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에 갔더란다
이무열
성씨고택이나 성씨 고가라는 말은 진작 어디선가 들었으나, 나로서는 초행길이었다. 장하빈 시인이나 김동원 시인도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우리는 번차례로 휴대폰으로 ‘2017 대구시인협회 학술세미나(5월 21~21)’가 열리는 장소를 검색했다. 마침내 목적지를 내비게이션에 찍어 두고 조금은 기대에 부풀거나 미열처럼 설렘으로 일렁이는 마음을 지지눌러 감춘 채였다.
누가 길 떠날 땐 내비게이션 아가씨 말과 하룻밤 자고와도 된다는 마누라 허락만 잘 얻으면 모든 게 편하다고 했던가. 국도와 고속도로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는데 방향키는 운전대 잡은 장하빈 시인의 판단과 수고에 온전히 맡길 수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진작부터 너스레를 떨며 먼 길엔 기사를 잘 섬겨야 된다나 어쩐다나. 점심을 봉평메밀국수로 대접받고 뱃구레를 간단없이 채운 힘 탓인지 ‘이형, 이번에 누구 찍었는데?’하며 느닷없이 묻는 것이었다. 새 정부 들어 펼쳐질 여러 변화에 대한 기대 탓도 있었겠지만, 뜻밖의 장소에서 만나는 시인협회 행사가 제대로 잘 되었으면 하는 우려와 바람도 섞인 물음이었으리라.
'당연히 홍 씨 아저씨 찍었지.’ 단도직입적으로 내뱉자 뜨악한 표정이었다. ‘와, 준표 형님 찍으면 안 되는감?’ ‘형님이라니, 에잇 이형 이 터널 지나면 당장 내려뿌라.’ 짐짓 모르는 척 딴전을 피우며 ‘그럼 누구 찍어야 되는데?’ 정색을 하자, ‘○○○ 아니면 하다못해 ***를 찍어 힘이라도 실어 줘야지…’라는 것이었다.
법원 앞에서 버스로 떠난 일행을 뒤쫓아 가는 입장이라 조금 다급했던 모양이다. 이왕 행사에 참석하기로 한 이상 제 시간에 맞춰 가야 된다는 것이 장하빈 시인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나는 국도를 타고 천천히 ‘산천경개 유산 가자 관동팔경 구경하고....’라며 느긋한 심정이었다. ○○○이 당선되리라 짐작했지만 첫마음 끝까지 저버리지 않도록 경계하는 의미에서 야당에도 힘 실어줘야 안되겠냐는 어설픈 변명을 스스로에게 하면서.
전후 사정을 떠나 하마터면 강제로 차에서 하차당할 뻔 했으나, 킥킥 부르르릉 투덜투덜 한 시간여 치달려 경상남도 창녕군 대지면 석리 322번지에서 첫눈에 들어온 것은 ‘창녕 양파 시배지 기념비’였다.
들은 풍월에 성씨 고가는 북한 김정일의 전처 성혜림이 유년을 보낸 곳이었다. 기념비에 의하면 1908년 성씨 집안에서 양파 재배에 처음 성공한 이래, 창녕 농민들의 소득증대를 이끌었던 경화해(耕和會)를 통해 창녕이 전국적인 양파생산지가 되었다. 성씨 고가는 1850년경 입향조 성규호에 의하여 그 터전이 마련되었다. 창녕에서는 ‘성부잣집’으로 알려지기도 했는데 일신당(日新堂), 아석헌(我石軒), 석운당(石雲堂), 경근당(慶勤堂)이란 당호를 가진 네 형제 집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본채와 별당 및 후원으로 이루어져 그 면적만 1만평이 되는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고가에 들어서자 앉은걸음으로 지레 다가온 느낌은 1930년 시문학 창간호에 발표된 김영랑의 시편 ‘오매 단풍 들겄네’에서 번져나던 아름다운 가락과 낭만적·서정적 정서였다. 미리 온 여류시인들은 한옥 마당에 떨어진 감꽃으로 감꽃목걸이나 감꽃반지를 만들 생각에 골몰하거나 저마다의 분위기에 취한 골똘한 표정으로 가을날도 아니건만 온통 얼굴과 마음까지 붉어져 어쩔 줄 모르는 듯 했다. 정신없이 살면서 일상에 빠트렸던 발목조차 빼어 들고 오만 잡생각 번잡스런 마음도 저만치 밀쳐두고 오늘 우리가 다룰 주제는 ‘물과 늪의 생명시학’이었다. 세미나 자료집에는 주제발표1 수달 외 4편(김선굉)과 회원들의 생태시·늪의 생명시를 비롯하여 주제발표2 대구의 생태주의 시(신상조)와 주제발표3 壁巖錄을 읽다(노태맹)의 순서로 짜여 있었다.
모시는 말씀을 쓴 대구시인협회회장 박진형 시인은 생명의 근원으로서의 물을 두고 노자의 도덕경을 빌어 상선약수(上善若水)를 이야기했다.
상선약수(上善若水)란 초나라 철학자 노자(老子)의 도덕경에 나오는 말 아닌가. 최고의 도(道)는 바위를 만나면 비켜가는 물과 같이 몸을 낮추어 다투지 않는 것이라 일렀거늘, 창녕에서의 고즈넉한 봄밤에 펼쳐질 시의 향연에 초대받은 나는 조금씩 서두르고 왜 그렇게 허둥거리기 시작했는지 모르겠다.
