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때 단체영화 관람으로 ‘성웅 이순신(1971년 개봉, 1974년 재상영)’을 보았다.
장군이 적의 유탄에 맞아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는 마지막 말에
꼬맹이들의 흐느낌은 울음이 되고~ 울음은 통곡이 되어~ 극장은 커다란 배가 되었다.
그리고 비 오는 왕십리의 눈물바다를 끝없이 끝없이 떠 다녔었다
23전 23승. 그러나 비통하고 비통하다
무술년 음력 11월 19일 노량 바다는 장군의 뜨거운 피로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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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7년 [백의종군에 나서다]
(1월~3월까지 일기가 빠져 있음)
4월 겨우 풀려났으나 어머님은 돌아가시고
초1일
옥문을 나왔다.
남대문 밖에 있는 윤간의 종의 집에 이르러 봉, 분, 울, 사행, 원경 등과 한 방에서 오래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사 윤자신이 와서 위로하고 비변랑 이순지가 보러 왔다.. 울적한 마음을 한층 이기기 어려웠다.
지사가 저녁때 술을 가져와서 정으로 청하여 억지로 술을 마시니 몸이 취했다.
이순신도 오고 영의정(유성룡), 판부사 정탁, 판서 심회수, 찬성 김명원, 참판 이정형, 대사헌 노직, 동지 최원,
동지 곽영 등이 사람을 보내어 안부를 물었다
초4일
일찍 길을 떠났다
초5일
해 뜰 때 길을 나서니 바로 아산에 있는 선영에 이르렀다.
산소 아래서 곡을 하며 절하고 한참 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저녁때 외가 사당에 절하고 큰 조카 뇌의 집에 선조들 사당에 절하고 저물어서야 집에 이르러
장인 장모 신위에 절하고 작은 형님 사당에 다녀왔다.
잠자리에 들었으나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였다
초6일
멀고 가까운 친척들과 친구들이 모두 와서 정을 풀고 갔다
초9일
동네 사람들이 각기 술병을 들고 와서 멀리 떠나는 길을 위로하였다.
홍군우와 이 별좌가 노래를 불렀다. 나는 즐겁지 않았다
12일
어머니가 기운이 쇠약하나 무사히 안흥에 닿았다고 한다
13일
아침 일찍 어머니를 마중하려고 바닷가로 향하여 홍백의 집에 갔다.
조금 있다가 배에서 종 순화가 어머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했다.
해암(아산 안주면)으로 달려가니 배가 벌써 와 있었다.
슬픔으로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여 다 적을 수가 없다.
15일
늦게 어머니 시신을 관에 모셨다
16일
영구를 상여에 올려 싣고 집으로 돌아와 빈소를 차리니 비가 크게 쏟아졌다.
기력이 다 빠진 데다가 남쪽으로 떠날 길이 급하니 소리 내 울부짖었다.
다만 빨리 죽기를 기다릴 따름이다
17일
금부도사를 거느린 서리가 어서 가자고 재촉했다
18일
몸이 몹시 불편하여 빈소에서 곡만 하다가 물러 나왔다
19일
일찍 길을 떠나며 어머님 영전에 인사를 올리고 울부짖었다.
일신역(공주시 신관동)에 이르러 잤다
21일
일찍 떠나 은진 땅에서 잤다
23일
일찍 떠나 오원역(임실 관촌)에 이르러 말도 쉬게 하였다.
저물 무렵 임실현에 이르니 현감이 대접하였다
24일
남원 부근에서 정철 등을 만났다가 헤어지고 이희경이 부리는 종의 집에 이르렀다.
서럽고 아픈 마음은 어찌하랴!
26일
일찍 떠나 구례현에 이르니 손인필의 집에 거처를 정하니 고을 현감과 금부도사가 보러 왔다
27일
순천 송원에 있는 정명원의 집에 이르니 원수(권율)가 군관을 보내 조문하였다.
저녁에 정사준이 달려와 원균이 망령된 짓을 하였다고 말했다
28일
원수가 군관을 보내 문안하며 ‘상중에 몸이 피곤할 터이니 회복되는 대로 나오라’ 하였다
5월 순천에서 백의종군하다
초2일
남원의 끝돌이가 아산에서 어머니 영위가 편안하시다고 전했다.
