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육지략(蠻戮至樂 : 끝없는 노략질과 무자비한 살육만행을 즐긴다)
오랜 기간, 왜구가 자행한(저지른 – 옮긴이 잉걸. 아래 ‘옮긴이’) 한반도(코리아[Corea] 반도 – 옮긴이) 침략사는 인간으로서는 말할 수 없는 극악무도한 범죄행위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우리나라(한국/조선 공화국 – 옮긴이) 사료인 『 고려사절요 』, 『 조선왕조실록 』, 『 동국신속삼강행실도 』 등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들이 눈에 띈다.
“(왜구는) 2,3세 된 계집아이를 잡아서 머리를 깎고 배를 갈라 깨끗이 씻어서 쌀과 술을 차려 놓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좌우로 나뉘어 풍악을 올리며 늘어서서 절하였다. 제사가 끝난 뒤 그 쌀을 먹고, 술을 마시면서 그 아이를 불태웠다( 『 고려사절요 』 권 31, 「 신우[우왕 – 옮긴이] 」 6년 8월조 ).”
“우왕 5년(서기 1379년) 왜적이 진주에 침입하여 모두 도망하였다. 최씨는 왜적이 계속해서 마을에 들어오자, 자식들을 데리고 산 속으로 피했다. … 최씨가 계속 저항하자, 왜적은 최씨를 살해하고, 두 자식을 잡아갔다. 셋째 아이 정습은 겨우 여섯 살이었는데 시신 옆에서 울부짖었고, 갓난아이는 최씨에게 기어가 젖을 빨아 피가 입으로 흘러들어가더니, 역시 조금 뒤에 죽었다( 『 삼강행실도 』 ).”
“김씨는 … 임진왜란의 도적 무리가 갑자기 그 집에 이르러 데리고 가려고 하자 김씨가 아이를 안고 버그러뜨리고 쫓지 아니하니, 도적(왜군 – 옮긴이)이 머리를 베고 가니, 죽은 얼굴이 산듯하여 아이를 품에 안고 앉아 있었다( 『 동국신속삼강행실도 』 ).”
“대마도(對馬島)는 본래 조선의 영지였으나, 멀고 사이가 떨어져 있으므로, (우리 나라가 그 섬을 비워 두고 – 옮긴이) 왜놈이 거주하게 두었더니, 개같이 도적질하고, 쥐같이 훔치는 버릇을 가지고 경인년으로부터 변경에 뛰놀기 시작하여 마음대로 군민(郡民. 고을[郡]에 사는 백성[民] - 옮긴이)을 살해하고, 부형(父兄. [사람들의] 아버지[父]와 형[兄] - 옮긴이)을 잡아가고 그 집에 불을 질러서 고아와 과부가 바다를 바라보고 우는 일이 해마다 없는 때가 없으니, 뜻있는 선비와 착한 사람들이 팔뚝을 걷어붙이고 탄식하며, 그 고기(왜놈들의 살코기 – 옮긴이)를 씹고 그 가죽(왜놈들의 가죽 – 옮긴이) 위에서 자기를 생각함이 여러 해였다. … 우리 백성을 소란케 하며, … 그 은혜를 잊고 의리를 배반하며, 하늘의 떳떳한 도리를 어지럽게 함이 너무 심하지 아니한가( 『 세종실록 』 권 4, 원년 6월 임오조 ).”
“왜구들은 여자를 포로로 하면 (그들을 – 옮긴이) 간음하고 희롱한 뒤에 풀어주었으나, 남자의 경우는 어린아이는 모두 살해하였으며, 건장한 자는 머리를 깎아 왜노(倭奴. ‘종[奴]같은 왜놈[倭]’. 왜인[倭人]을 깎아내린 말 – 옮긴이)로 변장시키고 칼이나 창으로 무장시켜 전투가 벌어지면 맨 앞줄에 서게 하였다(田中 健夫[ 전중 건부/다나카 다케오 ],「 왜구와 동아시아 통교권[倭寇と 東アジア通交圈] 」, 『 일본의 사회사[ 日本の 社會史 ] 』, 岩波書店[암파서점/이와나미 서점], [서기] 1987, 162쪽 및 『 왜구토벌사 – 민족전란사 』, 국방군사연구소, [서기] 1993, 5쪽).”
