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원제 : The Letter
1940년 미국영화
감독 : 윌리암 와일러
원작 : 서머셋 모옴
각본 : 하워드 코치
음악 : 맥스 스타이너
출연 : 베티 데이비스, 허버트 마샬, 제임스 스티븐슨
게일 손더가드, 프리다 아인스코트, 브루스 레스터
세실 캘러웨이, 빅터 센 융
싱가포르 인근의 어느 지역, 한 저택에서 6발의 총성이 울립니다. 총에 맞은 남자가 비틀거리며 뛰어나왔고 그는 계단을 굴러 쓰러집니다. 총을 든 채 따라나온 미모의 여인, 사람들이 몰려들고 이렇게 살인사건이 벌어집니다.
무슨 일이지 모르겠지만 한 남자가 총상을 입고 쓰러져 죽으면서 시작되는 영화, 언뜻 '선셋 대로'나 '밀드레드 피어스'가 연상됩니다. '밀드레드 피어스'와 비교하면 둘 다 사건이 벌어지고 그 원인을 복기하는 과정을 다루었지만 ''밀드레드 피어스'는 영화 전체가 사건의 복기과정이고 반전의 이야기가 있는데 비해서 오늘 소개할 '편지'는 미스테리하게 사건을 다룬 것 보다는 사랑과 욕망, 변호사의 양심과 고뇌 등 내면적 부분을 많이 다루었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거장 윌리암 와일러와 세기의 명배우 베티 데이비스가 함께 한 영화인 1940년 작품 '편지'는 유명작가 서머셋 모옴의 원작을 영화화 한 것입니다. 모옴의 이 작품은 1927년 브로드웨이에서 공연되었고, 이후 1929년 무성영화로 한 차례 영화화 되었습니다. 그걸 19년만에 윌리암 와일러가 유성영화로 다시 만든 것이죠. 인기가 있고 유명한 작품이라 유명 배우들이 등장하여 라디오 극으로도 여러차례 만들었다고 합니다.
싱가포르 인근에서 고무농장을 운영하는 크로스비(허버트 마샬)의 아내 레슬리(베티 데이비스)는 갑작스럽게 벌어진 살인 사건에 대해서 남편과 변호사에게 차근차근 설명을 합니다. 지인인 해먼드가 갑자기 찾아왔고 자신을 성폭행하려고 하자 급기야 남편의 총을 꺼내 우발적으로 그를 살해하게 되었다고 진술합니다. 크로스비의 절친인 변호사 조이스(제임스 스티븐슨)가 이 사건을 담당하게 되었고, 크로스비는 정당방위 무죄가 나올 것을 확신합니다. 일단 자수하여 구치소에 들어간 레슬리, 조이스는 사건을 조사하다가 레슬리가 해먼드에게 보낸 편지가 있었다는 걸 알게 됩니다. 더구나 그 편지는 레슬리가 살인을 저지른 바로 그날 보내진 것입니다. 레슬리가 진술한 사건의 원인을 완전히 뒤집을 수 있는 그 편지, 조이스는 레슬리를 추궁하여 결국 그 편지가 실제 존재했다는 자백을 받아 냅니다. 그 편지를 갖고 있는 사람은 죽은 해먼드의 현지인 아내였고, 조이스의 조수 옹은 그 편지를 돌려받는데 1만 달러라는 거액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절친의 아내의 변호를 맡게 된 변호사, 친구를 위해 그녀를 살리려면 편지를 찾아서 증거인멸을 해야 하고, 변호사의 양심대로 그냥 재판을 할 경우 편지가 원인이 되어 패소를 하게 되고, 레슬리가 사형을 당할 수도 있고, 레슬리 부부가 명목상 주인공이지만 실제로는 변호사인 조이스의 내면적 고민에 대한 비중이 높은 영화입니다. 변호사라는 직업, 의뢰인의 비밀을 절대 말할 수 없고, 양심과 도덕에 의해서 재판에 임해야 하지만, 또한 의뢰인을 돕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하는 직업입니다. 아마 변호사가 가장 괴로울 때가 의뢰인이 실제 유죄인데 그걸 변호해야 하는 입장일 때 일 것입니다. 이런 갈등이 잘 묘사된 작품이지요.