석포쪽 불빛에 그림자 길게 누일 길 있던가/……/추억은 때로 늪 위에 누워 누각 짓기도 하고/생각은 때로 늪 깊이 침잠하기도 하여/내 삶은 때로 누각까지 오르다가/늪속으로 빠지기도 하여/둑 가까이서 길 잃었다.//……/……/살아 있어, 그 삶의 날소리 듣지 못한다면/ 어떤 생이 저 늪의 질창 걸어가겠는가//……/……내 삶 마디마디에 고인 沼 따라/늪 밖으로 나오는 길 분주하여/……/…………/……붉은 등 켠 작부집 간판에도 길게 누워/석포 쪽으로 가는 몸의 길 연다/내 몸 누일 그림자 아직도 희미하다
윤희수 「둑의 가까이서 길 잃다」중에서
세미나 다음 날 우리가 방문할 우포늪과 청룡사와 창녕고분을 찾아가며 매순간마다 우연처럼 아니 오래된 약속처럼 만나게 될 목숨의 빛깔과 소리와 향기는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 것인가. 행사 축하를 위해 일부러 시간을 내주신 오늘의 시조시인회의의장 이정환 시인의 시조를 소개하는 것도 의미가 있겠으나 나는 다시 한 편의 시를 펼쳐 들었는데,
새들이 떠나가버린, 아직/돌아오지 않는 우포늪에/자운영꽃 환하게 번집니다/천 송이 꽃이 한 송이처럼/한 송이 꽃이 천 개의 씨앗을 달고/오래된 상처를 다독이고 있습니다/늦봄, 수척한 햇살 한 줄기/물 위로 떨어집니다/동그란 무늬 속으로, 소금쟁이/억년의 시간을 가로지릅니다/납작하던 우주의 乳房에, 핑그르르/뽀오얀 젖이 돌기 시작합니다
강문숙 「물 위에는 자운영-우포늪에서」전문
원시의 자연습지, 그 생태보고서에 어떤 감상이나 주석을 달 수 있으랴. 쇠물닭이 만들어내던 그 어느 여름날의 정경과 빼곡하게 수면을 뒤덮은 가시연이나 한 폭 묵화의 농담처럼 점점점 안개 사이로 멀어져가던 장대나룻배를 본적이 있거니, 우포는 새삼 얼마나 크나큰 그리움이며 저 가슴 밑바닥 감동과 설렘의 치유와 생명의 공간이던가.
유리 부스러기 속으로 찬란한, 선명하고 쓸쓸한
고요한 남빛 그림자 어려온다, 먼지와 녹물로
얼룩진 땅, 쇠 조각들 숨은 채 더러는 이리저리 굴러다닐 때,
버려진 아무 것도 더 이상 켕기지 않을 때,
유리 부스러기 흙 속에 깃들어 더욱 투명해지고
더 많은 것들 제 속에 품어 비출 때,
찬란한, 선명하고 쓸쓸한, 고요한 남빛 그림자는
확실히 비쳐 온다.
껌종이와 신문지와 비닐의 골짜기,
연탄재 헤치고 봄은 솟아 더욱 확실하게 피어나
제비꽃은 유리 속이든 하늘 속이든 바위 속이든
비쳐 들어간다. 비로소 쇠 조각들까지
스스로의 속을 더욱 깊숙이 흙 속으로 열며…….
이하석 「투명한 속」전문
주제발표2 ‘대구의 생태주의 시’란 제목으로 문학평론가 신상조는 여러 이야기를 한 것 같으나 조금 아쉬웠다. 생태시와 늪의 생명시를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그 선구자적인 자리를 차지하기에 분명한 ‘투명한 속’이 가진 의미와 인식에 소홀하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壁巖錄을 읽다’라는 주제발표를 한 노태맹 시인은 ‘내 시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라고 묻지 말라. 내 시는 불덩어리이거나 다 타버린 흰 재다. 소통하기보다는 사람들이 그저 그 불덩이나 흰 재를 가슴에 오래 안고 있어주면 좋겠다. 나는 이미 벽암록을 불태워 버렸다,’고 했다.
나는 중국 당나라 이후 불교 선승들이 전개한 대표적인 선문답을 가려 뽑아 설명한 책이라는 ‘벽암록’을 허퍼 시늉으로라도 읽어본 적이 없다. 늘 공부가 부족하고 능력 부족으로 도무지 소통하거나 읽어낼 재간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신발장 속
낡고 쭈그러진 소 한 마리 누워있다.
革命은 없고
먼 길 걸어갈 길 막막하다.
노태맹 「壁巖錄을 읽다·18」전문
노태맹 시인의 주제발표를 두고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을 가감없이 드러낸다면, 그의 시에 기대어 일면불(日面佛)월면불(月面佛)일면불(日面佛)월면불(月面佛)일면불(日面佛)월면불(月面佛)이다.
세미나를 끝내고 뷔페식 저녁을 먹은 뒤에는 ‘우리 가락 좋을시고’ 시간이었다. 소리는 우소혜(판소리연구회 소리 공감 대표), 고수는 김기호(고령가야금연주단원), 대금은 김정현(계명문화대학 생활음악과 외래교수) 세 분이 수고해 주셨다. 5월 봄밤은 서서히 무르익어 판소리와 대금으로 펼치는 한마당 소리잔치에 두둥실 달이 떠올랐던가, 어느 순간 달도 별과 함께 까무룩 스러졌던가. 나는 진양조·중모리·자진모리·휘모리·엇모리장단 어느 경계 안과 밖에서 얼쩡거렸던가. 종내 내 비록 창은 못할지라도 귀명창 흉내라도 내는 양 앙가슴 떠다박질린 것처럼 달뜬 분위기에 빨려들고 있었다. 얼쑤!
