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사벌(比斯伐)-전주 이야기.
소생이 ‘서라벌 경주’ 기행문을 끝내고
같은 천년 도읍이고 역사 문화의 흐름이
서라벌(徐羅伐) 경주와 같다고 느끼는
고향 비사벌(比斯伐) 전주‘를
다시 살펴봤으면 하는 심정으로
사단법인 ‘호남문화 관광연구원’ 원장이며
전주 토박이이신 <전주학교> 이두엽
교장선생님의 <전주 이야기> 글을
조심스레 발췌, 사진을 삽입하여
첫 편 ‘들어가기’로 해서
소생이 겪었던 고향 얘기를
펼쳐 볼까 합니다만,,,
...........
전주는 나지막한 한옥 담장 햇살 가득한
골목길에서 오래전 잃은 '나'를 찾을 수
있는 곳입니다. 전주 막걸리를 마시면
네 번 취한다고 합니다.
첫 번째는 흥(興)에 취하고,
두 번째는 안주에 취하고,
세 번째는 맛에 취하고,
네 번째는 정(情)에 취한다는 뜻입니다.
막걸리뿐 아니라,전주에 오시면
네 가지 취할 거리가 있습니다.
첫째, 그리운 한옥 골목길이요,
둘째, 간장(肝腸)의 썩은 눈물을 토해낼 만큼
애절하고 '금세 숨이 탁 막히게 벌어지는
사랑놀이'처럼 흥미진진한,
옹골차고 푸진 우리 소리요,
셋째, 심성 고운 여인네들의 섬세한 손맛이요,
넷째, 천지만물에 깃든 한울을 공경하고
모시는 '전라도의 속 깊은 마음'입니다.
전주 출신 <혼불>의 작가 최명희는 전주를
'꽃심의 땅'으로 불렀습니다. 꽃의 심(心),
무엇인가를 간절히 바라면서, 기운을 다해
'꼿꼿이' 버텨온 땅이 전주입니다.
동학혁명의 중심지역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민주자치기구인
집강소가 설치되었던, 자유와 평등의 '꽃'이
한때 피었던 곳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삶의 근본이 되는
전통문화를 잊고 살았습니다만,
서라벌 경주에 버금가는 비사벌 전주가
고려 이후로 지금까지 열패 되어 있는
가운데도 힘겹게나마 민족의 전통문화를
껴안고 지켜온 도시가, 바로 여러분이
사랑하는 고향 '비사벌, 전주'입니다.
전주는 바로 우리가 새롭게 발견해야 할,
'오래된 미래'입니다.
전주는 전라도의 특정한 지역이 아니라
전통문화도시의 '보통명사'입니다.
전주에 이르면 톨게이트의 한글현판
<전주>를, 톨게이트를 지나 바로 시내로
들어가는 초입에 호남제일문을 만납니다.
이 문을 지나고부터
남원, 장수 쪽으로 쭈우욱 옛 비사벌,
지금의 전주 땅입니다.
전주향교는 조선유학의 손꼽는
중요한 기관이었습니다. 전주가
후백제 천년 왕도요, 조선왕조의
발상지였기 때문입니다.
500년 넘은 은행나무와 대성전,
통이 큰 건물 명륜당이 빚어내는
'아우라'는 '천년 전주'로의 시간여행의
문(門)을 열어 줍니다.
향교 쪽에서 동고산성과 남고산성을
바라보면 후백제 견훤왕을 봅니다.
<오목대 시조창과 전주비빔밥>
오목대는 황산대첩에서 왜구를 물리치고
개경으로 개선하던 조선 태조 이성계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전주에 들러 종친들을
모아 잔치를 벌인 곳입니다.
환한 낮 시간에는 판소리보다, 맑고
기(氣)가 넘치는 '시원한'
시조창이 제격입니다.
한옥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오목대 정자에서...
비빔밥은 화합과 상생(相生)의
철학을 바탕으로 머지않아
세계인의 음식이 될 것입니다.
<한옥마을과 전주한지>
태조로(太祖路)를 내려오면서
한옥마을을 바라봅니다.
7백여 채의 '도시형 한옥'이
밀집하게 된 배경에는
전주 사람들의 '자존심'이 있습니다.
일본인들이 들어와 서문 부근에 자리 잡고
상권을 장악해 가자, 이에 대한 반발로,
전주의 중산층들이 교동과 풍남동 일대에
집을 짓고 모여 살기 시작한 것이지요.
전주사람들의 기질을
'화이부동(和而不同)'으로 말합니다.
너그럽게 융합할 줄 알지만, 자신의 근본을
잃지 않는, '꼿꼿함' 같은 게 있습니다.
