운이 아무런 흔적도 없이 발출될 수 있다니……."
임단하와 벽소운도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앞으로 무영권이 발출되면 상대는 이유도 모른 채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때 석비룡은 공중에서 아래로 내려오며 두 손을 앞으로 쭉 뻗었다. 차디찬 냉기가 그의 몸을 에워쌌고 장심에 눈부신 광채가 모아지며 백색 환(幻)이 생겨났다.
강호의 견식이 넓은 만박신승만이 그 장법을 알아볼 수 있었다.
"저……저건…… 현빙신공(玄氷神功)!"
석비룡은 보이지 않는 거대한 물체를 밀어내듯 두 손을 천천히 앞으로 뻗어냈다.
콰우우우우……!
장심에서 나온 백색 환이 폭포 한 가운데를 향해 날아갔다.
쩍!
환이 폭포 속으로 스며드는 순간, 거대한 폭포가 백색기류에 휩싸이며 순식간에 꽁꽁 얼어버렸다.
구경꾼들은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현빙신공도 이미 끝을 보았다는 건가?"
"무영신공과 현빙신공을 극성까지 터득했으니 천하에 더 이상 천리무영의 적수가 없겠군."
석비룡은 아래로 떨어지며 얼음벽으로 변한 폭포를 발로 탁! 차면서 다시 공중으로 솟구쳐 올랐다. 정점까지 올라가지도 않은 채 그의 몸이 팽이처럼 핑그르르……! 돌아갔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빠른 속도로 빠르게 돌면서 타래에서 실이 풀려 나가 듯 실과 같이 가느다란 기류 수만 가닥이 풀려 나왔다.
이번에도 만박신승이 먼저 입을 열었다.
"맙소사, 만공모사(萬空毛絲)까지……."
나머지 사람들도 경악했다. 동시에 한 가지 의문을 품었다.
현현교에서 가장 수련하기 난해한 무공으로 무한의 파괴력을 지녔다는 만공모사를 석비룡이 어떻게……?
그 대답은 석비룡과 함께 난파협에 잠입했던 무면귀왕이 해주었다.
"아마 종천로가 죽기 직전에 천리전이격공으로 저 친구의 몸속에 넣어준 걸로 알고 있소만……."
만박신승은 그제야 모든 의문이 풀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지난 백 일 간 저 친구를 잠 속에 빠뜨린 세 가지의 힘은 바로 그것들이었어. 거기에 대환단이 여섯 알이나 녹아든 힘까지 곁들여졌으니 아예 괴물이 탄생했다고 볼 수밖에는……."
석비룡의 전신에서 풀려나온 실과 같은 수천 가닥의 기류가 소용돌이치며 폭포를 향해 나아갔다.
만박신승은 뒤늦게 구경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란 걸 깨닫고 외쳤다.
"위험하다! 모두 피해!"
그 소리가 떨어지는 즉시 네 사람은 신형을 솟구쳐 뿔뿔이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콰콰콰쾅!
거대한 굉음(轟音)과 함께 거대한 얼음벽으로 화한 폭포가 폭발을 일으켰다. 예리한 비수로 변한 얼음조각들이 사방으로 날아가 지면을 할퀴고 찢어댔다.
방금 전 만박신승 등 네 사람이 숨어있던 언덕 역시 흉악한 꼴을 면할 수 없었다. 바위와 나무들이 얼음조각의 공격을 받고 뭉개진 떡처럼 초토화된 것이다.
벽소운과 임단하는 두려움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조금만 늦게 피했어도 자신들의 몸이 저렇게 되었을 것이 아닌가?
(3)
겨울을 알려주려는 듯 하늘에서는 솜을 풀어놓은 것같이 소담스런 눈송이가 하늘하늘 떨어지고 있었다.
홍우선사는 마당으로 내려와 하늘을 쳐다보며 어린애처럼 맑게 웃었다.
"허어, 참으로 깨끗한 눈이로고."
송엽도장이 그 옆에서 미소를 지었다.
"어젯밤부터 계속 내렸지요……."
노각자는 어린아이처럼 환하게 웃으며 손뼉을 쳤다.
"정말 좋다! 좋아! 어린아이로 되돌아간 기분이구나"
홍우선사는 조용히 합장을 하고는 하늘을 우러러 봤다.
"아미타불……! 부처님의 자비처럼 저 눈들이 세상의 온갖 더러움을 덮어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꼬?"
만박신승이 담담하게 말했다.
