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3일 (일) 핸드폰 촬영
2부
또 다른 세상과 마주한 사람들
1492년 콜럼버스가 도착한 이래 유럽인들이 북미 대륙으로 건너오면서 원주민들의 삶에는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첫 만남은 낯설었지만 대체로 평화로웠습니다. 원주민들은 낯선 땅에 정착한 이주민들을 도와주며 나눔과 배려, 조화와 공존의
삶을 추구했습니다. 하지만 이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이주민이 옮긴 전염병은 많은 원주민의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서로 다른 문화와 세계관이 충돌하면서 원주민들은 오래도록 살아온 삶의 터전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갈등 속에서도
북미 원주민들은 전통적인 생활 방식과 문화를 지키려고 노력했습니다. 북미 원주민들에게 전통을 지키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들이 전통을 계승하는 방식은 단순히 과거를 재현하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과거의 가치를 새로운 표현 방식으로 재창조하여 여러 사람들에게 전합니다.
원주민 예술가들은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고민하고, 그 고민을 작품에 담아내고 있습니다.
낯선 사람들의 시선
16세기 이후 영국, 프랑스, 스페인 등에서 온 이주민들은 북미 대륙 여러 곳에 정착촌을 만들었습니다.
그중에서 오늘날 미국을 만든 초기 이주민들은 동쪽 바닷가에 '제임스타운'과 '플리머스'라는 마을을 만들어 살았습니다.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하지 못했던 유럽인들은 춥고 배고프게 생활했지만,
북미 원주민들에게 집을 짓는 법, 옥수수와 콩을 기르는 법 등을 배워 북미 땅에서 적응할 수 있었습니다.
이주민들을 처음 보는 원주민의 외모, 옷, 생활 방식에 관심을 가졌고, 그 모습을 그림과 사진에 담았습니다.
이주민의 그림에 담긴 북미 원주민의 모습은 대체로 낭만적이고 평화롭습니다.
당시 그림은 미국의 서쪽으로의 확장을 장려할 목적으로 그려졌습니다. 이주민들에게 자연이란
미국이라는 나라의 가능성과 발전을 상징하며 새로 정착한 사람들을 따뜻하게 맞이해주는 곳이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위험한 고비
북미 원주민들에게 자연은 소유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지만, 이주민들에게 북미 대륙은 기회이자 풍요의 땅이었습니다.
이주민들은 처음에는 동쪽 바닷가에 자리 잡았다가 1783년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에는 점점 더 서쪽으로 이동했습니다.
서부 개척을 '명백한 운명'이라고 본 이주민들과 삶의 터전을 지키고 있었던 원주민들 간의 갈등과 충돌은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골드러시'는 북미 원주민과 이주민 간에 일어난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전국의 수많은 사람들이 금을 찾기 위해 서부로 몰려들었습니다. 북미 원주민들은 조상 대대로 살던 곳에서 보호구역으로
이주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면서 많은 원주민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1890년에 일어난 운디드니 사건이 그중 하나입니다.
골드러시 II
딘 콜월(1892-1960), 1926년, 캔버스에 유화, 윌리엄 시니어함센과 도러시 힘센 컬렉션, 2001. 1150.
딘 콘월은 미국의 삽화가이자 벽화 작가입니다.
그의 그림은 유명 잡지와 서적의 삽화나 광고, 전쟁 흥보 포스터로 자주 사용되었습니다.
1848년 캘리포니아주에서 금이 발견되자 많은 이주민이 금을 찾아 서부로 이주했습니다. 당시 캘리포니아 지역에는 원주민
약 30만 명이 곳곳에 작은 마을을 이루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금광이 발견되면서 원주민들은 강제 이주되었으며 이주민들에게서 옮은 질병에 시달렸습니다.
그림은 이러한 캘리포니아의 골드러시를 시굴자, 개척자, 사업가의 집단 이주로 묘사합니다. 그림의 오른쪽에서 사냥꾼같이
빠르게 움직이는 군중은 서부 지역에 사는 소수의 북미 원주민들을 곧 추월할 것처럼 표현되었습니다.
