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 축령산 힐링 탐방
춘원 임종국 비문 앞에서
-이 형 권 -
바람이여 내 눈물을 가져가다오
동짓달 마른 가지 끝에 머물다가는 햇살이여
차디차게 식어가는 나의 가슴을 어루만져다오
木神 에 들리었다가 굳어버린 육신
나의 노래는 오래 전에 허공 속에 흩어져 버렸으니
호사롭구나 아름다운 이름이여
숲내음길 , 산소숲길 , 하늘숲길 ....
저승길까지 찾아오던
채권추심의 통고장을 알기나 하겠는가
빚쟁이들 톱날 아래 산이 울던
그날을 기억이나 하겠는가
나의 눈물이 되었던 곳
축령산을 넘어와 탄식처럼 휘감고 도는
겨울 숲의 바람이여
내 눈물을 가져가다오
산행 전날 저녁
인천시민이 된 나를 축하한답시고 친구와 형들이
저녁식사나 하자고 함께한 자리가 술자리로 옮겨가고
결국에는 산행 당일 새벽 2 시에 자리를 털고 일어납니다 .
저녁식사나 하고 반주로 간단하게 마시면
일찍 잠들어 새벽 4 시쯤에 일어나서 집결지로 가겠다는 계산에
찬물을 끼얹어버리고 술에 비틀거리는 정신을 다잡겠다고
찬물로 목욕을 하고 등짐을 들쳐 메고 집을 나섭니다 .
마음이나 몸이나 전화 한 통으로 사정을 알리고 싶은 심정이지만 ....
우리 사회는 어느 곳보다 약속이라는 시간표가 강력하게 작동합니다 .
이런 약속의 시간표에서 벗어나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
전철역에 들어서니 부지런히 새벽을 여는 사람들이
전철 안으로 몰려드는데 나 말고도 절반 가까운 사람들이 산행객들입니다 .
시대가 바뀌고 있는 것입니다 .
내면의 정원을 오래 가꾼 사람들은 인생이 한 마당 정원임을 압니다 .
그래서 주변 사람 하나하나를 소중한 꽃나무처럼 가꾸고
자기에 삶의 환경도 소중하게 가꾸어 갑니다 .
스스로 정원이 되고자 하는 삶 .
그것은 많은 사람과 자신을 나누고자 하는 자연스러운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
홀로 누리는 대정원의 쓸쓸함과 외로움보다는
소박한 마음의 정원에 지친 사람들이 찾아와 쉬어가는 풍경이
훨씬 아름답다는 것을 알기 때문일 것입니다 .
그런 정원을 가꾸는데 필요한 것은 오직 감성뿐이고
이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점은 오직 사랑뿐입니다 .
그 사랑과 감성으로 자신의 정원을 가꾸어가는 산행객들이 부럽습니다 .
이 글을 읽는 그대 마음의 정원에는 지금 무엇이 자라고 있습니까 ?
전철역을 지나칠 때마다 전철 안은 사람들이 자리를 메웁니다 .
마음은 급한데 전철도 잠에서 덜 깼는지 비틀거리며 속도를 내지 못합니다 .
우리 사회는 심각한 시간기근 (Time famine)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
유치원생부터 할아버지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 시간이 없습니다 .
백수 (白手 )가 과로사 한다는 말까지 생겨날 정도입니다 .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바쁘신데 죄송해요 ”라는
말이나 전화 , 문자를 시작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입과 코에서 풍겨 나오는 향기로운 술 냄새 때문에
자리를 옮겨가며 드디어 집결지에 이르렀습니다 .
반가운 사람들과 손을 맞잡고 인사를 나누고
담배 한 대 피어 물었지만 술 냄새는 담배 연기처럼 날아가지 못합니다 .
오늘 산행에서는 과음을 삼가야겠습니다 .
헌데 사는 것이 어설프기만 한 내가
이 다짐을 지켜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
축령산으로 향하는 차창으로 스쳐가는 풍경은
알곡이 여물어 고개 숙이는 벼와
도톰하게 살이 쪄 벌어지는 밤송이 등등
함성소리와 함께 무수히 흘러갔던 가을이
어느덧 발 아래로 다가와 인사를 건넵니다 .
가을은 흘러간 것과 오지 않은 것들이 모두 그리운 계절입니다 .
바람 소리가 맑아지고 기억이 선명해지는 것은
뜨거운 여름을 건너온 이들에게 자연이 건네는 선물입니다 .