피해자인 우리 측 기록뿐만 아니라, 가해자인 일본(왜국[倭國] - 옮긴이) 측 기록에도 악랄한 살인 행위는 물론(말할 것도 없고, - 옮긴이), 심지어 민간인인 남성들을(원문에는 “민간인 어린아이들을”이라고 적혀 있었으나, 그 문장대로라면 글쓴이[이자 지은이]가 인용한 기록 – 그러니까, “남자의 경우는 어린아이는 모두 살해하였으며,”라는 문장 – 과 글쓴이의 설명문이 서로 맞지 않아, 왜구들이 붙잡은 “남자”가운데 “건장한 자”를 “전투가 벌어지면 맨 앞줄에 서게 하였다.”는 기록을 좇아 이 부분을 “민간인인 남성들을”로 고쳤다 - 옮긴이) 인간 방패로 삼았다는 내용이 보인다. 왜구에 대한 강한 적개심은 중국(올바른 이름은 ‘제하[諸夏]’ - 옮긴이) 측 사료에도 잘 나타나고 있다.
“왜구(倭寇)는 관군과 백성들의 집을 습격하여 텅 비게 만들고, 젊은 사람들을 잡아가며 묘(무덤 – 옮긴이)도 파헤친다. (그자들은 – 옮긴이) 양민을 마구 죽여 (그자들이 지나간 곳에는 – 옮긴이) 해골이 산을 이루고, 피가 흘러 강을 이룬다. (그자들은 – 옮긴이) 어린아이를 기둥에 묶어 놓고 불을 질러 그 소리를 듣고 손뼉을 치며 즐거워한다. (그리고 그자들은 – 옮긴이) 임산부를 잡으면 남녀 아이의 임신 여부를 놓고 술 내기를 하여 (임산부의 – 옮긴이) 배를 갈라 본 뒤에 술을 마셨다.”
이처럼 왜구는 강도적 무력집단으로서(‘강도<인> 무력집단으로서’ - 옮긴이) 약탈과 방화, 살인 등 잔악한 행동을 일삼았다. 왜구는 무장 상인으로서의 일면도 보여주지만, 교역 활동이 불가능할 때에는 무장 강도 집단으로 변해 거침없이 무자비하게 약탈, 살인 행위를 일삼았다.
왜구와의 지속된 전쟁 국면은 ‘기한 없는 전시(戰時. 전쟁[戰]이 벌어진 때[時] - 옮긴이) 상태’와 같은 것이었다.
(서기 – 옮긴이) 1377년, 왜구는 고려(후기 고리[高麗] - 옮긴이) 수군을 기습하여 착량 어귀의 수상 통로를 장악하고 그 여세를 몰아 강화부로 진격했다. 그런데 당시 강화를 방어하고 있던 만호(萬戶. 후기 고리 충렬왕 때부터 둔 군대의 관직 – 옮긴이) ‘김지서’, 부사 ‘곽언룡’ 등은 왜구가 몰려오자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마니산으로 도주해 버렸다(달아나 버렸다 – 옮긴이).
이와 같이 강화부의 방어를 담당하는(맡는 – 옮긴이) 수장들이 앞장서서 달아나버리자, 왜구는 이렇다 할 큰 저항도 받지 않고 강화도를 점령한 뒤에 마음 놓고 노략질을 자행하였다(저질렀다 – 옮긴이).
왜구가 착량의 고려 수군을 격파하고(깨뜨리고 – 옮긴이), 강화부를 함락시킨 사실이 알려지자, 고려 조정은 큰 충격을 받았다. 착량과 강화는 고려의 수도 개경(오늘날의 개성 – 옮긴이)으로 통하는 수로(水路 : 물길 – 옮긴이) 교통의 요충지로, 개경의 관문인 예성강 하구를 견제할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왜구가 이 지역을 장악한다는 것은(손에 넣는다는 것은 – 옮긴이) 개경으로 들어가는 조운(漕運. ‘배로 실어 나르는[漕] 길[運]’ → 배로 물건을 실어 나름 : 옮긴이)을 포함해 모든 수상 운송을 완전 마비시킬 수 있는 것이었다.
