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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을 떠나는 임금의 비통한 심정을 그린
'통곡의 길'
트레킹지 | 영월 단종대왕 유배길 1코스 14.5km |
일 시 | 8월06일 (화요일) 07:00 출발 |
출발장소 | 동래지하철4번출구 (매일투어리무진) |
코 스 | 솔치재=>어음정=>역골=>술샘공원=>주천1교=> 주천3층석탑 => 금마대교(14.5km) |
걷는시간 | 5시간 |
회 비 | 4만5천원 (아침간식 생수 제공. 저녁없음 ) 선 입금계좌:121036-52-086597 농협 신일광(취소시 환불 없음) |
준 비 물 | 식수, 여벌의옷, 여름산행 준비물 확실하게 |
예약문의 | 010-9310-3975, 051-334-3975 |
** 차량진행방향: 동래지하철4번출구-세연정-만덕육교-부민병원-덕천IC도 | |
** 함께 하실분 예약 댓글로 예약받습니다 | |
** 차내 음주가무는 절대로 할 수 없습니다. | |
** 초보자도 환영합니다. | |
위 산행일정은 현지사정이나 산악회 사정에 따라 변경될 수 있으니 사전에 확인바랍니다. |
시작점 : 솔치재(원주시 신림면 황둔리와 영월군 주천면 신일리의 경계) ◇ 종 점 : 주천삼층석탑(영월군 주천면 금마리( 1262-3) 금마대교 원도 원주시 신림면 솔치재에서 영월군 영월읍 방절리 청령포에 이르는 조선 제6대 임금 단종의 유배길. 명칭 유래 1455년 조선 제6대 임금 단종이 수양대군 [세조]에게 양위한 후, 1457년 6월 박팽년, 성삼문 등이 단종 복위를 계획하였으나, 김질(金礩)의 밀고로 실패하였다. 세조의 측근인 정인지, 신숙주 등이 단종도 복위 모의에 참여하였다 하여, 단종은 1457년(세조 3) 상왕에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 되어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청령포에 유배되었다. 이후 세조의 동생이자 단종의 숙부인 금성대군(錦城大君)이 다시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 발각되어 죽임을 당하자 단종 또한 이에 연루되어 1457년 10월 강원도 영월군에서 죽음을 맞았다. 단종대왕 유배길은 한양에서 출발하여 강원도 영월군에 이르는 단종의 유배 행로 중 강원도 영월군 구간의 길을 2012년 강원도 영월군이 문화 관광 자원으로 재탄생시킨 것이다. 현 황 단종은 1457년 6월 22일 한양을 출발하여서 광나루에서 배를 타고 경기도 여주시 이포나루에 도착한 후, 육로로 강원도 영월군 관내에 진입한다. 단종대왕 유배길은 강원도 원주시 신림면 황둔리 솔치재 입구에서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방절리 청령포에 이르는 총 43㎞ 구간이며, 1구간 ‘통곡의 길’, 2구간 ‘충절의 길’, 3구간 ‘인륜의 길’로 구성되어 있다. ‘통곡의 길’ 솔치재~어음정~역골~주천삼층석탑에 이르는 10.5㎞ 구간이다. 솔치재는 원주시 신림면 황둔리와 영월군 주천면 신일리의 경계가 되는 곳으로 단종의 유배 행렬이 유배지인 영월군에 진입하는 첫 번째 장소라는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솔치재를 넘어 영월군 주천면에 도착한 단종은 마을에서 우물물로 목을 축였다고 하는데, ‘임금이 물을 마셨다’라는 의미의 어음정(御飮井)이 남아 있다. 