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운(金炳雲)
[문과] 헌종(憲宗) 10년(1844) 갑진(甲辰) 증광시(增廣試) 을과(乙科) 5위(08/39)
[인물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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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 경평(景平)
생년 갑술(甲戌) 1814년 (순조 14)
졸년 정축(丁丑)【補】(주1) 1877년 (고종 14)
향년 64세
합격연령 31세
본인본관 안동(安東[新])
거주지 한성([京])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1814년(순조 14)∼1877년(고종 14).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경평(景平), 호는 유정(柳汀). 본관은 안동(安東[新]).
증조부는 김이안(金履安), 조부는 김봉순(金鳳淳)이고, 부친은 김호근(金湖根)이다. 외조부는 이광헌(李光憲)이다.
성품은 호학하고 관대하고 조화로우며 엄하고 맺음을 잘하였다.
1831년(순조 31) 신묘식년사마시(辛卯式年司馬試)에 생원(生員) 3등으로 합격하고, 1844년(헌종 10) 갑진증광문과(甲辰增廣文科)에 을과(乙科) 5등으로 급제하였다.
1852년(철종 3)에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이 되었고, 1854년 이조참의(吏曹參議)를 거쳐 1856년 부제조(副提調)로 임명되었다가 2년 후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로 부임했다.
1860년에 형조판서(刑曹判書), 한성판윤(漢城判尹),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지냈고, 1863년에 한성판윤에 재임명되었다가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을 제수 받았다.
저서로는 『유정수후록(柳汀隨後錄)』이 있다. 묘는 남양주(南楊州) 이패동에 있다.
[생원] 순조(純祖) 31년(1831) 신묘(辛卯) 식년시(式年試) [생원] 3등(三等) 31위(61/100)
[음관] 문음진신보(文蔭縉紳譜)
[이력사항]
선발인원 39명 [甲3‧乙7‧丙29]
전력 생원(生員)
문과시제 어제(御題) 명(銘):어수당(魚水堂)
타과 순조(純祖) 31년(1831) 신묘(辛卯)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3등(三等) 31위
[가족사항]
[부(父)]
성명 : 김호근(金浩根)
[조부(祖父)]
성명 : 김봉순(金鳳淳)[進]
[증조부(曾祖父)]
성명 : 김이안(金履安)
[외조부(外祖父)]
성명 : 이광헌(李光憲)[文]
본관 : 우봉(牛峰)【補】
[처부(妻父)]
성명 : ▣○○(▣○○)
본관 : 미상(未詳)
[주 1]졸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8.)을 참고하여 졸년을 추가.
[출전]
『국조방목(國朝榜目)』(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貴 11655])
김호근(金浩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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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 양선(養善)
생년 병진(丙辰) 1796년 (정조 20)
본인본관 안동(安東[新])
[관련정보]
[음관] 음안(蔭案)
[이력사항]
초직 계사(癸巳) 세(洗)
[가족사항]
[부(父)]
성명 : 김봉순(金鳳淳)
관직 : 현감(縣監)
[조부 - 조부1:부의 부]
성명 : 김이안(金履安)
관직 : 좨주(祭酒)
[조부 - 조부2:부의 생부]
성명 : 김이계(金履銈)
관직 : 도정(都正)
[증조부 - 증조부1:조부1의 부]
성명 : 김원행(金元行)
기타 : 견수근파(見洙根派)
[증조부 - 증조부3:조부2의 부]
성명 : 김범행(金範行)
관직 : 군수(郡守)
[4대 - 4대조3:증조부3의 부]
성명 : 김양겸(金養謙)
기타 : 견면순파(見勉淳派)
[외조부(外祖父)]
성명 : 홍낙정(洪樂正)
관직 : 서윤(庶尹)
본관 : 미상(未詳)
[처부(妻父)]
성명 : 이광헌(李光憲)
관직 : 참판(參判)
본관 : 미상(未詳)
[출전]
『음보(蔭譜)』 利(규장각한국학연구원[古929.3-Eu55])
김봉순(金鳳淳)
[진사] 순조(純祖) 1년(1801) 신유(辛酉) 식년시(式年試) [진사] 3등(三等) 33위(63/100)
[인물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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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 유문(幼文)
생년 갑오(甲午) 1774년 (영조 50)
합격연령 28세
본인본관 안동(安東[新])
거주지 양주(楊州)
[관련정보]
[이력사항]
선발인원 100명 [一等5‧二等25‧三等70]
전력 유학(幼學)
부모구존 영감하(永感下)
생부모구존 구경하(具慶下)
[가족사항]
[부(父)]
성명 : 김이안(金履安)
품계 : 통정대부(通政大夫)
관직 : 공조참의(工曹參議)
[생부(生父)]
성명 : 김이계(金履銈)[進]
품계 : 어모장군(禦侮將軍)
관직 : 행용양위부사과(行龍驤衛副司果)
[안항(鴈行)]
본생가 형(兄) : 김근순(金近淳)[文]
본생가 제(弟) : 김적순(金迪淳)
본생가 제(弟) : 김운순(金運淳)[進]
[출전]
『숭정3신유추식년사마방목(崇禎三辛酉秋式年司馬榜目)』(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B13LB-31])
김이안(金履安)
[진사] 영조(英祖) 35년(1759) 기묘(己卯) 식년시(式年試) [진사] 1등(一等) 2위(2/100)
[인물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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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 정례(正禮)
생년 임인(壬寅) 1722년 (경종 2)
졸년 신해(辛亥)【補】(주1) 1791년 (정조 15)
향년 70세
합격연령 38세
본인본관 안동(安東[新])
거주지 양주(楊州)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조선후기 『의례경전기의』, 『계몽기의』, 『삼산재집』 등을 저술한 학자.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원례(元禮), 호는 삼산재(三山齋).
