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 잠언9:1-6
찬송가 528장에 ‘예수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 그 음성 부드러워
문 앞에 나와서 사면을 보며 우리를 기다리네.
오라, 오라 방황치 말고 오라
죄 있는 자들아 이리로 오라 주 예수 앞에 오라,’ 는 찬송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죄 있는 자들을 다 오라고 부르는 찬송입니다.
부르시는 음성을 듣고 주님께 나아오면 ‘사망의 그늘이 너와 내 앞에 둘리며 가리 우고,
죄 많은 세상을 떠나게 될 때 주님께서 영접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우리를 부르는 또 하나의 음성이 있습니다. 지혜입니다.
지혜는 물론 우리를 부를 수 있는 인격체는 아닙니다.
솔로몬은 지혜를 인격화해서 지혜가 우리를 부른다고 말씀합니다.
솔로몬은 잠언에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라고 여러 번이나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지혜가 우리를 부른다는 말은 하나님이 우리를 부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지혜의 부름뿐 아니라 미련한 여인의 부름이 또 있습니다.
이 부름을 13절 이하에서 볼 수 있는데 이 부름은 지혜의 부름과 대칭을 이루고 있습니다.
절수도 똑같이 여섯 절에 해당하고 부르는 곳도 성중 높은 곳으로 같습니다.
부르는 소리도 똑같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이리로 돌이키라”
서로 내게로 오라고 부릅니다. 그러면 행복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그 부름의 결과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지혜의 부름에는 생명을 얻고 명철의 길을 가게 되지만
미련한 여인의 부름에는 죽은 자들이 들어가는 스올에 있게 됩니다.
인생을 살아갈 때 우리는 여러 음성을 듣게 됩니다.
그 음성은 자기가 제일 명철하고 자기를 듣고 따르면 행복한 인생을 살아가게 되고
구원을 받게 된다고 그럴듯한 말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부름의 결과는 너무나 다릅니다.
어떤 부름은 명철과 지혜를 가져다주고 생명을 가져다주지만
어떤 부름은 멸망과 실패를 가져다주고 영원한 파멸을 가져다줍니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을 쓴 스티븐 코비는
‘일상이 행복해지기 위한 세 가지 선택’을 말합니다.
먼저는, 행동의 선택인데 뚜렷한 목표를 위해 계획을 세워 스스로 움직이는
능동적 선택을 하라고 합니다.
주어진 상황에 휩쓸려 어쩔 수 없이 살아가는 수동적 선택을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두 번째는, 목적의 선택인데 같은 일억을 벌어도 목적이 무엇이냐?
구제가 목적이냐 자기 소비가 목적이냐에 따라 행복도 달라진다고 합니다.
세 번째는, 원칙의 선택인데 살면서 만나는 불법과 부조리에 대해
반응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법을 어기고 남을 넘어뜨리면서라도 빠른 성공을 추구하는 사람은
행복과는 점점 멀어진다는 말입니다.
살아가면서 늘 직면해야 하는 선택의 과정에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 가
우리의 인생을 좌우하게 됩니다.
예전의 상업광고에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한다는 말이 있었습니다만
영적인 선택은 10년이 아니라 영생을 좌우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음성을 듣고 따르느냐 하는 것은 인생을 살아가는 자들에게
제일 중요한 결정이 아닌가 싶습니다.
솔로몬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지혜가 부르는 음성을 따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지혜의 음성은 무엇입니까?
1. 어리석은 자는 이리로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아갈 때 제일 중요한 것은 어떤 방향으로 어떤 길을 가느냐?
살아가는 방향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방향이 잘못되었으면
그것은 실패의 길을 재촉하는 것 밖에 안 됩니다.
유대인의 지혜서인 탈무드에 나오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나그네가 길을 가는 데 마차를 만났습니다.
나그네는 너무 다리가 아파서 태워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마부는 기꺼이 타라고 허락하였습니다. 나그네가 마부에게 물었습니다.
“나는 예루살렘까지 가는 데 예루살렘까지는 여기에서 얼마나 되나요?”
마부는 “이 정도 속도라면 30분 정도 걸리지요”라고 했습니다.
나그네는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조금 자고 일어나 보니 30분 정도 지났습니다.