또 강원도 영월군 주천면 신일리에는 보안도(保安道) 소속의 신흥역(新興驛)이 있었던 역골이 있었는데, 신흥역은 충청북도 제천시와 강원도 원주시, 강원도 영월군, 강원도 평창군으로 갈 수 있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단종의 유배길은 광나루에서 이포나루까지는 뱃길을 이용하였고 그다음은 육로를 따라 영월 청령포에 이른다. 광나루에서 이포나루까지의 거리는 55km로 행궁에서 하루를 묵은 뒤 사흘에 걸쳐서야 이포나루에 도착했다. 그 후 엿새간은 육로를 이용하여 유배지인 영월 청령포에 도착했다. 좋은 길을 두고 굳이 광나루에서 이포나루까지 뱃길을 이용한 것은 어린 왕이 귀양가는 것을 백성들이 보지 못하게 하려고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포나루부터의 육로는 여주에서 원주를 지나 영월까지 이어지는 구간이다. 여주에도 임금이 넘었다는 행치가 3곳, 물을 마셨다는 어수정도 있다. 원주에 들어오면 단종이 넘었던 고개는 시작에 불과했다. 원주에서 좀재.염터고개(부론면)를 지나면 단정[端亭]이 있다. 폐교된 단강 초등학교의 교목인 수령 600년 느티나무는 단종이 더위를 피해 쉬었다는 곳이고 여기에 정자가 있었는데 그 정자의 이름은 단정이라고 했다. 뱃재(원주시 귀래면 운남리~충북 제천시 백운면 화당리)운학재(백운면), 싸리치(신림면)도 넘어야 했다. |
단종유배길은 한양을 출발한 단종이 영월 관내에 들어온 이후의 행적을 따라간다.
전체 길이는 43㎞. 통곡의 길(솔치고개~주천 10.5㎞)과 충절의 길(주천~배일치 마을 17㎞),
인륜의 길(배일치 마을~청령포 15.5㎞)등 3개 코스다.
아무리 이팔청춘이라 해도 가마솥 같은 무더위에 100리에 달하는 험한 영월의 산길,
강길을 하루 만에 걷는 건 무리였을 터다.
그러니 그 길 곳곳에 얼마나 많은 단종의 땀과 눈물, 그리고 한숨이 배어있을까.
짧은 뱃길에
관광객이 한명이든 두명이든 테우고 건너다 준다.
조금은 미안한 생각마저 든다
삼면이 강으로 덮혀 천혜의 자연 감옥이다
지금으로 치면 중학교 2학년정도의 어린아이에게
예나지금이나 권력이 무엇이길래 어린아이에게 이런 고통을 주었을까
‘노산군이 세종이 임어하시던 자미당 창가의 난간을 보고 크게 탄식하기를,
할바마마께서 살아 계시다면 나에 대한 사랑이 어찌 적겠는가? 하니,
종자(從者)들이 모두 감격하여 울었다.’
<단종실록 12권, 단종 2년 11월 25일. 국편영인본 6책 712면>
역사서에는 그를 노산군 혹은 홍위(弘暐), 또는 휘지(輝之)라고 불렀다 한다.
그는 왕이었지만 왕이 되지는 못했다.
그를 왕이라 부르는 자는 여지없이 가문의 뿌리까지 뽑히었다.
삶의 그림자조차 제대로 남기지 못한 불운한 소년,
조선의 제 6대 국왕인 단종(端宗. 1441-1457)이다.
단종은 출생부터가 남달랐다.
태종(1367-1462) 이후 적장자(嫡長子)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것이
조선의 왕위 계승 원칙이었다고는 하지만
실제 적장자로 즉위한 왕은 조선을 통틀어 고작 7명에 불과하였다.
상황이 이러하다보니 단종은 적장자를 넘어 적장손 신분이었기에
더더욱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확실히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역사는, 권력은 하늘 끝을 찌르는 정통성이라는 명분보다는
칼을 쥘 수 있는 힘을 가진 자에게 돌아간다.
단종이 12살 어린 나이에 국왕으로 오른 때인 1452년에는 이미
할아버지인 세종, 할머니 소헌왕후, 아버지 문종과 어머니 현덕왕후마저
세상을 떠나고 없던 시기였다.
