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력위조 파문이 한차례 우리 사회를 휩쓸고 지나가는군요. 그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서라도 주변인에서 벗어나 주류세력으로 편입하고픈 과도한 욕망의 결실, 그 뒷맛이 씁쓸하기만 합니다.
보란 듯이 한번 높이 높이 솟구쳐보고 싶은 욕구, 매스컴의 주목을 받고 싶은 욕구, 주전선수가 되고 싶은 욕구, 무대 위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싶은 욕구, 주역, 주인공이 되고 싶은 욕구는 인간으로서 누구나 지니게 되는 기본적인 욕구이겠지요.
그러나 때로 조역으로서의 삶, 조력자로서의 삶, 주변인으로서의 삶, 선구자로서의 삶, 예언자로서의 삶도 얼마나 아름다운지, 의미 있는지를 알게 되면 생각이 바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거론되고 있는 세례자 요한의 삶이 그랬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의 삶은 감독, 또는 PD, 또는 작가로서의 삶이었습니다.
감독이나 PD나 작가가 영화나 드라마에 얼굴 드러내는 것 보셨습니까? 그들은 자신의 작품에 단 한 번도 얼굴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들의 역할은 무대의 한 가운데서 화려한 조명을 받는 역할이 절대로 아닙니다. 렌즈의 초점이 맞춰지는 주인공으로서의 역할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의 역할은 주인공이 확실히 뜨도록, 작품이 잘 나오도록, 무대 아래서 열심히 뛰는 것입니다. 그는 단 한 번도 영화나 드라마에 얼굴을 나타내지는 않습니다만, 작품이 잘 되기만을 바라며 묵묵히 헌신합니다.
예수님께서 오실 길을 미리 닦는 일, 예수님께서 메시아임을 선포하는 일, 그리고 마침내 임무를 완수하고는 무대 뒤로 조용히 사라지는 일이 세례자 요한에게 맡겨진 일이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세례자 요한은 그야말로 완벽했습니다.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었습니다. 예언자로서의 삶이 조금도 흐트러지는 법이 없었습니다. 자신을 과대평가하지도 않았고, 자신을 그럴듯하게 포장하지도 않았습니다.
그 어떤 상황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평가에 조금도 우쭐거리지 않았습니다. 그 어떤 순간에도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부여하신 선구자로서 지녀야할 본연의 자세를 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삶에 진지했습니다. 자신의 삶에 충실했습니다. 자신의 삶에 대한 지속적인 의미부여가 계속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는 세례자 요한의 수난과 죽음에 대해서 언급되고 있습니다. 신구약을 통틀어 예언자치고 고통이나 십자가와 멀리 떨어져있었던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늘 세상으로부터 반대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수시로 끔찍한 고통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예수님과 흡사한 방법으로 수난을 당했습니다. 그들의 삶에서 안정이나 평화라는 단어는 꽤 낫선 단어들이었습니다.
예레미야의 경우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유다왕국의 멸망을 예고할 것을 숙제로 주셨습니다. 그는 싫었지만, 괴로웠지만 계속해서 유다왕국의 끝장을 사람들에게 알렸습니다. 국왕의 입장에서 쓴 소리만 계속해대는 예레미야가 죽이고 싶도록 미웠을 것입니다. 어쩌면 예레미야는 반국가적 언동을 서슴지 않던 요주의인물이었습니다.
왕의 심복들은 이런 예레미야를 잡아 웅덩이에 가둡니다. 예레미야는 심연의 구덩이로 내팽개쳐졌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웃음거리가 되고, 따돌림 당하던 그는 얼마나 괴로웠던지 이렇게 외쳤습니다.
“아, 불행한 이 몸! 어머니, 어쩌자고 나를 낳으셨나요? 온 세상을 상대로 시비와 말다툼을 벌이고 있는 이 사람을.”(예레미야, 15, 10)
세례자 요한의 삶 역시 대동소이했습니다. 왕의 치부를 신랄하게 지적한다는 것은 죽음과 직결되는 일이었습니다. 왕을 향해 쓴 소리를 수시로 남발한다는 것은 간땡이가 부어도 단단히 부었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거듭되는 고통과 시련, 수난과 십자가 앞에서도 예언자들은 흔들림 없이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렸습니다.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의연했습니다. 그들의 이런 배경에는 무엇이 있었을까요? 하느님께서 자신과 반드시 함께 하고 계신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자신과 동행하신다는 확신을 배경으로 한 참 평화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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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기도의 모델, 에즈라!>(20170927)
멸망을 향해 가는 이스라엘 민족을 안타깝게 바라보며,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는 한 의인(義人), 사제요 율법학자 에즈라가 바친 기도는, 우리가 바쳐야 할 참된 기도가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에즈라는 기도하는 사람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잘 가르치고 있습니다.
“의복과 겉옷은 찢어진 채 무릎을 꿇고 두 손을 펼쳐...”(에즈라 9장 5절)
여기서 ‘찢어진 의복과 겉옷은’ 자신이 하느님 앞에 큰 죄인임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표시입니다. 무릎을 꿇는 행위는 죄인으로서 겸손하고 솔직한 마음 상태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두 손을 펼치는 것은 하느님 앞에 자신의 무능함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면서, 하느님의 도움을 간절히 바라는 표시입니다. 에즈라가 보여준 태도는 참으로 모범적인 기도 자세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와 잘못을 잘 알고 계시는 전지전능하신 아버지 앞에, 죄인인 아들이 취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태도입니다. 진실성과 겸손한 마음을 잘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에즈라의 기도는 기승전결이 있습니다.
① “저의 하느님, 너무나 부끄럽고 수치스러워서, 저의 하느님 당신께 제 얼굴을 들 수 없습니다. 저희 죄악은 머리 위로 불어났고, 저희 잘못은 하늘까지 커졌습니다.”(에즈라 9장 6절)
에즈라는 기도의 출발점이 어떠해야 하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과 민족이 처해있는 부끄러운 현실을 정확히 직시하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을 포함한 공동체 전체가 하느님 앞에 나아가 공동체적으로 죄를 고백합니다. 이는 공동체의 죄가 곧 내 죄이며, 공동체의 일이 곧 내 일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② “그러나 이제 잠깐이나마 주 하느님께서 은혜를 내리시어, 저희에게 생존자를 남겨주시고, 당신의 거룩한 곳에 저희를 위하여 터전을 마련해 주셨습니다.”(에즈라 9장 7절)
우리의 죄가 하늘까지 닿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저버리지 않으셨음을 기억합니다. 완전히 멸망시키지 않으시고 생존자를 남겨주시어 이스라엘 역사를 잇게 하셨음에 감사드립니다.
③ 이어서 민족의 멸망과 유배라는 참담한 현실을 불러온 구체적인 죄의 고백이 이어집니다. 가장 중요한 죄목은 우상숭배, 그리고 하느님께 대한 불충실이었습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불러오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솔직하고도 진정성있는 참회와 죄의 고백임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④ 에즈라 기도의 마지막 부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입니다. 너무나도 송구스럽고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번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구하고 있습니다.
그 큰 하느님 사랑과 은총에 보답하기는 커녕 끝도 없는 배신과 타락의 길을 걸어왔음에 가슴을 칩니다. 고개조차 들수 없고, 그 어떤 처벌 앞에서도 할 말이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번 하느님으로부터의 용서와 자비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무죄한 의인이면서도 하느님 앞에 겸손되이 무릎을 꿇고, 백성들의 죄에 대한 용서를 청하는 에즈라의 기도가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에즈라의 기도는 백성들의 지도자가 어떤 삶을 살아내야 하는지 명확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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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루카 9,7-9)
<걱정이 깊어지면>
오늘 한 신부님이 요즘 가톨릭교회에 위기가 찾아왔다고 하면서 걱정을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신자들도 순교시대와 비교할 수도 없게 믿음이 약해져있고, 성소자들의 수가 급감하고 있는데 특히 수도회에 입회하는 수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위기는 항상 있어왔습니다. 물론 당면한 어려움에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할 필요는 있지만, 교회가 망할까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교회가 망할까 두려워해야 할 분은 교회를 세워주신 분이시고 우리는 그냥 오늘을 열심히 살아가기만 하면 됩니다. 교회를 세우신 분의 능력을 볼 때 교회는 절대 망하지 않습니다.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라는 노래 가사처럼 그런 걱정을 하면 걱정하는 대로 되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믿는 대로 되어라.”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걱정이 깊어지면 그것을 믿어버리게 됩니다.
이런 우화가 있습니다. 어느 날 알렉산드리아로 향하는 마차 위에 할머니 한 분이 올라탔습니다. 마부가 물었습니다.
