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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類比 구조와 다층적 연상 / 엄현옥
1. 수필은 작가의 일상에 뿌리를 내리고 개인의 삶과 사회의 다양한 무늬를 그려낸다. 한 편의 수필이 담아내고자 하는 내용은 심오하거나 거창한 것이 아니다. 수필이 일상에 담긴 소소하거나 극적인 스토리텔링으로 이어나갈지라도, 장르의 특성상 장황한 서사적 구조를 채택하지는 않는다. 좋은 수필은 부자연스러운 기교로 과장하지 않았음에도 진솔한 독백처럼 다가와 독자에게 스며든다.
그렇다 하여 소소한 일상의 나열이나 회고만으로는 독자의 관심을 얻기 어렵다. 작가의 경험적 서사를 담아낸 수필에서 미학적 요소와 의미화는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일상의 경험은 서술 자아의 사유와 성찰에 의해 해석한 의미기억을 통해 재해석된다. 흔히 있을 법한 일상에서 얻은 단편적인 일화가 의미 기억으로 변용될 때 공감을 불러온다.
《수필과비평》 5월호에 게재된 작품 중, 일상에서 얻은 화소話素에 유비 구조와 다층적 연상을 통해 의미의 울림을 주는 작품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2. 문학작품은 언어를 떠나서 존재할 수 없으며, 작품 속 언어에 깃든 차이와 동일성은 이질적인 것을 서로 연결하는 기능을 한다. 한복용의 〈껍질〉은 이질적인 모과와 몸의 동일성을 통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몸과 모과의 유사성을 유기적으로 연결한다. 〈껍질〉에는 모과가 시들어가는 과정에 집중한다. 언젠가는 모과처럼 무너질 자신의 몸을 관찰하고, 자신의 살갗을 껍질로 인식하는 과정을 연상聯想과 유비類比를 통한 유사성으로 드러낸다.
작가는 늦은 밤 귀갓길에 단골 커피집에서 모과를 보았다. 주인은 얼마든지 가져가라며 모과차 레시피까지 알려주었다. 그러나 작가는 정작 모과차에는 관심이 없었다. 에스프레소 한 잔에 긴 얘기를 나누려던 계획도 바꾸어버린다. 집에 돌아와 방안을 모과향으로 채운다.
모과는 생김새도 고왔고 몸도 컸으며 향도 짙었다. 그 색이 변하는 짧은 시간이 못내 아쉬웠다. 상처 하나 없이 몸통이 고와 오래 가려나 했는데, 여느 모과와 다를 바 없이 껍질을 웅크린 채 어느 날 갑자기 시들어버렸다. 범접하지 못할 검은 색의 딱딱함으로 또 다른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다. 매끈한 모과를 쓰다듬던 그날은 나도 그도 찬란했다. 찬란한 시간은 우리의 뜻대로 오래가지 않았다.
색이 변하고 형체가 무너진 모과는 검은 덩어리의 다른 존재로 변한다. 그것을 계기로 자신의 몸을 쓸어내리던 작가는, 탄력을 잃은 껍질로 남은 몸과 모과와의 연상을 통해 몸의 불완전함에 대해 상기한다.
욕실로 가 따뜻한 물에 몸을 담갔다. 나의 껍질들이 일제히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탄력을 잃어버린 채로 어느 곳은 색이 변했고 또 어느 곳은 멍이 든 채였다. 언제, 어디서 부딪혔는지도 모를 피멍, 아팠던 기억도 없는 흔적들이 늘어진 살갗에 무늬를 남겨두었다. 거울에 비친 몸은 더욱 형편이 없었다. 몇 차례의 수술로 흉터가 나 있는 앞모습과 살아온 만큼 늘어진 뒷모습이 어느 한 곳 만족스럽지 못하게 버티는 중이었다. 세월이 준, 잃어버린 탄력 앞에 까마득한 어느 날의 나를 더듬어보지만 한 번도 좋았던 적이 없었던 것처럼 기억은 차단되어 더 이상 확장되지 않았다.
작가는 평소 공들여 보살피지 못한 자신의 몸을 바라보며 삶의 이력을 떠올린다. 프랑스의 철학자 메를로퐁티 Maurice Merleau-Ponty는 지각의 분석을 가능케한 몸에 대해 강조했다. 의식의 기본체계를 몸의 지각에서 찾았던 퐁티는, 그의 《지각의 현상학》(문학과지성사. 2002)에서 몸은 의식의 외부 대상이 아니라 몸을 통해 의식이 주어진다고 보았다. 실존하는 몸은 모든 의미를 발생시키는 지각 체계이므로, 지각의 변형이 일어나는 의식은 몸 자체에서 일어난 변형이라는 인식론에 맞선 철학을 전개했다.