홀로 빈 동헌에 앉으니 슬퍼 견딜 수가 없다
초4일
어머니 생신이다. 닭이 울 무렵 일어나 눈물만 흘렸다
초5일
어머니 영위를 떠나 천 리 밖 먼 곳에서 종군하고 있으니
나와 같은 일은 고금을 통해 찾기 어려우니 가슴이 아프다
16일
구례에 도착하여 현감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풍성한 점심을 받았다. 대단히 미안하였다
23일
체찰사가 부르기에 조용히 의논하였는데
시국이 이미 그릇된 것을 무척 분하게 여기며 다만 죽을 날을 기다린다고 말하였다.
내일 초계(권율이 있는 곳)로 가겠다고 하니 쌀 두 섬을 지급해 주었다
24일
체찰사가 경상 우도 연해안 지도를 달라하니 거절할 수 없어 대강 그려 보냈다
29일
몸이 몹시 불편하여 떠나지 못하고 조리하였다. 현감은 정이 어린 말을 많이 하였다
6월 다시 초계로 옮겨 종군하다
초1일
하동에서 농사짓는 박도원의 종 집에 묵었다.
주인이 반가이 접대했으나 방이 좋지 못하여 간신히 밤을 보냈다.
하동 현감이 기름종이 하나, 장지 두 축, 백미 두 가마, 참깨 다섯 말, 들깨 세 말, 꿀 다섯 통,
소금 다섯 가마, 미지(밀랍 먹인 종이) 다섯 장을 보내주었다
초2일
삼가현에 이르니 현감은 산성에 가서 주인이 없는 공관에서 잤다.
고을 사람들이 밥을 해주었으나 따르는 종들에게 먹지 말라 타일렀다
초3일
비가 와서 계속 묵었다.
아침에 종들이 고을 사람들의 밥을 얻어먹었다 하여 이들을 매질하고 밥쌀을 갚아주었다
초4일
현감이 문안편지와 여비까지 보내왔다. 낮에 합천에 이르니 원수의 진이 보였다
초5일
거처할 방을 도배하고 하동현감이 보내준 종과 말들도 모두 돌려보냈다
초6일
군관들이 쉴 곳도 두 칸 만들었다
초8일
원수의 진에 가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저물어서 돌아왔으나 몸이 불편하여 저녁을 먹지 않았다
초9일
처음으로 노마료(복무의 대가로 종과 말을 먹일 비용)를 받았다
초10일
저녁때 원수 종사관 황여일이 왔기에 임진년 왜적을 무찌른 일을 이야기하자 감탄해 마지않았다
25일 무씨를 뿌렸다
7월 칠천량에서 대패하다
14일
김해 사람 김억이 보낸 보고서에는
'초7일 왜선 500여 척이 부산으로 나오고 초 9일에는9 왜선 1천여 척이 합세하여 절영도 앞바다에서 싸우다가
우리 전선 5척이 표류하여 동래 땅 두무포(기장)에 도착하였고 또 7척은 간 곳이 없다고 하였다.'
이에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황 종사관에게 달려가서 사태를 의논하였다
15일
수군 20척이 적에게 패했다는 소식을 중군 이덕필에게 들었다. 매우 분하다
18일
새벽에 이덕필과 변홍달이 말하기를
‘16일 새벽 왜군에 기습당해 원균과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와 여러 장수가 피해당하고
수군이 패하였습니다’ 듣고 있자니 울분이 터져 나오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조금 있다가 원수가 와서 말하기를
“일이 여기까지 왔으니 어떻게 할 수 없소.”
오전 10시쯤까지 이야기를 나누다가
“내가 직접 해안 지역으로 가서 듣고 본 뒤에 방책을 정하겠습니다”라고 말하니 원수가 매우 반가워하였다.
나는 송대립, 유황, 윤선각, 방응원, 현웅진, 임영림, 이원룡, 이희남, 홍우공을 데리고 길을 떠났다
21일
노량에 이르니 거제 현감과 영등포 만호 등 10여 명이 와서 통곡하였다.
또 피해 나온 군사와 백성들이 울부짖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경상수사는 도망가고 없었다. 조금도 눈을 붙이지 못하여 눈병을 얻었다
22일
경상수사 배설이 와서 원균이 죽은 사실을 장황하게 말하였다
28일
이동지와 진주목사가 와서 대책을 의논하였다
29일
원수가 보낸 군사는 모두 말도 없고 활도 없다. 아무런 쓸모가 없으니 한탄스럽다.
저녁때 병이 깊은 배홍립과 남해 현감에게 들렀다
(7.30~31 일기가 빠져있음)
8월 다시 삼도수군통제사가 되다
초2일
밤에 꿈을 꾸었는데 임금의 명령을 받을 징조가 보였다
초3일
아침에 선전관 양호가 임금이 내린 교서, 유서와 유지를 가져왔는데 삼도수군통제사를 겸하라는 명령이었다
12일
거제 현령과 발포 만호가 들어와 배설이 당황하고 두려워하는 모양을 전해 들었다..