"이 마차는 알렉산드리아로 가는데 누구십니까?" "나는 페스트[흑사병]요." "그렇다면 마차에서 내리십시오. 나는 당신을 태워 갈 수 없습니다."
"젊은이, 내가 알렉산드리아로 가서 꼭 세 사람만 죽게 할 테니 제발 나를 태워다 주시오." 세 사람 이상 죽게 되면 어떻게 하겠소?" "그 때는 이 칼로 나를 죽이시오." 마부는 할머니가 주는 칼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태워주어 할머니는 마차가 시에 도착하자마자 마차에서 뛰어 내렸습니다. 얼마 후 알렉산드리아 시에 페스트가 유행하여 수많은 사람이 죽어갔습니다. 단 세 사람만 죽게 하겠다는 약속을 한 할머니가 많은 사람을 죽이자 마부는 화가 나서 칼을 들고 할머니를 찾아 나섰습니다.
얼마 후 마부가 성문에서 할머니를 만나 죽이려 하자 할머니는 “왜 나를 죽이려 하오?”라고 물었습니다.
마부는 화가 나서 버럭 소리쳤습니다. “당신은 내게 세 사람만 죽이겠다고 하지 않았소? 그런데 지금 저렇게 무수한 사람이 죽었으니 약속대로 당신을 죽이겠소.”
그러자 할머니는 대답했습니다. "여보시오 젊은이, 내가 죽인 사람은 세 사람이 맞소. 다른 사람들이 죽은 것은 페스트란 말을 듣고 놀라서 두려워하다가 죽은 거요."
14세기 후반 유럽을 휩쓸었던 "검은 죽음의 병" 흑사병은 유럽사람 3명에 1명꼴로 죽음에 이르게 하였다고 합니다. 일단 병이 걸리면 40일 동안 격리시키는 것이 유일한 예방법이어서 외롭게 죽어가야 하는 무서운 병이었고, 그래서 [고독 살인]이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당시 유럽 에서 2,500만 명이 흑사병으로 사망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산 사람들도 죽은 사람 못지않게 비참하게 연명해야 했는데, 페스트로 인하여 무역은 부진해지고 노동자의 죽음으로 경작지는 급속히 감소했으며 지주들이 파산했습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로 사회는 공황에 빠졌고 성직자들은 위기 속에서 영적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2차 세계 대전 당시 전쟁으로 죽은 청년의 수가 30만 명인데 아들과 남편을 전쟁터에 보내고 그 근심과 불안 때문에 심장병으로 죽은 사람들은 1백만 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경제공황이 오는 이유는 경제공황이 올 기미가 보일 때 미래를 두려워하여 일제히 지갑을 닫아버리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경제공황이 오면 자신들이 쓰지 않고 모아둔 돈은 휴지종이처럼 값어치가 떨어지게 됩니다. 미래는 미래가 걱정하게 내버려두고 그냥 오늘을 열심히 살아가면 됩니다.
세계와 우리나라 경제, 사회의 불안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불안해합니다. 4년 전 세계와 한국에 닥쳐온 경제 불황은 수년 전에 겪었던 '리먼브러더스' 사태의 공포가 엄습하고 있다고 합니다. 아니 그때보다 더 위험하고 어렵다고 말들 합니다.
20대는 취업에 막히고, 30대는 집값에 깔리고, 50대는 노후 대책이 없어 부자도 가난한 자도 다 행복하지 않다는 내용이 나왔습니다.
오늘의 시대는 흔들리는 불확실성의 시대, 불안의 시대라고 말을 하며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참조: 다음 카페, 프로페짜이, 경제 불황 두려움 예화]
그러나 세상 창조 이래 언제 한 번 확실한 미래가 있었습니까? 미래는 알 수 없습니다. 걱정한다고 바뀌는 것도 없습니다. 아니 어쩌면 걱정하기 때문에 더 나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걱정은 죄인이나 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기 이전에 걱정할 것이 있었을까요? 카인이 죄를 짓기 이전에 걱정할 것이 있었을까요?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서 살아갈 걱정과 아이를 키울 걱정 등이 생겨난 것이고, 카인도 동생을 죽이고 나서 다른 민족들이 자신을 죽일까봐 걱정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마찬가지로 헤로데도 두려워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죄가 있으니 미래가 두렵기만 한 것입니다.
헤로데는 자신이 죽인 요한이 살아났다고 두려워하고, 어떤 이들은 엘리야나 옛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 살아났다고 호들갑을 떱니다.
예수님은 그냥 예수님입니다. 미래는 그냥 미래입니다. 우리의 영역이 아닌데 판단하며 걱정을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어쩌면 두려워하는 근저엔 자신 안에 죄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모든 걱정을 미래의 주인께 맡겨드리고 우리는 오늘을 살아갑시다. 걱정이 많은 사람치고 좋은 결말을 맺은 사람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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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가 9,7-9 : 헤로데가 예수님에 대해 묻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하여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그들이 지켜야 할 규칙을 간단히 말씀해 주셨다. “길을 떠날 때 아무 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마라.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곳을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사람들이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고을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에서 먼지를 털어 버려라.”(마태 9,3-5)고 하신 것이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보면, 제자들은 스승 예수의 말씀을 그대로 따랐던 것으로 보인다. 예수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한 선교의 효과는 매우 큰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바로 헤로데 왕의 동요가 그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났다고 하기도 했으며, 또는 예언자 엘리야가 다시 살아난 것이 아닌가?
혹은 신명 18,15에서 말하듯이 다른 위대한 예언자가 나타나지 않았는가 하는 여러 가지 소문이 나돌자 헤로데 왕은 가뜩이나 세례자 요한을 죽인 것에 대해 가책을 느끼고 있었기에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9절)하고 물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한번 만나고 싶어 했다. 예수님께 대한 소문은 꽤나 영향이 컸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일을 제자들의 복음선포 활동에 연결 지어 볼 때 그렇다면 우리는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데 어떠한 자세로 하고 있는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이용하여 사심 없이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이때에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삶을 보고 진리를 향하여 발걸음을 옮길 것이다.
주님 앞에 참 삶을 통하여 복음의 향기가 이웃으로 퍼져 나가도록 열심히 노력하자. 여기에 우리의 참 행복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기쁘고도 하느님께 감사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삶을 위하여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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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불안과 의심을 몰아내는 사랑과 믿음>
예수님께서 말씀과 행적으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자 사람들은 놀라워합니다. 당시 그 지방 영주였던 헤로데는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해 합니다(9,7). 예수님이 누구이신가에 대해 사람들이 다양한 반응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요한에 뒤이어 사명을 수행하기 시작하신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난 요한이라고 했습니다. 또 엘리야가 다시 와서 하느님의 위대한 개입을 준비하리라 기대했던 이들은 예수님을 다시 나타난 엘리야로 봤습니다. 또 다른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라 했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예언자들이 예고한 메시아 시대를 여신 분이시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모두가 예수님을 종말에 앞서 오리라고 예고되던 그 예언자로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예수님을 예언자로 보긴 했으나 ‘하느님의 아들’이나 ‘오시기로 된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말씀과 행적을 보면 하느님의 손길을 느끼지만 그건 되살아난 예언자로서 한 일로 축소시켜버린 것이지요.
헤로데는 죽은 예언자 가운데 한 사람이 되살아났다고 하는 이들의 말을 믿지 않습니다. 또 이미 죽임을 당한 사람이 다시 나타났다는 소문도 믿지 않습니다. 그는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하며 의심의 끈을 놓지 않습니다. 요한이 다시 살아날 리가 없으며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헤로데는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합니다.”(9,9) 사실 그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그분을 보고 싶어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서 일으키시는 어떤 표징이라도 보기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23,8) 그는 자신의 불의와 부도덕을 서슴없이 지적했던 세례자 요한에 이어 하느님의 자비와 진리와 정의를 선포하시는 예수님의 존재 앞에서 두려워 불안에 빠졌습니다. 그는 거기서 헤어나고자 예수님을 직접 만나 확인하려 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고백합니까? 말이 아니라 삶으로 말입니다. 혹시 헤로데가 안고 있었던 두려움과 불안, 권력에 대한 탐욕, 의심, 하느님의 권능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교만 이런 것들이 내 안에도 있지 않습니까? 헤로데가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듣고 당황했던 것은 두려움 때문이었지요.
두려움과 의심은 왜 생기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현존과 활동은 오직 하느님을 드러냅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자비와 정의와 선을 거슬러 재물과 권력을 자기 소유로만 삼으로 하는 이들은 불편과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지요. 하느님의 진리는 거짓의 바다를 출렁이게 만듭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탐욕의 뿌리를 뒤흔듭니다.