대평원을 가로지르며.
새뮤얼 콜먼(1832-120), 1872년경, 나무판자에 유화, 윌리엄 시니어함센과 도러시 힘센 컬렉션, 2001. 1182.
19세기 서부 지역 전경을 담은 그림은 미국이 영토를 확장하는 과정을 담은 중요한 기록으로 평가받습니다.
이 그림은 서부 개척에 나선 이주민들이 지붕이 있는 마차를 타고 대평원을 가로지르는 이상적이고 낭만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대평원을 약속의 땅으로 표현한 이런 그림은
이주민들의 서부 확장과 정복을 자연스러운 일로 여기게끔 하여 서부 개척을 장려했습니다.
역마차.
노만 로크웰(1894-1978), 1966년 이전, 캔버스에 유화, 리차드 윌리엄과 수 윌리엄 기증, 1975, 154.
이 그림은 고전 서부 장르 영화 <역마차, 1939>를 1966년에 리메이크한 작품을 광고하는 일러스트입니다.
<역마차, 1966>는 1880년 역마차 운전사 두 명이 애리조나주에서 뉴멕시코주로 이동하는 모습을 담았습니다.
영화에 나오는 북미 원주민은 영화 내내 아무 이유 없이 정착민을 공격하는 '극단적이고 단순한 야만인'으로 묘사됩니다.
이런 이미지는 서부 개척을 장려하고 그곳에 사는 원주민을 쫓아내도 된다는 생각을 하는데 이용되었습니다.
콜로라도주 아이언마스크 광산.
해리 런드(생몰년 미상), 1886년, 캔버스에 유화, 교환으로 취득, 1968. 40.
미국 콜로라도주 배틀산에 위치한 아이언마스크 광산의 풍경입니다.
1850년대에 광산에서 금속을 캐려는 수천 명의 이주민들이 콜로라도주로 몰려와 광산 근처에서 마을을 만들어 모여살았습니다.
1879년, 배틀산에서는 은광이 처음으로 발견됐습니다.
그 후에는 은이나 금보다 아연을 대규모로 생산하지만 1980년 중반에 문을 닫았습니다.
전쟁을 기록한 그림
압사로가족의 화이트 스완(1851-1904), 몬태나주, 1890년경, 모슬린천에 수채, 잉크, 연필, 원주민 미술 수집 기금, 1968.336.
대평원 지역에 사는 원주민들은 전쟁에서 승리했을 때의 장면을 티피와 개인 물건에 그림으로 기록했습니다.
주로 가죽에 그렸지만, 이 그림은 모슬린 천에 그렸습니다. 1800년대 후반, 미국 정부는 원주민에게 이주를 명령했습니다.
원주민들이 새롭게 살게 된 지역에서는 동물 가죽을 구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가죽보다 구하기 쉬운 천을 사용해 중요한
사실을 기록했습니다. 이 그림은 압사로가족인 화이트 스완이 직접 겪은 이야기를 묘사한 것입니다.
그는 1876년 6월 미국 육군과 북미 원주민 사이에 벌어진 '리틀 빅혼 전투'라는 중요한 전투에 참여했습니다.
이 전투에서 원주민들은 미국 군대를 이겼습니다. 화이트 스완은 당시 미 육군 제7기병연대가 라코타족, 샤이엔족, 아라파호족
캠프로 자신들을 안내하도록 고용한 정찰병이었습니다. 그는 전투 상황을 여러 장면으로 나누어 그렸습니다.
그림 오른쪽 위, 화이트 스완이 주변을 살피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아래에는 나팔수가 다친 화이트 스완을 구하고, 그 아래는 화이트 스완이 적을 공격하는 모습입니다.
왼쪽 위는 그가 적에게 둘러싸여 적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왼쪽 아래에는 그가 말을 탄 적을 죽이는 모습입니다.
