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송주의 좋은 글 나누기> 등골나물
190823전라도닷컴[한송주 괴나리봇짐] 벌교 나철 유적지
한배검 얼 잇고 항일독립전쟁 선봉
아랫께 주막에서 역사선생님 했던 선배가 물었다.
“자네 봉오동전투라는 영화 봤능가?” “아뇨. 소문은 들었습니다만.” “그 영화 솔찬히 재밌데. 스토리도 과장 별로 없이 사실에 충실허고. 근디 봉오동전투 누가 이끌었는지 아는가?” “홍범도 장군 아니요?” “싸움이야 홍장군이 지휘했지만 진짜 대장은 나철 선생이지.” “아, 대종교 교주 그 양반...” “그 양반은 종교 지도자일 뿐 아니라 항일독립운동의 대부 격일세. 쯧쯧, 공부 좀 해. 공부해서 남 주소.”
그래서 이번 봇짐을 벌교 쪽으로 쌌다. 벌교 횡개다리(홍교) 지나서 보성 쪽으로 반 마장 지친 골에 홍암(弘巖) 나철(羅喆 1863~1916)선생의 유적이 있다. 전라도 보성군 벌교읍 칠동리 금곡마을. 나철선생 서거 백 주기인 2016년에 기념관이 서고 생가가 복원됐다.
기념관은 홍암의 유적과 유물이 전시된 홍암관, 홍암의 위패와 영정이 봉안된 홍암사, 대종교의 독립운동 발자취를 살필 수 있는 대종교독립운동관 등으로 구성돼 있다. 그리고 기념관 옆에 복원된 생가는 고아한 전통 기와집 두 채로 어우러졌다.
기념관 뜰에는 나철선생이 생전에 직접 지은 ‘예언시(豫言詩)’가 새겨진 빗돌이 서 있다.
‘을유년 7월 7일 일본은 동쪽 하늘에 떨어지고(鳥鷄七七 日落東天)/ 소련과 미국은 나라를 남북으로 분단하도다(黑狼紅猿 分邦南北)/ 공산주의와 외래종교가 민족과 국가를 망치고(狼道猿敎 滅土破國)/ 공산 자유의 극한대립이 세계를 파멸할지나 (赤靑兩陽 奔蕩世界)/ 마침내 백두산의 밝달도가 하늘 높이 떠올라(天山白陽 旭一昇天)/ 공산 자유 대립 파멸을 막고 홍익인간 이화세계를 이루리라(食飮赤靑 弘益理化)’
먼저 홍암관에 들러 선생의 생애를 조감한다. 문서와 사진 자료가 풍부하게 갖춰져 선생의 업적을 한 눈에 살필 수 있다.
나철은 1863년 12월 2일, 전남 낙안군 남장면 금곡리(지금의 보성군 벌교읍 칠동리 금곡마을)에서 나용집(羅龍集)과 송씨부인 사이의 3남1녀 중 2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나두영(羅斗永), 개명은 나인영(羅寅永)이고 아호는 경전(經田) 또는 홍암(弘巖)이며 본관은 나주(羅州)다.
일찍이 한학을 공부했으며 29세에 과거에 응시해 급제했다. 훈련원 부정자(副正字), 승정원 가주서(假注書), 징세서장(徵稅署長) 등의 벼슬을 살았으나 일본의 침탈로 국정이 혼란에 빠지자 관직을 버리고 귀향했다.
고향에서 선생은 본격적으로 항일독립운동을 펼쳤다. 1904년에 강진의 오기호(吳基鎬), 부안의 이기(李沂), 최전(崔顓) 등 호남 출신 지식인들과 함께 비밀 결사인 ‘유신회(維新會)’를 조직했다.
그리고 을사늑약(乙巳勒約) 직전인 1905년 6월에는 오기호, 이기, 홍필주(洪弼周) 등과 함께 일본에 건너가 일본의 한국침략에 반대하는 외교활동을 벌였다.
유신회원들은 일본의 정치 지도자들을 직접 만나 동양 평화를 위해 한, 청, 일 3국은 상호 친선 동맹을 체결하고 한국에 대해서는 선린(善隣)의 교의(交誼)로써 협조할 것을 제의했다. 일본 정계가 이를 외면하자 황거 앞에서 단식농성을 하기도 했다.
기어이 을사늑약이 체결됐고, 나철은 이철, 강원상(康元相) 등과 함께 을사오적암살단을 결성, 거사했으나 실패하고 만다. 이 사건으로 1907년 10년 유형을 선고 받았는데 고종의 특사(特赦)로 1년 후 풀려났다.
그후 나철은 구국운동의 일환으로 민족종교운동에 주력해 1909년 1월 15일 고려 때 명맥이 끊긴 단군교를 부활시켰다. 오기호 등 동지 10명과 함께 서울 재동에 ‘단군대황조신위(檀君大皇祖神位)’를 모셔놓고 ‘단군교포명서(檀君敎佈明書를 공포했다.
1년 뒤 대종교로 개칭하고 북간도에 지사를 설치했는데 신도수가 2만여 명으로 늘어나는 등 교세가 맹위를 떨쳤다. 한일병합 뒤에는 일제의 박해를 피해 교단을 만주 쪽으로 옮기고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이때 서일을 비롯한 대종교 지도자들이 군대를 조직해 전쟁의 선봉에 섰다. 청산리 전투, 봉오동 전투 등의 대첩도 대종교 지도자들의 활약으로 이룩된 것이다. 위협을 느낀 일제는 1915년 10월 ‘종교통제안’이라는 법을 만들어 대종교 탄압에 나섰고 10여 명의 순교자를 냈다.
이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나철은 1916년 8월 15일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에서 한배검(단군)에게 제천의식을 올린 뒤 순명삼조(殉命三條, 한배님께 제천하고, 대종교를 위하고, 한배님을 위하고, 인류를 위해 목숨을 끊는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조식법(調息法)을 빌려 스스로 숨을 멈췄다.
선생의 유해는 유언에 따라 대종교의 본산이 있었던 중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화룡시(和龍市) 용성향(龍城鄕) 청호촌(淸湖村) 작은 구릉에 있다. 여기에는 대종교 삼종사(三宗師)로 일컬어지는 나철, 김교헌(金敎獻, 1867~1923), 서일(徐一, 1881~1921)이 함께 안식하고 있다.
선생의 위패와 영정과 유묵이 봉안돼 있는 홍암사에 들어가 경건한 마음으로 절을 올리고 향을 피운다.
단아한 모습으로 주장자를 짚고 있는 선생의 영정 옆에 순명 직전 운필했다는 게송이 서늘하다.
‘생사(生死)는 몸껍데기에 있지 않고 신의(信義)만이 오직 맑고 밝게 빛난다.’
글 한송주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