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가 자욱한 경춘 국도를 따라 콧노래를 부르며 운전하고 있다. 벅찬 설렘으로 혼자서 길을 나섰다. 흔히 말하는 그런 여행은 아니다. 물론 자주 하던 행보도 아니다. 그래서 더욱 설레는지 모른다. 늦가을의 냄새와 색깔이 덮친 강과 산은 만추의 정점을 찍고 있다. 내비게이션의 안내로 용인 집에서 3시간이 더 걸리는 거리를 가고 있다. 경험하지 못한 설렘과 예상치 못하는 닥칠 것들에 대한 상상들로 두어 시간을 그렇게 달리고 있다. 과연 어떤 사람, 무슨 일, 어떤 희로애락과 마주하게 될까? 눈에 보이지도 않는 것을 쌓고 또 부수며 지금까지 가보지 않은 길, 꼭 가보고 싶었던 어렴풋이 아는 그 길을 찾아가고 있다. 정확하게 나는 배우 하러 간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처음으로 영화 출연 제의를 받고 촬영을 위해 강원도 화천의 동구래 민박이라는 곳으로 간다.
저녁 6시까지 도착하는 스케쥴이지만 일찌감치 움직이고 있다. 드라마나 연극의 연출작업이 아닌 영화 연기를 하러 그곳으로 가고 있다. 도착시간을 40~50분쯤 남겨두고 출연을 연결해준 친구 K와 연락이 되어 목적지가 다시 춘천 시내로 바뀌었다. 만나서 점심을 함께 먹고 같이 숙소로 들어가서 차분히 촬영 준비하자는 제의를 해 온 거다. 여간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역할의 크고 작음에 관계없이 세심한 준비가 필요한 것이 배우의 자세이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그도 그럴 것이 전주영상위원회에서 지원하는 중편 독립영화 <정말 먼 곳>이라는 제목 밖에는 작품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다. 단지 내 역할은 친구(K군의 역할) 어머니의 빈소를 들린 동네 할아버지다. 대사는 한마디도 없다. 그러니까 배우라고 부르기엔 조금은 사치스럽다. 보조 출연이라고 해도 그 역시 과분하다. 그래도 자세만큼은 여느 배우 못지않아야 한다.
배우! 연기! 오랫동안 꿈꾸어 오던 직업이고 작업이다. 많은 이들은 그들이 좋아하고 또 하고 싶던 일을 꼭 해보고 싶어 한다. 나 역시 하고 싶던 일을 해보려 한다. 어쩌면 남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이기심의 반로(?) 일 수 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 남들에게 노욕으로 보여지지 않기를 바라며 나를 이해하고 위로한다. 철없던 시절 연기가 뭔지 모르면서 막연하게 영화배우가 되고 싶었다. 배우가 그냥 좋아 보였다. 그러던 시간이 몇 년 흐른 후 우여곡절 끝에 그것도 어쩌다. 남들보다 몇 년 늦게 우연히 연극영화과에 입학했다. 대학을 입학하자마자 군에 입대했고 3년 뒤 다시 복학했다. 군 생활 3년 동안 당돌한 목표를 세웠다. 근사한 배우가 되어 잃어버린 3년을 만회하겠다고. 복학(1977년)하던 바로 그해 겨울방학에 그 목표를 향해 시동을 걸었다.
연기의 기본인 화술을 위해 당시 화술 최고 권위자에게 개인 지도받기로 했다. 비장한 결심으로 우리말 즉, 표준말을 배우기 시작한 것이다. 몇 개월 후 삼일로창고극장에서 그동안 갈고 닦으며 준비했던 작품인 조 M. 씽크/작 <계곡의 그늘>의 노인 역을 맡아 연기자로 첫선을 보였다. 공연이 끝나고 분장실에서 분장을 지우며 자평하는 자리에서 연습 내내 인내하시며 화술만 지도하시던 교수님의 느닷없이 한마디를 던졌다. 그 일성으로 내 인생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됐다. 인생의 항로가 새롭게 정해졌다. 그리고 줄곧 한 길로 꾸준히 달려왔다. 시간이 가고 전문가가 되며 그 교수님의 깊은 뜻을 알게 되면서 진심으로 감사해했다. 덕분에 지금껏 살면서 너무나 다이나믹하고 매력 있는 날들을 보낼 수 있었기 때문에. 그렇지만 다시 생각해봐도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황당한 논리다. 그 교수님이 내게 했던 말!
“사투리 쓰는 배우는 추ㅇㅇ! 한 사람이면 족하니 당신은 당장 연기를 관두고 연출을 공부하시게!”