선조 재위 당시 정여립의 기축옥사 때
천명이 넘는 호남의 선비들이 처형을
당했습니다. 한마디로 씨를 말려버린 것이지요.
동학 때는 전북에서만 15만이 넘게
희생되었습니다.
화이부동의 기질이 만들어지게 된
역사이기도 합니다. 정여립과 동학의 정신은
'천하대동(天下大同)'의 사상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대동세상(大同世上)의 꿈'은
전주가 오늘의 시점에서 새롭게
조명되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천년을 가는 세계적인 '명품' 전주한지는
그동안의 오랜 잠에서 깨어나고 있고,
전주 합죽선과 전통가구, 전통악기,
옻칠공예 등도 소박하면서도 단아한
자태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검박하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나
사치스럽지 않은(儉而不陋 華而不侈)'
전주의 미학이지요.
전주한지는 임실 등지의 질 좋은
닥나무와 전주의 좋은 물이 함께
만들었습니다. '완판본'의 고장인 전주는
출판문화의 중심이었습니다.
전주는 완산(完山)이니 완판본은
곧 전주판본이지요. 한지가 있고
경제적 여유가 있었던 지역이었기에,
서민들이 완판본 <춘향전>이나
<심청전>을 사서 읽을 수 있었겠지요.
<전동성당의 건축미>
전동성당은 빼어난 건축미로도
유명하지만 비잔틴풍의 건축양식이
유입된 대표적 건물로 건축사적으로도
중요한 공간입니다.
천년고도 전주에는 4대 문이 있었습니다.
1907년 조선통감부의 폐성령에 의해
3 대문이 동시 철거되고 현재 유일하게
(풍) 남문만 남아있습니다.
풍남문은 천주교 순교자들의 목이
효수되었던 곳이며, 동학혁명군이
전주성에 입성한 관문이기도 합니다.
천년의 역사를 지켜본 풍남문
건너에는 전주 남부시장이 있습니다.
1905년 설치된 남부시장은 호남의 물산이
집결되는 경제활동의 중심지였습니다.
원래 지방에 가면 재래시장을
둘러보는 재미가 있는 법입니다.
백화점이나 24시 편의점과 달리,
덤도 있고 에누리도 있고
사람 사는 정(情)도 있는 것이
재래시장이니까요.
남부시장이 요즘 '젊어지고' 있습니다.
젊은 문화 장사꾼들이 시장에
들어가서 재래시장을 새롭게
바꾸고 있는 현장을 살펴보시는 것도 좋습니다.
<경기 전... 조선왕조 발상지>
아시겠지만 전주는 조선왕조의
발상지입니다.경기전은 그 탯자리입니다.
조선조 서거정은 <공부루기(拱北樓記)>에서
'아조선 근본지지(我朝鮮根本之地)'로 불러
전주를 '상서로운 곳'으로 높였습니다.
경기전에는 태조의 어진이 모셔져 있고,
임진왜란 때 유일하게 지켜낸
전주사고가 복원되어 있습니다.
전주사고를 지켜내지 못했다면
오늘날의 <조선왕조실록>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경기전의 대나무 숲과 등 굽은 매화나무,
그리고 능소화는 전주시민의
마음을 여유롭게 합니다.
한옥마을 골목을 걸어 가까이
만나는 최명희 문학관이 있지요.
한옥마을에서 태어나 자란
고(故) 최명희(1947~1998) 선생은
'생(生)을 다해' 대하소설 <혼불>을 썼습니다.
<혼불>은 우리 민족어와 전라도 민중의 삶이
담긴 거대한 '공동체문화의 보고'이기도 합니다.
<감칠맛 나는 전주음식, 울림이 깊은 판소리>
원래 전주음식은 궁중음식과 연관이 깊어서,
남도음식에 비해 맵거나 짜지 않고 어느 면
에서는 담백합니다.
거문고 산조와 판소리, 대금 산조를
들으시면서 우리 음악, 우리 소리가
얼마나 사무치는지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판소리는 인간이 낼 수 있는
가장 크고 울림이 깊은 소리이며,
가까이에서 듣는 거문고 산조는 오래도록
'가슴에 남는' 귀(貴)한 소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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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럼 여그서 잠깐 명창 조상현 님의
단가 '사철가,
한 수 지긋이 감상허심서 쉬어가실까요.
전주에는, 난초와 시와 술을 사랑하셨던
시조시인 고(故) 가람 이병기 선생이 사셨던
양사재나 아세헌, 동락원, 풍남헌 그리고
한옥생활 체험관 같은 품격 있는 한옥 민박집이
여러 곳에 있습니다. 뽀송뽀송한 이불을 덮고
'한옥에서의 하룻밤'을 청해보시기 바랍니다.