김상헌(金尙憲)의 후손으로 김창협(金昌協)의 증손자, 김원행(金元行)의 아들이다.
당대의 학자였던 아버지에게서 학문을 배워 1762년(영조 38) 학행(學行)으로 천거받아, 민이현(閔彝顯)·김두묵(金斗默)·조림(曺霖) 등과 함께 경연관(經筵官)에 기용되었고, 1781년(정조 5) 충주목사를 지냈으며, 1784년 지평(持平)·보덕(輔德)·찬선(贊善) 등을 거쳐 1786년 좨주(祭酒)가 되었다.
당시 북학파(北學派) 학자 홍대용(洪大容)·박제가(朴齊家)등과 교유를 맺어 실학에 관심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버지 문하에 출입하던 성리학자 박윤원(朴胤源)·이직보(李直輔)·오윤상(吳允常) 등과의 교유 속에 전통적 성리학자로 더 알려졌으며, 또한 예설(禮說)과 역학(易學)에도 조예가 깊어 『의례경전기의(儀禮經傳記疑)』·『계몽기의(啓蒙記疑)』 등 많은 저술을 남겼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저서로는 『삼산재집(三山齋集)』 12권이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김이안(金履安))]
[이력사항]
선발인원 100명 [一等5‧二等25‧三等70]
전력 유학(幼學)
사마시제 일시(一詩)
부모구존 구경하(具慶下)
[가족사항]
[부(父)]
성명 : 김원행(金元行)[進]
품계 : 통훈대부(通訓大夫)
관직 : 세손강서원좌권독(世孫講書院左勸讀)
[안항(鴈行)]
제(弟) : 김이도(金履道)
[주 1]졸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8.)을 참고하여 졸년을 추가.
[출전]
『숭정3기묘식년사마방목(崇禎三己卯式年司馬榜目)』(국립중앙도서관[古朝26-29-39])
김이계(金履銈)
[진사] 영조(英祖) 44년(1768) 무자(戊子) 식년시(式年試) [진사] 3등(三等) 46위(76/100)
[인물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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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 성서(聖瑞)
생년 병진(丙辰) 1736년 (영조 12)
합격연령 33세
본인본관 안동(安東[新])
거주지 한성([京])
[관련정보]
[이력사항]
선발인원 100명 [一等5‧二等25‧三等70]
전력 유학(幼學)
사마시제 이시(二詩)
부모구존 자시하(慈侍下)
[가족사항]
[부(父)]
성명 : 김범행(金範行)
품계 : 통훈대부(通訓大夫)
관직 : 양주진관병마동첨절제사(楊州鎭管兵馬同僉節制使)
[처부(妻父)]
성명 : 심둔(沈鈍)【補】(주1)
본관 : 청송(靑松)【補】
[안항(鴈行)]
형(兄) : 김이현(金履鉉)
형(兄) : 김이용(金履鏞)[文]
제(弟) : 김이호(金履鎬)[進]
제(弟) : 김이영(金履鍈)
제(弟) : 김이수(金履鏽)
[주 1]처부 : 『대구서씨세보(大丘徐氏世譜)』(1995) 戊編2下, [87쪽]을 참고하여 처부를 추가.
[출전]
『숭정3무자식년사마방목(崇禎三戊子式年司馬榜目)』(국립중앙도서관[古朝26-29-42])
김원행(金元行)
[진사] 숙종(肅宗) 45년(1719) 기해(己亥) 증광시(增廣試) [진사] 3등(三等) 65위(95/100)
[인물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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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 백춘(伯春)
생년 임오(壬午) 1702년 (숙종 28)
졸년 임진(壬辰)【補】(주1) 1772년 (영조 48)
향년 71세
합격연령 18세
본인본관 안동(安東[新])
거주지 한성([京])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조선후기 종부시주부, 공조참의, 사성 등을 역임한 문신.학자.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백춘(伯春), 호는 미호(渼湖)·운루(雲樓).
아버지는 승지 김제겸(金濟謙)이며, 어머니는 밀양 박씨로 이조판서 박권(朴權)의 딸이다.
당숙인 김숭겸(金崇謙)에게 입양되어 종조부 김창협(金昌協)의 손자가 되었다.