(후기 고리의 임금인 – 옮긴이) 우왕은 ‘나세(羅世. 서기 1320년에 태어나 서기 1397년에 세상을 떠난 후기 고리의 장군. 몽골제국의 원나라에서 후기 고리로 귀화한 사람이다. 서기 1363년에는 후기 고리로 쳐들어온 홍건적을 깨뜨리는 공을 세웠다 – 옮긴이)’를 선봉장으로 내세우고, ‘이원계’, ‘강영’, ‘박수년’, ‘조사민’ 등으로 하여금 후속부대를 이끌고 강화로 진격하도록 하고, 도통사 ‘최영’의 부대는 승천부(昇天府)에 주둔하면서 돌발 사태에 대비해 도읍(개경 – 옮긴이)을 방비하도록 조치했다.
고려 조정이 강화를 점령하고 있는 왜구를 토벌하기 위해 이 같은 움직임을 보이자, 왜구는 강화에서 재빨리 철수하여 서해(다른 이름은 ‘황해’ - 옮긴이) 연해를 횡행하며(제멋대로 돌아다니며 – 옮긴이) 철저하고 무자비하게 살육과 노략질을 감행하였다. 왜구들조차도 무인지경과도 같은 이 지역 상황을 가리켜 이렇게 표현할 정도였다.
“(우리의 행동을) 아무도 금하고 막는 자가 없으니, (후기 고리의 서해안이 – 옮긴이) 참으로 낙토(樂土. ‘즐거운[樂] 땅[土]’ → 즐겁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땅 : 옮긴이)가 아니고 그 무엇이냐?( 『 고려사절요 』 권 30, 「 신우 」 3년 3월조)”
왜구의 만행에는 약탈적 근성이 큰 영향을 미친다. 왜구는 야만성과 약탈성, 잔인성에 있어 역대 어느 침략자들(예를 들면, 키타이 족이나 몽골인 – 옮긴이) 못지 않았다. 훗날 임진왜란(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근세조선 침략전쟁. 줄여서 ‘6년 전쟁’ 또는 ‘아시아의 7년 전쟁’ - 옮긴이) 당시(서기 1592년 – 옮긴이), (왜국의 – 옮긴이) 전국시대(서기 15세기 중반 ~ 서기 16세기 후반 – 옮긴이)를 통해 피에 굶주린 왜구들(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왜군[倭軍]들 – 옮긴이)이 조선(근세조선 – 옮긴이) 강토를 피로 붉게 물들인 것은 한일 간 오랜 구원(舊怨. 오래전[舊]부터 품고 있는 원한[怨] - 옮긴이)의 근원이 된다.
(그리고 메이지 유신 이후부터 시작된 근대 왜국 정부의 근세조선/대한제국 침략과 대한제국 점령/한국을 식민 지배한 일은 이런 ‘불’[그러니까, 배달민족의 반일감정]에 ‘기름[분노와 증오와 반감이 더 커지게 하는 일]’을 부었다. 오늘날[그러니까, 서기 21세기]에는 길거리에 나와 “<조센징>을 죽여라!”하고 시위하는 넷우익/재특회와, 혐한[嫌韓] 서적을 써서 팔아먹는 왜국 작가들과, 네이버의 자회사인 ‘라인[Line]’을 왜국 회사에 내놓으라고 윽박지르는 왜국 정부가 이 ‘불’에 ‘부채질’을 하고 있고! – 옮긴이)
임진왜란 발발을 알리는 선조 25년(서기 1592년 – 옮긴이) 4월 13일자 기사는 그 첫머리를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왜구가 침범해 왔다( 『 선조실록 』 25년 4월 13일조 기사 ).”
앞서 다룬 바지만, 우리는 이 기록이 의미하는(뜻하는 – 옮긴이) 바를 정확히 꿰뚫어 보아야만 한다. 일본(왜국 – 옮긴이)이 일으킨 전란의 주체를 특정 일본인 침구 세력이든, 국가(나라 – 옮긴이)가 주도하고 획책하는 침략 전쟁이든 조선 정사(正史)는 ‘왜구’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 ‘왜구’는 비법적/무법적/불법적인 모든 일본인 침략세력을 뜻하며, 이는 오늘날에도 적용된다고 본다.