우리도 헤로데처럼 소유와 육의 경향에 사로잡혀 두려움과 불안, 그리고 의심에 걸려 넘어져 하느님께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을 때가 있지요. 그러나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4,18) 그렇습니다! 내 안의 두려움과 불안은 사랑과 믿음이 부족하다는 표지임을 알아차려야겠습니다.
오늘도 두려움과 불안, 혼란과 의심의 자리에 사랑을 채우며, 온 몸으로 주님을 고백하는 사랑 고백의 날이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을 사랑하지 못할까봐 두려워하는 두려움 외에 두려워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 재물과 권력과 명예를 잃어버릴까 하는 두려움을 버리고 사랑을 갈망하는 복된 우리였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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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묵상
예수님의 소문을 들은 헤로데의 불안은, 권력에 집착한 나머지 양심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진리를 외면하는 한 인간의 어리석음을 대변해 줍니다. 헤로데는 자신의 비행을 지적했던 세례자 요한을 눈엣가시처럼 여기고 걸림돌로 생각했으면서도 그를 함부로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헤로디아의 딸 앞에서 공언한 허세를 이용해 세례자 요한을 처형합니다. 헤로데는 진리 앞에서 양심의 가책과 두려움을 감추려고 했지만, 예수님의 등장은 그에게 또 다른 걸림돌이 되어 불안의 늪을 벗어나지 못하게 합니다.
성경에서 ‘죄’는 단순히 윤리적인 악행이나 법과 계명을 지키지 않는 무질서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죄의 본질은 나의 삶의 바탕이자 근거인 하느님을 잊고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신앙인이라면 하느님께서 선으로 우리를 인도하시고, 모든 악행과 폭력으로부터 벗어나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라고 가르치신다는 것을 모르지 않습니다. 나의 행위와 생각들이 세상의 논리와 관점에서 정당화되고, 사람들 때문에 나도 어쩔 수 없다는 식의 합리화의 유혹에 빠질 때, 하느님의 말씀과 그분의 계명은 나에게 걸림돌이고 불안과 두려움의 대상이 되고 맙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에는, 진리에 눈을 감을 때 죄의 유혹과 불안감이 내 삶을 지배한다는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헤로데에게 예수님은 불편한 진리였습니다. 나를 숙명처럼 지배하고 있는 죄의 근원들을 벗어 버리지 못한다면, 비록 내가 세상에서 인정받고 부유함의 안락을 누린다 하더라도, 내 영혼의 참된 평화와 안식은 없습니다.
고해성사를 통해 우리가 죄를 씻을 수 있는 기회를 교회가 주는 것은, 하느님과 맺는 관계가 불안과 두려움이 아니라, 기쁨과 평화여야 한다는 점을 가르쳐 주기 위함입니다.(한국천주교주교회의 사무국장/인천교구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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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밤송이 김기현 요한 신부님]
<하느님을 보기까지 만족할 수 없습니다.>
가끔 동기 신부가 저희 본당에 와서 쉬었다 가곤 했는데요. 올 때 빈손으로 온 적이 거의 없는 거 같습니다.
한 번은 고기를 구워먹자고 목살하고 삼겹살을 조금 사왔었습니다. 덕분에 사제관 베란다에서 처음으로 고기를 구워먹었는데요. 조용하고 한산한 밤에 동기 신부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술도 한 잔하고 고기도 먹고.. 참 좋았던 거 같습니다.
그리고 한 번은 본당에서 돈까스 판매를 했다면서 돈까스를 가져왔었습니다. 그래서 며칠 돈까스를 해 먹었는데요. 맛있기도 하고, 해 먹는데 시간도 별로 걸리지 않아서, 저 같이 혼자 사는 사람 반찬으로 참 좋았던 거 같습니다.
그리고 낚시도 한 적이 있는데요. 고기를 많이 잡지는 못했지만 (조그만 거 두 마리 잡았습니다.^^;), 기다리고 잡는 재미가 있었던 거 같습니다.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동기 신부가 찾아와 주어서 좋았는데요. 만약에 동기 신부가 오지 않고 그의 손에 들려져 있던 것들만 저를 찾아온다면 어떨까요? 돈까스나 삼겹살이나 목살이나 낚시대 같은 것들만 말입니다. 그래도 좋겠지만...^^; 뭔가 아쉽고 허전할 거란 생각이 듭니다.
보내진 고기를 구워먹으면서나, 낚시대를 들고 저수지로 나가 낚시를 하면서나.. 마음 속에 ‘동기 신부와 함께 하면 좋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일 거 같은데요. 성경에 나오는 모세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느님은 그에게 능력을 부어주셨고, 불기둥으로 인도해주셨고, 먹을 양식과 물을 주셨습니다.
하느님은 모세에게 많은 것을 주셨지만, 모세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거 같습니다. 오늘 독서에 나오는 예언의 말씀과 비슷한 감정을 느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독서 중간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먹어도 배부르지 않으며 마셔도 만족하지 못하고 입어도 따뜻하지 않으며...'
왜 그럴까요? 모세는 하느님을 보고 싶어 했습니다.
하느님이 주시는 선물도 감사하지만, 무엇보다 그분의 영광을 체험하길 간절히 바랐습니다. 그 간절한 바람이 탈출기 33장 마지막 부분에 “당신의 영광을 보여 주십시오.”라고 표현된 거 같습니다.
하까이 예언자가 성전을 지어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도 그러한 맥락일 거 같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주시는 선물로만 살 수 없다. 만족하지 못할 것이고, 충분하지 못하다고 느낄 것이다. 성전 안에서 주님께 찬양을 드리고 그분을 만나야 충만함과 만족을 느끼며 살아가지 않겠느냐...’ 하는 뉘앙스인 거 같습니다. 하느님이 주시는 부수적인 혜택과 선물이 아니라, 그분을 만나고 그분의 영광을 보게 되기를 원하는 일.. 우리 영혼이 간절히 바라는 일인 거 같습니다.
오늘 하루, 삶 안에서 뭔가 채워지지 않는 부분이 있다고 느끼신다면 하느님을 만나러 가 보십시오. 공허한 내 마음이 채워지는 느낌을 받으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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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헤로데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다.>
“헤로데 영주는 이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였다. 더러는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났다.’ 하고, 더러는 ‘엘리야가 나타났다.’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 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헤로데는 이렇게 말하였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하였다."(루카 9,7-9)
여기서 ‘이 모든 일’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설교와 기적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서 요한이 되살아났다고 말하거나, 엘리야가 나타났다고 말하거나,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고 말한 것은, 예수님을 위대한 예언자라고 생각했다는 뜻인데, 이것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생각하지는 않았음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헤로데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몹시 당황했다는 것은 ‘미신적인 불안감’을 느꼈다는 뜻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유령이 자기를 해코지하지나 않을까, 같은 불안감.(이것은 양심의 가책이나 죄책감과는 거리가 멉니다. 양심의 가책이나 죄책감은 자기가 죄를 지었다는 것을 의식하는 사람이 느끼는 법입니다. 복음서 전체 내용을 볼 때, 헤로데는 자기가 세례자 요한을 죽인 일을 죄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라는 말은, “내가 세례자 요한을 죽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니까 ‘예수’는 요한일 수가 없다.”라는 뜻입니다. 또 이 말은, 헤로데는 부활을 안 믿는다는 것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귀신이나 유령의 존재는 믿어도 부활은 안 믿었다는 것.) 헤로데는 부활만 안 믿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안 믿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마태오복음을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헤로데는 요한을 죽이려고 하였으나 군중이 두려웠다. 그들이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마태 14,5)
헤로데가 군중을 두려워했다는 말은, 그가 하느님을 믿지도 않았고 두려워하지도 않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가 권력을 잃는 것만 두려워했고, 하느님의 심판은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아마도 헤로데는 심판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었을 것입니다.)
어떻든 헤로데는 예수님의 소문이 무척 신경 쓰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도 죽이려고 했습니다.
“바로 그때에 바리사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어서 이곳을 떠나십시오. 헤로데가 선생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가서 그 여우에게 이렇게 전하여라. '보라, 오늘과 내일은 내가 마귀들을 쫓아내며 병을 고쳐 주고, 사흘째 되는 날에는 내 일을 마친다. 그러나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루카 13,31-33)
예수님께서 헤로데를 ‘여우’ 라고 부르신 것은, ‘간사하고 교활한 인간’이라고 그를 꾸짖으신 것과 같습니다.