이재(李縡)의 문인이다.
1719년(숙종 45) 진사가 되었으나, 1722년(경종 2) 신임사화 때 조부 김창집(金昌集)이 노론 4대신으로 사사되고, 생부 김제겸과 친형인 김성행(金省行)·김탄행(金坦行) 등이 유배되어 죽임을 당하자, 벼슬할 뜻을 버리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이때 어머니의 유배지에 따라가 『맹자』·『율곡집(栗谷集)』·『우암집(尤庵集)』 등을 탐독하였다. 1725년(영조 1) 조부·생부·형등이 신원된 후에도 시골에 묻혀 살며 학문 연구에만 몰두하였다.
1740년 학행으로 천거되어 내시교관(內侍敎官)에 임명되고, 1750년 위수(衛率)·종부시주부(宗簿寺主簿)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1759년 왕세손을 교육할 적임자로서 영조의 부름을 받았으나 소를 올리고 사퇴하였다.
1761년 공조참의·사성(司成)에 임명되고, 그 후 찬선(贊善)에도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김원행(金元行))]
[이력사항]
선발인원 100명 [一等5‧二等25‧三等70]
전력 유학(幼學)
부모구존 자시하(慈侍下)
[가족사항]
[부(父)]
성명 : 김숭겸(金崇謙)
관직 : 행사복시첨정(行司僕寺僉正)
[생부(生父)]
성명 : 김제겸(金濟謙)[進]
품계 : 중직대부(中直大夫)
[안항(鴈行)]
본생가 형(兄) : 김성행(金省行)
본생가 형(兄) : 김준행(金峻行)
본생가 제(弟) : 김달행(金達行)
[주 1]졸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8.)을 참고하여 졸년을 추가.
[출전]
『기해대전입기로소증광별시사마방(己亥大殿入耆老所增廣別試司馬榜)』(국립중앙도서관[古6024-188])
김창협(金昌協)
[문과] 숙종(肅宗) 8년(1682) 임술(壬戌) 증광시(增廣試) 갑과(甲科) 1[壯元]위(01/35)
[인물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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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 중화(仲和)
호(號) 농암(農巖)
시호(諡號) 문간(文簡)
생년 신묘(辛卯) 1651년 (효종 2)
졸년 무자(戊子)【補】(주1) 1708년 (숙종 34)
향년 58세
합격연령 32세
본인본관 안동(安東[新])
거주지 한성([京])【補】(주2)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조선후기 병조참지, 예조참의, 대사간 등을 역임한 문신. 학자.
경기도 과천 출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중화(仲和), 호는 농암(農巖)·삼주(三洲).
좌의정 김상헌(金尙憲)의 증손자이고, 영의정을 지낸 김창집(金昌集)의 아우이다. 아버지는 영의정 수항(金壽恒)이며, 어머니는 안정 나씨(安定羅氏)로 해주목사 나성두(羅星斗)의 딸이다.
1669년(현종 10) 진사시에 합격하고, 1682년(숙종 8) 증광문과에 전시장원으로 급제하여 전적에 출사하였다.
이어서 병조좌랑·사헌부지평·부교리 등을 거쳐 교리·이조좌랑·함경북도병마평사(咸鏡北道兵馬評事)·이조정랑·집의·동부승지·대사성·병조참지(兵曹參知)·예조참의·대사간 등을 역임하고, 명에 의해 송시열(宋時烈)의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를 교정하였다.
청풍부사로 있을 때 기사환국으로 아버지가 진도에서 사사되자, 사직하고 영평(永平)에 은거하였다.
1694년 갑술옥사 이후 아버지가 신원됨에 따라 호조참의·예조참판·홍문관제학·이조참판·대제학·예조판서·세자우부빈객·지돈녕부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직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김창협은 학문적으로는 이황(李滉)과 이이(李珥)의 설을 절충하였다.
“사단(四端)은 선(善)뿐이고 칠정(七情)은 선과 악을 겸했으니, 사단은 오로지 이(理)만 뜻하고 칠정은 기(氣)를 겸한 것이다.”라는 이이의 설에 대해, 다만 기까지 겸하였다는 한 구절에서 차이를 보인다. “칠정이 비록 이와 기를 겸했더라도 그 선한 것은 기가 능히 이를 따랐음이요, 그 선하지 않은 것은 기가 능히 이를 따르지 않은 것이니, 처음부터 기가 주된 것이다.”라고 하여 이이의 기발이승설(氣發理乘說)을 지지하였다.
김창협은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에서도 “기의 맑은 것은 모두 선하지만 선한 정(情)이 모두 맑은 기에서 나왔다 함은 옳지 않으며, 정의 악한 것이 탁(濁)한 기에서 나왔지만 탁한 기가 발(發)해 된 정이 모두 악하다고 할 수는 없다.”라고 말한다.
