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기적 奇跡, I Wish(2011) : 고레에다 히로카즈
= 당신의 세계 안에서 가족은 여전히 갈라서 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1468E454E9EDB4A0D)
고레에다 히로카즈를 만나는 6번째 걸음과 그의 세계를 말하기 전에
오프닝과 더불어 떠오른 영어 제목을 유심히 봏지 않을 수 없다.
기적 奇跡이라 쓰고 한 켠에 'I Wish' 라 덧붙였다. 원제와 영제는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
여기서는 영제에서 주어인 'I'를 사용함을 주목해야겠다.
여기서 영어대문자 'I'는 영화 속 두 주인공 어린이라 해야겠지만, 동시에 그것은 필연적으로 감독일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본편을 보는 따뜻한 시선과 부드러운 웃음들은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영화를 따돌린 것은 아닌가
나의 질문은 여기에서 시작되고 여기서 멈추었다.
그의 출세작이자 극영화 데뷔작인 "환상의 빛"에서 벌서 16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조금은 안이하지만, 그것이 한 작가의 출발이었기에 아름답게 맞이할 수 있었던 순간 이후로
그가 희극과 비극, 역사와 현장을 오가는 시간동안 그의 거의 유일하다 할 정도의 관심은
가족을 기억해내는 것, 아니 차라리 체추험을 통해 재구성하는 것이라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아직 보지 않았지만, "공기인형"은 가상 가족 만들기라는 새로운 공간으로의 진입이라는 편견이 든다.
그리고 지금 여기 도착한 그의 8번째 장편 영화는
명백히 선배 기타노 다케시의 "키쿠지로의 여름(1999)"이 연상되는 어린이 로드무비이다.
이같은 장르가 일본 문화 속에서만 등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일본망가처럼 영겁회귀 무한반복이 아닌
처음부터 집을 상정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형식의 열고 닫는 형식을 드라마를 고수한다.
(알다시피 오프닝은 주인공 어린이가 문을 열고 나오고 라스트 씬은 문을 닫고 들어가는 형식이다.)
'철도' 즉 새로 개통하는 신칸센이나 화산재가 떨어지는 마을에 주목할 때
작품의 실제 제작시기와는 상관없이 자연적으로 일본 쓰나미 재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절대적 과잉이나 불필요한 언급이 생략되었기에 그나마 본편은 어린이 성장-국가 회복으로 연결되지 않을 수 있었다.
당연히 어린이 성장 영화에서 어른들은 미성숙하거나 불필요하거나 불완전하다.
그들은 어린이라는 대상이자 주인공을 통제할 능력도 의사도 정확히 표현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른이라는 이름이 사회 구조라는 명제로 화하는 것을 감독이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본편에서 오다기리 죠는 '세계"와 인디 음악으로 자신을 분장하지만, 어느 사이인가 어린 아들에게 무릎 꿇는다.
이것은 어린이가 기적(그들도 관객들도 모두 알고있는 여행 그 자체의 감동)을 찾아가는 이야기지만,
여전히 한편으로 고레에다 히로카즈라는 감독의 가족 추억의 드라마이기도 하다.
그래서 여전히 관객의 바램과는 달리(혹은 유치한 해피엔딩은 거부되는) 가족은 여전히 분리되어있다.
감독의 전작들 모두의 결말이 행복하든 아니든간에 결과는 여전히 가족의 결별로 이루어져있다.
나는 여기서 감독이 바라보는 일본 현대 사회의 가족이라는 분단 시차를 감지한다.
비록 본편처럼 그것이 어린이 유머 장르에 속한다하더라도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여전히 가족을 불안해한다.
"기적"은 가족 대신에 '세계"를 택했다고 마음씨 곱게 성장하지만,
나는 아직도 그가 말하는 '세계'가 그의 극 어디에 도착해있는지 알지 못하겠다.
단지 휴화산은 분화하지 않을 뿐이고 어머니-외가집은 무직자로 남겨져있을 뿐이다.
'기적'은 그것을 지켜보는 우리의 웃음 속에서 찾아야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동시에 가족을 결합시키거나 하나로 엮어보려는 관객들의 심성 이상이 아니다.
10. 테라페르마 Terraferma(2011) : 에마누엘 크리알리스
= 국경개방 노동자 자유이동의 그 날을 위한 배웅
![](https://t1.daumcdn.net/cfile/cafe/184B8D454E9EDB4C04)
한참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유학파 경제학자는 자신의 베스트셀러에서
국경을 개방할 경우에는 환율이나 여러 경제적 함수들이 추방될 것이라고 썼다.
이주민 노동자들에 대한 영화가 하나의 장르로 자리잡은지도 벌써 20년이 넘어선다.
하지만, 여전히 미국과 유럽, 한국 등 자본주의 강대국들은 이주민 노동자에 대한 이중적인 착취 전략을 고집한다.
그들의 값싼 노동력이 수출-내수 시장에 필수적이면서도 정착은 결코 허가하지 않는 악랄한 분리정책이 그것이다.
우리가 살고있는 대부분의 아파트, 건물과 간이식당 대부분은 그들의 노동력으로 메워진 지 오래다.
올해 유명영화제 수상작 중 한편인 "테라페르마"에서 기억되는 이미지는
마치 할리우드 블랙버스터 중 무척이나 허름했던 "피라냐"나 죠스 시리즈에서의
포식자의 해변 습격에 뭍으로 도망치려고 수영하는 인파를 거꾸로 떠올리게한다.
실제 사회 속에서 이들은 '좀비'라는 이름으로 칭해진지 오래다.
마치 오징어잡이 배가 켜둔 집어등으로 몰려드는 오징어, 생선과 같은 그들 이주민 노동자의 악몽같은 밀항이야말로
모든 이주민 노동자 장르들이 가장 주목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원제 "테라페르마"는 우리말로 "저기 뭍이 보인다" 정도로 해석될 어부들의 속어이기도 하다.
