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 101장면 - 한국 최초 결혼 청첩 신문 광고란에 올라온 공개 결혼 청첩장
인기멤버
hanjy9713
2024.05.23. 01:41조회 9
댓글 0URL 복사
한국 최초 101장면
한국 최초 결혼 청첩
신문 광고란에 올라온 공개 결혼 청첩장
요약 전통 결혼식에는 청첩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으나 신식 결혼식을 하며 청첩이 생김.
1920년 4월 10일자 <동아일보> 광고란에 첫 청첩장이 실림. 신랑·신부는 김우영과 나혜석.
최초 여류화가 나혜석과 34세 변호사 김우영의 공개 청첩은 큰 화제가 됨.
청첩장 일반화 초기엔 양가가 합의해 들어갈 문구나 매수를 정해 인쇄해 사용.
나혜석과 김우영이 신문에 게재한 청첩장
출처: 1920년 4월 10일 동아일보
우리 나라의 전통 결혼식에는 청첩이라는 것이 없다. 맨 먼저 사당에 가 조상에게 '제가 누구와 혼인합니다' 하고 고하는 것이 결혼의 첫 단계였다. 이 한 가지만으로도 결혼을 얼마나 신성시하고 중요한 일로 여겼는지를 알 수 있다.
청첩은 신식 결혼식, 이를테면 지금과 같은 기독교식 결혼식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자주 보이면서부터 생겨났다. 처음엔 신랑·신부의 태도가 전통 혼인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비록 식장에서 팔짱을 기고 사진을 찍는가 하면, 같이 걸어나가기까지 했지만 몸 둘 바를 몰라 했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내가 모월 모일 모시에 모처에서 누구와 혼인합니다'하고 미리 알리는 청첩장을 전달하는 것은 아예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공개리에 행해진 결혼 청첩은 1920년대에 와서야 처음 등장한다. 청첩장이 일반화되기 시작한 초기엔 양가가 합의하여 청첩장에 들어갈 문구나 매수 등을 미리 정해 인쇄해서 나누어 사용했는데, 그 매수는 보통 1백 장 정도였다. 그러니까 반반씩 나누어도 50장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우리 나라에서 공개리에 결혼 청첩을 한 최초의 신랑·신부는 누구일까? 동성동본 결혼을 허용하면 자살하겠다는 말을 서슴지 않는 유학자의 후예가 아직도 건재한 곳이 우리 나라다. 남녀가 팔짱을 끼고 결혼식이라는 것을 마치자 말세니, 잡놈이니 하던 시절인데, 소리 소문 없이 한다면 몰라도 '나 이런 남자, 이런 여자와 결혼하니 오셔서 봐주시면 영광으로 여기겠습니다'하고 알렸으니 그 신랑·신부는 분명 범상치 않은 인물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우선 당시의 청첩장을 보기로 하자. 이 청첩장은 과감하게도 1920년 4월 10일자 <동아일보> 광고란에 그대로 실려 있다.
敬啓者 生等은 牧師 金弼秀氏의 指導를 隨하여 四月十日(土) 下年三時에 貞洞禮拜堂에서 結婚式을 擧行하옵나이다. 伊日에 尊駕 枉臨의 光榮 주심을 伏望. 庚申四月三日 金雨英 羅蕙錫
나혜석
출처: 문화콘텐츠닷컴(문화원형백과 신여성문화), 한국콘텐츠진흥원
한자가 들어 있지만 풀어보면 오늘의 청첩장 바로 그것이다. 처음에 경계자(敬啓者)라 한 것은 '삼가 말씀드립니다'라는 뜻이고, 김우영과 나혜석이 어떻게 결혼하겠다는 내용이 빠짐없이 들어가 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면 김필수 목사의 지도를 받아 결혼식을 거행한다는 것인데, 그 지도라는 것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주례가 김필수 목사인 것만은 분명한 듯하다.
무엇보다 이 청첩장은 신랑·신부가 김우영이고, 나혜석이어서 더욱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당시 두 사람의 결혼은 장안에 일대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신랑 김우영은 34세의 변호사로, 딸까지 둔 가장이었다. 신부 나혜석은 우리 나라 미술사에 최초로 여류화가로 기록되어 있는 여성으로, 당시 나이는 24세였다. 재기발랄한 처녀 화가와 변호사인 기혼 남자가 신랑·신부로 만나 결혼식을 하겠다고 공개 청첩을 했으니 요즘이라도 화제 중의 화제였을 것이다.
'천벌을 받아 죽을 놈' '목사도 미쳤지' '미친년이 따로 있었구나' 등등 화제는 주로 질타 쪽이었다.
김우영에게는 노모가 있었다. 그러나 '전실 자식과 시어머니와는 따로 산다'는 서약을 하고 나혜석과 결혼을 한 것이다. 결혼 조건에는 또 한 가지가 더 있었다. 신혼여행을 나혜석의 병사한 애인이 잠들어 있는 곳으로 간다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정말 신혼여행을 그곳으로 가서 비석까지 세우고 왔다.
나혜석 김우영 결혼사진
나혜석은 김우영과의 사이에 4남매를 두었다. 그러나 결혼 11년째 되던 해 파리 여행 중 그곳에서 만난 33인 중의 한 사람인 최린과 염문을 퍼뜨리자 이혼을 당하고 말았다. 그 직후 그녀는 '정조는 도덕도 법률도 아무것도 아니며, 오직 취미'라고 말했다.
나혜석을 시대의 편견에 몸부림친 한 예술가로서 인정해주지 않는다면, 그녀의 삶은 기껏해야 부정적인 도덕적 평가밖에 받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녀는 결국 40대를 넘기지 못하고 행려병자로 떠돌다가 비참하게 죽고 말았다. 그것은 윤리·도덕이라는 잣대로 예술혼을 철저히 묵살시킨 시대에 대한 무언의 항거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