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초등학교,
아니지, 중앙국민핵교 때,
학교 담을 넘으면 경기전!
그 경기전을 지키던 공산명월 님에
(그때 꼬맹이들은 그렇게 불렀다.)
쫓겨 어린 우리들은 ‘걸음아,,’ 하고
도망쳤지. 근처에는
오목대(梧木臺)가 있었다.
또
맑디 맑은 전주천이 휘돌아 가는
바위에 세운 서늘한 한벽루(寒碧樓)가
있었지, 뿐 만 아니라, 전주향교,
풍남문과 번화가 남문통, 전동성당 그리고
'은행나무 골목'에 커다란 한옥들이 있었지!
이 범위가 지금은 관광 수입을 목적으로
잘(?) 정돈되어 전국으로 알려진
한옥마을이다.
..........
국민핵교에서 고등핵교까지 약 13년을
밀착해서 놀던 이곳을 홀로
‘옛 추억 밟기’를 해봤다.
흩어진 동무들, 변해버린 골목 풍경에서
옛 세월의 흔적을 찾으려 보니
아스라이 멀어진 세월 속에
가물거리는 어린 시절과
그 시절 파릇했던 젊음이 그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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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생 중고등 때에 비하면
깔끔하게 씻어진 자태다.
우리 세대가 주력이 되어 온 국민이
쌓은 경이로운 발전 70년
(Amaiging 70 years) 덕분이다.
오목대 언덕 기슭에는
육이오 전쟁 상처가
그대로인 함석 울타리 엉기성기
둘러댄 허름한 초가들이
옹기종기 처마를 맞대고 있었지.
거의 틀림이 없는 기억이다.
허름한 초가 옆으로 난 비탈길로
오목대(梧木臺)에 수도 없이 올랐고,
지금은 걷어 없어진 전라선 철로 터널에
들어가 한벽루 (寒碧樓), 전주향교에서
노닐다가
전주천 상류로 올라 각시바위,
서방바위에서 깨(홀랑) 벗고 마구잡이
개헤엄을 쳤다는 게 아닌가!
아~!
지금 누리는 이 풍요에서 뒤돌아보면 ,
상상을 넘는 생존의 밑바닥을
헤맨 가난의 세월이었다.
갑자기 안구 습도가 치솟는구나~!
참말 동어반복이네
금석지감, 격세지감
그야말로
桑田碧海다.
아 아~! 옛날이여
기럼 한옥 마을로.
우선 ‘선비의 길’로 들어섰다.
잘 알다시피 우리는 힘센 나라들 침략으로
역사가 무너질 아실아실한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고려 때부터 보면 외침은
평균 4년 건너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러나다.
지금까지 유유히 나라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각 시대 ‘권력 엘리트 패거리’들의
부패와 무능에 맞선 재야의 올곧은 선비와
대다수 민초, 백성들의 끈질긴 생존력이
큰 몫을 했다고 소생 나름 생각한다.
참된 선비들은 세상에 나가고 물러감에 있어
올곧음을 앞세워 불의에 저항,
세상을 바로잡고자 했다.
참 선비는 권력의 중심에 나갔을 때는
일신의 영달보다는 인(仁)과 의(義)를
실천하려 했다고 배웠다.
일본에 사무라이(侍, 武士) 정신이 있고,
서양에 신사도(紳士道) 정신이 있다면
우리에게는 선비(士) 정신이 있는 것이다.
한지를 바른 창문, 기와 황토담과
지붕 처마선을 보라!
한국적인 너무나 한국적이지 아닌가!
우리 철없이 놀던 때는 이리 깔끔하지 않고
군데군데 파이고 빛바랜 담이였지.
‘전주 대사습놀이’가
지금이야 유명하지만, 그 옛날이야
그런 놀이 이름이 있는 줄 몰랐다.
그 유명한 ,, 쑥대머리‘의 국창 임방울도
여그 전주서 청을 텄다고들 하지만,
전주 천변에 접해있는 남부시장에 드는
매곡교 다리 밑에 허름한 천으로
천막 친 무대에서 노상 판소리야,
시조창이 흘러나왔고 한 마장이
끝나면 동동구리무, 이명래 고약 등을
든 약장시가 관중석을 한 바퀴 돌았다.
우리 코흘리개들은 천 주변 자갈밭에
앉아 입 벌리고 깐에 자갈 장단 두드리며
’얼씨구나!‘ 험서 고수(鼓手)한다고
까불대고 있었지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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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시 적 경기전 옆을 지날라치면
반쯤 허물어진 허름한
담 너머로 낭낭 허게 여러 사람의
공부 소리 청이 들렸지롸.