세 층위의 인물, 할아버지-삼촌-손자 사이의 갈등,
임산부 이주 노동자의 가족 내부로의 침입, 도시 젊은이들의 여름 여행 등이 각축하는 구조는 새롭지 않다.
손자 역할의 주인공이 겪는 내적 방황이나 윤리적 선택 등도 예상되고 다소 평탄하기까지 하다.
바다의 율법(물에 빠진 사람은 살려야한다는 바다의 율법)과 땅의 법치(관료들의 이주 노동자 체포)라는
이분법적 대결 구도도 선명하기는 하나 어느 지점 이상까지는 나아가지 않는다.
어긋나는 지점이 있다면, 여행객으로 온 젊은 여성의 애매한 위치 선정이나
흑인 이주민 노동자 아들이 행하는 동생인 갓난 아기에 대한 시기의 직접성 정도일 것이다.
알다시피 이주민 노동자 문제는 자본주의가 현재의 구조를 재생산하기를 지속하는 동안에는
결코 해결될 수 없는 문제로, 요즘 유행하는 복지 이슈로는 풀리지 않을 숙제이다.
이는 전세계적 노동의 착취라는 커다란 벨트 안의 문제이기에
마치 이주민 노동자 장르 영화가 한없이 크게 소리치고 깊게 울어도 막막한 벽에 선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와도 같이
육지에 도달했다해도 좀비 이상의 대접을 받지 못할 영혼들에 대한 작은 위로가 본편의 주어진 한계점이다.
11. 르 아브르 Le Havre(2011) : 아키 카우리스마키
= 흑인 소년, 중국인 그리고 앙뚜완..프랑스를 향한 기특한 사모곡
![](https://t1.daumcdn.net/cfile/cafe/12408E454E9EDB4716)
차라리 전혀 상관없는 영화인 바로 위에 언급한 "테라페르마"의 속편이라 좋을 정도이다.
아키 카우리스마키를 만나는 14번째 길은 이전의 어느 작품보다 선명하고 독특했다.
여기서 독특은 형식상의 문제가 아니라 출연진의 색다름이다.
이전에도 흑인 배우가 출연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세계는 언제나 10명 내외의 배우 군단이 중심이자 전부였고,
그들 너머에서 감독 자신이 가끔 얼쩡거리기도 했다.
흑인 배우는 단연이나 음악 연주자 등으로 극 속에서 미끄러지는 듯 배치되었다.
본편은 작정하고 프랑스와 유럽에 바치는 감독 자신의 사회적 발언이다.
전반적인 이데올로기적 배경이 자유-평등-박애가 떠올려지는 프랑스 휴머니즘에 머문 것은 아쉽지만,
아키 카우리스마키 배우 군단 그 중에서도 카티 오우티넨을 비롯한 주요 여성 출연진 3인 모두를 동원해 이룩한
동정과 동감의 요소, 주목해야할 프랑스 조연 전문 배우인 장 피에르 다루생과
이제 몇 남지 않은 감독의 남성 페르소나인 앙드레 윌름스의 조우는 지극히 '레미제라블'적이다.
흑인 소년만으로는 부족했든지, 감독은 첫 장면에서부터 중국인 청년을 등장시키기도 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극 내부의 흐름은 이전의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세계와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고
오히려 웃음이라는 면이나 뜬금없는 생략의 묘미라는 측면에서는 조금 평이한 전략에 가깝다.
"르 아브르"는 프랑스 항구도시의 명칭인데, 이와 더불어 주목할 것은 특별출연인 장 피에르 레오의 모습이다.
그는 흑인 이주민 소년을 고발하는 역할을 하는데, 이미 감독의 전작 2편에 출연한 인연이기도 하겠지만
한편으로는 활활 타올랐던 젊은 프랑스 영화를 상징하는 그를 비열한 고발자에 위치시킴으로서
현재의 프랑스 영화에 대한 감독의 불만을 얼핏 실은 것은 아닌지 의뭉스럽다.
더불어 주연을 맡은 앙드레 윌름스는 전작이자 프랑스를 무대로 한 감독의 몇 안되는 작품 중 하나인
"보헤미안의 생"에서 맡았던 삼류 소설가에서 그대로 옮겨왔음을 발견하는 것은 작은 희열이다.
한가지 더불어 인간들만큼이나 개성적인 조연진 중 하나인 개에게도 반갑다는 인사를 덧붙인다.
12. 파우스트 Faust(2010) : 알렉산더 소쿠로프
= 당신 도달하고픈 목적지가 어디든간에...동행은 힘들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5451C454E9EDB490F)
별달리 붙일 말이 없다. 나는 아직 당신을 맞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마치 장 뤽 고다르,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를 비롯한
내가 아직은 본격적인 만남을 미루고 있는 수많은 미지의 감독들처럼 낯설다.
올해 부산영화제에서 중간에 드문드문 잠든 유일한 작품(물론, 점심을 과하게 먹긴했다)이자
변명같지만 많은 관객들을 숙면 속으로 빠뜨린 영화이자 올해 유명 영화제의 최고상을 수상한 작품으로서
본편은 참으로 오랫만에 러시아 문예영화의 무한대의 방언들이 한꺼번에 터져나오는 바람에
원작 소설을 제대로 읽지도 못한 문외한의 관객에게는 불감당의 장벽과도 같았다.
개인적인 약속으로서 그의 전작들을 충실히 정독한 이후에 다시 본편을 떠올려 첨언하기로 하겠다.
이제 부산영화제의 후유증을 넘어서 그들에 대한 새로운 배웅을 하러 나서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