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경호원의 정치범수용소 체험기 내가 독재자 김정일을 호위할 때는 외부와 접촉을 하지 못하고 잘 먹고 잘산다는 TV, 라디오, 신문 잡지로써 잘 사는 것으로 알다가 제대되니 사회생활이 내가 배우고 듣던 것과는 80%로 달랐던 탓으로 대한민국 방송에 귀를 기울이게 된 것이다.대한민국 KBS 사회교육방송은 북한 기차칸에는 창문도 없고 려행 다니려는데 려행증 검사를 하는 등 북조선의 현실을 그대로 말하고있었다. 그 후부터 대한민국 방송이 나를 대한민국의 품으로 인도하였다. 방송이 북조선 현실과는 진실성이 있기 때문이다.그리하여 김일성, 김정일 부자가 인민대중에게 돼지고기에 이밥을 먹고 기와집에서 살도록, 즉 사회주의 지상락원에 살도록 해주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사실은 자기를 위한 허위와 기만이라는 것을 때늦게 알게 되었다. 돈 번 뒤 연길 자치주에 들어와 조선족과 어울려서 나의 소감을 말했다. 알고 보니 그는 중국주재 북조선 대사관 국가안전대표였다. 그는 중국조선족(특무)의 말을 듣고 연길에 비행기로 온 것이다. 산보시간과 수행원들의 부화방탕생활, 행사시의 군무 전투 기술기재에 대한 설명 등을 썼다. 렬차를 타고 1994년 11월 29일 북경 역전 연길 연변식당에서 하루 자고 북경 천안문 광장 옆에 있는 조선족 려관에서 삼일동안 자면서 사진과 대한민국 달력과 대한민국 입담배 하나로라는 담배를 주면서 나를 안심시켰다. 하면서 사진을 찍고 12월 3일 저녁 6시 30분 대사관 차에 태워서 대한민국 대사관으로 간다는 것이 들어가 보니 김일성과 김정일 부자 사진이 벽에 붙어 있는 것을 보고 북한대사관이라는 것을 눈치 채게 되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순안비행장에 압송되었다. 그때 나는 온 몸에 기브스를 하고 마취약과 모르핀 주사를 맞고 평양시 연못동 국가안전보위부 예심국(제3국)에서 1호 감방 1번 수감자가 되었다. 이때 나를 담당한 예심원은 김순철, 방은 2층 216호에서 조사를 받았다. 사람도 아닌 네가 어떻게 그렇게 비방과 권위훼손, 심지어 적들이 노리는 호위사업비밀까지 누설하느냐. 너는 우리 민족의 원쑤이며 처단 받아야 할 놈이다”라고 하면서 총살하라고 호통치는 것이었다. 계호원들이 들어와서 나의 머리에 물을 부어놓고 몸을 얼구었다. 구멍으로 내보내게 하고 참나무 몽둥이로 발등과 다리뼈를 두드리고 고통을 주었으며 어느 하루도 빼어놓지 않았다. 두드리였다. 나에게 물어보는 것이 누구의 임무를 받고 그런 짓을 했느냐 하는 것이었다. 나의 말은 록음이 되었다. 씻겨준다고 하면서 몇 시간씩 구박과 구타를 하면서 고통을 주었다. 밥은 하루 3끼 옥수수쌀 33그람을 김장배추국과 함께 주었는데 수저 없이 먹게 하였다. 그리하여 구류장에 들어갈 때 94킬로이던 내 체중은 나올 때는 54킬로에 불과했다. 배를 발로 누르고 물을 다시 토하게 하였다. 때로는 콧구멍에 주전자로 물을 부었다. 때로는 금식처벌이라하여 하루 2끼 66그람 밖에 주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러던 4월 어느날 예심관 김순철이가 나를 불러 나오게 하였다. 한다고 하면서 평양에서 무산까지 내려와서 나의 안해를 희롱질하고 롱락질한 다음 올라와서 집에 록음기가 없다고 하는 부모와 안해가 손도장을 찍은 문건을 가져와서 나에게 보이면서 내가 쓴 문건 중에서 록음기로 KBS 방송을 들었다고 쓴 대목을 지워버리는 것이었다. 록음기는 김순철이 가로챘다. 김정일의 승용차 운전수로 있는 관계로 동생을 살리기 위하여 나를 국가보위부 요덕관리소(15호) 대속리라는 곳으로 보내는 것이었다. 갔다. 관리소 입구에서 내가 살 대속리까지 가는 데 2시간 반 정도가 걸린다.신입자들은 15일 동안 훈련을 받고,그 이후에 반,소대에 배치됐다. 가족반, 공무반으로 되어 있다. 매 반별로 사방에 4미터 높이의 전기 철조망이 둘러쳐져 있다. 집은 나무 판자집이다. 아침 5시까지 식사를 하고 작업장으로 진출한다. 한 개 반이 170명 정도이고 한 개 소대가 56명 정도인데, 3개 소대로 되어있다. 신입자는 한 달에 5~10명 정도인데 꾸준히 들어왔다. 나무를 도끼로 패서 놓은 것이다. 나무는 사회에 내다가 판다. 때로는 보위지도원들의 집에 가져간다. 