지금 생각히봉게 산다는 게 말이시,
'기냥 휙~ 불고 지나가는 바람 가터 잉!'
’아~! 옛날이여 ‘.
증말 한적하고 보잘것없던
이곳이 유명 관광지로 바뀌고
외국인들도 들리게 되다니!!
상전이 벽해 되어버린 격세지감이다.
대여 한복을 입고 한옥 골목길을
걷고 있는 한쌍의 젊은 연인(?)
우아하다.
기와담 위에 운치 있게 핀 이 꽃.
사철 채송화란디,,,
기전대학이면 신흥학교와
예수병원과 함께
미국 남장로교가 세운 학굔디,,
한옥생활 체험관인 동락원을 세우고
운영하는 게 워째 부자연스러웠다.
최담 선생 고택.
그런데,
이전 안내?
소생 대가리론 ,,,
뭘 전하려는 건지????
거그다 연락처는 뭔지?????
좀 더 들어가면 동기 시인이 문재를 알아채고
문단 등장을 강하게 권유한 혼불의 작가
연고 터에 세운 문학관.
전주판 '토지', 아니지 박경리의 토지가
통영판 '혼불' 가터 잉! ㅎㅎㅎ
어라? 한옥마을 관광 핫포인트에
동학의 33 걸 전봉준, 손화중
그리고 김개남 대형 사진이 보이는
저 건물이 동학혁명 기념관이라!
,,,.... 까까머리
가난티가 줄줄 흘러서
포도청 해결이 초 급선무였는디,,,,
전통문화의 ’文化‘ 두 글자가 어디
끼어들 수 있었겄드라구! 앙 그려~?
소생 어림 기억이나 필시 을씨년스럽고,
비루먹은 잡개나 여기저기싸 논 인분
찾아 나돌아 다녔던 장소였다.
.........
동학과 전주, 특히 남문통- 울 동네와는
관련이 깊다.
동학 농민운동은 한국민주화운동의
뿌리이자 정신적 초석이라고들 한다.
4.19 의거, 5.18 광주민주화항쟁 그리고
평화 촛불운동 등이 그렇다고 생각된다.
부패한 지배세력과 사회적 모순에 대항하여
민중이 어떻게 대응하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또렷한 경험이자 역사인 것을,,
소생들 세대는 기냥 간략하게 동학난이
있었다는 정도였고,,
할머니들이 기죽은 소리로 부르던
’ 새야 새야 파랑새야‘가 동학과 관련이 없는
그 시대의 민요인 줄 알았다는,, 내,, 참!
한심한 우리가 배운 역사 교육
’ 을사늑약‘을을사늑약‘ 일본이우릴 보호한다는
’ 을사보호조약‘이라고
갈수록 기막혀 볼갑쇼?
백제 부흥운동에 왜와 백제 연합군이
당과 신라의 연합군을 상대로
백마강으로 향하는 금강 입구에서
7세기 동아시아 최대 건곤일척의
국제대전, 백강전투가 있었다고 한다.
중국과 일본은 교과서에는 실려 있었단다.
소생이 고등학교 동기의 일본인 처에게서
처음 ’ 백강전투‘의 이름과 내용을 듣고서
받은 충격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혀서
’ 우리가 배운 역사는 정사가 아니다.‘는
타이틀로 동기들 카페에 올린 적이 있다.
아무리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 해도,
신라 유민인 고려의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에 이어, 일제 시의
경성제국대학 엘리트 패거리들의
식민사관은 너무 심했다고 생각 킨다..
(위 글은 6년 전 원본에 조금 덧붙여 지금 삽입한
소생 개인적 의견일 뿐임을 해량 바랍니다.).)
관군에 체포되어 바로 여기
전주 향교 옆 전주천의 한벽루(寒碧樓)
에서 즉결 처형됐다고 들은 김개남 장군
동학농민운동은
폭정의 벼슬아치를 없애,-除暴救民
나라와 백성을 평안케 하고, -輔國安民
일본을 비롯 침략 외세를 물리친다.-斥攘斥倭
의 깃발 드 높이고, 고부, 백산 기포를 발판으로
파죽지세로 전주성을 함락, 잠시였지만
울나라 최초의 민주정을 실시했던
주권재민, 즉 민주 정신의 수원지인 것이다.
집강소가 여기서 한 마장 정도 떨어진 풍남문
안 쪽이었다고 들었던 어렴풋한
기억이 떠오르며 의미 있는 장소에
기념관을 세웠구나고 느꼈다.