한복용은 〈껍질〉에서 몸의 지각을 통해 인간의 유한성에 다가간다. 자신의 육체도 언젠가는 쓸모를 다한 모과의 과육처럼 무너지고, 모과 또한 결국 자연을 지탱하는 흙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생각에 잠긴다.
나는 왜 모과를 보며 나의 살갗을 생각한 걸까. 여직 그런 생각은 처음이었다. 둔기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쩡, 하는 소리와 함께 자각이 된 것이었다. 모과처럼 나도 아무도 모르게 색이 변하고 애당초 흙이었던 것처럼 적당히 무너져 흙으로 돌아갈 일이었다. 결국엔 벌레의 먹이가 되고 나무의 거름이 되어서 무언가의 단단한 힘줄이 돼 주겠지. 그런데 조금 억울한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죄스러움에 못내 몸을 떨었다. 성장을 멈춘 듯 애도 어른도 아닌 어정쩡한 모습을 한 어떤 여자아이가 나를 보며 웅크린 채로 거울 속에 앉아 있었다.
〈껍질〉의 유비 구조는 직접적으로 말하기 방식에 비해 함축적이고 암시적이다. 작가가 신체를 통해 자각된 세계를 말하는 방식은 대상의 복제가 아닌 그것의 재해석이다. 제목을 ‘모과’가 아닌 ‘껍질’로 내세워, 일상적 소통과는 다른 미적 변주를 추구한다. 함축적으로 주제를 암시하는 이런 방식은 독자의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필자는 〈껍질〉을 읽으며 박연준 시인의 산문집 서문이 떠올랐다.
이 산문집은 평범한 날을 기리며 썼다. 빛나고 싶은 적 많았으나 빛나지 못한 순간들, 그 시간에 깃든 범상한 일들과 마음의 무늬를 관찰했다. 삶이 일 퍼센트의 찬란과 구십구 퍼센트의 평범으로 이루어진 거라면, 나는 구십구 퍼센트의 평범을 사랑하기로 했다. 작은 신비가 숨어 있는 아무 날이 내 것이라는 것을, 모과가 알려주었다. 내 평생은 모월모일의 모과란 것을.
평범함은 특별하다. 우리가 그 속에서 숨은 모과를 발견하기만 한다면 평범이 특별함이다. 매일 뜨는 달이 밤의 특별함이듯.
- 박연준 《모월모일某月某日》(문학동네.2019)의 서문에서 발췌
시인은 어쩌다 찬란하고 대부분은 평범한 삶에서 발견한 특별한 대상인 모과에서, 일상의 가치를 보았다. 한복용이 쉽게 갈변되는 모과의 특성이나 쓰임 등을, 인간 삶의 유한성으로 연결했다면 상투적인 진행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껍질〉은 향을 얻기 위해 방에 들인 모과의 갈변을 자신의 몸을 들여다보는 단계로 확산한다. 일상에서 얻은 모과 몇 알에 특별함을 부여하고, 상한 모과와 자신의 몸을 연상하는 과정이 자연스럽다.
이렇듯 한복용은 모과 몇 알이라는 특이할 것 없는 일상을 비일상화한다. 단순한 대상의 재현이 아닌 일상의 동질성을 모과라는 이질성으로 전환하는 생산의 언어를 구축한다. 이 작품에서 모과와 껍질의 유비 구조가 미적인 효과가 드러나는 것은, 연상으로 연결되는 두 개체의 성격을 적절하게 포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2. 홍종현의 〈가방은 가방이다〉는 합평 모임에 제출하기로 한 ‘가방’을 소재로 한 수필이 발단이다. 착상에 도움을 받기 위해 가방과 관련된 시를 찾았으나 없었다. 결국 옴니버스 형식으로 제출한 ‘가방’에 대한 수필은 혹평을 받았다. 그 트라우마는 언젠가는 가방에 대해 꼭 쓰고야 말겠다는 다짐으로 남아있었다.