하루 120지게의 나무를 산에서 밭까지 1000m 거리를 걸어서 옮겨 놔야 숙소로 올 수 있다. 채 물푸리(재목이 단단하고 질긴 나무 이름) 나무로 10대가 끊어질 때까지 땅에 엎드려 맞는다. 그것은 하루, 과제와 그 해 농사에 따라 다르다. 국은 소금국 밖에 없으며 배추시래기와 무시래기가 떠있다. 휴일은 1월 1일, 2월 16일, 4월 15일 밖에 없다. 구역 안에는 구호 간판들이 많다. 등등 어마어마한 글들로 되어 있다. 수인들은 보위원이나 경비대 군인, 사회 사람이 오면 머리를 땅에 대고 무릎을 꿇고 앉아야 한다. 아니면 발로 또는 돌맹이로 마구 때리며, 때로는 사람의 뇌수가 땅에 흘러나와 죽는 일도 빈번히 벌어진다. 또는 쑥을 말리운 것)를 가지고 다니면 도주기도분자로 몰려서 총살 또는 교수형, 생매장 당한다. 대한민국으로 가려다 회령땅에서 잡혀 왔다. 매여 4km을 수인들을 길 량쪽에 세우고 초소 앞에서 끌고 다녔다. 교수대에 묶어 놓고 매 사람이 피를 만지게 하고 도주기도분자는 이렇게 죽인다고 엄포를 놓았다. 루명을 쓰고 들어온 사람이다. 그 늙은이가 “사람이 어떻게 그것도 소금 한줌 때문에 이렇게 비참하게 차에 끌고 다니면서 죽일 수 있느냐. 피를 만지게 하느냐”고 뛰어나가서 호소하였다. 그때 그는 그런 잔인한 광경을 보고 정신이 이상해져서 소리친 것이다. 갓모자를 씌웠다. 그를 세워놓고 반혁명 분자들은 이렇게 죽인다고 망치로 머리 정수리를 쳐서 의식을 잃게 한 다음 처넣고 흙으로 매장해버렸다. 일하다가 배를 타고 대한민국으로 도주하다가 잡혀온 사람인데, 인체실험의 결과로 죽었다. 간첩으로 포섭돼 암호와 은행비자를 받고 간첩질을 한 사람 등 많은 사람들이 건장한 몸이라 하여 인체 실험실로 실려 갔다. 쓰기 시작하여 현재까지 운영되고 있다고 한다. 이 비밀은 일본인 처 미쯔비시 후미꼬가 그곳에서 살아 돌아와서 국부적으로 폭로되었다. 다시 올라왔다. 그 후 경비대원들이 쏘련제 지프차 련결고리에 손을 쇠줄로 맨 다음 그대로 차를 몰고 가 하체 바지가 다 없어진 상태에서 아래구역으로 끌고 내려갔는데, 그녀는 내려가는 도중 죽었다고 한다. 살았는데, 김정일을 비방했다가 잡혀 왔다. 소리를 했다고 해서 관리소로 끌려왔다고 한다. 그녀의 아버지는 길림성 육문중학교 교장이라고 한다. 벗어”라고 하고 집의 문을 닫고 그녀를 롱락질하고 성욕을 채운 후에 나무 꼬챙이로 녀자의 자궁을 찔러 놓고 나무로 하반신을 두드리며 한 주일 만에 죽게 했다. 지낸 김정남은 1997년 관리소에 들어 왔는데, 김정일의 정책이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폐쇄정책이라고 바난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오른팔이었다고 하는데, 보위원이 말하는데 잘 움직이지 않았고, 머리를 땅에 대지 않고 무릎을 꿇지 않았다고 하여 팬티 바람에 땅을 100m 정도 기게 했다. 그런데 제대로 하지 않는다 하여 돌로 허리를 쳐서 앓아눕게 만들었다.
배려가 얼마나 큰가를 각자가 생각하라고 강요한다. 입고, 숙소는 옥수수 보관용 창고로 쓰던 것이어서 돼지우리보다도 못한 게딱지같은 집이었다. 비 오는 날에는 물이 새고, 추운 날에는 눈보라가 그대로 밀려들어 왔다. 다래나무순, 도라지, 뱀, 개구리, 쥐 등 먹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나 닥치는 대로 먹는다. 뱀가죽까지 그대로 먹고, 쥐털과 밸까지 다 먹어치우는 끔찍한 그 모습을 더 이상 묘사할 수 없다. 수인들은 소가 싼 똥에서 옥수수 알을 주어먹고는 힘이 난다고 좋아한다. 이들은 영양실조로 서서히 죽어간다. 기형화된다. 얼마 후에는 얼굴과 온몸이 부어서 물이 줄줄 흘러나온다. 죽기 전 사람들은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하늘중천아 나를 살려달라”고 소리친다. 물을 뚝뚝 떨구 면서 산에 시체를 메고 올라가다가 발을 잘못 디디면 시체와 함께 산 밑에까지 굴러 내려온다. 어떤 사람은 일어서지 못하고 같이 죽기도 한다. 구차하게 사는 모습을 기억해주기 바란다. |
출처: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하여 원문보기 글쓴이: 채명락[명량]
첫댓글 새삼 그들의 만행에 치가 떨려 할말이없군요.지금도 그들[북한]을 칭송하는 종북세력을 시급히 몰아냅시다
생지옥이 따로 없습니다.