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마리아 막달레나는 늘 예수님 바로 곁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어 드리고 온전히 죄를 용서받고서는
곧바로 예수님의 시중을 들었던 여인입니다.
예수님께 음식을 대접하는 것보다 그분의 말씀에 더 주의를 기울인 마리아는
주님의 가장 충실한 종이었으며,
부활하신 주님을 제일 먼저 목격한 은총의 여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아버지가 바로 우리의 아버지시며,
예수님의 하느님께서 바로 우리의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예수님께 직접 들은 여인입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생애 가장 중요한 순간에 늘 예수님과 함께했으며,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당신 부활의 순간에 그녀와 함께 계셨습니다.
함께 머무는 것은 사랑과 신앙의 여정에서 가장 중요한 행위입니다.
함께 머물러야만 평소 눈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게 되고,
상대방의 내면적인 모습, 신앙에서의 초월적인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있습니다.
회개의 순간에도 예수님의 발에 값비싼 향유를 남김없이 쏟아 부은 것은
그녀의 전 존재가 담긴 온전한 사랑의 표현이었으며,
그녀의 이런 사랑으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라는 생애 최고의
고백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마음을 돌려서 회개하고, 그분과 함께 머물며 온전히 자신을 바치는 것,
끝까지 실망하지 않고 그분께 최선을 다하는 것,
마리아 막달레나가 우리에게 보여 주는 신앙의 최고 모범들입니다.
주교회의 홍보국장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 2016,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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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대 신부
예수의 주검을 마음속에 묻은 성녀
오늘은 신약성서상의 인물이자 예수님 당대에 살았던 마리아 막달레나,
또는 막달라 여자 마리아의 축일이다.
마리아 막달레나!
막달레나는 그녀의 고향을 딴 이름이다.
성녀는 갈릴래아 서쪽에 위치한 막달라 지방 출신으로서 성녀의 이름은 단지 복음서에만
12번 언급된다.
그것은 마태오복음에 3번(마태 27,56; 27,61; 28,1),
마르코복음에 4번(마르 15,40; 15,47; 16,1; 16,9),
루카복음에 2번(루가 8,2; 24,10),
그리고 요한복음에 3번(요한 19,25; 20,1; 20,18)이다.
복음서에서 성녀를 언급하는 곳은 거의 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및 부활과 관련이 있다.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와 어떠한 관계에 서 있는 지에 대하여 정확히 기록하고 있는 곳은
루카복음에서 ‘예수를 도와 드린 여자들’의 명단을 기록한 대목이다.(8,2)
여기서 마리아는 일곱 마귀가 들려 시달리다가 예수님으로부터 치유된 여인으로 지목되며,
이 사실은 마르코복음에도 증언된다.
“일요일 이른 아침 부활하신 예수께서 막달라 여자 마리아에게 처음 나타나셨는데,
그녀는 일찍이 예수께서 일곱 마귀를 쫓아내어 주셨던 여자이다.”(마르 16,9)
이 점을 미루어 볼 때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는 예수님으로부터 구마치유를 받고
줄곧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다른 여인들과 함께 선교활동에 협조하였으며,
예수님의 마지막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증인이라 결론지을 수 있다.
종합하여 보면, 막달라 지방 출신의 마리아는 일곱 마귀에 들려 고생하다 예수로부터 치유되어
그분의 제자가 되었다.(루카 8,2)
그렇다면 예수의 제자단은 12제자뿐 아니라 여인들까지 포함한 큰 규모였음을 알 수 있다.
마리아는 여성제자단에서 중요한 인물이었고, 다른 여인들과 함께 재산을 털어
예수와 그 일행의 시중을 들었고, 그들의 의식(衣食)을 돌보았다.(루카 8,3)
마리아는 예수를 따라 모든 제자들과 예루살렘까지 갔다.