또한 김창협은 “인심의 동(動)함에 이가 비록 기에 탔어도 기가 또한 이의 명령을 듣는 것이다. 만약, 선악의 정을 모두 기의 청탁에 돌린다면 이의 실체와 성(性)의 선함을 보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성악론변(性惡論辨)」에서 김창협은 “사람의 성은 본래 선한 것이나 순경(荀卿)이 인성을 악하다고 말한 것은 기요, 성이 아니다. 대체로, 사람이 세상에 날 때 기는 질(質)이 되고 이는 성이 되는 것인데, 이에는 선만 있고 악이 없으나 기에는 선한 것도 있고 선하지 못한 것도 있으니, 사람에게 선하지 못함이 있음은 기의 소위이다.”라고 규정하였다.
김창협의 문장은 단아하고 순수하여 구양수(歐陽修)의 정수를 얻었으며, 김창협의 시는 두보(杜甫)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대로 모방하지 않고 고상한 시풍을 이루었다.
특히, 문장에 능하고 글씨도 잘 써서 「문정공이단상비(文貞公李端相碑)」·「감사이만웅비(監司李萬雄碑)」·「김숭겸표(金崇謙表)」·「김명원신도비전액(金命元神道碑篆額)」 등의 작품을 남겼다.
저서로는 『농암집(農巖集)』·『주자대전차의문목(朱子大全箚疑問目)』·『논어상설(論語詳說)』·『오자수언(五子粹言)』·『이가시선(二家詩選)』 등이 있고, 편저로는 『강도충렬록(江都忠烈錄)』·『문곡연보(文谷年譜)』 등이 있다.
숙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양주의 석실서원(石室書院), 영암의 녹동서원(鹿洞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김창협(金昌協))]
[진사] 현종(顯宗) 10년(1669) 기유(己酉) 식년시(式年試) [진사] 3등(三等) 44위(74/100)
[이력사항]
선발인원 35명 [甲3‧乙7‧丙25]
전력 통덕랑(通德郞)
관직 문형(文衡)
관직 예조판서(禮曹判書)
타과 현종(顯宗) 10년(1669) 기유(己酉)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3등(三等) 44위
[가족사항]
[부(父)]
성명 : 김수항(金壽恒)[文]
[조부(祖父)]
성명 : 김광찬(金光燦)[生]
[증조부(曾祖父)]
성명 : 김상헌(金尙憲)[文]
[외조부(外祖父)]
성명 : 나성두(羅星斗)
본관 : 미상(未詳)
[처부(妻父)]
성명 : 이단상(李端相)[文]
본관 : 연안(延安)【補】
[안항(鴈行)]
형(兄) : 김창집(金昌集)[文]
제(弟) : 김창흡(金昌翕)[進]【補】
제(弟) : 김창업(金昌業)[進]【補】(주3)
[주 1]졸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8.)을 참고하여 졸년을 추가.
[주 2]거주지 : 『기유식년사마방목(己酉式年司馬榜目)』(국립중앙도서관[古朝26-29-17]) 내의 합격 기록을 참고하여 거주지를 추가.
[주 3]안항 : 『기유식년사마방목(己酉式年司馬榜目)』(국립중앙도서관[古朝26-29-17]) 내의 합격 기록을 참고하여 안항을 추가.
[출전]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卷之十三(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106])
김수항(金壽恒)
[문과] 효종(孝宗) 2년(1651) 신묘(辛卯) 알성시(謁聖試) 갑과(甲科) 1[壯元]위(01/07)
[인물요약]
UCI G002+AKS-KHF_13AE40C218D56DB1629X0
자(字) 구지(久之)
호(號) 문곡(文谷)
시호(諡號) 문충(文忠)
생년 기사(己巳) 1629년 (인조 7)
졸년 기사(己巳) 1689년 (숙종 15)
향년 61세
합격연령 23세
본인본관 안동(安東[新])
거주지 한성([京])【補】(주1)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조선후기 예조판서, 좌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구지(久之), 호는 문곡(文谷).
김극효(金克孝)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김상관(金尙寬)이고,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김광찬(金光燦)이며, 어머니는 목사 김내(金琜)의 딸이다.
1645년(인조 23) 반시(泮試)에 수석하고, 1646년 진사시와 1651년(효종 2) 알성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 전적(典籍)이 되었다.
이어 병조좌랑·사서(司書)·경기도사·지평(持平)·정언(正言)을 거쳐, 1653년 동지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 해 정시 문과에 5등으로 급제해 효종으로부터 말을 받았으며, 이듬해 부수찬(副修撰)·교리(校理)를 거쳐 이조정랑이 되어 중학(中學)·한학교수(漢學敎授)를 겸하였다. 1655년 호당(湖堂)에 사가독서하고 수찬이 되었다가, 응교(應敎)·사간·보덕(輔德)을 지냈으며, 중시에서 을과로 급제, 형조참의·승지·부제학을 지냈다.