전남 장성은 홍길동의 고장입니다 .
홍길동은 한국인을 대표하는 민족영웅이자 역사상의 실존 인물이며
허구적 소설의 주인공입니다 .
소설에서는 봉건제도에 맞서 만민평등의 이념으로 활빈당을 이끌고
이상국인 율도국 (일본 오끼나와 )을 건설한 인물입니다 .
(장성군 , 오끼나와 관광국 , 석원도 문화원의 3 년의 노력 끝에
베일에 쌓였던 그 비밀이 밝혀졌습니다 .)
조선에서 뱃길로 3000 리나 떨어진 일본 최남단의 섬 오끼나와에서
후반부의 삶을 살았던 그곳에는 민족운동의 선구자 홍길동을 추모하는
기념비가 서 있습니다 .
또한 장성은
의병장 김경수 , 윤진 , 김우급 , 김익중이 나고 자라 활동한 고장이고
한서 김인후의 필암서원이 있습니다 .
애써 또 자랑을 하자면
성적으로 전국 1 위를 자랑하는 장성고등학교가 있습니다 .
장성의 장성고등학교와 고창의 고창남중학교는
광주에서 이비인후과를 경영하는 반상진 씨가 설립했습니다 .
그는 장성에서 나고 3 살 때 고창으로 이주해 살았습니다 .
한 해에 서울대에 들어가는 학생이 10 여 명이고
장성고 3 학년 학생 전체가 4 년제 대학에 10 여 년째 진학하는
진기록을 이어가는 아주 우수한 고등학교입니다 .
공부에 방해되는 요소를 없애 집중력을 높이기 위해
휴대폰을 갖고 있다가 적발되면 ‘해지증명서 ’를 제출해야 했으며
1990 년대 중반에 고전기타 , 디지털카메라 , 원어민 영어회화 , 시사이슈 토론 등
20 여 개 반 특기 적성교육을 실시했습니다 .
입시공부만을 해야 하는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흔치 않는 일입니다 .
체육대회는 구기 종목을 없애고 전교생이 선수로 나서는
민속놀이를 도입한 것도 이채롭습니다 .
지금의 이 체육대회는 전국의 학교에서 벤치마킹을 하기에 이르고 있습니다 .
학업 성취도는 이러한 토대 위에서 가능했습니다 .
장성고등학교에 우수한 학생들이 입학해 명문고가 되었다는 논리는
절반의 진실입니다 .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느냐고요 ?
제 당숙이신 김낙종 선생이 고창남중학교 교장으로 계시다 퇴직을 했습니다 .
그러나 위와 같은 자랑거리에도 불구하고
장성의 제일 자랑거리는 축령산 편백나무 숲입니다 .
오늘 우리 산길방 청춘 (?)들이 그 축령산을 찾았습니다 .
출발지점은 영화 ‘태백산맥 ’ 과 ‘내 마음의 풍금 ’ 촬영지인
금곡 영화마을입니다 .
그 동네는 숲 입구에 있습니다 .
돌담길로 이어진 소박한 산골마을 . 민박집도 있습니다 .
마을 동구에 피어 있는 가을꽃들이 인사를 건넵니다 .
오느라고 수고했다고 ....
향긋한 편백나무 향을 따라 축령산에 들었습니다 .
우리 일행이 초가을 오전 편백나무 숲속을 걷습니다 .
부드러운 햇살을 받으며 황소걸음으로 느릿느릿 걷다보니
아둥바둥 살아온 게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
숲길에서 한창 작업 중인 청솔모를 만났습니다 .
인기척에 청솔모가 놀라 달아납니다 .
공연히 미안한 마음이 드는데
그 마음 사이로 잘 생긴 소나무와 편백나무가 눈에 들어옵니다 .
알싸한 피톤치드 향이 콧속을 파고듭니다 .
빽빽한 삼나무 숲과 편백나무는 재작년 찾았던 그때나 지금이나 그대로인데
변한 것은 사람뿐입니다 .
여린 들풀들이 종아리를 간질이는 축령산에도
이제 곧 가을이 들 것입니다 .
나무는 말이 없습니다 .
나무 심는 사람도 말이 없습니다 .
나무는 묵묵히 자랍니다 .
나무 심는 사람도 담담히 늙어갑니다 .