"봄이 되면 눈은 녹기 마련이고, 숨겨졌던 세상의 형상도 더러움 속에 나타나기 마련이지요. 세상을 깨끗하게 하는 방법은 오직 하나……그 더러움들을 완전히 소멸시키는 것뿐입니다."
홍우선사는 못마땅한 눈길로 만박신승을 쳐다보며 쯧쯧 혀를 찼다.
"아무리 이교도(異敎徒))라지만 명색이 중이거늘 그런 끔찍한 말을 하다니."
허나 만박신승은 태연하게 반박했다.
"난 진정한 정도(正道)를 말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입은 삐뚤어져도 말은 바로 하랬다고, 난 이교도가 아니라 엄연한 밀교의 적통(嫡統)이지요."
홍우선사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앞으로 걸어갔다.
"공부를 더 해야 해. 제대로 알지 못하니 눈이 비뚤어지고 세상이치가 비딱하게 보일 수밖에……."
송엽도장이 허허 웃으며 그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게 바로 이교도의 한계가 아니겠소?"
만박신승은 뒤에서 머리끝까지 화가 치미는 듯 콧김을 씩씩 뿜어냈지만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껄껄 웃으며 월동문을 지나 석실 쪽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석실문은 굳게 닫혀져 있었고 문 앞 양쪽에는 벽소운과 임단하가 마치 호위를 하듯 단정히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일행이 가까이 오는 것을 보고 일어나 두 손을 맞잡으며 인사를 올렸다.
"아직 나오지 않았나?"
홍우선사가 초조한 표정으로 벽소운에게 물었다.
"예. 하지만 곧 나오겠다는 전음이 있었습니다."
홍우선사를 비롯한 일행의 신색이 그 한 마디 말에 활짝 밝아졌다.
암울한 현실을 인내하며 오랜 세월 동안 기다려온 보람이 있는 것이다.
한 시진쯤 지났을까?
그그긍……!
육중한 소리를 내며 석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 앞에는 석비룡이 서 있었다.
선비가 변하는 모습은 매일 틀리다고 했는데, 지금 석비룡의 모습이 그와 같았다.
겉모습은 전에 비해 오히려 힘이 빠져 보였다. 마치 전혀 무공을 익히지 않은 사람처럼……
그러나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당대에서 충분히 일가(一家)를 이룰 만한 무공의 고수들.
석비룡의 눈 속에 깊이 감추어진 형형한 광채에서 그가 모든 무공과 세 갈래로 나눠졌던 기류를 몸속에 완전히 체득했음을 알아챘다.
"역근세수(易筋洗髓)…… 노화순청(爐火純靑)…… 삼화취정(三花聚頂)의 경지를 넘어서 등봉조극(登峰造極)에 이르렀구나."
"경사로다, 경사야! 무림의 큰 은혜로고……! 하늘이 무심치 않아 현현교에 맞설 초인을 보내 주셨구나."
그들은 눈물까지 글썽이며 감격했다.
석비룡은 부드러운 미소를 얼굴 가득 퍼뜨리며 한 사람, 한 사람과 눈을 맞추었다. 그리고 조용히 두 손을 맞잡고 허리를 숙였다.
"이 모두 여러분들의 정성 덕분입니다. 죽어도 잊지 못할 은혜를 입었습니다."
노각자가 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우리야 뭐 고생이라고 할 것까지 있는가! 저 두 분 소저가 고생이 많았지."
그는 턱끝으로 한쪽을 가리켰는데, 그곳에는 벽소운과 임단하가 서 있었다. 그녀들의 눈에선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고 온몸은 감격과 기쁨으로 떨리고 있었다.
석비룡은 빙긋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이거 내 눈이 잘못됐나? 우리 두 분 소저께서 그 사이 훨씬 아름다워지셨는걸?"
"미워!"
말은 밉다고 하면서도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석비룡의 품속으로 와락 뛰어들었다.
"어어!"
석비룡은 당황하면서도 두 사람을 품 안에 고이 받아주었다. 그녀들의 등을 안으며 손으로 어깨를 부드럽게 매만져 주었다.
벽소운과 임단하에게는 백 마디 말이 필요 없었다. 따스하게 보듬어 주는 그의 손길 하나가 지금까지의 모든 고생과 슬픔들을 깨끗하게 씻어내는 것이다.
"험험……!"
홍우선사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다른 일행들도 머쓱해져서 낯을 붉히며 슬그머니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러나 한 사람, 만박신승만은 침까지 질질 흘리며 몹시 부러운 눈으로 석비룡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제기랄!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내 신도들을 데리고 오는 건데…… 석비룡, 넌 좋겠다! 오늘밤, 소림의 밤은 무척이나 뜨겁겠구나. 빌어먹게도 내 방은 싸늘한 한기만 돌 테고……."