운디드니 : 아메리카 대학살.
루이세뇨족의 프리츠 숄더(137-2005), 1972년, 캔버스에 오일.
이 그림은 미국 사우스다코다주의 '운디드니'라는 원주민 보호 구역에서 있었던 슬픈 사건을 보여줍니다.
1890년 12월 29일, 미국 육군 제7기병대 소속 군인들이 운디드니에서 남성, 여성, 어린이 등 약 300명을 학살했습니다.
이 사건은 '유령춤'이라는 종교 운동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원주민들은 대대로 살던 땅에서 쫓아내는 사람들에게 항의하고,
자신들의 땅을 되찾기 위해 모였는데 미군이 이를 막으려 하면서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눈 덮인 무덤을 표현한 그림은 많은 슬픔을 담고 있습니다.
작가 프리츠 숄더는 1890년 운디드니 사건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라고 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긍정적인 것은 부정적인 것 없이 존재할 수 없으며,
예술가의 역할은 타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다해 진심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대륙횡단철도와 들소.
미국 서부 땅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다른 곳에서 서부까지 물건과 사람들을 실어 나를 수 있는 열차가 꼭 필요했습니다.
1865년 열차가 지나다닐 수 있게 길을 만드는 공사가 시작됐습니다. 그리고 1869년에 처음으로 동쪽 땅과 서쪽 땅을 잇는
철도가 완성됐습니다. 대륙횡단철도는 북미 원주민의 삶에 큰 어려움을 가져왔습니다.
서부 땅을 개발하려고 찾아온 사람들은 열차가 지나다니는 데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들판에서 뛰어놀던 들소들을 마구 잡아갔습니다.
광활한 대지와 그 대지를 뛰놀던 들소는 대평원 부족의 정체성과 존재의 기반이었습니다.
그들의 신성한 땅에 철도가 가로지르고 들소가 사라지고, 그 땅에 울타리가 만들어지면서 원주민들은 예전처럼 살 수 없게 됐습니다.
갈등과 위기를 넘어
북미 원주민들은 여러 갈등과 위기를 겪으면서도 전통적인 생활 방식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변화가 불가피하지만, 전통문화를 지키는 것은 여전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오늘날 북미 원주민들은 소설이나 시와 같은 문학이나 조각, 회화, 사진과 같은 예술품으로 전통적인 주제를 표현하거나
미래에 대한 기대를 담기도 합니다.
또한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로서 원주민에 대한 잘못된 생각,
원주민이 겪는 차별을 바로잡기 위해 열심히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젊은 평원의 인디언
제임스 바마(1926-2022), 1980년, 합판에 유화, 컨템포러리 리얼리즘 그룹 기금, 1998. 215.
아직도 비원주민 예술가들은 원주민을 '사라져 가는' 또는 '사라진' 인종으로 표현하거나 이들을 '사라진 존재'로 연출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원주민을 있는 그대로가 아닌 자신들이 생각하는 모습으로 바라봅니다.
화면 속 젊은 남성은 호저 가시와 새 깃털 장식으로 몸을 치장하고 나바호 직물을 얹은 말 위에 앉아 있습니다.
이 그림은 1980년에 완성되었습니다.
당시 원주민은 더 이상 화면 속 원주민처럼 옷을 입지 않았고, 창과 방패를 들고 말을 탄 채 평원을 돌아다니지도 않았습니다.
원주민은 언제나 그랬듯이 모든 순간 동시대인입니다.
웨인의 세계.
클링깃족의 제시 쿠데이(1955-), 1992년, 종이에 컬러 실크스크린과 흑연, 제네비브 D. 셜리 기금, 2002. 92.
클링깃족 출신 제시 쿠데이는 원주민에 대한 이미지와 문구의 조합으로 강한 정치적 발언을 하는 작가입니다.
이 작품에서 그는 미국 배우 존 웨인의 얼굴과 그가 했던 말을 클링깃족의 의식용 가면과 조합했습니다.