1659년(현종 즉위년) 효종릉비의 전서(篆書)를 쓴 공로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르고, 도승지·예조참판·이조참판을 지냈으며, 1662년 왕의 특명으로 예조판서에 발탁되었다. 그 뒤 육조의 판서를 두루 거쳤고, 특히 이조판서로 있으면서 명사들을 조정에 선임하는 데 힘썼다.
1672년 44세의 나이로 우의정에 발탁되고, 좌의정에 승진해 세자부(世子傅)를 겸하였다. 그러나 서인 송시열(宋時烈) 등이 왕의 경원을 받고 물러남을 보고 남인 재상 허적(許積)을 탄핵한 대간을 힘써 변호하다가 도리어 판중추부사로 물러났으며, 사은사로서 청나라에 다녀왔다.
1674년 갑인예송에서 서인이 패해 영의정이던 형 김수흥(金壽興)이 쫓겨나자, 대신 좌의정으로 다시 임명되었다.
숙종 즉위 후 허적·윤휴(尹鑴)를 배척하고, 추문을 들어 종실 복창군(福昌君) 이정(李楨)·복선군(福善君) 이남(李柟) 형제의 처벌을 주장하다가 집권파인 남인의 미움을 받아 영암에 유배되고 1678년(숙종 4) 철원으로 이배되었다.
1680년 이른바 경신대출척이 일어나 남인들이 실각하자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로 복귀, 영의정이 되어 남인의 죄를 다스리는 한편, 송시열·박세채(朴世采) 등을 불러들였다.
이후 8년 동안 영의정으로 있다가 1687년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로 체임되었다.
1689년 태조 어용(太祖御容:태조영정)을 전주에 모셔놓고 돌아오는 길에 기사환국이 일어나 남인이 재집권하자, 남인의 명사를 함부로 죽였다고 장령(掌令) 김방걸(金邦杰) 등이 탄핵해 진도로 유배, 위리안치되었다.
뒤이어 예조판서 민암(閔黯)을 비롯한 6판서·참판·참의 등 남인 경재(卿宰) 수십 인의 공격과 사헌부·사간원의 합계(合啓:함께 계문을 올림)로 사사되었다.
이는 경신 이후의 남인 옥사를 다스릴 때 위관으로 있었고, 특히 소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남인 재상 오시수(吳始壽)를 처형했기 때문에 입게 된 보복이었다.
절의로 이름 높던 김상헌의 손자로 가학(家學)을 계승했으며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인 송시열·송준길(宋浚吉)과 종유하였다.
특히 송시열이 가장 아끼던 후배로서 한 때 사림의 종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할 때 송시열을 옹호하고 외척과 가까운 노론의 영수가 되자, 소론 명류들에게 배척을 받기도 하였다.
시문에 뛰어났고, 변려문(騈儷文)에서는 당대의 제일인자로 손꼽혔다.
또한 가풍을 이은 필법이 단아해 전서와 해서·초서에 모두 능하였다.
사후에 세상의 평가는 조정에서 벼슬할 때 세 가지의 큰 절의를 세웠다고 찬양하였다.
첫째는 남인의 역모를 꺾어 기강을 유지했다는 것이고, 둘째는 소론이 이론(異論:남인에 대한 온건한 처벌 주장을 말함)을 일삼아 흉당(凶黨:남인)을 기쁘게 할 때에도 홀로 옳은 것을 지켰을 뿐 아니라 화를 당하면서도 후회하지 않았다는 것이며, 셋째는 스승인 송시열을 배신한 윤증(尹拯)의 죄를 통렬히 배척해 선비의 갈길을 밝혀 사문(斯文)에 도움을 주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세상의 평판은 물론 노론계의 주장이며, 반대로 소론측에서는 송시열과 윤증 사이의 사사로운 일을 임금에게 아뢰어 조정을 시끄럽게 만들었고, 이로 인해 마침내 사림을 분열시켜 놓았다고 비난하였다.