헤로데가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한 것은 ‘불순한 호기심’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과 설교 내용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던 것 같고, 예수님께서 행하셨다는 기적들만 직접 보고 싶어 했던 것 같습니다. 나중에 헤로데는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데, 루카복음서 저자는 그 일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빌라도는 이 사람이 갈릴래아 사람이냐고 묻더니, 예수님께서 헤로데의 관할에 속한 것을 알고 그분을 헤로데에게 보냈다. 그 무렵 헤로데도 예루살렘에 있었다. 헤로데는 예수님을 보고 매우 기뻐하였다.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오래전부터 그분을 보고 싶어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서 일으키시는 어떤 표징이라도 보기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헤로데가 이것저것 물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그 곁에 서서 예수님을 신랄하게 고소하였다. 헤로데도 자기 군사들과 함께 예수님을 업신여기고 조롱한 다음, 화려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돌려보냈다. 전에는 서로 원수로 지내던 헤로데와 빌라도가 바로 그날에 서로 친구가 되었다."(루카 23,6-12)
예수님을 조롱하는 헤로데의 모습을 보면, 그가 세례자 요한을 죽인 일에 대해서 양심의 가책이나 죄책감 같은 것은 전혀 느끼지 않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헤로데 같은 인간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3,18-20)
헤로데는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사람이었고, 하나의 죄를(불륜죄를) 다른 죄로(살인죄로) 덮었던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은 ‘이미’ 심판을 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회개하지 않는다면, 멸망이 예정되어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헤로데 같은 사람이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마음 편하게 살고 있는 이 세상의 현실을 보면서, “도대체 하느님의 정의는 어디 있는가?”, 또는 “하느님께서는 왜 저런 인간을 내버려 두시는가?” 라고 물을 때가 있습니다.
묵시록에 바로 그런 질문이 나옵니다.
“거룩하시고 참되신 주님, 저희가 흘린 피에 대하여 땅의 주민들을 심판하고 복수하시는 것을 언제까지 미루시렵니까?"(묵시 6,10)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베드로 2서에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미루신다고 생각하지만 주님께서는 약속을 미루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여러분을 위하여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2베드 3,9)
하느님은 헤로데 같은 인간도 회개하고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분입니다. 이 세상의 현실은 신앙인들에게는 일종의 숙제와도 같습니다. 헤로데 편에 설 것인가? 세례자 요한 편에 설 것인가? 신앙인은 눈에 보이는 세상의 현실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믿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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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고흥 도화성당 조창현 클레멘스 신부님]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
<깨어 기도하라...>
사는 법이 여러가지 입니다. 첫째, 그냥 사는 것... 그냥 때가 되면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일하는 것입니다. 둘째, 잘 사는 것...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고 자신만을 위해 사는 것 입니다. 셋째, 정말 잘 사는 것... 자기 자신도 잘 살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며 사는 것입니다.
지금 고운님들의 삶은 어떠신지요???
오늘 복음에 나온 헤로데는 가진 것도 많고 누릴 수 있는 것은 다 누리고 삽니다. 세상은 그런 삶을 대부분 축복된 인생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헤로데는 두려움때문에 당황하고 있습니다. 왜냐면... 세례자 요한을 죽이는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쁨이 없습니다.
이때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비가 온 뒤에는 따뜻한 햇살이 참 좋습니다. 기분도 좋고 마음이 산뜻합니다. 비가 그치면 저절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내 마음 안에도 햇살 담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충전해야 합니다. 내 마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충전입니다. 우리 마음안에 하느님께서 계십니다. 깨어 기도하면서 그 기쁨을 느끼십시오. 그러면 찜찜하고, 답답하고, 두렵고 우울한 것이 물러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깨어 기도하는 것"은 시련의 순간에 저희들로 하여금 그 시련에 맞설 수 있게 해 주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깨어있지 못합니다. 저희들의 눈은 여전히 무겁게 내리 감겨 자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다시 홀로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만이 유일하게 깨어 기도하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모든 이가 당신을 버릴지라도 예수님은 끝까지 아버지 하느님께 자신을 맡기십니다. "깨어있음"과 "기도"는 "저희 육신과 영혼의 나약함"을 극복하게 해주는 힘입니다.
이 나약함은 가장 부서지기 쉬운 부분입니다. 이 나약함을 통해 악의 유혹이 들어와서 저희를 두려움으로 사로잡히게 합니다. 그러기에 저희들의 믿음이 유혹 앞에 있다해도, "깨어 있음"과 "기도"로써 악의 유혹에서 생기는 두려움을 능히 이겨낼 수 있음을 믿습니다.
영적일기를 마무리하면서... 깨어있음과 기도로써 내 마음안에 햇살 담은 하느님사랑으로 충전하시기를... 내 안에 두려움을 능히 이겨내는 기쁨이 흐르기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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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부산본원 김종오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의말씀
“헤로데는 이렇게 말하였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하였다.”(루카.9,9)
소문만 듣고 우리는 자주 다른 사람을 판단합니다. 소문으로 판단하면 그릇된 판단을 하게 됩니다. 소문은 전하는 사람의 개인적인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이 때로는 악의가 섞여 진실을 자주 왜곡하기 때문입니다.
소문이나 가정(假定), 혹은 추측으로 속단하는 것은 우리가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불안한 지도자나 공동체는 자칫 자유로운 영혼들을 속박하고 어리석고 불공정한 판단을 하여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기도 합니다. 불안한 만큼 우리는 속단하게 됩니다.
막연한 불안에 시달리는 사람은 사람과 삶에 대한 평화와 굳건함의 체험이 필요합니다. 소문에 의존한 상상이나 관념을 넘어 실제로 보고, 만지고, 향기를 맡으며 현실을 보고 체험하여야 막연한 불안에서 우리는 벗어나게 됩니다.
듣는 것을 넘어 우리는 예수님을 체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과 평화의 체험이 없는 믿음은 쉽게 흔들립니다. 주님에 대한 체험은 우리의 신앙을 더욱 굳건하도록 도와주지만 관념적 신앙은 주님마저 쉽게 저버리게 됩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항상‘불안’했습니다. 단순히 듣고 아는 것을 넘어 불완전한 자신의 모습을 체험한 뒤에 비로소 사랑과 평화의‘주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불완전한 일상의 현실적 자신을 통하여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기 전까지 우리는 불안합니다.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는 체험은 일상의 관계성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말씀과 양심의 빛과 성사 안에 숨을 쉬시며 우리 삶의 기쁨과 고통에 함께 활동하시는 주님은 우리가 마음을 열고 하는 관계 안에서 사랑과 평화로 체험하게 됩니다.
소문으로만 듣던 주님과 사람들은 현실적 일상의 관계성을 통하여 진실하고 온전한 만남을 이루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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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어릴 때 배운 동요가 있습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나는 김 사랑. 그 이름 아름답구나. 당신은 누구입니까? 나는 박 장군. 그 이름 씩씩하구나.” 어린 아이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통하여 자신이 누구인지를 소개하는 노래입니다. 상대방은 그 이름을 듣고 아름답고 씩씩하다고 칭찬하는 노래입니다.” 영화 올드보이에서 주인공은 끊임없이 자신을 괴롭히고 있는 상대방을 향하여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넌 누구냐?”
사람은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답변을 하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그리스의 철학자 프로타고라스는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고 하였습니다. 생각할 수 있고, 기억할 수 있고, 문명과 문화를 만들어 갈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이야기 한 것 같습니다. 그런가하면 시편 8장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십니까?” 유혹에 빠지는 인간, 시기와 질투로 상처를 받는 인간, 폭력과 전쟁으로 서로를 죽이는 인간, 병들고, 늙고 죽어야하는 나약한 인간을 돌보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읽은 글이 생각납니다. ‘행복이란 하고 싶은 일을 좋아하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이란 해야 할 일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고 싶은 일을 좋아하기 때문에 참된 행복을 느낄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더 많이 소유하려 합니다. 더 많은 권력을 갖고 싶어 합니다. 더 좋은 집에서 살고 싶어 합니다. 더 건강하게 그리고 더 오래 살고 싶어 합니다. 더 많이 소유하려하는 것, 더 많은 권력을 가지려 하는 것, 더 건강하게 그리고 더 오래 사는 것’들은 정말 헛된 일입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해야 할 일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은 매 순간 삶의 자리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거리에 버려진 쓰레기를 줍는 사람의 손은 정말 아름답습니다. 아마도 그분들은 이 세상을 좀 더 깨끗하게 하였다는 행복을 맛보았을 것입니다. 형편이 어려운 조카의 등록금을 내준 삼촌이 있습니다. 본인도 그리 넉넉한 것은 아니지만 감사하는 마음으로 더 열심히 공부할 조카를 보며 삼촌은 이 세상이 좀 더 환해진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지난 봄 길가에 코스모스를 심었던 분들이 있습니다. 가을, 길가에는 예쁜 코스모스들이 바람에 춤을 추고 있습니다. 코스모스를 보면서 길을 걷는 분들은 참 마음이 밝아질 것 같습니다. 봄에 코스모스만을 심은 것이 아닙니다. 세상은 아름다운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다는 희망을 심은 것입니다.