흥보 마누라 반겨라/흥보 마누라 반겨라/어서 오오 어서 와요/무엇을 주더이까 쌀이 되면 밥을 짓고/벼가 되면 어서 찧어 죽이라도 얼른 끓여/……
창(노래)과 아니리(말)와 사설과 너름새(몸짓)으로 구연(口演)되는 판소리 가락은 점차 흥을 고조시키고는 했는데, 일고수 이명창(一鼓手二名唱)이란 말이 결코 허투루 하는 말은 아닌 것 같았다. 소리꾼과 고수 사이에는 박(拍)이라는 보이지 않는 끈이 있어 호흡장단을 길고 짧게 끌어내 주고받고 씨줄과 날줄로 끊임없이 얽혀 들며 어우러지곤 했다.
흥부가 먹을 것 구하러 형님 집에 갔다가 매 맞고 돌아오는 것을 보고 흥부 마누라가 중중모리장단으로 노래 부르는 장면에서 문인수 시인은 기어이 얼쑤! 얼쑤 좋다! 꽤나 흥이 뻗쳐오르는 모양이었다.
판소리에 이어진 대금산조도 사뭇 감동적이었다. 더러 일축조선소리반이나 유성기 음반을 통해 가야금산조나 거문고산조를 들은바 있지만, 고가의 뜨락에 둘러앉아 맛보는 원장현류 대금산조의 느낌은 참으로 색다르고 굽이굽이 제홀로 깊어가는 여울물 흐르는 소리 같았다. 몇 번을 돌이켜 생각해도 그날 대금이 연주되던 누각 위에 달이 떴는지 졌는지 조차 잘 모르겠다. 다만 깊고 그윽하게 어둠에 젖어 굽이굽이 흐르듯 멈춘 듯 휘몰아 굽이치고 꺽이다 여울지던, 얼씨구 추임새 넣고 싶은 한바탕 신명만 질펀하게 가슴에 남았다.
공연을 보다 뜬금없이 노화순청(爐火純靑)이라는 무협소설의 용어 하나를 떠올렸다. 화로의 불이 뜨거워지면 파란색으로 변하는 것처럼 전륜의 무림 고수에게 무공의 경지가 극에 달하는 경우를 일러 노화순청이라고 했다. 예전 도사들은 단약(丹藥)을 만들며 화로의 불꽃이 그야말로 순청색이 나올 때까지 끝없이 연단했다고 한다. 불꽃은 온도에 따라 색깔도 달라 500도 일 때는 암흑색, 700도가 되면 자주색, 800이나 900도에서는 붉은색에서 노란색으로 바뀐다고 한다. 1,200도가 되면 불꽃이 하얗게 되고 이윽고 3,000도를 넘어서면 파란색이 되는데 이를 두고 노화순청이라고 했다.
모름지기 학문이나 예술을 하는 사람들이 완숙한 경지에 이른 것을 두고 비유적으로 노화순청이라는 말을 쓰는 것 같다. 우리 가락을 들려주신 세 분은 얼마나 오랜 시간 절차탁마의 과정을 거쳐야 빛나는 성음을 거둘 수 있는 것일까. 그날 그 시간 그 자리에 함께했던 대구의 많은 시인들은 또 몇 도의 불꽃 가운데 머물며 현재 자신의 시를 연단하고 있던 것일까?
프로그램상 김호진 시인이 진행을 맡도록 되어 있었으나 부득이한 일로 함께 하지 못해 많이 아쉬웠다. 우리끼리 하는 쑥덕거림으로 그는 여성친목부장으로 딱이다. 그의 뛰어난 친화력과 맛깔스런 말솜씨와 덕담이 덧붙여졌다면 한층 색다른 분위기가 펼쳐졌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서대현 시인도 모처럼 얼굴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늦게 오는 바람에 밥도 못 먹고 빵으로 끼니를 때우면서도 아련한 추억이나 미련처럼 시의 본향에 다시 발목 빠트리고 싶은 모양이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긴 여운을 남긴 소리판을 접고 장소를 옮겨 화첩놀이의 흥취에 빠질 시간이 왔다. 진행을 맡은 김동원 시인이 화첩을 펼치고 미리 준비한 먹을 찍어 바둑판 화점 놓듯 일필휘지로 첫 줄을 그었다.
시중유화(詩中有畵)라!
시중유화(詩中有畵) 화중유시(畵中有詩)란 말이 있다.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는 말로 일찍이 당나라 시인 왕유의 시를 평한 송나라 소동파의 글로 인해 유명해졌다.
몇 해 전이던가. 박미영 시인이 무명 예술가를 돕기 위해 시인들이 소장한 물건들을 자선바자회에 내놓는 자리를 마련한 적이 있다. 나도 무명인 주제에 수성아트피아 전시장에 조각가 친구에게 받은 도자기 십자가를 내 놓았는데 두 사람이 경합이 붙어 꽤나 비싼 가격에 팔렸다. 그날 경매 마감 자리에서 수필가 ○○님이 소장했던 목암 유장식 선생의 서각 ‘詩中有畵’를 만났다. 1989년 1월에 각(刻)한 것으로 목암을 세상에 알린 백악미술관 전시품이었다.