존 웨인은 '서부'를 배경으로 한 미국 영화의 우상이었지만 원주민에 대한 인종차별주의적 시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971년 인터뷰에서 웨인은 자신의 영화에 종종 출연하는 원주민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이 위대한 나라를 그들로부터 빼앗은 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중략)
많은 사람에게 새로운 땅이 필요했고, 원주민들은 그 땅을 그들만 가지려고 했어요."
오키프, 휘슬러 식.
치파와족의 데이비드 P. 브래들리(1956-), 뉴멕시코주, 2007년, 캔버스에 아크릴, 원주민 미술 수집 기금, 2012. 315.
오지브와(치파족)족 예술가인 브래들리는 뉴멕시코 샌타페이의 남서부 도시에 거주하며 활동했습니다.
그는 그림을 통해 사람들이 익숙하게 떠올리는 북미 원주민의 모습이 어떠한지, 원주민의 예술이 미국 문화에 어떻게 사용됐는지
이야기합니다. 이 작품에서 그는 뉴멕시코의 풍경을 담은 그림으로 유명한 조지아 오키프(1887-1986)를 그렸습니다.
오키프는 호피족 카치나에 매력을 느껴 이를 소재로 한 일련의 작품도 그렸습니다.
브래들리는 샌타페이에서 흑백 의상을 입은 오키프를 보고 <휘슬러의 어머니>로 더 잘 알려진
제임스 맥닐 휘슬러(1843-1903)의 유명한 그림, <회색과 검은색의 배열 제1호> 와 비슷한 구도로 그녀를 표현했습니다.
이 그림에서 오키프는 휘슬러 스타일의 구도로 그려졌지만, 그녀가 머무는 곳의 창밖에는 샌타페이의 풍경이 보입니다.
그녀가 이젤에서 그리고 있는 그림의 주제도 카치나입니다.
이 작품에서 브래들리는 오키프가 자신의 예술을 위해 원주민 문화의 예술성을 빌렸다고 이야기합니다.
딸랑, 딸랑
핏리버/ 마운틴마이두/ 와슈족의 주디스 로우리(1948-),
1997년, 캔버스에 아크릴, 윌리엄 시니어 함센과 도러시 함센 컬렉션, 교환으로 취득, 2007. 48.
캘리포니아 출신의 원주민 예술가 로우리는 오랜 세월 부족이 모여 사는 땅에 카지노가 들어서면서 원주민 공동체가
겪는 폐해를 체험했습니다. 그녀는 카지노가 원주민 공동체에 가져온 탐욕과 부패를 표현하고,
카지노 비리를 폭로하려다 죽임을 당한 사촌을 추모하려고 이 그림을 그렸습니다.
반은 인디언, 반은 멕시코인.
루이세뇨/이파이/푸유커춤족이자 멕시코인인 제임스 루나(1950-12018),
1991년, 종이에 잉크젯 인쇄, 윌리엄 시니어 함센과 도러시 함센 컬렉션, 교환으로 취득, 2009. 773A-C.
작가 제임스 루나는 재능이 많은 예술가입니다. 그는 공연, 사진, 그림 등 다양한 형태의 예술로 자기 생각을 표현합니다.
재밌는 말과 행동으로 사람들을 즐겁고 편안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는 원주민이자 멕시코 사람으로서 차별을 겪은 경험을 작품으로 표현했습니다.
세 장의 사진은 콧수염과 장신구, 머리 길이에 따라 어떤 사람으로 보이는지, 사람들의 생각은 어떻게 변하는지를 물어봅니다.
작가는 누군가를 그가 가진 특징에 따라 평가하는 일이 좋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이 작품에서 그는 미국 사람들이 북미 원주민과 멕시코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살펴보기를 제안했습니다.
크리켓.
체메우에비족의 카라 로메로(1977-), 2014년, 인화지에 안료 인쇄, 로렌 G. 립슨 박사 기증, 2018. 325.