그러나 예수의 예루살렘 마지막 날에는 많은 제자들이 스승을 버리고 도망가 버렸지만,
마리아 막달레나는 다른 두 여인과 함께 예루살렘뿐 아니라 스승의 십자가 죽음 끝까지 따라 갔다.
(마태 27,55-56)
마리아는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이 예수를 장례 치르는 동안
줄곧 스승을 잃은 슬픔에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마태 27,61; 요한 20,11)
그녀는 경황이 없어 스승의 시신에 다 하지 못한 예를 갖추기 위해
안식일 다음날 새벽 동이 트기도 전에 다른 여인들과 함께 스승의 시신에 향유를 바르기 위해
무덤을 찾아갔다.
그 일로 그녀는 빈무덤의 첫 증인이 되었고,
예수부활에 관한 천사의 기쁜 소식을 맨 처음 들은 자가 되었고,
이 소식을 모두에게 전해야 할 사명을 받게 되었다.(마르 16,6-7)
요한복음은 부활절 이른 새벽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혼자 예수님의 무덤에 있었으며
그녀 혼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본 것으로 전한다.(요한 20,15-17)
마리아는 예수님의 살아생전뿐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의 현존에도 각별한 친분으로
함께 한 증인이었다.
마리아 막달레나에 관한 더 이상의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복음서를 읽다보면 헷갈리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복음서 여기저기에 등장하는 다른 ‘마리아’로서
그녀가 마리아 막달레나와 동일한 인물인 듯한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우선 요한복음에 의한 마르타와 라자로의 누이로서의 마리아인데,
이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아드린 적이 있다는 것이다.
(요한 11,1-2)
요한복음사가는 실제로 예수님의 예루살렘입성 바로 전, 마지막 과월절을 엿새 앞두고
라자로를 다시 살렸던 베타니아에서의 환영만찬에서 마르타가 시중을 들고 있던 중에
마리아가 나타나 매우 값진 순 나르드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닦아 드렸다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요한 12,1-8)
이 대목은 마태오(26,6-13)와 마르코(14,3-9)복음에도 똑같이 실려 있는데,
시기적으로 예수님의 최후만찬 직전에 있었던 사건으로 매우 신빙성이 있다.
가리옷 사람 유다는 비싼 향유를 아까워했으나 예수께서는 이 사건을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는 것으로 풀이하셨다.
문제는 루카복음이다.
루카복음에는 이 대목이 생략되었다.
그러나 루카복음에도 예수님의 갈릴래아 활동기 중에 이름 없이 죄인으로 묘사된 한 여인이
예수께 와서 그 발치에서 눈물을 흘리고는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향유를 발랐다는
기록이 있다.(루카 7,36-50)
여기서 이 여인은 예수께 행한 사랑의 행위를 통하여 자신의 죄를 용서받는다.
이 여인이 베타니아에 살고 있던 마르타의 누이 마리아(루카 10,38-39)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런데 후대의 사람들은 같은 마리아 막달레나로 본다는 것이다.
확실한 사실은 마리아 막달레나가 빈무덤과 예수부활의 첫 증인이며,
일찍이 일곱 마귀가 들렸던 여자라는 것이다.
(마르 16,9; 마태 28,1; 루카 24,10; 요한 20,1; 마르 16,9; 루카 8,2)
오리게네스(185-254?)는 마리아 막달레나와 마르타의 누이 마리아와
이름 없이 묘사된 죄 많은 여인을 모두 구분하였으나,
373년 시리아 출신 에프라임의 복음주석서에는 모두 동일한 인물로 주장되었고,
교황 대 그레고리오(540-604)는 이를 재차 확증하였다.
이후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에 관한 많은 이야기들이 만들어졌다.
동방정교회의 증언에 의하면 마리아 막달레나는 성모 마리아가 살았던 에페소에 살다가 죽었으며,
그녀의 유해는 899년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졌다고 한다.