너 댓 사람이 눈독을 들인 목암의 서각 ‘시중유화’는 두 번 만나기 힘든 좋은 작품으로 그 뜻도 좋았다. 마지막 순간까지 참 좋은 시를 쓰는 여류 ○○○ 시인과 경합이 붙었다. 그대로 계속 금액을 높여 나가다간 자존심 싸움에 무리한 금액 지출도 감수해야 할 지경이었다.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霽色圖)의 제색(霽色)이란 소나기 온 뒤 맑게 갠 모습이라고 합니다. 화가인 겸재 정선과 시인인 사천 이병연은 젊은 날부터 인왕산 부근에서 평생 우정을 나누면서 살았다고 하지요. 세월이 흘러 이병연이 병중에 있을 때 오랜 친구인 정선은 이병연이 죽기 나흘 전 건강을 기원하며 소나무 숲에 둘러싸인 친구의 집을 그렸다고 하네요. 그래서 소동파나 왕유를 떠나 정선과 이병연의 시와 그림을 두고 시중유화니 화중유시란 말을 한다고 그럽디다. 시를 좋아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이런 의미가 가슴에 꽤 와 닿기도 하고………’
대강 그런 식의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치열한 접전(?)의 모든 과정을 처음부터 지켜보던 박주영 시인이 조용히 나섰다. ‘○ 시인이 양보해라. 이야기 들어보니 이 선생이 임자 같다.’ 나중에 들어보니 ○ 시인 남편이 ‘시중유화’를 꼭 사오라고 단단히 일러두고 자리를 떴다고 한다. 제대로 시도 못 쓰는 처지에 나는 거실의 ‘시중유화’ 목각을 볼 때마다 ○ 시인에게 고맙고 미안하기도 한 그날의 기억이 떠오르곤 한다.
김동원 시인의 뒤를 이어 미리 비워둔 첫 자리에 이하석 시인과 노중석 시인은 서로 먼저 붓을 드시라고 아름답게 사양하기도 하고, 박상옥 시인은 詩心卽淸心을 쓰고, 박종해 시인이나 정재숙 시인도 그 뒤를 잇고, 김청수 시인은 차 한 잔 하실래요! 자기 시집 제목을 쓰고, 박진형 시인의 지인 화가 이규목 선생은 고령에서 시인협회 행사를 빛내기 위해 일부러 오셔서 시에 그림을 더해 시중유화에 화중유시의 진경을 완성하였다.
옛 선비의 풍류를 따라가 본 화첩놀이 뒤부터 ‘재미는 이제부터다’ 라는 말이 깔축없이 들어맞았다. 삼삼오오 짝을 이뤄 담소를 즐기는 모습은 저마다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구상’임에 분명했다. 그러다 ‘우포늪의 봄’을 두고 ‘비가 오면 하늘이 우는 것 같아/ 늪이 노래를 불렀다, 던 김세현 시인이 자발적으로 일어서서 더는 못 참겠다는 표정으로 노래를 하기 시작했다. 어느 해 시인협회 송년회 자리에서 절정으로 치닫던 연주자 이마에 만 원짜리를 침 발라 척 붙여 트럼펫을 내동댕이치게 하던 신명을 그 누가 감당하랴. 립스틱은 총알이라더니 립스틱 짙게 안 바르고도 가요에서 가곡을 거쳐 오페라까지 넘나들며 잘도 넘겨 재치는 사이, 밤은 꼴깍 ’서으로 가는 달‘처럼 숨넘어가고 있었다.
앞 노래를 받아 박언숙, 홍영숙, 정경진, 이자규, 임창아 시인이 이어달리기하듯 뒤를 받치고, 예술은 지극한 피눈물로 이루어진다 했거늘 송만갑, 이동백, 정정렬이나 진채선, 박녹주, 이화중선 같은 명창은 아닐지라도 그 어떤가. 기교에서 예술로 나아가는 것을 도(道)라 이른다면 그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진정 시(詩)의 이름으로 모여 시의 도(道)를 행하고자 스스로에게 다짐한 것은 아니었을까.
권영호 사무국장, 이무열 시인, 김상연 시인
사전 준비에 여러모로 고심했을 사무국장 권영호 시인과 집행부 몇 몇 분들을 곁에 둔 자리에서 나는 떠벌리고는 했다. 시협회장이 평소 제대로 하는지 못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번에 장소하고 분위기는 죽이네! 하, 우리 박 회장님이 파마도 하시고 모처럼 한 인물 나네!
이번 행사를 취재하기 위해 참석한 동요가수이자 시인이기도 한 이춘호 기자의 가락과 흥취는 또 어떠했던가. 리바이스 청바지가 어울리는 모습으로 직접 기타 치며 부르는 ‘행복의 나라로’나 ‘섬집아기’를 들을 수 있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직접 녹음해 와서 들려준 그의 많은 노래들이 분위기를 들었다 놓았다 하곤 했다. 어느덧 준비한 막걸리도 떨어지고, 문학기행 갔다 대구로 오는 길에 행사에 참여하신 박방희 시인이 찬조해 주신 전통주도 떨어지고, 이름은 못 밝히겠지만 오래 살려고 비겁하게 술도 안마시고 더러는 일찍 잠자리에 들고 어지럽게 쓰러진 술병만 짤랑거리며 그렇게 축제는 끝나가고 있었다.