그 후 거짓말처럼 ‘가방’에 대한 시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우리 인생에는 ‘타이밍’이 어긋나는 경우가 허다하다. 간절할 때는 나타나지 않던 것이 일이 다 끝난 후에 ‘짜잔’ 하고 얄밉게 고개를 내미는 일. 이번에도 그랬다. 시간이 흐르니 ‘가방’에 관한 시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그때 허둥대던 나를 비웃으며 일부러 숨어 있었던 것처럼.
이병률의 시집 《바다는 잘 있습니다》(문학과 지성사. 2017)에 실린 〈가방〉은 작가에게 발견이었다. 인용된 시에는, 밥을 먹고 잠을 청하는 일상의 저녁에서, 방이든 가방이든 어떤 형태의 폐쇄된 공간으로 들어가는 절대 고독 속의 인간이 보인다. 작가는 이 시를 읽을 때마다, 자신이 고래 안에 있는 것인지 가방 안에 있는 것인지, 지구 또한 큰 가방은 아닌 것인지 생각에 사로잡힌다. 가방은 누군가와 소통할 창을 내고 화분 하나라도 심고자 하는, 시적 화자에게 방패가 되어주는 공간이었다. 다른 시에서는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내면의 의식으로부터 깨어 있는 사고를 상징하는 가방도 만난다. 가방에 대한 사고의 확장은 가방과 삶의 메타포를 넘어, 가방이 경계를 만드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에 다다른다.
그러다가 해외여행을 마치고 공항에서 가방을 분실한다. 행방이 묘연한 작가의 가방에는 소중한 것들이 담겨있었다. 경제적인 손실도 컸으나 가방에 담긴 것들을 구하기 위해 공들인 시간과 노력은 보상받을 길이 없다.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서 분실한 가방은 잊어야 했다. 잡다한 것들이 담긴 가방이 없어졌을 뿐이며, 가방은 가방이었다고 애써 합리화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잃어버린 가방은 자연스럽게 가방의 의미를 찾던 나의 집착에 가 닿았다. 당연한 연결이었다. 가방은 단지 가방일 뿐이라고 반복하며 다짐하는데, 뭔가 툭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나를 붙잡고 있던 가방 트라우마, 정확히는 내가 놓지 않고 꽉 잡고 있던 ‘가방’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였다. 떨어진 가방은 한껏 부풀어 있어 가방처럼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동안 가방 안에 지나친 사유를 욱여넣으려 했다. 과연 그것들을 사유라고 할 수나 있을까, 의심도 들었다.
‘가방은 가방이다.’
집착이라 생각했던 가방 트라우마는 가방이 “툭” 떨어지는 환청으로 그것에서 벗어나는 전환점을 맞는다. 이를 계기로 그동안 가방이라는 대상에 부여했던 사유의 정체와 직면한다. 자신이 가방에 부여했던 의미는 집착이었을까, 지나친 사유였을까.
결미의 ‘가방은 가방이다.’는 페터 빅셀Peter Bichsel의 《책상은 책상이다》(위즈덤 하우스. 2018)에 실린 짧은 소설 〈책상은 책상이다〉를 연상했다. 단지 제목의 유사성 때문이다. 소설에서는 일상이 견딜 수 없을 만큼 지루했던 한 남자가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한 돌파구로 사물을 지칭하는 어휘를 바꾸어버린다. 일종의 사회적 약속인 언어를 자의적으로 바꾸며 변화를 시도한다. ‘침대’를 ‘사진’이라 부르고, ‘책상’은 ‘양탄자’로 불렀다. 이런 그의 선택은 마침내 타인과의 소통 단절과 사회로부터의 고립을 가져왔다. 무리한 변화를 갈망하다가, 혼자만의 세상에서 자신만의 언어를 사용해 마침내 고립된 남자를 이야기는 언어의 자의성과 사회성의 괴리를 떠올렸다.
여기에서 두 작품의 관련성을 굳이 들추는 일은 무의미하다. 〈가방은 가방이다〉는 ‘가방’에 대한 지나친 사유에 대해 회의하며 대상의 본질에 천착한다. 대상을 칭하는 이름을 바꾸어가며 변화를 갈망했던 〈책상은 책상이다〉의 주인공의 행동과는 이질적이면서도 무관해 보이지 않았다.
〈가방은 가방이다〉에서는가방이 주는 안과 밖의 모호한 경계를 암시한 일련의 에피소드가 다층적으로 확산된다. 작가는 마침내 가방은 가방일 뿐이라는 결론에 도달하며 과잉된 의미 부여와 사고에서 빠져나온다. 불변의 진리는 책상이 책상이듯 가방은 가방 자체일 뿐, 그 안에 담긴 소중한 추억의 부산물은 사실 가방과는 무관한 것이었다. 가방에서 시작된 일상의 모티프는 일상을 가공하여 또 다른 층위의 세계를 구축하기에 이르렀다.