독일에서는 13세기부터 뉘우치는 여인들을 위한 막달레나 수녀회가 창설되었고,
덴마크와의 전쟁에서 막달레나의 전구로 승리하였다는 것을 기념하여
‘뤼벡’이라는 도시가 건설되기도 했다.
14세기부터는 ‘멀리 서서 지켜보고 있던 여자들’(루카 23,49) 가운데서 마리아 막달레나를
예수님의 십자가 바로 아래로 끌어와 그린 성화들이 등장하였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뉘우치고 용서받고 구원받은 죄인으로 중세기 시인들과 화가들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1844년 프리드리히 헤벨스의 ≪마리아 막달레나≫나 1983년 루이제 린저의 ≪미리암≫은
이런 모티브를 사용한 대표적인 작품이다.
오늘 교회가 기억하는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가 과거 행실이 나쁜 죄인이었다는 주장은
그 정확성의 여부(與否)를 접어두고라도 교회적으로 볼 때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다.
그러나 죄인이 아닌 사람이 세상 어디에 있겠는가?
중요한 것은 마리아가 예수께 믿음과 사랑을 가졌었고, 이 믿음과 사랑으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받았다는 것이다.
누구든지 마리아처럼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으며,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발라드리는 극진한 사랑을 보인다면,
그 또한 그만큼 많은 죄를 용서받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예수님으로부터 죄를 용서받고 그분의 사랑을 받은 자는
예수님과 마지막까지를 함께 한다.
제자들은 예수를 버리고 모두 달아났지만(마르 14,40), 그는 십자가 곁을 떠나지 않고
예수님의 죽음을 아파하며, 그분의 주검을 마음속에 묻었다.(마르 15,40-41)
예수님의 시신(屍身)을 마음에 묻고 사는 사람은 더 이상 송장을 묻어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예수님을 품고 사는 사람이다.
죽음으로부터 예수님은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살아 계신 예수님을 마음에 품고 사는 사람은 매일 아침 부활한 예수님을 만나 뵈올 것이며,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부활의 기쁜 소식을 세상에 전하는 증인이 될 것이다.(요한 20,18).
부산교구 박상대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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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양 신부
오늘은 마리아 막달레나 기념일입니다.
막달레나는 성녀의 고향을 딴 이름입니다.
갈릴래아 서쪽에 위치한 막달라 지방 출신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제일 처음 만나는(마르16,1-8) 큰 은총을 받은 마리아 막달레나는
무척 죄가 많은 여인으로 전해집니다.
얼마나 죄가 많았으면 루카복음 저자는 그녀 몸 속에
마귀가 일곱 마리나 들어 있었다고 전합니다.(루카8,2)
그런데 이렇게 손가락질 받던 죄 많았던 여인,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을 만나면서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몰라보게 달라졌을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다 바쳐 예수님을 섬기는 제자가 되지요.
예수님을 만난 마리아는 일생을 예수님에게 헌신하며 살기를 결심하였고,
자신의 전 재산은 물론 목숨을 바쳐야 하는 위험 앞에서도 예수님 곁에 머물렀습니다.(루카8,3)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에도 무덤을 지키며 죽기까지 예수님께 대한 존경과 믿음을
버리지 못했던 여인이었습니다.
복음서를 읽다보면 인물 때문에 종종 헷갈리는 부분이 있습니다.
신약성경에 '마리아'라는 인물이 6~7명이 등장하기에 오늘 기념일로 지내는 이 분이
어떤 분이신 지 명확히 구분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지요.
「교부들의 증언과 전승에 따르면 오리게네스와 그 밖의 초기 성경학자들은
막달라 여자 마리아를 눈물로 예수의 발을 적시고 향유를 발라 드린 죄인으로 소문난 여인
(루카7,36-50)과,
마르타와 자매지간인 마리아(루카10,38-42),
베타니아 마을 라자로의 누이 마리아(요한11,1-12)가 서로 다른 사람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레고리오 1세 교황(590-604)은 이들을 모두 동일 인물로 간주하였고
그 후부터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공경이 성행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한국 가톨릭 대사전 제4권 마리아, 막달라의참조)」
우리는 교회의 이러한 가르침을 기억하며 오늘 복음을 통하여
마리아 막달레나의 삶을 묵상하도록 합시다.