1694년에 신원, 복관되었다. 1886년(고종 23)에는 현종 묘정에 배향되었고, 진도의 봉암사(鳳巖祠), 영암의 녹동서원(鹿洞書院), 영평의 옥병서원(玉屛書院) 등에 제향되었으며, 양주의 석실서원(石室書院), 전주의 호산사(湖山祠)에 추가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문곡집(文谷集)』 28권이 전하고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김수항(金壽恒))]
[문과] 효종(孝宗) 7년(1656) 병신(丙申) 중시(重試) 을과(乙科) 1[亞元]위(02/08)
[진사] 인조(仁祖) 24년(1646) 병술(丙戌) 식년시(式年試) [진사] 1등(一等) 1[壯元]위(1/100)
[이력사항]
선발인원 07명 [甲1‧乙1‧丙5]
전력 진사(進士)
관직 문형(文衡)
관직 의정부영의정(議政府領議政)
문과시제 명(銘):남훈금(南薰琴)
타과 인조(仁祖) 24년(1646) 병술(丙戌)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1등(一等) 1위[壯元]
본인문과 효종(孝宗) 7년(1656) 병신(丙申) 중시(重試) 문과(文科) 을과(乙科) 1위[亞元]
기타 기사피화 갑술신 명상 34주문 44입상(己巳被禍甲戌伸名相三十四主文四十四入相) 우암찬지(尤菴撰誌)
[가족사항]
[부(父)]
성명 : 김광찬(金光燦)[生]
[조부(祖父)]
성명 : 김상헌(金尙憲)[文]
[증조부(曾祖父)]
성명 : 김대효(金大孝)
[외조부(外祖父)]
성명 : 김래(金琜)[進]
본관 : 연안(延安)【補】
[처부(妻父)]
성명 : 나성두(羅星斗)[進]
본관 : 안정(安定)【補】
[안항(鴈行)]
형(兄) : 김수증(金壽增)[生]【補】(주2)
형(兄) : 김수흥(金壽興)[文]
서제(庶弟) : 김수징(金壽徵)[進]【補】
서제(庶弟) : 김수응(金壽應)[進]【補】
서제(庶弟) : 김수칭(金壽稱)【補】
서제(庶弟) : 김수능(金壽能)[文]【補】(주3)
[가족과거]
자(子) : 김창집(金昌集)[文]
손(孫) : 김제겸(金濟謙)[文]
[주 1]거주지 : 『병술3월○일을유식년사마방목(丙戌三月○日乙酉式年司馬榜目)』(국립중앙도서관[한貴古朝26-29-15]) 내의 합격 기록을 참고하여 거주지를 추가.
[주 2]안항 : 『병술3월○일을유식년사마방목(丙戌三月○日乙酉式年司馬榜目)』(국립중앙도서관[한貴古朝26-29-15]) 내의 합격 기록을 참고하여 안항을 추가.
[주 3]안항2 : 『선원록(璿源錄)』(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K2-1047])권39, [成宗大王宗親錄](49쪽)과 『문곡집(文谷集)』 卷之21, 行狀, [선부군행장(先府君行狀)]을 참고하여 서제를 추가.
[출전]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卷之十一(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106])
김광찬(金光燦)
[생원] 인조(仁祖) 5년(1627) 정묘(丁卯) 식년시(式年試) [생원] 1등(一等) 2위(2/100)
[인물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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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 사회(思晦)
호(號) 운수거사(雲水居士)【補】(주1)
생년 정유(丁酉) 1597년 (선조 30)
졸년 무신(戊申)【補】(주2) 1668년 (현종 9)
향년 72세
합격연령 31세
본인본관 안동(安東[新])
거주지 한성([京])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조선후기 청풍군수, 파주목사, 동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사회(思晦).
아버지는 부사 김상관(金尙寬)이며, 작은아버지인 좌의정 김상헌(金尙憲)의 양자로 들어갔다.
광해군 때는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있다가 1627년(인조 5)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음서(蔭敍)로 세마(洗馬)가 되었으며, 병자호란 때 아버지를 따라 남한산성으로 인조를 호종하였다.
통진·교하의 현감 등 지방관을 역임하던 중, 아들 김수흥(金壽興)·김수항(金壽恒)이 출세하자 1661년(현종 2) 공조참의에 특별히 제수되었다.
뒤에 청풍군수·파주목사를 거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올랐다. 1637년 아버지 김상헌이 척화를 주장하며 자살을 기도하였을 때 적극 만류하지 않아 물의를 빚기도 하였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김광찬(金光燦))]
[이력사항]
선발인원 100명 [一等5‧二等25‧三等70]
전력 유학(幼學)
부모구존 구경하(具慶下)
[가족사항]
[부(父)]
성명 : 김상헌(金尙憲)[進]
품계 : 가선대부(嘉善大夫)
관직 : 행승정원도승지(行承政院都承旨)
[생부(生父)]
성명 : 김상관(金尙寬)
증직 : 증가선대부 이조참판(贈嘉善大夫吏曹參判)
품계 : 행통훈대부(行通訓大夫)
관직 : 장단도호부사(長湍都護府使)
[처부(妻父)]
성명 : 김래(金琜)[進]【補】(주3)
본관 : 연안(延安)【補】
[안항(鴈行)]
본생가 형(兄) : 김광혁(金光爀:異焃)[進]
서제(庶弟) : 김광한(金光㸁)【補】
서제(庶弟) : 김광적(金光熵)【補】
서제(庶弟) : 김광료(金光炓)【補】(주4)
[주 1]호 : 『문곡집(文谷集)』 卷之21, 行狀, [선부군행장(先府君行狀)]을 참고하여 호를 추가.
[주 2]졸년 : 『문곡집(文谷集)』 卷之21, 行狀, [선부군행장(先府君行狀)]을 참고 졸년을 추가.
[주 3]처부 : 『문곡집(文谷集)』 卷之21, 行狀, [선부군행장(先府君行狀)]을 참고 처부를 추가.
[주 4]안항 : 『선원록(璿源錄)』(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K2-1047]) 권39, [成宗大王宗親錄](55~56쪽)을 참고하여 서제를 추가.