전국에서 온 관광객이
대여 한복을 입고 자유롭고
평화롭고, 한가하게 싸드락싸드락
발걸음을 옮긴다.
역시 우리 옷이다.
몰락한 황손 이석 씨.
기억이 맞다면 한 때 대중 가수로도 생계를
유지했었는디,
전주시가 여기 한옥 마을로 뫼셨구나!
지나다 눈에 든 한 한옥 입구.
조촐하고,아담허고,
은근하고, 소소허지만
품격이 있다.
한복 대여점.
전주의 모주도 파누나! 저거 에지간이 마셨다.
술도 아니라고 험시로,,
콩나물국밥 아니면 선짓국과 곁들이면,
아침 해장으론 그만이다.
고목의 뿌리에서 새싹이 돋아나
또 다른 한그루의 나무로 자라고 있는데,
혹시 누가 새로 심었나 하여 최근에
유전자 감식을 하였더니, 고목과 완전
일치하여 새끼목라는 것이 증명되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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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에 자신이 없으나 소생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한옥마을이란
명칭이 없었다. 이 노거수가
요 근처의 랜드마크가 되어
’은행나무 골목‘이라고 했지롸.
그때 친구 집이 이 근처에 있어 자주 놀러
다녀서 아래 내용은 기억이 뚜렷하다.
....
이 나무 밑동은 동네 쓰레기로
뒤덮여 있어 악취가 났다.
어느 날 이곳에서 조그만 단지 안에
유기된 영아 사체를 보고
놀란 기억이 생생하다. 그런데
지나는 행인들은 본둥만둥
아무렇지 않게 지나고 있었다.
몹쓸 6.25 전쟁 후, 뒤죽박죽의
어두운 우리 땅의 세월이었다.
아~아! 눈물 나는 옛날이여.
은행은 백과라 하여 항상 깨끗하고,
벌레도 생기지 않아 오래도록 보관되는
과실로 선비도 뜻을 오래도록
저버리지 말라는 의미라고.
한옥마을 안 전주의 명물 學忍堂.
대원군의 배려로 대궐을 짓는 대목장이
직접 전주로 내려와서 지었고, 모든 재목이
궁궐목을 갔다 썼고, 주춧돌이나 기둥 등을
대궐의 전각처럼 지었다.
일제 강점기 일인 관료나 갑부들,
또 광복 후 내로라하는 인사들이
매입을 하려 했으나,
지금까지 후손들이 꿋꿋하게
지켜 내려오고 있다 하며,
사랑채는 '전주고유문화 전수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시향토 사료에서)
조선시대 한양에 있던 출판사는 주로
한자로 된 책을, 지방에서 전주가 유일하게
한글 책을 발행하여 전주에서 만든 책들을
'완판본(完版本)이라 하였고, 심청전,
춘향전 등 이 완판본 책들은 한글 보급에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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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전 바로 앞
한옥마을 랜드마크인 전동 성당으로,
(주 : 3년 후 다시 찾은 사진 삽입)
까까머리 때 신자도 아니면서 집에서
가까워 자주 들려 놀았고 선종하신 조모님이
참 열심히 다니셨던 전동 성당.
아! 또 하나
선친이 수술을 받은 날 그 신새벽에
제발 살려주십사고
땀 흘리며 빌고 빌었던 추억도 있고..
여기 성당 뒷마당으로 와 자주 놀았다.
이제는 성호를 긋는 가톨릭 신자가 되어 보니
전주 전동성당이 건물 자체로도 대단한
유적이고
’ 살아서 건 죽어서건 가장 높으신 아버지를
배반하면 아무 데도 갈 곳이 없다.‘고 하며
이 성당 자리에서
한국 최초로 순교한 윤지충 바오로 등.
이곳이 한국 가톨릭 교회사에서 아주
큰 자리며 순례지인 걸 알았네.
울 동네가 새삼 자랑스럽다.
비사벌 전주의 4대 문 중 동문교회의 동문,
서문교회의 서문 글고 북문 교회가 있었던가?
여튼 문들은 죄다 없어졌고,
남문교회의 남문인 풍남문만 남아있다.
그러니께 울 앵경점빵이 있던
남문통의 남문이 풍남문이다,
그때는 저 2층의 본루 건물만 덩그랑게
있었고, 그 밑의 성문그늘엔 지게꾼들이,
좀 으슥한 곳에 인분들이,,,,.
양귀자 작가는 지금 어디 있는가?
소생 바로 아래 동생의 절친 양**군이
자주 울 집에 놀러 왔고,
작가는 그의 누이동생이였는데,
전주에서 서점을 운영한다고
들은 후 감감이다.