“예루살렘에 다 왔지요?” 그러자 마부는 “여기서는 한 시간 거리입니다.”라고 합니다.
“아니, 30분 걸린다는 데 30분 왔으면 다 온 것 아닌가요?”
그 때 마부가 말합니다. “이 마차는 예루살렘과는 반대로 가는 마차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방향은 생각하지도 않고 아무 길로나 갑니다.
빨리 가는 것만 생각하고, 편히 가는 것만 생각하고 길을 떠납니다.
그러나 빠르고 쉬운 마차를 타는 것도 좋지만
바른 방향으로 가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우리가 지금 어떤 길을 가고 있는지를 생각하며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면 빨리 돌이켜야 합니다.
4절 말씀을 보면, “어리석은 자는 이리로 돌이키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단어가 돌이키라는 말입니다.
지혜로 돌이키고 하나님께로 돌이킬 때 거기에 생명이 있고 구원이 있다는 말입니다.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먼 나라에 가서
허랑방탕하게 사는 삶을 스스로 결정합니다.
얼마 있지 않아 그 삶은 실패로 돌아가고 아들은 거지 신세가 됩니다.
얼마나 가난한 지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를 먹으려고 해도
그 마저 먹을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미련한 여인의 소리를 좇다가 결국 이런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신세에서 벗어나 그가 살 수 있었던 비결은 아버지께로 돌이켰기 때문입니다.
창피하기도 하고 자존심이 허락하지도 않고 뵐 면목도 없었지만
아버지께로 돌아갈 때 살 수 있었고 죽음에서 생명을 얻을 수가 있었습니다.
어리석은 자가 살 수 있는 길은 ‘이리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아버지께로 돌아가고 지혜로 돌아가고 신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베드로와 가롯 유다는 누가 더 잘못했느냐?
경중을 논하기 어려울 정도로 큰 잘못을 범한 자들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죽을 지언 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큰 소리를 쳤지만 막상 위험이 닥쳤을 때는 어린 계집종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하고 나아가 저주까지 했습니다.
이 죄가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은 30에 팔은 죄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런데 베드로는 회복되었고 가롯 유다는 그것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는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하여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며 회개하고 돌이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롯 유다는 돌이키지 못하였습니다.
죄를 짓지 않고 사는 것이 중요하겠지만
그렇지 못하다고 하면 죄를 지었을 때 빨리 돌이키는 것이 또한 중요합니다.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라”(행3:19)
감사한 것은 우리는 지혜가 부르는 길로 이미 들어섰다는 사실입니다.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성자 아우구스티누스는 ‘비틀거리며 절며 바른 길을 가는 것이
꼿꼿이 서서 그릇된 길로 가는 것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때때로 우리의 길이 어려울 수도 있고 비틀거릴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른 길을 가는 것이 생명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걷는 자세를 보지만 하나님의 사람들은 가는 방향을 봅니다.
예수님은 유일한 길이기에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바른길을 가는 자입니다.
빨리 가려고 애쓰지 말고 바른 방향으로 가려고 애쓰시기 바랍니다.
한 번 믿음으로 정한 길을 바꾸지 말고
바르게 하늘나라를 향하여 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길을 갈 때 많은 미련한 여인의 유혹이 있겠지만 잘못된 유혹에 이끌리지 마시고
끝까지 최선을 다하여 생명의 길을 가실 수 있기 바랍니다.
2. 두 번째 지혜의 음성은 내 식물을 먹으며 내 혼합한 포도주를 마시라고 합니다.
어리석은 길에서 지혜가 부르는 길로 돌이켰다고 하면
이제는 지혜와 함께 식물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셔야 합니다.
중동 지방에서 식사를 함께 한다는 것은 우정을 나눈다는 의미가 있고 우리가 하나다,
특히 남녀가 함께 식탁에 앉는다는 말은 몸을 섞는다는 뜻이 있다고 합니다.
사울이 다윗을 사랑하고 아꼈을 때는 그와 식탁을 함께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다윗을 미워하고 적대시할 때는 식탁에서 쫓아내었습니다.
다윗이 요나단과의 우정을 생각하여 그의 아들 므비보셋을 사랑했을 때
므비보셋은 다윗의 식탁에서 함께 식사를 나누게 됩니다.