한탄스럽기 짝이 없다
17일
새벽에 길을 떠나 강진 땅에 이르니 사람의 자취가 보이지 않았다.
수사 배설이 내가 타고 갈 배를 보내지 않았다
18일
장흥 땅 회령포에 갔으나 수사 배설이 뱃멀미를 핑계로 나오지 않았다
19일
왕이 내린 교서와 유서 앞에 엎드려 절하는데 배설이 예를 올리지 않았다.
그 아래 딸린 이방과 영리들을 붙들어 곤장을 때렸다
20일
몸이 몹시 불편하여 음식도 먹지 못하고 앓았다
21일
새벽 2시쯤 곽란이 일어났다.
차게 하여 그런가 하고 소주를 마셔 치료하려다 인사불성이 되어 거의 죽게 되었다
22일
곽란으로 인사불성이 되었다
23일
병세가 위험해 배에서 내려 포구에서 잤다
25일
어란포(해남)에서 그대로 머물렀다.
당포에서 포작이 피난민의 소 두 마리를 훔쳐와서 왜적이 왔다고 말하나 배를 굳게 매고 움직이지 않았다.
그와 관련된 자들을 잡고 보니 과연 거짓말이었다. 거짓말을 한 두 명의 목을 잘라 매달았다.
다행히 민심을 안정시켰으나 배설은 벌써 도망쳐 버렸다.
28일
어란포에 머물렀다. 배설이 나타났는데 두려워서 떠는 빛이 역력하였다.
내가 불쑥 말하기를 “수사는 어디로 피해 갔던 것이냐.” 하고 캐물었다
29일
벽파진(진도)에 진을 쳤다
30일
벽파진에서 정탐병을 각지로 나누어 보냈다.
배설이 두려워 도망가려기에 체면을 생각해 참고 기다렸더니
제 종을 시켜 병이 위중하여 조리하겠다고 소지를 올려 결재하니 배에서 내려갔다
9월 명랑에서 적의 기세를 꺾다
초2일
배설이 도망갔다
초7일
망을 보던 군관이 와서 보고하기를
“적선 55척 중에서 13척이 어란포 앞바다에 도착했는데 그 목표가 우리 수군에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여러 장수에게 두 번 세 번 군령을 내려 엄하게 타일렀다.
오후 4시쯤 적선 13척이 나타나서 곧바로 우리 배들이 적을 향해 추격하니 적선이 뱃머리를 돌려 도망쳤다.
먼바다로 나가니 바람과 물살이 우리 쪽을 향하고 숨은 적이 있을까 걱정되어 쫓아가지 않았다.
벽파진에 이르러 장수들을 모아 약속하기를
”오늘 밤 반드시 적의 야습이 있을 것이니 미리 알아서 준비하고 조금이라도 군령을 어기면 군법대로 시행하리라 ““
거듭 타이르고 끝마쳤다.
과연 밤 10시쯤 적이 어둠을 이용해 탄환을 계속 쏘면서 공격해 왔다.
내가 탄 배가 앞장서서 지자포를 쏘니 그 소리가 산천을 뒤흔들었다.
적들도 네 번쯤 들어왔다 물러갔다 하며 화포를 쏘다가 자정이 지나서야 완전히 물러갔다
초9일
명절(중양절)이므로 비록 상복을 입은 몸이지만
녹도 안골포 두 만호에게 제주에서 온 소 다섯 마리를 주어 장수와 군졸에게 나누어 먹이도록 지시하였다.
늦게 적선 2척이 감보도(진도)에서 우리 수군을 정탐하여 영등포 만호가 추격하니 당황한 적들이
물건을 모두 바다에 던지고 달아났다
11일
날씨가 흐리고 비가 올 것 같았다.
혼자 배 위에 앉아 어머니가 그리워 눈물을 흘리니 아들 회가 내 심정을 알고 무척 언짢아하였다
14일
임준영이 정탐한 결과 ‘적선 200척 가운데 55척이 먼저 어란포로 들어왔습니다” 하였다.
우수영으로 전령선을 보내 곧 싸움이 벌어질 터이니 백성들은 빨리 육지로 올라가라 하였다
15일
장수들과 진을 우수영 앞바다로 옮겼다.