3. 김근우의 〈공사 중〉에서는 은유의 작법이 빛을 발한다. 수필 쓰기가 일상에서 얻은 화제에 보편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이라고 할 때, 이러한 유비 구조는 효율적인 방법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평소 영혼의 허기와 한기를 느끼던 작가는 추위를 막아 줄 집을 짓기로 한다. 자신이 짓는 글과 집 짓는 일의 동일성을 발견한 작가는, 건축 공정에 문학적 열정과 작가로서 성숙의 과정을 은유한다. 이 과정에서 ‘문학’이나 ‘수필’이라는 어휘는 수면에 드러나지 않는다. 철저히 계산된 언어 사용이다.
글을 쓰기로 작정한 작가가 창작의 과정을 집 짓는 단계로 은유한 문장들을 열거해 보자.
① 정해진 거처 없이 동가식서가숙할 때는 몰랐는데 집을 지으려고 작정하고 보니 집 지을 터나 자재 가 보통 값진 게 아니었다.
② 허름한 집이라도 좋았다. 사람 냄새 흠씬 나는 집을 짓고 내 이름이 새겨진 문패를 걸고 싶었다.
③ 문제는 거의 모든 곳이 이미 임자가 있어서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는 데 있었다.
④ 잊고 있던 자신을 찾아가는 열망으로 가득한 나를 기대하며 빈터에 앉아 집 지을 궁리를 호기롭게 시작했다.
⑤ 인심 좋은 땅 주인을 만났다. 아침저녁 오가는 길에 들러 설계도 그리는 법이나 집을 지을 때 알 아야 하는 원칙, 그리고 자재 구하는 요령까지 상세하게 일러 주었다. 자재를 잘 골라야 한다. 본 질과 현상이 둘이 아니듯 울고 웃으며 살아온 삶이 모두 자재가 될 수 있다.
⑥ 터를 잡은 지 몇 달이 지나도록 지었다 부수는 꿈만 꾸며 지냈다. 잘만 지으면 팔아줄 수도 있는 데 왜 공사를 서두르지 않느냐는 채근까지 덧붙이며 힘을 실어 주었다.
⑦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겠다. 종이로 지을 집이라고 폐지만 그러모을 수는 없는 일이다.
⑧ 집을 짓는다고 여기저기 말해 놨더니 집들이는 언제 하느냐고 야단들이다. 이제 겨우 기초공사를 시작했으니 집들이는 요원하다. 마음은 급하지만, 보이지 않는 마음자리로 쓰는 글쓰기니만큼 기 초공사에 더 많은 공을 들여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오랫동안 묵혀둔 욕망의 실체와 직면한 작가는 집 짓기를 서두른다. 막상 터를 물색해 보니 쉬운 일이 아니다. 건축 자재를 구하는 일도 만만치 않고 주워 모은 나뭇가지만으로 기둥을 세울 수도 없는 일이다. 포기하려던 순간 ⑤의“인심 좋은 땅 주인”으로 묘사된 후한 스승을 만난다. 스승이 알려준 문학의 세계는 무궁무진했기에 제대로 된 집을 지을 궁리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나 ⑥에서와 같이 쓰는 작업은 쉽사리 진행될 수만은 없다. 설계에서 시작하여 글감을 구하는 방식, 자신과 타인의 삶이 깃든 글에 대해 비로소 눈을 뜨게 되었다. 삶이 안겨준 시련이 값진 글로 거듭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선입견을 버리고 세상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불편하고 낯선 곳으로 자신을 끌고 가는 일은 용기를 필요로 했으며 그 공정은 더디기만 했다. 작가는 사람 냄새나는 조촐한 글을 자신의 이름으로 묶어 책을 내고 싶었으나, 자신만의 고유한 집을 지으라는 선배 문우들의 충고를 마음에 담고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겠다. 종이로 지을 집이라고 폐지만 그러모을 수는 없는 일이다. 허접해진 기둥부터 다시 손질한다. 오가는 길에 눈에 띄는 돌덩이 한 개, 재래시장 마늘 까는 노인의 거친 손이 하는 말도 슬쩍 담아와 본다. 어떤 날은 아직 버리지 못한 시간이 남아있는 곳에 가 보거나 엄마 냄새가 가시지 않은 친정집에도 들러 본다. 한껏 들여다보고 눈을 맞춰도 빈손으로 오는 날이 대부분이다. 그래도 불시에 얻게 될지 모를 자재를 기대하며 빈터의 웃자란 잡초를 부지런히 뽑는다.