우리는 몇 군데 숙소에 나누어 들었는데 스스로를 돌처럼 낮춘 아석헌(我石軒)이나 석운재(石雲齋), 근면함을 공경한다는 경근당(敬勤堂), 날로 새롭게 한다는 의미의 일신당(日新堂) 당호가 의미하는 바가 뜻깊었다. 내 숙소는 청수당(淸修堂)이었는데 현액글씨가 예사롭잖아 자세히 보니 일중 김충현의 제자인 정도준 선생이 썼다. 석운재 또한 정도준 선생이 쓰셨는데 도톰하게 살은 쪘지만 활달하고 빼어난 품새가 당당하고 올곧은 선비를 연상케 했다.
옆방에는 이춘호 기자와 장하빈 시인이 들었는데, 뒤늦게 연애라도 하는지 무슨 이야기가 그리도 길고 오래도록 이어지던지 모르겠다. 마치 첫사랑 여인과 마주보고 앉아 시냇물 흐르는 소리처럼 조잘조잘 나직나직 툭툭 주거니 받거니 정담이 깊었다. 하긴 그런 고택에 와서 마누라 허락을 받았는지 잘은 모르겠지만 누구라 쉽게 잠이 오랴. 내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김동원 시인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최근 페이스북으로 찾아온, 20대 시절 만난 도서관학과 여학생을 떠올렸다. 어쩌면 오랜만에 시가 한 편 써질 것 같은 예감이 온몸 가려 두르는 것을 감추느라 신경이 쓰이기도 했다. 그런 기분은 참 묘하고도 신선하면서 절절한 설레임이라서 무릇 시라는 것도 움직이는 문의 지도리 같아야 되리라는 생각을 했다.
사월, 꽃이 왔다
이 무 열
사월 모일
페이스북으로 그녀가 왔다
물푸레나무 가녀린 영혼,
낭창낭창 아픈 회초리 사십 년 묵묵부답의
가고 오지 않는 것이 어디 사람이나 인정뿐이랴
이마가 곱던 도서관학과 일학년 어깨 너머
방천시장 입구 목조계단 이층 정든 찻집 유리창마다
얼룩덜룩 빈집에 노을만 붉어서
먹먹하다
사람을 견딘다는 것은
가슴에 키운 심, 발걸음마다 굳은살이 박이듯
못 다한 노래 잊힌 후렴구 같은 것이어서
이 순간 나는 가슴이 아픈 것인가 머리가 아픈 것인가
낙산 동쪽 보문사 거쳐 청암사로 운문사로
일주문도 천왕문도 없는 죽령과 마재와 길안을 스쳐간 풍문은
천지간 남루의 구절양장길을 돌아
꽃이 왔다
옛 여인의 머리카락짚신* 같은 맹세
천지갑산 푸른 물든 봄밤에
*1998년 안동 고성이씨 무덤에서 ‘원이 엄마’의 한글 편지와 함께 출토된,마와 머리카락을 섞어 짠 16세기의 짚신형 신발
이런저런 생각이 깊어 세 시 넘어 잠들고도 평소와는 달리 여섯 시경 잠이 깨었다. 고가의 뒤뜰을 천천히 거닐었다. 1920년대에 세워졌다는 원류 고택을 비롯하여 대한민국 지도 형태로 깊이 팬 연못과 논흙을 쌓아 만들었다는 작은 동산이 혼자 보기 아까웠다. 용틀임하듯 굽이쳐 간 소나무가 주는 위용과, 꽃은 없지만 오래된 몇 그루 배롱나무가 이루어 낼 가을날의 풍경이 눈에 잡힐 듯 선연히 다가오곤 했다.
일제 강점기 이집 주인이었던 성유경은 신간회 등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일제 말에는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들과 교유하며 남로당 재정부장을 지내다 월북한 사람이다. 아들 또한 유격대원이 되어 남도부 빨치산 참모장을 지낸 사람이다. 우리가 흔히 쉽게 말하는 빨갱이 집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55년 성규호가 처음 이곳에 터를 다진 후 주위에 베푼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은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1863년 병자년 기근 때에는 이웃을 위해 기꺼이 곡간 문을 열었으며, 그의 후손들은 지양강습소(池陽講習所)를 열어 후학을 가르치고 부녀자교육에도 열정을 쏟다 일제 때 강제로 철거되기도 했다. 또 우리나라 최초로 양파 씨를 농가에 보급하여 농가소득을 올렸으며, 해방 전 춘궁기에는 면민들의 호구를 책임졌으며 최근에는 집안에서 운영하던 협성농산 주식을 경화회 조합원들에게 대부분 나눠주기도 했다. 그런 선행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데 영원무역(노스페이스)을 운영하는 성기학 회장은 기회 있을 때마다 이번처럼 문화예술인들에게 아낌없는 지원을 꾸준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노중석 시인은 영원무역의 이사로 있으면서 시의 길을 함께 걷는 시인들의 행사였기에 더욱 아쉬움이 없도록 처음부터 끝까지 관심을 가져 주셨다.
