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요스미 정원(清澄庭園)
키요스미 정원(清澄庭園)은 도쿄도 코토구(江東区) 키요스미(清澄)에 있는 도립공원으로 연못을 중심으로 츠키야마(築山)와 메이세키(名石)를 배치한 회유식(回遊式) 임천정원(林泉庭園)으로 도지정명승이다. 키요스미(清澄)는 구 후카가와구(旧深川区) 지역 내에 있는데, 후카가와(深川)는 에도부(江戸府) 내에서는 발전이 늦었던 곳으로 에도시대 이전 이 일대는 스미다강(隅田川) 삼각주 안에 갈대가 무성한 저습지였다. 1590년,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가 에도에 들어오면서 주민의 수가 급증하여, 식자재 특히 어패류 수요에 맞춰 하구에 스미다강(隅田川)의 수운을 활용한 후카가와 료우시마치(深川猟師町)가 생겨났다.
키요스미(清住, 지금의 清澄) 부근에 마을이 생겨난 것은 칸에이 연간(1624-1643)으로, 츠쿠다(佃) 인근에 료우시마치(猟師町)가 형성됨으로 인해, 니혼바시(日本橋) 오다와라쵸(小田原町) 부근에 우오가시(魚河岸)가 생겨나면서, 최초로 료우시마치(漁師町)가 등장했고, 후카가와료우시마치( 深川猟師町)는 유통거점이 되었다.
만지(万治) 연간(1658-1661)의 지도에 따르면, 후카가와 신덴(深川新田), 에이타이지마(永代島) 등이 지명이 보이고, 메이레키(明暦) 연간(1655-1658) 혹은 칸분(寛文) 연간(1661-1673)에는 츠쿠다지마(佃島)의 지명이 보인다.
키요미즈 정원(清澄庭園)의 당시 위치는 키요스미쵸(清住町, 지금의 清澄一丁目)에 있었는데, 서쪽은 스미다 강(隅田川)에 접해 있었고, 료우시마치(猟師町)는 남쪽으로 사가쵸(佐賀町), 에이다이쵸(永代町)까지, 료우시마치(猟師町)의 북쪽 오나기 강(小名木川) 하구 부근에는 선박기술자인, 후타다이쿠(船大工) 들이 모여살아 우미베다이쿠마치(海辺大工町)라고 불렸다. 이세사키마치(伊勢崎町)는 키요스미쵸(清住町)에서 센다이 해자(仙台堀)따라 늘어선 띠 모양으로 들어선 마을이었다.
칸에이(寛永) 연간(1624-1644)에서 겐로쿠(元禄) 연간(1688-1704)에 걸쳐 에도가 번영함에 따라 료이시마치(猟師町)도 상업 지구로 바뀌어, 키요미즈쵸(清住町)에는 센다이 해자(仙台掘)가 유력한 유통 경로가 되면서, 센다이쿠라(仙台蔵)가 지어졌다. 1828년의 분켄에도오오에즈(分間江戸大絵図)에 따르면, 이 지역에 여러 다이묘들의 영지가 늘어나 키요미즈쵸(清住町)에는 마츠다이라 무츠(松平陸奥), 나이토우 키이(内藤紀伊), 마츠다이라 에치고(松平越後), 토다 에치젠(戸田越前) 등의 다이묘 영지가, 이세사키마치(伊勢崎町)에는 쿠제 나가토(久世長門) 등의 시모야시키(下屋敷) 등의 이름이 보인다. 1932년 도쿄시에 신 행정구역이 실시되면서 키요스미쵸( 清住町), 우미베다이쿠마치(海辺大工町), 이세사키마치(伊勢崎町) 등은 폐지되고, 새로이 키요스미쵸(清澄町)가 명명되었다.
쿠제 가문(久世家)이 무라카미 겐지(村上源氏) 가문에서 나와 미카와쿠니(三河国)에 세거하면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도와 에도막부를 여는데 일조하였는데, 1636년, 쿠제 히로유키(久世広之, 1609-1679)가 야마토노카미(大和守)가 되어 1662년, 시모우사노쿠니(下総国) 세키야도죠(関宿城)를 하사받았다. 세키야도(関宿)의 위치는 현재 치바현(千葉県) 히가시카츠시카군(東葛飾郡) 세키야도쵸(関宿町)인데, 토네가와(利根川)와 에도가와(江戸川)의 분기점에 위치한 교통요충으로, 가미야시키(上屋敷)를 토키와바시(常盤橋) 고몬(御門)에, 나카야시키(中屋敷)를 하코자키쵸(箱崎町)에, 시모야시키(下屋敷)를 후카가와(深川) 이세자키쵸(伊勢崎町)에 두었다. 에도 막부 말이 되면서 쿠제 히로치카(久世広周, 1819-1864)는 안도 노부마사(安藤信正, 1819-1871)와 함꼐 로쥬(老中)로서 막부를 지도하는 역할을 맡아 막부 재정을 재건하는데 힘썼다. 에도시대 중기부터 이세사키쵸(伊勢崎町)에 쿠제가문(久世家)의 시모야시키(下屋敷)가 있었지만, 메이지 유신 무렵에는 이미 쇼군에게 반납한 상황이었다.