오늘 복음에 따르면 그렇게 그리던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셔서 눈앞에 나타나셨을 때
마리아 막달레나는 전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저 동산지기인 줄만 알았지요.
많은 제자들이 스승을 버리고 도망가 버렸지만 다른 두 여인과 함께 예루살렘뿐 아니라
스승의 십자가 죽음 끝까지 따라 갔으며(마태 27,55-56),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이 예수를 장례 치르는 동안 줄곧 스승을 잃은 슬픔에
눈물을 흘렸던 마리아 막달레나였습니다.(마태 27,61; 요한 20,11)
그토록 예수님을 추종하였으며, 사랑과 투신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예수님의 임종을
지켜보았지만(마르15,40) 마리아 막달레나는 막상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다른 모습으로 살아나셨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가시기 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살아나셨지만
마리아 막달레나는 알아 뵙지 못했습니다.
마리아가 찾아 헤맨 것은 돌아가신 예수님이었기 때문입니다.
돌아가신 예수님만을 찾았기 때문에 살아 계신 예수님이 바로 옆에 서 계셔도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어떤 한 곳으로만 관심을 쏟으면 다른 것은 놓치고 맙니다.
다시 말하자면 내 이웃의 안타까운 점, 잘못된 점만 보고 있으면
그에게 있는 좋은 점들은 결코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미워하는 마음이 크면 상대방의 좋은 모습은 놓치게 되는 것이지요.
반대로 아주 잘해주고 싶고 사랑해주고 싶은 이웃이 있다면 그가 무슨 일을 해도
무조건 좋아 보이는 것이 우리들 마음입니다.
내 주변의 모든 이웃을 이렇게 너그러운 마음과 열린 눈으로 보고 맞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 뿐만이 아니지요.
한가지 일에 몰두하고 집착하면 우리는 중심을 잃고 표류하기가 쉽습니다.
예를 들어 요즈음 참으로 불행하게 보이는 것 중의 하나가 돈에 대한 사람들의 집착입니다.
돈에 욕심을 부리고 집착하면 부모도 형제도 보이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돈 때문에 부모를 살해하고 형제간에 의를 끊으면서까지
오로지 내 욕심만 채우고 싶어합니다.
돈만 보이고 부모도 자식도 부부도 아무 것도 보이지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누구에 대해 미움이 내게 있으면 그가 아무리 좋은 언행을 보여도
나에게는 안보이고 무엇이든 그에 관한 것은 곱게 보이지가 않습니다.
모든 관계는 사랑으로 출발해야합니다.
사랑이 있을 때에야 잘못을 덮어줄 수 있고 미운 모습도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가 생깁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자칫 한쪽으로만 관심을 가지게 되고
생각이 기울어져서 보여도 못 보는 잘못을 범할 수가 있습니다.
바른 눈과 바른 마음을 회복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 시대는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돈이나 건강, 명예 등 보여지는 것에 치중하여
소중한 것들을 잃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살아가면서 정작 보아야 할 것들을 보지 못하고, 눈 뜬 장님이 되어 잘못된 길을 걸어가느라고
헛된 노력들을 하는 안타까운 모습들을 심심찮게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에 나는 내 옆에 계시는 예수님을 제대로 잘 알아보고 있는지
한번 깊이 묵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면, 이웃 사람의 좋은 점도,
또 간절한 갈망도 알아볼 수가 없고 오로지 이웃도 나의 필요 대상으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이 요즈음 세상의 불행이고 비인간화의 모습이지요.
오늘 하루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는 바른 눈과 바른 마음을 위해 내가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서울대교구 이기양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에서 참조
가톨릭 사랑방 catholicsb
첫댓글 감사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