지혜의 부름에 응답하여 돌이켜서 함께 식물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는 것은
하나님과 지혜와 깊은 교제가운데 거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들을 예수님의 식탁 속에 초대하셨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탕자가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하였습니다.
살진 송아지를 잡는 잔치는 최고의 잔치입니다.
양이 아닙니다. 염소가 아닙니다. 늙은 소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살진 송아지는 최고의 맛을 의미합니다.
최고로 맛있는 고기 잔치였습니다.
먹고 마시는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 나라의 이치입니다.
사람은 무엇을 먹느냐 보다 누구하고 먹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가끔 좋은 사람들과 만나서 식사를 나누고 좋은 대화를 하게 될 때
참으로 행복하다는 느낌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먹고 마시는 것은 하나님과 우정을 맺고 싶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먹고 마실 줄 아는 사람이 지혜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식탁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대화하는 시간은 가장 귀한 시간이요
행복한 시간이요 축복의 시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 하나님의 식탁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을 기뻐 찬양하고
하나님의 좋으신 생명의 말씀을 듣는 시간입니다.
이 예배의 교제를 절대 소홀히 하시면 안 됩니다.
할 수 있는 한 많은 시간을 예배하는데 드려야 합니다.
성만찬에 참여하는 것이 또한 하나님과 교제하며 주님의 은혜를 힘입는 시간입니다.
기도와 말씀으로 주님과 교제하는 것이 또한 중요합니다.
기도하는 시간은 나와 주님과 일대일로 교제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시간입니다.
이 시간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
주님께서도 이 세상에 계실 때 기도하는 시간을 많이 가지셨습니다.
때로는 새벽 미명에 기도하셨고 때로는 철야하며 기도하셨고
때로는 산에 올라가 한적한 곳에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주님을 만나는 것도 너무 좋은 교제의 시간입니다.
예배로 찬양으로 기도로 주님과 교제하는 이 시간
주님의 즐거움과 기쁨과 행복이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3. 세 번째로 지혜는 어리석음을 버리고 생명을 얻고 명철의 길을 행하라고 말씀합니다.
지혜의 부르는 소리를 듣고 길을 돌이키며 지혜의 식탁에서 교제하는 것이 왜 중요합니까?
6절 말씀을 보면, '어리석음을 버리고 생명을 얻고', 생명을 얻기 때문입니다.
명철의 길을 걷기 때문입니다.
명철의 길을 걷는 것이 무엇입니까?
10절 말씀을 보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잠언서에는 이런 말씀이 18번이나 언급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잠언서를 삶의 지혜를 얻는 일종의 도덕책으로 보는 경우도 있는데
여러분, 잠언서는 도덕책이 아니라 생명을 얻게 하는 생명의 책입니다.
여호와를 알고 섬기며 구원을 얻게 하는 생명의 책입니다.
그러기에 지혜의 말씀을 듣고 돌이키며 주님을 알고 섬기는 자는 생명을 얻게 됩니다.
이것이 명철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반대로 말해서 어리석은 여인의 말을 듣고
지혜의 길에서 멀어진 자들은 멸망을 당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칠레 북쪽 아타카마 사막은 매우 건조한 곳으로
이곳의 연평균 강수량은 15㎜ 정도라고 합니다.
그런데 2015년 3월 어느 날 12시간 내내 비가 내렸습니다.
엄청난 양의 비가 한꺼번에 쏟아진 것입니다.
비가 그치자 척박한 땅 곳곳에서 싹이 돋아나기 시작하더니 꽃망울이 맺히고
몇 주 후에는 흙먼지뿐이던 사막이 온통 분홍색 꽃들로 뒤덮였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이 기적 같은 일을 보려고 찾아왔습니다.
많은 사진작가가 멋진 절경들을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눈으로 보면서도 마음으로 믿어지지 않는 놀라운 광경이었습니다.
그 후 비가 내리지 않자 꽃은 사라지고 다시 황량한 사막이 됐다고 합니다.
그러나 충분한 비만 내려준다면 아타카마 사막은 언제라도
아름다운 꽃들로 뒤덮일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창 2:7) 사람은 흙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비가 내리지 않으면 황량한 사막과 같은 존재가 됩니다.
