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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디미방>의 저자 장계향 선생의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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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난 밤늦은 귀가 때면 문지방에 물 살짝 부어 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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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동주는 술같지 않은 술…한과는 미술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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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부 권순선생이 알려주는 팥잎국
1. 낙엽이 떨어지기 전에 팥잎을 따서 음지에 말린 뒤 양파자루에 담아 보관한다.
2. 말린 팥잎을 새벽 마당에 내놔서 이슬이 살짝 떨어지게 한다. (혹은 물을 촉촉하게 묻힌다)
3. 팥잎을 삶는다. 물에 3번 정도 헹군다. 꼭 짜서 칼로 다지고 콩가루를 묻힌다.
4. 육수(멸치와 다시마로 우린 물)를 낸다. 육수에 넣고 끓인다.
5. 물이 너무 많으면 콩가루가 벗겨지기 때문에 처음에는 물 양을 적게 한다. (팥 : 물 = 2 : 3)
6. 끓으면 물을 더 넣는다. 간장으로 간을 한다.
명예와 이익을 멀리한 진정한 선비의 삶
가지고 있다.
건물의 앞쪽은 안채로 들어갈 수 있는 중문이 달려 있는 문간채와 사랑채로
전체 6칸의 규모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사랑채는 문간채 보다 훨씬 높게
죽담을 쌓고 기둥을 세워 높은 품격을 자아낸다.
정면에 걸려 있는 현판 글씨는 김방걸(芝村 金邦杰, 1623∼1695)의 종손
김구직(南井 金九稷)의 글씨다.
사당은 종택의 동북쪽 뒤에 자리잡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로 맞배지붕집으로 경당의 불천위를 모시고 있다. 춘파에서 옮겨온 후 절 집을 사서
지은 것이다.
경당고택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곳이다. 안동을 중심으로 조선 중기 퇴계학파를 이끌었던 영남 유학의 근간이 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경당은 어려서부터 김성일((鶴峰 金誠一, 1538~1593) 문하에 출입했고 유성룡(西厓 柳成龍, 1542~1607), 정구(寒岡 鄭逑, 1543~1620)에게 배웠다. 이황의 큰제자 세 사람에게 배움으로써 퇴계학통을 있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중후(忠厚)와 성실(誠實)을 바탕으로 ‘敬’의 학문을 중시하였던 선생은 책상 위에 커다란 '敬'자를 써 붙이고 생활의 신조로 삼았으며, 자신의 아호를 경당(敬堂)으로 불렀다. 평생토록 명예와 이익을 멀리하여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으며, 오로지 후학 양성과 학문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의 학문은 외손인 이현일(葛庵 李玄逸, 1627~1704)에게
전해져 많은 제자와 문인을 길러내었다.
특히 고택은 안동의 신사임당이라 불렸던 정부인 안동장씨(貞夫人 安東張氏 張桂香. 1598~1680)가 태어났던 곳이다. 경당의 무남독녀로서 이시명(石溪 李時明, 1580~1674)의 배필이었던 장씨는 우리나라 최초의 요리책인 『음식디미방(閨壺是議方)』을 지은이로, 여성 문장가로 이름이 높았다. 『음식디미방』은 지금도 재현할 수 있을 만큼 당시의 요리 종류와 조리법을 상세히 기록해 놓은 책으로
귀중한 사료로 평가 받고 있다. 재령이씨 문중에 불천위로 모셔져 있다.
칠계재 七戒齋
외할머니집처럼 정겨운 마당, 아름다운 이야기가 가득~
아울러 광풍정을 중건하고 인재 최현의 기문을 걸었다.
1844년에는 경당선생의 제사 대수가 다하여 조매를 하게 되자 당대의 대학자인 정재 류치명 선생에게 품의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부조묘(不祧廟)로 모시도록 주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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