‘나무는 꽃을 버려야 열매를 맺는다고 합니다.’ 결국 꽃이 시들어야 결실을 맺는 것처럼, 우리들의 삶도 땀을 흘리고, 자신을 희생해서 누군가를 위한 다리가 되어 줄 때, 진정한 결실을 맺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인생은 허무 한 것이 아니라, 인생은 하느님을 만나는 축복의 시간입니다.
하고 싶은 일만을 좋아했던 헤로데는 결코 느낄 수 없었던 행복입니다. 해야 할 일은 좋아하다면 우리 모두는 행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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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이 먼저다> -삶의 우선 순위-
하느님이 먼저입니다. 삶의 우선순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삶의 중심을, 삶의 방향을 말하는 것입니다. 삶에서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입니다. 하느님은 등수를 보지 않습니다. 삶은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평생 마라톤 경주입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이신 예수님 따라 가면 됩니다. 중요한 것은 제 페이스대로 하느님 향해 완주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잘 뛰어도 방향을 잘 못 잡거나 도중 하차 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삶의 경주를 도중에 포기하고 무너져 내리는 이들이 참 많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믿는 이들에게는 늘 새로운 시작이 있을 뿐입니다.
아주 예전부터 피정지도시 자주 드는 예가 있습니다. 노년의 품위유지를 위한 우선순위입니다.
-1.하느님 믿음, 2.건강, 3.돈-입니다.
어찌 노년뿐이겠습니까? 진정 품위있는 삶을 위해서는 누구나 지켜야할 우선 순위입니다.
사실 하느님 믿음이 먼저 중심에 자리잡으면 자연스럽게 영육의 건강이 뒤따르고 돈욕심도 자제됩니다. 내적평화와 안정이 뒤따릅니다.
그러나 이 우선순위가 바뀔 때 삶은 혼란스럽고 복잡해집니다. 알 수 없는 두려움과 불안이 엄습합니다. 존엄한 인간 품위와 여유를 유지하기 힘듭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 말씀의 이해가 확연해 집니다. 하까이 예언자를 통한 주님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이 백성은 ‘주님의 집을 지을 때가 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주님의 집이 무너져 있는데, 너희가 판벽으로 된 집에서 살 때냐?”
빨리 우선순위를 회복하여 공동체의 가시적 중심은 주님의 집부터 지으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이 먼저인 우선순위가 바뀌었기에 무익하고 헛된 삶이 었음을 깨달으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 중심을 잃은 삶은 말 그대로 밑빠진 독이 물붓기 삶일 뿐입니다.
“너희가 살아 온 길을 돌이켜 보아라. 씨앗을 많이 뿌려도 얼마 거두지 못하고 먹어도 배부르지 않으며 마셔도 만족하지 못하고 입어도 따뜻하지 않으며 품팔이꾼이 품삯을 받아도 구멍이 난 주머니에 넣는 꼴이다.”
하까이 예언자를 통한 이스라엘 백성은 물론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입니다. 시편127장 1-2절을 연상케 하는 말씀입니다.
이어 주님은 거듭 가시적 중심인 당신의 집인 성전 건립을 촉구하십니다.
“너희가 살아온 길을 돌이켜 보아라.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집을 지어라. 그러면 나는 그 집을 기꺼이 여기고 그것으로 영광을 받으리라.”
하느님 중심의 삶을 재정비하라는, 또 삶의 우선순위를 확실히 하여 하느님을 첫 자리에 두라는 말씀으로 이해해도 무방합니다. 끊임없이 주님의 집을 수리해야 하듯이 하느님 중심의 각자 인생집도 끊임없이 수리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헤로데에게 결정적으로 결핍된 것이 삶의 중심이요 방향입니다. 삶의 우선순위도 전무해 보입니다. 그냥 권력욕 따라 무의미한, 생각이 없는 삶을 살았음이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는 모습에서 내적 두려움과 불안이 감지됩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이 아니었기에 자초한 두려움과 불안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확고한 삶이었다면 애당초 우유부단하게 세례자 요한을 죽이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헤로데에게 주어지는 화두같은 물음 ‘이 사람은 누구인가?’입니다. 구원의 갈림길입니다.
호기심의 대상이나 정략적 야심을 떠나 삶을 재정비하는 회개의 기회가 되어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을 만나 삶의 중심을 회복한다면 구원이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전무해 보입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중세 최고의 고전을 저술한 ‘토마스 아 캠피스’의 ‘코헬렛’ 구약성경에대한 평가가 생각납니다. 그는 코헬렛의 삶에 대한 전적으로 부정적 묘사를 ‘최고의 지혜’로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헛되고 무익한 것으로 평가함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것에 유일한 우선권을 주기 때문입니다.
삶의 허무에 대한 유일한 답은 하느님뿐입니다.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으뜸자리에 둘 때 허무의 심연은 사랑의 충만으로 바뀌고 인생고해의 허무한 삶은 인생축제의 충만한 삶으로 변합니다.
하느님이 먼저입니다. 우선순위의 첫 자리에 오는, 삶의 유일한 중심은 하느님뿐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시간 우리 모두 당신을 으뜸 자리에 두고 당신 중심의 충만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보라, 주님의 눈은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당신 자애를 바라는 이들에게 머무르신다. 주님은 죽음에서 목숨을 건지시고, 굶주릴 때 먹여 살리신다.”(시편33,18-1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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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혹시 자동차 사고를 경험한 적이 있으십니까? 저는 이제까지 크고 작은 사고를 몇 차례 경험했었습니다. 그런데 그중에서 잊지 못할 사고가 하나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15년 전에 난 사고입니다.
차를 구입한 지 두 달도 채 되지 않았을 때, 눈길에 차가 미끄러져서 몇 바퀴를 빙글빙글 돌다가 근처 언덕 아래에 있는 집 담벼락에 처박힌 사고였습니다.
이때의 경험은 정말로 특별했습니다. 미끄러지면서 차가 빙글빙글 돌 때, 그리고 떨어져 아래에 있는 집 담벼락에 처박힐 때까지의 시간이 마치 스포츠 경기에서 다시 보기로 천천히 보여주는 것 같았습니다.
분명히 몇 초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마치 몇 시간이 흐른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체험이 이때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제 서품식 중에서, 바닥에 엎드려서 성인호칭기도를 바칠 때에 저의 삶 모두가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가는 것이었습니다. 10분이 채 되지 않는 시간이 제 삶 전체를 기억할 정도로 오랜 시간으로 느껴졌습니다.
이렇게 시간이 천천히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에 반해서 시간이 엄청나게 빨리 지나가는 경우도 있지 않습니까? 좋은 친구들과 만나서 신나게 놀 때면 어떻습니까? “벌써 시간이 이렇게 지났어?”라면서 시간의 빠름에 대한 아쉬움을 표현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시간은 각 개인에 따라, 그리고 상황에 따라 달라집니다(이는 과학에서 상대성 이론을 통해서 증명되었습니다). 이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분명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시간의 흐름에 그냥 대충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에 맞게 그리고 올바른 상황을 만들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내 자신에 맞게 살아간다는 것은 주님께서 창조하신 목적에 맞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또한 올바른 상황이란 주님의 뜻이 펼쳐지는 상황입니다. 이렇게 될 수 있도록 열심히 살아가십니까?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들은 예수님의 소문을 들은 헤로데의 불안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체면 때문에 세례자 요한을 죽이지요. 어떤 소원도 다 들어주겠다는 헤로디아의 딸 앞에서 했던 허언으로 인해 그는 평생 불안과 싸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생명의 영역은 인간의 몫이 아니라, 하느님에게만 달려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마치 하느님인양 모든 것을 다할 수 있다는 착각 속에서 자신에 맞는 삶을 살지도 못했고, 또 올바른 상황을 만들지도 못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그의 시간을 기쁨과 희망이 아닌 불안과 절망의 시간으로 만들었습니다.
우리들 역시 이 원칙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이라는 시간을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먼저 자신에 맞는 시간인지를 그리고 올바른 상황을 만들고 있는지를 따져봐야 합니다. 그래야 나의 시간을 기쁨과 희망의 시간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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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시간 }
언젠가 결혼식 주례를 위해 예식장에 갔습니다. 예식 30분 전, 매니저라는 분이 저를 찾습니다. 그리고 결혼식에 관한 설명을 하더니 제가 담당해야 할 부분을 이야기하십니다.