수렴청정조차 해줄 왕실의 어른도 없는 미래를 짐작이나 한 듯
세종대왕과 문종은 서거 전에 김종서, 황보인 등에
단종을 보필해줄 것을 간곡히 부탁하였다.
수령 600년 '관음송'…단종이 오열하던 곳
안쪽으로 더 들어간 숲속엔 유독 우뚝 서 있는 소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30m 높이의 이 나무는 단종의 한이 서려 있는 관음송(觀音松)이다.
현재 국내에 있는 소나무 중에서 가장 키가 큰 관음송은
1.2m 정도에서 두 개로 갈라져서 자라 학의 날개처럼 펴져 있다.
몇년 전부터 원주굽이길을 걸으며 알게 된 단종 유배길, 이제서야 그 출발점에 섰다.
원주굽이길에 속한 흥원창, 단정(단강리), 뱃재, 운학재(구력재), 싸리치를 지나서 영월에 이르는 단종의 발자취를 따라 꼭 걸어 보겠다고 생각했는데, 몇 년 만에 행동으로 옮기게 되었다.
단종의 유배길은 광나루에서 이포나루까지는 뱃길을 이용하였고 그다음은 육로를 따라 영월 청령포에 이른다. 광나루에서 이포나루까지의 거리는 55km로 행궁에서 하루를 묵은 뒤 사흘에 걸쳐서야 이포나루에 도착했다. 그 후 엿새간은 육로를 이용하여 유배지인 영월 청령포에 도착했다. 좋은 길을 두고 굳이 광나루에서 이포나루까지 뱃길을 이용한 것은 어린 왕이 귀양가는 것을 백성들이 보지 못하게 하려고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포나루부터의 육로는 여주에서 원주를 지나 영월까지 이어지는 구간이다. 여주에도 임금이 넘었다는 행치가 3곳, 물을 마셨다는 어수정도 있다. 원주에 들어오면 단종이 넘었던 고개는 시작에 불과했다. 원주에서 좀재.염터고개(부론면)를 지나면 단정[端亭]이 있다. 폐교된 단강 초등학교의 교목인 수령 600년 느티나무는 단종이 더위를 피해 쉬었다는 곳이고 여기에 정자가 있었는데 그 정자의 이름은 단정이라고 했다.
뱃재(원주시 귀래면 운남리~충북 제천시 백운면 화당리)운학재(백운면), 싸리치(신림면)도 넘어야 했다.
단종 유배길은 야사에는 700리(280km)라고 하는데, 그때 당시 대동여지도에 기준하면 뱃길과 육로를 합치면 약 150km (360여 리) 정도 된다고 한다.
이 중 영월군에서 영월 경계 내의 43km를 3개 코스로 하여 단종대왕 유배길을 만들었다.
1구간 '통곡의 길', 2구간 '충절의 길', 3구간 '인륜의 길'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 오늘은 1코스 '통곡의 길'을 걸었다.
찐빵으로 유명한 원주시 황둔 마을에서 다리 하나를 지나면 출발점이다. 이곳이 1코스의 시작점 솔치재이다.
출발지점은 행정구역상 원주시 신림면이며 솔치재 정상부터 영월군이다.
영월 보덕사 산신각 단종영정
단종대왕 유배길은 스토리가 있는 길인 만큼 길을 걷기 전 다 아는 얘기이지만, 단종에 대해서 잠깐 알아보고 가야겠다.
이곳 솔치재도 터널을 뚫어 예전 도로는 차가 거의 지나지 않는 한적한 마을길이 되었다. 원주의 싸리치는 일찍 터널을 뚫어 도로가 구불구불 임도로 남아 있어서 더 운치가 있었는데 솔치재는 포장도로를 따라 올라야 한다.
솔치재 정상이다.
여기부터 영월이다. 뒤돌아보니 원주 이정표는 있는데 영월 이정표는 없다.