그러나 그 사막 같은 마음에 예수님의 은혜의 단비가 쏟아지면
그 마음도 아름다운 꽃들로 가득하게 될 줄로 압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아타카마 사막같이 황량한 사회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정치권은 이념 분쟁으로 하루도 싸우지 않을 날이 없습니다.
분쟁의 골은 점점 더 깊어지고 있고 각자의 진영을 따라
반대편의 사람들을 악마화시키고 있습니다.
우리 국가와 사회뿐 아니라 우리 마음도 덩달아 황폐화되어가고 있습니다.
이 땅을 생명이 충만한 옥토로 변화시킬 수 있는 길은 무엇입니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의 은혜의 복음을 널리 전파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유일한 생명의 근원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십니다. 지혜가 우리를 부르십니다.
이 부르심에 응답하여 생명의 길로 축복의 길로 구원의 길로 나가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고난 속에서 드리는 감사 고린도후서8:1-6
오늘은 7월 첫 번째 주일로서 대부분의 한국교회가 지키는 맥추감사주일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맥추절을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맥추절은 이스라엘의 3대절기로 첫 번째 수확한 농산물을 가지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아주 중요한 절기였습니다.
농경시대가 아니고 보리나 밀 같은 여름곡식을 거의 재배하지 않는 시대에
구약에서 말씀한 맥추절을 지킬 필요가 있겠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맥추감사 절기를 없애기보다는
그대로 지키는 것이 더 좋고 옳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일 년의 반을 지내면서 이 때쯤에 지난 반년을 돌아보며
감사를 생각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우리의 삶은 ‘항상, 쉬지 말고, 범사’를 잊어버릴 때가 너무 많습니다.
지난 반년을 지내온 것도 하나님의 은혜인데
그 은혜를 잊어버리고 살았을 때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범사’가 무색할 만큼 크신 하나님의 은혜에도 감사할 줄 몰랐습니다.
그런 점에서 일 년의 반을 보내면서 지난날을 돌아보고 여기까지 인도하신 은혜를
깨닫고 감사를 드리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되어집니다.
그럴 때 감사를 회복하여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으리라고 여겨집니다.
기독교 치유상담학을 가르치는 교수의 글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국에 사는 한 교포 학생이 미국 전국 대학생 토론대회에서 1등을 합니다.
그 비결이 다섯 살 때부터 하루에 무조건 5가지 감사제목을 쓰는 습관을
갖게 했기 때문입니다.
저녁마다 하루를 돌아보며 감사제목을 쓰다보니까 생각을 많이 하게 되고
논리가 발달하게 되었습니다.
작은 일도 지나치지 않고 감사로 보고, 큰 것도 감사하게 되고, 좋은 일도 감사,
나쁜 일도 감사하면서 논리가 고도로 발달하게 되었다는 것이죠.
그래서 전 미국 토론대회에서 1등을 하고 유명대학의 초청장을 받아
전액 장학금을 받고 대학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5가지 감사의 습관을 들이면 다 전국 토론대회에서 일등을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한 가지, 감사하는 삶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축복하신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시편50편에 “감사하는 마음을 제물로 바치는 사람이 나에게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니,
올바른 길을 걷는 사람에게 내가 나의 구원을 보여주겠다.”(표준 새 번역) 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①감사하는 마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요,
②그런 사람들이 올바른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요
③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보여주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이 원수들의 모함을 받아 한 달 동안 하나님께 기도하지 못하는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한 달 동안 왕 외에 어떤 신이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 굴에 넣는 조서가
다니엘을 겨냥하여 선포된 것입니다.
이러한 왕의 조서가 발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니엘은 하나님께 드리던 기도를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어놓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여러분, 죽음을 담보하고 기도하면서 무슨 감사가 나오겠습니까?
그런데 다니엘은 감사하며 기도합니다.
아무래도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이제 죽어도 족하다는 생각에 감사하지 않았겠습니까?
이 모습을 하나님이 기뻐하셨고 하나님의 구원을 보여주셨습니다.
우선은 사자 굴에 던져졌지만 하나님이 사자의 입을 막으셨고
사자 굴에서 구원을 해 주셨습니다.
다니엘을 죽이려고 했던 원수들이 사자 굴에 들어갔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다니엘은 더 귀하게 쓰임 받았습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아멘.