후원은 넓고 그윽하고 끝 간 데 없이 깊었다. 옛 사람들은 밝게 드러나는 빛 보다는 은은한 정취를 좋아해서 대나무 숲을 즐겨 가꾸었다고 한다. 근세에 와서 이념이나 사상문제로 성씨 고가는 잠시 빨갱이집이라고 모르는 사람들로부터 경원시 되었으나, 소작인들과 철저하게 나누는 삶을 살아간 집안 내력을 아는 사람은 다 알지 않는가. 걸을수록 더욱 고요하고 서늘한 대나무 숲길 끝에서 나보다 먼저 산책에 나선 김형범 시인을 보았다. 어느 자리에서 김선굉 시인은 김형범 시인이 자신과 나이가 같다는 사실을 알고는 더럽게 기분 나쁘더라고 우스갯소리를 했다. 너무 젊게 보이고 늘 밝은 모습이 짐짓 부럽고 신기하기조차 했던 것이다.
아침 식사를 하고는 창녕고분군을 둘러보았다. 몇 사람은 간밤의 숙취에 시달릴 만도 한데 모두들 씽씽한 얼굴이었다. 특히 김상연 시인은 행사사진 찍으랴 술 마시랴 자신이 중 상이라는 이야기에서 석용산 스님과 경산예총 행사이야기 까지 들려주느라 종횡무진 혼자 바빴는데 지난 밤 한 시간 밖에 자지 않고도 늠름했다.
우리가 찾아간 창녕고분 일대(교동 고분군 일부와 송현동 89·91호분)는 일제 초기 1918년에서 그 이듬해까지 조선총독부 박물관 촉탁 야쓰이 사이아치(谷井濟一) 주도로 발굴이 이루어졌다. 그때 마차 20대와 화차로 2량(兩)이 넘는 어마어마한 유물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그 후 창녕 일대의 유물은 대구에서 전기회사를 운영했던 오구라 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의 사주를 받아 철저하게 유린되어 당시 강탈해 간 유물은 1,000여점이 넘는데, 그의 사후인 1982년 동경박물관에 기증되었다.
동경박물관에 기증된 유물 가운데 창녕 출토 가야금관이 한 점 있어 유독 눈길을 끈다. 띠모양의 관테중앙에 원형과 물방울모양 달개가 달린 연꽃 봉오리 모양의 세움 장식이 있고, 양쪽으로도 풀잎모양의 세움 장식이 두 개씩 배치된 것인데 가야금관의 독창적인 아름다움과 화려함을 잘 보여주는 유물이라고 한다.
일연(一然, 1206~1289)이 쓴 「삼국유사」에는 5가야가 언급되어 있다. 여기서 말하는 5가야는 아라가야·고령가야·대가야·성산가야·소가야인데 학자들은 금관가야를 포함하여 통상 6가야라고 한다. 일연은 ‘고려 「사략」에는 금관가야·고령가야·비화가야·아라가야·성산가야를 5가야라고 했다’며 비화가야가 지금의 ‘창녕’이라고 말하고 있다. (문화유산답사회 엮음 ‘경남’에서 인용)
우리가 둘러본 고분군은 창녕읍의 동쪽과 북쪽에 펼쳐진 목마산(牧馬山)이 잦아드는 야트막한 산기슭에 자리해 있었다. 사방 둘러보아도 잔디가 잘 가꾸어진 큰 무덤뿐이었다. 사전 지식도 없이 둘러보는 역사의 현장에서 일행의 눈에 과연 어떤 것이 보였을까.
5월 중순부터 본격적으로 열리는 뽕나무 열매 오디에 저마다 손이 갔고 멀리 바특이 바라다 보이는 옛무덤을 앞에 두고 찰칵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는 지극히 짧은 순간 등 떠밀린사윤수 시인의 고전적인 춤사위가 펼쳐졌다.
다포 겹처마 팔작지붕 아래 슬기둥 덩뜰 당뜰 당다짓도로 당다둥 뜰당 거문고 소리……
사윤수 「청자상감매죽유문장진주명매병의 木牘 」중에서
화왕산 군립공원 안에 있는 관룡사는 신라 진평왕 5년 증법국사(證法國師)가 처음 절을 지었으며 신라 8대 사찰의 하나였다. 원효대사가 제자 1천명에게 화엄경을 설법하였다고 한다. 관룡사(觀龍寺)라는 이름이 붙게 된 연유는 증법국사가 절을 지을 때 화왕산 위 세 개의 연못에서 용 아홉 마리가 승천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관룡사 사적기」에 따르면 ‘조선 숙종 30년(1704) 가을 큰 비가 내려 금당과 부도 등이 유실되고 승려 20여명이 익사하는 참변을 당한 뒤 숙종 38년(1712)에 대웅전 등을 다시 지었다.’
나는 관룡사에 오르며 관룡사 여장승과 남장승이 꼭 보고 싶었다. 이십 수년 전 우연히 김두하 선생님이 쓰신「 벅수와 장승」을 보았기 때문이다. 재야학자가 7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의 책을 저술하기까지의 절절한 장승 사랑이 몸으로 전해져 왔을 뿐더러, 다양하고 세세한 분류에 자세한 설명이 덧붙여진 대단한 노작이었다.
사전적 의미의 장승 설명은 다음과 같다. ‘장승은 민간신앙의 한 형태로서 마을의 수호신 역할을 하며, 사찰이나 지역 간의 경계표·이정표 구실도 한다. 대부분 남녀 1쌍을 세우고, 5방위 또는 경계 표시마다 11곳~12곳에 세운다. 솟대·돌무더기·서낭당·신목·선돌 등과 함께 동제 복합문화를 이룬다.