한 5분 정도 이야기를 나눴는데 ‘참 사무적으로 말한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농담을 던지면, ‘괜한 말 하지 마라.’는 식으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더군요.
결혼식이라고 하면 분명히 즐겁고 기쁜 시간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이 즐겁고 기쁠까요?
이 예식장에서 일하는 사람은 반복되는 결혼식에 남들이 느끼는 즐거움과 기쁨을 체험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단순히 일로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남들에게 즐거움과 기쁨을 전달하는 소중한 역할임을 기억한다면 어떨까요? 그렇게 웃음 없이, 사무적으로 대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어쩌면 모든 사람이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나의 말과 행동이 남들에게 즐거움과 기쁨을 전해주는 소중한 역할이라고 한다면 내게 주어지는 매순간을 허투루 보내지는 않게 될 것입니다. 소중한 나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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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왜 예수님을 만나려고 하십니까>
루카 9,7-9 (헤로데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다)
헤로데 영주는 이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였다. 더러는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났다.” 하고, 더러는 “엘리야가 나타났다.”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 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헤로데는 이렇게 말하였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하였다.
<왜 예수님을 만나려고 하십니까>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려고 합니다.
헤로데가 예수님을 만나려고 합니다. 제 자신만 있기 때문입니다.
제 자신을 살리기 위해 세례자 요한을 죽인 것처럼 예수님을 없애려하기 때문입니다.
불의한 권력으로 자신의 삶을 살찌우는 사람은 정의로운 나눔과 섬김을 사는 사람을 두려워합니다.
이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낡고 더러운 불의를 말끔히 씻고 정의의 새 옷을 입어야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어둠을 즐기는 많은 사람들은 정의로운 자유의 길을 걷기보다 불의한 예속의 길을 걸음으로써 온 삶을 두려움 속에 묻습니다.
세례자 요한을 목을 벤 것도 모자라 예수님을 없애려고 안달이 난 사악한 그러나 가련한 헤로데처럼.
믿는 이들은 예수님을 만나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추악하고 낡은 자신을 벗어버리고 예수그리스도를 옷 입어 지금여기 또 하나의 작은 예수그리스도로 거듭 나기 위해서입니다.
참되게 예수님을 만나려는 사람은 끝없는 탐욕을 자극하는 재물과 권력 뒤쫓는 하느님을 내버린 불경스런 우상숭배의 세상을 예수님 닮은 나눔으로 다시 거룩하게 합니다.
순수하게 예수님을 만나려는 사람은 서로를 적으로 만들어 죽음으로 몰고 가는 숨 막힐 것 같은 치열한 경쟁의 세상에 예수님 닮은 섬김으로 다시 살맛 돋웁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벗님들이여! 왜 예수님을 만나려고 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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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헤로데 영주는 이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였다”(루카 9,7)
“이 모든 일”은 예수님의 기적에 대한 이야기들뿐만이 아니라, 바로 앞 장면에서 보여준 제자들의 활동에 대한 이야기도 포함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제자들마저 그 권능을 행하는 것을 전해들은 헤로데는 몹시 당황했던 것입니다.
“당황했다”는 말의 원어의 뜻은 ‘길을 찾지 못해 헤매는 상태’를 말한다고 합니다. 곧 ‘몹시 불안한 상태’에 빠졌던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본문에 따르면, 예수님에 대한 소문은 세 가지였습니다. ‘죽은 요한이 살아났다는 것’과 ‘엘리야가 나타났다’는 것과 ‘옛 예언자 가우데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헤로데는 자신이 목을 벤 요한이라고 단정하고 있는 것입니다.왜 그랬을까? 왜 헤로데는 예수님을 자신이 목을 벤 요한이라고 단정하는 것일까?
그것은 자신이 스스로 고백하고 있듯이, 자신이 요한의 목을 베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도둑이 제 발 절인다.”는 말이 있듯이. 양심이 찔렸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죄인은 피해 다닐 때보다 잡혀서 감옥에 들어갈 때가 오히려 편안함을 느낀다고 합니다.
헤로데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묻습니다.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보려고 하였다”(루카 9,9)
그는 단순한 호기심으로 예수님을 만나보려고 한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아마 겁이 나서 확인해보고 싶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예수님의 죽음에 방조하거나 협조했던 것입니다. 혹 우리도 오늘, 자신도 모르게 예수님의 죽음에 방조하거나 협조하고 있지는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오늘 저는 제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봅니다. 내가 소문으로 듣고 믿고 있는 이 분은 누구신가? 내가 찾기도 전부터 나를 찾으시고, 나를 훤히 아시는 이 분은 대체 누구신가? 나를 믿고 있고 사랑하고 있는 이분은 대체 누구신가?
그렇습니다. 설혹 제가 당신을 믿지 못해도 당신은 저를 믿으시는 분이십니다. 설혹 제가 당신을 사랑하지 못해도 당신은 저를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그토록 저를 소중히 여기시니, 당신은 저의 아버지이십니다. 그토록 훤히 저를 아시니, 당신은 저의 스승이십니다. 그토록 저를 믿으시니, 당신은 저의 신자입니다. 그토록 저를 쫄쫄 따라다니오니, 당신의 저의 추종자입니다. 그토록 저를 사랑하시니, 당신은 저의 연인입니다. 옳고 그름을 따지기보다 아픔을 먼저 보아주시니, 당신은 저의 벗입니다. 하오니, 주님! 저는 당신의 사랑받는 새끼입니다. 저는 당신의 임이요, 당신의 벗입니다. 저는 당신의 제자요, 당신께 속한 이, 당신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결코 당신과 떨어질 수 없는 당신과 함께 있는 이입니다. 당신 또한 결코 저와 떨어질 수 없는 저와 함께 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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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반신부의 복음 묵상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 자유를 회복하라>
가끔 꿈 얘기를 듣습니다. 좋은 꿈을 꾸어서 복권을 샀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면 무서운 악몽에 시달려 밤잠을 설치고 그 꿈 때문에 마음이 흔들려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괴로워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꿈은 꿈입니다. 아무리 좋아도 꿈이고 아무리 험해도 꿈입니다. 그러므로 꿈은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좋게 생각하고 기뻐하고 또 준비하면 되는 것입니다. 꿈에 끌려 다녀서는 절대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꿈대로 안 좋은 일이 생기게 됩니다. 좋지 않은 꿈 때문에 안 좋은 일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꿈을 다스리지 못하고 그 꿈에 매여 집착하기 때문에 안 좋은 일이 생길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꿈을 꿈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물론 때로는 죄를 짓고 그 죄책감 때문에 꿈을 꾸는 사람도 있습니다. 좋지 않은 일을 행하여서 악몽에 시달립니다. 그리고 안 좋은 일이 생기면 하느님께서 벌을 주시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벌을 주시는 것보다 본인 스스로 불안한 마음과 죄책감으로 몸을 괴롭히기 때문에 상황이 나빠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그 원인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잘못이 있다면 그 잘못에 대해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사람들을 위해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23,34). 하고 용서를 넘어 아버지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의 허물에 대해서도 언제나 용서해 주시고 얽매인 것을 풀어주십니다. 그러므로 죄의 고백을 통해 용서의 은총을 입어야 합니다. 자유를 회복해야 합니다.
헤로데 영주는 예수님께 대한 여러 소문을 듣고 몹시 당황하였습니다.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살아났다”고 하고, 더러는 “엘리야가 나타났다.” 하는가 하면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 하였기 때문입니다. 헤로데는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하면서 예수님을 만나보려고 하였습니다. 헤로데가 불안해하고 당황한 것은 당연합니다. 사람을 죽였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다 소유한 왕이라 할지라도 죄책감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는 것입니다. 죄 값을 스스로 치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존재가 무서운 것이 아니라 자신이 저지른 죄 때문에 예수님이 무서워진 것입니다. 사랑을 전하러 오신 분을 심판관으로 생각하는 것은 그분이 우리를 심판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잘못한 것이 부끄러워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뻐합니다. 우리의 주님께서는 “우리가 죄를 고백하면, 그분은 성실하시고 의로우신 분이시므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1요한 1,9). 그리고 우리의 하느님은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악인이 자기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을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에제33,11). 혹시라도 마음의 불안이 있다면 하느님의 자비를 굳게 믿고 주님의 품안에서 자유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혹 두렵습니까? 거짓을 벗어 버리고 진리를 추구하십시오! 용서하시는 주님과의 깊은 만남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이득형 씨는 권위와 권력을 설명합니다.