오늘 맥추감사주일에 다시 한 번 우리의 잃어버린 감사를 회복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삶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두 번째 편지 중 일부입니다.
이 편지에서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을 섬기는 일에
동참해달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그 일을 부탁하면서 마게도냐 교회의 모범을 예로 들어 말씀합니다.
마게도냐 교회는 고린도교회에 비해 여러 가지로 부족했습니다.
교회규모나 재정이나 모든 것이 부족하였지만
그러나 성도를 섬기는 연보에 대해서는 너무나 풍성했습니다.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넘치도록 하는 마게도냐 교회를 언급하면서
너희들도 이 일에 동참하였으면 좋겠다는 말씀이 오늘 본문입니다.
오늘 말씀은 물론 성도들을 섬기는 연보에 대한 말씀이기는 하지만
감사에 적용해도 하등 잘못이 없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마게도냐 교회가 어떻게 연보를 하고 어떻게 감사를 하였기에
모범적인 교회로 선정이 되었을까요?
먼저는,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감사하였기 때문입니다.
2절을 보면,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하는 말이 나오는데요,
마게도냐 교회의 감사는 환난의 많은 시련가운데서 행해진 감사였습니다.
2절을 공동번역에서는 “그들은 환난을 만나 큰 시련을 당하면서도 오히려 기쁨에 넘쳤고 극심한 가난에 쪼들리면서도 많은 희사를 했습니다.”라고 번역합니다.
그들의 풍성한 연보와 감사는 극심한 가난에 쪼들리는 가운데서 행해진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더 귀한 것입니다.오장성교회 장로님 부부 간증
우리는 보통 풍성한 축복을 주셔야 감사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극심한 가난에 쪼들릴 때 어떻게 감사를 할 수 있느냐? 생각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감사는 ‘범사에’, 크신 축복을 받았을 때나 그렇지 못할 때나,
감사의 조건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언제나 감사하는 것입니다.
자기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음에도 감사하며 기도했던 것이 다니엘의 신앙이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감사’ 하였습니다.
감사의 대표적인 신앙인 중에 하나인 욥은 모든 재산과 자녀들을 잃어버린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감사를 드렸습니다.
여러분, 이러한 신앙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들은 나와 다른 사람이니까 가능하지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느냐?’ 고 생각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도 얼마든지 고난 속에서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이러한 감사신앙을 갖기를 원하십니다.
마게도냐 교회와 같이 극심한 가난 속에서도 풍성한 감사를 드리기를 원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고
그런 자에게 은혜와 축복을 베풀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처녀가 귀한 반지를 잃어버리고 집에 와서 화가 나서 어쩔 줄 모르고 불평을 합니다.
그녀는 반지 한 개를 잃어버림으로써 행복과 자존심과 생활까지 다 잃은 듯
끊임없이 원망을 쏟아놓았습니다.
이런 딸을 본 어머니가 웃으면서 이렇게 말해 상황이 반전됐습니다.
“얘야, 손가락을 안 잃어버린 것을 감사해라. 네 손가락은 그대로 있잖니.
손가락마저 잃어버렸으면 어떡할 뻔했니?
반지야 다시 살 수 있지만 손가락은 살 수 있겠니?”
그렇습니다. 귀한 반지를 잃어버리는 것은 불평거리요 원망거리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러나 그런 상황 속에서도 잃어버리지 않은 것에 대한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그것이 범사에 감사하는 삶이요, 모든 것이 없을지라도 드리는 감사요,
고난 속에서 드리는 감사입니다.
둘째는, 힘대로,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드리는 감사였기 때문입니다.
3절에 나오는 ‘힘대로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드렸다는 말은
마게도냐 교회의 감사가 적당한 감사나 억지로 마지못해서 하는
형식적인 감사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오히려 기쁨이 넘치는 감사, 더 드리지 못해서 아쉬워하는 감사였다는 말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성막을 지을 때에 백성들에게 필요한 예물을 가져오도록 합니다.
그때 백성들이 얼마나 많은 예물을 가져왔는지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성막과 그 기구들을 만들고도 남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일을 하는데 오히려 지장을 받는다는 말을 듣고
모세는 더 이상 예물을 가져오지 말라고 합니다.(출36장)
극심한 가난과 고난 속에서 힘대로 힘에 지나도록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드리는 성도들을 보면서,
더 이상 가져오지 말라고 말할 정도로 풍성하게 예물을 드리는 백성들을 보면서
하나님은 얼마나 기뻐하셨겠습니까?