지역과 문화에 따라 장승·장성·장신·벅수·벅시·돌하루방·수살이·수살목이라고도 불린다. 재료에 따라서 목장승·석장승·복합장승으로 분류된다. 목장승의 형태는 솟대형·목주형·신장조상형이 있다. 석장승의 형태로는 선돌형·석적형·석비형·돌무더기형이 있고, 복합장승은 돌무더기나 흙무더기에 솟대와 석인의 복합 형태를 이룬다.
동쪽에 있는 장승에는 동방청제축귀장군, 서쪽에는 서방백제축귀장군, 남쪽에는 남방적제축귀장군, 북쪽에는 북방흑제축귀장군이라는 신명을 써서 잡귀를 쫓는다.’
관룡사 장승은 여장승과 남장승 한 쌍으로 구성되어 있다. 상대적으로 크고 날카로운 송곳니를 빼물고 있는 절 입구 오른 쪽 장승이 여장승이고, 안경을 쓴 듯 안경자국이 콧잔등에 남은 것이 남장승이다. 이 장승들은 관룡사 소유 토지의 경계를 위한 표지(標識)이지만 사찰 토지 안에서 사냥과 어로를 금하는 호법(護法), 절에 잡귀가 출입하는 것을 막는 수호신과 풍수적으로 허한 곳을 보완해 주는 비보(裨補) 등을 위해 세워진 것으로 보고 있다. 고 김두하 선생께서는 이 두 장승의 건립연대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영조 49년에 세워진 것이 아닌가 했다. 그 근거로는 절 입구에 세워진 당간지주 명문에 건륭삼십팔년게사시월(乾隆三十八年癸巳十月)이라고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장승을 배경으로 나는 온갖 포즈를 취하며 사진 몇 장을 찍었는데, 아직까지 두 사람 다 게으름 피우며 사진을 보내주지 않고 있다. 마음 같아서는 ‘자이 그래가 훌륭한 시인 되겄나 싶다. 카메라는 좋더라마는…’한 마디 하고 싶은데 아직까지 꾹꾹 눌러 참고 있다.
장승을 보고 한걸음씩 더 올라가면 귀여운 산문 하나가 오래전부터 그 누구를 기다린 듯 무릎걸음으로 다가온다. 동글동글 납작납작 고만고만한 돌로 소꿉장난하듯 쌓아올린 돌담위에 장대석 두 개로 꾹 눌러놓은 지붕돌을 보노라면 그렁그렁 맑은 눈물이라도 내비칠 것 같다. 그 단순한 아름다움에 얼비쳐 묻어나는 순박함에 가슴이 다 따뜻해 오기 때문이다.
산문을 지나 만나는, 불교의식에 쓰였을 법고대(법고받침대)는 또 어떻던가. 해태인지 사자인지는 알 수 없지만 오랜 세월 고통 속에 헤매는 축생들에게 기쁨을 맛보게 하면서 온갖 번뇌와 망상과 집착과 오욕에서 벗어나게 하는 구실로 쓰였던 것이 거기 있었다. 이제는 태무심하게 버려지고 잊혀 조용히 눈 감고 쉬고 싶은 휴식의 표정을 한 채로.
자세히 보면 1칸 맞배지붕의 약사전도 그냥 스치듯 지나치며 볼 예사 건물이 아니다. 약사전 설명문에 따르면 공포는 기둥위에만 있으며 그 사이 포벽에도 구조물이 생략되어 있었다. 창방(昌枋)의 끝을 그대로 첨차로 만들었는데, 이는 주심포계 건물에서 볼 수 있는 독특한 수법이라고 한다. 내부의 첨차는 다포계 건물에서처럼 원호곡선을 이루었다. 이처럼 두 개의 첨차를 사용한 예는 1404년(태종4)경에 세운 송광사 국사전(국보 제56호)과 1473년(성종4) 다시 지은 도갑사 해탈문(국보 제50호)이 있어 약사전 건물도 최소한 15세기에 건립되었을 것이라고 설명문에는 나와 있었다.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석조여래좌상도 눈길을 끌었는데 머리위 둥근 육계(肉髻)에는 가르침을 상징하는 반달구슬인 계주(髻珠)가 있고 법의(法衣)의 겹쳐진 부분은 선각(線刻)으로만 표현해 형식화되어 가는 고려시대의 양식을 따르고 있었다. 약사전 앞 삼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이었다. 하대석(下臺石) 네 면에는 코끼리의 두 눈을 형상화한 안상(眼象)을 조각하였는데, 이는 석탑의 장식성을 강조한 통일신라 말기의 석탑 표현 양식이다.
대웅전에서 내려오며 바로 보이는 약사전 벽화는 그 오랜 세월의 풍상을 겪느라 반나마 지워진 채로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처럼 형체만 남았다. 그러나 조금 더 자세히 보면 네 칸 면 분할 공간 속에 낙랑장송인듯 휘어진 참나무인 듯 희미하지만 소박하면서도 찬연한 아름다움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런 풍경을 배경으로 둘러서서 권영호·김형범·박언숙·변희수 시인 네 사람은 무슨 이야기를 나누느라 그리 솔깃한 표정들을 하고 있는지 참 보기 좋았다.
