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화유산(461)/ 스웨덴
비스뷔 한자 동맹 도시(Hanseatic Town of Visby; 1995)
고틀란드 섬[Island region of Gotland]에 있는 옛 바이킹 유적 비스뷔(Visby)는 12~14세기 발트 해 연안 한자 동맹[Hanseatic League]의 중심지였다. 13세기에 지은 성벽과 200채 이상의 창고, 부유한 상인들의 주거지가 있는 비스뷔는 북유럽에서 가장 잘 보존된 요새화된 상업 도시이다.
비스뷔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북유럽 중세 무역 도시의 뛰어난 전형으로 놀라운 완성도의 도시 경관과 수준 높은 고대 건물군을 잘 보존하고 있다. 이곳 건물은 이런 유형의 중요한 인류 정착지의 형태와 기능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비스뷔의 도시 구조와 전체적인 도시 경관은 이 유적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지리적 위치 덕분에 고틀란드는 몇 세기 동안 서유럽[슐레스비히, 프리지아, 영국]과 러시아 사이에서 발트 무역의 지배적 역할을 했다. 고틀란드 인은 처음으로 모피, 왁스, 타르, 목재를 러시아의 무한한 잠재적 자원으로 인식하여 러시아 중심부에 이르는 해안과 하천을 따라 무역 거래소를 설립하였다. 러시아 물품은 고틀란드에서 서유럽을 거쳐 슐레스비히, 프리지아, 영국으로 배로 운송되었다. 발굴 작업으로 비스뷔 유적이 초기 바이킹 시대의 교역 지구였음이 밝혀졌다. 이러한 교역 지구에서는 일련의 교역소(交易所)를 보호하고 그들이 통과하는 영토의 통치자와 맞서서[또 자신들의 경쟁자에 대항하여] 이익을 관철하기 위하여 동맹, 즉 한자(Hansa)로 함께 단결했다. 12세기에 비스뷔는 발트 무역의 지배자였고, 모든 발트 해 무역로가 이 도시를 통해 연결되었다. 발트 해로 관심 영역을 넓힌 독일 상인들은 나중에 발트 한자 동맹 중심지가 되는 비스뷔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독일인의 뒤를 이어 러시아와 덴마크 무역상이 들어왔다. 마을에는 길드하우스와 교회가 건설되었고, 항구를 따라 석조 창고가 지어졌다. 이전의 소규모 목조 건물은 13세기 동안 항구에서 동쪽으로 병렬로 늘어선 대규모 석조 건물로 대체되었다. 수많은 무역상이 이 무역 중심지로 몰려들어 주변 토지에는 교회와 길드하우스뿐만 아니라 주택도 지어졌다. 비스뷔는 소박한 고틀란드 마을에서 인상적인 국제도시로 변모했고, 튼튼한 방벽으로 둘러싸였으며, 점차 내륙의 농촌 지역에서 분리되었다. 1350년 흑사병 창궐, 1361년 덴마크의 점령, 1396년 ‘바이탈리안 형제들[Vitalian Brothers]’로 알려진 해적의 침입과 2년 뒤 이들을 몰아낸 튜턴 기사단[Teutonic Knights]의 점령 같은 재앙이 이어지면서 14세기에 비스뷔는 한자 동맹의 주도적 위치를 잃었다. 15세기에는 전쟁과 해적질이 끊임없이 발생하면서 발트 무역에 심각한 영향을 주어 비스뷔의 경제는 악화되었다. 15세기 비스뷔에는 이보다 더 큰 불행이 찾아왔으니 축출된 스웨덴 왕 포메라니아의 에릭[Erik of Pomerania]과 덴마크가 벌이는 오랜 전쟁의 중심지가 된 것이다. 에릭은 왕국을 되찾으려고 비스뷔를 본거지를 삼았다. 뤼베크(Lubeck) 군의 습격으로 도시 북부가 불타면서 비스뷔의 영광은 1525년에 끝났다. 이 지역은 13세기에 지은 중세 도시 성벽에 둘러싸였는데 14세기에 이르러 상당 부분 바뀌었다. 북쪽・동쪽・남쪽 길[선사시대부터 있던 것으로 추정]로 통하는 도시의 성문은 절벽부터 항구까지 이어지며, 비스뷔에게 특징적인 경관을 제공한다. 대체로 13세기부터 지금의 형태에 이르기까지 거리는 불규칙적으로 설계되었으며, 곳곳에서 갑자기 넓어지거나 좁아진다. 비슷한 거리 형태가 이후 바이킹 시대에 생긴 도시 중심부에 남아 있으며, 오늘날 도시 계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중세의 비스뷔에는 스웨덴의 다른 어떤 도시보다 교회가 많았다. 성벽 안쪽에 15개, 바깥쪽에 2개가 있었는데 교구 교회, 길드 교회, 수도원 교회, 병원 교회 같은 다양한 기능을 수행했다. 또 중세적 요소가 상당 부분 남아 있는 200채 이상의 세속 건물이 있다. 이 건물들은 크기와 형태가 비교적 비슷하다. 네모진 모양에 박공이 있는 5층~7층 규모의 건물이 거리 양쪽에 늘어서 있다. 꼭대기 층은 화재를 방지하기 위해 석재로 아치형으로 만든 곳도 있다. 장식은 드물게 사용되어 일반적으로 모퉁이 돌, 계단식 박공, 문 가장자리 장식으로 제한된다. 주된 자재는 석회암, 장식 요소를 넣은 벽돌, 타일 지붕이다. 이러한 중세 창고 가운데 가장 완벽하게 보존된 건물은 스트란드자턴(Strandgatan)에 있는 ‘옛 약국[Old Pharmacy]’이다. 이곳에는 1층과 꼭대기 층의 아치형 방, 지하 변소, 중세 우물 그리고 독창적인 문 장식, 창문, 틈새 구멍이 있다. 성 한스자턴[St. Hansgatan]에 있는 폰 링엔 저택[von Lingen's House]과 항구로 내려가는 좁은 거리에 있는 많은 건물이 유명하다. ‘옛 거주지[Old Residence]’와 스트란드자턴에 있는 부르마이스터 저택[Burmeister House]은 모두 17세기 중반에 지었는데 내부는 화려하게 채색되었다. 도시의 동쪽 지역에는 성벽 안과 절벽 밑으로 1740년대에 있었던 중세의 채소밭과 함께 수평의 판자로 지은 자그마한 집들이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17세기 후반에 섬을 떠나면서 덴마크 인이 파괴한 비스보리(Visborg) 성터에 스웨덴 특유의 양식으로 지은 18세기 후반 주택들도 마찬가지이다. 고틀란드가 스웨덴으로 반환된 뒤 100년이 지난 18세기에 비스뷔는 무역과 산업의 부흥기를 맞았다. 새 건물이 예전의 폐허 위, 절벽 위의 새로운 지역, 비스보리 성 주위에 추가로 지어졌다. 목재를 절약하려고 석조 건물에 세금을 면제했던 1757년의 스웨덴 법은 비스뷔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쳐 도시는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번영하였다. 19세기에는 학교・병원・감옥 등의 석조 건물을 새롭게 지었으며, 중심가 한곳에서는 소규모 상업 지역이 확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