힘대로,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드릴 수 있었다는 것은
기쁨이 아니면 결코 할 수 없는 감사였습니다.
기쁨이 있기에 즐거움이 있기에 가난 속에서도 풍성한 연보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마지못해서 억지로 드렸다고 하면 이런 연보는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9장에서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7절) 말씀합니다.
마음에 정한 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마음을 정할 때는 인색하거나 억지로 정하지 말고
즐거운 마음으로 기쁜 마음으로 정해서 드리라는 말씀입니다.
중국사기에 돈제일주(豚蹄一酒)라는 말이 나오는데 돼지 발굽과 술 한 잔이란 뜻입니다.
제나라 위왕이 초나라의 공격을 받고 조나라에 원병을 요청합니다.
위왕이 예물을 줘 조나라에 사람을 보낼 때 사절단인 순우곤이 왕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소신이 오면서 풍작을 비는 사람을 보았는데,
겨우 돼지 발굽 하나와 술 한 잔을 놓고
들과 밭에 오곡이 차고 넘치기를 기원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작은 것을 바치면서 원하는 것은 너무도 커서 기가 막힐 지경이었습니다.”
위왕은 크게 깨닫고 예물의 양을 엄청나게 늘렸습니다.
제나라가 순우곤의 지혜로 정병 10만과 가죽수레 천대를 지원받게 되자,
초나라는 싸우지 않고 물러났다는 데서 ^^돈제일주^^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작은 물건이나 정성을 가지고 큰 것을 구한다는 이 비유는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한 번 생각해봐야 할 내용이라고 생각되어집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얼마나 큰 것을 구합니까?
큰 것을 구하면서 하나님께는 아주 적은 것을 드릴 때가 없지 않아 많습니다.
어떤 좋은 일이 있을 때, 감사한 일이 있을 때 세상의 사람들에게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적은 것, 부족한 것을 드리며 감사하다고 할 때가 있습니다.
세상의 도움을 위해서는 힘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지만
하나님께는 적당하게 형식만 보이며 힘을 다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모습이 바뀌어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가 힘을 다하는 감사,
힘에 지나도록 하는 감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이름과 베풀어주신 은혜와 축복에 합당한 감사를 드릴 수 있기 바랍니다.
즐겁고 기쁨으로 자원하여 드리는 감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는, 마게도냐 교회의 감사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였기 때문입니다.
1절에 보면,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했습니다.
이 말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되는데요,
하나는, 마게도냐 교회가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한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이기도 하고,
또 한 가지는 이렇게 넘치도록 풍성한 연보를 할 수 있었던 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았기 때문이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두 가지 설명이 가능하지만 사실은 한 가지, 같은 내용으로 볼 수 있습니다.
마게도냐 교회가 극심한 가난 속에서도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은혜를 깨닫게 하시고 감사하게 하신 것이 또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욥이 크나큰 어려움을 당하면서도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분도 여호와시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이 모든 축복을 하나님이 주셨다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았기 때문에
그 상황에서도 감사할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요 내가 노력하고 애써서 벌었다고 생각하면
어떻게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감사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자가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맥추감사절은 지난 반년을 지켜주신 은혜를 깨닫는 절기입니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이 주의 크신 은혜임을 깨닫는 절기입니다.
풍성하게 먹고 마시며 풍성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는 절기입니다.
우리를 택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시고 구원을 주시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주시고 이 땅에서도 눈동자처럼 지켜주시는 은혜를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외에도 여러분 각자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절기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게도냐 교회의 감사가 오늘 저와 여러분의 감사가 되어야 합니다.
극심한 고난 속에서도 드리는 감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힘대로,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드리는 감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베풀어 주신 은혜를 깨닫고 범사에 감사하는 여러분의 삶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떠한 형편과 처지에서도 ‘감사의 씨’를 심어서 엄청난 하늘의 축복과
땅의 축복을 거두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감사하였기 때문입니다.
힘대로,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드리는 감사였기 때문입니다
마게도냐 교회의 감사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였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