만박귀승이 혼자말로 중얼거리는 소리였다.
* * *
등룡왕부거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흙덩이와 자갈로 세워진 초라한 무덤 하나가 있었다.
'어머니, 어이해 나만 남겨두고…… 나 혼자 어찌 살라고…….'
석비룡은 무덤을 부둥켜안고 울부짖던 조그만 사내아이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그가 열다섯 살 나이가 되었을 때 그는 다시 이 무덤 앞에 올라왔었다.
'어머니! 이곳에서 지켜봐 주세요. 제가 설혜와 외삼촌의 복수를 하겠어요. 절대…… 무슨 일이 있어도 등룡왕부를 무너뜨린 그 나쁜 놈들을 용서하지 않겠어요!'
그로부터 다시 십 년이 흘러 석비룡은 이 자리에 돌아와 있었다.
그의 등 뒤에는 벽소운과 임단하가 우울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오똑오똑 키재기를 하는 산봉우리들 사이로 황혼이 지고 있었다. 붉게 물든 하늘 위를 기러기들이 무리지어 날아가고 있었다.
석비룡은 그 기러기들을 올려다보며 조용히 말했다.
"어머님은 평생 아버님에 대해 말씀하신 적이 한 번도 없었어.……어린 시절 내게 있어 아버님의 존재는 늘 그리움의 대상이었지."
그의 음성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어머님이 돌아가신 후 줄곧 등룡왕부에서 생활했는데 그곳에서 난 어머님의 또 다른 영상을 발견했어. 그게 바로 설혜였어."
석비룡은 눈빛은 깊은 우수에 젖어 있었다.
"설혜는 외사촌 누이로 나이는 동갑이었지만 때론 어머니처럼 날 포근히 감싸줬고 때론 어린아이처럼 응석을 부리곤 했기 때문에 난 나의 어두운 과거를 잊고 살 수 있었어. 그러던 어느 날 설혜가 시한부 생명임을 알았을 때 난 또 한 번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을 받아야만 했어."
벽소운과 임단하는 꼼짝도 하지 않고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자신의 아픔처럼 느껴지는 그의 아픔, 사랑하는 이의 아픔인 것이다.
석비룡의 목소리는 계속 이어지며 눈물과 아픔이 섞여 들었다.
"그녀를 살리겠다는 일념 외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어. 그래서 거의 미친 듯이 의술을 배웠던 거고…… 아마 그 당시 그녀를 살려주는 조건으로 누군가 내 목숨을 요구했다면 난 서슴없이 받아들였을 거야. 그만큼 설혜는 내게 소중한 존재였거든."
그는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떨구었다.
"결국 등룡왕부가 무너지고 설혜의 삶이 파괴되면서 나의 모든 노력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지만……."
벽소운과 임단하가 그의 등 뒤로 다가왔다. 양쪽에서 그의 어깨에 살포시 볼을 기댔다.
벽소운이 말했다.
"잘은 모르지만 당신의 아픔을 조금은 알 것 같아요. 왜 당신이 색골서생이란 누명 아닌 누명을 써야 했는지……."
그녀는 말 끝을 흐리면서 임단하를 쳐다봤다. 그녀들 사이에 어떤 약속이라도 있었던 듯.
임단하는 약간 주저하면서 입을 열었다.
"시작하는 길은 각자 달랐지만 가는 길은 같이 가기로 해요, 우리……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면 평생을 통해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그게 좋지 않겠어?"
석비룡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임단하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지금 우리라고 했어?"
임단하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그래요, 언니와 나…… 그리고 당신이 함께……."
언니?
석비룡은 벽소운을 쳐다봤고,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배시시 웃었다.
지난 세월, 소림사에 있는 동안 벽소운은 임단하가 그의 의동생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고, 그녀를 동생으로 인정했다는 것은 곧 두 사람 사이가 원만해졌음을 뜻했다.
벽소운은 곱게 눈을 흘기며 일침을 가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여인 이외에 다른 여자에게 한눈을 팔았다가는……."
용서하지 않겠다는 마지막 말은 할 수 없었다.
석비룡이 한 팔에 하나씩 두 여자의 허리를 잡아 채 자신의 품 안으로 바싹 끌어들였기 때문이다.
벽소운과 임단하는 숨이 막혔지만 행복했다.
'이대로…… 이대로 영원히 시간이 멈추었으면…….'
그것이 이 순간 그녀들의 유일한 바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