단호하고 간단명료한 명령 같은 조언이었다. 분하고 또 혼란스러웠다. 그런 만큼 내 동작은 빨랐다. 곧바로 진로 변경을 단행한 거다. 잃어버린 3년을 만회하자면 단 하루의 시간이 아까웠기 때문에 과감했다. 그렇게 결정한 미련도 후회도 없었던 연출가의 여정 동안 그 교수님의 진정한 숨은 뜻을 알아가고는 간혹 민망해했다. 당시엔 나 같은 외형과 보이스의 연기자는 어디에서도 필요하지 않을 때였음을 스스로 인정하면서다. 많은 세월이 흘렀다. 그리고 시대도 많이 달라졌다. 그런 외모와 목소리 또 그런 지방어를 쓰는 사람들이 여러 매체에 등장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 그런 것이 무기가 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동안 많은 서로 다른 장르와 다양한 콘텐츠를 작업하는 데 정열을 쏟아왔다. 그러면서도 늘 어딘가 비어 있는 듯한 허전함을 느꼈고 그것을 채우기를 갈망해왔다. 고백하자면 그것은 바로 연기에 대한 목마름이었다. 그래서였을까? 그동안 직접 연출한 작품에 간간이 출연하면서 갈증이 해소된 듯 순간순간 만족을 느껴왔던 것 같다. 그런 속내를 자주 내비친 탓에 많은 가까운 사람들이 눈치를 챘다. 정작 하고 싶었던 게 연기고 배우가 되는 게 꿈이었다는 발칙한 사실을. 이제는 주위의 많은 이들이 공공연하게 인정한다. 특히 내가 소속된 회사 대표 Y군은 회사를 설립하면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감독님! 감독님은 배우를 하고 싶었고 나는 연출하고 싶었으니 영화 제작할 때 나는 연출하고 감독님은 연기를 해보자고요! 아셨죠?”
가던 길을 돌려 춘천 시내에서 K군과 그의 딸을 만났다. 두세 살 때 본 아이가 성숙한 여인이 되어있었다. 최근 연기를 새로 시작했다면서 같은 영화에 배우로 함께 출연한단다. 피는 속일 수 없는 모양이다. 서른이 넘어서 잘 다니던 좋은 직장을 버리고 배우로 나섰으니 말이다. 연기가 그렇게도 하고 싶었단다. 그러면서 그 아이가 내게 뼈있는 한마디를 야무지게 던졌다. 내게 너무나 익숙한 말!
“지금 하지 않으면 영원히 할 수 없을 것 같더라고요.”
셋이서 함께 식사를 마치고 서둘러 화천의 동구래민박으로 들어갔다. K군은 감독과 제작부장에게 인사시켰고 나는 배우의 입장으로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준비해 간 의상 점검을 진지하게 부탁했다.
“네.. 좋은데요….”라면서도 민망해했다. 그리고는 들릴 듯 말 듯 “역할이 너무 적은 데….”를 덧붙인다.
느끼기에 그들이 내 진지함에 부담을 갖는 듯했다. 굳이 의상이며 등등에 대해 그럴 필요가 없는 배역인데 너무 오버하고 있다는 느낌을 전해줬다. K군 역시 그 상황을 당황해했다. 그렇지만 배우의 자세는 절대 그렇지 않다. 내 역할에 관해서는 이미 다 알고 왔다. 배역이 크고 작음에 상관없이 배우로서 최선을 다할 뿐이다. 40년 이상 비슷한 직종에 몸담아온 사람으로서 그렇게 접근하는 게 지극히 당연하기에 그들이 조금도 어색할 일이 아니다. 검증되지 않은 사람이 얼마만큼 연기할 수 있는지 상상되지 않는 만큼 어떤 사람의 안내나 어떤 추천에도 함부로 역할을 줄 수 있는 게 아니다. 익히 알고 있는 업계의 불문율을 당당하게 인정하며 K군의 미안함을 웃으며 일축했다. 준비한 만큼을 챙겨서 약속된 시간과 장소에 두 사람은 도착했다. 역시 짐작했던 대로였다. 한눈에 느낄 수 있을 만큼 열악하기 이를 데 없는 현장이었다. 스태프 구성이며 장비며 상상할 수 없는 정도였다,
메이저 회사에서 30년을 뒹굴었던 사람으로 그 현장 분위기를 무어라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저 그 현실이 대한민국의 독립영화를 만드는 현장의 현실이라는 것밖에. 부정적인 어떤 판단을 내색할 수도 또 해서 안 된다. 어떤 간섭도 더더욱 마음의 간섭도 해서는 안 되는 게 전문가로서의 예의이다. 나는 배우이지 연출자도 제작자도 아니다. 비겁(?)하지만 내게 주어진 상황에서 오직 연기만 성실하게 하면 된다. 칠흑 같은 어둠 속 산골 외딴 목장의 어느 실내 공간은 빈소와 문상객 대기실로 꾸며진다. 몇몇 스태프들의 바쁜 움직임으로 대도구와 소품이 채워진다. 이윽고 촬영용 라이트가 하나씩 켜진다. 까만 속에 잠겨 있던 현장은 밝아지고 조금씩 사람들이 보인다. 준비 중인 촬영 조명 분장 미용 등등의 스태프들의 움직임이 보이면서 현장 분위기가 살아나며 그들의 절반 정도가 여성임에 순간 놀랬다.