솔치고개 정상에서 이정표는 우측으로 가라고 손짓한다. 고개를 들어보니 나지막한 산자락에 몽글몽글 연둣빛으로 물든 나무들이 몽환적인다. 넓은 공터와 정자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이 바로 단종이 영월에 들어서 처음으로 물을 마시며 쉬어 갔다는 어음정이라는 곳인가 보다. 어음정에도 긴 겨울이 지나고 연둣빛이 도는 봄이 오고 있다.
어음정을 둘러보며 살며시 배낭을 내려놓고 물 한 모금 마시며 그 옛날 단종이 쉬어갔던 것처럼 잠시 쉬어간다.
어음정 단종해갈지처'(御飲井 端宗解渴之處)'
어음정 앞에는 커다란 바위에 단종이 목을 축이신 우물임을 알리는 글이 새겨져 있다.
단종이 유배길에 물을 마셨다는 곳으로 여주시 대신면 상구리 '어수정'(御水井), 단종이 쉬어 갔다는 원주시 부론면 단강리의 '단정지(端亭止)' 등이 더 있다.
어음정을 지나서부터는 산길로 접어든다.
인적이 드문 산길은 비교적 넓고 계절 상 수풀이 우거지지 않아 걷기에 불편함이 없지만, 봄이 지나고 여름이 오면 수풀이 우거져 걷기가 좀 어려울 것 같다.
첩첩산중 산길은 대체적으로 유순하지만 오가는 이는 없고 바람조차 불지 않았는지 낙엽만 수북이 쌓여있다. 산속 군데 군데에는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남아있다. 폐가도 보이고 생활폐기물도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 보기에는 좋지 않다.
잘 정리된 계단식 밭과 집터로 보이는 곳을 지난다. 밭으로 보이는 곳엔 언제부턴가 곡식 대신 뿌리를 내린 나무가 빼곡히 들어앉아 있고 집은 온데간데없다. 나지막한 돌담에는 이끼만이 무성하다. 농경지를 버리고 떠난 이들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앙상한 나뭇가지를 헤치며 걷고 있는 깊은 산중에 멀리 밝은 빛이 감돈다. 가만히 보니 생강나무 꽃이다.
생강나무가 어찌나 큰지 그 꽃은 팝콘이 주렁주렁 매달려있는 것 같다.
새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적막한 산중에 개구리울음소리가 들린다. 점점 커지는 개구리울음소리.. 근처에 작은 연못에서 나는 소리다. 그 소리가 어찌나 큰지 궁금하여 다가가 보았다. 발소리가 들리자 갑자기 뚝 그친다. 신기하다.
깊은 산중에 개구리와 나.. 단둘이다.
아니.. 연못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개구리알이 수백. 수천 개가 둥둥 떠 있다.
앞으로 개구리 알은 더 태어날 것 같다. 사랑을 나누는 개구리들이 여럿 보이는 걸 보니.. 19금
농가 몇 채를 지나 내려오면 주도로 밑으로 나 있는 작은 통로를 빠져나간다. 여기서부터는 도로를 따라가야 하는 구간이다. 인도가 따로 없기 때문에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통로를 나가 기존 코스는 오른쪽으로 가게 되어 있었으나, 변경된 코스는 솔치재 방향으로 다시 올라가서 가야 한다. 잘 ~ 선택하시길~~~
산마루에 있어야 하는 이정표가 터널이 뚫리고 마을로 내려와 있다. 행정구역 개편이 되기 전에는 주천도 원주목에 포함되어 있었으니 크게 의미를 두지 않는 건가?
하기야 영월 주천 사람들은 읍내에 간다고 하지 않고 영월간다고 하였다. 마치 다른 지역을 가는 것처럼...