[출전]
『천계7년8월초4일정묘식년사마방목(天啓七年八月初四日丁卯式年司馬榜目)』(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B13LB-1])
김상헌(金尙憲)
[문과] 선조(宣祖) 29년(1596) 병신(丙申) 정시(庭試) 병과(丙科) 8위(13/19)
[인물요약]
UCI G002+AKS-KHF_13AE40C0C1D5CCB1570X0
자(字) 숙도(叔度)
호(號) 청음(淸陰)
호(號) 석실(石室)【補】(주1)
호(號) 서간노인(西磵老人)【補】(주2)
시호(諡號) 문정(文正)【補】(주3)
생년 경오(庚午) 1570년 (선조 3)
졸년 임진(壬辰)【補】(주4) 1652년 (효종 3)
향년 83세
합격연령 27세
본인본관 안동(安東[新])
거주지 한성([京])【補】(주5)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조선시대 부제학, 대사헌, 예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김상헌은 조선시대 부제학, 대사헌, 예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1570년(선조 3)에 태어나 1652년(효종 3)에 사망했다. 1596년 임진왜란 중에 실시한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했다. 병자호란 때 예조판서로서 주화론을 배척하고 끝까지 주전론을 펴다가 인조가 항복하자 안동으로 은퇴했다.
명을 공격하기 위한 청의 출병 요청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청에 압송되어 6년 동안 감금되었다가 풀려났다. 효종이 북벌을 추진할 때 이념적 상징이 되기도 했다.
재임시 대동법에는 반대하고 서인계 산림의 등용을 권고했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숙도(叔度), 호는 청음(淸陰)·석실산인(石室山人:중년 이후 楊州 石室에 退歸해 있으면서 사용)·서간노인(西磵老人:만년에 安東에 은거하면서 사용).
서울 출생.김번(金璠)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군수 김생해(金生海)이고, 아버지는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 김극효(金克孝)이며, 어머니는 좌의정 정유길(鄭惟吉)의 딸이다.
우의정 김상용(金尙容)의 동생이다. 3세 때 큰아버지인 현감 김대효(金大孝)에게 출계(出系)하였다.
1590년(선조 23) 진사가 되고 1596년 전쟁 중에 실시한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에 임명되었다. 이후 부수찬(副修撰)·좌랑·부교리(副校理)를 거쳐 1601년 제주도에서 발생한 길운절(吉雲節)의 역옥(逆獄)을 다스리기 위한 안무어사(安撫御史)로 파견되었다.
이듬해 왕에게 결과를 보고하고, 고산찰방(高山察訪)과 경성도호부판관(鏡城都護府判官)을 지냈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문과 중시에 을과로 급제, 사가독서(賜暇讀書)한 뒤 교리·응교(應敎)·직제학을 거쳐, 1611년(광해군 4) 동부승지가 되었다. 그러나 이언적(李彦迪)과 이황(李滉) 배척에 앞장선 정인홍(鄭仁弘)을 탄핵했다가 광주부사(廣州府使)로 좌천되었다.
1613년 칠서지옥(七庶之獄)이 발생, 인목대비의 아버지인 김제남(金悌男)이 죽음을 당할 때 혼인관계(김상헌의 아들 김광찬(金光燦)이 김제남의 아들 김내(金琜)의 사위가 됨)로 인해 파직되자 집권 세력인 북인의 박해를 피해 안동시 풍산으로 이사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이조참의에 발탁되자 공신 세력의 보합위주정치(保合爲主政治)에 반대, 시비(是非)와 선악의 엄격한 구별을 주장해 서인 청서파(淸西派)의 영수가 되었다.
이어 대사간·이조참의·도승지·부제학을 거쳐, 1626년(인조 4) 성절 겸 사은진주사(聖節兼謝恩陳奏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이후 육조의 판서 및 예문관·성균관의 제학 등을 지냈다.
1632년 왕의 생부를 원종(元宗)으로 추존하려는 데 반대해 벼슬에서 물러났다.
1635년 대사헌으로 재기용되자 군비의 확보와 북방 군사 시설의 확충을 주장하였다. 이듬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예조판서로 주화론(主和論)을 배척하고 끝까지 주전론(主戰論)을 펴다가 인조가 항복하자 안동으로 은퇴하였다.
1639년 청나라가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요구한 출병에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가 청나라에 압송되어 6년 후 풀려 귀국하였다.
1645년 특별히 좌의정에 제수되고, 기로사에 들어갔다.
효종이 즉위해 북벌을 추진할 때 그 이념적 상징으로 ‘대로(大老)’라고 존경을 받았으며, 김육(金堉)이 추진하던 대동법에는 반대하고 김집(金集)등 서인계 산림(山林)의 등용을 권고하였다.
1585년(선조 8) 윤근수(尹根壽)의 문하에서 경사(經史)를 수업하고, 성혼(成渾)의 도학에 연원을 두었다. 이정구(李廷龜)·김유(金楺)·신익성(申翊聖)·이경여(李敬輿)·이경석(李景奭)·김집 등과 교유하였다.