카라 로메로는 체메우에비족 출신의 사진작가입니다.
극적인 색채가 가미된 연극적 구성과 디지털 기능을 결합한 작품으로 유명하지만,
작업 초기에는 영화의 정규 교육에 집중했고 그 결과 이와 같은 사랑스러운 초상화가 탄생했습니다.
<크리켓>은 작가가 자신의 딸을 전통적인 기법으로 찍은 사진입니다.
인생의 특정 시기에 도달한 소녀와 사진을 보는 사람의 직접적, 감정적 연결을 느낄 수 있습니다.
<크리켓>의 힘은 진정성과 카메라를 응시하는 소녀의 열린 시선에 있습니다.
인디언을 죽이고, 사람을 구하라
인디언을 구하고, 사람을 죽여라
피라미드레이크 파이유트족의 그레그 딜(1975-), 콜로라도주 페이튼에서 활동, 2016년, 캔버스에 아크릴, 2016. 30.
원주민 출신의 작가 그레그 딜은 미국 국기를 배경으로 원주민 복장을 한 남자와 양복을 입은 남자를 그렸습니다.
그는 <신원을 알 수 없는 백인과 함께 있는 원주민 남자>라는 제목의 역사적 사진을 참조했는데,
성조기의 별무늬는 작가가 속한 부족의 바구니 무늬로 바꿔 표현했습니다.
여기 두 남자는 조지 키케하키(왼쪽)와 그의 아들 윌리엄 폴락(오른쪽)으로 모두 포니족 출신입니다.
미국 정부는 원주민을 미국 사회에 강제로 동화하려 했고, 그 과정에서 원주민들은 정체성 혼란 등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원주민을 보는 고정관념의 위험성과 원주민으로 '보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 보게 합니다.
술집 사람들.
코치티족의 디에고 로메로(1964-), 뉴멕시코주, 1995년, 점토에 채색, 버지니아 보켈 매턴 기증, 2003. 1222.
디에고 로메로는 코치티족 도예가입니다.
그는 점토와 천연 안료를 사용해 전통적인 코일링 기법(손으로 점토를 둥글고 길게 말아서 쌓는 것)으로 그릇을 만든 후
동시대 문제를 표현해 왔습니다. 이 작품에서 그는 원주민 공동체의 알코올 중독을 다뤘습니다.
그림 속 두 남자는 푸에블로족 남성의 전통적인 머리 스타일을 했지만, 사회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그가 묘사하는 인물은 현재를 사는 원주민의 어려움에 대한 은유입니다.
그들은 미국 스포츠를 시청하지만, 원주민 사회의 춤과 의식에 참여하기도 합니다.
많은 원주민들은 '두 세계에 사는 것'의 압박감에서 벗어나려고 하는데, 그 방법 중 하나가 술을 이용한 도피였습니다.
깔개
나바호족의 메리 굴드(1930-) 추정, 196년, 양모로 직조, 글로리아 F. 로스의 현대 나바호 직조 컬렉션, 1986. 113.
나바호족은 성조기처럼 미국 문화에서 인기 있는 상징을 작품에 묘사해 왔습니다.
관광객들에게 판매하기 위해 국기를 소재로 한 깔개는 1800년대 후반에 만들어져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때로는 별의 개수를 달리하거나 별을 꽃이나 닻으로 바꾸는 등 국기의 형태나 무늬를 변형하기도 합니다.
미국 인디언 : 러셀 민스
엔디 워홀(1928-1987), 1976년, 캔버스에 합성 플리머안료와 실크스크린, 찰스 프란시스 헨드리 기념 컬렉션(교환으로 취득), 1993.