트랭글 앱 따라 걷기 실행 중이어서 기존 코스대로 국도를 따라 걸었다. 걷다 보니 대형 차들도 많이 오가고 인도가 없어서 정말 위험한 구간이다. 변경된 코스로 걷기를 추천한다. 1km 정도 국도를 따라 걷다 좌측 마을길로 접어들면 삼 형제 나무가 의좋게 서있다. 봄물이 올라 연두 연두 한 나무가 반겨주니 긴장했던 발걸음도 편안해진다.
이른 봄에만 볼 수 있는 자연의 색이다. 마치 갓난아기를 보는 것 같다.
사슴이다. 농장주께서 굳이 사슴을 보고 가라고 하신다. 낯선 사람이 다가오니 사슴들도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는 모습이 재밌다.
한가로운 시골 논두렁 밭두렁 길을 걸어 마을 어귀에 커다란 느릅나무와 정자가 나타난다. 이곳이 역골이다.
역골은 서낭당으로 1846년(헌종 12)에 세웠다가 1972년 수해로 인해 파손되어 지금은 느릅나무 2그루만 남아 있다.
1970년에 시작된 새마을운동 때 미신타파를 이유로 당고사가 중단되었으나 1985년부터 다시 정월 대보름날에 느릅나무가 있는 서낭당터에서 당산제를 지내고 있다.
주천의 주막집은 단종의 슬픈 사연이 깃든 장소이기도 하다. 당시 서인으로 강등돼 영월로 유배를 오게 된 단종은 주천을 지나다 날이 어둡자 머물 곳을 찾았다. 마을에는 관리들이 머무는 숙소인 ‘공순원’이 있었지만 서인 된 신분으로서 공순원을 이용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날 밤 단종은 어쩔 수 없이 인근 주막에서 나그네들 틈에 끼어 밤을 보냈다고 한다.
이 사진은 며칠이 지나고,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공수원 마을을 다녀온 사진이다. 단종이 유배를 가며 마지막 밤을 보낸 곳인데...
단종대왕 유배길에서 떨어져 있어 다녀오지 못한 곳으로 흔적은 없고 마을회관에 마음이 남아 있었다.
이 마을도 인구가 많이 감소하여 얼마나 유지가 될지 걱정이다.
단종 유배길을 걸으며 이 이정표를 볼 때마다 숙연해지고 마음이 착잡해진다.
지금도 이렇게 억울하게 귀향 가는 사람은 없는지?
역골을 지나 또다시 논두렁 밭두렁 길을 걷다 보면 저 멀리 망산 정상에 누각 하나가 보인다. 빙허루다. 현재의 빙허루는 1986년에 재건되었으며 한쪽으로는 올망졸망 모여있는 주천 시내와 주천강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곳에 있어 그야말로 힐링포인트다.
빙허루 아래쪽에 술샘공원이 있다.
술샘고을 조형물을 중심으로 작은 공터와 체육시설이 조성되어 있다. 이곳에 주차를 하고 망산 산림욕장과 빙허루에 오르는 등산로도 조성되어 있다.
망산 기슭에 자리 잡은 오래된 샘터가 있는데
'술이 솟아나는 샘'이라 하여 술샘 또는 주천(酒泉)이라 불렀다.
이 샘터에는 3가지 설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전설 따라 삼천리~라는 말이 있듯이 길을 걷다보면 그 지역에 전해내려오는 설화를 알아가는 재미가 있다.
술샘공원 옆으로 내려가면 주천강변을 따라 걷는 주천강 둘레길 데크길이 보인다.
술샘공원을 지나 주천1교를 건너며 아름답게 조성되어 있는 산책로와 섶다리가 보인다. 주천강 둘레길을 다 걸어도 좋겠지만 잠시 차에서 내려 섶다리만 밟고 가도 많은 것을 보고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왕이 되었을 땐 초등학생의 나이, 죽임을 당했을 땐 고등학생의 나이밖에 되지 않았던 단종의 발걸음을 생각해 보면서 말이다.
주천1교를 건너와 주천 3층 석탑에서 단종대왕 유배길 1코스 통곡의 길 걷기를 마무리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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