권위는 1)인간적인 매력과 인격에 매어지는 것 2)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따라옴 3)자리에 관계없이 평가가 높아짐 4)죽은 뒤에도 없어지지 않음 5)지도자 선택의 첫째가는 기준이 됨
권력은 1)직제상 지위(자리)에 주어지는 것 2)사람들을 덮어놓고 복종시킴 3)자리가 높아질수록 더 강해짐 4)권위가 없는 사람일수록 더 휘두름 5)그 자리를 떠나는 동시에 없어져버림
권위와 권력은 분명히 다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만나는 헤로데는 권력을 잡았지만 권위는 없었습니다. 헤로데는 권력을 가지고도 불안해 하였습니다. 권력을 이용하여 많은 사람에게 폭력을 사용했고 특히 당시 유다인들이 최고의 예언자로 알고 따르던 세례자 요한을 죽였는데 그가 다시 살아났다고 하는 소리도 들렸고 여러 소문이 있었기에 불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어도 ‘도둑이 제 발이 저린다.’고, “때린 놈은 발을 오그리고 자도 맞은 놈은 발을 펴고 잔다’고 합니다. 자기가 한 짓을 알기에 늘 불안하고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속적인 권력이 아니라 권위를 지니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혹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많이 지배하려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권력의 마음입니다. ‘돈이면 다 된다’는 식의 마음으로 이웃에게 재물이나 지위를 가지고 대접 받고자한다면 그에게서 권위는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권위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고, 우리는 그 권위에 복종해야 합니다(로마 13,1-2). 주님께서 생명을 주관하는 권위(루가 12,5)를 가지셨고, 말씀대로 이루시는 힘을 지니셨습니다(요한5,39). 또한 가르침대로 행하심으로써 권위를 지키셨습니다. 우리도 삶의 자리에서 각자의 권위를 키워야 하겠습니다(2고린 10,8). 아버지는 아버지로서, 어머니는 어머니로서, 자녀는 자녀로서, 아내는 아내로 남편은 남편으로서의 위치기 있습니다. 각자의 위치에 걸 맞는 삶을 살아감으로써 권위를 지키시기 바랍니다. 직장이든 가정에서든 각기 권위가 살아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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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이병우 루카 신부님]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루카9,9)
세례자 요한의 목을 벤 헤로데가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듣고 불안해 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났다." 하였기 때문입니다.
죄의 속성은 불안과 두려움입니다. 그래서 죄를 지은 사람은 헤로데처럼 자유롭지 못하고, 불안과 두려움에 떱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14,6)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8,32)
진리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 죄와 죄의 속성인 불안과 두려움을 몰아내고 자유라는 선물을 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께 감사드리면서 날마다 자유로운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아니 자유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7일 간에 소중한 연피정을 마치고 삶의 자리로 돌아갑니다. 삶의 자리로 돌아가는 저의 발걸음이 오기 전보다 더 가벼워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자유를 선물로 받고 돌아갑니다.
고성 산 속에 있는 오두막처럼 생긴 외딴 피정집에서 '오두막'이라는 책도 읽었고, 아무튼 이곳에서 주님과 함께 잘 쉬었다 갑니다.
임마누엘이신 주님께 감사드리고, 또한 기도로 함께 동반해 주신 영적 이웃인 여러분들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하루'라는 시간을 또 다시 선물로 받았습니다. 이 하루가 진리이신 주님 안에서 죄를 멀리하고 자유와 기쁨이 충만한 복된 하루가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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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지병철 신부님]
오늘 헤로데는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합니다. 왜 만나고 싶어할까요?
그냥 예수님이니깐 죽이고 싶어서일까요?... 세례자 요한이 되살아났다는 소문때문입니다.
사실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수 있었던 헤로데도 세례자 요한만큼은 마음대로 할수 없었습니다.
죽이고 싶었지만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세례자요한이라 쉬이 죽이지 못하고 있었는데 딸아이의 소원때문에 할 수 없이 세례자 요한을 죽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동안 세례자 요한을 죽임으로써 잃었던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이리저리 노력했는데 세례자 요한이 되살아났다는 소문이 떠돌기시작하는 것입니다.
헤로데에겐 예수님이 세례자 요한이든 아니든 상관이 없습니다. 다만 세례자 요한처럼 사람들의 존경과 지지를 받는 사람이라는 것이 마음에 걸릴 뿐입니다.
자신의 정치적 영역에 또다시 누군가가 끼어들지 모르기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나보려 합니다. 만나서 회유를 하든 안되면 죽이려 들것입니다.
그가 만나고자 하는 이런 이유로 그는 예수님을 실제 만나다하더라도 예수님의 알아보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하는 또 다른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할 무렵 사람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세례자 요한은 헤로데에게 죽음을 당하게 되고 세례자 요한을 기억하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례자 요한이라 기억하고 싶어 예수님을 만나보려 따라다닙니다.
하지만 그들은 세례자 요한이라는 안경을 쓰고 예수님을 보기에 예수님의 참 모습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과는 삶이 모습이 너무나 틀린 예수님의 모습에 그들은 떠날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의 암울한 상황을 벗아나가해줄 예언자들의 모습에 예수님을 맞추어버립니다.
로마의 지배와 이 지긋지긋한 가난을 없애줄 위대한 예언자가 바로 저 예수님이라 하여 만나고 싶어 따라다닙니다.
그들은 예언자의 모습으로 예수님을 보기에 언젠가 초라해지는 예수님을 보면 떠날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한 무리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 다닙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할 수 있는 일이란 답답할 정도로 스승의 가르침을 이해못하는 머리를 가진 12제자들의 무리입니다.
그들에겐 이 예수님은 정치적 인물로도, 세례자 요한으로도, 예언자로도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예수님이 누구인지도조차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예수님이 좋아서, 예수님 자체가 좋아서 모든것을 버리고 따라다닙니다. 하지만 예수님과 함께 하는 동안 그들의 이 아무것도 모르는 백지와 같은 상태에 예수님의 모습이 하나둘씩 칠해질 것입니다.
그래서 훗날 그들은 이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할 것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이 철부지 어린이와 같은 모습이 그들에겐 좋은 복이 될것입니다. 우리들 또한 예수님을 늘 만나고 싶어 합니다.
예수님을 어떤 사람으로 보기에 만나고 싶어하는지 어떤 이유로 만나고 싶어하는지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설령 우리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한다 할지라도 예수님 자체, 하느님 자체가 좋아서가 아니라면 그래서 무언가를 바래서라면 헤로데의 모습, 요한을 기억하는 사람들, 예언자를 기다리는 사람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을 것입니다.
바라는것이 있다면 지워버리는 연습을 하시고 아무것도 모르는 백지로 만드셔서 예수님의 참 모습을 그려주십사 하느님께 기도하였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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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권경렬 베드로 신부님]
오늘은 배와 항해를 우리의 삶에 비유하여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배에는 바닥짐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배를 다 만들고 나면 맨 밑바닥에 바닥짐을 싣는다고 합니다. 배를 바다에 띄우기 위해서는 바닥에 얼마간의 무게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바닥짐이 없다면 배를 바다에 띄울 수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기 전에 뒤집히고 만다고 합니다.
우리의 인생을 항해에 비유한다면 이 바닥짐은 인생에 있어서 우리의 중심일 것입니다. 그 바닥짐은, 무겁고 힘들다고 내던질 수 없는 인생의 알맹이입니다. 그것 없이는 인생이라는 망망대해에 배를 띄울 수도 없고, 항해할 수도 없습니다. 항해하기 위해서 마지막까지 함께 가야 하는 당연하고도 소중한 바닥짐이며 중심입니다.
슈바이처도 인생을 항해에 비유하며 이런 내용의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인생이라는 배에 여러 가지 많은 짐을 싣고 항해를 시작합니다. 항해에 기본이 되는 것은 물론, 성공. 명예. 부. 정의. 평화. 진실. 나눔. 사랑, 등 많은 짐을 싣고 항해를 시작합니다. 이것들은 항해를 의미 있게 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배에 실린 많은 짐들은 배를 무겁게 하여 앞으로 나아감을 힘겹게 합니다. 풍랑이라도 만나면 침몰할까 두렵습니다. 그래서 무거운 짐을 하나씩 바다에 던져버립니다. 진실을 저버리고, 정의에 눈감고, 나눔은 나중으로 미루고… 항해를 시작할 때의 마음은 어느새 사라지고 어떻게 하면 빨리 나아갈까 만 고심하며 마구 치달아갑니다. 짐이 없어 가벼운 배는 빨리 나아가 목적지인 항구에 빨리 닿습니다. 그러나 배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빈 배인 것입니다.“
바닥짐과 빈 배 이야기, 우리의 삶을 생각하게 합니다.