이 마당에
참새가 방앗간을 기냥 지나치길 바라야지.
술맛 땡기는 소생이 한 대빡 안 걸칠 수야,
하룻 나절을 옛 발자국 밟고 난 후 종결처.
초등, 중고등 동기요 이 카페에 가입케 하고
인터넷을 걸음마부터 가르쳐준
친구의 옛집이다. 고등 땐가
꽤 잘 살아 앞마당에 탁구대가 있어
공치러 가고자퍼 온갖 수모를
감내하며 참 많이 다녔다.
ㅎㅎㅎㅎ
- 넘넘 자랑거리 같은 긴 글로 귀한 시간을
허비케 하여 죄송스럽습니다.-
다음은
'오목대(이성계) VS 만경대(정몽주)'
편으로 갈까 합니다.
첫댓글 過猶不及이네요. 너무 긴 글을
나대며 쓰다 보니 Amazing 등 오자가 있네요.
스크랲판이라 수정이 안 돼
댓글로 양해 부탁드립니다.
一雲 님: ' 경주기행 끝버전 -고향 전주 이야기 2 <한옥마을>'
전주의 전주천 바위 위의 寒碧樓에서 바라본 전주 한옥마을의
발전 된오늘날의 모습... 梧木臺에서 바라본 전주 초등학교와
고등학교를 거친 약 13녀의 회상 ...
일본이 사무라이 정신이고 서양은 신사도라면, 우리는 선비의
정신이 깃드려 발전 곳이라는 자랑스러운 긍지며 ...
특히 최담선생의 고택, 承光劑는 우리도 잘 알고 있는 왕손
이석씨가 살고 있다는 사실도 새삼스럽게 느껴집니다 ...
우리의 전통 판소리 와 三笠優子 원창의 '人 生' 노래와 함께
'고향 전주 이야기 2 ' ... 소상하게 쓰신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이 해가 저물고 있습니다 만, 과세 잘 하시고 다복한 새해를
맞으시기를 두 손 모아 기원드리며 돌아갑니다. 안녕히 계십시요.
(어제는 우리 엔카 모임이 있었고, 오늘은 낡은 컴이라서 그런지
생각지도 않은 컴퓨터 오작동 때문에 방문이 지체된 점, 해량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第善어르신!
세밑 맹 추위에 별고없이 카페 모임도
치루셨다니 다행입니다.
고향 전주 이야기 2 <한옥마을>을 올리려
6년이 넘은 자료를 들추어 보며 다듬다
어려웠던 어릴 적과 젊은 시절이 회상되어
울컥 울컼 하여 눈시울에 손이 갔습니다.
어르신 님들 앞에 결례인 줄 아오나
'산다는 게 휘익 불고 지나는 바람' 같이
느껴졌습니다.
이리 찰나 같은 인생을 왜 악다구니 쓰며
남에게 이길라고 그 야단을 쳤는지 ,,,,
후회스럽니다.
댓글 고맙습니다
. 내내 강녕하십시요.
一雲님: " 고향 전주이야기2 한옥마을" 잘 읽었습니다. 잘 가꾸어진 한옥마을의 아름다운 모습 위에 님의 어릴적 추억을 더불시키면서 구수하게 엮어가는 이야기 솜씨는 역시나 입니다.
소생은 전주는 10 여년전에 사둔댁 행사 때에 한번 가본 이후로는 가보질 못했는데, 이 화보를 보니 엄청나게 변모되어 있구먼요. 그러니 그곳에서 유,소년기를 보내신 일운님의 감회야 오즉 하시겠습니까?
잘 다듬어진 사진을 겯드린 한옥마을 소개는 읽는 이로 하여금 소설가 양귀자의 " 고향예찬" 문이 과찬이 아님을 닙득하게 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逸泉 어르신!
師走의 세밑 추위에 별고
없으신지요?
주위에 겨울 고뿔에 시달리는
지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건강에 유념하시옵기를...
소생을 자그만치 6년 간 여여하게
이 카페에 붙들어 주고 계신
위 第善 어르신 댓글에 단 소생의
어설픈 답글과 같은 말씀을 드립니다.
덧붙이옵자면
때 지난 자료를 뒤적이다 보니
주위의 모든 것 심지어 지 고장의 역사도
잘 모르는 게 많아 건성 아는 양 한 게
부끄러워져 새로 공부하는 보람도 있습니다.
엄청난 정보량을
손쉽게 얻는 정보시대의 덕인가 싶습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아, 고향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