전주막걸리가 생각나시는 분들은 부근에 있는
선술집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생활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이런 낙서들이 있는 허름한 목노에서
옛 가요 하나쯤 부르시는 것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콩나물국밥>
콩나물국밥은 전날 술을 많이 자신 분들에게
더 맛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콩나물 국밥과 함께 모주
(검은 설탕을 한약재와 함께 넣고 끓인
막걸리)는 꼭 한 잔 하셔야 합니다.
알코올 도수는 높지 않으니
속풀이로 생각하셔도 됩니다.
<장현식 고택과 한옥의 멋스러움>
전주향교 옆에 있는 기품 있는 한옥
장현식 고택(古宅)에 들러야 합니다.
고(故) 장현식 선생은 전북 김제에서
만석꾼의 아들로 태어나
항일독립운동을 수십 년에 걸쳐
지원한 독립운동가로, 해방 후에는
제2대 전북도지사를 지냈습니다.
일찍이 대동단(大同団)과 3·1 운동에
거금을 투입했고,고려대학교
(당시 보성전문) 본관을 짓는데
큰돈을 냈습니다.
1942년에는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기도 했으나
6·25 전쟁 때 납북되셨습니다.
고택의 마당에는 선생의 호(號)와 같은
한 그루 소나무[一松]가 있습니다.
한국적 '노블레스 오블리쥬'의
전범(典範)인 선생의풍모가 느껴지는
듯합니다. 고택의 뒷담 골목길을 거닐면서
한옥의 아름다움을 여러 각도에서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한옥 추녀의 선(線)이
왜 중국이나 일본의 선(線)과 다른지.
이 나라, 산하 (山河)의 다정(多情)한 선(線)과
왜 그리도 닮았는지...
차분히 생각하는 시간 되시기 바랍니다.
<금산사와 강증산 유적지>
금산사가 깃들어 있는 모악산(母岳山)은
'어머니의 품'과도 같은 산입니다.
동학사상과 증산사상의 모태가 된
신령한 산(山)이고, 21세기를 이끌어나갈
생명사상이 발원하는 땅이지요.
시인 김지하는 모악산 일원을 '21세기
생명사상'의 어머니의 품과 같은
곳이라 이야기합니다.
금구면과 원평면 일대에서 전봉준
장군이 어린 시절을 보냈고,
정여립 선생이 대동계(大同契)를
만들었으며,강증산이'천지공사'를 했습니다.
금산사는 또한 미륵신앙의
'성지(聖地)'와 같은 곳입니다.
백제 멸망 이후 '메시아'를 기다리던
민중의 한(恨)과 염원이 생명사상의 역동성
(力動性)으로 새롭게 일어서고 있습니다.
김제 지역은 여러 종교가 서로 어울려
화이부동(和而不同)하고
백화제방(百花齊放)하는 곳입니다.
일찍이 해월(海月) 최시형 선생은
부안에서 "이 땅에 새로운 문명의 꽃이
피리라"라고 예언했습니다.
개벽과 상생의 문화지대인
전북지역이 훗날 전 세계인이
그리워하는 '꽃심의 땅'이 될 것을
예견했던 것이지요.
<이두엽 교수 님 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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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글 꾸우욱 참으시고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다음은 소생의 발자국 따라
본 전주 이야기입니다.
첫댓글 一雲 님: ' 경주기행 끝버젼 - 비사벌(比斯伐) 전주 - 이야기 1 <프롤로그>'
경주 여행에 이어, '비사벌(比斯伐) 전주'에 대한 '이두엽- 호남문화 곤광연구원장의
전주 이야기' - 발췌 글과 사진들을 소개하신 장편의 글을 대하게 됩니다.
전주는 전라도의 특정지역이 아니라, 전통 문화도시의 보통명사란 이야기를 비롯해서
전주 톨게이트를 지나 시내로 들어가는 초입에 있는 호남 제일문과 이 문을 지나서 남원,
장수 쪽이 옛 비사벌, 지금의 전주 땅으로, 후백제 며 조선왕조의 발상지역이라는 점 ...
조선 태조 이성계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둘러 잔치를 벌린 梧木臺와 어진 ... 정여립의
옥사며 동학란에 희생된 전북의 아픈역사 ... 四大門 중 남아있는 南門, 전주향교, 한옥마을과
이곳에서 태어난 최명희 문학관, 가람 이병기가 살았던 곳, 독립운동가, 장현식 고택, 한옥
생활체헌관과 전주 막걸리를 비롯한 전주 전통의 향토음식 ... 천년역사의 세계적 명품인
전주 한지 ...금산사가 깃들어있는 母岳山등의 전주 소개글 ...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추워지는 날씨에 아무쪼록 건강에 유의하시고 안녕히 계십시요.