나무가 어느 날 하늘을 향해 껑충 자랍니다 .
나무 심는 사람은 하회탈처럼 너털웃음을 터트립니다 .
푹 나온 광대뼈에 굵은 나이테 주름살 ,
춘원 임종국 선생은 평생 나무를 심었습니다 .
그는 영면해서도 수목장으로 한 그루 나무가 되었습니다 .
춘원 임종국 선생이 나무를 심게 된 동기는 일제 강점기에
인촌 김성수 선생이 조성해 놓은 삼나무와 편백나무 숲을 보고
감명과 영향을 받아 시작한 것이라고 합니다 .
‘무정 ’ ‘흙 ’ 등을 쓴 작가 춘원 이광수와 조림왕 춘원 임종국 ,
작가 춘원 이광수는 인촌 김성수 선생이 일본 제국대학에 보냈으며
조림왕 춘원 임종국은 인촌의 행동만을 보고 영향을 받았습니다 .
春園 이라는 호까지 같은 두 사람은 인촌 김성수 선생과 이런 인연이 있지만
작가 이광수는 조선인의 머리를 바늘로 찌르면 일본인의 피가 나와야 한다는 내선일체 (內鮮一體 )를 주장하는 친일파가 되었으며 조림왕 임종국은
나무를 심는 것이 나라 사랑하는 것이라는 애국자가 되었습니다 .
이렇게 인촌이라는 거목 아래에서 자라난 나무는
하나는 친일파가 되었고 하나는 조림왕이 되었습니다 .
축령산 일대는 온통 편백나무 삼나무로 빽빽합니다 .
키가 20 ~ 30m 나 되는 40 ~ 50 년 수령의 수백 만 그루 .
쭉쭉 빵빵하게 잘도 자랐습니다 .
그 인근 산에도 20 ~ 30 년 수령의 편백나무들이 많이 있습니다 .
임선생의 영향을 받아 산주인들이 너도 나도 따라 심었기 때문입니다 .
숲속은 축축합니다 .
나무는 고요합니다 .
공기는 달디 달지요 .
나무는 물 , 바람 , 햇살과 침묵의 소리로 속삭입니다 .
편백나무는 내 속에 있고 , 난 편백나무 속에 있습니다 .
삼나무 속에 있습니다 .
편백나무는 잎 끝이 뭉툭한 마름모꼴이고 , 삼나무는 뾰족한 바늘잎입니다 .
이들은 서로 어깨동무하며 곧고 푸르게 서있습니다 .
우리는 그 속을 걷습니다 .
키가 자꾸 낮아집니다 .
마음이 잔잔해집니다 .
가슴 속에 푸른 잎 새들이 우우우 일어섭니다 .
나무는 숲의 아들 , 인간은 대지의 아들 , 둘은 한 가지에 돋은 잎입니다 .
도시인들은 일분일초를 쪼개가며 콩 튀듯이 살고 ,
나무는 천년을 하루처럼 삽니다 .
숲은 조용합니다 .
그래서 행동보다는 사념이 앞섭니다 .
그 깊은 침잠과 고요 덕분입니다 .
그래서 숲은 걷기에 좋습니다 .
그 걸음마다 생각이 실립니다 .
숲 걸음의 그 생각이 비뚤어질 일 없습니다 .
그 숲은 경이로웠습니다 .
진초록의 침엽으로 온 산을 뒤덮은
삼나무와 편백나무의 장대한 숲 풍광이 그랬습니다 .
그리고 그 숲을 지배하는
알싸한 피톤치드의 숲 향 역시 그랬습니다 .
구월 초 한 낮의 축령산 숲 길
그늘진 숲속은 땡볕에 달궈진 숲 밖 세상과 딴판입니다 .
어둡다고 느낄 만큼 숲 그늘은 짙고
춥다고 느낄 만큼 숲 기운은 찹니다 .
그 초록의 세상
나는 그 녹음에 물들어
피부가 온통 초록빛으로 물들 것 같습니다 .
아니 겉옷을 벗어 짜면 초록물이 똑똑 떨어질 것 같습니다 .
축령산 정상에서 둘러보니 진초록의 축령산 능선이 한 눈에 조망됩니다 .
모두 임선생의 손으로 심고 가꾼 감나무와 편백나무 들입니다 .
