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 101장면 - 한국 최초 파마 전기로 머리카락을 지지는 전발(電髮), 가격은 5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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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4.05.23. 15:14조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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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 101장면
한국 최초 파마
전기로 머리카락을 지지는 전발(電髮), 가격은 5원
요약 1933년, 국내 최초로 화신백화점 내 미용실을 개업해 파마를 해준 오엽주.
당시의 이른바 신여성인 이월화·김명순·문마리아·정애식·최예순 등이 최초라는 기록도 있음.
1937년 파마가 첫 선을 보이고 전기로 머리카락을 지진다고 해서 전발(電髮)이라고도 함.
파마 값은 5원, 당시 높은 금액이었으나 고객은 많았음.
파마머리가 상륙하여 유행할 무렵의 모습을 알게 해주는 여성잡지의 표지
월간 <여성> 1936년 10월호
우리 나라에서 파마를 맨 처음 한 여인은 누구일까? 파마가 첫선을 보인 것은 1937년이었는데, 당시엔 파마를 전기로 머리카락을 지진다고 해서 전발(電髮)이라 했다 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글로 쓸 때의 점잖은 표현이고, 아가씨들도, 부인네들도 일상생활에서는 알아듣기 쉽고, 말하기 쉽게 '지지고 볶는다'고 했다.
맨 처음 머리를 지지고 볶은 여성은 과연 누구일가? 이월화라는 기록도 있고, 김명순이라는 자료도 있다. 또 문마리아라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정애식이라는 기록도 있고, 최예순·윤성덕·서은숙이라는 기록도 있다.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그녀들은 모두가 당시의 이른바 신여성들로서 사회 일선에서 활동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월화는 영화배우였고, 김명순은 소설가였으며, 문마리아·정애식·최예순·윤성덕·서은숙은 모두 이화학당 출신들이었다.
또한 거기에 빠질 수 없는 것은 역시 기생들이었다. 지지고 볶는 것이 최첨단 헤어스타일이라는데 그녀들이 빠질 리가 없었다. 강향란은 그 대표적인 여성이었다. 파마의 원조는 그녀라는 주장도 있다.
그런데 한 가지 짚고 가야 할 것은 파마가 도입되기 전에 유행했던 헤어스타일이다. 그것은 곧 단발머리였는데, 1920년대 이 땅엔 단발머리가 대유행이었다. 미국 무성영화가 퍼뜨린 것인데 귀가 가릴 정도로 짧게 자르고 머리 가운데에서 가르마를 내 양편으로 빗어 넘기는 모습이었다.
당시의 파마는 바로 이 단발머리를 전기열로 지지는 것이었다.
파마가 들어오기 시작한 1937년을 생각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있는데, 바로 오엽주라는 여인이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1933년에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화신백화점 안에 미용실이라는 생소한 업소를 개업하고, 그곳에서 파마를 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최초로 자신이 먼저 파마를 했다는 확실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사진으로 남아 있는 1937년의 모습, 그리고 미용실을 개업하기 전후의 행적으로 볼 때 그녀야말로 이 땅에 파마 머리를 선보인 최초의 여성일 것이라는 추측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오엽주에 대해서는 그리 알려진 게 없다. 단지 <경향신문>에서 오랫동안 복식 담당 기자로 일해왔던 김유경씨가 그의 저서 「옷과 그들」에서 소개한 단면들을 통해 그 윤곽이나마 알 수 있게 되었다.
오엽주는 1904년 황해도 사리원 태생으로, 원래는 영화배우 지망생이었으나 일본에서 미용기술을 배우는 것으로 진로를 바꾸었다고 한다. 그녀는 미용실을 개업하기 전 쌍꺼풀 수술을 하고, 색깔 있는 안경을 착용했으며, 코르셋으로 몸매를 가꿀 줄 알았고, 굽 높은 구두를 신었던 장안의 유명인이었다.
타고난 미모에 사교술까지 있었던 그녀는 돈을 쓰는 데에도 거침이 없어서 가는 곳마다 화제를 뿌렸다고 한다. 그런 그녀가 파마를 시작하자 내로라 하는 여성들이 다투어 찾아와 머리를 맡겼다. 배우·무용가·의사·교사 등 이름만 대도 금방 알 수 있는 여성들이었다.
파마값은 5원 정도였다는데, 이는 금가락지를 사서 낄 수 있을 정도의 높은 금액이었다. 그래도 고객은 계속 늘어갔다. 특히 부유층 여성들이 줄을 이었다.
그녀들에게 파마는 가슴이 떨릴 만큼 경이로운 것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두려운 것이기도 했다. 파마를 하고 나면 대부분 미용실 밖을 몇 번씩 두리번거리곤 했던 것이다. 머리를 지지고 볶은 다음 선뜻 미용실 밖으로 나서는 여성은 강심장 중에서도 강심장이었다. 해가 넘어가 어둑해져야 미용실 밖으로 나가는 여인들도 있었다. 그것도 인력거를 부른 다음에.
그런 과정에서 본처와 첩이 미용실 안에서 마주쳐 대판 싸움을 벌이는 때도 있었다. 파마를 해주는 곳이 한 군데뿐이다 보니 있을 수 있었던 해프닝이었다.
오엽주는 한국전쟁 후에도 지금의 신세계 백화점 안에 미용실을 개업했다가 미국으로 이민, 87세로 작고했다고 한다.
그녀는 명실상부한 우리 나라 미용계의 선구자였다. 그녀가 선보인 파마라는 헤어스타일은 당시 세계적인 유행인 것만은 분명했지만, 오엽주의 경우에 있어서는 한국여성의 의식구조를 바꾸어놓았다고 할 만큼 획기적인 것이었다. 그녀의 파마는 훗날 단발령만큼이나 큰 파급 효과를 나타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