第善 어르신 !
날이 많이 추운데 안녕하신지요?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이리 꾸준히 추임새를 넣어주시니...
처음 경주 여행 편 올릴 때 늘그막(실례)
'시간 죽이기'로 젊을 적 여행지 느낌을
적어 보겠다고 말씀 드렸듯 긴 글을 올렸는데도
여차없이 다 보시고 성실하신 댓글 주시니
감사합니다..
내내 강녕하십시오.
一雲님: "비사벌(比斯伐) 전주 이야기- 1 ",..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美空ひばり가 열창하는 "誰が故郷を思わざる" 의 노래가사 처럼, 비사벌 전주를 생각하시는 一雲님의 애향심이 절절히 느껴지는 기행문이었습니다.
慶尙道라는 행정명이 慶州와 尙州의 두 지명에서 따왔고, 全羅道는 全州와 羅州의 두지명에서 따온 것이라는 말을 어디에서 들은 적이 있는데, 과연 전주는 전라도의 뿌리답게 유구한 역사와 많은 문화유산을 지니고 있군요.
서두에 나오는 "호남제일문"의 웅장한 모습에 우선 압도되었고 , 이어 화려한 전주향교의 은행 낙엽, 지난날의 영광을 오늘에 전하는 오목대의 늠늠한 모습, 비잔틴풍의 미를 그대로 지닌 정동성당, 그리고 용하게도 일제의 철거를 면한 풍남문의 모습 등등, 안방에 안자서 현장에 간 것처럼 구경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전주가 명문 전주이씨의 본관이고, 근세의 영웅. 이성계와 전봉준를 탄생시킨 곳이라는 것은 역사에서 배워 익히 알려저 있는 것이지만, 전주한옥마을, 전주비빔밥, 전주한지 등, 관광자원에 관해서도 보다 소상한 사실을 알게되어 좋았습니다.
이번 편이 프로로그 이니 후속편이 기대됩니다.
逸泉 어르신!
추위에 별고 없으신지요?
경주기행을 끝내고 ,,, 리얼하게 현장감 있는 자료가 없다보니,
소생이 자란 경험이 있는 땅 고향
전주의 묵은 자료로 이바구 해볼 요량으로 올렸습니다.
이토오 은인 참배가 연이 되어 부끄럽게도 소생의 신분, 사고 등이
반 이상 까발려져 못나게도 자랑 만 늘어놓는 허언 넋두리 같아졌습니다. 부끄럽습니다만 이왕지사 이리된 이상 자랑도 할 겸 소생의 과거지사로
이바구를 엮어 가겠습니다.
아름답게 봐주셨으면 합니다.
내내 강녕하시옵기를 기원합니다.
일운 님
전주하면 옛이름이 완산으로 알고 있던 터에 비사벌이라고 하니, 서라벌을 검색해 보니 경남 창녕의 옛 지명도 비사벌이라고 하네요. 일제와 독재에 항거했던 신석정 선생의 고택을 비사벌초사라고 이름을 붙인 데서 전주와 창녕 간에 논쟁이 일어난 모양인데,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진흥왕 16년(555년) 때에 비사벌(比斯伐)에 완산주를 설치했다고 기록이 나옵니다. 여기서 양쪽 간에 논쟁이 일어난 모양입니다. 역사에 무지한 소치로 완산주는 신라가 아닌 백제에 있는 완산일 터인데?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게 됩니다.
전주에 들어서면 누구나 湖南第一門에 마주칩니다. 자연히 명동에서 먹던 전주비빔밥이 떠오르고 가정식백반이 생각납니다. 무엇보다
이두역 교수의 전주 이야기를 의미 깊게 읽었습니다. 다음 편을 기대하며 끝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goldwell 어르신!
추위에 별고 없으신지요?
박학다식 하심은 나름 눈치 챈 바, 이번 댓글에서도 느낍니다.
비사벌의 명칭은 소생이 창녕 成哥로
젊은 적에 시조 어른 묘 참배 비롯
큰 집에 다수 들린 적이 있습니다.
소생의 불찰이겠으나 창녕 옛 지명이 비사벌인 것을 들어본 기억이 없사옵고 님의 댓글 보고 검색하니
매년 비사벌 축제를 크게 연다고
합니다. 덧붙여 은사이셨던 부안 고향의 신석정 선생님의 전주 거처 였던 비사벌 초사는
모교 바로 옆에 있었던 기억인데 ,,,
비사벌은 소생 아주 어릴 적부터 눈과
귀에 익은 이름으로 지금도 건물명 상점명에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소생의 개인적 경험이옵니다.
댓글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내 강녕하시옵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