대웅전 안으로는 삼배나 백 팔배를 하는 보살들이 수시로 들고 나는데, 법당 한 자리를 턱 하니 차지한 김청수 시인은 도통 나올 생각을 안 하고 있었다. 모르긴 해도 머리 빡빡 밀고 마누라도 아이들도 모르게 독경소리에 숨어들고 싶은 모양이었다. 한 삼일 아니면 석 달 열흘이라도 시의 화두 하나 잡고 끙끙 알 낳으려다 무심결에 선잠에 들고 싶은 표정이었다. 나는 대웅전 수미단의 다채로운 조각에 물끄러미 빠져 들었다가 뒤로 돌아가 후불벽화로 그려진 양류관음도에 오래 눈길이 꽂혔다. 불화 하단 왼쪽에 배치된 선재동자처럼 53명의 선지식(善知識)을 찾아 천하를 역방(歷訪)하다가 마침내는 보현보살을 만나듯 좋은 시 몇 편 얻고 싶었기 때문이다.
조선 태종 때 창건되어 숙종 때 중건된 대웅전을 나오자 박태진 시인이 대웅전 벽에 기대어 놓은 커다란 느티나무 지통을 만져보고 있었다. 과문한 탓인지 이토록 큰 지통을 다른 곳에서는 보지 못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지통을 두고 스님이나 대중들의 밥을 담은 구유나 구시라고 부르며 절의 규모나 사격 운운하지만 이것은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조선시대 억불숭유정책 아래에서 관청의 요구로 종이 만들 때 닥나무 껍질을 물에 풀어 담는 용도로 쓰인 것이다. 이토록 큰 지통을 사용한 관룡사 스님들은 얼마나 많은 노역의 고단함을 등짐 졌던 것일까?
관룡사를 떠나 우포늪 이우걸문학관에서 맛본 들밥은 색다른 재미와 느낌으로 다가왔다. 가까운 곳에 식당이 없어 예전 농부가 들일할 때 들밥 이고 가듯, 대구시인들의 방문을 환영하며 마련한 조촐하지만 정과 성의가 듬뿍 담긴 음식이었다.
관장이신 이우걸 시조시인은 대구에서 대학시절을 보낸 탓으로 대구시인들에게 특별한 애정과 관심을 갖고 계셨다. 1973년 이영도 시인의 추천으로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했는데 40년 문학인생을 김춘수나 이재행 시인과의 일화를 섞어 담담하게 들려줘 잔잔한 감동을 주었다. 여러 번 자신을 보잘 것 없다며 겸손해 하면서 툭툭 던지는 말솜씨가 예사로운 언변이 아니었다. 우리는 우포늪에 가서 정작 우포 보다 조금 더 우포늪 같은 이우걸 시조시인을 만나고 왔는지도 기실은 모를 일이었다.
수생식물의 교과서, 녹색의 물 융단, 살아있는 자연사박물관, 생태계의 자궁, 종다양성의 보고라는 말들은 다 우포늪을 두고 이르는 말이다. 우포늪은 우포(牛浦)·목포(木浦)·사지포(沙旨浦)·쪽지벌 등 네 개의 숲으로 이루어져 있다. 정겨운 우리말로 불러보면 소벌,나무벌, 사지벌, 쪽지벌이 그것인데 70만평에 달하며 창녕군 대합면·이방면·유어면 3개 면에 걸쳐있다. 우포늪은 1억 4천만 년 전 생긴 국내 최고의 자연사박물관이다. 이번 시인협회행사는 우포늪을 마중물 삼아 진정 시의 씨앗을 뿌리고 잉태하고 낳고 기를 자양분을 얻어온 여행으로 기억되리라.
우포늪을 나서며 문학관 앞 나무에 저마다 자신의 시를 쓴 시의 리본을 매달았다. 김선굉 시인은 이번 세미나에서 「물의 언어와 수달의 시간」이라는 산문을 통해 ‘수달이 만들어내는 물의 파문을 떠올리면서, 우리의 삶이 어때야 하는 지를, 시의 문장이 어때야 하는 지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라고 했다. 장하빈 시인은 ‘저 스쳐간 봄날의 直指心經,이라며 소회를 밝혔다.
아아, 5월 어느 날 1박 2일 우리가 함께 했던 늦은 봄날은 그렇게 우쭐우쭐 흘러가고 있었다.
*2017 대구시인협회 학술세미나 "물과 늪의 생명시학" 참관기입니다.
**오랫만에 한문관 카페에 들어 왔습니다. 토요일 오후 하릴없이 점방이나 보고 앉아서 생각하니, 이 해도 벌써 다 갔는데 해설사 카페에 이런 글이 해당이 되나? 하다가 심심파적으로 옮겨 봅니다. 허물이 되는 것이나 아닌지.....
첫댓글 이웃 동네인 창녕에 갔다시길래 반가워 창을 열었습니다.
이웃이면 참 가까운줄 알았는데 선생님의 글을 읽으면서 등잔밑이 어두웠구나 싶은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무에그리 바빴는지 한동안 잊고 살았던 창녕 ... 조만간 다시 가보렵니다...
성씨고가의 뒷뜰과 우포늪의 퐁당거림과 관룡사의 장승과 내 어릴적 동무의 얼굴을 닮은 3층 석탑이 보고싶어집니다.
노스페이스 회장으로 계시는 성☆☆님이 성씨고가를 근래에 복원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평소 재정적인 지원을 하면서 여러 예술 문화단체에 문호를 개방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1박 2일 걸판지게 놀다 왔답니다.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는 창녕이란 지역이 새삼 그립기도 하네요.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