시대의 변함을 알 수 있는 지표였다. 여성의 숫자가 저 정도나? 몸을 많이 쓰는 전문직종인데? 사무실로 사용한 듯한 한 공간에는 보조 출연을 위해 동원된 마을의 연세 드신 주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묵묵히 기다린 지 두어 시간이 지난 후 준비된 현장은 몇 차례의 리허설을 거치고 주요 장면부터 찍기 시작했다. 현장은 요란하지 않고 아주 조용히 진행되었다. 문상객들이 조문하러 빈소를 들락날락하는 씬SCENE으로 현장 상황 설명 장면이다. 한 CUT으로 이루어졌다. 나는 대사 없이 조문하고 빈소를 나서는, 카메라 위치나 동작상 어쩔 수 없이 뒷모습만 보이는 장면에 임하면서 나름 진지했다. K군은 달랐다. 어떡하든지 친구인 내 정면 모습을 보여주려 열심히 움직였다. 감독이 원하는 Shot의 분위기로는 전혀 내 정면은 기대할 수 없었다. 상황을 판단한 그는 본인이 억지로 움직여서 자리를 바꾸며 내가 모일 수 있도록 갖은 애를 썼다. 가상했다. 그리고 감사했다.
감독은 그 상황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드리긴 했으나 K군의 쓸데없는 동작에 몹시 피곤했을 것이다. 그런 노력에도 그 장면이 편집에서는 선택되지 않을 것은 나는 안다. 감독이 원하는 장면이 아니었기에. 그렇게 애쓴 장면이 끝나자 바로 다음 장면으로 이어졌다. 문상객들이 모여서 고인의 주검을 애도하며 담소를 나누는데 주인공 부부가 등장한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은 갈등의 중심의 내용으로 문상객 앞에서 심하게 다툰다. 곧바로 아버지(K군)가 나와서 격하게 역정을 낸다. 그것 역시 FS(Full Shot) 한 CUT으로 담는 장면에서 나의 짧은 애드립의 대사로 내 첫 촬영은 모두 마무리 지어졌다. 그렇게 두 장면을 찍고 K군의 몇 개의 단독 CUT 촬영까지 마무리 지은 시간이 새벽 2시였다. 세 시간을 달려오고 저녁 내내 기다려서 두 씬SCENE 촬영을 마친 시간이다. 물론 단독 CUT도 없고 한마디의 대사도 없다. 엄밀히 따져서 내가 맡은 역할은 배역이라고 할 수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당당하게 배우(그들은 나를 엄기백 배우님이라 불렀다)로서 작업했다.
“작은 배역은 있지만 작은 배우는 없다”
비록 역할은 작지만 배우는 배우다.
“어떤 상황, 어떤 역할에도 프로답게 해내야 한다”고 마음속으로 굳게 다진다.
신구 선생님 또 이순재 선생님은 엄연히 그들만이 맡아야 역할이 있다. 그러나 내가 하는 역할은 그들은 절대(?)할 수 없고 하지도 않는다. 그 배역은 오로지 나만 할 수 있다. 그게 내가 이 나이에 배우로 임할 수 있는 이유이다.
캄캄한 밤 강원도 깊은 산 어느 목장에서 따뜻한 커피믹스 한잔 마시고 얼었던 몸을 녹이고는 스태프들에게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며 K군의 차에 올랐다. K군은 숙소로 돌아오는 동안 그런 역할을 연결해준 데 대해 미안함을 토로했다. 그런가 하면 뒤늦게 이런 보장 없는 작업을 도전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또 과연 맞는 선택인지를 계속 캐물었다. 할 말이 많았다. 그러나 표현하지 않고 또 말을 아꼈다. 그렇지만 현실은 냉혹하지 않냐고. 수많은 시간 동안 수많은 작품을 연출했음에도 어떤 제작자도 이 나이의 연출자에게 작품을 맡기지 않는다고. 스스로 거듭나지 않으면 남은 생이 보장되지 않는다고. 지금 하지 않으면 영원히 할 수 없어서라고. 그렇게 생각만 한다.
방갈로로 돌아온 우리는 소주 몇 병의 취기로 서로의 아름다운 남은 날들을 약속하며 즐거워했다. 밤이 한없이 깊어가고 취기가 온몸을 감싸는데도 쉽게 잠들지 못하고 현장을 복기했다. 그렇게 일흔을 목전에 두고 새로 시작한 연기자로서 첫 촬영의 경험은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주체할 수 없는 흥분으로 이어졌다. 현재로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최상의 선택이었기에 더욱 그랬을 거다.
오십 년을 초지일관 연기만 해온 K군의 조언도 위로도 또 희망에 대한 메시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내 생각만으로 충만했다. 영화감독을 준비하는 아들에게 전화한다.
“네? 뭘 하고 오신다고요?”
“배우 하러 갔다 온다고.”
“배우요?”
“응. 강원도 화천에서 촬영하고 집으로 가는 중이라고!”
“역할은요…?”
“역할? 그냥 할아버지….”
그 막연하고 뻔뻔한 행보와 당당함은 도대체 무언지? 그냥 혼자 웃는다.
(2023년 올해의작품상 수상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