작가는 세상의 낮은 곳과 인간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글을 지향한다. 지인들은 집들이를 재촉하지만 평생 써야할 글이니 서두를 필요도 없다. 아예 “공사 중”임을 내걸고, 시행착오를 거울삼아 그 길을 가려한다.
〈공사 중〉은 암시적인 건축 공정과 수필 작법을 정교하게 배치한 메타수필이다. 작가가 창작의 동기와 문학에 대한 소신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무겁거나 난해하지 않는 비유를 함축적으로 배치했다. 〈공사 중〉은 실험적 창작 태도를 바탕으로 한 작가만의 수필 창작의 변을 담아,문학과 건축이라는 두 대상의 유사성을 찾기 위한 연상과 상상에서 시작된 하나의 여정을 향해 나아간다.
글쓰기는 삶의 단순한 반영이 아니다. 김근우 작가는 겉모습만 그럴듯하게 치장한 집보다는 사람 냄새나는 제대로 된 자신만의 집을 열망한다. 더디 갈지라도 문학의 기본에 충실한 글을 쓰겠다는 작가 정신은 삶과 분리되지 않는 성숙한 글쓰기를 갈망한다. 〈공사 중〉에 담긴 함축된 의미와 유비 구조는, 직설적인 말하기보다 문학성이 강하다.
4. 정태헌의 〈울게 하소서〉는 산길에서 갑자기 쏟아진 빗속에서 우는 남자를 만나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평일 낮, 양복 차림으로 울던 젊은 남자의 눈물에 작가는 동화同化된다. 그 순간 남자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공명共鳴, 함께 울어 주는 일이었다. 인간은 대부분 자기 연민 때문에 울지만, 남을 위해서 운다면 그것이야말로 인간다운 일이다. 작가는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사람들에 의해 세상은 따뜻해지리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남자의 눈물을 외면하지 않고 함께 울어준다. 눈물의 카타르시스 때문이었을까. 남자는 울음을 멈추고 하늘을 바라보더니 웃는다. 이것을 본 작가는 남자의 울음을 패배와 절망이 아닌 살아 있음의 증거와 희망으로 받아들인다.
작가는 이어령 선생이 생전에 써내려간 마지막 노트에 담긴 “눈물 한 방울”을 떠올리며, 누군가에게 위로를 안겨주는 눈물이 필요한 시대임을 자각한다. 시대의 지성이라 불리던 선생은죽음을 목전에 둔 순간에 “눈물만이 우리가 인간인 것을 증명”해주며, “남을 위해 흘리는 눈물은 지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힘 있는 것”이라고 했다. 평생 이성과 지성에 관해 설파한 선생이었으나, 죽음을 앞두고 힘들게 쓴 마지막 메모는 사람만이 흘릴 수 있는 눈물에 대한 것이었다. 선생이 말하고자 했던 눈물은 단순히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맺힌 눈물은 아닌, 인간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만이 흘릴 수 있는 눈물이리라.
동물도 눈물을 흘리지만 인간만이 영혼에서 우러나오는 눈물을 흘리며, 인간이 만든 AI도 눈물을 흘릴 수는 없다. 아무리 지식과 부를 쌓는다 해도 타인을 위해 흘릴 눈물 한 방울 없는 삶이라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울게 하소서〉에서와 같이 눈물의 의미와 가치를 아는 작가는 또 한 번 눈물을 피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한다. 원작을 읽고 그것을 토대로 한 영화 관람 후 토론하는 모임에서였다. 모성을 다룬 영화를 보며 눈물이 쏟아졌다.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듦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주시다.’고 시인(김현승)은 노래했다. 눈물은 기쁨과 슬픔이 차려놓은 따뜻한 초대다. 웃음과 눈물은 인간의 직설적인 감정 표현이나 웃음이 현상적이라면 눈물은 근원적이다. 웃음이 외적이고 변하기 쉬운 것이라면, 눈물은 내적이고 변치 않을 소중한 가치이다. 눈물은 나약함이 아니라 뜨거움이고 천박함이 아니라 고결함이다. 자신에게조차 눈물을 감추거나 단속하며 근엄한 척하진 않으리.