1653년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1661년(현종 2)효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양주 석실서원(石室書院), 정주봉명서원(鳳鳴書院), 개성숭양서원(崧陽書院), 제주귤림서원(橘林書院), 정평망덕서원(望德書院), 함흥창덕서원(彰德書院), 경성경산서원(鏡山書院), 의주기충사(紀忠祠), 광주현절사(顯節祠), 상주 서산서원(西山書院), 종성화곡서원(華谷書院), 안동서간사(西磵祠), 예안운계사(雲溪祠), 정평모현사(慕賢祠)에 제향되었다.
시문과 『조천록(朝天錄)』·『남사록(南槎錄)』·『청평록(淸平錄)』·『설교집(雪窖集)』·『남한기략(南漢紀略)』 등으로 구성된 『청음전집(淸陰全集)』 40권이 전한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김상헌(金尙憲))]
[문과] 광해(光海) 즉위년(1608) 무신(戊申) 중시(重試) 을과(乙科) 1[探花]위(03/09)
[진사] 선조(宣祖) 23년(1590) 경인(庚寅) 증광시(增廣試) [진사] 2등(二等) 9위(14/100)
[이력사항]
선발인원 19명 [甲1‧乙4‧丙14]
전력 진사(進士)
관직 문형(文衡)
관직 의정부좌의정(議政府左議政)
문과시제 표(表):당이필청령한고귀성기부(唐李泌請令韓臯歸省其父)
타과 선조(宣祖) 23년(1590) 경인(庚寅) 증광시(增廣試) 진사(進士) 2등(二等) 9위
본인문과 광해(光海) 즉위년(1608) 무신(戊申) 중시(重試) 문과(文科) 을과(乙科) 1위[探花]
기타 청백(淸白)
[가족사항]
[부(父)]
성명 : 김대효(金大孝)
[생부(生父)]
성명 : 김극효(金克孝)[進]【補】(주6)
[조부(祖父)]
성명 : 김생해(金生海)
[증조부(曾祖父)]
성명 : 김번(金璠)[文]
[외조부(外祖父)]
성명 : 이영현(李英賢)[文]
본관 : 광주(廣州)【補】
[생외조부(生外祖父)]
성명 : 정유길(鄭惟吉)[文]【補】(주7)
본관 : 동래(東萊)【補】
[처부(妻父)]
성명 : 이의로(李義老)(주8)
본관 : 성주(星州)【補】
[안항(鴈行)]
본생가 형(兄) : 김상용(金尙容)[文]【補】
본생가 형(兄) : 김상관(金尙寬)【補】
본생가 형(兄) : 김상건(金尙謇)[進]【補】
본생가 제(弟) : 김상복(金尙宓)[進]【補】(주9)
[가족과거]
손(孫) : 김수흥(金壽興)[文]
손(孫) : 김수항(金壽恒)[文]
손(孫) : 김수능(金壽能)[文]
증손(曾孫) : 김창직(金昌直)[文]
증손(曾孫) : 김창집(金昌集)[文]
증손(曾孫) : 김창협(金昌協)[文]
[주 1]호 : 『송자대전(宋子大全)』 卷之189, 墓表, [석실 김선생묘표(石室金先生墓表)]를 참고하여 호를 추가.
[주 2]호2 : 『계곡집(谿谷集)』 序, [序], [계곡집서(谿谷集序)](金尙憲)를 참고하여 호2를 추가.
[주 3]시호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8.)을 참고하여 시호를 추가.
[주 4]졸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8.)을 참고하여 졸년을 추가.
[주 5]거주지 : 『황명만력18년경인10월초6일상존호증광사마방목(皇明萬曆十八年庚寅十月初六日上尊號增廣司馬榜目)』(『청좌부군방목(淸坐府君榜目)』, 대전시립박물관) 내의 합격 기록을 참고하여 거주지를 추가.
[주 6]생부 : 『황명만력18년경인10월초6일상존호증광사마방목(皇明萬曆十八年庚寅十月初六日上尊號增廣司馬榜目)』(『청좌부군방목(淸坐府君榜目)』, 대전시립박물관) 내의 합격 기록을 참고하여 생부를 추가.
[주 7]생외조부 : 『상촌고(象村稿)』 卷之24, 墓誌銘, [동지돈녕부사 김공묘지명(同知敦寧府事金公墓誌銘)]을 참고하여 생외조부를 추가.
[주 8]처부 : 『문곡집(文谷集)』 卷之21, 行狀, [선부군행장(先府君行狀)]을 참고하여 처부 본관을 추가.
[주 9]안항 : 『황명만력18년경인10월초6일상존호증광사마방목(皇明萬曆十八年庚寅十月初六日上尊號增廣司馬榜目)』(『청좌부군방목(淸坐府君榜目)』, 대전시립박물관) 내의 합격 기록을 참고하여 안항을 추가.
[출전]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卷之八(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