장수들을 불러 모아 “병법에 이르기를 ‘죽으려 하면 살 것이고 죽는다’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는 말은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여러 장수들이 명령을 어긴다면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다고 엄하게 약속했다
16일
맑다. 이른 아침 망보던 자가 보고하기를
“수많은 적선이 명량으로부터 우리 진으로 달려옵니다”
모든 배에 닻을 올리고 바다로 나가니 적선 130여 척이 우리 배를 둘러쌌다.
나는 노를 빨리 저어 앞으로 나가며 지자 현자 등 각종 총통을 마구 쏘았다.
탄환이 폭풍우같이 날아갔다. 군관들도 화살을 빗발처럼 쏘아댔다.
그러나 여러 겹으로 둘러싸여 형세를 알 수 없으니 사람들의 얼굴빛이 하얗게 질려있었다.
나는 조용히 타이르기를
“비록 적이 많아도 바로 침범하지 못할 것이니 마음을 다잡고 다시 힘을 내어 적을 쏘아 맞혀라.”
여러 장수의 배를 보니 우수사 김억추의 배가 멀리 나가 있어 호각을 불어 중군에 군령을 내려
초요기를 세우니 거제 현령 안위의 배가 먼저 왔다.
나는 배 위에서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간다고 어디 가서 살 것이냐.” 하니 황급히 적선 속으로 뛰어들었다.
또 김응함을 불러
“너는 중군으로 멀리 피하고 대장을 구원하지 않으니 죄를 어찌 면할 것이냐.” 하였다.
그리하여 두 배가 적진을 향해 앞서가는데 적장이 탄 배에서 지시가 내리자 일시에 안위의 배에 왜군들이 개미 붙듯 올라갔다.
안위와 그 배에 탄 사람들이 죽을힘을 다해서 몽둥이를 들거나 긴 창을 잡거나 돌멩이를 가지고 후려쳤다.
배 위에 사람들이 거의 기운이 빠질 때 나는 뱃머리를 돌려 쫓아 들어가 빗발치듯이 마구 쏘아댔다.
적선 3척이 거의 뒤집힐 때 녹도만호 송여종과 평산포 만호 정응두의 배가 힘을 합쳐 적을 쏘아 죽여 한 놈도 살아남지 못하였다.
안골포 적진에서 항복해 온 왜인 준사는 내 배에서 물에 적을 굽어보더니
“붉은 옷을 입은 자가 적장 마다시입니다.”하고 말했다.
군사 김돌손을 시켜 갈고리로 낚아 올려 곧바로 토막을 내니 적의 기세가 크게 꺾였다.
우리 배들이 적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일제히 북을 울리고 함성을 지르며 쫓아가
화살을 빗발처럼 쏟아대고 지자포,현자 포를 쏘니 산천이 뒤흔들렸다.
적선 31척을 깨뜨리니 적선은 도망가 우리 수군 가까이 오지 못하였다.
싸우던 바다에 그대로 정박하려 했으나 물결이 사납고 바람이 거꾸로 불어 당사도(무안)로 옮겼다.
이번 일은 하늘이 도우셨다. (명량 12척의 배로 적선 133척을 격파)
17일
맑다. 어의도(신안군) 이르니 피난선 3백여 척이 먼저와 있었다.
우리 수군이 이긴 것을 알고 축하하며 임선은 많은 양식을 가져와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24일~26일
몸이 좋지 못하여 끙끙 앓았다
10월 막내아들 면이 죽다
초1일
아들 회를 보내서 아산 집의 생사를 알아 오게 하였다
초7일
호남 안팎에서 적의 자취가 완전히 사라졌다는 말을 들었다
13일
우수영 우후 이정충이 싸움에 빠진 죄를 물어 처벌하였다
14일
저녁에 천안에서 온 어떤 사람이 편지를 전하는데 겉봉을 뜯고 보니 ‘통곡’이라 쓰여있다.
면이 적과 싸우다 죽었음을 알고 간담이 떨어져 목 놓아 통곡하였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어질지 못한가!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에 마땅한데 어쩌다 이처럼 이치에 어긋났는가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하룻밤 지내기가 한해를 지내는 것 같구나.
밤 10시쯤 비가 내렸다
19일
죽은 아들을 생각하고 통곡하였다. 어두울 무렵 코피가 한 되 넘게 흘렀다.