오늘 복음은 갈릴래아의 영주 헤로데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통해 나의 삶을 묻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어리둥절해 하고 두려워하며, 자기가 죽인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났다는 소문에 몹시 혼란스러워하는 헤로데. ‘그의 삶의 중심'은 무엇이었을까? 인생이라는 망망대해에서 그를 보호해주리라 믿고 끝까지 붙잡고 놓치지 않았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또, 나의 중심은 무엇이며, 나는 무엇을 끝내 붙잡으려는가? 이렇게 묻고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예언자 하까이는 우리 삶의 중심이 하느님임을 깨닫고, 하느님을 우리 마음의 중심에 모시는 성전이 되어야 함을 말합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성전이 무너졌는데도 아랑곳없이 벽을 널빤지로 꾸민 집에서 사느냐?... 너희가 어떻게 지내왔는지 돌아보아라..”
복음은 나의 삶을 돌아보라고 말씀하십니다. 나의 삶에서 중심은 올바른지 그리고 나의 삶의 태도는 성실한지? 나의 항해는 어디쯤에 와있으며 배에는 무엇이 실려 있는지? 항해를 시작하면서 세웠던 선한 의지들을 바다에 던져버리고 오직 앞으로 나아가는 데만 정신을 팔고 있지는 않은지? 무겁다는 이유로 바닥짐을 내던지고 출렁이는 물결에 균형을 잃고 두려움과 혼란에 빠져있지는 않은지? 돌아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씨는 많이 뿌렸어도 수확은 적었고, 먹어도 배부르지 않으며, 마셔도 성이 차지 않고, 입어도 따뜻하지 않으며, 아무리 벌어들여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는 아니었는지 지난 삶을 돌아보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재 세상의 모습은 끊임없이 출렁이는 바다와 같습니다. 한 고비를 넘기면 또 새로운 파도가 우리를 덮칩니다.이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나 소용돌이가 치는 한가운데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중심이 있듯, 우리 삶의 가장 깊은 중심에는 하느님이 계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심중에 품고 살아간다는 것은 그 출렁이며 소용돌이치는 물결의 중심에 균형을 잡고 서 있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인생의 망망대해에서 무게중심을 잡고 앞으로 나아가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바닥짐이 없이는 항해할 수 없는 이치를 알기에 우리는 기꺼이 자신의 짐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부디 중심인 하느님을 잊지 않게 하시고 용기와 지혜와 성실을 주시기를 청하며 마침내 다다른 항구에서 빈 배의 허무가 아닌, 만선의 기쁨을 주님과 함께 나누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살아왔는지 돌아보며, 남은 항해가 빈 배가 되지 않고 마칠 수 있기를 원한다면, 바닥짐이란 내어버려야 할 짐이 아니라 복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살아가야 합니다.
일상의 삶에서 거짓과 불의에 단호히 아니라고 말하고, 가난하고 억눌린 이웃과 함께 하고, 평화를 위해 일하며, 하느님 나라와 그 의로움을 위하여 기꺼이 투신하는 삶이야말로 인생이라는 항해가 빈 배로 끝나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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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웅태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는 헤로데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당황하며 소문에 들리는 그 사람은 도대체 누구인지 한번 만나보고 싶어했다는 말이 나옵니다.
헤로데라는 이름은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이 세상의 권력자로서 대칭적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헤로데는 세상의 부귀와 권력을 쥔 지상권을 대표하는 왕이라는 인물로서, 그리고 예수님은 지상적 권력은 없지만 성령과 사랑의 능력을 통해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평화의 왕이라는 분으로서 대칭을 이루고 있습니다.
헤로데 자신이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때문에 크게 놀라고 당황하는 모습이 나오는데 헤로데 대왕과 그의 아들 헤로데 안티파스 모두 예수님 때문에 당황하고 놀라고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 동방박사들이 예물을 들고 찾아와 "유다인의 왕으로 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하자 자신의 왕권에 도전 할 또 다른 유다인의 왕이라는 말을 듣고 당황하고 불안하여 헤로데는 예수님 탄생전후 두 살 이하의 남자아기들을 죽여 버렸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헤로데 대왕이 죽고 또 그 자리를 계승한 헤로데 안티파스(Herode Antipas)는 갈릴레아와 페레아 지역의 영주이면서도 헤로데 대왕처럼 불안해 하고 있습니다.
헤로데 안티파스는 자기 이복형제인 헤로데 필립의 아내 헤로디아와 결혼하기 위해 자기 아내와 이혼했었습니다.
의인이었던 요한은 누차 헤로데 안티파스에게 그것은 부당한 일이라고 간하다가 헤로데 안티파스의 아내가 된 헤로디아의 미움을 사서, 어느 축제일에 그녀의 딸 살로메가 춤을 추어 왕을 기쁘게 하고 왕의 환심을 얻어 요한을 죽이게 했던 것입니다.
헤로데 안티파스는 요한을 죽이고, 예수님을 모욕한 인물입니다.
헤로테는 심리적으로 의인을 죽였다는데 대해 불안해하고 있었습니다. 요한은 당시 큰 예언자로서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있었는데, 헤로데도 비록 그를 죽였지만 그의 인물에 대해 어떤 위압감마저 느끼고 있었습니다.
이럴 때 예수님이 등장하여 요한과 같은 일을 할 뿐 아니라 오히려 요한 보다 더 큰 인기를 획득하고 백성들의 마음이 그리 쏠리자 불안해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권력자가 불안을 가장 많이 느낀다고 합니다. 자기 권력에 도전하는 자들을 제거할 뿐 아니라, 그것은 가족, 형제들까지도 그 제거의 대상이 됩니다.
우리 나라의 사극 용의 눈물에서도 그러한 면이 나타났지만, 로마의 칼리큘라 황제도 자신이 황제 지위를 누리기 위해 자기 형제들을 제거하고 자기는 새로운 태양, 왕이며 신으로 떠 받들여지게 되었습니다.
그후 그는 자기 형제를 죽인 양심의 가책으로 미치게 되어 피비린내 나는 폭정 끝에 그도 역시 살해되었습니다.
헤로데는 의인 요한을 죽이고 양심의 불안을 느끼고 있던 차에, 그 요한과 같은 인물이 다시 나타났다는 말에 그의 관심이 쏠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만나보고 싶어했습니다. "소문에 들리는 그 사람은 누구냐" 라고 묻는 질문처럼, 그는 소문에 들리는 그분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분에 대한 증언은 바로 세례자 요한이 했던 것입니다.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연 헤로데가 예수를 만나보고 싶어했다는데, 예수에게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는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왜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하는가? 우리는 예수님 한테서 그리스도를 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자신을 희생하여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히울 정도로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 구속공로로 사람들로 하여금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회복시켜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헤로데처럼 에수님에게서 단순히 기적적인 것을 보고 싶다거나 혹은 물질적인 유익함을 청하기 위한 목적으로 예수님을 찾는다면 예수님의 그리스도로서의 진정한 모습을 보지는 못 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원하는 뜻, 자기 자신을 그분께 신뢰를 드리고 하느님의 아들로 받아들이는 신앙의 눈이 필요합니다.
오늘날도 예수의 소문이 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소문에 진정 자신과 타인의 올바른 구원을 위해 예수를 찾아가 볼 수 있는 마음을 갖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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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루카 9, 9)
오늘은 우리에게 어떤 날입니까.
그 어떤 것으로도 바꿀 수 없는 고유한 우리의 오늘입니다.
고유한 삶은 서로의 본모습을 주고받습니다.
진실하지 못한 마음에서 벗어나는 시간이길 기도드립니다.
허공에 떠도는 소문이 아니라 요한 세례자 한 사람을 잃은 아픈 슬픔과 책임감을 느끼는 마음이어야 합니다.
끊임없이 예수님은 우리에게 마음을 보여주십니다.
마음은 언제나 기도로 시작됩니다.
마음을 다듬지 않고서는 거듭되는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헤로데에게 예수님은 위험한 존재로 비춰지지만 예수님에게 헤로데는 마음을 나누어야 할 소중한 한 사람입니다.
마음이 빠져버린 삶은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없는 삶입니다.
소문이 아니라 따뜻한 마음을 나누는 소중한 오늘 되십시오.
예수님의 마음은 두려움과 부끄러움이 아닌 다시 시작하게하는 희망의 마음이기에 그 마음을 만나뵈옵길 간절히 청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