1871년 작성된 도쿄오오에즈(東京大絵図)에 의하면, 이세사키쵸(伊勢崎町)의 영지는 도쿠가와 신산미노츄죠(徳川新三位中将)였다가, 1876년의 지도에는 마에지마 히소카(前島密, 1835-1919)나 시죠 타카우타(四条隆謌, 1828-1898) 등의 소유로 표시되어 있어, 당시의 격변하는 정세를 반영하여 소유주가 계속 바뀌었다. 당시 이세사키쵸(伊勢崎町)와 키요스미쵸(清住町) 일대에는 쿠제 야마토노카미(久世大和守)、토다 휴가노카미(戸田日向守), 마츠다이라 미노노카미(松平美濃守), 마츠다이라 우쿄(松平右京) 등 다이묘들의 시모야시키(下屋敷)나, 이나 한자에몬(伊奈半左衛門), 오카노 류노스케(岡野竜之助) 등 호족의 거주지였지만, 유신 이후에는 당시 실세였던 신정부 요인의 거주지로 변화했다.
1878년 후카가와 키요스미쵸(深川清住町)와 이세사키쵸(伊勢崎町) 일대 토지 3만평을 미츠비시재벌(三菱財閥)창업자인 이와사키 야타로(岩崎弥太郎, 1835-1885)가 구입하여, 동생 야노스케(弥之助, 1851-1908), 장남 히사야(久弥, 1865-1955)의 3대에 걸쳐 키요스미정원(清澄庭園)이 조성하었다. 당시 야타로(弥太郎)는 대만정벌, 서남방 전역 등에 물자를 대며 대박을 낸 직후 바야흐로 해운왕이 되었을 무렵이었다. 이와사키 히사야(岩崎久弥, 1865-1955)의 기록에 의하면, '여기에는 옛 막부시절의 다이묘의 야시키(屋敷)에 딸린 정원이 있었다. 야타로(弥太郎)는 이 정원을 개수하여, 전체적으로 확장하고 배치를 새로 하여 여기 일대 정원을 조성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야타로(弥太郎)는 젊을 때부터 조경에 관심이 있었고, 특히 정원석을 좋아했다고 하며, 히사야(久弥)에 의하면, '나는 천성이 이거다 할 기호는 없지만, 천석구예( 泉石丘壑)에는 항상 마음이 있어, 우민(憂悶)을 느낄 때마다 아름다운 정원을 찾곤 한다. (중략) 하나 카가 저택(加賀邸)의 정원은 거암대석(巨巌大石)을 무수히 배치하고, 노수묵철(老樹黙綴)하여 심산(深山)의 풍치가 있어 호탕한 정취가 느껴져, 만약 내가 정원을 만든다면, 이를 본받고자 한다.'라고 적고 있다.
야타로(弥太郎)의 동생이자 3대째인 야노스케(弥之助)는 30세에 부사장으로 형을 도왔고, 1885년 형이 죽고나서, 일본우선회사(日本郵船会社)를 설립하여 해운업을 경영했다. 형이 조경을 마무리하고 있었던 키요스미정원(清澄庭園)을 이어받아 시공계획서를 만들어 조경을 지휘하여 1891년 완성하였다. 야노스케(弥之助)는 일본 경제계의 중진이 되어 이 곳을 국내외 요인과의 호화로운 사교장을 목표로 거액의 건설비를 투입하였다. 이와사키 가문(岩崎家) 4대째인 히사야(久弥)는 야타로(弥太郎)의 장남으로, 1894년 미츠비시합자회사(三菱合資会社)를 설립하여, 전사장이었던 야노스케(弥之助)의 아들 코야타(小弥太)에게 사장자리를 넘기고 협력을 이어갔다.
혼란스러웠던 막말을 거치며 황폐해졌던 정원이었지만, 쿠제 가문(久世家) 시모야시키(下屋敷) 주위에는 연못과 나무 등은 어느정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886년 참모본부 육군국 측량부 발행 도쿄시내지도(東京市内地図)에 따르면, 조성하던 당시의 모습이 엿보이는데, 양관 동쪽에 큰 건물이 있고, 일본관으로 생각되는 곳에도 작은 주택이 지도에 보인다. 정원의 대부분에 걸쳐 연못이 파져 있었고, 주위로 츠키야마와 회유로가 있어, 남쪽으로는 센다이 해자(仙台掘)에서 물을 끌어들이는 수로가 동쪽으로 나 있었다. 야타로(弥太郎)는 새로 정원을 대대적으로 축조하면서 연못을 개수하여, 해자 두 곳을 파서 센다이 해자(仙台掘) 뿐 만 아니라, 스미다 강(隅田川)과도 연결하였다. 또한 전국에서 이름난 거석(巨石)을 사들여 배로 옮겨와 정원 곳곳에 배치하였는데, 이는 키요스미정원(清澄庭園)의 특징 중 하나로, 인근 정원에서는 쉬이 볼 수 없는 거석(巨石)을 십분 활용한 석조로 정원석을 좋아하는 야타로(弥太郎)의 취향이 잘 나타나 있다. 1880년 착공 후 3년 걸려 완공하였을 때, 정원을 후카가와 신보쿠엔(深川親睦園)라 명명하여, 평상시에는 미츠비시 회사원을 대상으로 한 휴양소로, 특별히 내외 귀빈이 방문하는 날에는 접대의 장소로 이용했다.