(중략)
한반도(코리아[Corea] 반도 – 옮긴이) 분단과 그 수혜자(受惠者. 혜택[惠]을 받는[受] 사람[者] – 옮긴이)로 일본이 이룬 경제적 도약은 한민족(배달겨레 – 옮긴이)의 불행(6.25 전쟁 – 옮긴이)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임진왜란 시기(서기 1592 ~ 1598년 – 옮긴이), 조선 침략의 뜻을 이루지 못한 일본은 (그로부터 312년 뒤인 – 옮긴이) (서기 – 옮긴이) 1910년 (양력 – 옮긴이) 8월 22일 (대한제국의 황제인 – 옮긴이) 순종에게 ‘한일합방조약’을 강제 조인토록 협박했다.
조인식이 있던 날 밤, 축하연 자리에서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이 자는 나중에 첫 번째 조선 총독이 된다 – 옮긴이)는 득의만면(得意滿面. ‘뜻[意]을 얻어[得] 얼굴[面]에 [기쁨이] 가득함[滿]’ → 뜻을 이루어 기쁜 표정이 얼굴에 가득함 : 옮긴이)하게 다음과 같이 한일합방(이 명칭은 잘못된 것이고, ‘대한제국 멸망’이나 ‘근대 왜국의 구한국 식민지화’라는 말을 써야 한다 – 옮긴이)의 의미를 뇌이고 있다.
“고바야가와, 고니시(6년 전쟁에 참전한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 – 옮긴이), 가토(6년 전쟁에 참전한 왜장 가토 기요마사 – 옮긴이)가 이 세상에 있다면, 오늘 밤(서기 1910년 양력 8월 22일의 밤 – 옮긴이) 저 달을 어떤 마음으로 바라볼꼬?”
그 말에 통감부(조선총독부 이전에 대한제국 땅에 설치된 근대 왜국의 조직. 총독부의 전신[前身]이다 – 옮긴이) 외사 국장 ‘고마츠 미도리’도 다음과 같이 화답했다.
“태합(太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받은 왜국의 벼슬 이름. 태합은 왜국에서 ‘전하’, 그러니까 왜왕 다음으로 높은 명칭으로 불렸다. 이 글에서는 도요토미를 일컫는 말로 쓰였다 – 옮긴이)을 지하에서 일으켜 세워 보여드리고 싶구나. 고려는 산 위로 높이 솟는 히노마루(일장기)이다.”
데라우치나 고마츠가 입에 담은 인물들은 모두 임진왜란 때 조선 침략에 앞장섰던 왜구의 우두머리들이다. 도요토미도 이루지 못한 조선 병합(한국 점령과 식민지화 – 옮긴이)을 자신이 이뤄냈다는 회심에 찬 간악무도한 언사(言辭. 말 – 옮긴이)이다.
(이처럼, 근대에 근세조선과 대한제국을 침략하고 결국 대한제국을 점령해서 무너뜨린 근대 왜국의 관리들이 자신들보다 312 ~ 318년 전에 침략전쟁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그 부하 장수들을 칭송했는데, 그리고 ‘그분들이 못하신 일을 우리가 이루고 말핬다.’고 떠들었는데, 이래도 서기 1592년의 6년 전쟁이 ‘지나간 옛날 일’일까? ‘근대에 되풀이된 비극’이자, ‘언젠가 또다시 되풀이될 전쟁’이 아니고? - 옮긴이)
임진왜란 이래로 왜구는 1910년 합방 당시에도 ‘근대 왜구’로 활동했으며, 그 결과 조선(옛 한국인 대한제국 – 옮긴이)은 강점된다. (그리고 – 옮긴이) 해방 후 66년이 지난 오늘날(서기 2011년 현재 – 옮긴이)에도 여전히 ‘대(對) 왜구전’은 계속되고 있다(사실, 서기 2024년인 오늘날에도 그 싸움은 계속되고 있다 – 옮긴이).
- 이상 『 남왜공정(南倭工程) 』 ( 작은 제목 「 일본 신[新] 왜구의 한반도 재침 음모 」. ‘전경일’ 지음, ‘카인즈소프트 ㈜ 다빈치북스’ 펴냄, 서기 2011년 )에서 인용
- 단기 4357년 음력 5월 10일에, ‘지금 한국의 최우선 과제는 “왜국으로부터의 해방”과 “남북 사이의 휴전이 깨지지 않게 막는 것”이다.' 라고 판단하는 잉걸이 올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