윌리암 와일러는 영화를 만드는데 있어서 철저히 감독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한 인물입니다. 훌륭한 원작을 가져와 유능한 시나리오 작가의 각색을 거치고, 역량있는 배우들이 연기를 하며 윌리암 와일러는 제작이나 연출에 집중합니다. 굉장히 분업화에 능한 인물이지요. 이 영화도 '카사블랑카' '요크상사' 등의 시나리오 작가 하워드 코치가 각색을 담당했는데 그 두 편의 영화보다 '편지'가 먼저 나온 영화입니다.
베티 데이비스는 윌리암 와일러와는 잘 맞는 배우였습니다. 1938년 출연한 '제저벨'로 아카데미상을 수상했고, '편지'이후 '작은 여우들'에서도 좋은 연기를 보였습니다. 하지만 워낙 촬영을 꼼꼼히 하는 윌리암 와일러이기 때문에 여러 차례 마찰이 있었다고 합니다. 특히 오프닝 살인 장면에서 해먼드 역의 배우는 8번이나 계단을 굴러야 했다고 하죠. 영화가 다 촬영된 뒤 와일러 감독은 주인공 레슬리가 좀 더 동정을 받는 분위기를 내야 한다며 전면 재촬영을 요구해서 베티 데이비스와 상당한 대립을 했다고 합니다. 또한 두 사람은 서로 은밀한 관계였다는 소문이 거의 기정사실처럼 돌기도 했습니다.
1930-40년대는 윌리암 와일러 감독이 흑백 스튜디오 드라마 장르를 주로 만들던 시기였고, 이런 영화들은 인간관계의 욕망과 갈등을 토대로 한 심도있는 내면을 잘 다루었는데 이 영화도 그런 패턴입니다. 특히 전말이 알려지는 중후반부에서 레슬리, 남편, 변호사 세 사람이 겪는 마음의 갈등이 집중적으로 펼쳐지지요. 여러 평단에서 높은 호평을 받았고, 아카데미 7개부문 후보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전체적으로 무난한 영화였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베티 데이비스를 묘사하는 윌리암 와일러의 연출이 아주 마음에 들지는 않았습니다. 30-40년대 영화들이 연극적 연기스타일이라서 과잉 연기가 좀 많은 편인데 이 영화는 오히려 살인 사건이 발생한 현장을 너무 태연스레 처리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특히 베티 데이비스가 너무 담담하고 태연한 모습이라 덜 실감이 났습니다. 상황 묘사를 살리기 보다는 여배우를 중심에 잡고 무대극처럼 대사연기를 시키는 느낌이었습니다. 숨겨진 진실이 밝혀지는 내용들의 장면도 다소 밋밋했고, 그래서 원작에 대한 의존도와 잘 구성된 화면에 치중한 영화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 시기의 윌리암 와일러의 다른 작품과 비교하면 다소 밑도는 작품 같았지만 영화적 재미는 상당히 있었던 볼만한 고전입니다.
어떠한 반전 보다는 감출 수 없는 비밀로 인하여 발생한 갈등과 무너져가는 관계를 짜임새있게 그려낸 영화입니다. 결국 회복되기 어려운 비극으로 달려가는 내용이고, 한 장의 '편지'가 모든 것을 좌우하는 중요한 주체가 됩니다. 베티 데이비스의 32세 당시의 아름다움을 최대한 화면에 잘 표현해준 영화인데 이런 걸 보면 윌리암 와일러가 당시 베티 데이비스에게 푹 빠진 느낌이 많이 듭니다. 그래서 아마 악녀보다 동정가는 여인처럼 묘사하려고 했던 걸까요?
ps1 : 해먼드의 현지인 아내로 등장한 게일 손더가드는 주로 이국적 여성을 많이 연기하는 배우입니다. '왕과 나'의 원전인 '안나와 샴왕'에서도 왕의 어진 아내 역을 연기했었지요. '편지'에서는 해먼드의 차갑고 냉정한 현지인 아내를 신비롭고 도도하게 연기합니다. 조연이지만 존재감이 상당했지요.
ps2 : 베티 데이비스와 허버트 먀살이 부부로 출연했는데 두 사람은 불과 1년뒤에 윌리암 와일러의 '작은 여우들'에서 다시 부부로 등장합니다.
ps3 : 편지를 회수하는 댓가로 지불한 1만 달러는 요즘으로 환산하면 50만 달러 즉 5억원이 넘는다고 합니다. 그런 거액인데 편지봉투 정도 크기에 들어가는 지폐 열장 정도네요. 화폐단위가 매우 컸는지.
[출처] 편지 (The Letter, 40년) 베티 데이비스와 윌리암 와일러|작성자 이규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