야노스케(弥之助)는 회사가 성장함에 따라, 정원을 사내 활용 만을 위한 신보쿠엔(親睦園)이 아닌, 회사를 방문하는 귀빈을 접대하기 위한 장소로 내외에 자랑할 만한 명원을 목표로 대대적으로 개수하였다. 1886년 교토에서 저명한 다도의 명가, 무샤코지센케(武者小路千家) 가문의 챠타쿠미(茶匠) 이소야 무네요시(磯谷宗庸)를 초청하여, 원유개장(園游開場), 온실원예장(温室園芸場), 식목지(植込地)를 설계하고, 많은 정원석을 놓아 약 5년에 걸쳐 공사를 진행하여 1891년 완성하였다. 또, 같은 해 착공한 일본관(日本館)은 목조로 건평 315평에 가와타고사부로(河田小三郎)의 설계로 오오히로마(大広間), 챠시츠(茶室), 쇼카이기시츠(小集会室), 마츠노챠야(松の茶屋) 등이 있었고, 양관(洋館)은 튜더식 붉은 벽돌 건물로 건평 782평에 영국 죠사이아 콘더(Josiah Conder,1852-1920)의 설계로, 1889년 완성되었다. 콘더는 1852년 런던 출생으로, 1876년 일본으로 와, 코부다이각코(工部大学校) 교수를 맡으면서, 공부성(工部省) 에이젠쿄쿠(営繕局) 고문이 되어, 1888년 도쿄에 건축사무소를 열었다.
야노스케(弥之助)에 의해 완성된 정원은 메이지 초기 회유식(回遊式) 시오이리 린센(潮入り林泉) 방식의 명원으로 손꼽혔는데, 3만평의 넓은 부지 내에 조수가 연결되어 밀물과 썰물에 따라 경관이 바뀌는 시오이리(汐入り)방식의 정원으로 연못에는 크고 작은 섬을 배치하고 다리를 놓았으며, 후지산(藤)을 형상화한 작은 언덕을 동서로 쌓고, 토후쿠( 東北 ), 시코쿠( 四国 ), 큐슈( 九州 ),오가사와라( 小笠原 ), 이토( 伊豆 ) 등 각지에서 정원석을 수집하여 배치하여 완성하였다. 히사야(久弥)는 현재 가와고에(川越)시 국 지정 명승인 구 야마사키시벳테이(旧山崎氏別邸)를 지은 바 있는 야스오카 카츠야(保岡勝也, 1877-1942)에게 설계를 의뢰하여 연못 남쪽에 이케노고차야(池の御茶屋, 현재의 료테이(凉亭))를 지었고, 1909년 회사를 방문한 영국의 육군 원수 호레이쇼 허버트 키치너(Horatio Herbert Kitchener,1850-1916)를 이 곳에서 접대하기도 했다.
1920년, 히사야(久弥)는 정세 변화와 회사의 장래를 도모하기 위해, 정원 남동쪽 원예장, 원유회 등에 사용하던 잔디 구역 약 3,000 평을 도쿄시와 협의해 어린이 공원으로 개조하여 1921년 일반 공개했다. 1923년에 일어난 칸토대지진으로 피해 가구수만 49,037 가구에 달할 정도로 전 후카가와(深川) 지역이 파괴되어, 키요스미정원(清澄庭園)은 임시 피난장소가 되었다. 하지만, 정원도 적지않은 타격을 받아 료테이(凉亭)를 제외한 모든 건물과 수목, 정원석 등 괴멸적인 피해를 입었다. 지역의 지진피해복구를 위해 부지 내에 목재 저장소, 재재소 등을 짓고, 피해가 비교적 적었던 동쪽을 동원으로 도쿄시에 개방하였다. 1924년에는 기요스미정원(清澄庭園)의 절반과 기요스미 유원(清澄遊園)을 정식으로 도쿄시에 기부하였고, 1927년 신주쿠고엔(新宿御苑)에서 거행되었던 다이쇼(大正) 일왕 장례식에 사용되었던 소우죠우덴(葬場殿)을 이축하여 다이쇼 기념관(大正記念館)으로 명명하여 1928년 개관식을 하였다.
1977년 서쪽 일부를 정원에 추가하여 총 79,056 평방미터의 정원으로 개원하였다. 동쪽의 기요스미정원(清澄庭園)은 1924년 이와사키 가문(岩崎家)으로부터 도쿄시에 기증된 것이었지만, 추가된 부지는 당초 지진피해지역으로, 2차대전 후 성토하여 건자재 적치장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도시계획 관점에서 일대의 공원화를 목표로 용지매입 후 1973년부터 설계를 시작하면서 1977년 기존 기요스미정원(清澄庭園), 어린이 유원 등을 포함한 종합공원으로 재정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