아들 생각을 하면 슬픔 때문에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여 가눌 길이 없었다
24일
해남에서 왜의 군량 322섬을 실어 왔다
29일
목포 보화도(고하도)에 서북풍을 막을만하고 배를 감추기에 좋은 지형이라 진을 치고 집 지을 계획을 세웠다
30일
목수를 데리고 집 지을 재목을 베어 오게 했다
11월 고하도에 진영을 마련하다
초4일
일찍 새집 짓는 곳에서 하루 내내 해 지는 줄 몰랐다
초8일
새방 벽에 흙을 바르고 수루를 지었다
23일
전쟁이 이겼다는 장계를 썼다
27일
장흥에서 전쟁에 이겼음을 보고하는 장계를 수정하였다
12월 나라를 구하다
초5일
도원수의 군관이 왕의 분부를 가져왔다
'통제사 이순신이 아직도 권도를 쫓지 않아서 여러 장수를 걱정스럽게 여긴다고 들었다.
(상주라서 나물찬 만 먹음)
예에도 원칙을 지키는 경(經)이 있고 권(權)이 있는 것처럼 꼭 원칙만 지킬 수는 없으니
경은 내 뜻을 잘 따서 소찬 먹는 것을 그만두고 권도를 쫒도록 하라'
아울러 고기반찬을 내려주셨다. 비통하고 비통하다
초10일
배 만드는 곳에 나가 지켜보았다
26일
방백(순찰사 황신)과 군사 대책을 이야기하였다.
30일
그믐밤이어서 비통한 마음이 더욱 심하다
1598년 [마지막 싸움에 나서다]
1월 7년째 전쟁이 계속되다
초1일
경상수사 조방장과 여러 장수가 모였다
(1월 5일~8월까지 일기 빠져있음)
9월 명나라와 연합하여 적을 공격하다
15일
도독 진린과 함께 군사를 움직였다
16~17일
나로도에 머물며 진린과 술을 마셨다
20일
오전 8시 광양 땅 유도에 다다르니 명나라 육군 유제독이 병력을 이끌고 와 수륙으로 협공하여 적의 기세가 크게 꺾였다
22일
아침을 먹고 진도독과 조용히 의논했다
30일
저녁에 유격 왕원추, 유격 복습, 파총 이천상이 100여 척의 배를 거느리고 우리 진으로 왔다.
밤 불빛이 찬란하여 적들의 간담이 떨어졌을 것이다
10월 명제독 유정이 싸움을 피하다
초3일
도독은 유제독이 보낸 밀서를 받고 초저녁에 싸웠다. 사선 19척과 호선 20여 척이 불에 탔다.
도독이 펄펄 뛰는 모양은 말로 하기 어려웠다
초6일
도원수가 군관에게 보낸 편지에는 '유제독이 달아나려고 합니다.' 하였다.
분하다. 분하다!
11월 마지막 싸움 노량해전
초8일
도독부를 방문하여 위로연을 베풀었다.
조금 있다가 도독이 청하여
“순천 왜교(순천)에서 적들이 도망간다고 하니 돌아가는 길을 막읍시다” 하였다
초9일
도독과 더불어 군대를 움직여 순천 백서량(여천)에 진을 쳤다
11일
유도에 이르러 진을 쳤다
13일
왜선 10척이 순천 장도(여천)에 나타났다. 왜선이 움츠러들어 나오지 않았다
14일
왜선 두 척이 강화하자고 바다 가운데로 나왔다.
왜장이 도독부에 올라와 돼지 두 마리와 술 두 통을 바치고 갔다
15일 왜선 두 척이 강화하자고 도독 진중을 두세 번 드나들었다
16일
도독이 진문동을 왜적 진영에 들여보냈다
17일
복병장인 발포 만호 소계남과 당진포 만호 조효열 등이
왜의 중간 배 한 척이 군량을 가득 싣고 남해를 건너는 것을 쫓아가니 한산도 기슭으로 달아났고
잡은 왜선과 군량은 명나라 군사에게 빼앗기고 빈손이었다
------------- 일기는 여기서 끝남 -----------
18일 조•명 연합 함대가 노량으로 진격
19일 새벽부터 싸움이 시작되고 선두에서 지휘하던 이순신 장군이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이순신(李舜臣) 1545~1598 본관 덕수. 자는 여해. 서울 건천동에서 태어남.
1576년 무과에 합격하여 함경도 동구비보 권관, 훈련원 봉사, 충청병사 군관, 발포 수군만호,
함경도 건원보 건관, 주로 함경도에서 관직생활을 했음.
특히 녹둔도 둔전관으로 있을 때 기습해 온 여진족을 맞아 적은 병력으로 선전했지만
병사 이일이 그를 나쁘게 평가하여 결국 백의종군.
임진왜란 직전에 재상 유성룡의 천거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가 되었고,
임진왜란 동안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삼도수군통제사를 지내며 수많은 해전을 치렀다.
첫댓글 지도와 함께 보니
더욱 쉽게 정리가 되고
흥미롭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