그는 얼마나 흐뭇할까요 . 내가 그런 느낌일진데
아직도 귓전에 쟁쟁합니다 .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이
“나무 심는 게 나라 사랑하는 길이야 ”
축령산의 삼나무 편백나무 숲은 현재 산림청에서 관리 육성중입니다 .
이제는 임선생의 외손자가 그 숲에 손을 더해 관리하고 있답니다 .
이 숲은 2000 년 전국 아름다운 숲 대회에서 1 등에 올라
경기도 포천시 광릉의 국립수목원에 있는 숲 명예의 전당에 헌정됐습니다 .
이 숲에는 길이 많습니다 .
임도가 여덟 개나 됩니다 .
트래킹은 임도를 따라 진행됩니다 .
물론 숲 속에는 작은 길도 있습니다 .
임도를 많이 낸 것은 간벌 등을 통해
경제성 있는 숲으로 관리하기 위한 것이지요 .
이 숲은 국내에서는 물론이고
세계적으로도 찬사를 받는 명품 숲입니다 .
임목 축적량이 세계 최고 수준인 독일의
독일인들도 이 숲을 보고 경탄해 마지않을 정도랍니다 .
그러니 올 가을 아니면 내년 여름에는 아이들 손잡고 이 숲을 걸어보십시오 .
유엔식량농업기구가 산림녹화 성공국가로 제 3 세계에 소개하는
세상을 아름답게 만든 축령산의 숲과
그것을 만든 한국인의 강인한 의지를 가르쳐 주십시오 .
또 하나 곁들이자면 축령산에는 세심원이 있습니다 .
세심원 (洗心院 )
‘수고하고 짐 진 자들아 모두 우리 집에 와서 쉬어 들 가거라 .’
편백나무 숲 속에 아담한 초가집을 지어놓고 열쇠 100 개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사람이 있습니다 .
아무 때나 와서 실컷 마음의 때를 씻고 가라는 곳입니다 .
그래서 이름도 세심원 (洗心院 ). 숙박료 같은 것은 받지도 않습니다 .
먹을 것도 걱정이 없습니다 .
독에는 쌀이 가득하고 , 김치 된장 고추장 등 밑반찬도 넉넉합니다 .
여기에 언제나 뜨끈뜨끈한 황토방 .
누구든지 먹고 푹 쉰 뒤 흔적을 남기지 않고 떠나면 됩니다 .
주인은 변동해씨입니다 .
평범한 농업고 출신인 그는 30 년 동안 장성군청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다
2005 년 봄에 스스로 그만 두었습니다 .
그는 이 집을 10 년 동안 혼자 지었습니다 .
매주 토요일 조금씩 땀을 쏟아 1999 년에 마무리를 하였습니다 .
거실은 황토 위에 죽염을 깔고 , 숯 (무게 2t, 높이 7cm)을 깔았습니다 .
그리고 그 1cm 위에 편백나무를 놓았습니다 .
장마철에도 고슬고슬하고 벌레가 꾀지 않습니다 .
지금까지 이곳을 다녀간 사람은 줄잡아 20000 여 명 .
맨 처음 열쇠를 받은 100 명은 그와 이래저래 인연이 닿은 사람들입니다 .
그러나 지금은 열쇠를 아랫마을 사람에게 맡겨두고 있답니다 .
변씨는 “이 그림 같은 경치를 나 혼자 보는 것은 죄짓는 일이다
이곳은 만인의 별장이며 난 관리인일 뿐 “ 이라며 손사래를 칩니다 .
한 달 운영비는 30 만 원 남짓 .
그는 이 비용을 매달 186 만 원씩 받는 연금으로 충당합니다 .
마을에는 그가 지은 소박한 미술관도 있습니다 .
300 년 묵은 감나무로 만든 그의 목공예 작품이 일품입니다 .
전문가들이 10 억 원을 준다며 팔라고 해도 그는 그냥 웃고 맙니다 .
그는 5 년째 숲속에 차 (茶 ) 씨를 뿌리고 다닙니다 .
지금까지 뿌린 양만 40kg 들이 30 가마 정도랍니다 .
이는 뒤에 오는 사람들을 위한 ‘차 보시 ’랍니다 .
요즘엔 임종국 선생 국가유공자 지정에 바쁘답니다 .
세심원엔 시계 달력 T.V 가 없습니다 .
술 , 고기 휴대전화는 금지물이고요 .
‘아니 온 듯 가시옵소서 ’
세심원에 걸려 있는 글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