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자·철학·사회학자 등 광범위한 패널단 구성, 춤추며 아이디어 쏟아내… 작년 특허 2000여개 등록
지난달 28일 독일 뵈블링겐시(市)에 있는 메르세데스벤츠 '이노베이션 스튜디오(Innovation Studio)'. 벤츠는 혁신기술포럼인 '테크데이(Tec day)' 행사의 일환으로 이곳 스튜디오를 한국,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등 각국 취재진들에게 공개했다.스튜디오 안으로 들어서니 쾌적하고 넓은 공간에 유선형 탁자들이 형형색색의 색종이 같은 카펫 위에 놓여 있었다. 벽면 곳곳에는 혁신을 주제로 한 광고물이나 미술품이 걸려 있었다. '연구소' 하면 떠오르는 딱딱한 이미지가 아닌, 마치 현대적인 미술관을 연상케 하는 분위기다.
- ▲ 얼핏 보면 레크리에이션이 아닌가 생각되지만, 벤츠 연구소의 신차 개발 회의다. 벤츠는 이런 창의적인 방법으로 수많은 아이디어를 얻고 있다. /메르세데스벤츠 제공
책상 위에는 이날 회의 주제인 '2020년, 안락함을 극대화 한 차'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 음악을 들으며 걸은 지 10분 남짓 지났을까. 참가자들이 써낸 크고 작은 아이디어 노트 100여 장이 어느새 책상 위를 가득 메웠다. 수면 마사지부터 우주여행, 타임머신까지 아이디어의 홍수였다.
얼핏 보기에는 그저 흥겨운 레크리에이션의 한 토막과도 같지만, 벤츠는 이런 방식으로 숱한 자동차 관련 기술을 개발해 왔다. 기상천외한 아이디어가 샘솟는 벤츠의 혁신기술 개발 현장을 찾았다.
◆춤춰라, 아이디어가 샘솟을지니…작년 특허 독일 車 업계 1위
벤츠는 이노베이션 스튜디오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개발하는 워크숍을 1년에 약 70회 개최한다. 연구개발(R&D) 관련 인력뿐만 아니라 일반 소비자와 철학자, 사회학자, 심리학자 등 이종(異種) 학계 관계자까지도 광범위하게 초청한다.
직업과 성별, 연령에 관계없이 뒤섞인 참가자들은 7~8명씩 조를 이뤄 아이디어를 낸다. 무차별적으로 적어낸 아이디어가 쌓이고 나면, 그다음은 나름의 분류작업을 통해 부문별로 아이디어를 정리한다. 예컨대 '영화감상'이나 '럭비'는 '즐거움'으로 분류되는 식이다.
어찌 보면 현실성과는 동떨어진 아이디어 연구 과정. 하지만 벤츠는 작년에 이런 방식으로 600개가 넘는 차량용 기술 관련 아이디어를 수집했다. 벤츠는 작년 총 2000여개의 신규 특허를 등록, 독일 자동차업계 특허 1위를 차지했다.
이노베이션 스튜디오의 총괄이사인 괴츠 레너(Renner) 박사는 "벤츠는 워크숍을 통해 오는 2016년 양산할 차에 적용할 모든 아이디어를 이미 작년에 획득했다"고 말했다.
◆"이런 차 만들어주세요" 고객 의견 경청… IT업체 영향받기도
이노베이션 스튜디오는 전문 인력을 위주로 아이디어를 내는 기존 자동차업체의 연구개발 방식을 과감하게 폐기했다. 그 덕분에 벤츠의 신차 개발에 적지 않은 공로를 세웠다. 승객의 상해를 줄여주는 에어백이나 이제는 보편화된 안전장치인 ABS(바퀴잠김방지장치), ESP(차체자세제어장치)도 이런 과정을 통해 탄생했다. 트렁크 수납공간을 편리하게 나눠주는 '이지팩 시스템', 운전대 대신 게임기에 쓰이는 조이패드로 차량을 조작할 수 있는 아이디어도 나왔다.
벤츠가 올해 출시한 뉴 E클래스 카브리올레(지붕이 여닫히는 차)는 머리받침대 주변에 송풍구를 달아 목 주위에 따뜻한 공기를 불어넣어주는 에어캡(aircap) 시스템을 장착했다. '겨울에도 컨버터블을 마음껏 타려면?'이라는 주제를 두고 논의하다 나온 아이디어라고 한다. '운전 중 안마를 받고 싶다'는 생각은 차량용 안마의자의 개발로 이어졌다.
모든 아이디어가 스튜디오 내부에서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레너 박사는 "벤츠 R&D 부서는 소비자들과 수시로 의견을 교환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벤츠는 독일 내 소비자 2000여명을 대상으로 '빨간 버튼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 벤츠의 R&D에 참가하는 일반 소비자들이 일상생활 중 자동차와 관련된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자신의 차에 달린 빨간색 버튼을 누르도록 했다. 그러면 곧바로 벤츠 R&D 관련부서와 화상전화로 연결된다. 실시간으로 전달되는 소비자들의 제안은 즉시 검토 대상이다.
벤츠가 아이디어를 내는 방식에는 IT업체가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벤츠가 소속된 다임러그룹의 바랏 발라수브라마니안(Balasubramanian) 혁신기술 총괄 부사장은 "이노베이션 스튜디오의 운영방식은 컴퓨터업체인 IBM 임직원 15만명이 자유롭게 참여하는 아이디어 회의 '이노베이션 잼'에서 착안한 것"이라고 말했다. 독일 기업문화는 위계질서가 강하고, 부서별로 독립돼 하는 일이 나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이 같은 방식을 도입한 후 보다 창의적인 연구개발 문화를 조성할 수 있었다는 설명이다. 바랏 부사장은 "벤츠는 혁신기술 개발 측면에서는 다른 자동차업체가 아닌, 미국 실리콘밸리의 IT업체를 경쟁상대로 삼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벤츠가 내년이면 125주년을 맞지만, 혁신은 '현재 진행형'"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