1960년대 앤디 워홀의 <캠벨수프 캔>, <브릴로 상자>. <메릴린 먼로>, <마오쩌둥> 등 다양한 이미지는
예술의 개념을 혁신적으로 변화시켰습니다. 미국 건국 200주년이 되던
1976년에 앤디 워홀은 북미 원주민 운동가이자 지도자인 러셀 민스에게 초상화를 그리게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러셀 민스는 오글라라 라코타 출신으로 북미 원주민의 권리를 위해 일하는 정치 활동가이자 배우, 음악가, 작가였습니다.
북미 원주민 운동은 원주민에 대한 빈곤, 차별, 경찰 폭력 등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고자 일어났습니다.
러셀 민스는 원주민들의 권리를 향상하고자 중남미 지역 단체, 유엔과 협력하는 등
원주민 관련 국제적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러셀 민스는 미국 문화에서 '대중문화의 아이콘'이자 지배적 문화에 대한 '저항의 상징'이기도 했지만, 역설적이게도
워홀은 민스가 누구인지 잘 몰랐고, 그가 원주민 정치계에서 지위가 높았다는 사실보다 그의 외모에 끌린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소총을 들고 앉아 있는 인디언
루이세뇨족의 프리츠 숄더(1937-2005), 뉴멕시코주 센타페이와 에로나주 스코츠데일, 1976년경, 캔버스에 유화, 2009. 361.
루이세뇨족 출신인 작가 프리츠 숄더는 북미 원주민의 낭만적 이미지와 고정관념에 대항해 대안적 현실을 제시하는 작품을
만들어 왔습니다. 이런 경향은 비원주민 화가인 조지 캐틀린, 프레더릭 레밍턴 그리고 사진가 에드워드 커티스가
초연한 표정의 '고상한 야만인'이나, '전쟁을 좋아하는 부족'과 같은 잘못된 원주민 신화를 만들어 온 것에 대항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이미지로 그려진 원주민은 사실 그들의 땅에서 쫓겨나 보호구역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비원주민 예술가들의 작품 속에서 소총을 든 원주민은 고독한 공격자의 이미지이지만,
프리츠 숄더는 스스로와 가족, 공동체를 지키는 보호자의 이미지로 재구성했습니다.
인디언의 힘
루이세뇨족의 프리츠 숄더(1937-2005), 뉴멕시코주 센타페이와 에로나주 스코츠데일, 1972년, 캔버스에 유화, 2016. 125.
프리츠 숄더는 현대 원주민 문제에 관심을 갖고 원주민 시리즈를 제작했습니다. <인디언의 힘>은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에서 금메달과 동메달을 받은 후 검은 장갑을 낀 주먹을 들어 올리는 장면과 비슷합니다.
이 '블랙 파워'의 상징은 흑인 공동체를 넘어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이 작품은 1970년대에 널리 복제되었습니다. 미국 전역 원주민들의 집과 사무실에서 찾아볼 수 있었으며,
원주민의 자결권과 행동주의의 시각적 상징이 되었습니다.
이 그림은 이후 행방이 알려지지 않다가 덴버 시내의 한 갤러리 앞에서 발견되어 덴버박물관의 후원자가 구입해 기증했습니다.
말을 탄 채 주먹을 힘껏 들어 올린 그림 속 주인공은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담고 있습니다.
작성자 : 바위솔
첫댓글 콜럼버스의 대 발견~
시작은 평화로웠으나 욕심에 눈을 뜬 사람들은
자기랑 다른 사람들, 약해 보이는 사람들의 것을
빼앗고 마치 원래 자기것인양 차지 하지요.
전쟁이야~~~~~~
아픈 역사지만 또 흐르는데로 바뀌는 운명이니...ㅠ
그래도 그 와중에 훌륭한 의인은 남는 법.
북미 원주민들과 이주민들의 융합이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
후세대들은 예술을 남겼네요.
어릴적 서부 영화도 무쟈게 보고.
캘리포니아 드림도 따라 부르고
아픔이 뭔지 역사가 뭔지 몰랐으니...ㅎ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피 위에 세워진
문명국가의 이중성이 보입니다
평화로운 세상이 왔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