그 사내의 뒷모습과 모성의 눈물 덕분이었는가. 묶여 있던 영혼, 이제 내 설움뿐만 아니라 남의 슬픔에도 갓맑은 눈물이 샘솟기를 소망한다. 눈물 온도는 생의 순도와 삶의 열도, 눈물이 느껍고 뜨거울수록 더 좋겠다. 시방 내 눈물은 몇 도쯤일까. 비로소 내 눈물의 향방과 온도를 가늠해 본다.
정태헌의 〈울게 하소서〉의 구조는 다중적이다. 빗속의 산길에서 만난 젊은 남자의 울음에서 시작하여 남자의 울음에 공명한 작가→ 이어령 선생의 “눈물 한 방울”의 의미→모성애를 주제로 한 영화에서의 눈물→눈물의 의미의 재발견→나와 타인을 위한 눈물이 샘솟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마무리한 결미의 구성에서 알 수 있듯이작가의 상상력은 매우 역동적이다. 수필은 산문이라는 명쾌한 논리성과 문학이라는 다의적인 함축성이 공존한다. 눈물을 화소로 눈물의 깊이에 파고든 정태헌의 연상은 눈물에 대한 단순한 서술이나 의미에 머물지 않고, 다층적 구성으로 이면의 심층적인 의미를 찾아낸다.
5. 유병덕의 〈황색 신호등〉에는 작가가 장롱면허를 면하고자 시작한 운전 연수의 경험담이 담겨있다. 작가는 꿈에서 서툰 운전으로 놀란 터라 망설였으나, 지인에게 주행 연수를 받게 된다. 그러던 중 황색 신호등에 진입하는 실수로 접촉 사고를 당한다.
작가는 사고를 계기로 황색 신호등은 녹색 신호의 연장이 아닌, 적색 신호등의 예비 신호임을 자각한다. 그대로 달려야 할지 멈추어야 할지 난감했던 황색 신호등은, 비단 도로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작가가 만난 황색 신호등은 노년을 앞두고 신체에 찾아온 경고등이다. 질병 앞에서 속수무책인 인간은 자신의 건강 신호에 들어온 경고등을 피할 수 없다.
인생길도 신호등이 있는 것 같다. 열심히 달려나가라는 녹색신호가 있고, 정지하라는 적색신호가 있다. 또 주위를 살피며 멈추어야 하는 황색신호도 있다. 아직 내 가슴에 피고 지는 꽃이 부지기수다. 치열한 생존경쟁 속에서 앞만 보고 달려왔던 관성이 노년까지 남아있다. 하나 마음만 청춘이지 몸은 아니다. 여기저기서 황색 신호등이 들어오고 있다. (중략)
황색 신호등은 성찰의 신호다. 황색 신호에 멈추지 않고 달리면 교통사고를 당하듯 우리 인생도 매한가지다. 자칫 저승사자의 먹잇감이 될지 모른다. 인생 백세시대라고 하나 칠순을 넘기지 못하고 떠나는 지인이 있다. 그는 황색신호를 무시해서다. 젊은 날 질주하던 관성을 그대로 가지고 천상으로 갔다.
삶에서 황색 신호등이 없다면 인간은 질주 본능을 조절하기 어려울 것이다. 쉼 없는 직진은 경쟁에서의 퇴보가 아니다. 달려야 할 때일수록 잠시 멈추고 옆도 보고 뒤도 돌아아야 한다. 삶에서의 황색 신호등은 주위를 살피게 하는 성찰의 시간이기에, 앞으로 달려가지만 말고 일상을 점검하는 순간으로 삼아야 한다.
〈황색 신호등〉은 소소한 일상에서의 삶의 무늬를 진솔하게 그려냈다. 우리의 삶에서 피할 수 없는 경고등과 멈출 수도 질주할 수도 없는 황색 신호등과의 적절성을 확보한 유비 구조를 통해 주제의 일반성을 획득한다. 수사적 기교의 과잉을 자제한 차분하고 담백한 문장 표현 등은 작품을 구축하는 조촐한 요소가 적절하게 균형을 이루었다.
위에서 살펴본 연상에 의한 유비 구조는 수필 작품에서 작가만의 고유한 방식에 의해 변주될 때 다양한 울림을 준다. 작품의 다양한 울림이야말로 작품을 빛나게 하는 고유한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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